제27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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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육군의 상비사단 (기계화보병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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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7보병사단 사령부의 정문(출처)

中部戰線(중 부 전 선)의 守護者(수 호 자), 祖國統一(조 국 통 일)의 先奉將(선 봉 장)

대한민국 육군 제27보병사단제7보병사단, 제15보병사단과 함께 제2군단 예하부대이다. 강원도 화천군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부전선을 책임지는 예비사단이다.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부대"라는 뜻으로, 이기자부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부대마크는 27사단의 숫자 27에서 2색(빨간색, 흰색)과 7각을 조합한 방패모양이다. 가운데에는 '이기자'라는 부대명칭이 쓰여있다. 이 덕분에 이기자부대는 그 부대마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처음 봐도 바로 알 수 있다.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인 1953년 수도기계화보병사단 병력들이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리 인근에 산재해 명령을 기다리던 중, 동년 9월 18일 사단 창설일에 맞춰 중대장 안도현 대위와 일행 장교들이 이끄는 2개 중대가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명월리까지 도보로 이동해 별도의 부대 창설을 한 게 해당 사단의 시초다.

전군 최초로 순우리말 이름[1]으로 지어진 부대이자 전군 유일의 행동실천형 명칭을 가진 부대이다. 창설연도를 보면 알겠지만 흔히들 이 부대에 대해 '한국전쟁때 한번도 못 이겨서' 또는 '북괴에게 군기를 빼앗겨서' 이름을 이기자라고 지은 것이 아니냐고 하는데 당연히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다.

사단명에 대한 또 하나의 낭설은 초대 사단장의 부인 이름이 '이기자' 여사님이 아니냐는 것이다. 당시 위의 이름이 매우 흔한 이름이기는 하지만 초대 사단장의 부인 이름과는 전혀 관계 없다. 하지만 '사단장 부인 이름설'(?)을 크게 의식한 탓인지, 27사단 부대사에서는 초대 사단장 이름을 표기할 때 반드시 사단장 이름 옆에 괄호를 치고 부인 이름도 함께 싣는다. 다른 사단들을 찾아본 바에 따르면 거의 유일하게 이기자 부대만이 사단장과 안사람의 이름과 함께 표기한다고.

악명 높은 훈련강도로 유명하다. 원래 예비사단의 특성상 훈련강도가 높을 수밖에 없지만, 27사단은 하필이면 예비사단 중 뭐 같은 지형으로 악명 높은 화천군에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이런 특징은 같은 화천군이 작전 구역인 제7보병사단, 제15보병사단 항목에서도 잘 묘사된다. 오죽하면 102보충대에서 이 부대와 2사단으로 배치받은 장정들에게는 '전투화를 바꿀 기회'를 한 번 더 줬겠는가. 자주 짤방으로 돌아다니는 훈련은 무자비하게 문구가 새겨진 비석은, 바로 여기 27사단 유격장에 존재한다.

2 참전 경력

베트남 전쟁 당시 79연대 3대대가 군사 원조단인 비둘기 부대 예하 제101경비대대로 참전하였다. 파병 당시 최초로 수도사단파병되고 남베트남미군측에서 추가파병을 요구하자 처음에는 백마부대 대신 27사단을 논의했다고 한다. 이 부분은 당시 주월사령관인 채명신의 회고록 형식의 신문 투고에 나온다.

3 사단가

1절 - 민주 자유 대진군에 발맞춰 가는 조국의 부름 받은 우리 전우들, 북녘땅을 향하여 총칼 겨누고 최선봉에 나서리라 북진의 사단
2절 - 추상 추풍 엄한 군기 굳은 단결로 필승의 훈련 받은 우리 전우들, 조국 산천 찾아서 천여리 넘어 진출선을 헤치리라 북진의 사단
후렴 - 이색 칠각 빛나는 우리의 사단 장부의 일편단심 함께 뭉쳐서 하늘 높이 올려보자 27사단

4 훈련소

제1신교대, 제2신교대가 있었으나 제2신교대는 13-8기로 없어지고 현재는 1신교대만 운용하고 있다. 시설은 열악하나 연대에서 신막사 공사중이니 훈련소도 신막사로 바뀔 예정이다.

제2신교대는 2008년 12월에 창설되었으며, 2013년 초에 통합하였다. 보병부대의 경우 1신교대에서 교육을 전부 받았지만 포병포병연대에서 교육을 전담하므로 운이 좋다면 자대의 선임을 일찍 볼 수 있다. 운이 없는게 아니라? 1신교대의 경우 연대 내 대대 하나를 교육대로 활용하여 중대 4개를 신병교육대로 활용하고 있다. 교육 과정만큼은 확실하여 분대 전술, 병기본, 독도법 등 분대장이 필요한 항목들을 체계적으로 빡세게 교육한다.

2013년 7월, 현재 제2 신교대는 사라지고 제1 신교대에서 7주 훈련을 하는것으로 바뀌었다. 2014년 1월부터, 제1신교대에서 5주 훈련을 마치고 자대에서 심화교육을 한다. 현재 그리고 분대장 교육대는 78연대로 바뀌었다. (원래는 77연대에 있었다.) 이곳 막사가 완공된지 얼마 안된 신막사라 이전 분대장 교육대보다 훨씬 좋다고 한다. 분대장 교육대를 수료한 모든 인원들에게 3박 4일 휴가를 주는데, 이게 교육대의 모든 훈련을 마치고 하는 수료식 당일날, 수료식이 마치자마자 부대측에서 준비해준 버스를 타고 바로 나가게 해주는 휴가라 위병소도 프리패스로 통과한다고.. 기분이 상당히 짜릿하다고 한다.

5 예하 부대

  • 육군 연대급 이하 부대는 고유명칭(예: 육군 제1보병연대)을 사용할 수 없고, 반드시 통상명칭(예: 육군 제3260부대)이나 애칭(예: 한라산 부대)을 사용해야 합니다. 또 주둔지 위치를 특정할 수 있는 내용 또한 작성할 수 없습니다. 내용 작성에 주의해 주세요.
  • 연대
    • 용호 연대 (육군 2316 부대)
    • 상승독수리 연대 (육군 2337 부대)
    • 쌍독수리 연대 (육군 2799 부대)
    • 포병 연대
  • 사단 직할대
    • 본부대 (육군 1288 부대)
    • 공병대대 (1288 부대 101 대대)
    • 정비대대 (1288 부대 201 대대)
    • 보급수송대대 (1288 부대 301 대대)
    • 화생방지원대 (1288 부대 401 대대)
    • 수색대대 (1288 부대 501 대대)
    • 의무근무대 (1288 부대 601 대대)
    • 정보통신대대 (1288 부대 701 대대)
    • 헌병대 (1288 부대 801 대대)
    • 전차중대
    • 방공중대
    • 보충중대

6 일화

해당 사단의 초기 멤버이자 1968년 4월 예비군 창설과 함께 초대 예비군 중대장이었던 (故 안도현옹)의 일화가 존재한다. 이 중대장은 당시 수시로 무장공비가 출몰하고 반공 이념이 누구나 투철했던 시기답게 현역과 견줄만할 매우 엄격한 훈련체계로 예비군 대원들을 통솔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중대장을 했었을 당시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용담리에서 농민의 조모가 이른 새벽 가마솥 속 옥수수와 감자를 훔쳐 달아나는 공비를 발견하고 그의 아들이 이장님 댁[2]에 신고하여 군경 합동 수색팀이 조직, 공비의 이동 동선을 따라 험준한 화악산을 중심으로 포위망을 펼치고자 그와 예비군들도 여기에 동원되어 M1과 실탄을 지급받고 그의 지시에 따라 수색 작전에 참여하게 된다.

이 와중에 그는 십 오년 전 경험을 토대로 피로와 허기에 발각을 감수하고 민가를 약탈할 정도라면 절대 화악산 방향으로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정짓고, 만약 이 상황에서 이동 경로를 예상한다면 화악산 보다는 광덕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개울을 끼고 수도권 방향으로 도주하고 있을것이라며 상급 부대장을 설득했으나 간첩작전 대응 메뉴얼 이외의 루트로는 수색할 수 없다 하여 그는 대원 절반을 경찰 지원으로 투입하는 한편, 나머지 절반과 함께 경기,포천 방향의 광덕 계곡으로 향하게 된다.

신고 후 3시간이 경과해 먼 동이 터서 전방 식별이 가능할 즈음, 개울을 수색하던 예비군에게 이상한 발자국이 있다는 보고를 받은 그는 물 속 이끼에 찍힌 발자국을 발견하고 이후 모든 대원들에게 노리쇠 장전을 명한 후 정밀 수색과 함께 전방 주시 주의를 명령했다. 그렇게 약 5분을 진행할 즈음 기관총 발사음이 콩볶는 소리처럼 들렸고, 그는 서둘러 군경에게 공비의 현 위치를 무전으로 송신하는 한편 예비군 대원들과 함께 발음지를 향해 나아갔고 이윽고 바위 뒤에 숨은 무장공비와 예비군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지다 잠시 소강 상태에 있을 무렵 그 중대장은 무장공비들에게 투항을 권고하게 된다.

"야 내래 리북서 내려와 남한서 살고 있는 예비군 중대장이다, 투항만 하면 내가 너희 목숨만큼은 내가 보장한다. 투항하라"

그럼에도 교전이 지속되는 사이 그의 무전대로 춘천과 화악산 방향에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병력들과 군용 트럭 소리를 들은 두 명의 무장공비들은 수류탄 두발로 그 자리에서 자폭을 하게 된다. 다만 이후 전공을 두고 현역 대신 예비군이 이들을 잡았다는게 석연치 않다 하여 그와 예비군들은 마을 주민들이 공비 잡느라 수고했다며 끓여 놓은 육개장과 막걸리로 목을 축이는 걸로 없었던 일로 하게 되고, 공비들을 압박한 게 전부(...)인 군경들은 각각 일계급 특진을 했다.

7 사건사고

제5공화국시절 삼청교육대를 운영하였다. 이때 교육기간이 끝나 수료증을 받고 집에 가야할 교육생들을 풀어주지 않고 장기수용하면서 구타와 가혹행위가 반복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교육생들이 봉기하였으나 무력을 통한 강제진압과정에서 교육생 3명, 해당부대의 하사관 1명 사망과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1990년대 군단 FTX중 도하훈련을 하다가 피곤에 지친 병사 한명이 부교를 졸면서 건너던 중 소총을 물에 빠트렸고 결국 못찾았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군사고사례집에 단골로 나오는 유명한 사건이다.좆됨

약 1997년경 모 연대 2대대에서 도하훈련을 한적이 있었다. 그때 훈련상태가 마음에 안든다고 중대장이 얼차려의 일종으로 전원 입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다시 나오는데 소대장 한명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당황한 중대장이 중대원들에게 전부 물에 들어가 찾으라고 했다. 이에 침전물이 일어나 물속이 더욱 탁해져서 소대장을 찾을 수 없었고 결국 나중에 소대장은 익사한채로 발견되었다. 이후 해당 대대는 3년에 한번하는 도하훈련을 5년간 못했다. 뱀발로 며칠 후 해당중대 뒷편 탄약고 근무를 서던 병사들이 야간 근무중 물에 젖은 소대장을 봤다고 해서 부대가 발칵 뒤집어 졌다. 심지어 초병들이 "정지! 누구냐?"라고 외치자 "나 5중대 2소대장이야"라고 대답까지 했다고 한다. "용무는?", "옷갈아 입으러 왔다!" 소름 작렬...

1990년대 말 2대대 6중대에서 A병사가 막사안에서 목매달아 자살했다. 그런데 2001년에 신교대에서 손에 총을 쏘고 자해 했던 병사가 영창 갔다와서 6중대로 들어왔는데 A병사와 똑같이 생겼다. 같은 해 11월에 또다른 병사가 입대해서 6중대로 왔는데 세쌍둥이인지 또 똑같이 생겼다. 부사관들은 이 세병사를 모두 본적이 있기 때문에 잇다른 사고에 겁에 질려 이 병사를 받는 것을 반대 했지만 당시 중대장이 "내가 그 징크스를 깨주마. 음화화~" 하여 그냥 받았다. 그리고... 성실히 근무하다가 04년 1월 제대하였다.

2005년 초 77연대본부에서 이등병이 보일러실에서 자살 하여 천천히 바뀌어 가려던 악습이 급격히 바뀌어갔다. (타중대 및 타대대는 악습이 여전했다. 본인의 중대는 말하지 않겠다.)
이때부터 이등별이란 말이 유행하기 시작함.

2011년 겨울 경 병사 한 명이 활동복만 입고 탈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초기에는 수색대로만 이루어진 추격조가 편성되었으나, 날이 밝아오면서 시간이 지체되었기에 각 부대에서 병력들을 차출해 주변을 탐색했고, 결국 탈영병은 근처 농가에서 잡혔다. 그리고 꿀같은 주말을 이걸로 허비한 추격조들에게 욕을 먹었다고 한다.

2012년 중순 어떤 훈련 당시 부대원이 탈영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장구류나 무기는 모두 놔두고 갔기에 무장탈영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더 웃긴 사건이 추가적으로 발생했는데, 탈영한 병사가 소속된 부대의 대항군인 부대에서도 똑같이 탈영병이 발생한 것이다. 아마도 우연의 일치겠지만 이 탈영병을 잡기 위해 훈련으로 대치중인 두 부대는 즉각 훈련을 중단하고 탈영병 수색에 전념했고, 위 아 더 월드 결국 탈영병 체포에 성공했다

2012년 말 포병연대 어느 예하부대에서 병사 한 명이 포상에 목을 메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2013년 중순 모 대대의 유격훈련 마지막 날에 인접대대의 부대원이 탈영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당초 예정된 복귀 행군을 취소하고 이들을 탈영병 추적에 동원하기 위해 급히 예정된 루트를 수정 급속코스로 복귀행군말이 행군이지 구보 하였다, 다행히도 해당 탈영병은 새벽에 신병이 확보되어 유격으로 골골대는 상황에서 탈영병을 쫓는 대참사는 피할 수 있었다.

이 부대의 가장 큰 흑역사로는 2010년 북한 간첩 흑금성에게 작계5027을 유출시킨 33대 27사단장 육군소장 김인동 장군이 있다. 그 때는 사단장 직을 마치고 상급부대가서 참모직을 하고 있었고 군단장 진급이 유력했다고 한다. 현재 김인동은 이등병으로 불명예 전역 후 교도소에 있다.

8 그 외

2009년 11월 제34대 사단장 전인범 소장이 취임한 이후 부대가 훨씬 더 야전적으로 많이 바뀌었다. 그 중 제일 유명한건 현 육군에서 보기드문 해병대식 짧은 헤어스타일, 육군인데 이 머리를 하고 돌아다니는 군인이 있다면 100이면 100 27사단 장병이다. 2011년 11월 35대 사단장, 이진원 소장[3]이 새로 취임한 후 규제가 조금 풀렸다. 하지만 여전히 육군 전체를 통틀어 가장 짧은 수준. 한때 전인범 소장이 사단장 임기 후 바로 진급해 2군단장에 취임할 것이라는 루머가 돌아 수많은 2군단 병사들을 공포에 떨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아무리 장관급 장교라 하더라도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한 계급에서 적어도 2개 보직 이상은 거쳐야 다음 계급으로 진급 심사 대상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이분의 부대 운영 철학이 특별했다는 반증이라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안경 착용자들에게도 전부 안경에 끈을 달아놓도록 한다. 솔직히 조금 멋없어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는 훈련도중 안경이 떨어지지 말라는 좋은 취지에서 시행되는 것이다.또한 부대역사관을 정비하여 정신전력을 강화하고 지역주민들과의 화합을 도모하여 지금까지도 사창리 주민들로 부터 기억되고 있다. 이기자 수색대대의 무박훈련도 전인범 장군이 만든 것이다.

2002년 초 78연대 2대대 6중대가 군정보화 시범사업 부대로 지정되었다. 그래서 자체 인트라넷으로 대대 홈페이지, 중대 홈페이지, 심지어 소대 홈페이지까지 만들어졌던 적이 있다.

후술할 수색대의 일원이었으나 px병이었다는 썰이 있는.. 가수 김태우가 현역으로 근무할 당시 부대 연례행사인 "이기자 페스티벌"에 온 초대가수의 질이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2007년에는 이 안 될때라 그랬는지 인맥을 총동원해서 임정희, 양파, 메이비, 손담비, , 수호, 원더걸스, 크라운J, 길건 등 위문 공연 역사상 최대의 라인업을 끌어모았다. 특히 Tell Me로 안팎에서 엄청난 인기를 모은 원더걸스와 혼신의 비방용 댄스를 보여준 길건의 무대는 이후 장병들 사이에 수없이 회자되었다. 2008년때는 짬이 차서 그런지 2007년보다는 질이 떨어졌지만 문지은, 임정희, 서인영, 원투 등이 출연하는 등 괜찮은 수준이었다. 2009년 2월 그가 전역한 후 수개월 뒤에 열린 09년 페스티벌때는 그를 포함해 아이유, 브라운 아이드 걸스, 마이티 마우스, 아웃사이더 캔, 황보, 김미연등이 참여했고, 한창 사랑비로 활동하던 김태우 역시 무대에 서서 전우들을 만났다.연대를 부르며 환호유도를 하는데 포병연대를 안 불러줘서 빡쳤다 카더라

2011년 이기자 페스티벌도 게스트진이 화려했다. 브레이브걸스, 에이핑크, 이파니, 디아등 젊은 신인 걸그룹이나 육체파(...)여가수 위주의 패널라인에 사창리는 불타올랐다. 박효신은 왜빼먹어!

사단사령부와 이외수 작가가 살고 있는 다목리 감성마을이 상당히 거리가 가까운 인연 때문에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2009년에 잠깐 사단 장병들의 상담역을 맡았던 적이 있다(얼마 지나지 않아 병영생활 전문가 제도가 도입되어 민간인에게 문제병사를 상담시키지 않는다). 이외수의 집에서 버튼 하나만 누르면 주변 군부대에서 5분대기조가 달려온다고 한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사실 농담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통합방위법 시행령 제23조에 의하여 국가 중요시설·기반시설이 아니므로 개인에 대한 군인력 지원을 할 수 없다. 다만 감성마을이 사단 작전지역에 포함되기 때문에 상황이 발생했을 시 5분대기조 등의 정상적인 작전 활동은 당연히 가능하다. 2013년 1월, 산천어 축제 전야에 이 문제와 더불어 상당한 논란과 문제제기가 있었다. 이외수 논평 및 논란 항목 참조.

인기 있는 군생활 이야기 블로그 중 하나인 <가츠의 군대이야기>도 이 27사단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주인장 '악랄 가츠'는 상승독수리부대 출신. 폭소를 터뜨리게 하는 개그 사이사이에 이 부대의 처절함(특히 훈련강도)이 매우 리얼하게 묘사되어 있다. 참고로 위에 언급된 전인범 前 사단장도 사단장 재임 시절 이 블로그에 팬레터(?)를 보냈다.

주둔지인 사창리의 물가가 애미리스하게 비싸서 외박나간 장병들이 고통받고있다. 물론 이것은 거의 모든 군부대 주변 지역이 비슷하다. 주말에 외박나오는 군인들의 지갑이 가장 큰 돈줄이기 때문. 숙박업소는 주말/평일 요금표가 따로 있을 정도다. 국민의 세금으로 위수지역 악덕상인들만 배불리는 셈. 위수지역을 확대하든지 물가를 통제하든지 대책이 필요하지만 그런거 없다.

특이사항으로 포병연대의 경우 예하 4개 대대가 모두 화력지원을 위해 전방에 배치 되어있다.
아예 7사단, 15사단의 주둔지역 내에 배치되어 있어 사단 본부까지 가려면 육공 기준 1시간이 넘는 고행의 길을 가야한다.
다만 그만큼 사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은 오히려 재앙에 가까운 수준이다. 포병여단부터 사단본부, 심지어 타사단에서까지 와서 간섭해대는 경우도 있다. 위병소 근무를 서보면 실제로 사단 관련 차량보다 주변에 깔려있는 2군단 예하 부대들인 7사단, 15사단이나 2포병여단 관련 차량을 훨씬 더 자주 볼 수 있는데, 그때문에 포병대대 위병근무자들은 사단 예하 연대의 차량번호보다 7사단과 2포병여단의 차량번호를 더 먼저 익히는 불상사가...

2012년 8월에 78연대에 또래오래가 생겼다.# 운영 시간은 평일은 일과 이후와 주말이고, 맥주(!)도 파는데 개인당 500ml 1잔으로 통제하고 있다. 병사 봉급으로 자주 가기에는 부담스러운 가격이라 자주 이용하기는 어려우나, 통상 군대 안에서 먹기 힘든 피자, 치킨, 맥주를 영내에서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타 부대에 비하면 엄청난 행운이다.

이기자 복지 회관과 주차장이 들어선 곳은 사보이 호텔 사주이자 대한교육 보험 회장을 지낸 경성 갑부 조준호의 마름 집이 있던 곳으로, 일개 마름에 지나지 않지만 산속에 상당한 규모의 집이였다고 한다. 그 집은 한국전쟁 직전에는 북한의 빨치산(조선인민유격대)의 소규모 유격대들이 쓰던 거점으로 쓰였다.

이기자 부대의 성지인 화악산은 남한내에 제일 추운 산중 하나로 겨울에 기온 하락이 심할 때 심심치 않게 신문에 이름이 오르내린다.
2005년 5월초에 화악산에 눈비가 내렸다. 그때 차량기동하던 장병들은 혹한기보다 더떨었다고 한다.
광복 전 세상을 놀라게 했던 사교 백백교 교주 전용해가 은신했던 곳이다.

8.1 사단장

출처

  • 1대 이형석 준장(1953. 10. 9 - 1954. 8. 24)
  • 2대 김봉철 소장(1954. 8. 25 - 1954. 10. 9)
  • 제3대 김계원 준장(1954. 10. 10 - 1956. 4. 12)
  • 4대 정래혁 준장
  • 5대 이치업 준장
  • 6대 박경원 준장
  • 7대 김동수 준장
  • 8대 전부일 소장
  • 9대 안광영 준장
  • 10대 이준학 소장
  • 11대 임지순 소장
  • 12대 나희필 소장
  • 13대 윤흥정 소장
  • 14대 최영식 소장
  • 15대 김선일 준장
  • 16대 권영각 소장
  • 17대 정진권 소장
  • 18대 정순현 소장: 이기자 유치원 앨범으로 인터넷에서 유명해졌다. 관련글. 퇴역 후 금오공고 4~5대 교장을 역임한 경력이 있다.(1985년~1992년) 금오공고 링크
  • 19대 김찬기 소장
  • 20대 편동수 소장
  • 21대 윤인하 소장
  • 22대 편장원 소장
  • 23대 양상태 소장
  • 24대 오형근 소장
  • 25대 김현수 소장
  • 26대 이풍길 소장
  • 27대 김승광 소장
  • 28대 김기성 소장
  • 29대 김군식 소장
  • 30대 이명구 소장
  • 31대 하정열 소장
  • 32대 이승우 소장
  • 33대 김인동 소장[4]
  • 34대 전인범 소장
  • 35대 이진원 소장
  • 36대 김종태 소장
  • 37대 김정수 소장

8.2

프로게이머. 수색대대에서 복무했다.
한국의 포크그룹 동물원의 리더. 1990년에서 1991년 사이에 복무했다.
아이돌 그룹 god의 멤버.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수색대대에서 복무했다.
밴드 럼블 피쉬의 베이스. 2010년부터 2012년까지 사단 군악대에서 복무했다.
탤런트 및 영화배우. 2013년 3월 5일 입대해 이틀 후인 7일 사단 신병교육대에 배치되었다. 이후 김태우와 마찬가지로 수색대대로 지원하였으나 수색대 무박 4일훈련중 중도 포기로 인해 사단 예하 연대로 배치되었으나 모종의 과정을 통해서 신교대 조교로 차출, 그 후로는 계속 조교로 복무하다가 전역했다.
탤런트 및 영화배우. 2013년 1월 10일 방영된 무릎팍도사에 게스트로 나와서 밝히길, 상병 말까지 복무하다가 병장 진급 직전 1군 예술단으로 전출되었다고.
탤런트 및 영화배우. 2010년 사단 신병교육대에서 교육을 받고 국방부 홍보지원대로 전출되었다.
프로 바둑기사. 2009년 12월 입대하여 수색대대에서 복무중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 나가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로 인해 2010년 12월 13일 부로 이기자부대 수색대대에서 나온 그는 2011년 10월 6일까지 한국기원에서 예술ㆍ체육요원으로 근무하고 전역했다.
탤런트 및 영화배우. 1984년에 입대해 쌍독수리 연대에서 60mm 박격포 주특기로 복무하였으며, 군 입대전의 강변가요제 입상 경력[5] 덕분에 문선대 단원으로 선발되어 분기별에 한번씩 부대 위문공연에 참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허리부상으로 인해 중간에 의병 전역을 하게 되었다.
영화 조선마술사의 제작보고회에서 이같은 사실을 밝혔다. #
  1. 이는 확인이 필요하다. 어째서 열쇠, 오뚝이, 불무리가 있는데 "최초의 순우리말 이름"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전군 최초의 순우리말 경례구호를 사용하는 부대정도로 이해하는게 좋다.
  2. 전화기가 흔치 않던 당시엔 긴급 신고처였다.
  3. 육사 39기로 대령시절에 이미 화천에 근무한적이 있는데 7사단 포병연대장을 지냈다. 그 직전에는 청와대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탈모때문에 고생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해병대식이 불가능했을지도
  4. 군단장 진출이 유력했으나 흑금성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5. 1984년 중창단 '덧마루'를 결성하여 '길을 잃은 친구에게'라는 곡으로 장려상을 수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