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레일리안 풋볼 리그 | |||
AFL | |||
정식 명칭 | 오스트레일리안 풋볼 리그 | ||
영문 명칭 | Australia Football League | ||
창설 연도 | 1897년 (VFL)[1] 1990년 (AFL) | ||
참가 팀 수 | 18 | ||
최근 우승팀 | 웨스턴 불독스 (2016) | ||
최다 우승팀 | 칼튼 FC, 에센던 FC (16회) | ||
웹사이트 | [1] |
목차
1 개요
오스트레일리안 풋볼 리그는 호식축구의 상위 리그. 리그 스폰서는 토요타.
AFL이란 단어는 사실상 호식축구 자체를 의미하며, 호식축구의 협회이자 리그 경기뿐만 아니라, 호식축구 전체도 책임지며, 많은 영향을 끼치는 호식축구을 움직이는 중앙 역할이다.
우선 리그는 빅토리아주[2] 중심으로 퍼스, 브리즈번, 골드 코스트, 시드니, 애들레이드 등에 걸쳐 18개 팀이 우승팀이 되기 위해 경쟁한다.
2 상세
2.1 일정
시즌은 매년 3월 말~4월 초부터 8월 말~9월 초까지 각 팀마다 23 라운드 22경기로 진행되고 상위 8팀은 파이널 시리즈[3]에 진출한다. 경기는 승리시에 승점 4점, 무승부 2점, 패배시 0점을 획득하며 동일일 경우에는 득점/실점 X 100로 결정한다.
시즌 중반 3주를 거치는 BYE가 있어서[4] 각 팀은 한 라운드 씩 쉬게 된다. 특이한 점은 일반적인 독립리그처럼각 팀이 2번 씩 맞붙는것이 아니라[5] 연말의 드로우를 통해 결정된다. 상위팀과의 경기가 많이 잡힐수록 승점에서 손해를 보기 때문에 작년시즌 파이널 진출팀이 다음해에 물을 먹기도 한다.
또한 마지막 라운드는 일정이 미확정, 왜나하면 파이널 전이기 때문에 파이널 진출하는 팀의 위주로 1달전에 확정된다.
각 라운드마다 소재가 있으며, 4월 25일 중심으로 한 라운드는 갈리폴리 작전과 호주군을 위한 ANZAC 데이를 위해 경기 전에 병사들을 추모하며, 5월 마지막주는 호주 원주민 어보리진을 위한 원주민 라운드며, 각 팀바다 원주민 문화가 들어간 유니폼을 입는다.
2.2 파이널 시리즈
현 AFL의 파이널 시리즈 제도
쉽게 말해서 플레이오프/포스트시즌을 가리키는 말. 현 파이널 시스템은 2000년에 도입했다. 9월에 시작해 가을야구랑 비슷한 말인 September라고 불른다.
우선 첫주는 상 4강은 퀄리파잉 파이널에 참가하며, 하 4강은 일리미네이션 파이널에서 맞붙는다. 퀄리파잉 파이널에서 진 팀은 챈스가 주어지나, 일리미네이션 파이널은 말 그대로 탈락(Elimination)이기 때문에 그런거 없다.
두번째 주는 1등 v 4등에서 진팀이 5등 v 8등에서 이긴 팀(1경기), 2등 v 3등에서 진팀이 6등 v 7등에서 이긴팀(2경기)이 세미세미 파이널에서 맞붙는다.
세번째주는 1등 v 4등에서 이긴 팀이랑 경기2에서 이긴팀, 2등 v 3등에서 이긴팀이랑 경기1에서 이긴팀이 프릴리미너리 파이널에서 맞붙는다. 여기서 이긴 팀은 결승의 진출. 프릴리미너리(Preliminary)라는 단어도 이전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그리고 다음이 AFL 그랜드 파이널. AFL 커리어의 마지막 목표지. 어느팀이 참가하던 그 주 한정으로 모든게 AFL 그랜드 파이널 위주. 우선 전날에 그랜드 파이널 퍼레이드가 있으며 페드레이션 광장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보는 체험 등이 있다. 그랜드 파이널은 원래대로 하면 9월 말이나 만약의 경우 10월 초에 열린다.
3 역사
3.1 빅토리안 풋볼 리그(VFL) 시절 - 1897년~1924년
VFL의 로고.
톰 윌스 식의 풋볼은 전국으로 퍼져 특히 고향인 빅토리아 주에서 인기가 올랐고, 풋볼[6]을 위한 클럽들이 참가하는 VFA[7]가 설립되었다. 하지만 강호 클럽들의 실력차가 컸고[8] 그래서 강호 여섯 클럽(멜버른, 사우스 멜버른, 에센던, 질롱, 콜링우드, 핏즈로이[9])과 같이 추청받은 칼튼와 세인트 킬다는 빅토리안 풋볼 리그를 창설한다.
차이점이 있었다면 VFL은 현재 파이널 시스템의 원조인 파이널 토너먼트와 현재 점수 시스템을 도입하였다.[10] VFA와 VFL을 VFL의 설립 이후에도 경쟁했으나, 실력차가 새롭게 설립된 VFL에게 이익이 되었다.
강호들이 있는 VFL이라 그런지 참가하고 싶은 클럽들이 늘어나자 1908년에는 유니버시티와 리치몬드이 참가한다. 그러나 유니버시티는 이름부터가 대학 풋티부인 만큼 공부가 위주였고 선수들이 대다수 아마추어였기 때문에[11] 1차 세계대전 이후로 리그를 탈퇴. [12]
또한 이웃 주 남호주 리그랑 호주 챔피언전도 열었지만...전쟁이 일어나자 중지했다. 그러나 60여년 뒤 다시 부활하긴 했다.
1차 세계대전은 리그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연합군 소속이였던 호주군은 유럽에서 전쟁을 막 시작한 동맹을 지원하기 위해서 유럽으로 군사들을 보내야 했는데...남자의 게임인데 남자들이 전쟁터로 나가니 몆몆 클럽들은 임시중지했고 리그의 1915년 시즌은 투표로 겨우 진행된다. 영향의 예를 들자면 세인트 킬다는 팀 컬러가 적백흑이였는데 독일 제국의 국기색깔과 비슷하게 되니 잠시만 흰색을 노랑색으로 바꾸게 된다. 아이러니하게 적황흑은 현재 독일의 국기색이라는게 함정.
전쟁으로 인해 전국에서 징병으로 인해 스포츠 자체가 몰락하자, 호식축구를 럭비리그와 결합도 시도할려고 했다. 그리고 당연히 흑역사.[13][14]실은, 이 실화에 대하여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
전쟁때문에 리그가 겨우 진행되니 관중수도 줄어들었고, 팀도 적을수 밖에 없었는데, 그중 1916년 시즌은 압권이였는데, 꼴지였던 핏즈로이가 동시에 우승도 해냈다. 왜나하면 '4팀밖에 없었고 상황이 이러하니 넷팀 다 파이널 참가가 가능했기 때문.
전쟁이 끝나가자, 빠졌던 팀들은 돌아왔고, 1919년에는 리저브/2군 리그를 도입했다.
3.2 빅토리안 풋볼 리그(VFL) 시절 - 1925년~1970년대
1924년에는 브라운로 메달을 도입. 질롱 회장이였던 찰스 브라운로의 영예로부터 따온 브라운로 메달이란 지금도 가장 중요한 시상중 하나이며, 경기 중 심판에게서 가장 많은 표를 가진 선수가 시상받는 메달. 첫 수상자는 질롱 선수였던 에드워드 "카지" 그리브스(Edward "Carji Greeves). 그러나 이를 포함하여 VFL은 타 주 리그랑 비교상 뒤져 있었던데 많았는데, SANFL이나 WAFL은 이미 최우수 선수 수상이 이미 있었기 때문. 또 이듬해에 호손, 풋스크레이와 노스 멜버른이 참가하게 되고 팀 수는 12로 늘어졌다.
1927년부터 1930년 사이에 콜링우드는 아직도 깨지지 않은 4연패를 달성하게 된다. 더 미신(The Machine)이란 이명을 이끌어 이를 달성한 감독은 감독 중 레던드라고 하는 족 맥헤일(Jock McHale)인데, 지금 우승 감독에서 시상받는 메달은 그를 존경하기 위해 그의 이름이 붙어있다. 또한 이 팀을 언급할때 호식축구 최고 골키커 중 한명인 1999년까지 그의 기록이였던 1299골을 찬 고든 코벤트리도 있다. 이로 인하여 콜링우드는 리그 내 강호였고, 경제 대공황 당시 구제 선두두자였다.
저번 전투보다 스케일이 더 큰 2차 세계대전은 운영을 그나마 할수 있었지만, 미공군이 여러 구장들을 쓰게 되자 경기 할곳을 잠시만 옮겨야 됐다. 또한 철도 문제 등등으로 인해 멜버른에서 떨어저 있던 질롱은 잠시만 빠지게 되었다.
1950년대에는 젊은 선수들을 위한 U19 리그와 시즌 1위에게 주는 맥크렐렌드 트로피(McClellend)을 도입하고, 경기를 동부 타 주에서 진행해보기도 했다. 초반에는 질롱이 몆번 우승했고, 후반에는 론 바라시(Ron Barassi) 중심으로 한 멜버른은 이 당시 5번 우승을 경험하게 되고, 멜버른을 강호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또한 이때부터 우승 트로피가 사용되어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또한 TV 보급이 시작되어 관중 수가 줄게되자 경기 방송을 아예 금지한 해가 있다.. 그러나 1960년대에 TV 보급 영향으로 관련 미디어 발전이 시작되었고, 호식축구를 알리기 위해 해외에 경기를 시전하기도 했다. 시골 출신 선수들이 늘어나자 시골선수 조닝[15]을 도입해서 그나마 괜챃았는데...조닝 자체가 문제가 많아서 여러 클럽들을 좌우하는 경우가 많았다.[16]
VFL에 또 다른 구장을 열었는데, 이는 바로 VFL 파크. 원래는 MCG보다 크게 만들려 했으나, 리그에 위협이 될수 있었기 때문에 무산되었지만,[17] 7만8천을 수용 가능했기 때문에 관중상은 만족했다.[18]
또한 1970년대부터 룰의 대한 현대화가 시작됐는데, 파이널의 참전 팀의 수를 5팀로, 이때 도입한 무제한 교체와 심판 추가 등등이 현대 호식축구의 기반이 되었다.
3.3 빅토리안 풋볼 리그(VFL) 시절 - 1970년대~1980년대
1970년대~1980년대로 들어오자 VFL은 호식축구내 거상이였다. 타 주의 리그보다 강했고 영입도 많이 이루어 졌지만...그건 일부 클럽 이야기였고 많은 클럽들은 재정 문제에 시달리기 시작했다.[19] 과도한 영입과 요구사항 등등의 문제들은 여러 클럽들한테 안좋은 영향이 미쳐 사우스 멜버른의 경우는 아예 시드니로 연고이전했다. 팀들이 시달리니 결합 시도도 많았는데, 예를 들어서 핏즈로이는 전쟁 이후 가장 시달리던 팀이였는데, 재정과 퍼포먼스 문제도 악명적이였다. 그러나 사우스 멜버른과 달리 멜버른에 남기 위하여 많은 시도를 하였다.
재정난의 근원이였던 조닝과 부유한 클럽들의 돈지랄를 해결하기 위해서 전국 드래프트와 샐러리 캡을 도입, 그나마 선두 클럽들의 득점을 줄이는데 성공했다.
또한 빅토리아 주의 독점을 줄이기 위해 세 주의 리그끼리 대결하는 나이트 시리즈(Night Series)를 도입했다. 그러나 그것도 빅토리아 출신들이 독접했기 때문에 의미없는 대회가 돼 버렸고, 프리시즌으로 바뀌었다.
호식축구 관련 문화도 이때 발전하였다. 클럽들은 각각 클럽송을 배정받았고, 1975년의 컬러 TV의 보급을 맞춰 팀컬러를 연하게 바꾸어본다. 호식축구의 열기와 영향은 스포츠 음악, 미술 문화를 발전시킨다. 스케쥴도 변화의 영향을 받았는데, 금요일과 일요일날 경기의 도입이 새 슬롯을 만들었다.
또한 1977년부터 결승전 생방송이 시작되었다. 대다 경기를 라디오로 듣거나 재방송만 보던 호주인들한테는 큰 도움이 된것이다. 그리고 그 해부터 결승전에 프리게임 엔터테이멘트를 도입했다.
겔릭 풋볼의 관계가 다시 만들어 진때도 이때였다. 아일랜드 출신 선수를 호식축구 체험용으로 불러오기 시작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였다. 이 결가와 결합으로 인해 두 코드끼리 붙는 인터내셔널 룰즈 시리즈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의 수혜자는 호손. 1983년부터 1991년동안 한번 빼고 계속 결승에 진출했고, 5번의 우승을 이루었다.[20] 지역상 전혀 관계없는 에센던과의 열기도 시작되었고, 두 팀 사이의 결투는 악명적.
그것보다 가장 큰 변화는 전국 리그의 창설. 시드니 연고 이전도 그렇고, 예전부터 타 주 클럽의 가입시도와 체험 게임들이 다시 쓰이게 되자, 타 주 클럽을 창단했는데, 그게 웨스트 코스트 이글즈와 브리즈번 베어즈. 그리고 1989년을 마지막으로 VFL이라는 명칭을 버리고, 전국 리그 오스트레일리안 풋볼 리그(AFL)으로 개명하며, 전호주의 호식축구를 맞게 된다.
3.4 새로운 전국 리그
새롭게 창설된 AFL의 첫 로고.
전국리그인 AFL의 창설후, VFL은 VFA가 쓰게 되었고, 빅토리아 주에서는 클럽이 운영하던 청년팀들은 사라지고 선수 발굴을 위하여 지방으로 나뉘어진 청소년팀 리그을 설립하였다.
전국 리그의 첫 결승은 콜링우드가 콩라인을 탈출. 32년동안의 한을 풀고 드디어 우승.
웨스트 코스트 이글즈는 믹 몰타우스(Mick Malthouse) 감독 중심으로 두번의 우승을 경험하게 되었고, 반면 질롱은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 개리 애블렛[21]의 존재에 불구하고 새 콩라인이 되었다.
빅토리아 다음으로 강호인 애들레이드에도 팀이 출범되었고, 두번째 서호주 팀인 프리맨틀 다커즈가 16번째 팀이 되었다.
팀의 수가 많아지니 6강, 후에 8강 파이널 시리즈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원조 클럽들은 재정문제에 시달렸는데, 명문 호손이 돈문제로 시달려 팀이 거의 결합해버렸고 핏즈로이는 최소한 멜버른에 남기 위하여 모든걸 쏳아부었지만 같은 문제에 시달리던 브리즈번이랑 결합해버렸다. 핏즈로이는 여러번 결합시도를 했는데, 예를 들어서 풋스크레이랑 핏즈로이는 결합해 사라질 뻔했는데...풋스크레이 팬들의 금모으기 운동이 팀을 살렸다.
빅토리아 클럽들이 재정난에 시달리면서, 또한 멜버른 호크스라는 팀으로 결합할려 했으나, 두 팀한테 흑역사인데, 특히 멜버른 팬들은 대다수가 흡수에 찬성을 선택했기 때문.
사라진 자리를 매운 팀은 포트 애들레이드. 원래 포트 애들레이드는 호식축구로 유명하기도 했고, 전국리그에 참가할려던 의도도 있었고, 주 내 강호였기 때문에 좋은 결과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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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버른에 새로운 경기장 건설을 시도했는데, 그게 돔경기장 도클랜드 스타디움(Docklands Stadium). 계획도시 도클랜드 지역에 새 고급아파트와 마천루가 건설되기 시작하면서 거기에 정한것. 웨이벌리/VFL 파크 규모는 거대했는데, 대중교통의 부재의 문제와 MCG의 재건설이 타격적이였고, 경기장의 관중수가 떨어지면서 결국 폐쇄되어 땅이 팔려버렸다. 그러나 남은 부분들은 호손 FC의 HQ로 사용되고 있다.
거지구단이다 팬들 없다 이런 말을 듫던 노스 멜버른의 전성기가 이때. 연속 파이널 시리즈 진출과 웨인 케어리(Wayne Carey)의 존재는 2번의 우승을 이끌었다. 하지만 재정이 안좋았고, 캥거루즈로 개명하면서 캔버라에서 경기를 열어보기도 했다.
3.5 새천년
2000년은 시즌은 같은 해에 열리던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이랑 겹치려는 것을 피해 3주 앞땡겼다. 또한 새로운 파이널 시스템을 도입했는데, 이는 첫 8강 시스템에서 4강 밖에서 결승 올라가는 확률이 높았기 때문.
새천년의 첫 우승팀은 에센던. 한마디로 무적. 1경기만 패하고 1위 자리를 그해 계속 유지하였고, 그 해 막을수 있는 팀이 사실상 없어 사상 최강 팀으로 도약했다.
그러나 진짜 최강은 브리즈번 라이온즈. 전신이자 재정난으로 시달리던 핏즈로이와 브리즈번 베어즈가 합해 신의 한수가 돼, 아무도 오랫동안 못한 3연패]를 기록했다.
경기장도 많이 개장했는데, 도클랜드 스타디움에 2000년에 개정, 2002년부터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의 경기장 스타디움 오스트레일리아(Stadium Australia)가 호식축구 경기장으로 처음 사용되었으며, 다음해에 시드니v콜링우드 경기에서 비멜버른 최다 관중수라는 기록을 올렸다. 럭비리그 위주였던 시드니의 변화였다.[22] 또한 다윈이랑 태즈매니아에서 처음으로 AFL 경기가 실행되면서, 신생팀의 관심이 더 높아졌으며, 특히 호식축구가 인기많던 태즈매니아와 북부지역에서 라이센스 기대가 올랐다.
2000년부터 멜버른 전통 강호들의 몰락과 비멜버른/빅토리아 주가 도약했는데, 2003년 경우에는 비 빅토리아 구단이 다 파이널 시리즈로 올라갔다. 또 다음해부터 3년동안 비멜버른 팀 결승이였다.
후반에는 '질롱 FC이 오랫 한을 깨고 우승하고, 그 뒤 2번 더 우승하여 왕조가 되었다.
떠돌며 여러 곳에서 경기를 진행해본 노스 멜버른은 다시 멜버른 지역에 완전히 자리잡았고, 연고이전의 반대는 골드 코스트 썬즈와 GWS의 탄생이 되었다.
세계화을 위하여 2013년에는 이웃나라 뉴질랜드에서 AFL 경기가 처음으로 실행. 그러나 기대감은 적었다...하지만 2017년부터 중국에서 처음으로 AFL 경기가 실행된다. 이는 호주의 총리, AFL의 사장이랑 포트 애들레이드의 회장이 중국 방문하면서 딜을 맺은거다.
4 참가 팀
빅토리아 주
- 노스 멜버른 FC (North Melbourne)
- 리치몬드 FC (Richmond)
- 멜버른 FC (Melbourne)
- 세인트 킬다 FC (St Kilda)
- 에센던 FC (Essendon)
- 웨스턴 불독스 (Western Bulldogs)[23]
- 질롱 FC (Geelong)
- 칼튼 FC (Carlton)
- 콜링우드 FC (Collingwood)
- 호손 FC (Hawthorn)
뉴사우스웨일즈 주
퀸즐랜드 주
서호주 주
- 웨스트 코스트 이글스 (West Coast)[24]
- 프리맨틀 다커즈 (Fremantle)
남호주 주
- 애들레이드 크로우즈 (Adelaide)
- 포트 애들레이드 FC (Port Adelaide)
5 역대 우승팀
5.1 VFL
연도 | 우승(수) | 준우승(수) | 시즌 1위(수) | 꼴등(수)(...)[25] |
1897 | 에센던(1) | 질롱(1) | 질롱(1) | 세일트 킬다[26](2) |
1898 | 핏즈로이(1) | 에센던(1) | 에센던(1) | 세인트 킬다(2) |
...
6 관련 항목
- ↑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순수 빅토리아 주 리그였다. 뭐 타 주 선수 출신도 꽤 있었지만 빅토리아 주를 위한 리그였다
- ↑ 원래는 VFL. 하지만 확장으로 인해 1990년에 AFL로 바꿨다. 빅토리아 주 출신 팀들이 많은 이유가 이것이다.
- ↑ 크보의 포스트시즌이랑 비슷하다.
- ↑ 원래 BYE는 팀 수가 홀수일때 쓰였고, 원래는 중반의 있는 라운드를 2주로 나누면서 1주 쉬는 것이였다. 그러나 18팀 리그가 되어 바뀌었다.
- ↑ 파이널 시리즈 때문이기도 하고 호식축구가 오래가는 경기인지라 최소한 경기 사이에 1주일이 필요하다.
- ↑ 크리켓이 없던 겨울에 대체할려고 만든게 호식축구.
- ↑ 현재 VFL
- ↑ VFA의 모든 우승들은 강호들의 차지였다.
- ↑ 브리즈번 라이온즈의 전신
- ↑ 첫 시즌이였던 1897년은 결승전이 없었고, 우승은 상위팀들이 참가하는 조별리그로 결정했다.
- ↑ 특히 시험기간이였을때가 문제였다.
- ↑ 현재 유니버시티는 재창설 이후 아마추어 리그 VAFA에 참가하고 있다.
- ↑ 통합은 나중에도 시도되었다. 다 무산됐을뿐.
- ↑ 또한 이러한 시도는 민족주의랑의 관련도 있다.
- ↑ 조닝이란, 각 팀마다 지역을 배정받는 제도. 나중에 폐쇄되었고, 드래프트로 바뀌었다.
- ↑ 예를 들자면 1960년대 결승 진출팀이 9개팀이였던 반면, 1972년부터 1987년까지는 반만 결승에 진출.
- ↑ 당시 VFL은 MCG를 소유하고 있었다.
- ↑ 참고로 호식축구 구장중 가장 컷기 때문에 야구장으로도 쓰였다.
- ↑ 특히 1984년에는 대다 클럽이 재정난 문제가 있었다.
- ↑ 게다가 호손은 팬베이스도 그렇게 좋은편이 아니였다.
- ↑ 현 개리 애블렛의 아버지
- ↑ 물론 반대도 마찬가지. 멜버른 스톰으로 인해 멜버른에도 럭비리그가 인기가 많아졌다.
- ↑ 연고지는 풋츠크레이.
- ↑ 연고지는 퍼스.
- ↑ 참고로 호주 스포츠계에서는 시즌 꼴등한테는 나무숟가락/우든 스푼(Wooden Spoon)이라는 상이 있다 카더라.
- ↑ 오랫동안 세인트 킬다는 동네북이였고, 몆시즌동안 승리를 해본적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