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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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문서는 조선의 2대 왕인 '정종(定宗)'을 다룬다. 원래 묘호가 '정종(正宗)'이었던 조선의 22대 왕에 대해서는 정조 문서 참조.

조선의 역대 국왕
초대 태조 이단2대 정종 이경3대 태종 이방원
묘호정종(定宗)
시호
의문장무온인순효대왕(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
공정(恭靖)
본관전주(全州)
능묘후릉(厚陵)
이(李)
방과(芳果) / 경(曔)
광원(光遠)
출생지고려 함흥 함흥본궁
사망지조선 한성 인덕궁 정침
배우자정안왕후(定安王后) 김씨
아버지조선 태조
어머니신의고황후(神懿高皇后)
생몰기간음력1357년 7월 1일 ~ 1419년 9월 26일
양력1357년 7월 18일 ~ 1419년 10월 15일 (62년 2개월 28일, 2만 2733일.)
재위
기간
음력1398년 9월 5일 ~ 1400년 11월 13일
양력1398년 10월 14일 ~ 1400년 11월 28일 (2년 1개월 14일, 775일.)
태상왕[* 당시에는 태종과의 구분을 위해 노상왕(老上王)으로 칭해졌다.]음력1400년 11월 13일 ~ 1419년 9월 26일
양력1400년 11월 28일 ~ 1419년 10월 15일 (18년 10개월 17일, 6895일.)

틀:조선의 태상왕

조선의 역대 왕세자
의안대군 이방석정종 이경태종 이방원

1 소개

정종공정의문장무온인순효대왕(定宗恭靖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

영안군 혹은 영안공. 흔히 영안대군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잘못된 호칭이다. 대군이라는 호칭은 동생인 태종이 고려시대의 오등작을 폐지하면서 등장시킨 것으로 태종 즉위 후에 생긴 호칭이다. 즉 태종이 '정안대군'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던 것처럼 정종도 '영안대군'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름은 이방과(李芳果)였으나, 즉위 후 경(曔)으로 바꾸었다. 태조 이성계의 둘째 아들이다.

겨우 2년 남짓 재위했고 사후에는 정통성 문제로 홀대받아 오랫동안 왕 대접을 받지 못했다. 물론 생전에는 동생도 함부로 하지 못할 정도의 포스가 있었지만 오랫동안 공정왕이라는 시호로 불리다가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정종으로 추존되었다. 드라마 등에서는 유약한 이미지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지만, 고려 말에는 장군이었던 아버지 이성계를 따라 전쟁터를 종군하기도 했던 무골이다. 기록에 의하면 체구가 곰처럼 강건하고 왼쪽 눈 밑에 큰 사마귀가 있었다고 전한다. 기록에 따르면 아버지인 이성계의 무인적인 기질만큼은 형제들 중 가장 많이 물려받았다고 한다.

역대 조선 국왕 중 최초로 한양(경복궁)에서 즉위한 왕이다. 또한 태조 이성계(즉위 당시 만 57세)를 제외하고 즉위할 때의 나이가 가장 많은 왕이기도 하다. 즉위 당시 만 41세.

1.1 조선 건국 전까지

고려시대에는 명장 이성계의 아들 답게 무장으로 활약했다. 약관의 나이를 넘긴 만20세가 되던 1377년(우왕 3) 5월에 태조를 수행하여 지리산까지 노략질하기 위해 진출한 왜구를 치는데 동행하였으며, 황산 대첩에서도 태조의 곁에서 함께 싸웠다. 이후 위화도 회군때 형 이방우와 함께 우왕 진영을 탈출해 신속하게 이성계측에 합류했으며 1389년(창왕 1)에 절제사 유만수의 지휘 하에 해주에서 왜구를 무찌른 기록도 있다.

조선왕조의 개국 논의가 한참 일어날 무렵엔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동생 이방원포은 정몽주를 척살할 계획을 세울때 같이 동참을 한 사람이다. 이방원이 정몽주 암살 모의를 할 때 참여한 사람이 이성계의 이복동생 이자 이방원의 숙부가 되는 의안대군 이화, 이방원의 이복여동생 경순공주의 남편 이제, 이방원의 심복 조영규, 그리고 둘째형 이방과였다. 참고로 이방원이 이성계의 의형제 이지란(퉁두란)에게도 모의를 건의했으나 이지란은 어르신(이성계)이 반대하는 일을 나는 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정몽주가 고려 최후의 보루로서 대활약했던 것을 방과도 모르지 않았을 터. 함께한 사람들이 전부 조선개국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이고 4명의 형들 중 유일하게 방과와 상담한 걸 보면 방과도 그 당시 역성혁명에 열성적으로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앞뒤 정황을 보면 억지로 끌어들였다고 보기엔 너무 적극적이다. 그리고 20대 초반에 불과한 방원이 연배나 공적에서 훨씬 위인 둘째형을 억지로 끌고갔다고 보긴 힘들다. 게다가 이방원 입장에서도 아버지 이성계는 정몽주 제거를 꺼려하고 있었고, 맏형 방우도 공양왕 즉위 이후 정계에서 배제되어 협력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나이도 많고 아버지 보필하며 공이 많은 둘째형의 지지가 여러모로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1] 태조와 정종의 역할이 축소되었다고 보는 학자들은 아예 정종을 정몽주 숙청의 주역으로 보기도 한다.

“만약 정몽주 일당의 죄를 묻지 않으시겠다면 청하건대 신들에게 죄를 주십시오."

정몽주가 선지교에서 참살된 후, 곧바로 총대를 메고 공양왕에게 정몽주 살해를 알렸으며, 자신들을 처벌하든지 아니면 정몽주 계열 인사들을 모조리 처벌하라고 매섭게 압박했다. (고려사절요에서는 이방원이 이화와 논의하여 보냈다고 한다.) 무장으로서 이성계의 모습을 가장 많이 이어받은 방과의 압박은 공양왕에게 심각한 두려움을 주었을 것이다. 정몽주 세력이 제거된 직후 이지란 다음으로 높은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의 직위를 받았다. 고려사절요

조선 건국 이후 막상 공이 있었던 왕자들에게는 별다른 혜택이 없고 오히려 정도전, 남은 등 소수의 재상들에게 권력이 쏠리자 이를 강력하게 비판하던 입장에 서 있기도 했다.

조선 왕조가 개창된 후 1392년(태조 원년) 8월 초 7일에 만35살의 나이로 영안공(永安公)에 봉하여지고 당시 태조의 친위부대인 의흥친군위(義興親軍衛)의 의흥친군위 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에 임명되었다. 1393년(태조 2) 6월 초6일에 문화현, 영녕현에 출군하여 왜구를 물리쳤다.

1.2 지극한 효성과 우애

태조 이성계의 아들 중 특히 효심이 깊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사료에 의하면 1차 왕자의 난이 벌어질 때는 홀로 병상에 누워 있는 아버지의 쾌유를 비는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이방원이 난을 일으켰단 소식에 크게 놀라서 김인귀란 자의 집으로 도망갔고, 자신이 세자가 되었다는 말에 마지못해서 숨어 있던 곳에서 나온 후 "내가 세자라니! 차라리 정안공이 하지?"라며 발을 빼려다 역시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태조가 정안공 이방원이 붙인 시위군이 말이 시위군이지 간수나 다름없다며 정종에게 하소연하자 재상을 불러 눈물을 흘리며 설득하여 시위를 풀었다. 이에 태조 역시 눈물을 흘리며 "왕은 성격이 본래 순후하여 이전에도 내 가슴을 아프게 한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또한 2차 왕자의 난에서도, 군사를 일으킨 다음 지지를 바라며 리포트를 하는 방간에게 너 미쳤구나 당장 군대 해산하고 궁궐로 혼자 들어오면 내가 목숨만은 지켜주마라는 반응을 보였다. 한 마디로 방원에게 상대도 되지 않을 테니 정신나간 짓 하지 말고 얼른 항복하라는 이야기(...).[2] 결국 싸움에서 승리한 정안공이 패배한 방간의 처분을 어찌할지 조언을 구하자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그래도 어려울 때 기댈 것은 피붙이밖에 없다."며 선처를 당부했다. 결국 방간은 목숨을 건져 유배지에서 그럭저럭 편하게 살다 죽었다. 후술하듯 식읍까지 받았으니 사실상 유배도 아니다.

이후 토산으로 유배 간 동생 이방간안산으로 옮겨 안치하면서 방간에게 전답을 마련해 주고, 고을의 주민 50호를 주도록 조치했으며 편지를 보내줬는데 이 편지를 보면 정종의 우애와 인간미가 잘 드러난다.

"토산군(현 황해북도 토산군, 옛 금천군의 일부)은 동북면(함경도의 옛 이름)에 왕래하는 땅이고, 또 네가 전에 영솔하였던 군사들이 사는 곳이니 네가 만일 오래 머물면 뒤에 반드시 말이 있을 것이다. 안산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 네가 받은 땅은 그 고을에 옮겨 주고, 또 식읍 50호를 주는 것이니, 네가 편한 대로 땅을 맡기고 사람을 부려서 일생을 마치도록 해라. 정월 초하루면 단기(單騎)로 서울에 들어와서 서로 생각하는 정을 펴도록 하자." -<정종실록> 정종 2년(1400) 2월 13일

이 편지를 받은 방간은 갓을 벗고 머리를 두드리면서 통곡할 따름이었다고 한다.

1.3 재위 기간

실록에 의하면 재위기간 동안 격구나 사냥을 즐기며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격구를 하다가 곁에 있던 사관(史官)에게 "내가 격구하는 것도 다 기록되냐"고 질문하자 사관이 "당연하죠"라고 대답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자 정종은 "옛날 사람들이 격구한 일을 어떻게 기록했는지 봐야겠으니 <고려사>를 가지고 오라"고 말했던 일도 있었다.[3]

뿐만 아니라 경연을 하다가도 "내가 병 때문에 팔다리가 저려서 격구를 해서 몸 좀 풀려고 한다"고 말해서, 지경연사(知經筵事) 조박(趙璞)이 "하시는건 좋은데 환관이나 간사한 애들하고는 같이 하지 마세요"라고 권하는 일도 있었다.[4]

아울러 격구와 관련해 태조에 대한 효심을 드러내는 에피소드가 많다. 대간에서 격구를 비판하며 "태조가 환관의 꾐에 빠져 격구를 궁에 도입했다"고 간하자 대간을 불러 "내 허물을 가지고 왜 부왕을 욕되게 하냐"며 화를 냈다고 한다.[5] 사냥을 나가면 언제나 중도에 사람을 시켜 잡은 짐승을 태조에게 보냈다고 한다.

정종은 잠시 조선의 수도를 개경(오늘날의 개성특급시)로 돌려보냈다. 여러모로 고려 시대에 대한 향수가 강했고, 형제끼리 골육상쟁을 벌인 한양(경복궁)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정종실록을 보면, 개경으로 다시 수도를 돌리기까지 유독 까마귀와 까치에 시달린 기록이 많이 나왔다.

  • 정종 1권, 1년(1399 기묘 / 명 건문(建文) 1년) 2월 12일(계축) 1번째기사
밤중에 뭇 까마귀가 대궐 위에 날아와 울다
  • 정종 1권, 1년(1399 기묘 / 명 건문(建文) 1년) 2월 14일(을묘) 1번째기사
뭇 까마귀가 궁성 북쪽 소나무에 모여 지저귀다
  • 정종 1권, 1년(1399 기묘 / 명 건문(建文) 1년) 2월 15일(병진) 1번째기사
뭇 까마귀가 경복궁을 빙빙 돌고 다음날도 또한 그와 같이 하다
  • 정종 1권, 1년(1399 기묘 / 명 건문(建文) 1년) 2월 19일(경신) 2번째기사
뭇 까마귀가 궁성 북원에 모여 울다
  • 정종 1권, 1년(1399 기묘 / 명 건문(建文) 1년) 2월 23일(갑자) 1번째기사
까치가 근정전 망새에 집을 지다.

그리고 이 까마귀, 까치 소동이 본격적으로 개경천도의 계기가 되었는지...

  • 정종 1권, 1년(1399 기묘 / 명 건문(建文) 1년) 2월 26일(정묘) 2번째기사
종척과 공신을 모아 도읍 옮길 것을 의논하여 송경에 환도하기로 정하다
  • 정종 1권, 1년(1399 기묘 / 명 건문(建文) 1년) 2월 26일(정묘) 2번째기사
종척과 공신을 모아 도읍 옮길 것을 의논하여 송경에 환도하기로 정하다
“뭇 까마귀가 모여서 울고, 들 까치가 와서 깃들고, 재이(災異)가 여러 번 보였사오니, 마땅히 수성(修省)하여 변(變)을 없애야 하고, 또 피방(避方)하셔야 합니다.”
임금이 이에 종친과 좌정승 조준(趙浚) 등 여러 재상들을 모두 불러 서운관에서 올린 글을 보이고, 또 피방해야 될지의 가부를 물으니, 모두 피방하여야 된다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어느 방위로 피방하여야 할지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경기 안의 주현(州縣)에는 대소 신료(大小臣僚)와 숙위(宿衛)하는 군사가 의탁할 곳이 없고, 송도(松都)는 궁궐과 여러 신하의 제택(第宅)이 모두 완전합니다.”
하니, 드디어 송경(松京)에 환도하기로 의논을 정하였다. 애초부터 도성 사람들이 모두 구도(舊都)를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환도한다는 말을 듣고 서로 기뻐하여 손에 손을 잡고 이고 지고 하여 길에 연락부절하니, 성문(城門)을 지키어 이를 제지하도록 하였다.

기껏 한양으로 내려와 대공사를 짓고, 골육상쟁의 난이 일어나 뒤숭숭한 와중에, 까마귀가 수시로 울어대니 다시 개경으로 돌아가잔 내용이다. 물론 태종이 즉위한 이후 다시 천도를 논의하여 창덕궁을 지으면서, "조선의 수도 개성"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은 2차 왕자의 난으로 그치게 되었다.

태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에는 놀면서 편하게 살다가 죽었다. 제사도 지내고 불공도 드리다가 이를 핑계로 전국 각지의 온천유람을 떠나는등, 말년에는 태종도 그의 유유자적한 생활을 부러워했다고. 태종도 말년에는 고독감 같은 것을 느꼈는지 상왕이 된 형과 어울려 노는 일이 잦았다. 실록에 정종과 태종이 서로 명절날 장난을 친 이야기를 읽다보면 무척 유쾌할 정도다.[6]

더불어 63살로 천수를 누렸는데 당시의 평균적인 수명을 생각하자면 오래 산 편이며, 영조(83살)와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74살), 고종(68살), 광해군(67살) 다음으로 역대 조선 국왕들 가운데 5번째로 장수했다. 6번째는 딱 환갑을 맞이하기 전이었던 숙종(60세)이다.

1.4 가족 이야기

고려말에도 부인인 김씨와의 젊은 시절부터의 정 때문에 부인을 더 얻을 수 없다하여 평생 해로한 애처가이기도 하다. 상왕으로 물러난뒤 태종이 원경왕후 민씨와의 사이가 극도로 나빠져 오기로라도 후궁을 더 들인다며 수선을 떨자 정종이 "왕은 어찌하여 다시 장가들려고 하시오? 내 비록 아들이 없어도, 소시(少時)의 정(情)으로 인하여 차마 다시 장가들지 못하는데, 하물며 왕은 아들이 많으니 말해 무엇하겠소?"라고 말해 태종이 가례색을 폐하기도 했다. 이건 정치에 일절 간섭하지 않던 정종이 유일하게 태종에게 한소리 한 것이라고 한다.(출처: 《태종실록》 권3 2년 2월 11일 갑자 3번째 기사. [1] 그렇다고 태종이 후궁을 더 들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거창하게 혼례를 올리려던 것을 조용하게 했을 뿐, 중국 제후의 예를 따라 최대 9명을 꽉 채워서 다 들였다.

후일 김씨가 먼저 사망하자 동생인 태종이 그를 위로하는 잔치를 열었는데, 잔치가 한창 무르익던 도중 갑자기 먼저 간 부인이 떠올라 혼자 즐기지 못하겠다고 잔치를 파하고 돌아간 일화에서 그의 부인에 대한 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 《태종실록》 권24 12년 8월 15일 정묘 2번째 기사. [2]

허나 아내와의 금슬과는 별개로 첩실 소생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은 상당히 많았다. 지금과 당시의 결혼관이 상당히 다른 면이 있어 그런 것도 있지만, 유교관에서 최고의 불효는 자식을 낳지 않는 것이었고 그렇게 금슬 좋은데 자식을 못 보는 것을 왕비가 불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여하튼 자녀복 많은 조선왕조 군주 랭킹 4위로 15남[7] 8녀(23명). 이들은 대체로 행실이 엉망이라 이후 세종대왕 시대에 왕실의 체면을 떨어뜨리는 골칫거리가 된다. 반대로 생각하면 정종에게 적자가 없었다는 것이 다행일지도 모른다. 만약 정종에게 정통성이 있는 적자가 있었다면 피바람이 한번 더 휘몰아 쳤을지도 모르겠다. 야사에는 모두 출가시켜서 중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정종의 아들을 사칭한(친아들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승려의 이야기가 후세에 들어서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이 야사를 참조한 모습을 보여준다.

정종에게는 기매라는 이름의 기녀 출신 첩이 있었는데, 그녀는 바람기가 대단해서 많은 남자들과 바람을 피웠다고 한다. 아들도 낳았지만 아버지가 의심스러워서 정종은 그녀 소생의 아들을 아들로 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아이를 보살펴 주었다고 한다. 정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후 기매가 가짜 내시와 바람을 핀 것이 들통이 났는데 원칙대로라면 이는 처형감으로 태종과 중신들은 가짜 내시와 기매를 처형하려 했으나 정종은 직접 태종에게 부탁하여 그녀를 살려주었다. 기매는 끝까지 자신이 낳은 아이를 정종의 아이라고 주장했지만 정종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종은 죽을 때까지 기매 모자를 보살펴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종 사후 기매의 아들은 '지운'이라는 법명으로 출가하였으나 승려의 모습으로 돌아다니며 왕자 대접을 받으며 권세를 누렸는데, 이게 왕족 사칭죄로 문제가 되었다. 당시 상왕이 된 태종과 국왕 세종은 일단 지운을 체포했는데, 태종과 세종은 지운이 정종이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심증적으로는 정종의 아들이 맞다고 생각했는지 지운에게 왕족에 준하는 의식을 공급할 테니 절대 왕자라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지운은 이 명을 듣지 않고 계속 문제행동을 일삼다가 결국 세종 6년에 참수되고 만다.

바로 아래에 설명돼 있듯이, '원자'로 일컬어졌다는 불노(佛奴)는 실록에 "정종의 친아들이 아니라 첩 유씨가 다른 사람에게서 낳은 아들"이라고 기록돼 있다. 불노도 지운처럼 "나는 상왕의 아들"이라고 주장했지만, 정종은 "결코 내 아들이 아니"라고 했다고 한다. 불노는 이와 같은 주장을 하다가 공주에 안치됐다.[8]

그 외에 서자로 다섯번째 아들이었던 선성군이 있는데 첫째 부인이 바로 정몽주의 손녀(...)인 오천군부인이다.

1.5 정종 무인정사 배후설

권력에 대한 욕심이 일절 없었던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적자가 없는 상황에서 자기 서자원자로 봉하려다 정안공 이방원이 압력을 넣어 취소시키고 왕세자가 된 기록이 남아있다.[9] 정치적 야심이 분명히 있었음을 알려주는 기록. 적장자 계승이 무인정사의 가장 강력한 명분이었으니만큼 방우 사후 적장자가 된 그가 명분상 밀릴 일은 없었다. 그리고 태조실록에서 태조와 정도전에 대한 곡필을 행한것이 거의 확실한 상황에서 정종실록이라고 곡필이 없으리란 법이 없다.[10] 태종이 조선 개국과정에서 세운 공로도 과장되었다는 연구들이 나오고 있는만큼 개국과정과 무인정사까지 정종의 역할에 대해서도 재고해 볼 필요성이 있다.

사실 정종에 대한 연구는 많지는 않아도 90년대부터 꾸준히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가지 의문점에 봉착하게 된다. 개국과정에 세운 공이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큰 방원과 달리 이성계를 따라 황산대첩에 종군했고 조정중신으로 자리잡고 있어 개국과정에서 공이 상당하며 강건한 무장 출신에 중앙군 지휘권을 행사한 정도전을 위시한 공신그룹과 대치하던 왕자들의 가장 큰 형님인데 정작 무인정사 때는 동복 아우 전원, 숙부에 조카까지 다 참여하고 심지어 방석의 형 방번에게까지 회유가 들어간 마당에 혼자 아무것도 모른채 제사나 지냈다는 실록 기록 때문이었다. 승정원 일기가 없어 교차검증도 안되는 탓에 결국 태종의 역사를 그대로 따랐고 다른 의견을 이래야 만만찮은 배경을 가진 형을 제치기 위해 방원이 일부러 배제시켰을 가능성을 소극적으로 제시하는 정도였다.(윤두수, 조선 정종에 관한 연구, 1990)

그러다 2000년대 이후 태조에서 정종, 정종에서 태종, 태종에서 세종으로 넘어가는 계승과정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어 큰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면서 다른 의견이 제시되기 시작했다.(윤정, 정종의 즉위과정과 즉위명분, 2013)

연구자에 따라서는 정몽주 격살은 물론 1차 왕자의 난 주동자를 태종이 아닌 정종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11][12] 이는 태종의 집권 명분과 정종이 무인정사 이후 왕위에 올랐다는 점에 주목한다. 정종은 태조에게 전위를 받을 때 장남이란 명분으로 물려받았고 길지 않은 재위기간 동안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된게 적장(嫡長)으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하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태종의 즉위 명분은 이와 대척점에 있는 택현(擇賢)이다. 개국에 가장 공이 컸고 재주가 뛰어난 왕자이기에 국가를 반석에 올릴 재목으로서 계승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후계자가 적장자가 되면 자기 권위가 흔들리고 골육상쟁을 거쳐 왕위에 오른 자신의 도덕적 결함이 강조될까 두려워 자기 맏아들의 비행을 일부러 드러내고 택현에 맞는 후계자(충녕)를 세운 사람이 태종이다.[13][14]

태종이 모든걸 주도했다고 보기엔 자신에겐 별 도움이 안되는 장자 계승이란 명분을 강조할 필요가 없었다. 처음부터 택현을 명분으로 즉위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형의 아들이 되는 무리수를 감행했고 뒷날의 용비어천가에서 빼버리는건 물론 폐위당한 왕이 아님에도 묘호를 바치지 않는 유일무이한 상황이 벌어졌다.[15] 이 때문에 1차 왕자의 난까지의 정종과 태종의 행보에 왜곡이 적잖이 들어갔다 보고 둘째 형 밑에서 세력을 키워간 태종이 적장자가 없는 정종의 약점을 노린 넷째 형과의 경쟁(2차 왕자의 난)에서 승리해 형의 왕위를 가져갔다는 해석이 나온 것이다. 즉, 아버지와 이복동생을 끌어내린 것은 큰 형 정종이고 그 형을 무력으로 끌어내리고 모든걸 빼앗은 사람이 태종이 된다.

사실 정종배후설을 밀어붙이기엔 많은 무리가 있다. 대신에 정종의 원자 책봉시도의 또 다른 배후로 생각되는 사람은 바로 태조 이성계. 형제를 죽인 패륜아가 왕이되는꼴을 못보겠다고 생각한 태조가 정종을 내세워서 이방원의 왕위계승을 방해하려했을 수도 있다.

1차 왕자의 난이후 세자로 추대된 점을 볼때 당시 정종이 관여하였을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당시 조정의 세력이 모두 이방원 휘하의 인물들이 가득찬 상황을 볼 때 정종이 주동자였음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즉 정종 배후설은 원자 책봉시도와 같은 몇 안되는 기록을 보고 제시한 설일 뿐, 실록 및 타 기록에서 이방원이 주체라고 적은 내용은 압도적으로 많다.[16] 정도전과 같은 친 이방석 세력의 주살 등의 주체가 이방원인 점이나 정종의 짧은 재위기간 및 숨은 배후라 보기엔 매우 지지기반이 약했던 점 등 여러가지 주 기록들을 볼 때 정종 배후설이 이방원이 주도한 사건이라고 보는 기존의 통념을 뒤집기에는 무리가 있어보인다.

그렇기에 이후에 이루어진 정종의 원자책봉시도는 결국 태조가 그나마 당시 동원 할수 있었던 패였던 듯 하다. 거의 유폐당하다시피 했지만 아버지의 명을 거스를 수 없었던 둘째 아들의 성품을 이용한 정치적 시도였다는 것. 태조가 보기에 이방원의 편을 들어준 둘째 또한 밉긴 했지만, 주체인 이방원보다는 나아보였을 것이다. 정종이 그 동안의 사건의 배후였다면 원재책봉시도 방식 자체가 매우 부실한 점 등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막후 배후라는 사람이 그런거 하나 공론화시켜서 정치싸움을 못할 정도로 지지기반이 없었단 말인가? 결국 축출당한 이성계가 정종을 앞세워서 이방원의 왕위 찬탈(이성계 입장에서는 당연히 찬탈이다.) 시도를 어떻게든 막아보려 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정종 배후설과 같은 주장은 조선전기에 기록된 승정원 일기의 소실, 현재로서는 1차 사료라고 봐야 하는 조선왕조실록에서의 모순점 등을 근거로 연구하고 있는 학설이라 아직 이를 뒷받침할 확실한 물증이 확보되어 정설로써 확정 된 것은 아니라는 점에는 주의 해야 한다. 하륜이 주도한 태조실록의 곡필 범위를 확정하는 것도 애매하기도 하고. 그렇지만, 비록 사료적 검증에서 한계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기존의 패러다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는 점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2 공정왕에서 정종이 되기까지

“대행 상왕(大行上王)의 능호·묘호·시호를 의논하여 아뢰어라. 내 생각으로는 사사 시호는 올릴 수 없고, 다만 〈명나라 황제가〉 하사하는 시호만을 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우리 태조도 또한 사사 시호가 있었습니다. 묘호는 옛적에도 그 예가 없었으니, 지금도 없는 것이 좋습니다.”
- 허조와 세종의 대화. 세종 1년 11월 29일(기사일) 2번째기사 [3]

죽어서 묘호와 시호를 받지 못했다. 사후 세종대왕이 묘호와 시호를 올리지 않아 숙종 때 정식으로 묘호시호가 올려지기 전까지 이 시호를 사용했다. 정종을 인정할 경우 태조에서 태종으로 이어지는 왕실 계보가 꼬이는 문제도 있고, 근본적으로 조선 초에는 최대한 묘호를 붙이지 않으려 했다. 고려사 서술 방식을 생각해보자.

이것은 여러 면모에서 나타난다. 용비어천가의 해동육룡이나 종친에 대한 족보인 선원록이나 모두 태조 이성계와 태종으로 이어지는 직계만 기록하고 있지 그 외의 인물은 모조리 배제되어 있다. 더군다나 유부록에서 딸과 서얼들을 기록하면서 오로지 서얼 뿐이었던 정종의 자손들은 모두 유부록에 기록되어 종친 대우를 받지 못하게 된다. 종친들에게 관대하기로 유명했던 세종대왕도 정종의 아들인 서얼들에게는 상당히 냉정해서, 이들과 관련된 문제가 발생하면 모조리 유배형을 내렸었다. 그러나 정종의 상중에는 세종대왕도 고기를 먹지 않을 정도로 예를 지키기는 했다.

그래서 조선 전기 내내 명에서 내린 시호인 '공정왕'으로 불리다가 250년이 지난 숙종대에 와서야 겨우 '정종'이라는 묘호를 받을 수 있었다. 사실 이미 세종대왕, 예종, 성종, 중종 때 등에 이따금 논의 되었으나 계속 미루어졌던 것이다.

예종 때 희종(熙宗)이라 하려다 요절로 중단. 성종 때 예종 때에 이어서 묘호를 올리는 일이 논해진 적이 있기는 했다. 정종의 후손인 운수군 이효성이 묘호를 추상하길 청한 것이다. 하지만 세종께서 추숭하지 않은 것이 이유가 있지 않겠냐는 의견이 유력했고, 태종이 정종을 왕 대접하지 않은 것이 명확할 뿐더러 이제와서 정종을 추상하면 정종의 모든 후손들을 다 추상해야 하니 너무 복잡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결국 성종은 이효성의 청을 거절했다.

마침내 숙종 시절이 되어서야 정종의 묘호만 비었으니 안종(安宗)으로 추증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이 올라왔다. 이에 태종이 정종을 왕 대접하지 않은 깊은 뜻을 어찌 후세에서 헤아릴 수 있겠느냐며 반대하는 뜻이 있었지만 송시열이 "우애 깊으신 태종께서 혼자 묘호를 받으셔서 가슴 아프셨을 것."이라면서 묘호를 추가하는 것이 옳다고 했고 결국 정종으로 결정되었다.

아무튼 죽고 나서 대접이 너무 안습해서 왕실 제사를 맡게 된 신출내기 관리의 꿈에 나타나 전임들이 너무 소홀했다며 한탄했다는 야사가 있다. 이에 이 관리가 정종의 제사를 정갈하고 푸짐하게 잘 지냈는데, 이후에 하는 일이 순탄하게 잘 풀려서 출세했다고 한다.[17]

3 여담

이숙번과의 정쟁에서 진 적이 있다. 이숙번의 집 앞으로 새로 길이 나기로 됐는데 이숙번이 누구 마음대로? 라며 펄펄 뛰었고 인덕궁 앞에 좋은 자리가 있는데 거기에 길을 놓으라며 반협박을 했는데 인덕궁이 바로 정종이 사는 곳이다. 정종도 내 집앞에 길을 왜 놓으냐며 못마땅해 했으나 그로써는 이숙번의 요구를 철회시킬 힘이 없었고 결국 그의 집 앞으로 길이 놓였다.[18]

조선시대판 만우절 관련 일화에도 등장한다. 조선시대에는 첫 눈이 내리면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그날 하루 거짓말이 허용됐다. 그리고 그 첫 눈을 담아 누군가에게 보내면 첫 눈을 받은 사람이 술을 한 잔 쏴야 했고, 반대로 심부름 오거나 혹은 미리 보낸 사람을 잡으면 보낸 사람이 쏴야 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태종이 세종에 양위하고 어느 날 첫 눈이 내리자 장난기가 돈 태종이 첫 눈을 상자에 담아 최유를 시켜서 형 정종에게 약이라고 속이고 전달했다. 그러나 약상자(?)가 도착하기도 전에 소식을 들은 정종은 이미 이를 알고 최유를 잡으라고 하지만 이미 최유는 눈치를 채고 도망을 가버렸다. 할 수 없이 정종은 동생 태종에게 술을 한 잔 쏠 수밖에 없었다고. 고려때 부터 내려온 풍습에 . 아무튼 즐겁고 유쾌한 말년을 보내 태종이 형을 많이 부러워했다고 한다.(출처 《세종실록》 1418년 10월 27일 기사. [4]

3.1 정종의 능

그의 묘는 현재 북한개성특급시에 있다. 조선시대 왕들 중 유일하게 묘가 북한에 있으며 조선왕릉 중 제일 북쪽에 있는 능이다. 왕비까지 포함하면 태조의 첫 비이자 정종의 생모 신의왕후 한씨의 묘인 '제릉'도 개성에 있다. 참고로 남한의 조선왕릉 중 제일 북쪽에 있는 능은 인조의 장릉이다. 태조 이성계의 조상인 추존왕들의 왕릉은 제외한다. 그들의 무덤은 함흥 부근에 있다. 정확한 위치는 경기도 개풍군 흥교면 흥교리(현 황해북도 개풍군 령정리). 능호는 후릉(厚陵)으로 정안왕후와 나란히 묻힌 쌍릉이다. 공민왕릉과 비슷한 형식이다.

안타깝게도 정종의 묘가 북한에 있는지라 같이 북한에 있는 신의왕후의 릉 제릉과, 왕릉의 제식을 못 갖춘 연산군의 묘와 광해군의 묘와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에 올라가지 못하였다. 관련기사.

일화에 따르면 선조 대까지만 해도 정종의 능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는데 송도 출신의 차식이라는 사람이 와서는 능을 잘 관리하였다. 그러자 정종이 그의 꿈에서 나타나 보답을 하겠다면서 "어머니가 아프니 약을 주겠다."라고 했는데 그가 잠에서 깨니 매 한 마리가 장어 한 마리를 떨어뜨리고 갔다. 그리고 그 장어를 어머니에게 먹였더니 나았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진짜 국왕 대접을 잘 못 받은듯 하다…….

4 현대 매체에서

용의 눈물에서는 故 태민영(1954~2000)[19]이 맡았다. 역사상의 소탈하고 호방한 무인의 모습은 없고 극초반의 위화도 회군때 형제들중 군대에 장수로서 종군하는 것으로 나와 무인 출신임을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전쟁에서 몇 번 승리한 다음에는 아우들의 야심과 거친 행동에 전전긍긍하는 나약한 모습만이 나온다. 태종이 왕세자가 되자 야사대로 자신의 아이들을 모두 중으로 출가시켰다가 태종이 허락한 이후에야 다시 환속시키는 등 카리스마나 막후 권력과는 거리가 먼 모습으로 등장한다. 다만 효심이 깊고 형제들을 아끼는 면은 많이 표현되었다. .

대왕 세종에선 초반부에 잠깐 등장하는데도 배우 노영국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로 태종과 맞먹는 막후 권력&카리스마를 내뿜는다. 정치적 실권은 물론 없지만 카리스마만 따지면 과연 이방원 형(...). 태종조차 형의 위치를 부담스럽게 여겨서, 정종이 연 잔치에 참석하기 전 '툭하면 잔치를 여는 것도 모자라서 귀한 명나라 활을 대군들에게 하사하질 않나, 상왕전 재미값으로 들어가는 백성들 혈세는 어쩌란 말인가?'라고 투덜거리다가 측근 상선 노희봉이 '다른 재미를 찾는 것보단 낫습니다.'라고 충고하자 '그렇겠지. 인덕궁(정종의 거처)이 회안 형님의 흉내를 냈다간 그 몇십배의 재물이 들어가고, 아까운 목숨도 숱하게 죽어나가겠지.'라고 받아들일 지경.덧붙이자면 노영국은 권력을 제대로 못 써보고 죽은 고려 2대 국왕 혜종을 카리스마 넘치게 연기한 바 있다. 다만 양녕의 비행으로 효령대군을 왕위에 올리려는 정치적 야심도 가지고 있었다고 묘사되는데, 물론 실제로는 그런 거 없다. 기존의 유약한 이미지에서는 벗어난 편이지만 오히려 고증 왜곡이 심하다.

정도전(드라마)에서는 황산대첩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그 후 무인의 역할로 간간히 등장하였다. 비중은 적지만 '나약한 정종'이라는 클리셰를 벗어났다. 정도전(드라마)/등장인물 참조.

육룡이 나르샤에도 등장했다. '나약한 정종'에서 벗어나서 소탈하고 가족에 대한 정이 많은 무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 흔히 알려진 사실과 달리 방우도 정말 고려에 충성했는지 확실치 않다. 고려왕실에 충정을 다했다는 기록은 어디까지나 공양왕 즉위 이후 세자경쟁에서 탈락한 다음에 나온 기록이고 창왕 즉위시점까진 아버지의 일에 적극 참여한 정황이 보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의도를 모르고 협력했을 수도 있지만 조선 개국후 4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향을 피우면서 신주를 효사관에 안치하는 등 후계자만 못되었을 뿐 새왕조 임금의 맏이로서 활동했다. 흔히 떠올리는 것 처럼 은거를 한 기록은 없다.
  2. 태조 역시 난을 일으킨 방간을 미련하다고 탓하며 성을 냈는데, 여기에는 1차 왕자의 난에 이어 드디어 친동기간인 태조의 아들들이 싸움박질을 시작한 데 대한 충격도 있겠지만 이방간이 성공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탓도 있을 것이다(...).
  3. 《정종실록》 권1 1년 1월 19일 경인 3번째 기사. [5]
  4. 《정종실록》 권1 1년 1월 9일 경진 11번째 기사. [6]
  5. 《정종실록》 권1 1년 5월 1일 경오 1번째 기사. [7]
  6. 세종 즉위년(1418) 10월 27일(계묘) 10번째기사 '상왕이 노상왕에게 첫눈을 봉하여 올리다. 첫눈 봉하여 서로 장난하는 풍습'
  7. '자'로 따로 구분했지만 모두 본명 돌림자는 '생'으로 끝났다.특히 독특한 건 선생
  8. 《태종실록》 권18 9년 10월 27일 을축 3번째 기사. [8]
  9. 《태조실록》 권15 7년 11월 7일 기묘 1번째 기사. [9]
  10.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 이런 시각이 어느정도 드러나는데 연회때 태종이 정종을 껴안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욕심을 가지지 말라는 투로 협박(?)한다.
  11. 조선 후기는 승정원 일기의 존재덕분에 실록에서 비롯된 역사인식을 재고하게 된 케이스가 꽤 있는데 조선 전기는 승정원 일기가 소실되어 그게 힘들다.
  12. 게다가 이 설이 맞다는 가정에서 생각해보면, 태종이 정몽주를 추숭한 일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생각해보면, 태종이 만약 정몽주 격살을 주도했다면 정몽주 추숭은 군신간에 충의를 강화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동시에 태종 자신의 정당성 손상이라는 리스크를 감수해야만 한다. 그러나 선죽교에서의 사건을 주도한 인물이 정종이었다고 하면, 태종의 정몽주 추숭은 이런 모순에서 태종이 비교적 자유로웠다는 의미이며 동시에 정몽주를 죽인 정종의 정당성을 상당히 실추시킬 수 있는 한 수였던 셈이다. 실제로 정몽주 추숭은 태종의 즉위 원년에 이루어졌다.
  13. 태종이 택현을 통해 세종을 즉위시켜 자신의 즉위까지 택현으로 포식한 과정, 양녕의 비행을 일부러 드러내고 그를 몰아붙인 상황은 최승희의 논문 太宗末 世子廢立事件의 政治史的 意義와 太宗朝의 王權과 政治運營體制, 윤정의 논문 태종 18년 開城 移御와 한양 還都의 정치사적 의미를 참고
  14. 물론 언제까지 택현의 명분아래 폐세자를 거듭할 순 없으니 세종은 자신의 후계자(문종)를 누가봐도 완벽한 차기 국왕으로 육성하고 세손까지 자기 살아 생전에 정해놓는다.
  15. 세종이 벌인 일이긴 하나 정종이 사망할 때 태종이 상왕으로 실권을 행사하고 있었다는걸 감안하면 누구의 의중일지는 뻔하다.
  16. 위에서 언급한 정몽주 주살 주체가 정종이라는 설 또한 논파의 여지가 많다. 당시 정몽주를 처단할 명분이 부족해서 전전긍긍하던 이성계와 달리 이방원은 그를 사람들이 보는 길거리 한가운데서 죽였다. 이는 당시 이성계의 부하들에게 이방원이 눈도장을 찍게되는 계기였으며 그의 지지기반도 올라가게 된다. 반면 이성계는 어쨌거나 그 사건의 총 책임자였기에 여론의 비난을 받게되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과 같이 이성계와 이방원의 갈등이 여기서 시작이 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17. 조선 중기 명시인 차천로의 아버지 차식의 얘기다. 차식 본인도 명문장가였으며, 아들 농사를 잘 지어 차씨 부자가 서로 문명을 떨쳤다. 차식이 정종의 제사를 정성스레 치르고 잠시 잠에 들었는데 꿈에 나타난 공정왕(정종)이 고마움을 표시하며 보답을 약속했다. 얼마 후 차식이 노모의 병환을 간병하기 위해 귀향 중, 갑자기 수리 한마리가 큰 물고기 한 마리를 떨구고 사라졌는데 공교롭게도 노모의 병에 즉효인 가물치였다고 한다.
  18. 《태종실록》 권25 13년 6월 19일 병인 2번째 기사. [10]
  19. 태조 왕건에서 신강으로 출연하기도 한 배우이며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영화판에서 성인 한병태 역으로도 출연했었다. 2000년 11월에 간암으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