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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熙祚. 호는 춘봉(春峰). 한국의 작/편곡가, 지휘자. 한국의 국악과 뮤지컬 발전에 기여한 본좌 음악인으로 손꼽힌다.
1920.11.21~2001.9.4
1 생애
서울특별시 종로구 내수동에서 태어났고, 매동공립보통학교와 동성상업학교를 졸업했다. 상업학교 재학 시절 하모니카를 독학으로 익혀 야마하 하모니카 합주단에서 연주하기도 했고, 졸업 후 한성은행(이후 조흥은행)에서 은행원으로 근무하면서 김흥조에게 피아노, 안성교에게 비올라, 안병소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다. 이외에 화성학과 대위법을 독학으로 익혔고, 임동혁과 김순남에게는 작곡을 배웠다.[1]
1944년에는 징병을 피하기 위해 일본인이 경영하던 군수산업체인 조선전공회사에 경리 직원으로 입사했고,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초에는 철도국 직원 자격으로 조선호텔 실내악단에서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면서 실내악 연주 경험도 쌓았다. 해방 후에도 명동의 7인조 경음악 합주단에서 피아노를 연주했고, 1946년에는 현제명이 창단한 고려교향악단에서 비올라와 콘트라베이스 주자 겸 편곡자로 활동했다. 고려교향악단이 내분으로 와해된 뒤에는 김생려가 창단한 서울관현악단(현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직계 모체)에서 콘트라베이스 주자 겸 편곡자로, 서울시립취주악단에서는 튜바 주자로 활동하는 등 상당히 다양한 분야에서 연주 경험을 했다.
1948년에 더 나은 수입을 위해 육군 정훈음악대(군악대) 장교 모집에 지원해 6기생으로 임관했고, 광주에 주둔하던 제5여단 군악대장으로 부임했다. 6.25 전쟁 발발 후에는 육군본부 군악대장으로 이임했고, 1957년에 중령으로 퇴역할 때까지 재임하면서 여러 행진곡과 군가를 작곡했다. 동시에 김소희와 박귀희 등 판소리 명인들을 군악대 문관으로 초빙해 이들의 음악을 채보하고 편곡하는 등 전통음악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전역 후에는 신흥대학교(현 경희대학교)의 작곡과 전임강사로 부임해 작곡 이론과 취주악을 가르쳤고, 이듬해인 1958년에는 KBS의 방송 전용 소편성 관현악단인 KBS 스몰 오케스트라[2]의 상임 지휘자로도 부임했다. 이 기간 동안 민요를 비롯한 전통음악들을 채보하고 편곡하면서 좋은 반응을 얻었고, 서양 관현악과 국악기들인 단소, 피리, 가야금의 협연 작품과 민요의 합창 편곡들인 '울산아가씨', '아리랑', '베틀노래', '옹헤야', '한강수타령' 등을 지휘/방송했다.
1962년에는 신흥대 강사직에서 퇴임해 정부가 갓 조직한 뮤지컬 등 무대예술 공연 단체인 예그린악단에 작/편곡자로 들어갔고, 여기서도 '신고산타령' 과 '경복궁타령' 을 비롯한 민요들을 합창으로 편곡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1963년에는 국악예술학교(현 국립국악고등학교) 양악 교사로도 활동하면서 지영희, 성금연, 신쾌동, 박녹주, 박초월 등 당대의 ㅎㄷㄷ한 국악 명인들과 자연스레 어울리게 되었고, 이들의 연주를 듣고 채보하는 등 계속 전통음악 자료의 수집에 몰두했다.
1965년에는 한국 최초의 국악관현악단인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이 창단되자 작/편곡자로 기용되었고, 여기서도 여러 민요를 국악관현악으로 편곡했다. 1968년에는 지휘자로도 부임해 악단을 이끌었고, 같은 해 예그린악단의 의뢰로 뮤지컬 '대춘향전' 을 작곡해 초연하면서 본격적으로 뮤지컬 작곡에도 뛰어들었다. 1974년에 예그린악단이 국립가무단으로 재창단되면서 초대 단장으로 부임했고, 여기서도 '대춘향전' 의 개정판이나 '종이여 울려라', '시집가는 날', '상록수', '심청전' 등 전통 소재에 기초한 뮤지컬을 계속 작곡했다.
이외에 '심청' 과 '춘향전' 등의 무용음악과 '처용' 등 창작 발레의 음악도 작곡했고, 판소리 '심청가' 의 창과 국악관현악을 위한 편곡도 남겼다. 1982년에는 서울예술대학 국악과 교수로 부임해 1987년까지 재직했고, 같은 해 국악관현악을 위한 합주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1986년에는 아시안 게임 개막식의 음악 작곡과 총감독을 맡았고, 1988년의 서울올림픽에서도 개막식과 폐막식의 매스게임 음악을 작곡했다.
이후 주로 국악관현악 작품들의 작곡에 주력했고, 특히 1999년까지 작곡한 11곡의 합주곡은 지금도 한국 국악관현악단들의 기본 연주곡으로 자리잡고 있다. 2000년까지 계속 작/편곡 활동을 했지만, 이후 노환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원주기독병원에서 투병 중 향년 82세로 별세했다. 유해는 강원도 원주시의 귀례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2 주요 작품들
국악관현악
산조 주제에 의한 합주곡 (1977)
합주곡 제1번 (1982)
합주곡 제2번 (1983)
합주곡 제3번 (1987)
합주곡 제4번 (1988)
축전 1988 (1988)
플루트 독주와 국악 합주를 위한 무용환상곡 (1989)
박상근 산조 주제에 의한 합주곡 (1990)
김죽파류 산조에 의한 가야금 협주곡 (1991)
윤윤석류 산조에 의한 아쟁 협주곡 (1991)
한범수류 산조에 의한 대금 협주곡 (1992)
서울 정도 600주년 기념 국악 칸타타 '서울교성곡' (1993)
합주곡 제5번 (1993)
가야금 3중주를 위한 협주곡 (1994)
농부가 주제에 의한 사시풍경 (1994)
합주곡 제6번 (1994)
서용석류 대금 산조와 관현악 (1995)
성금연의 흥을 주제로 한 가야금 협주곡 (1995)
합주곡 제7번 '자작 주제에 의한 여섯 개의 변용' (1998)
합주곡 제8번 '다심, 다악, 다선 삼매' (1998)
합주곡 제9번 '영남의 봄' (1998)
합주곡 제10번 '축전 서곡 1999' (1999)
합주곡 제11번 '짓밟힌 우리소리 움티운 찬가' (1999)
서양관현악/국악관현악+서양관현악 협주
피리와 관현악을 위한 민요 스케치 (1957)
단소와 관현악을 위한 수상곡 (1958)
성금연류 가야금 산조와 관현악 (1958)
한/양 관현악 합주를 위한 '봄의 찬가' (1988)
한/양 관현악 합주를 위한 '아름다운 농촌 풍경' (1997)
무용음악/발레
무용음악 '종송(鍾訟)' (1967)
무용음악 '심청' (1975)
발레 '처용' (1981)
뮤지컬
대춘향전 (1968. 1974 개작)
종이여 울려라 (1974)
시집가는 날 (1974)
상록수 (1975)
심청전 (1976)
태양처럼 (1976)
달빛 나그네 (1978)
신데렐라 (1980)
양반전 (1986)
아리랑아리랑 (1988)
영화음악
젊은 표정 (이성구 감독. 1960)
귀거래 (이용민 감독. 1960)
종자돈 (김진규 감독. 1967)
장군의 수염 (이성구 감독. 1968)
당신 (이성구 감독. 1969)
여진족 (이규응 감독. 1969)
결사대 작전 (고영남 감독. 1969)
마님 (주동진 감독. 1970)
내 아내여 (유현목 감독. 1971)
분례기 (유현목 감독. 1971)
춘향전 (이성구 감독. 1971)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 (주동진 감독. 1972)
을화 (변장호 감독. 1979)
군가/행진곡
대한 국군의 자랑
대한의 방패
개선행진곡
한글 노래
승공의 노래
6.25의 노래
현충일의 노래
나의 조국
충성을 다하라
묵념곡
건전가요
잘 살아보세
조국의 찬가 (흑역사)
민족의 노래 (흑역사) 등
체조/체육음악
국민체조 음악
전국체전가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개막식 음악
1988 서울 올림픽 개/폐막식 매스게임 음악
여타 편곡
판소리 '심청가' 와 '춘향가' 의 창과 국악관현악 편곡
뮤지컬 '지붕위의 바이올린' 의 서울시뮤지컬단판 편곡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 의 신시 뮤지컬컴퍼니판 편곡
민요의 합창과 서양관현악용, 합창과 국악관현악용 편곡 다수
3 수상 경력
제4회 방송문화상 음악상 (1961)
제1회 청룡영화상 음악상 (1963)
옥관문화훈장 (1991)
뮤지컬의 날 공로상 (1993)
MBC 가곡 공로상 (1994)
어린이문화예술원 반달동요대상 (1994)
4 음악적 특징
보통 작곡을 음악대학이나 음악원에서 전공하고 일선에서 활동하는 이들과 달리 주로 연주 분야에서, 그것도 대부분 독학이나 개인 교습으로 배우고 시작한 인물이라 '음악은 듣기 쉬워야 한다' 는 철칙을 고수한 것으로 유명하다. 다만 김희조가 본좌로 평가받는 가장 큰 이유는, 서양음악을 배우며 커리어를 시작한 음악인이 당시로서는 드물게 한국의 전통음악에 엄청난 관심을 갖고 이곳저곳에서 긁어모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창작에 응용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성향은 작곡 스승이었던 김순남에게 이어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김순남도 월북 전 함화진을 비롯한 국악인들에게 국악 이론을 배우거나 민요 등을 채보하면서 창작에 응용하는 등 민족적인 요소를 상당히 중시했다. 다만 거기서 더 나아가 전위적인 경향까지 보였던 스승에 비해, 김희조는 오히려 음악이 어려우면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기 쉽다고 판단해 통속성을 더 중시하면서 국악과 양악의 요소를 긴밀히 접목시키는데 집중했다.
한국전쟁 직후나 1960년대까지만 해도 양악계와 국악계는 서로 선을 그어놓듯이 나뉘어져 있었고, 적대하는 관계까지는 아니었더라도 소 닭 보듯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김희조의 경우 군악대장 시절부터 일제강점기 시절 명창이나 명인들이 녹음한 판소리나 시나위 등을 비롯한 전통음악 SP를 모으고 국악인들을 군악대에 편입시키는 등 상당히 적극적으로 국악계와 소통했고, 이렇게 형성된 경험이 이후 국악관현악의 태동기와 발전기에 쏟아낸 작품들에 녹아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뮤지컬의 한국 유입 과정에서도 외국의 명작을 그대로 공연하는 것이 아닌, 한국적인 소재를 통한 독자적인 뮤지컬 창작 노선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한국 뮤지컬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로도 평가받고 있다. 특히 '대춘향전' 이나 '시집가는 날' 은 김희조 사후에도 계속 반복 상연되고 있는 작품으로 남아 있다.
합창단에서도 김희조의 민요 편곡 합창은 지금도 정평있는 레퍼토리로 계속 애창되고 있고, 군악대의 연주 곡목에도 지금까지 김희조 작곡의 군가나 행진곡, 편곡 작품이 들어있는 등 다방면에서 이 사람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음악에 문외한이거나 전공하지 않은 이들이라도 학창 시절 국민체조 음악에 맞추어 체조를 했거나 '잘 살아보세' 의 가락을 흥얼거리는 등 알게 모르게 이 분의 음악과 자주 마주칠 수 있다.
비록 통속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여러 실험적인 시도에는 미온적이었다는 비판도 있고, 5.16 이후의 군사 정권이 주도한 문화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는 이유로 삐딱하게 보는 시선도 없지는 않지만 여전히 국악계 인사들을 비롯한 많은 음악인들은 김희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다만 '조국의 찬가' 와 '민족의 노래' 같은 건전가요는 차지철이 작사를 맡은 바람에 공인된 흑역사 취급을 받고 있다(...). 아니 그 전에 차지철이 진짜 작사를 한 건지 아니면 할 능력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예그린악단에 들어가 뮤지컬에 전념하기 전에는 오페라 지휘자로서도 소소하지만 한국 오페라 역사에 업적을 남겼는데,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 와 플로토의 '마르타' 한국 초연을 지휘한 인물도 김희조였다.[3] 이후에도 70대 후반이 될 때까지 계속 정기적으로 지휘대에 올라 자작곡들을 지휘하는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렇게 다방면에서 발자취를 남겼음에도 음악 전공자 외의 일반인들에게는 정작 존재감이 덜한 편인데, 세기가 넘어간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동명이인 여성 아나운서 때문에 더 공기화 되는 듯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구글링을 해보면 이 분보다 아나운서 얘기가 더 많이 나온다...후새드.
5 사생활
군악대장을 역임한 경력이 있어서 매우 완고하고 고압적인 인물로 여겨지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다지 화를 내지 않는 온화하고 겸손한 성품이었다고 한다. 작곡할 때는 영감이 안떠오르면 시간이 언제든 그냥 잤다가 삘꽂혔다 싶으면 마찬가지로 밤이든 낮이든 계속 악보를 그렸다고 하는데, 그러면서도 마감 기한은 거의 어기지 않아서 높으신 분들이 좋아했다고 한다.
다만 일에 치여서 살다 보니 담배도 하루에 한두 갑 정도 피웠다고 하는데, 깊이 들이마시지는 않았고 그냥 뻐끔거리는 정도였다고 한다. 이외에는 군악대장 시절 미군들과 어울리면서 익숙해진 초콜릿이나 오레오, 설탕과 프림을 듬뿍 넣은 커피(소위 '다방커피') 같은 달달한 군것질 거리로 스트레스를 풀었다고 한다.
자식 농사도 비교적 잘 지었는데, 1946년에 결혼한 부인 지정숙과 평생 좋은 금슬을 유지하면서 딸 하나와 아들 둘을 두었다. 이들 중 큰아들인 김은기는 의사로, 작은아들인 김덕기는 성악 반주자 겸 오페라 전문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외손녀인 박윤영도 외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뮤지컬을 비롯한 무대 작품의 작/편곡자와 대본 작가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