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아르타크세르크세스왕의 술 관원이였던 유대인이다. 하칼야(하가랴)의 아들로 기록돼있다. 느헤미야(נחמיה)라는 이름은 야훼에게 위로받는다는 의미이다. 그의 헌신적인 예루살렘 복구얘기를 다룬 동명의 구약 성경이 있으며 에즈라가 기록했다고 전해진다.
2 내용
페르시아 왕중왕 앞에서 술담당관리로 있던 중 지인에게 고국 예루살렘의 처참한 광경을 전해들은 느헤미야는 근심하다가 왕 앞에서 암울한 표정을 지어보인다.[1] 이에 왕이 왜 그러냐고 물어보고 느헤미야는 자신의 조국의 수도가 처한 곤경을 얘기한다. 다행히 일이 잘 풀려 왕은 그를 유다총독으로 임명하고 장교들과 기병부대를 붙여주기까지 한다.
이어서 느헤미야의 정적들이 등장하고 누가누가 성벽을 복구했는지 구간마다 나온다. [2]
성벽 복구 과정에서, 예전 앗시리아의 침략으로 인해 생겨난, 이민족과의 유대인들 사이의 혼혈족인 사마리아 족이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합류하고 싶다는 의사를 보이지만 느헤미야는 거절한다. 이러한 태도를 취했다는 것에 대해 "유대인들의 민족 순혈주의"로 보는 시각도 있으나 이는 다분히 현대의 반유대적 사고로만 바라보는, 대단히 편향적인 관점이다. 바벨론 유수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그 지역에 원래 있던 혼혈된 사마리아인들 및 모압이나 암몬인들과의 알력에 곧바로 부대껴야 했는데, 그 상황에서 믿을 수 없는 데다 관점이나 생각도 전혀 다른 주변 족속들을 결집의 핵심이 될 성전 건설에 참여시킨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 역사에 비유해 보자면, 친일파들이 독립 기념관이나 백범 기념관 건설, 유지 혹은 관리를 요구하고 또 참여 의사를 밝히는 셈. 당연히 의심부터 드는 게 자연스럽다. 느헤미야가 딱히 민족주의적이거나 골수 순혈 분자라서 저런 행동을 취한 게 아니다.
또한 느헤미야는 생각하는 바와는 달리 상당한 현실주의자였다. 느헤미야의 전임자라고 할 수 있는 에즈라는 이방민족과 통혼한 유대인 가정들을 강제로 이혼시키고, 그 사이에서 나온 혼혈아들을 강제로 부친들과 생이별시켜서 그 당대에도 가정 파괴범으로 유대인들에게조차 욕을 먹고 있었다. 느헤미야는 이런 현실을 감안하여, 이미 혼인한 가정의 현 상태는 인정하고 그 사이에서 나온 아이들은 반드시 히브리어 교육을 시킬 것을 권장하는 선에서 끝낸다. 물론 일종의 인민 재판 비슷한 것을 열어 지도층들을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두들겨 팬 장면은 지금 기준으로 봐도 센세이셔널하긴 하지만(...), 비록 자기 울분을 못 이기고 폭발하긴 했어도 실제로 이혼 조치를 취하진 않았다.
오히려 이 대목에서 '유대인'이 혈통적인 범위가 아니라 매우 종교적인 범위가 될 단초가 보인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에즈라 때까지만 해도 혈통을 매우 중시했지만 느헤미야는 그렇지 않았다.[3] 이 경향이 굳어지는 것은 훗날의 마카베오 시대. 유일신교로 국민을 단결시키는 이 아이디어는 얄궂게도 기독교를 통해 로마에서 실천된다.
- ↑ 고대 페르시아에서는 이게 사형에 처해질만한 행동이었다고 한다. 일종의 불경죄였다고.
- ↑ 참고로 이때 성벽을 복구하면서 언제 적들이 훼방을 놓을지 몰라 일꾼들은 제각기 무장하고 공사에 임한다.
- ↑ 본래는 종교적인 범위가 맞다고 하는데, 적어도 이 시기엔 그렇지 않았다. 모세오경에 외국인이 유대교로 개종한 경우 유대인으로 취급했다고 하지만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었으며, 개종해도 자손 몇 대까진 온전한 국민 취급을 받기가 매우 힘들었다.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지한 것은 이방인이 자기 종교를 유지한 상태에서 혼합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고 보는데 이 관점도 오류다. 느헤미야는 치사하게 외국인 처나 며느리에게 개종을 강요하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