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나크의 예언서(네비임) 후기 | ||||
예솨야후 | 예레미야 | 에제키엘 |
영어: Book of Isaiah
히브리어: ספר ישעיה
1 개요
유대교 경전,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구약 성경 중 예언서의 한 부분. 기원전 8세기 남유다 왕국에서 활동한 예언자의 이름. 히브리어 발음은 '예샤야후(Yeshaʿyahu)'에 가깝지만, 70인역 성경에서 '에사이아스(Ἠσαΐας, Ēsaïās)'로 음역하고 라틴어로 다시 '이사이아스(Isaias)로 다시 옮기면서 '이사야'라는 표기로 전래되었다.
2 내용
아모츠(아모스)의 아들 이사야는 아시리아의 침략으로 북이스라엘 왕국이 망해가고, 남유다 왕국 내에서는 종교적 관용주의가 팽배하면서 흉흉해진 시기를 살았다. 이 당시 종교적 관용주의가 왜 흉흉한 거냐면, 유대 민족이 위기에 빠지면서 야훼 근본주의가 강해지고, 다른 신을 인정하는 것은 외세에 굴복하는 것과 다름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이사야는 유다 왕족으로 추정된다.
이사야서에 나타난 메시지는 암울하고 절망적이며, 정의와 평화가 사멸해가는 상황을 바라보며 강력하게 규탄하고 심판을 경고하면서, 동시에 미래에 열리게 될 새로운 세상, 곧 '공평과 정의의 기초 위에 세워진 생명과 평화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전과 희망을 말하고 있다.
3 구분 및 논란
- 유다와 예루살렘으로부터 열방으로 이르는 공의의 심판의 말씀(1장-35장)
- 아시리아의 예루살렘 침공에 대한 회상과 히스기야 왕에 대한 썰, 그의 자만으로 인한 바빌론의 침공에 대한 예언(36장-39장)[1]
- 이스라엘의 회복과 소망의 밝은 내용, 메시야의 도래, 메시야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를수 있다는 희망의 선포(40장-66장)
39장까지의 내용과 40장 이후의 내용이 확연하게 갈린다. 39장까지는 이스라엘에 닥칠 위험에 대해 엄숙히 경고하는 내용인데 비해, 40장부터는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과 위로를 말하고 있다. 시대적으로 보면 39장까지의 내용과 40장 이후의 내용은 200년의 차이가 난다.
이 때문에 신학계에서는 1~39장을 제1이사야로 보고, 40~55장과 56~66장은 후대의 어떤 사람이 이사야의 이름을 빌려 쓴 제2, 제3이사야로 구분한다. 제2와 제3은 각각 바벨론 치하의 포로시대(6세기 초)와 페르시아 키루스왕 치하(6세기 말)를 다루고 있다. 한국 가톨릭에서 쓰는 성경에서는 이 시각을 따라서 아예 1부, 2부, 3부로 구분을 해놓았다.
가톨릭 신학자들뿐만 아니라 개신교 신학자들 역시 이사야서를 1-39장, 40-55장, 56-66장의 3부분으로 구분한다. (아니 애초에 이걸 이렇게 처음으로 구분한 사람이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인 베른하르트 둠(Bernhard Duhm)이었다.) 이사야서를 이사야 혼자서 다 썼는지에 대해서는 신학자들 사이에서 단일 저작권 견해와 다중 저작권 견해 사이에 논란이 있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의 이사야서는 서로 다른 세 역사적, 신학적 정황을 다루고 있다는 점'[2]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이는 이사야서는 크게 1-39장과 40-66장, 혹은 1-39장/40-55장/56-66장의 2파트 혹은 3파트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각각의 파트는 서로 다른 배경을 깔고 집필이 되었지만 그 모두를 아우르는 하나의 단일 주제 때문에 한 권으로 묶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목회자인 마틴 로이드 존스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필시 이사야서는 각각 다른 때에 설교한 예언들을 모아 놓은 것이지만 하나의 완전한 책이 되었습니다. [3]
다만 이 세 파트를 이사야 혼자서 썼는지, 아니면 2명 또는 3명이 나눠서 썼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이사야서를 몇 명이서 쓴 것이든 최소한 이사야서는 서로 완전히 다른 책이라 볼 수 있을 정도로 주제와 표현 면에서 확연한 차이가 나는 둘 또는 세 개의 파트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대한 근거는 많다.
우선 제1이사야는 아시리아를 언급하는데, 제2와 제3에서는 아시리아가 전혀 등장 안 한다. 그리고 제2와 제3에만 구속자(Redeemer)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리고 제1은 산문체로 장엄한 심판을 말하지만, 제2와 제3은 운문체로 위로와 희망을 주로 말한다. 동네목사가 독후감 써놓고 주석서라고 우기는 책 말고, 아래에 인용된 것과 같이 전문 신학자들이 집필한, 제대로 된 주석서를 읽어보면 다 나오는 내용이다.
역사적인 근거에서 이 책이 제시하려는 논리를 간파하려는 시도를 통해 한 권의 이사야서는 독립된 별도의 세 권의 책으로 분리되었으며(1-39장; 40-55장; 56-66장), 이 책들은 그 이상의 시대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바로 기독교시대까지 수 백년을 거쳐오는 동안에 각각 별도로 영감을 받은 3명의 개인들이나 세 학파들에 의해 공적으로 선포된 말씀에서 기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중략) 현재 해석가들은 우리가 1~39장 안에서 제2이사야서에 있는 내용과 예루살렘 멸망 및 포로생활을 폭 넓게 경험한 데서 영향을 받은 편집자들에 의해서 문학적인 첨가-때로는 산발적이며 또 다른 경우에는 더 포괄적인-가 이루어졌다는 증거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중략) 제 1이사야서의 해석과 제2이사야서의 해석을 선명하게 구별되게 한 것은 본문 40~55장들은 바벨론 포로생활이라는 특정한 상황에서 나타났고, 따라서 그 명백한 지리적, 사회적, 양식비평적(form-critical)인 정체성(identity)은 물론이고, 역사적으로 이사야의 예언으로부터 대략 150년 정도 떨어져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4]
이 책은 이사야가 살았던 수십 년으로 시작하여, 약 3세기에 걸친 하나님의 계획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대화를 증거한다. (중략) 이사야서의 이상의 의도는 역사적인 것이 아니다. 즉, 이사야서의 이상은 주전 8세기와 6세기의 문제들을 정의하고 제시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사야서의 이상은 주전 8세기, 6세기 그리고 5세기의 정황으로부터 자료들을 제출함으로써 주전 5세기의 문제들을 정의하고 제시한다. (중략) 이사야서의 이상은 약 두 시대-전시대와 후시대-에 걸쳐 이루어진 책이다. 이 점에서 제1이사야와 제2이사야의 구분은 적절하다. 그러나 이 구분이 두 가지의 다른 작품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제2이사야는 제1이사야를 전제하고, 제1이사야는 제2이사야를 예상한다. 문학적 형태와 구조는 한 작품이다. [5]
이사야서 1-66장의 저자가 한 사람인지 혹은 두 사람, 세 사람인지는 19세기 말 베른하르트 둠(Bernhard Duhm) 이래로 학자들의 활발한 논의의 대상이 되어 왔다.1-39장은 대체로 앗수르 제국의 위세를 경험하던 청중에게 선포된 예언들이고, 40-66장은 바벨론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의 위세를 경험하던 청중에게 선포된 예언처럼 읽힌다. 과연 주전 8세기 예언자가 당대의 회중에게 약 200년 뒤의 일에 관하여 예언했겠는가 하는 이유 때문에 역사비평적인 학자들은 40-66장을 제2이사야(40-55장)와 제3이사야(56-66장)로 구분한다.
그들은 이사야 40-66장은 포로기가 끝날 무렵에 자신을 주전 8세기 예언자 이사야의 신학적 후예라고 자처하는 한두 예언자(집단)에 의하여 선포되었거나 저작되었다고 판단한다. 이 경우 40-66장에 기록된 예언적 설교의 청중은 바벨론으로 끌려간 바벨론 포로들이거나 그들의 후예였다(겔 37:11). 이런 역사적 정황상의 차이(바벨론 포로 전 상황과 바벨론 포로 후 상황) 외에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들이 1-39장과 40-66장(40-55/56-66장)을 구분하는 것을 지지한다.
첫째, 언어적 어휘상의 차이로서 40-66장에는 '앗수르'라는 단어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이사야'라는 단어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둘째, 신학적, 이데올로기적 차이로서 1-39장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라는 표현이 주로 사용되고, 40-66장에서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구속자'라는 표현이 주로 사용된다. 셋째, 문체상의 차이로서 1-39장에는 부분적인 전기적 이야기체 문체와 장엄한 심판 문체가 주로 사용되고, 40-66장은 대부분이 운문체 예언이며 위로와 희망을 선포하는 시문들이 주를 이룬다. 후자는 예언 선포의 역사적 맥락이 거의 누락되어 있는 반면에, 전자에서는 상당 부분에서 명시되어 있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1-66장을 하나의 이사야서로 묶은 것은 신학적, 이데올로기적 연속성이다. 시온에 대한 야웨 하나님의 계약적 투신과 사랑(hesed=covenantal devotion), 즉 '시온을 향한 야웨의 계획'이 이사야서를 응집시킨다. 이 큰 공통점 외에도 크고 작은 신학적 연속성이 있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공평과 정의의 문제). (중략) 얼마나 많은 저자가 현재 이사야서의 마지막 저작 과정에 참여했는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적어도 현재의 이사야서는 서로 다른 세 역사적, 신학적 정황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1-66장의 저자가 한 사람이든 두 사람이든 현재 이사야서가 가지고 있는 심오하고 광대한 신학적 가치는 조금도 손상되지 않는다. (중략)
베른하르트 둠 이래 계속된 자료비평적, 양식비평적 그리고 편집사적 연구들이 이사야 1-66장을 1-39장, 40-55장, 56-66장으로 나누어 읽음으로써,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도저히 포착할 수 없었을 신학적 자산을 발굴하는 데 상당히 기여했다고 본다. 1-39장이 주전 8세기 역사적, 신학적 맥락과 조응하고, 40-55장이 고레스 칙령 전후 시기의 포로살이 공동체의 역사적, 신학적 맥락과 조응하고, 56-66장은 포로귀환 공동체의 시온 재건을 위한 분투와 좌절을 그리고 있다고 본 역사적, 비평적 읽기는 특히 이사야 40-66장의 메시지를 거의 원음(原音)으로 재생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만일 40-66장이 주전 6-5세기의 예언자가 선포한 동시대적 메시지가 아니라, 주전 8세기 이사야의 미래예언(fore-telling/혹은 fortune-telling)이라면, 40-66장의 원음 메시지를 생생하게 복구하지 못할 것이다. (중략)
제 2, 3 이사야가 있었느니 혹은 40-55장, 56-66장이 한때 독립적으로 존재하였는지의 여부를 완전히 논증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40-55장, 56-66장이 각각 주전 6세기, 5세기를 반영하거나 전망한다고 읽을 때에, 주전 8세기 예언자가 200-300년 전에 주전 6-5세기 상황에 대해 미리 예언하였다고 믿고 읽을 때보다, 역사창조와 하나님 말씀 사이의 역동적 관계를 훨씬 더 강력하게 포착할 수 있다고 본다. 만일 40-66장도 주전 8세기 이사야가 직접 발설한 예언들이라고 믿으면, (중략) 말씀과 당대 역사 사이에 작용하는 역동적인 조응 관계를 파악하는 데는 별로 도움이 안 된다. 바벨론 포로살이도 시작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바벨론 포로살이가 끝났으니까 위로를 받으라'고 외치는 이사야 40장이 어떤 역동적인 반향사역(反響事役)을 일으킬 수 있었을까? 도대체 주전 8세기에 그 위로의 말씀들과 고레스 출현의 세계사적인 의의를 설명하는 역사신학적 강화(講話)들이 무슨 목회적, 신학적 동력을 낼 수 있었을까? 이사야 40장 이하도 주전 8세기 이사야의 진정성 있는 예언이라고 주장한다면, 40-66장은 거의 200-300년 후에 올 청중, 즉 이사야 당시 기준으로 볼 때 유령 같은 청중에게 외친 비의(秘義)에 가득 찬 미래 예견으로 평가절하될 것이다.
반면에 이사야 40-66장이 주전 8세기 예언자의 예언을 자신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었던 주전 6-5세기의 예언자적 인물 혹은 신앙공동체의 파생적 예언이라고 본다고 해서, 이사야 40-66장의 권위가 추락하는가? 오히려 주전 8세기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이 시대를 넘어 역사를 해석하고 창조하는 권능을 발휘하는 과정을 친히 목격한 사람들이 이사야의 원메시지를 창조적으로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40-66장이 형성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 27장들의 신언성(神言性)과 계시성이 약화된다고는 보지 않는다. [6]
4 신약과의 연관성
나중에 마태오 복음서 기자가 이사야서 7장 14절[7]을 예수의 탄생을 예언한 것이라고 단장취의를 했기 때문에 흔히 이사야서를 성경 전체의 축소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실제로 이사야서의 메시지를 보면 메시아 예언과 성경 전체에서 핵심을 이루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전이 잘 드러난다.
또, 53장은 분명히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예언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이사야서 전체에 흐르는 메시지가 미래에 이 세상에 오게 될 메시아와, 이 메시아를 통해 구현될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십분 담아내고 있다. 예수 또한 자신이 메시아임을 선언하기 위해 이사야서 61장 1~2절을 낭독했다.
이사야서는 집필 당시에는 유대 민족에게 주어진 책이므로 당시 이스라엘의 역사적, 정치적 배경을 깔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는 이를 유대인뿐만 아니라 전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이야기로 받아들인다. 예를 들어 전반부에서 사회적, 경제적 정의가 무너진 현실을 강력하게 규탄하는 것은 어떤 사회에서든 그대로 적용되며, 전반부에서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등장하는, 미래에 열리게 될 새로운 세상, 곧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과 비전도 전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해당되는 것이라고 기독교에서는 해석한다. 여기에 대해 마틴 로이드 존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지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극심한 박해를 겪었습니다. 이들의 입을 다물게 하려고 가능한 모든 일이 자행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선지자들은 계속 외쳤으며 소수로, 때로는 완전히 혼자 남기도 했습니다. 자기들을 반대하는 말을 들으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했습니다. 이런 일은 인류 역사의 오랜 기간 동안 계속되어 왔고 오늘날까지 여전히 있는 일입니다.(중략)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그게 대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 그 사람들이 누구죠? 예전에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고 다시 들어볼 일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나하고 아무 상관이 없잖습니까? 오늘날 우리가 세상을 사는 데 문제, 어려움, 골칫거리가 뒤덮여 있지만 이사야 1장의 모든 이야기가 현대인들과 무슨 연관이 있다는 겁니까? 옛 역사 한 장면을 훑어 보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는 거죠?"
이는 분명 정당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물론 그에 대한 답은 '우리가 여기서 다루는 내용이 이 이사야 1장이나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등의 시대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중략) 역사상 아주 중대한 이 시점에 죄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그분의 말씀은 고통과 곤경에 처한 인류 전체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중략) 저는 여러분에게 어느 한 시점에 이사야에게 설교를 들었던 이스라엘 자손들이 현대의 인류와 똑같은 형편에 있음과 그 나라에 해당되던 것은 지금 모든 개개인에게도 해당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자 합니다. [8]
결과적으로 이사야서 전체의 주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암울하고 불의한 현실에 대한 고발과 규탄 및 심판에 대한 경고.
2. 꿈이고 희망이고 없는 암울한 상황 속에 나타날 메시아에 대한 예언.
3. 메시아에 의해 구현될 새로운 세상, 즉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전.
- ↑ 36장~39장은 열왕기 하권의 히스기야 왕 부분(열왕기하 18장~20장)을 거의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 ↑ 김회권, 성서주석-이사야 I, 대한기독교서회, 2006, p. 38
- ↑ 마틴 로이드 존스, 이운연 옮김, 이사야 1장 강해, 기독교문서선교회, p.9
- ↑ 크리스토퍼 사이쯔, 한미 공동 주석편집, 현대성서주석-이사야 1~39, 한국장로교출판사, 2003, pp. 31-35
- ↑ 존 와츠, 강철성 옮김, World Bible Commentary-이사야 (상), 도서출판 솔로몬, 2006, pp.35-57
- ↑ 김회권, op. cit. pp. 37-39; 81-82
- ↑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처녀'에 대한 오역 논란은 여기를 참고.)
- ↑ 마틴 로이드 존스, op. cit. pp. 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