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대
게르만족은 원래가 호전적인 야만족이었다. 그 이미지의 역사는 고대 게르만족이 로마 제국군을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개발살 내면서 시작되었지만, 그 이전에도 현프랑스 일대의 갈리아인들이 그들의 잔인함과 군사적인 강력함에 두려워했다고 하며, 그 때문에 로마 제국의 힘을 빌리려다 로마에게 먹히는 단초를 제공했다.[1]
2 중세
게르만족은 강력한 로마군에 패배하면서도 수에보 족, 반달 족, 서고트 족 등은 라인강을 도하해 속속 로마제국을 침범했고, 결국 3세기에 와서는 로마는 쇠퇴하고 게르만족으로 주도권이 넘어 갔다. 여기서 착각하지 말아야 할 점은 게르만족은 단일조직이 아니라 여러 부족을 통칭해서 말하는 것이며, 개별 부족의 패배는 곧 게르만족의 전체의 패배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동서 로마가 분리되고 410년에는 최초로 로마가 약탈당했다. 쉽게말해 지금으로 치면 최강대국인줄 알았던 미국이 수도가 약탈당했다는 거나 다름없는 얘기. 서고트족을 수차례 격퇴했던 스틸리코가 귀족들의 모함으로 처형되자 서로마는 결국 게르만족에게 멸망하고, 유럽은 게르만족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게르만 족중 반달 족은 스페인을 거쳐 북아프리카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다른 곳의 게르만족은 대부분 현지인에 동화되었으나, 독일지방에 남은 게르만족은 훗날 독일민족의 조상이 되었다.
영국과 북유럽을 제외한 서유럽 전역을 손에 넣은 프랑크 왕국은 게르만족의 일파인 프랑크족의 국가였으며, 샤를마뉴(카를 대제) 이후 프랑크 왕국이 분리되자, 동프랑크는 현재의 독일, 서프랑크는 프랑스가 된다. 그리고 동프랑크는 "신성로마제국"이라고 로마를 자칭한다.
중세 때는 신성 로마 제국이 안정되지 못해 독일군의 위세를 떨치지는 못했지만,(아예 황제군과 황제를 포함한 각 제후들의 군대가 따로 존재했다.) 이건 당시 유럽 국가면 어느쪽이나 마찬가지. 그러나 신성 로마의 황제는 대대로 독일 내 입지를 다지기보다 이탈리아나 십자군 전쟁 쪽에 신경을 쏟느라 내실을 다지지 못하고 신성 로마 제국의 분열을 초래한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 이후 독일인 기사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튜튼기사단이 동유럽을 석권하며, 현재의 칼리닌그라드 일대에서 전 발트 3국을 아우르는 거대한 기사단 국가를 건설하여 위세를 떨쳤다. 여기에 더 머무르지 않고, 계속 동진하다가 결국은 현재 에스토니아 지방에서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에게 패하여 더이상 동진할 수 없었다.
이후 1410년 폴란드-리투아니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기사단 국가는 몰락하고 1525년 호엔촐레른 가문의 기사단장이 루터파 개신교를 받아들여[2] 호엔촐레른 가문이 이끄는 프로이센 공국이 되었고 후에 대가 끊기면서 호엔촐레른 본가인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과 합쳐져 프로이센 왕국의 기반을 닦았다.
3 근대
실질적인 독일 강군의 신화는 독일이라는 전체지역이라기 보다는 18세기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2세(프리드리히 대왕)의 군사 개혁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프리드리히의 군대는 이후 근세 유럽국가의 모델이 되었...지만, 사실 프리드리히 시대에 7년전쟁에서 오스트리아-러시아-프랑스- 작센- 스웨덴 연합군에게 나라가 사면초가도 모잘라서 오면초가에 몰렸지만 예카테리나 여제가 사망하고 독빠로 유명한 표트르 3세가 즉위해 전쟁에서 이탈하면서 기사회생, 오스트리아를 쳐발라버리고 위기에서 탈출한다. 프리드리히 대왕시절 프로이센군은 병력의 규모에선 프랑스 러시아에 뒤지지만 병력의 질은 최강이었다. 특히나 혹독한 훈련으로 사격 속도가 빨라서 다른나라 군은 숙련된 병사가 1분에 2번정도 였지만 프로이센군은 1분에 3번씩 사격할 정도로 단련을 시켜놨기 때문에 적은 병력으로도 많은 수의 적군을 물리치는것이 가능했다. 또한 종대 횡대 전환과 행군능력도 다른 나라 군대에 비해 혹독한 훈련으로 단련시켜놨기에 비슷한수 또는 그보다 많은수의 적군을 빠른 기동으로 격파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왕이면서 장군인 탓에 명령체계가 간소했고 군제면에서도 포병과 기병대의 운용에 다른나라에 까지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시절 부터 프로이센 군대 하면 유럽에서 최정예로 꼽히게 된다.
이후 나폴레옹 전쟁에서는 프랑스에게 연전연패하며 라인강 유역의 영토를 깡그리 빼앗기는 등 완벽하게 패배했다. . 만회하기 위해 샤른호르스트개혁으로 장교단에 부르주아나 평민을 받아들이고 프랑스를 모방하여 징병제를 실시하면서 군을 재건한 끝에 결국 1813년부터 해방전쟁에 돌입하여 1815년 블뤼허 원수 등의 지휘하에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군과 힘을 합쳐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게 승리한다.[3] 물론 다른 나라도 폭도들 하는짓 우리도 따라해야하냐란논란끝에 따라하면서 비교우위는 무너진다. 한편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나서 프로이센 등지에선 다시 상비군으로 돌아가는데 전통적인 국왕에 충성하는 군대와 달리 새로운 병력에 불순세력(?)들이 군에 침투할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개혁으로 먼저 18세기 프리드리히 대왕시절 부터 장수한 똥별들을 대거 퇴역시키고 징병제를 실시하는데 이는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다른나라 군대도 마찬가지였지만 다른 중요한 개혁 내용으로는 육군 일반 참모부 후에 독일군의 핵심역량이라 불리우는 참모체계가 이때부터 시작되며 후에 독일군의 지휘방식으로 유명한 임무형 전술(Auftragstaktik)의 기반이 이때에 닦였다.
이전 까지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엄명으로 장교단에서 부르주아 출신들이 배제 되었지만[4] 이러한 제한이 철폐되고[5] 이후 육군 일반 참모부는 프로이센의 장교중에 핵심 두뇌 인력들이 소수정예로 교육받아 프로이센(독일)군이 이후 2차대전까지 군사강국으로 군림하는데 기반이 되기도 하지만 이러한 뛰어난 능력 덕분에 군의 전반적인 작전을 정치나 외교상의 문제에서 '행동의 자유'를 보장 받기 이르러 군국주의화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6]
이후 보불전쟁에서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군을 섬멸하며 황제를 포로로 잡고,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함락하는 등 대승을 거둠으로써 강군의 이미지를 굳히고, 전쟁에서의 승리로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 제국을 탄생시키게 된다. 몰트케로 대표되는 육군 참모부의 효율성과 능력이 또 다시 확인되고 유럽 각국은 물론 미국 일본에서 까지 프로이센(독일)육군을 연구하고 참모 체계를 모방하는 계기가 된다.
4 제1차 세계대전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초기 서부전선에서 영불 연합군,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군을 상대로 양쪽 전선 모두 선전하였고, 특히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보조가 맞지 않는 러시아군을 섬멸하는 등 대승을 거둔다.
그러나 서부전선에서는 영불 연합군의 반격으로 전황이 고착되어 전쟁이 오래끌게 되고, 동맹인 오스트리아와 오스만 제국군이 어리버리한 탓에 전선이 지나치게 분산되었고, 해군은 유틀란트 해전에서 영국 본국함대(The Home Fleet)의 순양전함군을 상대로 전술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정작 가장 큰 위협인 전함군에는 손해를 입히지 못하고 퇴각, 그 이후로는 손실을 두려워한 나머지 더 이상의 결전을 포기하고 항구에 틀어박혀 히키코모리짓을 하는 등 전황이 점점 나빠진다. 그러자 스위스에 망명 중이던 레닌을 러시아로 돌려 보내 혁명을 유도하여 러시아를 전쟁에서 이탈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미국의 참전이 결정되자 미군 주력이 도착하기 전에 어떻게든 영불 연합군의 항복을 받아내려고 무리한 대공세를 하다가 실패, 이후 서부전선의 붕괴가 시작되고 자살에 가까운 출동 지시에 분노한 수병의 반란, 이어진 혁명으로 결국 전쟁에서 패배하고 만다.
5 전간기
1차대전의 패전으로 독일제국은 해체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섰다. 전간기에는 베르사유 조약으로 군의 규모가 10만으로 제한되고, 각종 신무기, 예를 들어 잠수함, 전차, 전투기등의 보유가 금지되었다. 게다가 독일군의 두뇌역을 한 참모본부의 설치도 금지되었다.
당시 육군의 지휘자인 한스 폰 젝트는 베르사유 조약의 여러 조항들을 교묘히 피하며 군의 정예화와 첨단화를 이뤄냈다. 이를 위해서 여러가지 기만책을 실시하였는데, 참모본부와 비슷한 기능을 하지만 이름이 다른 기관을 만들고, 장교의 선발이나 교육을 강화했으며, 당시 공산정부가 세워진 소련과 비밀 조약을 맺고 소련의 철의 장막안에서 여러 무기를 시험했다. 이 교류는 히틀러 집권전까지 계속된다. 이때 전차 전술을 훈련하기 위해 자동차에 양철판이나 마분지를 씌운 모의전차로 연습한 것은 유명한 일화. 또한 공군 조종사들은 항공 스포츠 클럽으로 위장하여 훈련을 행했다.
이 시기 연합군이 개발한 전차(탱크 Tank)의 운용법을 연구(당연히 보유 자체가 금지돼 있는 장비)하거나, 비밀리에 신무기 개발(예를 들자면 포병 사거리 제한 규정을 피하기 위한 장거리 로켓병기의 개발을 위해 로켓 연구가들을 후원한다거나)을 하는 등 차후의 전쟁에 대한 전술 및 작전술 연구는 오히려 승전국 이상으로 충실해져 갔다. 그러나 발전을 했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지나친 열세 하에 놓인 베르사이유 조약 하 독일군은 물론이고 국력이 허용하는 안정적인 수준의 군사력을 확보한다 하더라도 최종적으로는 국가를 확실히 방위할 수 없다는 결론이 1920년대 후반에 이미 나와 있었다.[7]
이 때문에 결국 군은 문민통제 하에서 최소한의 자위능력 확보를 우선시하고 모든 분쟁은 정치 및 외교로 해결해야 한다는 의견이 당시의 군 상층부에서 나왔으나, 이는 소수 의견으로 그쳤다.[8] 즉 독일군, 특히 육군은 1차 세계대전의 패전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주도하는 유럽의 질서 재편과 이를 주도할 독일 육군의 영광에 여전히 매달려 있었다. 이런 망상에 가까운 발상은 결국 예전부터 정치적 센스가 형편없었던 독일군의 전통과 절묘하게 결합, 히틀러를 자기들이 제어할 수 있다고 착각함으로서 결국 전 세계에 헬게이트를 여는 단초가 되고 말았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히틀러가 등장한 후 독일군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재건되었으나, 1919년부터 1933년까지의 군사적 공백기간은 2차 세계대전 패전 때까지 독일군에게 상당한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했다. 1차 세계대전 종전 때까지 전문적인 군사 교육을 받은 장교단은 단 4천 명만이 현직을 유지했고, 이 수치는 사실상 10만 명의 육군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수치였다. 이 때문에 독일군은 고질적인 장교 부족에 시달렸다. 장교만이 아니라 훈련된 예비역 병사도 부족해서, 당시 독일이 전시 동원 가능하다고 판단되던 총 남성 인구의 3/4가 일체의 군사훈련 경험이 없는 이른바 백색년생이었을 정도였다. 이런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은 적어도 10년 이상의 시간을 들여 예비군을 재구축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편, 히틀러 집권 이후 창설된 독일 공군은 수장 괴링의 정치적 삽질로 인해 발전이 지체되었고,[9] 지나치게 전술공군으로서의 임무에 특화[10]되어 훗날 2차 세계대전 패전의 원인 중 하나를 제공했다. 이에는 육군 소속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를 보낸 육군 장교들이 독일 공군 창군 멤버가 되어 수뇌부 자리를 장악하고 있었던 탓도 컸고,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육군에 의한 공군 운용개념 연구 역시 1차 세계대전 당시 정립된 전술공군 개념에 얽매여 있었던 것도 함께 작용했다.
해군 또한 베르사이유 조약 무효화 이후 본격적인 발전의 가속도가 붙기도 전에 바로 전쟁에 돌입하는 바람에 대양함대(Hochseeflotte)의 꿈을 접어야 했다.[11]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전간기의 독일군은 1919~1933년까지의 조약 시기 규제로 인해 약체화될 대로 약체화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차 세계대전 이전의 특권계급적인 위치 및 당시 독일 특유의 민족주의적 사고방식, 아울러 형편없는 정치적 센스의 절묘한 화학작용을 통해 전 유럽의 패자로서의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수준의 목적의식을 가진 채 히틀러의 집권을 맞았고, 자신들의 능력이라면 히틀러를 잘 제어해서 한 15~20년쯤 꾸준히 준비를 한 끝에 세계대전을 일으켜 세계정복은 몰라도 유럽 정복은 할 수 있으리라고 믿고 있었다.[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군사적 역량은 국력에 비해 충분치 않았고, 그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장기 전략을 수립할 능력 자체가 부재[13]한 상태에서 자신들이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정치지도자에게 거꾸로 이리저리 휘둘린 끝에 결국은 자신들의 사형 판결문에 자기 피로 사인하는 바보짓을 하고 말았다.
6 제2차 세계대전
어쨌든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집권후 독일군의 군비를 제한하던 베르사이유 조약이 철폐되고 재군비가 이루어지면서 독일 육군 및 공군은 대대적인 팽창이 이루어졌고, 육군의 전격전[14]과 슈투카를 중심으로 한 막강한 전술공군의 힘으로 제2차 세계대전초에 독일은 서부 전선에서의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폴란드를 점령하고 덴마크, 노르웨이 등의 북구 약소 국가들을 차례차례 석권하더니 결국 5월 10일 시작된 황색 계획에 의해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점령하고 프랑스의 항복마저 받아내며 사실상 유럽의 절반을 장악했다.
그러나 영국 본토 항공전이 실패로 돌아가 영국 침공은 물건너 가고,[15] 이런 상황에서 소련과 북아프리카로 전선이 확대되면서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게 다 무솔리니 때문이다 해군의 유보트 전단은 영국을 아사 직전까지로 몰아넣었고 육군 또한 소련군을 맘껏 유린하며 모스크바 코앞까지 도달했지만 결국 나치의 캐삽질로 기껏얻은 귀중한 전술적 승리를 공수표로 날려 먹었다. 이후 연합군의 공세에 서서히 전력이 바닥나고 동맹이란 것들은 하나같이 도움이 안 돼 점차 전황이 어두워지더니 결국 동부 전선에서의 소련의 대반격과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다시 독일군은 패배하고, 그 결과 독일은 사회주의 진영의 동독과 서구 진영의 서독으로 분할된다.
7 냉전과 그 이후
냉전이 시작되자 미국과 소련은 패전으로 무장해제된 두 독일을 무장시키기 시작했다. 그래서 양군에 대거 전직 나치 독일군(독일 국방군 Wehrmacht) 장교들이 영입되어 전력을 갖추게 되었다.(그러나 시작은 고작 1500여명의 총병력으로 여론의 냉대를 받으면서 창설되었다.) 서독군(독일 연방군 Bundeswehr)과 동독군(국가인민군 Nationalvolksarmee)은 각기 나토와 바르샤바 조약군의 핵심전력이었다. 희한하게도 겉모양만 보면 서독군보다 동독군이 더 독일국방군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동독군 장교 정복은 독일국방군과 너무 유사하여 냉전이 붕괴되고 조금 수선되어 나치독일 오리지날 군복으로(속여서) 비싼값에 서방에 팔려나갔다. 동독군 철모는 바가지를 엎어놓은 것처럼 희한하게 생겼지만, 사실은 나치가 새로 도입하려던 신형 철모를 그대로 쓴 것이다. 원래는 제1차대전 말기에 도입되어 나치독일군이 쓰던 프리츠 철모를 도입하려고 했으나, 나치에게 호되게 당했던 소련측이 그것은 용납하지를 않았다고...
구 서독군은 만약 바르샤바 조약기구와 나토의 전면적 재래식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전선의 최전방 을 담당하고 있던 군대였다. 초기 조약군의 제파 전술을 중추로 한 조약군의 기갑전력에 대응하기 하기위한 산물로 서독군은 기갑여단 중심의 강력한 육군을 보유했었다. 프랑스군 같은 경우는 애초부터 2선전력으로 전선유지에 투입될 예정이었고, 이탈리아군은 정치적이유로 불가. 미군과 영국군은 유럽전선에 도착하는데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덴마크-서독 유틀란트 사령부의 병력만이 1파의 동독군, 유틀란트반도를 목표로 한 폴란드군, 독일 남부를 담당하는 체코슬로바키아군, +소련군과 헝가리 등등......의 국가를 홀몸으로 상대해야만 했다. 암울하다 이렇게 조약군의 1파 공세를 어떻게든 처절하게 막아내고 나면 서독군은 정비를 위해 예비대로 빠지고 영국, 미국, +네덜란드, 벨기에 의 병력이 공군, 긴급대응군, 본격적인 육상 병력 의 순서로 투입되는 전개가 예상되었기에 서독군은 필연적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지닐 수 밖에 없었다. 이때의 산물이 PZH-2000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레오파드 1,2 전차와 게파드 자주대공포 등등의 장비이다. 병기의 성능은 그 필요성에 비례하는 것이다. 한국군이 개발하는 양질의 병기들도 동북아시아라는 지랄맞은특수한 환경때문에 지속적으로 개발/배치되고 있는 것이다.
냉전 붕괴와 독일 통일로 동독군은 해체되었다. 나토 규격과 안맞는 소련제 장비는 소수(높은 비행성능을 보이던 MiG-29)만 제외하고 모두 타국에 팔려나가거나 대부분 독일기업들에 의해 폐기처분했다. 초기 90%의 장비들이 사실상 폐기되었고 2011년 현재까지는 구 동독군의 장비들은 100%폐기되어있으며 MIG-29도 동유럽국가로 중고판매되었다. 동독군 장교들은 제대(장성-정치장교-심리전 요원들은 100% 제대했다.)하거나, 계급이 강등되어 연방군에 들어가야했다. 동독군에서 받은 서훈경력같은건 인정되지도 않는다고 한다.나치독일 서훈도 인정해주면서 동독 서훈은 인정해주지 않다니...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독일통일때 군사통합시 동독군 출신 5만명이 인수되었으나 2년 기간복무자 2.5만명은 93년에 모두 군을 제대했으며 점차적으로 단계별로 한시적 복무지원으로 그 규모를 감축하여 군사통합시 동독군 출신들은 99년까지 약 1만명만이 복무하고 있다.(물론 이는 동독지역에서 유입된 새로운 군인력은 고려되지 않은 군사통합시 동독군인력을 의미한다.)
현재 독일 연방군의 육군은 머릿수로보나 병사의 질로 보나 유럽 최강으로 보인다. 다만 공군과 해군은 육군에 비하면 안습.
하!
지!
만!
8 현재
냉전 붕괴로 인한 안보위협 저하 + 미국발 경제위기로 인해 눈물나게 감축중이다. 징병제는 통일이후 사민당(SPD)에 의해서 처음 폐지논쟁을 겪었으나 의무병역제를 유지하는 차원에서 지속되었고 9개월을 복무하는 쪽으로 잡았다가 2010년 6개월 복무로 추가감축되었으며 2011년 1월 3일 마지막으로 의무복무자원들이 입대하면서 공식적으로 2011년 7월 1일부터 실질적으로 모병제로 16만명선으로 전환하였다.[16]
그래도 영국군에 비하면 아~~주 형편이 좋은 상태다. 소총만 봐도 답이 나온다 과연 그럴까?
가능하면 해외파병은 자제하였으나,[17] 93년 나토의 코소보 공습 때 동참했으며,[18] 1994년 연방 헌법재판소는 '기본법의 방위는 독일의 국경을 지킬 뿐만 아니라 위기에의 대응이나 분쟁 방지 및 전 세계에서 독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필요한 행동을 가리킨다.'라고 판결함으로서 보스니아의 평화이행군(IFOR)에 3700여명 97년 3000명의 전투병을 보스니아 평화안정군(SFOR)을 파병하여 독일의 국제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그 이후 21세기에 들어서 소말리아 해역과 미국의 아프간에 4400여명을 파병하여 전투임무를 비롯한 다목적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아프간전
그러한 탓에 신속대응군이라고 규정된 해외파병목적의 합동군부대가 96년초기 4만명이었던것과 별개로 현재는 10만명으로 증강된 상태이며 앞으로 더욱 이 규모가 확대될 전망이다. 하지만 꾸준한 감소세 문제와 더불어서 2014년까지 독일연방군은 지상군만해도 3개 사단은 넘지 않는 규모로 대폭 축소되어있지만 러시아의 동유럽에 대한 팽창과 우크라이나 사태에 리비아 내전당시의 유럽군의 현실을 겪으면서 독일군의 현재 규모의 한계문제에 대한 논란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 2016년 5월 10일에 독일 정부는 2023년까지 7000명의 군 인력을 증원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게다가 테러위협이 늘어나자 징병제를 부활시킬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지만, 독일내에서는 반발하고 있다.# 브렉시트 이후 독일 정부는 안보 분야에서 새로운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군사적으로 더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9 관련 항목
- ↑ 단, 이건 게르만 군대가 갈리아 군대보다 강군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게르만인들이 겨우 철제 검 들고 우왕ㅋ굳ㅋ하며 부러질 때까지 써먹는 동안 갈리아인들인 사슬갑옷으로 무장한 정예 귀족전사계층까지 완성해 놓았다. 이는 게르만들이 유목민이었는데 비하여 갈리아인들은 정주민, 게다가 상당히 농업생산이 좋은 갈리아 지역 자체의 풍족함등이 기인했다. 그리고 갈리아는 게르만보다 더 빨리 기병대를 양산했다. 그러나 갈리아의 유력부족인 아르베르니와 아이두이가 자기들끼리 치고 박느라 귀족전사 계급이 싸그리 몰락. 이 참에 게르만족이 한 숟가락 걸치려고 했지만 하필이면 이 때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 ↑ 17세기에 다시 칼뱅파로 개종한다. 즉 왕실은 칼뱅파고 프로이센 귀족 대다수는 루터파이다
- ↑ 프랑스군의 장점으로 나폴레옹같은 전투의 사기 천재도 있지만 원래도 전통적으로 육군 강국인데는 유럽최대 인구와 경제력으로 상비군 규모에선 최강이었다가 한술 더떠 혁명으로 20대 전체 연령을 징집하는 징병제 역할도 컸다. 나폴레옹 등장전에 1793년 라자르 카르노가 의용군을 기존상비군(30만)과 합쳐 혁명군은 75만을 징집하는데 프로이센이나 오스트리아는 상비군이 20만 정도였다.
- ↑ 국왕보다는 돈에 충성하는 천박한 장사꾼들이란 고정관념과 토지귀족과 거주민이라는 프로이센 군제와 충돌되는 여러 어른의 사정때문... 실제론 귀족 자제들만으로 장교수요를 채우기 어려웠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제한적으로는 받아들였다.
- ↑ 샤른 호르스트, 클라우제비츠도 원래는 평민 출신이었다.
- ↑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은 프로이센 이후 독일 제국이 군국주의 사회였다는것을 부정하기도 한다. 오히려 군에서는 소수정예와 효율성을 내세워서 육군의 규모가 인구가 3분의 2에 불과한 프랑스(60만)보다 더 적은 (55만)에 불과했다는점을 들기도 하는데 전반적으로 나라에서 군의 위치가 특별하고 국민들도 선호하는 대상이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물론 경쟁국인 프랑스에서 군대란 사회적 지위도 낮고 장교라고 해도 사회적 보상이 적었다.
- ↑ 베르사이유 조약을 준수한다는 전제 하에선 폴란드에 대한 방어조차 불가능했으며, 최우선 가상적국이 될 수밖에 없었던 프랑스에 대해서는 아예 답이 없었다.
- ↑ 특히 이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실무를 맡았던 슐라이허는 1934년 돌격대 숙청과 동시에 다른 반나치 인사 상당수와 마찬가지로 자택에서 나치의 정치테러를 당해 죽었고, 이에 대해 독일군 장교단은 자군의 유력한 장성이 백색테러로 살해당했다는 사실에 침묵함으로서 독일 국가에 대한 군부의 주도권을 부정하려 했던 내부의 배신자에게 간접적으로 복수했다. 단, 슐라이허는 일시적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총리를 지낸 적도 있었으며 나치와 협력하지 않았다는 것을 제외하면 도리어 당시 독일군 내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하는 정치군인이기도 했으므로, 어떤 의미로는 나치를 지지한 얼간이들보다 더 악질이라고 볼 여지도 있다.
독일놈들이 다 그렇지 뭐 - ↑ 당시 육군은 공군을 가리켜 "당(黨)의 공군"이라 부르며 비웃었다.
- ↑ 실제로 전략폭격에 이용되는 4발 중폭격기를 보유하지 않았다. 전략공군 개념은 주로 해군국에서 발달했으며 독일 공군의 경우 1차 세계대전 때 이미 전략공군을 운용해 보았으나 그 성과가 미미하다는 것을 절감한 데 이어 스페인 내전 참전경험으로 전략공군이 무용지물이라고 착각했다. 물론 실제로도 전략공군의 가치는 압도적 물량 우위 하에서만 의미가 있으며 독일은 그런 산업능력이 없었지만, 적어도 2차 세계대전 초기에는 아직 가능성이 있었다. 이것이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가장 큰 원인이라는 견해도 있다. 사실 전쟁 초기 영국군의 전략폭격이 대부분 실패로 돌아간 것을 보면 신뢰가 안 갈 만도 하다.
- ↑ 당시 해군이 생각하고 있던 개전 시점은 45년 정도로 그때정도는 돼야 프랑스, 영국등과 붙어볼 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1942년 시점에선 통상파괴를 중심으로 해서 제한적인 함대결전도 시도 가능한 해군력 구축이 가능하다고 판단했으나,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 ↑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제프리 메가기의 "히틀러 최고사령부:1933~1945(김홍래 역)"이 매우 잘 정리하고 있다.
- ↑ 원래부터 독일군 자체가 전략적 기획력 자체가 부족한 체질이었던데다, 이의 실무를 완성할 전문 참모장교단조차 확보하지 못한 채 개전을 맞았고, 종전 때까지 이 문제는 계속해서 악화되기만 했다.
- ↑ 사실 전격전이란 용어는 학술적으론 이미 사어에 가깝다. 자세한 것은 전격전 항목을 참조.
- ↑ 여기엔 괴링의 삽질과 독일 공군의 과도한 전술공군 지향으로 인한 짧은 항속거리가 큰 영향을 끼쳤다.
- ↑ 하지만 연방헌법에는 엄연하게 의무병역제를 명시하고 있으며 유사시 의무병역제로 전환할수 있는 형태로서 미국과 유사한 병역제도를 확보하고 있다.
- ↑ 이는 2차대전의 영향이 매우 크게 작용한 탓이다.
- ↑ 2차대전 이후 첫 해외파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