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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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영토의 변천사

이 문서는 러시아역사를 다룬다.

이하 연대기 순.

2 국가의 탄생

바이킹의 일파인 루스(Rus)족이[1][2]라도가 호수변[3]에 건설한 요새에서 시작되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대략 바이킹 등의 북유럽[4]들과 현지 슬라브인이 나라를 세운 것으로[5] [6]전한다. 초기에는 현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를 중심 도시로 노브고로드 공화국, 폴로츠크, 체르니고프, 야로슬라블, 로스토프, 할리히-볼히니아 등 여러 공국들이 성장하였다.

3 키예프 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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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번영했던 도시인 키예프를 중심으로 러시아 최초의 나라가 생겼다. 현대의 중심지인 모스크바 쪽은 소공국들이 존재하기는 했지만(황금의 고리) 아직 러시아 제공국들 사이에서도 변방이었다. 당시 키예프 공국은 '여러 러시아 도시의 어머니'로 불리며 대부분의 러시아를 영향권 하에 두었다. 동방정교회를 받아들인 블라디미르, 최초의 법전을 편찬한 야로슬라프 대공, 야로슬라프의 종손 야로슬라프 모노마흐 등 위대한 대공들의 황금시대가 10세기를 전후해서 100년 정도 이어졌다. 키예프는 대도시로 번영을 누렸으며, 농민은 농노 신분이 아닌 자유민 신분으로 민회에서 참정권까지 가졌다.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서유럽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할 것이 없는 시대였다[7] 예를 들어보자면 프랑스 국왕 앙리 1세의 왕비였던 키예프 대공녀 안나(1024~1075)가 아버지에게 쓴 편지에서 프랑스를 집들은 음침하고, 성당은 초라하고, 풍습은 혐오스러운 야만적인 나라로 평가했을 정도였다. 여담이지만 그녀는 첫 아들의 이름을 그리스식인 필리프(Philippe)[8]라고 지었는데, 후에 필리프 1세가 되는 그가 서유럽에서 필리프라는 이름의 시초가 되었다.

이러한 키예프 러시아의 황금시대는 동로마 제국과 서유럽 사이의 무역로 덕분에 가능했다. 지중해의 무역이 사라센 해적들에게 방해받은 탓에 흑해에서 강을 타고 키예프 지역을 통해 발트 해로 둘러가는 무역이 성행했던 것. 아울러 블라디미르의 손녀 가운데 한 명은 프랑스 왕, 또 한 명은 헝가리 왕, 셋째는 노르웨이 왕과 각각 결혼해 서유럽과 많은 연결선을 유지했다. 하지만 십자군 전쟁을 전후해서 사라센 해적들이 약해지고, 베네치아 등의 지중해 무역국가들이 성장해 직항로를 트게 되면서, 상인들의 발길이 뜸해지며, 아시아 유목 민족인 플로프치족이 스뱌토슬라프와 블라디미르가 쳐놓은 방어선을 뚫고 들어와 1095년 키예프를 점령했다. 이로써 러시아의 황금시대는 끝나고 키예프도 몰락한다.

이후의 공국들은 끊임없이 갈라지고 쪼개진 상태였으므로 나라다운 나라라고는 노브고로드 공국, 블라디미르-수즈달, 할리히-볼히니아 정도에 불과하였다.

4 몽골의 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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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많은 공국들은 몽골에게 있어서는 불쏘시개나 다름없었다. 제베와 수보타이가 돌아가던 중에 살짝 툭 치고 간 것만으로도 빈사상태에 빠졌고 제대로 갈아엎으며 지나가자 저항 한 번 못해보고 대부분의 공국들이 갈려나가듯그대로 사라졌다. 운 좋게 침략을 면한(봄의 해빙기에 몰려왔던 몽골 기병들이 뻘투성이가 된 땅에 질려서 철수) 노브고로드와 그외 살아남은 공국들은 몽골에게 상납금을 바치는 역할로 전락했는데, 이들 중에서 모스크바 공국이 상납금을 모아 바치는 역할을 하면서 모인 돈을 적당히 떼먹으면서 성장했다. 특히 키예프에 있던 정교회 대주교가 모스크바로 주교좌를 옮기게 되면서 종교적 중심지의 역할까지 수행하게 된다.

마침내 1483년 이반 3세는 킵차크 칸국과 맺은 조공계약을 불태워 버리면서 전쟁을 걸었고, 러시아 정교회 주교들이 모스크바를 도우라고 열변을 토하자 거의 모든 공국들이 서방의 십자군 비스무리한 연합군을 결성한다. 그리하여 싸움 끝에 몽골군을 몰아내면서, (그리고 말 안 듣는 공국들을 때려 잡으면서) 현재의 러시아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몽골의 참혹한 지배로인해 키예프 공국에서부터 예로부터 내려온 민회적 전통 등은 거의 다 사라졌고 몽골의 격렬한 파괴의 반작용인지, 독재와 압제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모스크바의 경쟁자였던 노브고로드 공국은 민회의 권한이 강했는데 이반 3세가 이런 말과 함께 멸망시킨다.

"내 세습 영지인 노브고로드에 민회의 종은 필요 없다. 내가 온 나라를 지배한다."

하지만 이 부분이 당시 상황에서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키예프의 자유로운 분위기는 류리크 가문이 혈족들에게 땅을 균등분배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아직 중앙집권적인 측면보다는 지방분권적인 발전하지 못한 정치체제였기 때문인 면이 크다. 키예프 러시아가 좋은 발전 조건을 가지고도 그 이상의 확장이나 발전을 못한 이유가 아직 국가로서의 기틀이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브고르드의 경우에도 민회의 권한이 강했던 이유가 상인들의 힘이 강했기 때문이지 어떠한 민주적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며, 전성기였던 11~12세기 이후에는 소수의 가문이 권력을 장악하는 과두정의 측면이 강해지며 정치적 혼란이 증가했다.

반면, 모스크바 대공의 경우 프랑스의 까페 왕조처럼 지속적으로 남자 후계자를 낳으며 계승구도를 확실히 했다. 모스크바 공국 발전 초기에는 대공계승에 적장자라는 계승자가 확실히 있었기에 이전 키예프 러시아처럼 형제상속이 아닌 자연스럽게 장자상속으로 옮겨 갈 수 있었다. 모스크바의 지리적 이점과 더불어 이러한 정치적 안정이 있었기에 모스크바 대공국은 다른 러시아 공국과는 달리 힘을 길러서 금장한국을 물리칠 수 있었다.[9] 이후 이반 3세는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질녀와 결혼하면서 자신을 차르, 곧 황제로 호칭한다. 그의 손자가 유명한 이반 뇌제이다. 이후 차르의 전제정치는 오랫동안 쭉 이어진다.

물론 몽골 제국으로 러시아의 권력구조가 대대적으로 바뀌면서 러시아가 제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러시아가 대제국이 됐다는 말은 몽골 지배의 장점만을 보고 말하는 것이다. 우선 몽골 제국으로 인해 러시아의 문화는 키예프 시대에 비해 완벽하게 퇴보했다. 그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기까지 러시아는 몇백년이 걸렸으며, 러시아 제정 말기까지도 군사적인 면을 제외하고 러시아가 다른 유럽국가에게 앞서는 것은 없을 정도였다. 또한 러시아가 대제국이 됐다는 점은 오직 영토가 커짐을 보고 하는 말이다. 러시아의 동방개척은 러시아로서는 별 수 없는 생존 방식이었다. 첫째로 속령 러시아 시절 러시아의 국력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스웨덴을 친다는 것은 말도 안됐다. 또한, 러시아의 가장 큰 수출품은 모피였는데, 이 모피를 얻을 수 있는 곳이 점점 동방으로 축소됨에 따라 러시아도 마찬가지로 동진을 한 것이다. 당시 러시아에게 이 땅들은 그저 지나쳤을 뿐이지, 정말 자신들의 영토로 생각하는 경우는 적었다. 러시아 제국이 동방의 중요성을 깨달은 시기는 제국주의 시대로, 그 때에 이르러서야 러시아는 자국민을 동방으로 이민보내기 시작했다. 또한, 러시아가 자신들의 위치를 확인하게 된 것은 표트르 대제시절 지도 제작 때부터이다. 러시아가 위상과 군사력으로 대제국이 된 시기는 몽골제국 덕이 아닌 표트르 대제라는 걸물의 개혁이 이루어진 시기이다. 몽골 제국 덕에 부자상속이나 단일된 정치체제를 가졌다고 해서 그동안의 모든 것을 잃은 러시아가 그들의 덕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몽골 제국 덕분에 러시아가 대제국이 됐다면 마찬가지로 몽골 제국 때문에 러시아는 유럽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정도로 몇백년 전으로 퇴보했으며 스스로 국가를 추스릴 시간도 빼앗겼음을 말해야 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위키 게시판에서 토론된 바 있으므로, 이곳을 참고할 것. 그리고 모스크바 대공국등의 문서에도 이에 관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으므로 참고할 만 하다.

5 세계 열강이 되다

이반 뇌제까지 이어지는 흐름동안 모스크바 러시아는 류리크 왕조와 함께 성장해왔으나 뇌제의 죽음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생기게 된다. 뇌제의 뒤를 이은 표도르와 그의 후계자이자 이반 뇌제의 아들이었던 드미트리가 드미트리, 표도르 순으로 죽으면서 류리크 가문에서 정식으로 이을 후계자가 아예 없어지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이 때를 기점으로 러시아에는 자신을 짜르라 주장하는 이가 여러명 등장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폴란드와 스웨덴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침범하면서 혼란이 가중되는 '동란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러한 동란시대는 1613년 미하일 로마노프가 귀족회의를 통해 로마노프 왕조를 열게 되면서 끝나게 된다. 비록 류리크 가문은 사라졌으나 그 가문과 결혼한 사이였다는 이유로 로마노프 왕조가 생길 정도로 류리크 왕조가 만든 짜르 전제정권은 강력했다. 귀족회의를 통해 올라왔다고는 하지만 짜르의 권위는 여전했으며, 오히려 귀족들이 동란시대를 통해 세가 약해지면서 로마노프 왕조는 다시 긴 기간동안 강력한 전제정치를 이어가게 된다.

키예프 루시 당시에는 유럽 열강들보다 잘나갔던 러시아는, 이후 몽고의 침입으로 인한 초토화와 동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문화의 발전이 정체되었다. 또한 모스크바 러시아가 이반 3세와 4세를 통해 날개를 뻗을 무렵 일어난 동란시대로 러시아는 큰 위기를 겪었다. 그 결과 로마노프 왕조가 시작될 무렵의 러시아는 이웃국가들에 비해 국가 발전이 상당히 미흡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은 로마노프 왕조(1613~1917)의 표트르 대제(1672~1725)의 적극적인 서구화 및 북방전쟁의 승전으로 인한 영토확장으로 겨우 '열강클럽'에 끼어들면서 바뀌게 된다. (로마노프 왕조의 역대 차르와 간략한 역사는 항목 참조) 이 시기에 러시아에는 두 가지 행운이 겹쳤다.

첫 번째 행운은 유럽의 군사력이 급격한 변혁기를 일단락하고 안정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기술을 외부에서 도입하는 것만으로도 그럭저럭 유럽의 군사기술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거대 국가로서의 이점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으므로 빠른 속도로 강대국의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다. 두 번째 행운은 때맞춰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7년전쟁에서 오스트리아와 결정적으로 반목하는 사이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러시아가 스웨덴을 격파하고 동유럽에서의 세력균형을 무너뜨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견제할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는데, 이는 한 나라가 강성해지면 주위의 다른 나라들이 연합해서 끌어내리는 것이 역사의 기본 패턴인 유럽에서 정말로 드문 현상이었다. [10]

덕분에 러시아는 주변의 여러 나라들을 잇달아 정복하면서 거대한 규모로 팽창할 수 있었다. 1773년과 1795년에는 폴란드 분할에서 가장 큰 영역을 차지했고, 1783년에는 크림을 병합했다. 오스만 제국에 대해서도 공세를 시작해서 1792년에는 동으로는 카프카스 지방, 서로는 드네스트르 강에 이르렀다. 북으로는 1790년에 스웨덴을 격파하고 핀란드로 진출했다. 결국 프리드리히 대왕의 군사활동으로 가장 큰 덕을 본 것은 프로이센도 영국도 아닌 러시아였던 셈이다.

이후 러시아의 팽창에 제동이 걸린 것은 프랑스 혁명기에 들어서였다. 혁명으로 인해 프랑스의 군사력이 폭발적으로 팽창하면서 러시아의 확장은 일단 저지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초 희대의 괴수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수십만 대군을 털리고 일약 알거지가 되는 바람에 마침내 러시아는 유럽에서도 최강국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었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의 재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는 프랑스가 균형을 잡아주지 않으면 러시아가 그 앞잡이인 프로이센(적어도 메테르니히의 생각으로는 그랬다)을 앞세워서 독일 지역과 더 나아가 유럽의 패권을 장악할 것을 우려하게 되었다. 이는 빈 체제에서 프랑스를 짓밟지 않고 오히려 프랑스의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적극적으로 인정한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나 겉보기에는 최신 트렌드를 따라가려는 모습과는 달리 경제수준은 계속 몇 세기 뒤를 달렸고, 여기에 서유럽의 군대가 다시 적극적으로 변혁을 받아들이게 되자 러시아는 또다시 빠른 속도로 뒤떨어지게 되었다. 당대 최강 무능장교들의 집합이었던 크림 전쟁(1853~1856)에서도 한 수 위의 무능함을 자랑하면서 연합군에게 패하여 러시아의 후진성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다 러일전쟁(1904~1905) 당시 일본한테까지 패배하면서 전세계를 놀라게 만들었다(…)[11] 그래도 만나기만 하면 펄펄 나는 상대가 있었으니 그것은 한창 막장 테크를 열심히 타던 오스만 제국(1299~1923)이었다. 거의 틈만 나면 오스만을 털어먹는 탓에 다른 유럽 국가들은 오스만을 살려두기 위해 많은 노력을 쏟아부었다. 뭐 얘네야 말 그대로 막장이었으니 당연한 듯 그래도 당시의 러시아도 악명 높은 제국주의 국가 중 하나였는데 스페인이나 오스만 투르크는 좀 심했지

제1차 세계대전(1914.7~1918.11) 당시의 러시아군의 막장 기량은 절정을 달려 개전 초기부터 압도적인 병력을 동원하고도 독일군에게 처참하게 관광을 다니며 밀리기에 바빴다. 대신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는 비교적 잘 싸웠던 것을 보면 당시 러시아군은 막장 군대에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러시아가 아무리 약했어도 오스트리아랑 비교 할 정도는 아니라니깐...

결국 러시아 혁명으로 전쟁에서는 리타이어. 제정 러시아는 적백내전을 거쳐 세계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공산주의 국가 소련으로 바뀌게 된다.

6 소련

적백내전까지 무사히 넘어갔다고 하지만, 소련의 상태는 아직 메롱이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 나타난 정책이 레닌의 신경제정책(NEP)이다. 사유재산을 일부 도입하면서 사람들에게 근로의식을 자극했고, 그 결과 비교적 짧은 기간동안 농공업은 전시 이전의 수준까지 올라오게 되었다. 레닌의 신경제정책은 사람들에게 이전보다는 나은 삶을 주었으나, 이는 아직 사람들의 소비량과 생산량의 차이가 문제가 불거질 정도로 올라오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으며, 이 문제점은 신경제정책의 자본주의적 성격과 결부되어 레닌 사후 소련 공산당에서 앞으로 소련 정책의 방향으로 거센 싸움이 일어나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것이 이오시프 스탈린으로, 스탈린은 그동안 서기장으로서 가지고 있던 권력과 본인이 쌓아온 인맥으로 트로츠키 및 부하린을 몰락시켰으며, 제1차 5개년 공업화 계획을 발표하게 된다. 이 시점부터 소련은 러시아 제국의 모습이 사라지면서 우리가 아는 중공업,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제1차 공업화 이후 제2,제3차 공업화 계획이 진행되며 우리가 아는 독소전을 견딜 공업력을 가진 것은 덤.물론 제국 때나 소련때나 지금이나 인민을 하찮게 여기는 건 비슷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1939.9~1945.8) 때에도 초반에는 독일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수도 모스크바가 함락될 위기까지 맞으며 막장의 전통을 이어가는 듯했다. 하필 2차 대전 직전에 이오시프 스탈린(1879~1953)이 대숙청을 벌이면서 쓸만한 장교들은 죄다 죽여놨기 때문에, 전쟁 말기까지도 고위 장교 수급에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점점 러시아인 특유의 끈질긴 저력과 막대한 물자의 생산력, '거세되었지만 능력을 각성한 장교집단의 지휘력', 그리고 엄청난 물량 공세 전략을 발휘하며 전세를 역전하더니 스탈린그라드 전투(1942.11~1943.2)와 쿠르스크 전투(1943.7)의 대승리로 독일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고 결국 제3제국의 수도 베를린을 점령하며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막장의 정석을 보여주는 러시아군임에도, 놀랍게도 러시아는 육군 교리에 있어서 타 서구 열강에 비해 항상 진보된 결과물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군사학의 이론적 부분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국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항상 거지같은 사정들이 겹치면서 막장 일로를 달려왔으니, 이 또한 놀라운 일이라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이론과 실제는 전혀 다르다는 뜻도 되겠다. 사실 2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강력한 단위전투력을 갖고 있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인 독일군은 소련에 비하면 군사학의 이론적 체계화 부분에서 뒤처지는 편이다. 물론 80년대 이전에는 작전술이란 게 아예 존재하지 않던 막장 영미 육군 교리보단 낫지만.

러시아가 가장 절정의 시기를 달리던 순간은 바로 소련 시절 제2차 세계대전 승전 이후 세계 양대열강에 올라선 시기이다. 이때, 당시의 소련은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의 동구권 전역을 영향하에 두고 있었으며 세계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공산 진영의 우두머리였으며 우주개발 등 여러 면에서 눈부신 성과를 이륙하였다. 이 시기만큼은 오래전부터 꿈꾸던 열강클럽의 1인자 자리에 가까운 위치였다. 그러나 전통을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겉모습과는 달리 원자재에 국가수입의 상당부분을 의존하는 등 경제체제가 워낙에 빈약한 면도 있었다. 이 시기의 소련 경제사정을 비꼬는 공산주의 유머 시리즈도 많다.

1957년에는 인류 최초로 인공위성을 쏘아올렸으며 유인 달착륙 이전까지 우주 경쟁의 모든 분야에서 미국을 선도하였고 세계의 절반을 휘어잡는 강대국으로 40년이나 군림한 점은 대단한 것. 그러나 전성기를 이끌었던 개혁적, 진보적 흐루쇼프 시대 이후, 18년 동안 이어진 반동적, 보수적 브레즈네프 시대 70년대 80년대에 경제가 정체되었고, 80년들어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국방비가 폭증하여 재정부담이 급속히 늘어났으며 석유가격이 81년 고점을 찍은 이후 폭락하면서 국가재정수입이 줄어들면서 경제가 더 침체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까지 터지면서 소련의 경제는 파탄직전에까지 이르는 혼란속에, 개혁개방의 혼란속에 결국 옐친이 주도권을 잡으며 결국 원하든 원치않든 91년도에 공중분해되었다.

7 소련 붕괴 이후

소련 붕괴 이후에 거의 환자 취급을 받고 있었고 소련붕괴의 충격(구체적으로는 초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자산손실과 임금수준의 급격한 하락, 복지정책 감축으로 인한 사회안전망의 붕괴, 빈부격차 심화로 인한 양극화)으로 많은 사람들이 삶의 의욕을 잃을데다 혼란한 정치 상황까지 겹치면서 결국 각국에 막대한 자금을 빌리고도 갚지 못해 모라토리움까지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세계적인 수준의 과학기술과 국방기술력, 그리고 중공업이 발달한 덕에 각종 무기시장에 값싼 무기들을 대량 유통시키며 짭잘한 수입을 벌어들인데다 허허벌판이던 시베리아가 자원의 보고로서 각광을 받고, 유가 상승으로 크게 호황을 맞았으며 현재는 사우디아라비아보다 더 한 산유국이 되어 전세계 에너지 자원을 쥐락펴락 하고있다. 덕분에 그동안 외국에 있던 채무를 대부분 처리했으며[12] 오히려 경제 대공황 때 자국이 다시 위기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슬란드가 부도위기에 처하자 돈을 꿔주는 채권자로 격상되었다. 2000년 넘어 1인당 GNP가 만달러가 넘어가기 시작했으며 세계에서 국민당 백만장자수가 가장 많은 곳이다.(다르게 보면 그만큼 빈부격차 문제가 심각하다는 말도 된다.[13]) 중국이 가장 빠른 속력으로 백만장자가 늘고 있지만 현재 러시아 역시 백만장자 수의 증가율이 가장 높은축에 속하여 금방 따라잡히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셰일혁명 이후 미국에서의 석유 생산량 증가로 국제유가가 급락하면서 러시아 경제에 위기가 닥쳐오고 있다. 부정부패가 심한데다 아직 자원이 경제 규모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이며 사우디 아라비아가 미국의 셰일가스를 인정하는 한편 나머지 산유국들을 석유 물량박치기로 고사시키려 들기에 차르푸틴이 부정부패 척결 등을 내세운 개혁이 성공할 때까진 한동안 침체할 듯 하다. 물론 개혁이 제대로 된다는 보장도 없다

  1. 그래서 이름이 러시아다.rus+sia.
  2. 다만 바이킹(노르만)의 일파가 아닌 슬라브족의 일파라는 설 역시 있다.
  3. 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근. 단,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아래에 나오듯 후대에 정책적으로 조성한 계획도시고 이 때는 늪지대에 불과했다.
  4. '바랴기'라고 불렸다. 동로마 황제의 호위대인 바랑기안 친위대는 여기서 나온 말.
  5. 사실 요때쯤 남하했던 그 북유럽 노르만인들은 주로 교역말이 좋아서 교역이지, 수틀리면...에 목적을 두고 왔기 때문에 어떠한 독립적인 세력을 키우고자 하는 의지는 별로 보이지 않았던것 같다.
  6. "현지인(슬라브인, 추드인, 크리비치인, 메레인, 벱스인) 들에게 과도한 삥뜯기무리하게 공물을 받으려해서 그들을 바다 너머로 내몰았다. 그럼에도 현지 부족들은 서로간에 싸움을 멈추지 않았고, 그들(바랴기)을 찾아가 자기들 대신 통치하여 질서를 잡아주기를 청하였다." 원초연대기에서 발췌.
  7. 물론 이때의 서유럽이 워낙 막장이기도 했다. 서유럽이 안정을 찾은 것은 노르만의 침공이 어느 정도 끝나고 프랑스가 까페 왕조로 안정을 찾은 후인 11~12세기 이후이며, 콘스탄티노플 함락 년도인 1204년까지는 동유럽이 문화, 부, 어느 면을 봐도 확실히 앞섰던 상황.
  8. 그리스식으로는 필리포스. 동명이인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가 있다.
  9. 니꼴라이 V.라쟈노프스키 작, 러시아의 역사 1 '속령 러시아' 부분 참조
  10. 사실 영국도 러시아와 비슷하게 변두리에 있고 수비하기가 유리한 지형이어서 프랑스나 독일 등보다 상당히 유리한 조건에서 강력해질수 있었다.그리고 그 둘은 19C~20C에 걸쳐 가장 강한 대립각을 형성한다. 또한 일본도 이런 좋은 조건이 다 갖춰져서 도움이 됐다는 시각이 있다.
  11. 다만 이건 러시아 대 일본이라기보다는 러시아 대 일본(을 바지사장으로 내세운 영국,미국)에 가까웠다. 러일전쟁 전비가 일본 1년 국가예산의 5배에 달했기 때문 (...) 러시아의 팽창을 두려워한 영미의 지원없인 전쟁은 꿈도 못꾸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패배라기도 애매했던게 그때 일본은 국가파산 직전이었다. 지금 일본 우익들은 러일전쟁을 보고 일본의 황금기니 뭐니 지껄이곤 하지만 정작 그때 일본인들은 그야말로 죽을맛이었다. 그에비해 러시아는 비록 피의 일요일 사건등 국내의 혼란으로 전쟁에서 발을 빼긴 했지만 전쟁을 계속한다면 육군이든 해군이든 얼마든지 추가적으로 보낼수 있었다. 이 때문에 협상 테이블에서 러시아는 패배했다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강경하게 나갔고 전쟁배상금을 요구하려 했으나, 일본의 상태가 도저히 돈을 물어줄 수 없는 지경이어서 (...) 포기했다. 이때 전쟁재상금만 받았어도 지금 일본우익들 기는 팍 죽어있었을 듯.
  12. 그것도 현금 박치기로!!
  13. 실제로 2013년 크레딧스위스는 111명의 부자가 러시아 국부의 35%(!)를 독점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발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