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멘트 보로실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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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 원수
육군
●1
알렉산드르 예고로프클리멘트 보로실로프P미하일 투하쳅스키세묜 부됸늬바실리 블류헤르
세묜 티모셴코보리스 샤포슈니코프그리고리 쿨리크게오르기 주코프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이오시프 스탈린P이반 코네프레오니트 고보로프콘스탄틴 로코솝스키로디온 말리놉스키
표도르 톨부힌키릴 메레츠코프라브렌티 베리야N바실리 소콜롭스키니콜라이 불가닌P
안드레이 예레멘코키릴 모스칼렌코SRF바실리 추이코프세르게이 비류조프AD, SRF이반 바그라먄
마트베이 자하로프필리프 골리코프니콜라이 크릴로프SRF표트르 코셰보이파벨 바티츠키AD
레오니드 브레즈네프P드미트리 우스티노프니콜라이 오가르코프빅토르 쿨리코프세르게이 소콜로프
바실리 페트로프세묜 쿠르콧킨세르게이 아흐로메예프드미트리 야조프
해군
●2
니콜라이 쿠즈네초프이반 이사코프세르게이 고르시코프
공군
●3
알렉산드르 노비코프알렉산드르 고로바노프파벨 지가레프콘스탄틴 벨쉬닌파벨 쿠타코프
보리스 부가에프알렉산드르 콜두노프
 : 소비에트연방 초기 5원수
 : 전간기 ~ 제2차 세계대전(~1945년 8월) 중 진급
 : 냉전 시기 진급
P : 정치장교, AD : 방공군, SRF : 전략로켓군, N : NKVD
● 1 : 전원 소비에트연방원수(Marshals of the Soviet Union). 스탈린은 대원수.
● 2 : 소비에트연방 함대사령관(Admiral of the fleet of the Soviet Union)
● 3 : 공군(항공원수)은 병과상원수(Chief marshal of the branch, 상급대장에 상응)에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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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시절.


밥 언제 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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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장관 시절 이오시프 스탈린(左)과 함께 영웅으로 숭배되던 시절의 포스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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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로실로프를 기념해 발행된 우표.

1 개요


화가 아이작 브로드스키가 그린 초상화
이름러시아어:Климе́нт Ефре́мович Вороши́лов
영어: Kliment Yefremovich Voroshilov
한국어: 클리멘트 예프레모비치 보로실로프
출생1881년 2월 4일, 러시아 제국 베르크네예
사망1969년 12월 2일, 소비에트 연방 모스크바
복무러시아 제국군(1917-1918)
소련군(1918-1972)
최종 계급육군 원수
주요 보직소련 국방장관
주요 참전제1차 세계대전
적백내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겨울전쟁
폴란드 침공
레닌그라드 공방전
주요 서훈소비에트연방영웅 2회[2]
사회주의노력영웅

적백내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소련군육군 장성이다. 최종 계급은 원수.

소련군에서도 손꼽히는 졸장. 원쑤 소련 초기 5원수(보로실로프, 세묜 부됸늬,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바실리 블류헤르, 알렉산드르 예고로프) 중 하나였으며 접시 던지고 놀 만큼 친했던 이오시프 스탈린의 친구였다. 일단 초기 소련 공산당 역사에서는 빼 놓을 수 없는 인물. 그러나 스탈린과 친했다는 이유만으로 당에서 요직을 점했을 뿐, 도대체 어떻게 원수까지 진급했는지 모를 정도로 군사적 재능은 전무했다. 동시대 적국에도 훌륭한 도플갱어존재했다 뭐 그래도 인성까지 막장은 아니었으니 다행이라 할 수 있겠다. 겨울전쟁에서, 그리고 독소전쟁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무능한 면모를 아낌없이 드러내 결국 야전 지휘에서 손 떼야 했고, 전후 니키타 흐루쇼프 시대에 실권을 잃고 몰락한 후 막판에 정계에 복귀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2 생애

2.1 어린 시절과 혁명 활동

보로실로프는 러시아 제국의 예카테리노슬라프[3]에서 가까운 베르크네예에서 태어났다. 1896년 공장 노동자로 일하다가 파업에 참가하여 해고되었다. 1903년볼셰비키에 참가했다. 1906년에는 파업을 선동해서 체포되었으나 석방되었고 스톡홀름에서 열렸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4]의 제4차 대회에 대표로 출석하여 블라디미르 레닌이오시프 스탈린을 알게 되었다. 이때 그는 스탈린과 한방을 썼고(!) 그 인연으로 스탈린과 안면을 텄다. 룸메이트가 대원수가 되었다.. 1907년 런던에서 열린 제5차 대회에도 출석하여 미하일 프룬제미하일 칼리닌 등을 알게 되었다. 동년에 다시 체포되어 북쪽의 아르항겔스크로 유배되었으나 1913년 사면되었다. 이렇듯 청년 시절부터 꽤 굴곡진 삶을 살았다.

2.2 붉은 군대의 지휘관이 되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보로실로프는 우크라이나 임시 정부 수반과 내무인민위원(내무장관)을 맡았다. 적백내전 기간 동안 공산당의 차리친(→ 스탈린그라드) 방위전 때 스탈린과 친해졌다. 이 스탈린-보로실로프 인맥은 나중에 붉은 군대의 중추가 되는데 대숙청에서 무사했던 군인들 중 상당수가 이 인맥이었고 대숙청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대거 승진한 것도 이 인맥이었다. 세묜 티모셴코이반 코네프가 바로 이 인맥이다.

당시 붉은 군대는 국방장관 겸 군사 혁명 위원회 의장 레프 트로츠키가 총지휘하고 있었고, 적백내전을 승리로 이끈 트로츠키의 명성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화려한 언변으로 무장하고 적과 동지를 동시에 많이 두고 다녔던 트로츠키에 비해 언변이 서툴고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성격을 지녔던 스탈린은 무명의 당 간부였으며, 10월 혁명에서나 내전에서나 별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잘 나가는 동갑인 트로츠키를 질투하던 스탈린은 트로츠키와 처음부터 사이가 극히 나빴는데, 보로실로프는 트로츠키가 이끈 군사 혁명 위원회에서 트로츠키에 맞서서 스탈린을 옹호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아마도 이렇게 스탈린이 어려웠을 때 보로실로프가 나서서 스탈린을 적극적으로 옹호했기 때문에 후에 보로실로프가 범한 중대한 실책에서도 스탈린이 너그러이 용서한 것일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될성 부른 친구에게 좀 잘해 주면 나중에 크게 보답받을 수 있다
트로츠키는 혁명의 일등공신이었으나 오만한 성격 탓에 적이 많았고, 트로츠키가 초기부터 블라디미르 레닌을 추종하던 볼셰비키가 아니라 뒤늦게 참여한 인물이라서 볼셰비키 당 내에 추종자들이 별로 없었다. 더구나 다른 볼셰비키 지도자급 인물들은 군부를 장악한 트로츠키가 제2의 나폴레옹이 되어 혁명을 전복시키고 독재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힘을 모아 트로츠키가 내전 당시 드러냈던 여러 약점을 들춰 내며 공격했고, 트로츠키는 이 때문에 군직에서 사임하고 미하일 프룬제가 그 자리를 맡았다. 스탈린은 그 틈을 타서 당내 세력을 확장하여 당내 서기장에 이르렀으며, 레닌이 중풍으로 와병하자, 당은 스탈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덩달아 보로실로프의 지위도 강화되었다.

보로실로프는 1921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61년까지 그 자리를 유지했다. 1925년 미하일 프룬제의 죽음 이후, 보로실로프는 국방장관과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이 자리는 1934년까지 맡게 된다. 프룬제의 지위는 당시 소련의 최고 권력을 나눠가졌던 그리고리 지노비에프, 레프 카메네프와 더불어 스탈린의 삼두 체제(트로이카)와 맞먹는 자리였지만, 스탈린은 지노비에프 파인 프룬제보다는 자신의 사람이 맡는 것을 더 선호했다. 프룬제는 지병인 위장종양을 절제하는 수술을 하라고 권유받았고, 수술대 위에서 마취제인 클로로포름 과다 흡입으로 사망했다.[5] 어쨌든 보로실로프는 1926년 새롭게 생긴 정치국의 정규 위원이 되었고 이 자리는 1960년까지 유지되었다. 정치인으로서의 운은 참 좋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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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년 11월 11일 창설되고 촬영된 5명의 원수. 위의 왼쪽부터 세묜 부됸늬, 바실리 블류헤르, 아래 왼쪽부터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보로실로프, 예고로프. 사진에서 보듯이 보로실로프가 센터넘버 원이다. 이 사진을 찍은 지 얼마 안 가서 투하체프스키, 예고로프, 블류헤르는 목이 날아갔다. 유능하면 다 죽여요. 투하체프스키 한정이지만[6][7]

위의 경력에서 보듯이 그는 군사적으로는 거의 무학이었고, 오히려 빌헬름 카이텔처럼 정치인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가 적백내전에서 올린 전공이라는 것은 얇게 무장하고 지휘 체계가 엉망이며 고립되었던 반혁명군을 진압해서이지 전략, 전술적으로 의미 있는 전공을 세워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참 볼셰비키(10월 혁명 이전에 볼셰비키에 참여한 자)로서 트로츠키 몰락과 프룬제 사후 붉은 군대의 넘버 원이었다. 1935년에 군에 계급이 부활되자 다른 4명(투하체프스키, 예고로프, 블류헤르, 부됸늬)과 함께 원수 계급을 받았다.

보로실로프는 1930년대 스탈린의 대숙청에 깊이 관여하였고 특히 미하일 투하체프스키의 몰락과 처형에 큰 역할을 하였다. 보로실로프는 군의 기계화를 추진하던 투하체프스키의 급진적 관념을 매우 비판하였고, 반역죄로 기소된 투하체프스키를 재판하는 군사 재판에서도 재판관으로 참여했다. 다만 기계화 자체에 반대한 것은 전혀 아니며, 오히려 군의 기계화에 대해 스탈린과 함께 지원 가능한 한도 내에서는 전폭적인 지원을 해 줬다. 투하체프스키를 비판한 이유는 투하체프스키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수만 대의 전차항공기를 요구했기 때문.[8] 하지만 투하체프스키가 처형되고 소련군의 기계화 과정이 완전히 중단된 것 때문에 이후 독소전쟁 초기 소련군은 엄청난 출혈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2.3 병크 1: 겨울전쟁

1939년 나치 독일과 은밀하게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은 후 아돌프 히틀러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등을 일으켜 중유럽, 서유럽을 유린하는 동안 동쪽의 발트 해 연안 약소국(발트 3국, 불가리아 등)들을 병합하던 스탈린은 핀란드에도 협박을 했다. 레닌그라드 수비를 위해 핀란드 영토를 할양하고 핀란드 주요 영토를 조차해 달라는 것이었다. 당연히 핀란드가 보기에 이는 터무니없는 것이어서 협상은 결렬되었고, 11월 30일 겨울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국방장관이던 보로실로프는 친히 침공군을 이끌었고, 처음에는 4개 전선군 42만 명을 동원했다. 스탈린은 히틀러에 철저히 관광당한 폴란드처럼 자신도 핀란드군 정도는 금세 쳐부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소련 성립 후 독립한 러시아 제국 시절의 영토를 되찾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스탈린은 발트 3국처럼 핀란드도 소련의 한 공화국으로 편입시킬 참이어서 소련 내의 핀란드 망명객을 중심으로 핀란드 인민 정부라는 괴뢰국을 출범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당연히 그렇게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침공군의 총지휘를 맡은 보로실로프는 1940년 1월까지 소련군을 지휘했으나, 현대전에 관해서 일자무식인 그가 40만 명이나 되는 대병력을 지휘한다는 것 자체가 대병크였다.[9] 잘해 봐야 대대장급 군인에게 4개 야전군을 통솔하는 육군참모총장급의 능력을 바란 거나 마찬가지다. 보로실로프의 지휘가 부실한 데다가 대숙청 후에 승진한 지휘관들의 경험 부족까지 합쳐져서 소련군은 대패했고, 보로실로프는 그 책임을 물어 총사령관과 국방장관에서 경질되었다. 이후 세묜 티모셴코가 소련군을 총지휘했다. 티모셴코는 그래도 전술을 아는 사람이라서 핀란드군의 만네르하임 방어선을 돌파했다. 그러나 소련군의 인명 손실이 워낙 극심했기에 스탈린은 이후 핀란드가 강화를 요청했을 때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 협정을 맺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스탈린은 옛 친구인 보로실로프가 처참히 패한 후 돌아오자 보로실로프에게 크게 화를 냈고, 보로실로프는 이때 무능을 질책하는 스탈린에게 접시를 던지면서(!) 대들었다. 이 일화가 담긴 원문을 기재한다.

The Finnish Soviet War exposed a multitude of problems in the Red Army, even though the Soviet eventually won and the Finland was forced to make considerable territorial concessions. The Soviet performance was so embarrassingly weak that it alarmed even the political leadership. Soviet deaths, more than 80,000, were much higher than the number of the Finnish dead. Khrushchev admitted that 'A victory at such a cost was actually a moral defeat.' Stalin was angry with the military commanders, and Khrushchev recalled a meeting at Stalin's dacha:

▶겨울전쟁에서 이긴 건 소련이었고 핀란드는 상당한 영토를 빼앗겼으나, 붉은 군대의 많은 문제점이 드러나기도 했다. 소련의 (군사) 행동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약해서 정치 지도부를 경악하게 했다. 소련군의 사망자는 8만 명이 넘어 핀란드군의 사망자를 훨씬 상회했다. 니키타 흐루쇼프는 '그런 댓가를 치루고 이긴 건 사실 정신적으론 패배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스탈린은 군 지휘관들에게 열이 받아 있었고, 흐루쇼프는 스탈린의 다챠에서 있었던 그들의 만남을 회상했다.

Stalin jumped up in a white hot rage and started to berate Voroshilov. Voroshilov was also boiling mad. He leaped up, turned red, hurled Stalin's accusasions back into his face. "You have yourself to blame for all this!" shouted Voroshilov. "You're the one who annihilated the old guards of the army; you had our best generals killed!" Stalin rebuffed him, and at that, Voroshilov picked up a platter with a roast suckling pig on it and smashed it on the table.
▶ 스탈린은 시뻘겋게 열받아 펄펄 뛰며 보로실로프를 야단치기 시작했다. 보로실로프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건 마찬가지였다. 결국 속이 뒤틀리고 얼굴이 시뻘개지면서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이 저지른 죄를 면전에 대고 쏘아붙였다. "이게 다 네놈 때문이잖아!" 보로실로프가 고함을 질렀다. "붉은 군대의 베테랑들을 없애 버린 게 네놈 아니냐, 니가 유능한 장군들을 다 죽여 버렸잖아!" 스탈린이 들은 척도 않자 보로실로프는 새끼돼지 통구이가 든 접시 하나를 집어 테이블에 내동댕이 쳤다.[10]

패기 끝판왕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 장교들을 사형시킨 재판관은 누구더라? 참 웃긴다 그런데 스탈린은 놀랍게도 이런 불경한 짓을 한 보로실로프를 별로 탓하지 않고 그냥 지휘권만 해임했다. 아마 딴 사람이었다면 가문 자체가 박살나지 않았을까

2.4 병크 2: 독소전쟁

이렇게 겨울전쟁에서 병크를 범한 보로실로프는 1941년 독일 국방군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기용되어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레닌그라드 방위사령관을 맡게 되었다.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원수가 지휘하는 독일 북부집단군은 순식간에 발트 3국을 거쳐 레닌그라드로 쇄도했다. 보로실로프는 어떤 때는 스스로 권총을 빼들고 진두에 서서 독일군 전차 부대의 공격에 대한 반격을 지휘하는 용맹을 보이기도 했으나 작전 지도에 있어 총체적 난국을 보였다. 그 결과 제정 러시아의 수도였고 소련 제 2의 도시였던 레닌그라드가 함락 직전에 처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사람은 군사적으로 무학이었으니. 레닌그라드가 위기에 처하자 스탈린은 보다못해 보로실로프를 해임하고 당시 자신과의 의견 충돌로 총참모장에서 해임된 게오르기 주코프를 파견하였다. 주코프가 사령부에 나타나자 보로실로프는 그제서야 자신의 해임을 알았고, 주코프에게 지휘권을 넘겨주면서 "내가 싸우던 방식으로는 지휘하기엔 전쟁이 너무나 달라졌다."고 솔직히 자신의 무능을 인정했다. 그리고 레닌그라드는 주코프의 지휘로 인해 1944년까지 버틸 수 있었고 레닌그라드 공방전은 소련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스탈린은 이번에도 친구였던 보로실로프를 용서했고 이래서 친구가 좋은 거다 보로실로프는 이후에는 일선 지휘를 맡지 않고 후방 근무를 하다가 종전을 맞았다. 1945-1947년에는 헝가리 공산 정권 수립을 지휘했다.

2.5 이오시프 스탈린 사후

1952년 보로실로프는 소련 공산당 중앙 위원회의 최고 간부 회의의 위원이 되었다. 1953년 3월 스탈린의 죽음은 소련 최고 권력의 변화를 가져왔다. 스탈린 밑에 고만고만한 부하들 여러 명이 있었는데 누구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이들은 일단 권력 투쟁 대신 권력 분점에 합의하여 여러 자리를 나눠 가졌다.

그래서 보로실로프는 최고 소비에트 간부 회의의 의장(→ 소련 국가원수)이 되었다. 니키타 흐루쇼프는 소련 공산당의 서기장을 맡았고, 게오르기 말렌코프는 소련 수상에 취임했다. 스탈린 치하에서 NKVD 부장을 지냈던 라브렌티 베리야는 정보 기관의 수장을 맡았다. 이때 권력을 분점한 말렌코프나 흐루쇼프뿐만 아니라 보로실로프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와 같은 정치국원들은 모두 NKVD 부장이었던 베리야를 모두 두려워했는데, 베리야는 정보 기관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언제라도 구실을 만들어 자신들을 체포, 처형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일단 협력하여 공동의 적인 베리야를 체포해 처형했다.눈에는 눈, 체포 처형에는 체포 처형

1956년 보로실로프는 75주년 생일 기념으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수여받았다. 수여 시기에서도 알 수 있듯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공훈 덕택이 아니라 원로 대접용으로 던져 준 것으로 보인다(...)[11] 이후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De-Stalinization)[12] 이후 보로실로프는 말렌코프, 라자르 카가노비치, 몰로토프의 보수파(소위 반당 그룹)에 일시적으로 가담하였다. 이들은 1957년 흐루쇼프의 실각을 노렸으나 실패했고, 보로실로프는 재빨리 편을 바꾸어 흐루쇼프를 지지하였다. 덕분에 일시적으로 권좌에서 물러나지는 않았으나, 노쇠한 데다가 겨울전쟁 이후 군사적으로 너무나 많은 병크를 저지른 탓에 당뿐만 아니라 군에서도 별로 지지 세력이 없었고, 그저 권력욕에 사로잡힌 노친네에 불과했다.

2.6 말년


▲ 노년의 보로실로프. 타고난 동안

1960년 5월 7일, 흐루쇼프가 뒤에 있는 최고 소비에트는 보로실로프에게 "은퇴 요구"를 하고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를 간부 회의의 의장(즉 국가원수)으로 선출했다. 1960년 7월 16일 중앙 위원회는 당 최고 간부 회의[13]에서 보로실로프의 위원 자격을 박탈했다. 1961년 10월 그의 정치적 몰락은 22차 당 대회에서 중앙 위원회으로부터 축출됨으로써 완결되었다. 보로실로프가 의장 역할을 했던 마지막 나날의 어떤 식사 자리에서 모든 멤버들이 그를 외면하고 모른 체했다는 일화가 있다. 동료들의 외면에서 이미 그가 축출될 운명임을 깨닫고 미리 선수를 써서 "은퇴"를 결심했다는 것이다.

흐루쇼프의 몰락 이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보로실로프를 다시 정계에 복귀시켜 얼굴 마담 노릇을 시켰다. 귄위는 땅에 떨어져 있었으나, 그래도 혁명 원로였기 때문에 보수파였던 브레즈네프가 대우를 해 준 것이다. 1966년 중앙 위원회에 복귀하고, 소련군의 창설 50주년이 되던 1968년 두 번째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는 이듬해 1969년 사망해서 다른 원수들, 유명 정치인과 마찬가지로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다.


▲ 크렘린 벽 묘지에 있는 보로실로프의 묘비.부됸늬아닌가?

3 평가

세묜 부됸늬와 함께 스탈린과의 친분으로 능력 없이 승진하여 소련군을 위기에 몰아 넣은 원흉으로 꼽힌다. 정실 인사의 폐해를 대표적으로 보여 주는 예. 그래도 부됸니는 자신의 전공 분야인 기병에 관해서는 꽤나 큰 기여를 했지만, 이 사람은 존재 자체가 해가 될 정도로 무능했다. 물론 보로실로프 본인도 자신의 단점을 인정하긴 했다. 그래도 대숙청을 비난했던 일화처럼 스탈린을 중재하고 접시를 던질 수 일갈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다. 보로실로프 말고 또 있을까?

굳이 잘한 점을 꼽자면 유능한 장성 이반 코네프를 대숙청으로부터 구했다는 것과 하단에 설명할, 개발 중이던 KV 전차의 개발이 중단 위기에 몰렸을 때 도움을 줘서[14] 이후 T-34와 더불어 파죽지세로 몰려 오던 독일군 기갑 부대에 대적할 수 있는 강력한 장갑의 중전차가 나올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점이 그나마 인정해 줄 만한 부분일 듯하다. 숱한 저티어 유저들에겐 이것 때문에 까일 듯하지만

지휘관, 참모, 군사 행정가로서의 자질은 없었지만 그래도 군인이라고 개인 화기 사격 솜씨 하나는 뛰어났다고 한다. 어느 날, 소련군 장성들이 보로실로프 앞에서 M1895 나강 리볼버 사격 시범을 보이고 있었는데 한 장군이 한 발도 맞추지 못하자 총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자 보로실로프는 장성에게 권총을 받아들더니 그 자리에서 모든 탄환을 명중시키고는 그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총이 아니라 동무의 사격 실력이오."라고 말했다. 이후 소련군 전군에 한동안 '보로실로프처럼 쏴라' 라는 운동 아닌 운동이 벌어져서 소련군의 개인 화기 숙련도가 약간 늘었다고 한다. 이런 것을 보면 혁명 이전 자금책으로 임명되어 은행 강도와 열차 강도, 각종 적색 테러로 잔뼈가 굵은 스탈린처럼 내전기에 다져진 개인 전투력과 소부대 전술 지휘 능력은 높았을 것이다. 이렇게 소대장-중대장 혹은 특수부대의 최소 단위 제대 팀장에나 어울릴 인물이 집단군사령관급 위치에 임명되었으니 문제. [15]

4 기타


대숙청 때 처형되는 장교들 보고 웃는 걸로 보이면 기분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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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년, 불알친구 두 명의 단란한 한때.

  • 보로실로프와 스탈린은 정말 불알친구였는지, 보로실로프가 스탈린과 함께 뱃놀이 갔을 때 스탈린이 농담삼아 "너 영국 스파이지?"라고 하자 보로실로프가 스탈린의 뺨을 때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세상에... 다른 사람이 이랬으면 너 굴라그 나에게 이렇게 대한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그렇게 세게 나갔으니 의심 안 사고 살아남은 거지. 어설프게 말했다간 그 역시 죽었을 거다..
  • 1935~1958년, 1970년~1990년 사이에 우크라이나 동부에 있는 루간스크는 이 사람의 이름을 딴 '보로실로프그라드'로 불렸다.
  • Wind Blow에서는 실제 역사처럼 반(反)베리야 전선에 서나 주코프가 베리아 편에 붙으면서[16] 반 베리야 그룹이 망해 버린다(...). 결국 보로실로프는 춤추기 어렵다고 악명 높은 코사크 춤을 추면서 신발이 벗겨진 줄도 모르고 베리야에게 쫓아와서 굽신거리며 용서를 빌고 베리야는 이 가엾고 딱한 자를 헝가리 군사 고문으로 쫓아낸다(...). 그리고 그의 병크가 워낙 많았기에 군부 측에서조차 그의 은퇴식에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안습.
  • 스탈린 시대의 숨막히던 사회 분위기를 잘 묘사한 영화 이너 서클에서도 시대 변화를 보여 주는 장치로 등장한다. 주인공의 이웃 집에서는 보로실로프를 영웅이라고 추켜세우며 초상화까지 걸어둘 정도로 강한 빠심을 드러내는데, 대숙청 당시 보로실로프의 인기를 반영한 설정이다. 하지만 그 이웃도 결국 대숙청에 휘말려 어딘가로 끌려가고, 스탈린의 전속 영화 상영 기사가 된 주인공도 독소전쟁 초반 소련군이 신나게 깨지자 보로실로프가 스탈린 집무실에서 실컷 갈굼당하고 나오는 모습을 보게 되면서 크게 실망한다. 결국 주인공은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웃에게 물려받은 보로실로프 초상화를 스탈린 초상화로 바꿔 버린다. 이 과정에서 열려 있던 반지하방 창문으로 마침 지나가던 소떼들이 오줌을 갈기자 보로실로프 초상화로 오줌 세례를 막는 등 한 번 더 능욕당한다(...).
  • 중전차 KV 전차 이름의 기원이 된 인물이기도 하다.[17] 일명 '리멘트 로실로프 전차'. KV 전차 항목을 참조하면 알 수 있지만 보로실로프가 이 전차의 개발에 힘을 실어 준 것이 계기가 돼서 이 양반의 이름이 붙었다. 괜히 이 전차의 개발진들이 전차에다 이 사람의 이름을 붙인 게 아니다.
이 전차는 그때까지 개발된 그 어떤 전차보다도 덩치가 컸으며, 무식하게 두꺼운 장갑으로 T-34와 함께 독일 국방군충격과 공포에 몰아 넣었다. 당시 독일군의 상냥한 도어노커 대전차포로는 떡장갑 투성이인 KV를 격파하기 어려웠고, 당대 최강 대전차포 88mm 대공포를 동원해야 했다. 그러나 기계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대전 내내 쓰인 T-34와는 달리 1943년 이후에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나무위키에 항목이 개설된 KV 시리즈로는 KV-1KV-2가 있다. 그리고 영국에는 처칠 전차가 있다 천조국은 과연 천조답게 사람 이름을 붙인 전차가 너무 많다... 미국 전차에 사람 이름 붙는 건 엉뚱하지만 영국군렌드리스로 들여온 미제 전차에 미국 남북전쟁 시기의 장군들 이름 붙인 것이 원조다

5 주요 수훈 내역

  1. 아랫쪽 가운데에 그려진 전차T-35이다.
  2. 이는 모두 전공(戰功)과는 상관없이 받은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
  3. 현재의 우크라이나의 드니프로페트로프스크.
  4. 소련 공산당의 전신격인 정당.
  5. 스탈린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 수술은 프룬제를 암살하기 위한 음모로 시행되었다고 주장했다.
  6. 예고로프나 블류헤르 원수는 무능한 사람은 아니었다. 이 사람들은 나름대로 적백내전에서 엄청난 활약을 한 사람들이었다. 보로실로프를 제외하면 사실 이때 원수들은 사실 다 그럴 만한 공적이나 이유가 있어서 원수가 된 것이었다. 물론 적백내전에서 신화적인 기병 지휘관이었던 부됸니에서 보듯이 이들의 현대전 수행 능력은 투하체프스키를 제외하고는 좀 아닐 수 있다.
  7. 바실리 블류헤르는 하산 호 전투 당시 블류헤르가 지휘했던 소련군의 피해가 일본군보다 많았던 것이 스탈린의 노여움을 사서 처형되었다.
  8. 다소 과장을 섞어서, 예를 들어 현대 미 해군 해군참모총장이 모든 대양에서의 제해권 우위를 위해 제럴드 R. 포드급 항공모함40척쯤 건조해서 50여 척의 대형 항공모함 전단을 운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미 국방장관은 무슨 반응을 보일까? 아마 이 분이라면 그냥 항공모함을 없애 버리지 않았을까 즉 말도 안 되는 예산 징징을 부린다고 화를 낸 것.
  9. 후에 축차 투입된 소련군까지 합하면 침공군은 거의 100만에 이른다.
  10. 출처: Stalin(Hiroaki Kuromiya 저), 145~146쪽
  11.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무려 4회나 수여받은 게오르기 주코프는 4회 중 2회의 수여 시기가 각각 1939년 8월, 1944년 7월로 한창 활동하던 시기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주코프와 보로실로프의 엄청난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12. 이 당시 흐루쇼프의 연설에서 그 유명한 "우리는 스탈린이 있어서 전쟁에서 이긴 것이 아니라, 스탈린이 있었음에도 전쟁에서 이긴 것이다"라는 문구가 등장했다.
  13. 1952년 이래 당 정치국을 부르던 명칭.
  14. 사실 진짜 이유는 KV 전차의 수석 설계자 코틴이 그의 사위였기 때문이다.이래서 장인어른을 잘 둬야 된다
  15.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대규모 정규전을 상정한 냉전 시절 미국에서는 특수부대를 오래 거친 장교들은 일반 부대 출신보다 지휘 계통에서 요직으로 빠지는 경우가 드물었다. 하지만 테러와의 전쟁 이후에는 좀 나오는 편.
  16. 하지만 주코프가 베리야를 후에 숙청한다
  17. 비슷하게 인물의 이니셜을 딴 소련 전차로는 IS 시리즈가 있다. 이쪽은 스탈린의 이니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