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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실제 역사에는 존재하지 않는 왕비 에스더
에스더 문서 참고.
2 페르시아 역사 기록과의 모순
역대기하의 저자는 페르시아의 제3대 왕 다리우스 1세 때의 사건을 제1대 키루스 2세(고레스)왕 때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페르시아 황제 고레스 제1년이었다. 야훼께서는 일찍이 예레미야를 시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황제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그래서 고레스는 다음과 같은 칙령을 내리고 그것을 적은 칙서를 전국에 돌렸다. "페르시아 황제 고레스의 칙령이다. 하늘을 내신 하느님 야훼께서는 세상 모든 나라를 나에게 맡기셨다. 그리고 유다 나라 예루살렘에 당신의 성전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지워주셨다. 나는 그 하느님께서 너희 가운데 있는 당신의 모든 백성과 함께 계시기를 비는 바이다. 그 하느님은 유다 나라 예루살렘에 계시는 분이시니, 유다인으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의 성전을 짓도록 하여주어라. 원주민들은, 여기저기 몸붙여 살다가 아직 살아 남은 유다인이 있거든 예루살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에 가져다 바치도록 자원예물도 들려 보내고 금과 은과 세간과 가축도 주어서 보내어라."(에즈라 1:1~4)
페르시아 황제 고레스 제1년이었다. 야훼께서는 일찍이 예레미야를 시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황제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그래서 고레스는 아래와 같은 칙령을 내리고 그것을 적은 칙서를 전국에 돌렸다. "페르시아 황제 고레스의 칙령이다. 하늘을 내신 하느님 야훼께서는 세상 모든 나라를 나에게 맡기셨다. 그리고 유다 나라 예루살렘에 당신의 성전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지워주셨다. 그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 가운데 있는 당신의 모든 백성과 함께 하시기를 빈다.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돌아가라." (역대기하 36:22~23)
B.C. 586년, 유다 왕국이 멸망될 때, 바빌로니아는 수많은 히브리(이스라엘)인을 잡아간다. 이 사건을 바빌론 유수라 한다. 이후 중앙 아시아와 중동 지방은 페르시아 제국으로 통일된다. 자연히, 히브리 포로들도 페르시아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다.
페르시아 제국은 키루스 2세(B.C. 558~529)가 세우고, 그 아들 캄비세스왕(B.C. 529~521) 때에 크게 발전하고, 캄비세스가 암살된 후 왕위를 차지한 다리우스 1세(B.C. 521~486) 때 전성기를 이룬다. 전성기를 이룬 다리우스 1세는 국교인 조로아스터교를 장려하면서도, 피정복 민족의 풍습과 종교를 인정하고, 바빌론으로 잡혀온 히브리인들을 돌려보내는 너그러움을 보였으며 전 국토를 민족에 따라 20개의 주(州)로 나누어 총독을 두고, 다시 '왕의 눈', '왕의 귀'라는 감찰사를 배치하여 총독을 감독케 하는 '중앙 집권 정치'를 폈던 강력한 군주였다.
헌데 위의 역대하의 기술을 보면 알겠지만, 성경은 페르시아의 제3대 왕 다리우스 1세 때의 사건을 제1대 키루스 2세(고레스)왕 때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건 마치, 조선의 국왕 이성계가 한글을 반포했다라고 기술한 것이나 다름 없다.
하지만 키루스 2세도 정복한 이민족들에게 매우 관대한 정책을 폈다는 기록도 많이 남아있어, 히브리인들의 귀국을 허용한 것이 키루스 2세 시대가 맞다는 주장도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당대의 기록이 더 많이 발굴되기 전까지는 확정할 수 없는 문제다.
3 다윗의 궁궐
열왕기상 10장에 의하면 다윗의 도읍에는 "은이 돌과 같이 많았다"고 하며, 다윗의 궁궐의 찬란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예루살렘 성의 동쪽에서 발굴이 된, 다윗의 궁으로 추정되는 궁궐은 일명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Large Stone Structure 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 구조물을 발굴한 고고학자 Eilat Mazar에 의하면 현재까지 발굴된 이 건물의 벽의 한 변은 약 2.5~3m 두께로 동서로 30m에 이른다. 발굴 팀들은 다윗의 도성을 하나의 마을 규모로 추정한다. 마을은 10헥타르 정도의 4천명 정도 거주를 하는 지역이였다. 베를린의 이집트 전문학자 Rolf Krauss는 "지방 둥우리"라고 말한다. 이 다윗 궁의 유적의 경우 부족 국가설을 주장하는 사학자들에 의해 지지를 받고 있다. 즉, '추장의 저택' 정도로 생각한다면 당연히 가능한 규모라고 한다.
그러나 최근의 고고학적 결과로는 성서의 사아라임으로 확인이 된 곳이 고고학자 Yosef Garfinkel에 의해서 발굴이 되었는데 발굴이 된 유적과 그 곳에서 발견이 된 유물이 해석되면서 기원전 10세기 경 다윗의 유다왕국이 어느 정도의 중앙집권화된 정치체제를 갖추고 있었다는 주장도 제기가 되고 있다.
4 예수의 출생
예수의 탄생시기에 대한 묘사와 실제 역사와 일치하지 않는다.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가 인구조사를 위해 본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갔다고 하는데, 예수가 태어났다고 알려진 시기에는 그 같은 인구조사가 없었고, 인구조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본향으로 돌아가서 인구조사를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1]
루카 복음서에서는 시리아의 총독이 된 퀴리니우스가 인구조사를 할 때 예수가 태어났다고 말한다. 그런 어법은 역사적으로 확실한 사실을 전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호구 조사가 이루어진 때는 AD 6년으로서,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가 헤로데 왕 치하에 태어났다고 말한다. 그런데 헤로데 왕은 BC 4년에 이미 죽어 있었다.(...) 유령왕
루카 복음서는 '유대 임금 헤로데 때에(1장 5절)'(적어도 BC 4년 이전) 세례자 요한과 예수가 6개월 간격으로 기적적으로 잉태되었다고 말했는데, 예수가 인구조사 때에 태어났다고 가정하면 아무리 짧게 잡아도 대략 10년 동안을 임신하고 있었던 셈이 된다.
조금 더 자세히 보자. 루카에 따르면 예수는 아우구스투스가 퀴리니우스가 시리아의 총독이었을 적에 호적 조사를 실시한 해(CE 6년)에 태어났으며, 마태오에 따르면 헤롯 왕이 죽고 아들 헤롯(안티파스)이 왕위에 오른 해(BCE 4년)에 이집트에서 돌아왔다고 나오는데, 시간이 거꾸로 흐르지 않는 이상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헤롯 대왕의 말기에서 '헤롯 대왕이 죽을 때 까지의 총독은 바루스'이며 그 전의 총독은 '사투르니누스'였다고 한다. 퀴리니우스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퀴리니우스는 언제적 총독이며, 누가가 말하는 호적 조사는 언제 있었던 일일까? 역사가 요세푸스는 퀴리니우스가 호적조사를 행하게 된 이유를 자세히 적어놓았고 이를 통해 호적조사가 일어난 시기를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헤롯 아켈라우스가 망명 중일 때의 일을 해결하러 온 것인데, 카시우스 디오에 따르면 이것은 최소한 AD 6년 이후의 일이다. 앞서도 설명했지만, 역사가 요세푸스는 헤롯 대왕의 말기에서 헤롯 대왕이 죽을 때 까지의 총독은 바루스이며 그 전의 총독은 사투르니누스였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퀴리니우스가 BC 6년 즈음에 연임해서 끼어들었을 여지가 없다.
따라서 루카와 마태오의 주장대로라면, 실제 역사에서는 AD6년 경에 일어난 호구 조사를 예수의 부모는 예수를 낳기 직전 겪고, 예수는 BC 4년에 이미 죽은 헤롯 대왕 치세에 태어났다는 것이 된다.
물론 이와 별개로 학계에서 예수 자체는 실존 인물로 여겨지는 것은 사실이다.예수/역사 참조.예수신화설은 그저 유사역사학에 불과하다.[2] 그러나 복음서에 묘사된 예수의 출생 뿐 아니라, 로마에서 유월절에 유대인 죄수를 풀어주는 관례에 대한 어떠한 다른 역사 기록도 없음에도 해당 관례가 있었다는 주장, 그리고 복음서에서 묘사되고 있는 지형이 실제 유대 지형과 차이가 있다는 점 등, 복음서와 당대 역사 기록과의 모순이 분명히 존재함을 미루어 볼 때, 복음서에서 말하는 예수의 모델이 된 인물은 틀림없이 실존했을 것이나 복음서가 그 실존 인물 예수를 왜곡없이 그대로 담아내지 못했을 가능성에 대해 의문이 제기될 수는 있다.
애초에 학계에서는 "복음서에서 묘사하고 있는 예수"의 모델이 되는 인물이 실존했다고 보는 입장이지, 복음서의 묘사대로 성령으로 잉태되어 기적을 부리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한 신의 아들로서의 예수가 실존했다고 보는게 아니다. 게다가 바르 코크바의 예를 보면 알겠지만, 당대 이스라엘에는 복음서에서 말하는 예수와 같이 메시아를 자청하는 인물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5 지형의 오류
복음서의 설명과 실제 지형에 차이가 있다.
(마르코 복음서 7장 31절) 그 뒤 예수께서는 티로 지방을 떠나 시돈에 들르셨다가, 데카폴리스 지방을 거쳐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
그런데 시돈은 정반대 방향에 있을 뿐 아니라, AD 1세기에는 시돈에서 갈릴래아로 가는 길이 없었다. 띠로에서 곧바로 갈릴래아로 가는 길이 하나 있었을 뿐이다.
(마르코 복음서 5장 1~13절) 그들은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 게라사 지방에 이르렀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셨을 때에, 더러운 악령 들린 사람 하나가 무덤 사이에서 나오다가 예수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무덤에서 살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매어둘 수가 없었다. 쇠사슬도 소용이 없었다. 여러 번 쇠고랑을 채우고 쇠사슬로 묶어두었지만, 그는 번번이 쇠사슬을 끊고 쇠고랑도 부수어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는 밤이나 낮이나 항상 묘지와 산을 돌아다니면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짓찧곤 하였다. 그는 멀찍이서 예수를 보자 곧 달려가 그 앞에 엎드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왜 저를 간섭하십니까? 제발 저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그것은 예수께서 악령을 보시기만 하면 "더러운 악령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너라." 하고 명령하시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는 "군대라고 합니다. 수효가 많아서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자기들을 그 지방에서 쫓아내지 말아달라고 애걸하였다. 마침 그 곳 산기슭에는 놓아 기르는 돼지떼가 우글거리고 있었는데, 악령들은 예수께 "저희를 저 돼지들에게 보내어 그 속에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허락하시자 더러운 악령들은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거의 2,000마리나 되는 돼지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을 내리달려 물 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 |
(마태오 복음서 8장 28~34절) 예수께서 호수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이르렀을 때에 마귀 들린 사람들이 무덤 사이에서 나오다가 예수를 만났다. 그들은 너무나 사나워서 아무도 그 길로 다닐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은 갑자기 "하느님의 아들이여,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우리를 괴롭히려고 여기 오셨습니까?" 하고 소리질렀다. 마침 거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놓아 기르는 돼지떼가 우글거리고 있었는데, 마귀들은 예수께 "당신이 우리를 쫓아내시려거든 저 돼지들 속으로나 들여보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가라." 하고 명령하시자 마귀들은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떼는 온통 비탈을 내리달려 바다에 떨어져 물 속에 빠져 죽었다. 돼지 치던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읍내로 달려가서, 이 모든 일과 마귀 들렸던 사람들의 일을 알렸다. 그러자 온 읍내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러 나와서, 예수를 보고는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달라고 간청하였다. |
애꿏은 돼지떼가 죽어서 생긴 생명윤리적 문제는 제쳐두더라도, 게라사(오늘날의 예라시)는 바다에서 동남쪽으로 50km나 떨어져 있다. 게라사에서 예수가 내쫓은 악령들이 들어간 돼지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을 내리달려 바다에서 몰사하기에는 거리가 너무나 멀다. 돼지 떼가 진짜로 산 넘고 물 건너 50km를 폭풍질주하여 몰사했다면 여러 의미로 장관이었을 것이다(...). 여기 나온 게라사는 갈릴래아 호숫가에 있는 가다라 지방을 필사하면서 잘못 기록했다는 추측도 있다. 돼지 1마리를 대략 한화로 최소 14만원으로 잡으면, 돼지 2,000여 마리의 가격은 대략 2억 8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예수는 보상도 해 주지 않고 가버렸다. 3억에 가까운 손해를 입은 애꿎은 양돈업자들 지못미. 신의 아들이라서 손해를 입혀도 그냥 갔다
게다가 마태오 복음서에는 마귀 들린 사람'들'이라고 되어 있는데 마르코 복음서에는 1명이라 되어 있다.
6 로마 제국에는 유월절마다 유대인 죄수를 놓아주는 관례가 있었다?
신약을 보면, 복음서 말미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이름이 있다. 바로 유대 총독이었다던 본시오 빌라도가 바로 그다. 복음서의 기록들이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서로 그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있긴 해도, 예수가 본시오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형을 선고받았다는 것은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기록들이다. 또한 여기에는 다음의 기록들도 덧붙여져 있다. 유월절에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관례가 있었는데, 본시오 빌라도가 죄인 바라빠와 예수를 놓고 둘 중에 누구를 풀어줄지, 유대인 군중들에게 물었다는 것.
함께 복음서의 기록들을 확인해보자.
명절이 되면 총독은 군중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관례가 있었다. 마침 그 때에 (예수) 바라빠라는 이름난 죄수가 있었다. 빌라도는 모여든 군중에게 "누구를 놓아주면 좋겠느냐? 바라빠라는 예수냐? 그리스도라는 예수냐?" 하고 물었다. 빌라도는 예수가 군중에게 끌려온 것이 그들의 시기 때문임을 잘 알고 있었다. (마태오 복음서 27:15-18)
명절 때마다 총독은 사람들이 요구하는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관례가 있었다. 마침 그 때에 반란을 일으키다가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갇혀 있던 폭도들 가운데 바라빠라는 사람이 있었다. 군중은 빌라도에게 몰려가서, 전례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달라고 요구하였다. 빌라도가 그들에게 "유다인의 왕을 놓아달라는 것이냐?" 하고 물었다. 빌라도는 대사제들이 예수를 시기한 나머지 자기에게까지 끌고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마르코 복음서 15:6-10)
"그래서 나는 이 사람을 매질이나 해서 놓아줄 생각이다." (17절은 없음. 아마 이 부분에서 본시오 빌라도가 죄수를 놓아주는 유월절의 관례를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러자 온 무리가 일제히 "그 사람은 죽이고 바라빠를 놓아주시오!" 하고 소리질렀다. 바라빠는 그 도시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살인까지 하여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이었다.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주고 싶어서 그들에게 다시 그 뜻을 밝혔으나 그들은 굽히지 않고 "십자가형이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하고 소리질렀다. 빌라도는 3번째로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이냐? 나는 이 사람에게서 사형에 처할 죄를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러니 이 사람을 매질이나 해서 놓아줄 생각이다." 하고 말하였으나, 무리들은 더욱 악을 써가며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고 소리질렀다. 마침내 그들의 고함소리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선언한 다음, 폭동과 살인죄로 감옥에 갇혀 있던 바라빠는 그들의 요구대로 놓아주고 예수는 그들 마음대로 하라고 넘겨주었다. (루카 복음서 23:16-25)
빌라도는 예수께 "진리가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빌라도는 이 말을 하고 다시 밖으로 나와 유다인들에게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였다. 과월절이 되면 나는 너희의 관례에 따라 죄인 하나를 놓아주곤 했는데, 이번에는 이 유다인의 왕을 놓아주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악을 쓰며 "그자는 안 됩니다. 바라빠를 놓아주시오." 하고 소리질렀다. 바라빠는 강도였다. (요한 복음서 18:38-40)
그런데 여기엔 매우 중대한 문제가 있다. 해마다 유월절에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이 독특한 관례의 근거나 선례를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짤막한 구절을 제외한 신약 및 구약에서도 찾을 수 없으며, 그것이 로마 제국의 관행이었음을 말하는 성경 외의 증거 자료도 전혀 없다. 이런 관행은 요세푸스의 <유대사>에도 1줄도 나오질 않는다. 타키투스, 플리니, 수에토니우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까지, 당시의 저작가와 역사가들의 저술에서도 이런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힌트가 있다면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본시오 빌라도의 말일 것이다. 빌라도는 위에서 보다시피 "과월절이 되면 나는 너희의 관례에 따라 죄인 하나를 놓아주곤 했는데"라고 말하고 있다. 즉, 로마 제국 총독과 피통치자인 유대인들 사이에 생긴 관행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관행은 유대인들이 로마 제국에 복속된 뒤에 생겨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구약성경에 유대인들이 매년 유월절에 자신들의 죄수를 석방했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변명이 될 수는 없다. 해당 민족에게 전혀 없던 관례가, 단지 사법권이 로마 제국으로 옮겨오면서 새로 생겨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억지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복음서에 따르면 바라빠는 민란을 꾸미던 중에 살인을 저지르고 체포된 자였다. (마르코 복음서 15:6) 당시 로마 제국은 제1차 유대-로마 전쟁과 바르 코크바의 반란의 예를 보면 잘 알겠지만, 특히 반체제와 관련된 소요를 엄중하게 처벌했다. 그런데 이러한 로마 제국이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마다, 민란을 꾸며서[3] 체포된 바라빠와 같은 유대인 죄수들을 놓아 주었다는 것은 실로 비상식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복음서 저자의 당시 역사에 대한 몰이해와 한계에서 온 명백한 오류라고 밖에는 볼 수가 없다.
- ↑ 고대 국가에서 인구조사를 하는 것은, 세금을 거두고, 노동력 동원을 하기 위해서이다. 본적지나 고향 따위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별로 중요하지 않고, 필요하면 추가로 기록하면 된다.
- ↑ 역사학자인 폴 존슨은 예수의 실존을 부인하는 것은 진지한 학자라면 아무도 하지 않는다고 발언한 바 있다.
- ↑ 일각에선 바라빠를 열심당원이라고까지 추측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