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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의 도덕성이 문자 그대로 바이블에 기초하길 원하는 자들은 둘 중 하나다. 읽지 않았거나, 이해하지 못했거나.
- 존 셸비 스퐁[1]
성경은 어느 부분을 믿어야 하고 어느 부분은 그렇지 않은 지의 지식도 없는, 실로 거짓말과 모순 덩어리의 책이다.
- 토마스 페인
경전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성경 역시 오랜 역사 속에서 중요한 책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집필 및 내용을 둘러싸고 관련된 논란이 상당히 많다. 특히나 르네상스와 금속활자 탄생 이전의 필사본 시대에는 사소한 자구 차이가 부지기수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문제에 들어가면 사실 끝이 없다. 필사본 시대에 생긴 자잘한 사본들 간의 차이를 전문용어로 '이문'이라고 한다. 성서학계에서 나온 이 이문에 대한 유명한 말이 바로 성경 전체에 있는 단어의 수보다 이문의 수가 훨씬 더 많다는 것. [2]
문제는 이 이문들이 자잘한 차이에 그치는것이 아닌 성경 구절간의 충돌로 인해 모순을 불러 일으키거나, 과학적 사실과 충돌해 과학의 발전을 가로막기도 하고, 비도덕적인 일들을 정당화 하는데 쓰이기도 하므로 이런 성경의 문제를 인식하고 비판하는 것은 비단 과학계나 철학계 등의 비종교적인 단체들 뿐만 아니라 기독교 내부에서도 중대한 일이라는 점이다. 특히나 이런 경전의 비판적 해석이 배제된 근본주의적 종교집단 혹은 국가들이 어떠한 병크를 일으켜 왔는가를 생각해 보면 알기 쉬울 것이다.
이런 성경의 문제들이 일어나는 이유를 간단히 설명하면 성경은 한사람이 작성한 서적이 아닌 오랜시간동안 수많은 저자들이 쓴 경전을 엮은 서적이며 작성 시기의 시대적 한계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성경의 개별적 내용들이 그 안에서 묘사된 시대 이후에 쓰여졌다는 추정과 학설이 많고 기독교 내의 성서비평학계에선 이를 사실상 기정사실로 인정하는 만큼 성경의 역사적 서술의 신빙성도 100% 신용할수 없다는 문제도 가지고 있다.[3][4]
물론 전승 그대로 해당 시대에 쓰여진 책이라고 믿고, 설교하는 근본주의자도 많긴 하지만
참고로 Project Reason 이라는 기관에서 성경의 내용들을 분석하여 성경에 적혀있는 내용끼리 충돌을 일으키는 모순을 찾아본 결과 439가지의 모순이 존재한다고 한다. # (여기서 말하는건 '성경에 적혀있는 내용끼리 충돌한 모순'이 439가지 라는 거지, 과학적이나 역사적으로 모순되는 것까지 포함하면 당연히 그보다 훨씬 더 많다.)
2 기독교의 시각
기독교 내에서 논란의 핵심중 하나는, 성경이란 야훼가 불러준 대로 기록한 경전인가, 아니면 인간의 창작물인가 이다. 이는 결국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이후로 고대 문헌에 대한 해석학의 발전, 중근동에 대한 고고학, 종교학, 역사학적인 연구성과가 쌓이면서 나타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전자의 경우 축자영감설이나 성서무오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문제가 많다.[5]
기독교 내 진보주의자들은 성경을 야훼에 대한 영감에서 발생한 문학적 창작물로 보며 '구원에 필요한 요소와 그렇지 않은 요소를 모두 포함한 경전'으로 규정하면서 경전을 모두 야훼의 말씀으로 규정하는 것은 무리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반면 근본주의자들은 이런 성경에 대한 분석과 연구 자체가 사기를 못치게 하는 영업방해행위신앙을 파괴하는 행위라고 하며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또 밑의 주된 논란들에 대해서도 근본주의자들은 나름대로의 반박 주장을 펴고 있다. 가장 극단적인 근본주의자들은 성서무오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당연히 이렇게 양극으로 갈리는 주장들만 있는건 아니며, 신정통주의 신학처럼 성서비평학을 적극 수용하되,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는 인정하는물타기작업 교단들도 세계적으로 상당하다는 걸 알아두자.[6]그렇게 안하면 사람들의 의식이 깨어있는 요즘시대에 사기를 쳐먹을 수가 없다 유럽의 중세시대에 성경은 일부 사제들만 열람할 수 있었고 일반 신도가 열람하면 신성모독이라며 죽였다.(...) 당시 열람을 "시도"라도 한 일반 신도는 까막눈이 난무하던 당시시대에 그나마 배운 지식인이었다! 100%의 거짓말보다는 99%의 거짓말과 1%의 진실의 배합이 더 나은 효과를 보여준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
결국 신비적, 고대적 요소로 가득한 경전을 신이 불러준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종교들이 현대사회의 과학적, 합리주의적 사고와 충돌하고 논란에 휘말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비슷한 예로 미국의 근본주의 기독교를 보면 알 수 있다.
미국의 근본주의 기독교계에서는 진화론과 더불어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비평적 해석학)이 사탄이라고 규정했다. 오늘날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미국이나 한국의 기독교에서는 성경에 대한 논란과 비평적 해석은 대학 문턱을 넘지 못하며, 사제들은 성경에 대한 비평적 해석과 논란점을 대학에서 배우긴 하지만 이를 설교하거나 교인들에게 이야기하는 성직자는 거의 없다. 물론 진보적인 기독교 학자들은 모든 내용들을 인정하고 관련 서적 등을 펴내며 설명을 하려 하고 있지만, 목소리가 워낙 작은 상황이다.
사실 요즘엔 보수적인 신학교들도 성서비평학을 가르치는 추세이긴 하지만, 문제는 한국 그 어떤 주류 기독교 교단이라도 교회 내에서 교인들에게 성서 비평을 통해 성경을 가르치는 목회자는 거의 없다. 대한민국 기독교 종파 중 가장 개혁적이라는 한국기독교장로회조차도 목사가 교인들에게 이렇게 가르치는 교회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7] 학계와 현실이 얼마나 괴리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이 알고 싶다 447회(2007. 10. 13) 방영분을 참조할 것. 한신대 신학과[8] 교수이자, 한신대 총장을 역임한 채수일 교수는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과 나눈 인터뷰에서, 한신대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기장 계열 목사들조차 설교 시간에 한신대에서 배운 대로 성경을 가르치지 않는다며 현실을 성토했다.
이에 대해서, "성서비평학을 신학적으로 연구하는건 당연하지만, 그저 신앙을 위해 모인 것일 뿐 성경의 오류에 대해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검증하려고 교회나 성당으로 모인게 아닌 일반 신자들의 경우에는 반드시 성서비평학에 입각해서 성경을 설교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반론도 있다. 애초에 성서비평학을 설교하느냐 마느냐는 개신교의 경우 목회자와 각 개교회의 자유라는 의견인 것
그러나 현대 사회의 교회에 성서비평학에 입각해 성경 내부의 잘못된 이해를 지적하고 이를 현대 사회에 맞는 돈독한 신앙으로 보완하고 발전시켜 나가려 하는 자세가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만큼 성서비평학을 일반 신자들에게서 아예 도외시하는 태도는 옳지 못할 것이다. 성서비평학을 수용한다는 것이 반드시 성경을 오류투성이로 폄하한다거나 하는 의미는 아니며[9] 십일조와 관련한 논쟁만 보더라도 성서비평학을 통해 교회가 기존의 기득권 중심의 성경 해석을 탈피해 변화의 길을 걸을 수 있게 하는 개혁적인 면모를 보이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된다. 단, 대한민국에서 가장 개혁적이라는 기독교 장로회도 십일조는 열심히 걷어댄다. 현시창
2.1 진보적 신학자들의 입장
진보적인 입장의 신학자, 성서학자들과 종교학자들은 성경이 그들 나름대로의 신적 체험이 담겨 있으나 시대적 한계가 상호 모순이 많기 때문에 성경을 완전무결한 진리라고 보지는 않으며, 다른 종교의 경전이나 신화를 연구할 때와 같은 시각으로 분석한다. 이는 어찌 보면 성서를 연구할 때 당연히 요구되는 자세인 것이, 고고학적 연구에 의하면 구약 성서에 나오는 사건들은 신화적 모티브를 여기저기서 따왔다고 한다.만들어진 신이 아니라며? 예를 들자면 창세기는 바빌론 신화의 성경, 에누마엘리쉬에서 따왔다는 논문이 있다. 노아의 방주와 대홍수는 길가메시 서사시에 등장하는 우트나피쉬팀의 대홍수 이야기와 거의 똑같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들을 파헤친다고 해서 종교계 입장에선 이미 정립된 신학에 충격이 가는 것도 아니고, 성경의 사람들이 하느님을 어떤 모티프로 받아들였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 사실 밑에서 언급하는 각종 오류부터가 계몽주의 시대 이후 성경에 날카로운 분석의 칼을 들이댄 신학자와 성서학자들이 직접 밝혀낸 것들이다. 오늘날에는 어째 반기독교측에서 더 자주 써먹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고대인의 사고방식이 현대인과 다르다는 것은 상식이며 그것이 고대인의 지능이나 이해력을 무시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달랐을 뿐이라는 것인데, 이들은 고대인의 뮈토스적 세계관으로 체험한 하느님이 현대인의 이해와 다른 것은 당연한 노릇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성서는 애초에 단일 저자가 쓴 책이 아니라 다양한 개인의 그 자신의 하느님 체험을 기록한 책이라고 하며 그 개별 저자들 역시 여러 다양한 시대적 배경의 산물이므로 모순된 시각이 나타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주장한다.
3 주된 논란 소개와 목록
성경에는 내부의 내용 불일치나 모순 및 보편적 윤리에 어긋나거나, 실제 역사 기록 및 과학적 지식과 상충 되어 갑론을박이 오가는 내용들이 많이 발견되는데, 그것들을 아래에 소개한다. 이는 한국 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이는 상당한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데, 본 항목의 상당 수 내용은 '바트 어만'의 관련 저서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특히 모순이나 현대의 보편적 윤리에 반하는 내용의 경우, 구약이 신약보다 더욱 많이 지적되고 있다.
성경의 역사가 오래된 만큼, 기독교에 비판적인 사람들에 의해 고대 헬레니즘 시대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받아 왔으며[10] 이미 밝혀진지 오래인 논란들의 경우엔 신학적인, 교리적인 반박이나 해석이 나와있는 경우가 대다수다.
다만 그 반박이나 해명들이 기독교계 입장에서 신앙심을 위해 펼쳐진 논리이고, 확실한 논리적 근거들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말이 되게 해석할 수 없을까 고민하다가 이런저런 신학적 가설, 설정을 덧붙이거나 가정하고, 교리로 덧붙여서 해명하는 식이라 종교적인 가치관을 배제하고 볼 때는 정신승리 내지는 설정 놀음이라는 것이 문제다.[11] 또 몇몇 개신교의 경우는 반박의 논리성에도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아서, 성경 논란에 대해 해명하려 하는 기독교인들의 주장 중에는 심지어 토끼가 자기 똥을 먹으니 되새김질 동물이라는 몰상식한 주장까지 나올 정도다.(...)
또한 신학은 그 특성상 다른 학문과 다르다. 일반 과학 이론의 경우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설계하여 그 가설을 증명할 만한 증거가 나오면 이론으로 자리 잡지만, 그 가설을 증명할 만한 증거가 나오지 않거나, 반대되는 증거가 발견된다면 가설을 폐기하게 되어 있다. 즉, 이론 자체가 깨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시작한다는 것이다. 반면 신학의 경우, 어떠한 경우에도 '신은 실존한다'는 명제를 절대 깨질 수 없는 절대적 진리로 상정하고 시작한다. 비종교적/객관적 시각에서 볼 때, 위에서 이야기하는 신학의 차원에서 시도되는 교리적 반박이나 해석은 모두, 야훼가 실존한다는 기본 명제를 절대적 명제로 설정한 상태에서 성경 내부의 상호 모순이나, 비윤리적/비과학적/전근대적인 부분들을 합리화하고, 일종의 설정 놀음을 통해 최대한 말이 되게끔 만든 것에 불과하다. 이렇다보니 신학이 2000년 동안 교리 논박과 정립을 거듭했네 어쩌네 하지만 그러한 해명들은 이미 신앙을 가진 교인들을 상대로나 유효한 교회 내수용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대다수다.
이러한 논란 지적에 대해서, 기독교의 근간인 성경의 논란점을 비판하면서 기독교 교리나 신학을 제외하고 성경 서술 그대로를 가지고 비난이나 논란을 제기하는 건 신화학과 종교학에 대한 무지가 상당수 드러난다는 기독교인들과 신학자들의 반박이 있다. 여기서 종교학자들의 주장을 넣지 않은 이유는, 종교학자들은 성경이 그들 나름대로의 신적 체험이 담겨 있으나 시대적 한계가 상호 모순이 많기 때문에 성경을 절대적 진리라 보지 않으며, 다른 종교의 경전이나 신화와 똑같이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성경의 특정 기록이 행해진 당시의 시대적 배경, 교리적인 설명을 고려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종교인에게는 가능한 해설일지 몰라도 비종교인들의 입장에서는 성경 자체의 신성성(神聖性)에 의문이 생기게 된다. 전지전능한 하느님의 저작인 성경은 시공을 초월하여 항상 유효해야 하기 때문이다. 종교인들은 고대인들의 사고방식이 현대인과 다를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다름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적 한계라고 보는 사람들이 더 많다. 성경에 기록된 비과학적/비합리적 내용들은 고대인과 현대인의 시각 차이 때문이 아니라, 고대인들의 한계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렇듯 하느님의 지시를 받은 인간들이 썼다고 해도 문제가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전능한 신이 올바른 지식들을 전해주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은가? 또한 당시의 인간들이 후대에 과학자들이 밝혀낸 사실들을 모른다고 해서 전지전능한 신이 그 수준에 맞춰서 책을 쓰도록 한다는 것은 넌센스이다. 게다가 사실 이런 해명은 고대인들을 얕보는 처사다. 고대인들이 현대인보다 지식이나 사고의 폭은 뒤떨어질지 몰라도 결코 지능이 모자라거나 이해력이 떨어지는게 아니다.
또한 성경의 시대적 한계를 감안하게 되면 성경이 그리스 로마 신화나 단군 신화, 북유럽 신화와 다를 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데꿀멍을 시전해야 한다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몇몇 기독교인들은 성서에 대해 열린 시각으로 그 가치와 한계를 모두 인정하는 신학은 당연히 다른 고대 신화도 인간의 신적 체험을 담고 있음을 인정한다고 하는데, 이는 기독교 신학에서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는 주장이다(종교다원주의). 일단 한국 내의 어떤 신학 대학도 이렇게까지 가르치지는 않는다. 이는 기독교 기본 교리를 부정할 위험이 있기 때문. 보수적인 교단 계열의 신학대는 물론이거니와, 한국 내에서는 가장 진보적이라는 기장 계열 한신대 신학과에서조차 다른 종교 및 신화의 모든 형이상학적 존재를 인정하지는 않는다.
적지 않은 수의 모순이나 내용 불일치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기독교 신학에서는 시대상 한계의 연장선상으로 필사자의 실수, 즉 오기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렇게 하면 진보적인 기독교 신학에서는 상당수의 오류에 대해 설명이 된다. 근데 문제는 극단적 성서무오설을 주장하는 보수 기독교인들의 주장, 즉 전지전능한 야훼가 성경 필사에 직접 관여했다는 주장은 여기서 설득력을 잃게 된다. 전지전능한 존재가 필사에 직접 관여했는데 오기가 생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기가 생긴 이유에 대한 설명은 다음 4가지로 정리가 가능하다.
1. 신은 전지전능하며 성경 필사에 관여했다. 그런데 오기가 나왔다. 그렇다면 신은 전지전능하지 않다.[12]
2. 신은 존재하나 성경 필사에 관여하지는 않았다. 이 경우는 신이 관여하지 않은 기록물인 성경이 신의 말을 전달한것도, 신 자체를 진실되게 서술한것도 아니란 말이 된다.
3. 신은 실존하지 않으며, 오류와 오기가 많은 것은 그 시대 저자들의 시대적 한계이다.
4. 신은 존재하며 성경 저자에게 감동을 주어서 성경을 쓰게 했지만 기계적으로 감동을 준 것이 아니라 성경 저자에게 맥락이나 메세지, 환상 등만 던져주고 나머지는 알아서 쓰게 했기 때문에 당시 시대적 배경이나 잘못 알고 있던 부분들이 그냥 그대로 녹아들어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는 대부분의 진보적 기독교 교단의 주장이다. 단, 이 경우에는 신이 이러한 논란들과 오류들이 나타날 것을 미리 알고 있었지만 손 놓고 있었냐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3.1 성경 내부의 불일치 사례
성경/논란/모순 항목 참고.
3.2 역사 기록과의 모순
성경/논란/역사 기록과의 모순 항목 참고.
3.3 과학과의 모순
성경/논란/과학과의 모순 항목 참고.
3.4 현대 윤리에 반하는 내용들
성경은 신약과 타나크를 막론하고 인간의 보편적 윤리에 반하는 내용들이 대단히 많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21세기인 현대와 성경이 쓰여질 당시의 청동기 ~ 고대 말기의 전근대 사회 가치관의 괴리로 해석해야 한다.
반면, 성경은 진실은 아니지만, 애초에 과학 사실이나 고대 윤리를 전하기 위해서 쓰인 책이 아닌 시대를 초월한 구원 논리를 쓴 책이라고 보는 온건 성향 종교인들도 있다. 이들은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는 구절이라도, 현대 사회에서 받아들이기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정복 전쟁을 설명하는 구절에서도 타민족 학살이 아닌, 악과 맞써 싸우는 신앙인의 자세를 찾는다던지 하는 식으로.
극단적인 축자영감설을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의 주장대로 영원하고 전지전능한 야훼가 개입해서 성경 집필에 관여했다면 당연히 시대와 사회를 초월하여 항상 진리로 받아들여져야 할 성경의 내용이 21세기의 서구식. 현대 윤리와 충돌하는 경우가 생기고, 성서가 인간의 언어로 쓰여졌기 때문에 한계가 있지만 야훼가 실존하므로 성경에서 시대초월적인 가치를 찾는다는 그들의 주장에 반감이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성경/논란/윤리적 문제 항목 참고.
3.5 현대 사회에서는 지킬 수 없는 부분
#!wiki style="border: 1px solid gray; border-top: 5px solid orange;padding:12px;" {{{+1 한정적으로 다중 관점이 적용되는 문서입니다.}}} {{{#!html <a href="https://namu.wiki/topic/@토론번호@">이 토론</a>}}}에서 다수 의견을 병기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본 문서에 한정하여 다중 관점 따르기가 인정됩니다. 이 방침에 이의가 있거나 수정이 필요하다 여기신다면 해당하는 토론란에서 먼저 의견을 작성하시기 바랍니다.{{틀:토론 합의/설명문서}}
현대 윤리에 비추어 보아도 문제가 되지 않아도, 현대 사회에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 존재한다. 반면, 이러한 점의 대부분이 현대 기독교에는 해당되지 않으며(심지어 일부 조항은 유대교에도) 해석하는 사람과 교단에 따라 적용이 다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 피를 먹지 말라고 하는 부분이 여호와의 증인 때문에 논란이 되고 있다. 이걸 지키려면 고기에서 피를 100%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당장 모든 고기를 못 먹게 된다.(...)[13]
정 지키고 싶다면 채식주의자가 되면 된다.또한 피를 먹지 말라는 부분을 확대해석해서 수혈을 받지 않고 있기에 사고가 나면 실제로 수혈을 거부하고 죽음을 택한다. 이게 본인만 그러면 욕 좀 하고 말겠지만 문제는 자녀들에게도 그런 짓을 강제한다는 것. 여호와의 증인 항목을 참조하면 알겠지만 실제로 자녀의 의지와 아무 상관 없이 부모가 병상의 자녀에게 수혈하기를 거부해 아이가 죽거나, 죽을 뻔한 사례가 많다. - 지상 생물 중에서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만 먹을 수 있다고 되어 있으며 이외의 동물은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고 그 주검을 만지지도 말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돼지는 새김질하는 동물이 아니므로 (성경을 따른다면) 먹을 수도 만질 수도 없다.
- 생선 중에서는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것만 먹을 수 있다. 즉 두족류와 장어를 먹을 수 없다.
- 메뚜기무리를 제외한 곤충은 먹을 수 없다. 번데기나 로열젤리같은건 먹을 수 없다.
- 소나 양이나 염소의 기름을 먹을 수 없다. 즉 마블링을 먹어선 안 된다.
소고기에서 먹을 수 있는 부분이 몇이나 될까? - 아이를 낳으면 일 년 된 어린 양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데 국내법에서는 정해진 도축장 이외의 장소에서 허가 없이 동물을 도축해서는 안 된다. 그 외에도 많은 곳에서 제사 규정이 드러나 있다. 근데 애초에 성전이 없어 제물을 바칠 수도 없다(…).
- 두 종류 이상의 재료로 된 옷을 입어선 안된다고 한다. 따라서 고분자 물질[14]로 구성된 합성섬유로 된 옷을 입을 수 없다.
- 여자는 남자 옷을 입을수 없고. 남자는 여자 옷을 입을수 없다. (신명기22:5) 남장여자 여장 남자들 지못미.
유니섹스는 어떨까 - 군 진영 안에서는 화장실을 설치할 수 없다.(...)
야삽들고 나가서 싼 다음 파묻은 건가?(신명기 23:12) - 난간이 없는 지붕을 만들수가 없다. (신명기22:8)
- 아내는 격투중인 남편을 구하기 위하여 상대방의 음낭을 잡을 수 없다. (잡으면 손목을 잘라야 한다.) (신명기25:11~12)
이건 인도주의적이잖아, 의사양반!잡으면 성폭행 아니냐 - 돌로 쳐죽여야 한다는 법 대부분. 안식일에 일을 했다던가.(민수기15:32~36) 시온산에 들어간 동물이라던가. (히브리서12:20) 무당이라든가.(출애굽기22:18) 혼전순결을 잃은 여자라든가.(신명기22:20~21) 부모님 말씀을 거역했다던가. (신명기21:20~21)
유대교 중에서 근본주의적인 종파는 투석형 등을 제외하면 아직도 위의 율법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 정말 야삽으로 똥을 파묻는 구나!하지만 유대교의 경우에도 구약의 규범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미슈나, 탈무드 등의 신학 해설을 통해 유화적으로 부드럽게 현대 사회에 적용시키는 편이다.
또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십자가 희생과 아후 사도들의 신학적 논쟁을 통해 율법에서 신자들을 해방[15]시켰기 때문에, 현재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받을 뿐이며 십계명을 제외한 구약의 자잘하고 삶의 제약이 심한 율법들은 강제로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 정식 교리이다. 특히 제사에 관한 내용, 식생활에 관한 내용은 더욱 그러하다. 다만 십일조 같이 돈과 관련된 율법의 경우는 아직도 고집하는 기독교 종파들이 많아 논란의 여지가 되고 있다. 돈 되는 것만 인정
여기에 대해서는 도덕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도록 해석되는 대목은 그 자체로 현재도 비판이 가능하다는 주장도 있으며[16] 사실상 사문화되거나 의미만이 남은 구절은 구절 자체일 뿐, 받아들이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 달린 문제라는 주장도 있다. 받아들이는데 있어서는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
3.6 기타
- 성서무오설 문서 참조
3.7 잘못된 논란
3.7.1 표절 논란
과거 이 항목에는 성경에 나온 예수의 이야기들이 타 신화들을 '표절'했다는 주장이 담겨있었으나, 시대정신에 나온 내용들을 그대로 옮겨적은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인 무신론 서적들[17]에도 예수의 이야기가 다른 종교의 것을 표절하였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는 않다. 이러한 무신론 서적들이 성경 자체에 대해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겠지만, 리처드 도킨스는 구약의 몇몇 예화들의 중복[18]을 두고 '신성한 경전의 출처가 잡다하다'라고 까기도 했고,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예수 탄생에 대한 복음서의 서술[19]이 전혀 역사적인 근거가 없다고 까기도 했다. 도킨스나 히친스 등이 성경 자체에 대해서도 공격하는데, 이들이 '예수 신화 표절론'을 꺼내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시사할까? 결국 명백한 '표절' 근거는 없다는 이야기다.
또 다른 예시를 들자면, 버트런드 러셀은 그의 저서 <러셀 서양철학사>에서, '에페소스의 디아나'숭배가 성모 마리아 흠숭으로 변화하였다는 것, 이사야서가 실은 여러 명의 저술이 혼합된 것이라는 등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소리를 하지만, 미트라 종교에 대해 서술하는 내용은 '당시에 그런 종교가 있었으며, 초기 기독교와 경쟁적인 관계였다'가 전부이다. '표절'이 아니다. [20]
즉 기독교의 여타 신화 표절론은 학술적인 입장에서 볼 때에는 별다른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주장이다. 기타 안티 기독교 사이트에서 돌아다니는 유사 종교 비교표니 태양신 호루스와 예수의 유사성 이니하는 떡밥들은 전부 시대정신에서 나온 거라고 보면 된다. 게다가, 시대정신이라는 저작물 자체가 사실상 유사역사학 및 음모론적 불쏘시개라는 것을 감안하면, 표절론은 헛소리에 가깝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3.7.2 니케아 공의회 정경 논란
다빈치 코드의 영향으로 인해 니케아 공의회에서 성경 목록을 정했다는 논란도 있는데, 그런 적 없다.[21] 니케아 공의회는 과연 예수가 하느님과 인간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한 건지, 아니면 하느님이자 인간인지를 결정한 공의회이므로 그리스도교 사상에는 매우 중요한 공의회이긴 했지만, 성경 목록을 정한 적은 전혀 없다. 다빈치 코드는 어디까지나 소설이지 역사적인 사실과 무관하다.
다만 정경이 인간의 손에 정해졌다거나, 삼위일체 교리 등이 인간들의 결정으로 확정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당장 어느 것을 경전으로 인정할 것인가는 현대까지도 교파마다 다른 상황이라.
4 논란에 관한 논란
4.1 4중적 해석법
4중적 의미의 해석은 중세까지 유행하던 해석방법으로 성경해석을 4가지 의미에서 관찰하는 것이다. 필로의 영향을 받은 오리겐에 의해 3중적 의미의 해석이 시도되었는데 4중적 의미의 해석으로 정립되었다. 1.""역사적 의미 혹은 문자적 의미 (sensus historicus or literalism)""란 단어들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것 2.""교훈적인 의미(senus tropologicus)""란 교훈과 도덕적 시정(the correction of morals)을 찾는 것 3.""풍유적인 의미(sensus allegorical)""란 문자적 의미 이상의 다른 의미를 설명하는 것 4.""영적 의미(sesus anagoricus)""란 신비적으로 혹은 공적으로(mystically or openly) 사용되는데, 듣는 자의 마음이 하늘의 것들(heavenly things)을 묵상함으로써 감동받고 훈계를 받는 것. 4중적 의미의 방법으로 예루살렘을 해석해 본다면 문자적(literal)으로는 팔레스타인의 문자적 도시이며, 풍유적(allegorical) 의미로는 교회를 의미하며, 도덕적(tropological) 의미로는 인간의 영혼을 언급하며, 영적(anagogical)인 의미로는 하늘의 도성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하와는 교회를, 노아의 방주는 십자가를 상징하기도 한다.
4중적 해석법을 도입할 경우, 이 문서에서 지적되는 성경에 관한 논란을 둘러싼 상당한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비기독교 입장에서는 기독교 입맛에 맞춘 성경 해석 방법이 아니냐는 합당한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밑의 비판 단락 참조.
일단 문제는 이러한 사중적 해석법을 성경에 체계적이고 주체적으로 적용하는 기준이 기독교 교계에 정립되어 있냐는 것인데, 대체 성경의 어느 부분까지를 역사적으로 보며, 어느 부분까지를 교훈적 의미로, 또 어느 부분까지를 풍유적 의미 및 영적 의미로 보아야 할까? 그 기준이 사실상 정립되지 못한 점이 큰 문제이다.
세계 기독교의 50~60%를 차지하는 가톨릭, 정교회 등의 보편 교회는 거룩한 공교회(sancta ecclesia catholica)의 해석이 그 기준이라 성경 해석에 있어서 통일되어 있으므로 해석에 있어서 일관된 견해를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개신교의 경우는 현재 지구상에 개신교 종파의 수는 대략 무려 2만여개에 달하는(...) 교파들이 있는데, 또한 각 종파마다 저마다 옳다고 내세우는 성경 해석법은 당연하게도 한 둘이 아니다. 이들이 말하는 '거룩한 공교회'의 해석은 대체 이 2만여개의 종파의 교회 중 어느 공교회의 해석을 말하는 것인가? 기독교 연합체인 WCC나 WEA에서는 각 기독교 종파를 아우르는 성경의 4중적 해석의 기준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지 않다. 국내 외 어떤 기독교 연합체나 어떤 공의회라도 각 종파를 막론하고 적용할 수 있는 성경 해석의 4중적 해석법의 기준을 제시한 적은 없다.
가까운 예로, 국내 기독교 메이저 교단 중 가장 보수적인 교단인 예수교 장로회와 가장 개혁적이라는 기독교 장로회 사이에는 성경 해석에 있어 차이가 많은 편인데, 특히 예수교 장로회 쪽에서는 위에서 언급된 문자적 해석을 주로 하며 성경무오설을 주장하는 반면, 기독교 장로회 쪽에서는 성서 비평을 통한 해석을 위주로 문자 그대로의 해석은 지양한다는 것이다.
또한 예장의 경우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교훈 상당수를 개인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 하는 반면, 기장의 경우에는 사회 구원과 연결 지어 해석하며 여러 사회 운동과 접목시키는 경우가 많다. 특히 보수 쪽인 예장 쪽에서는 기장의 이러한 성경 해석에 대해 좌파적이라는 평가를 하며, 심하면 이단이라는 언급도 심심찮게 하며 대단히 공격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니, 이러한 개신교 교파 간의 차이를 기독교 연합체에서 통합하여 공통된 성경 해석의 기준을 제시할 수 있다는 주장부터가 교리적으로 불가능한 주장에 가깝다. 애초에 개신교는 통제받지 않는 성서 자유해석이 원칙이기 때문.
개신교 내 종파들 간의 문제 뿐만 아니다.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계의 성경에 대한 해석도 여러 부분에서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구약 인물들의 영이 지하로 내려 갔다는 구절에 대하여 로마 가톨릭에서는 이를 연옥 교리에 대한 근거로 해석하지만, 개신교 계에서는 이런 해석들을 전면 부정하며 연옥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또한 복음서의 내용 중에 예수가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기는 구절에서도 로마 가톨릭 측에서는 이 구절을 베드로에 대한 교황권과 로마 교회의 수위권의 부여로 해석하지만 이 해석 역시 개신교 계에서는 전면 부정하고 있다. 물론 교회 일치 운동 등이 현대에 활발히 일어나는 점도 무시해선 안되지만, 교계의 교리적인 소통은 지지부진한 것이 사실이다.
설사 가톨릭과 개신교, 개신교계의 모든 종파들을 아우르는 초교파적인 성경의 4중적 해석법에 대한 기준안이 적용되어 성경의 상당수 논란이 해결되었다고 봐도 여전히 역법/숫자 상의 상충 및 상호 모순, 이문 현상이 일어나는 부분이 많다. 애당초 야훼의 뜻과 개입으로 쓰여졌다는 성경이 집필되고 필사되던 시점에서조차 그러한 오류들이 산재했던 것이 현실인데, 몇 천 년이 지난 오늘날의 시점에서야, 기준을 세운다고 세워서 해석해 봐야 해석 과정에서 오류가 생기지 않을래야 생기지 않을 수가 없는 것. 게다가 성경은 다 다른사람이 적었는데다가 소실된 부분도 약간씩 있기 때문에 더 특정한 해석을 하기가 애매해진다.
간단한 예로, 신약 성경에 산재하는 모순과 사본들 사이의 이문들의 문제는 4중적 해석법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복음서만 해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리스도교인들이 내용을 서너 번, 혹은 그 이상 원래의 내용을 바꾸었기 때문이며, 이외에도 교파 간의 갈등이나, 개인의 신학적 고찰 등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 내용에 변경이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필경사의 부주의[22]나, 오/탈자 등의 문제로 인해 생기는 오류와 모순들과 이문들[23]문제들은 4중적 해석법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다.
여담이지만, 이 글에 기여한 사람들이 대부분 한국인이라 그런지 논의의 대상이 가톨릭과 개신교에만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지구상에는 정교회나 성공회, 각종 오리엔탈 정교회의 분파들 같은 기독교계 종파들[24]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며, 독자적인 성경 해석을 발전시킨 이런 종파들까지 초교파적인 4중적 해석안의 주체여야 할 것이다. 개신교와 가톨릭만 합의를 보는 것도 이 문단에서 계속 언급했듯이 엄청나게 어려운 문제이다.
4.2 비판적인 시각에서 본 성경 속 논란에 대한 문제
결론적으로 보면, 비판적인 시각에서는 애초부터 모든 기독교 종파를 해석하는 통일되고 권위있는 해석이란 전무하며, 성경의 어느 구절이 비유인지 어느 구절이 문자 그대로의 의미인지 알 수 있는 기준 역시 없고 여기에 대해선 가톨릭과 개신교, 그리고 개신교 내부의 2만여개의 종파들마다 저마다의 성경 해석법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은 시궁창에 가깝다.
또한 해석에 대해서도 기독교인들이 성경에 나타나는 유아 학살이나, 곤충이 네 발로 기어다닌다는 등의 비합리적인 부분 내지는 문자적으로 해석하기 불리한 부분에 대해서는 풍유적/영적 해석 으로 땜빵하는게 아니냐는 비기독교인들의 지적도 나온다.
다시말해 하필 성경 내에서 발견되는 여러 상호 모순이나, 타민족 학살, 여성 차별, 동성애 증오, 유아 살해 및 대량 학살 등의 전근대적/비윤리적 부분에 대한 해명을 요구할 때만, 즉, 야훼와 기독교에 불리한 부분을 질문하게 되면 바로 위와 같은,'전지전능한 야훼의 뜻이라 미천한 인간을 알 수가 없다'는 논리를 펼친다.사실 다 똑같은 야훼의 뜻인데, '야훼가 인간을 사랑한다'와 같이 듣기에 좋고 긍정적으로 내비칠 수 있는 부분에서는 모르는 것 없이 술술 이야기 하다가, 왜 유독 '야훼가 아말렉의 젖먹이 아기들을 죽였다'같은, 비윤리적이고 전근대적인 구절에만 이르면 '인간은 알 수 없다'고 나오는 것인가?라는 지적이다.
'전지전능한 신의 뜻이라 인간은 모른다'라는 기독교인들의 말이 사실일 경우, 야훼는 자신에게 유리하고 듣기에 좋은 부분은 인간이 잘 알 수 있도록 해놓았으면서, 유독 자신의 비윤리적이고 잔악하고 야만적인 부분만 인간이 알 수 없도록 해놓았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위의 4중적 해석법 단락을 보면 알겠지만 기독교계를 보면 성경 구절을 해석할 때 해당 구절에 반영된 구절이 종파에 따라 성경에 대한 해석이나, 야훼의 뜻을 이야기하는데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에 기독교도의 교리논박도 말이 통일되지 않은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 해석의 근거를 물어보면 대부분 성령의 힘이라느니, 영적 눈으로 봐야 한다느니 하는 말을 하며, 성령이 영적 눈을 틔워주어 알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는 점[25]에서 답답하다는 말이 많다.
또 기독교계의 성서해석은 주로 성경이 진리라는 교계의 입장을 먼저 내세우고 나서 성경의 논란을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론에도 언급했듯 종교적 가치관을 차치하고 보면 말이 안되는 점들이 존재하여 지금까지 무수한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따라서 성경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하느님의 뜻을 인간이 이해할 수 없다면 우리는 우리도 뭔지 모르는 대상을 그저 숭배해야 한다는 뜻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인간의 정신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정의를 지닌 초월자라면 크툴루나 야훼나 다를 게 무엇인가?
또한 '인간을 초월하는 야훼의 뜻이라 인간은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를 취한다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데, 정말로 인간의 이해 수준을 뛰어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변명할 말이 없어서 우기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고로 비신자들의 의견은 후자에 가까울 수 밖에 없다.
더욱이, 소돔과 고모라의 경우, 이성과 동성을 가리지 않는 집단 성행위, 근친상간, 수간이 난무했다고 주장하는데, 확실하게 묘사한확실하게 묘사를 하면 어떻게 될까 부분이 없다. 그저 창세기 19장에 계간을 암시하는 내용이 있는데, 도시 전반적인 설명이라 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이후의 기록들은 하나같이 '부정한 자들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흔적도 없이 소멸하리라' 혹은 너무 타락했다고 할 뿐이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타락했는지 말하지 않는다.
5 성경내 몇몇 오류의 원인 분석
- 대부분의 숫자 문제
사울 이외에도 나이나 집권 햇수, 대수가 일치하지 않는 문제는 호적과 역법과 같은 기록 문화가 제대로 자리잡히지 않은 사회에서는 흔히 나타나는 일이다. 이런 제도가 없으면 지방 풍습에 따라서 해(年)를 세는 관습이 달라지는 경우도 많고, 출생일을 제대로 기록하지 않다보니 자기 나이가 확실하지 않은 사람도 매우 많아진다. 성경 기록을 내부적으로 참조하자면, 이스라엘 왕국은 다윗 이전 까지는 아예 호적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이러한 사례를 가공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자면, 어느 마을에 자기 나이가 100살이라고 주장하는 할머니가 있다고 해보자. 이 할머니는 마을에서 가장 오래 살았기 때문에, 이미 그녀가 언제 태어났는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그녀의 아들이나 손자, 그외 아래 세대의 사람들은 그녀가 100살을 살았다고 믿어줄 수 밖에 없다. 실제로는 70살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해도.
그리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그 아들은 자신의 나이와 어머니의 나이를 셈하다가 실수를 하여 20 정도를 잘못 더해 버렸고, 자신의 어머니가 120살에 돌아가셨다고 여기게 되었다. 게다가 이 마을은 오래되고 오류가 많은 역법으로 해를 세고 있었기 때문에, 1년의 길이가 다른 지방보다 더 짧았다. 나중에 기록가들은 구전 기록을 바탕으로 역법 보정을 한 결과, '200년을 살다가 죽은 할머니의 전설'이 버젓하게 기록된다.(…) 솔직히 이런 우연이 중첩될 가능성은 상당히 낮다. 하지만 살다가 죽은 할머니들의 숫자, 즉 모집단이 너무 많아서 상당히 낮은 확률을 적용해도 몇명씩 나오게 된다.
이렇게 전승 기록들은 후대에 문자 문화가 도입된 다음 증언을 채록하면서 과장과 왜곡을 거치면서 수년에서 수십년, 수백년까지 차이가 날 수 있다. 문자 기록이 있는 사회라도 기억의 오차 등의 이유로 인해 출생 기록이나 집권 시기가 문헌에 따라서 몇년씩 차이 나는 경우는 흔히 비교적 있으며, 이런 사회에서도 하층민들은 아예 구체적인 출생 시기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경우도 매우 많다.
심지어 대한민국에서도 고작 몇십년 전만 해도 본인이 말하는 나이, 주변인이 증언하는 나이, 족보나 호적 등에 기록된 나이가 1~2년에서 많게는 수년 정도 차이나는 일은 흔히 있었다. 행정 기록의 도움없이 민간에서 기억하는 연대기적 기술은 이처럼 정확성이 떨어지는 것이다.[26][27]
- 대부분의 산수 문제
이 문제도 간단한데, 고대인들에게는 수학(이라기보다는 산수)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 의무교육이 활발한 우리나라 사람에게 사칙연산을 셈하는 것은 너무나 간단한 지식이며 심지어 초등학생마저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근본주의 유대교 하레디 집단의 사례를 보면, 더하기와 빼기는 둘째쳐도 한국에서라면 미적분과 벡터에 고통받는 18살에 곱하기와 나누기를 배우는 사례도 존재한다. 그러니까 기초적인 사칙연산마저도 '성경에 포함된 지식'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나마 우리가 현재 쓰는 아라비아 숫자는 사칙연산은 간단하게 되어 있어서 몇만자리 셈도 간단하게 할 수 있지만 0과 자릿수의 개념이 없는 그 이전의 숫자들은 간단한 사칙연산도 상당히 어렵다. 히브리어 문자를 그대로 숫자로 활용하는 히브리 숫자 역시 마찬가지로, 이 문자를 사용한 계산이 그리 쉽지는 않다.
- 생물학 문제
근대 박물학이 발달하기 전 까지, 지식인이라 해도 생물에 대한 이해는 변변치 못한 수준이었다. 지식인들은 동물이나 곤충, 식물을 그리 자세하게 관찰하지 않았고, 이런 현실에 존재하는 생물을 관찰하는데는 관심이 별로 없었다. 지식인이 아닌 일반인들은 이런 분야에 몰두할 경제적 여유도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그 때문에 생물에 대한 지식은 경험적이고 피상적인 것으로 현실과 동떨어졌거나 왜곡된 것이 의외로 많이 있었다. 이러한 왜곡된 선입견들은 근현대까지만 해도 꽤 많이 남아 있었으며, 실증적인 연구에 따라서 하나씩 제거되고 없어지게 된다. 파브르의 곤충기 같은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생물 기록이 나타나게 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다.
일반인들도 동식물, 곤충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데, 유대교에서는 특히나 '더러움'을 경계하여 유대교의 신학자, 사제 등은 동물을 더욱 가까이 하지 않았다. 이런 사람들에게 "곤충의 다리는 몇개인가?"같은 질문은 전혀 중요한 지식이 아니었고,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즉, 진지하게 생물을 관찰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물에 대한 지식이 엉망이 되었던 것이다.
5.1 논란의 원인 분석에 대한 결론
신실한 기독교, 유대교 신자들에게는 성경과 성경 저자가 이러한 시대적 한계를 지녔다 하더라도, 성서무오설 신봉자가 아닌 이상 그것이 적어도 하나님이 실존하지 않는다는 근거는 되지 않으며, 하나님 대한 믿음이나 신앙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입장이 주요 종교계의 해석이다. 교황청에서도 본 항목에 나온 것 같은 성경의 상호 텍스트 간의 모순이나 현대 윤리에 반하는 내용들의 경우, 해당 내용을 부정하지 않고 당시 성경 저자의 시대적 한계로 분명히 인정을 하고 있다. 다만, 그러한 사실들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대해서는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 이는 성경 내의 모순이나 현대적 관점에서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기독교의 핵심가치를 훼손하거나 핵심 자체가 모순이라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세속적/비종교적 관점[28]으로 보면 성경이 다른 종교와 경전, 그리고 다른 신화에서도 발견되는 이러한 서술 상의 한계를 똑같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종교에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믿지 않아도 되는 이유만 만들어주는 꼴이다. 물론 서술 상의 한계점 자체가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기독교적 세계관의 고유한 특징이 없다는 얘기는 아닌데다, 지적된 여러 모순이나 논란 등을 기독교의 특별함은 지키면서 새롭게 해석하는 연구가 활발히 진행 중이다.사실 무신론자들이 야금야금 증가해서 기독교 변증가들이 팔을 걷고 열심히 기독교 변증학을 연구 중이다.[29]
6 학술적인 탐구
6.1 구약 성경에 대한 이해
구약을 이루는 24(가톨릭 46, 개신교 39)권의 책은, 유대인이 '토라'라고 부르는 모세오경을 제외하고는 통일된 체계도 없이 각각 읽혀져 왔다. 사실 Bible을 '성경'이라고 표현하는 발상이 '사서오경'에서 나온 것인데, 유교의 수많은 경전들과 마찬가지로 구약의 많은 책들이 기원전 1400년부터 400년 사이에 각각 다른 사람들에 의해 다른 목적으로 쓰여진 것들이다.
시대적으로 가장 앞선 시기의 토라를 살펴보자. 유대인은 처음부터 하나의 집단으로서 존재해오지 않았다. 탈출기에 묘사된 출에굽사건을 계기로 하여, 기존에는 별개의 집단이었던 것이 하나로 규합된 것이다. 아무리 오래 보아도 이 때를 기점으로하여, 역사적으로는 고대 이스라엘 국가 성립 이후에야 민족의식(Nationalism)이 생겨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전설상의 시조인 아브라함, 민족의 시조 모세의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 토라인 것이다. 창세기는 토라의 가장 앞장을 장식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기원전 440년경 취합된 것으로 인정된다.
기독교인 중에서 기존의 성서무오설과, 성경은 비과학적이라는 양쪽 논리를 모두 비판하는 시각에서는 창세기는 세상이 창조된 과정이나 모습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세상은 하느님이 만드셨다"라는 지식을 전달하고, 당대에 널리 퍼져 있던 범신론, 다신론과 그들의 신앙을 구별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며, 기원전 1400년경의 사람들을 위해 당대에 불필요한 이야기는 최대한 빼 버린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출애굽기 부터는 추가바람 - 특히 가톨릭 성서해설서 등의 자료에 풍부한 역사적 설명과 함께 나와있다.
6.2 신약 성경에 대한 학문적 연구
우선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 복음에 대한 학문적 연구 결과를 살펴보자. 복음서들은 원래 그런 이름으로 불린 것이 아니었다. 원래는 특정한 저자가 없었던 것이다. 각 복음서는 각 그리스도교 분파의 '가르침'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다 후대에 가상의 저자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복음서들은 사실상 익명의 작품들이다. 복음서 안의 모든 내용은 중세기 대부분의 문서와 마찬가지로, 예외없이 대문자로 씌어져 있고, 제목이 없으며, 장이나 절의 구분도 없고, 실제로 낱말들 사이에 구두점이 없다. 이 복음서들은 유대인의 아람어로 쓰여지지 않았고 오직 그리스어로만 쓰여졌다.
사실 복음서 간의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한 문제이다. 복음서는 예수를 일일히 쫓아다니면서 작성한 게 아니다. 사도행전 8장 25절, 사도행전 8장 4절 등에 나오는 듯이 처음 예수의 행적과 말씀은 성문화되어 전해진 게 아니라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내려왔다.
이런 구전복음(Oral Gospel)이 처음으로 문서화된 것이 대체로 기원후 50년정도라고 보고, 이런 원시적인 문서자료들과 구전자료, 그리고 복음사가가 자신의 기억들을 취합하여 작성한 복음서로서, 4복음서 중 가장 이른 마르코 복음서이 작성된 것이 기원후 70년경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행전의 시작, 끝부분을 기반으로 좀 더 이른 시대(기원후 50년~60년)를 말하기도 한다.[30]
이렇기 때문에 복음사가들이 각자 사용한 자료, 그리고 그 자료들을 어떤 의미에서 배열했는가에 따라 복음서들의 당연히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예수의 생애를 역사적으로 복원하려는 무수한 시도가 있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예수전'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작금의 복음서들은 종교적 경전으로서는 몰라도, 역사적 고증 가치가 있는 문헌으로서는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31]
또한 복음사가들은 복음서를 쓸 때 제각각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마태오 복음서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대인을 위한 것이고, 마르코 복음서는 로마 이방인, 루카 복음서는 그리스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따라서 복음사가들이 자신이 수집한 기록들을 나열하고 정리할 때 그들의 의도가 개입되었다.[32] 복음서 간의 차이가 나오는 것은 이것 때문이기도 하다. 앞서 '주된 논란 목록'의 복음서 간의 차이에 관한 내용들도 상당 부분 이에 관련된다. 또한 이것은 엄밀한 의미의 일관된 '예수전'을 만드는 것이 위험한 일인 이유이기도 하다. 각 복음사가들이 일정한 의미를 가지고 배치해 놓은 사건들을 뒤섞어 버려서 성경의 해당 책이 주는 의미를 퇴색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서는 또 세월이 흐름에 따라 내용이 바뀌고 덧붙여졌다. 이교도 비평가 켈수스는 그리스도교인들이 '내용을 비판하는 주장을 무마할 목적으로 서너 번, 혹은 그 이상 원래의 내용을 바꾸었다'고 지적한다. 이외에도 교파간의 갈등이나, 개인의 신학적 고찰 등 여러가지 이유에 의해 내용에 변경이 이루어졌다. 그리스도교 철학자 오리게네스는 3세기의 저술에서, 변해 가는 신학적 풍토의 요구에 발 맞추기 위해 원고가 계속 편집되고 개편되었다는 사실을 시인한다.
오늘날 수 많은 판본의 원고가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것은 필경사의 부주의나. 일부 사람들이 주제넘게 원문을 고쳤기 때문이거나, 더러 교정자로 자처하여 제멋대로 첨가하거나 삭제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입증하기 위해, 바트 어만은 완전히 무작위로 복음서 일부를 선택했다. 이 때 선택된 것은 마르코 복음서 10장과 11장이었다. 그는 여러 초기 원고들 간에 다른 점이 얼마나 많은지 점검했다. 결과, '전체 내용으로 볼 때 48곳 이상이 달랐다. 상호 비교하면 2곳만 다른 것도 일부 있었으나, 대부분 3곳 이상이 달랐고 어느 경우는 6곳 이상이 달랐다.
학자들은 복음서 내용 가운데 후대에 추가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냈다. 예컨대 원래 마르코 복음서는 16장 8절에서 끝난다. 예수의 무덤이 비어있고 여자들이 무서워하는 장면에서 끝난 것이다. 소위 긴 결말이라고 부르는 부분이 초기원고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지만, 오늘 날엔 거의 모든 신약에 포함되어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마르코 복음서 참고.
참고자료 : 《성경 왜곡의 역사》(바트 어만[33] 저, 민경식 역, 청림출판)
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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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구약 내에서의 상호모순을 나타낸 시각화 자료이다. 큰 이미지로 보기. BibViz Project 홈페이지에서 모든 성경의 모순을 검색하고 찾아볼 수 있다.[34] 막대기 하나하나가 장(chapter)를 의미하며, 하얀 건 신약, 회색은 구약을 나타낸다. 막대기의 길이는 각각의 장들의 절(verse) 분량을 의미하고, 빨간 원은 모순되는 부분을 연결해놓은 것이다. 이 시각화 자료는 소설로 치자면 '세계관 내에서의 모순' 즉 서술상의 오류와 모순들을 표현하고 있다. 성경에서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부분이나 학술적, 역사적인 모순까지 따져보면 이런 모순의 수는 훨씬 늘어난다. 이 웹사이트에 성경 충돌부분을 클릭하여, 댓글 부분을 보면, 충돌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조금 있기는 하다.[35]
이러한 자료들이 있기에, 성경의 문자 그대로가 100%의 과학적, 실제적 진실이라고 여기는 극단적 성서무오설은 대개 개드립 취급 받는다. 다만 종교계에서도 성경을 둘러싼 여러 문제를 둘러싼 해석과 교리적인 절충을 적용하고 시도해 왔다는 점, 그럼에도 성경에는 논란이나 비판을 받을 수 있다는 요소가 존재한다는 점을 모두 숙지하고 도를 넘는 극단적인 성경 비난이나 성서무오설 등에 치우치지 않는 중립적 자세가 성경을 탐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하다고 하겠다.
8 같이보기
- ↑ 미국의 성공회 주교로서 매우 진보적인 사상의 신학자
- ↑ 그 중에 중세 라틴어 성경이 된 불가타 판 성경과 그에 바탕을 둔 킹 제임스 성경 등에 대한 논란이 많은 편이다.
- ↑ 영국의 철학자 토마스 홉스는 저서 리바이어던에서 '오늘까지도 여전히 남아 있다', '오늘까지도 여전히 그렇다' 등의 구절이 많이 나타나는 <사무엘기>, <여호수아기>, <창세기>, <롯기>, <판관기>, <열왕기> 등이 그 시대에서 몇십 년 후에 쓰여졌다고 저술하였다.
- ↑ 예를 들어 가톨릭에선 창세기는 바빌론 유수 시대에 그간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해져 내려오던 창세기 관련 전승을 문서화, 경전화한 책이라는 점을 공식적인 학설로 받아 들이고 있다.
- ↑ 결국 성경은 절대 틀린게 없으며 그러므로 천동설, 창조론 등을 인정해야 한다는 문제가 생긴다.
- ↑ 흥미롭게도 같은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중 하나인 이슬람교의 경전인 쿠란에서도 이런 진보적 주장이 나온다.
- ↑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한 S목사가 담임 목사로 있는 Y교회를 20년 이상 다닌 사람도, "주일 대 예배 때 목사가 성서 비평적으로 교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증언한다.
- ↑ 대한민국에서 가장 개혁적인 기독교 장로회 계열 신학대이다.
- ↑ 당장 신정통주의 신학만 자세히 파도 알 수 있다.
- ↑ 마찬가지로 중세 때는 이교도들에게, 근대 때는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
- ↑ 이에 대해선 마찬가지인 창조설 논란도 참조.
- ↑ 그런데 인간의 기준으로 조차도 전지전능하지 못한 인간이 전지전능의 조건 결정짓는것 자체가 어찌보면 잘못된것이다.
- ↑ 하지만 여증은 고기를 잘만 먹는다. 성경에 고기 먹어도 된다는 내용이 있어서 피를 안 먹으려는 노오력만 보이면 된다더라(...)
- ↑ 2종류 이상의 화학물질로 구성
- ↑ 부정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강제적 율법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완성시켰다고 표현한다.
- ↑ 예를 들어 "이웃을 사랑하라"는 구절은 나쁘게 해석할 여지가 없지만 "동성애자를 돌로 쳐죽이라"는 구절은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좋게 읽히지 않는 점이 다르듯이 명백히 문제가 있는 구절은 당연히 비판받아 마땅하다는 관점
- ↑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나,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 데이비드 밀스의 <우주에는 신이 없다> 등
- ↑ 아브라함이 왕에게 아내를 여동생이라고 속이는 이야기 등
- ↑ 이 문서에도 나오는 퀴리니우스와 헤롯 왕 등의 서술에 대한 불일치
- ↑ 을유문화사 판 <러셀 서양철학사>(서상복 번역), 381페이지에 근거함
- ↑ 천주교, 정교회, 개신교에서 모두 인정하는 보편공의회인 니케아 공의회에서 성경 정경 목록을 결정했다면, 아무리 마르틴 루터라고 해도 구약의 얌니아 목록을 받아들이는 일을 어떻게 할 수 있겠나? 교회사에 대한 오류 중 반기독교로 인해 은근히 널리 퍼진 소문이다. 특히 천주교를 기준으로 할 때, 트리엔트 공의회 이전까지 성경 정경 목록은 성문법적으로 정한 게 아닌, 관습법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 ↑ 당시 신약 성경은 띄어쓰기가 없이 필사되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발생되는 오류가 상당했다.
- ↑ 신약 성경의 이러한 이문 문제는 매우 심각해서, 바트 어만은 신약 성경의 전체 단어 숫자보다 이문의 수가 더 많다고 이야기 한다
- ↑ 우리나라에서야 정교회와 성공회가 듣보잡이기는 하다. 하지만 정교회의 신도 수인 약 4억 명은 가톨릭의 약 13억명의 신도 수에 비하면 약 3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어떤 개신교 단일 종파보다도 큰 규모이며, 성공회도 전 세계적으로는 약 1억 명 정도의 신자가 있다(성공회의 경우에는, 넓게 보면 개신교의 범주에 들어가지만)
- ↑ 성령이 감화 감동을 일으켜 영적 눈으로 풀이를 하는데, 그럼에도 왜 교파마다 해석이 다른 부분이 존재하는가? 성령도 교파 별로 여러 종류가 있는가? 라는 의문. 또 성경을 해석하고 영적 눈을 틔워주는 전지전능한 성령이 있는데, 왜 인간이 알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하는가? 성령이 인간이 알 수 없는 부분과 알 수 있는 부분을 골라서 해석을 해주는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될 수 있다.
- ↑ 다만 이 경우는 족보나 호적 쪽이 오히려 틀린 경우가 많다. 특히 시골에서 심한데, 유아사망률이 높아 출생 후 1년정도 지나야 출생신고를 하는 관행이 있었기 때문.
- ↑ 그럼 신고할 때 원래 출생일로 하면 되지 않겠냐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도 그렇듯이 당시도 정해진 기한 안에 신고하지 않으면 벌금을 물어야 했다. 당시는 모두가 가난했던 지라 아까운 벌금을 내느니 그냥 아이의 생일을 늦춰버리는(...) 선택을 한 것. 그래서 당장 70년대 태생만 해도 실제 생일과 주민등록상 생일이 다른 경우가 부지기수다. 오죽 그런 사람이 많으면 개인정보 수집에 관한 법률 시행으로 생일을 수집하기 전 시절의 인터넷 사이트 대부분은 본인의 진짜 생일과 주민증 생일, 두 가지를 넣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따로 넣기 귀찮고 어린 게 좋아서 주민증 생일 하나로 퉁친다. - ↑ 나무위키는 규정상 비종교 위키이며, 세속적 관점과 종교적 관점이 상충될 때는 세속적 관점을 우선시하여 집필하도록 되어 있다.
- ↑ 농담이 아니라 진짠데, 궁금한 사람들은 알리스터 맥그래스(옥스포드대 분자생물학 및 신학 박사, 성공회 사제), 윌리엄 레인 크레이그(탈봇대학교 철학교수 및 기독교 변증가), 존 레녹스(옥스포드대 수학과 교수)의 저서나 유튜브 강의를 들어보자.
- ↑ 해당 주장은 사도행전의 마무리가 사도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는 식의 열린 결말이기 때문에 아주 빠르게 잡으면 1차 투옥 이전(기원후 58~60년), 늦게 잡아도 사도 바울 생전(기원후 65~68년)에 초본이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사도행전의 시작에서 이미 누가복음을 기록하였다고 말하였고 누가복음이 공관복음 중 가장 늦게 작성된 것으므로 여겨지므로 해당 주장에 따른다면 가장 먼저쓰여진 마가복음, 혹은 Q사본은 기원후 50년경에 정립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 ↑ 가장 처음 마르코 복음서가 작성되었고, 마태오와 루카는 마르코 복음서을 참고하는 한편 마르코 복음서 이외 예수의 언행을 기록해놓은 일종의 어록집을 공통으로 사용하였다. 이를 'Q자료'라고 한다. 이 Q자료 외에 마태오와 루카가 독자적으로 사용한 자료들은 마태오 특수자료(M), 루카의 특수자료(L)이라고 한다. 요한 복음서는 4복음서 중 가장 마지막으로 집필된 것으로 기원후 100년경에 작성되었는데, Q자료는 물론 다른 복음서에 나오지 않는 상당히 많은 다른 기록들이 존재한다.
- ↑ 좀 값이 나가는 성경에는 각 복음서가 시작하기 전에 "저작 목적" 및 "저작 배경" 등이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런 부분들을 읽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 ↑ 이 사람은 미국 기독교내에서 대표적인 보수적 신약학자의 수제자였지만, 불가지론자가 되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성서연구에 따른 회의 때문에 불가지론자가 되었다고 잘못 알려졌는데, 바트 어만의 또다른 저서 "예수 왜곡의 역사" 후기를 보면 성경 연구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온갖 부조리한 일이 벌어지는 세상에서 신은 절대선이라는 것이 맞는 것인가(악의 문제)라는 신앙적인 회의감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 ↑ 이 웹사이트에서는 구절을 한쌍식 연결한것이 아니고, 한 토픽에 대해 같은 답과 다른 답들을 연결한것이다. 예를 들어, 지옥이 있다라는 토픽에서는 있다라고 하는 구절들과, 없다고 하는 구절들을 한번에 연결한 것이다. 이해가 안가면, 연결된 선 중 하나를 클릭해 볼 것.
- ↑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람들이 신학을 공부했는지도 의문일뿐더러, 성경은 애초에 목사나 전문가들 입장에서도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으며, 단순히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자체가 큰 오류일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지도 의문이다. 혹자에 의하면 성경은 성령이 없이는 죽은 책에 불과하므로 접근시에 유의해야되는 부분이라 하기때문이다. 만약 그럴 경우 이미 저 사람들은 성경을 대적한다는 태도를 가짐으로써 이미 성경을 해석할 자격을 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