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미도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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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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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부천군 용유면 실미도(현 인천광역시 중구 실미도)에 위치한 대한민국 공군 684부대 북파공작원들이 부대원을 살해하고 부대를 이탈하여 시내버스를 탈취해 중앙청을 향해 돌진하다가 자폭한 사건이다. 당시에는 8.23 난동사건이라고 칭하였다.

2 사건의 전개

1968년 1월 21일, 소위 김신조 사건으로 알려진 1.21사태가 일어났다. 북한이 무장 게릴라를 보내 당시 국가원수였던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그 복수(김일성 암살)를 계획하게 된다. 이를 위해 공군 산하에 이를 전담할 특수부대인 684부대를 창설하고 실미도에 비밀훈련기지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7.4남북공동성명 등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고 중앙정보부장이 교체되는 등[1] 상황이 변하면서 암살 계획은 점차 뒤로 밀려나고 잊혀지게 되었고, 이들에 대한 대우도 나빠지게 되었다.

결국 불만을 품은 이들은 1971년 8월 23일 반란을 일으켜 훈련을 담당하던 공군 교관들과 기간병력들을 살해하고[2], 섬을 탈주하고, 인천에 상륙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육군 제33보병사단(현 제17보병사단) 예하 해안경계부대의 저지선을 뚫고 시내버스를 탈취하여 경인국도를 타고 부평, 소사, 영등포를 거쳐 청와대로 돌격하려다가[3] 무장공비로 간주되어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대방동(현재는 동작구 관할)[4]에서 30사단 예하 등 육군 병력에게 포위, 저지되어 부대원 대다수는 수류탄으로 자폭하였으나, 수류탄 폭발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4명은 체포, 군사재판을 받고 사형당하고 말았다.

오랫동안 무장공비 침투 또는 군 특수범 난동사건으로 알려져 안 좋은 취급을 당해 오다가, 당시 정치권에서 진상규명 요구를 통해 정치문제화 되면서 암암리에 "북파공작원들의 탈출 난동"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1987년 6월 항쟁 이후 본격적으로 금기의 영역에서 벗어나 특수부대 난동사건으로 자세히 알려지게 되었다.[5] 1999년 실상을 파헤친 소설 실미도#s-2가 발간되고 2003년에는 강우석 감독의 영화 《실미도》가 개봉되면서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김일성 암살작전이 미뤄지게 된데는 닉슨 독트린과 관련된 음모론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 작전이 성공하게 되면 북한에게 전면전의 명분을 주는 것으로, 이렇게 되면 베트남에서 전쟁 중인 미국에게는 또다른 전쟁이 발생하여 한 번에 2곳에서 전쟁을 수행해야만 한다. 또, 실패하더라도 당시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으로 인한 미 해군 장병들의 귀환협상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어 미국에서 작전을 수행치 못하게 하였다는 설이다.

3 부대원들의 출신

영화 실미도의 영향으로 죽으러 가는 거나 다름 없는 이 임무에 투입하기 위해 사형수, 조폭, 흉악범 등을 포섭해 특수부대를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평범한 사람들이 자원한 것이다. 시골의 순박한 농민이나 일용직 노동자 등이 많았다고 한다.

실미도 사건 직후 이 사건을 수사했던 당시 공군 감찰부장 김중권[6]은 2004년 언론 인터뷰에서 당시 실미도 부대에 범죄자 출신은 없었다라고 밝혔다. 본인도 실미도(영화)를 보았는데, 사실과 다른 부분이 많았다면서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보였다.

흔히 있는 선입견과는 달리 조폭이나 흉악범죄자는 군인으로서의 전투능력은 오히려 일반인보다 떨어진다. 이런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반사회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반사회적인 성향이란 곧 사회의 룰을 대놓고 무시할 정도로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사고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는 뜻이다. 사회의 룰을 무시하는 인간들이 그보다 훨씬 엄격한 군대의 규칙에는 적응 할 수 있겠는가?

반사회적인 성격 때문에 반항적이며, 절제력이 약하기 때문에 욕망에 쉽게 굴복하여 게으르고, 자제심이 없어 무의미한 폭력을 휘두르거나 규칙을 어기는 경우도 많은데 모두 군대에는 적합한 성향이 아니다. 실제로, 범죄자들의 집합소라고 민간에 많이 알려진 프랑스 육군 외인부대인터폴의 협조까지 받아가며 지원자들의 신원 조회를 철저히 해 범죄자들의 입대를 원천봉쇄하고 있고, 덕분에 군기를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철저히 준수하고 크게 사고치는 일이 드물다. 반면, 진짜 범죄자 출신을 많이 받아들이는, (공식 행사 때도 정복 셔츠 단추를 풀어헤쳐 가슴털(...)을 내놓고 다니는 걸로 유명한)에스파냐 육군의 외인부대는 사고 정말 잘 치기로 유명하다.

4 다른 해석

이 부대가 '공작원'하면 생각할 수 있는 형태하고는 상당히 다른지라 실미도 특수부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해석이 나오는데, 그 중 하나가 실제 김일성 암살이 아닌 상징적 보복의 산물이라는 의견도 있다.

정부에서 진짜로 김일성을 암살하려 했다면, 수많은 훈련을 받고 북파 경험도 많이 겪었을 베테랑 대원들을 동원했을 테고, 치밀한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한 나라의 원수를, 범죄자 혹은 민간인을 잡아다가 무인도에서 겨우 몇 개월 훈련시켜[7] 북파시켜 암살하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고, 암살이 정식으로 시도되었다면 최소 몇 년간 북쪽 고정 간첩들과 긴밀한 연락을 통해서 은밀하게 계획이 되었을 것이지만, 실미도 부대는 그런 특징이 전혀 없었다.

즉 684 부대는 김일성 암살 특공대도 뭣도 아닌 열받은 정부가 "너희도 암살특공대를 보냈으니 우리도 보내주마" 라는 단순한 논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제로 실미도 역시 그렇게 외딴곳도 아니고, 1.21 사태와 동일한 숫자의 북파공작원의 훈련, 또한 지리적으로 기밀성이 있는 위치도 아니었다[8]

5 참고할것

  1. 실제로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김형욱에서 김계원, 이후락으로 바뀌었다.
  2. 김방일 소대장 외 병 5명 등 총 6명이 살아남았으며, 화장실이나 숲 속에 숨은 경우, 또는 바다에 뛰어들어 어선에 구조되어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3. 사진에 나온 태화상운 버스가 당시 그들이 탈취한 버스였다.
  4. 그림에서도 보듯 현재의 유한양행 구 본사 건물 앞이다. 그러니까 노량진을 얼마 안 남긴 것. 계룡대로 이전하기 전의 해군본부 등이 위치해 있었으며, 지금도 공군회관 등 소수의 군사시설이 남아있다.
  5. 참고로 70년대 당시에도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물론 그때는 이 사실을 함부로 누설하고 다니면 코렁탕을 먹었다. # ㅎㄷㄷ.
  6. 김중권은 전역후 판사로 일하다가 1981년 민주정의당 창당에 합류하여 고향인 경북 울진에서 국회의원으로 3선하였다. 1997년 김대중이 이끄는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였고, 이후 김대중 정부에서 대통령비서실장과 새천년민주당 대표를 역임하면서 민주당 정권의 핵심으로 활약하였다. 2000년 총선에는 고향 울진/영덕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서 불과 19표차이로 낙선하였다.
  7. 68년 4월에 창설되어, 9월에 작전을 실행할 계획이었다.
  8. 실미도 근처 무의도 주민들도, 군사시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부대원들의 훈련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