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 청사

(중앙청에서 넘어옴)
철거 전인 1988년 9월[1]의 조선총독부 청사. 왜 철거했는지를 단번에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진이다.[2]

1 개요

일제시대 식민지 통치행정기관인 조선총독부가 있었던 건물.

8.15 광복 이후에는 '중앙청'이라고 불리며 정부수립 직후에 대한민국 정부청사와 국회의사당으로 활용되었다. 이후 국회의사당은 부민관을 거쳐 1975년 완공된 여의도 국회의사당으로 빠져나갔고, 정부 부처들도 세종로 정부종합청사나 과천 정부종합청사로 빠져나간 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

참고로 사진에서 우측 하단에 보이는 붉은 벽돌 건물은 옛 경기도청으로, 현재는 철거되어 그 자리에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또 이 건물 뒷편 산 속에 푸른색 지붕으로 된 작은 건물이 있는데, 1991년에 철거된 청와대 옛 본관으로, 노태우 전 대통령까지는 이 건물에서 대통령들이 업무를 수행했다.


2 역사

2.1 청사 건립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는 남산 왜성대의 일본 공사관을 청사로 사용하였지만, 1908년에 건립된 용산구의 통감부 건물 역시 별도로 계속 운용하였다. 그러나 직원수의 증가와 많은 사절의 내방, 그리고 각종 기관의 통괄로 인한 사무량의 확대로 넓은 청사가 필요하게 되었다.

신청사의 부지로는 행정적으로 편리한 장소를 채택한다는 구실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한국인의 문화적/역사적/민족적 심리를 압도할 수 있는 곳을 물색하였다. 원래는 서울시청 자리 등이 부지로 꼽혔었지만 당시 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당시 건축가였던 이토 주타(伊東忠太)에 의해 지금의 위치가 정해졌다. 1912년경복궁에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이 본격화되면서 흥례문과 주위의 행각, 영제교 등이 철거되기 시작한다. 1914년에는 이듬해에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를 경복궁에서 개최한다는 핑계로 경복궁의 중요 전각 몇 채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전각들이 헐려버렸다...

1912년부터 조선철도호텔을 설계한 독일인 건축가 게오르그 데 라란데(George de Lalande)가 설계에 착수하였으나 1914년에 기초설계만 남긴채 사망하였고, 그 뒤에는 일본인 건축가인 노무라 이치로(野村一郞), 구니에다 히로시(國枝博) 등이 청사의 설계를 완성했다. 건물은 르네상스 양식에 바로크 양식을 절충한 네오 르네상스 양식으로 설계되었다. 조선에서 3번째로 9대의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으며, 당시에는 최신 기법이었던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했으며, 화강석과 대리석으로 마감하고 장식은 유럽에서 수입해와 만든 호화판 건물이기도 했다.

1916년에 시작된 공사는 처음에는 5년의 시간과 300만의 비용이 예상되었지만, 결국 1926년에 완성되어 10년이 걸렸고 돈은 675만 1,982엔이 소요되었다. 예산과 시간이 예상보다 2배씩 들어간 것. 이 과정에서 중국인/일본인 석공 300명과 조선인 노동자 200만 명이 년마다 투입되었다.

경복궁의 입구 역할을 하던 광화문 역시 조선총독부 건물 완공과 때를 같이 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광화문 항목 참조. 일제는 광화문을 옮긴 후 그 자리를 '총독부 광장'이라 부르면서 각종 옥외 행사를 이곳에서 거행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이 곳은 1968년 광화문이 복원될 때까지 군정청 광장, 중앙청 광장 등 이름만 달리하며 여러 관제행사의 개최 장소가 된다.

한편 조선총독부는 1937년경복궁 북쪽에 총독 관저를 신축하였다. 이곳은 8.15 광복 이후 경무대를 거쳐 지금의 청와대 부지가 된다.

2.2 해방과 그 이후

1945년 9월 9일 미군에 항복하는 마지막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
1953년 8월 15일 중앙청 광장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하자, 1945년 9월 9일서울에 진주한 미군이 총독부 청사를 미군정청 청사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날 오후에 총독부 청사의 제1회의실에서 오키나와 주둔 미군 군단장 존 하지(John Reed Hodge) 중장과 당시 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 사이에 항복 문서 서명식이 있었다.

이후 미군정에 의해 조선총독부 청사는 캐피탈 홀(Capital Hall)이라 불리게 되었다. 중앙청(中央廳)이란 이름은 당시 학자였던 정인보(鄭寅普)가 캐피탈 홀을 직역하여 지은 것이다.

1948년 5월 10일에 중앙청 중앙홀에서 헌법 제정을 위한 역사적인 제헌 국회를 개의하였고, 그해 7월 17일 1층의 메인 홀에서 헌법공포식을 열고 헌법을 공포하였다. 1948년 8월 15일에는 청사 앞뜰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이 거행되었다. 이후 중앙청은 대한민국 정부의 청사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정부청사로서의 기능이 계속됐다는 점에서 어떤 의미로는 중앙청사는 강점기와 동일한 기능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 건물이 정부 청사로 사용되기 시작할 때도 그에 대한 비판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시에는 조선총독부 청사만큼 정부 기관이 입주하기에 적절한 건물이 딱히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사용하던 형국이었다. 본래는 빠른 시일 내에 새로운 청사로 이전하겠다는 계획이 있었지만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무산되었다.

6.25 전쟁 때는 인천상륙작전 후 후퇴하던 조선인민군서울을 조직적으로 파괴했고, 그 때문에 서울에 성한 2층 건물이 없을 지경이었다. 중앙청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불을 질렀는데,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라 파괴되진 않고 실내만 극심한 피해를 입게 된다. 아무튼 서울 수복을 상징하는 대한민국 해병대 장병들의 태극기 게양 사진이 찍힌 장소이기도 하다.[3]


1962년 11월 22일에 6.25 전쟁으로 파괴된 청사를 복구하여 중앙청 개청식을 열었다. 또 이때 중앙청 건물밖 동쪽으로 50m 떨어진 곳에 안보회의장소로 쓰일 벙커가 세워지기도 했다. 1979년에는 경복궁 마방 터에 중앙청 내 공무원들의 복지를 위해 후생관이 들어섰다.

이후 1968년에 서양식 정문이 철거되어 콘크리트 광화문이 복원되고 1970년에는 바로 건너편에 정부서울청사가 설립되어 대다수 기관들이 이전하고 1982년에는 정부과천청사까지 신설되면서 법무부, 보건사회부, 농림수산부, 건설부, 과학기술처 5개 기관이 과천시로 이전함에 따라 정부청사로써의 기능이 이양되었다. 이후 구 중앙청 건물이 일제 침략의 상징이라 정부청사로 더 이상 쓸 수 없다는 의견에 다다르자 1982년부터 박물관 개조 계획이 실시되어 1986년 8월 21일에는 청사의 개보수 작업을 거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이 과정에서 1983년에 안보회의장소 벙커가 유물 보관소로 개조되었다. 이후 1985년서울 지하철 3호선 중앙청역이 개통되었고, 후에 경복궁역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구 중앙청 후생관은 국립중앙박물관 부속 사회교육관으로 개편되었다.

[중앙청 시절의 건물 내부와 그 인근 건물들을 다룬 포스팅.]


2.3 철거

맨 처음에 해체가 논의된 것은 한국전쟁 중이었던 1.4 후퇴 이후에 막 서울을 수복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이 일제의 상징을 서울의 심장부에 둔다는 것이 말이 되냐면서 철거를 지시하면서였다. 당시 이 계획을 검토한 게 육군 공병감인 엄홍섭과 육군 참모총장 백선엽이었는데 당시 공병대에서는 "이렇게 거대한 석재를 나를 장비를 도무지 못 구하겠다."고 난색을 표했고 백선엽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미군에게 빌고 빌어서 불도저 4대를 빌려오긴 했는데 중장비는 그게 고작이었고 기껏해야 지게꾼들이나 동원할 수 있었다. 해체할 능력은 아예 없고 폭파라도 시켜서 억지로 없앤다 해도 무거운 석재를 나를 능력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거기에 대체할 건물이 마땅치 않다는 애로사항도 있었지만 핵심적 원인은 철거할 능력 자체가 없었다. 그 이후 수십년 동안 해체에 대한 논의는 없다가 그 후 노태우 대통령 시절 중앙청 철거를 지시했었으나 비서진이 바뀌면서 또 다시 유야무야되었다. 그 뒤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뒤에 해체 계획이 입안되었다.

1995년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총독부 건물의 해체를 상징하는 의식으로, 총독부 건물의 첨탑을 기계톱으로 절단해 크레인으로 제거하는 공사를 했다. 1995년 첨탑 철거 당시에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들은 그 옆에 있던 지하 유물보관소로 옮겼다.

1995년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들은 중앙청 바로 옆에 있는 구 사회교육관 건물로 이전되었다.[4] 이후 차근차근 기계식으로 절단해서 해체하는 과정을 통해 철거해 나가 1996년에는 완전히 해체했다.


순수 건물철거비로 당시 돈으로 약 47억원이 소요되었으며, 이때 중앙청 건물의 실측 및 영상자료, 모형제작을 합쳐 117억원이 소요되었다. 후술할 청사 해체 논란에서도 등장하겠지만, 처음에는 독립기념관 부지로 이전한 후 원래 모습 그대로 재현해 보존하는 방안도 검토했으나, 2천억원의 엄청난 예산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되어 무산되었다.


2.3.1 폭파설과 오해

1995년의 첨탑 절단 행사가 '폭파 행사였다'라고 와전되기도 하는데, 분명히 절단해서 크레인으로 들어 올려 제거하였다. 잘 생각해 보면 폭파설은 말이 안 되는데, 폭파했다가는 근처 경복궁 전각 등에 진동+파편 피해를 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폭파한 적은 없다. 당시 철거 영상을 보면 [마치 마지막 외벽 부분을 폭파하는 듯 보여서] 이런 이야기가 퍼진 듯하다. 즉, 폭파설은 와전된 것이다.

게다가 철거 1년 전 뉴스에서 총독부 철거 계획을 보도할 때 "첨탑을 자르고 건물은 가림막을 설치한 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할 듯"이라는 보도를 해서 이것이 폭파되었을 것이라고 와전된 것이긴 한데, 그때 건물을 어떻게 철거할지에 대해선 학자들과 관계자들 간에 폭파와 해체 의견이 여러번 설왕설래 했었다고 한다. 그 뉴스가 나간 이후에도 여러번 논의하다가 최종적으로는 조각조각 해체하는 것으로 정해지고 첨탑 자르기 행사를 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철거되기 전까지 총독부에 대해 폭파로 철거를 할 것이다, 폭파 시도를 한 적이 있다 등 여러가지 뜬소문이나 루머들이 많이 퍼졌는데, 과거 한동안 와전된 폭파 관련 설 중에서는 이런 것이 있다. "7~80년대 쯤에 일재 잔재 청산으로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기 위해 내부 소장품들 다 옮기고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해 폭파시도를 했으나, 건물 자체가 독일식으로 쓸데없이 튼튼하게 지어져서 소리만 요란하고 건물 자체는 멀쩡했다. 총독부가 쓰러지지 않아"는 루머도 있었다. 8~90년대에 일부 중/고등학교 국사 교사들이 이 잘못된 설을 실제로 믿고 수업때 인용했다고 한다.

저렇게 폭파해도 무너지지 않기에 한동안 총독부 건물은 일제시대를 반성하는 역사의 흔적으로 남겨놨었다는 설인데, 이 잘못된 설은 6.25 전쟁 통에 인민군이 방화를 하여 내부에 불이 났지만 건물이 콘크리트벽이라 멀쩡했다는 일화가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저 뜬소문대로 폭파하게 된다면, 위에서 말했듯 근처 경복궁에 파편이 날아갈 수도 있고, 진동이 생겨 경복궁을 파손시킬수 있기에 폭파방법은 철거계획에서 떨어져나갔다. 애초에 한국에선 폭파에 대한 의견은 여러 번 나오긴 했지만 그동안 총독부 건물을 시도로라도 폭파한 적은 없다.


2.3.2 일본의 반응

철거 결정이 내려진 이후 일본 정부에서 통째로 옮겨가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가, 이 발언에 열받은 김영삼이 바로 다음 날 폭파[5]해 버리고 "일본 놈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라는 폭탄 발언을 던졌다던 일화가 전설처럼 내려온다. 원체 이 발언은 당시 일본역사 관련 망언이 극에 달했기에, 이를 놓치지 않은 김영삼장쩌민과의 정상회담을 마친 후 공동 기자 회견에서 한 말이다. [관련 기사] 이때, 일본 내 웬만한 지한파, 한국통들도 '버르장머리'란 단어 자체를 해석 못 했었다는 후문이 있다. 이 때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율이 일시적으로 70%를 넘었다고 카더라. 실제로 김영삼 대통령의 최고 지지율은 하나회 해체, 금융실명제 실시 등의 정책으로 인해 90%를 넘은 적도 있으니, 아주 믿지 못할 이야기는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날에 와서는 속만 시원했을 뿐이고 정작 외교적 실리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한 발언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속이라도 시원한 적이 별로 없어서 고평가인 듯

이 철거에 관한 일본 측의 여담으로, 일제강점기에 활동하며 한국 고건축을 연구했던 학자 후지시마 가이지로의 책인 <韓의 건축문화> 증보판 서문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쓰여있다. 역자인 이광노 서울대학교 명예교수가 쓴 서문인데, 자신이 1984년 교환교수로 일본에 가서 후지시마 가이지로를 만났을 때 후지시마가 "지금 조선총독부 청사를 국립박물관으로 쓰고 있다고 들었다. 총독부 건물 속에 한국의 반만년 역사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스모 선수가 승부에서 지면 상투를 자르듯, 이제라도 그 건물의 상투 부분(돔 부분)을 잘라버려라."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한국의 고건축을 연구한 일본인 학자다운 말이다. 다만, 일본인 고건축 학자가 상투 자르듯이 첨탑을 절단하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반영되어 실제 그렇게 한 것인지는 알 수는 없고 당시의 정치가들의 의견을 자세히 들어봐야 한다.

조선총독부 청사의 문제는 한국식민지배한 총독부의 건물로 세워졌다는 것 외에도 문제가 있었다. 경복궁의 흥례문 권역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지어놓은 건물이라는 것. 거기다가 고의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은 있으나 경복궁을 가리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원래 광화문과 근정문, 근정전은 일직선에 있어서, 왕이 근정전에 앉으면 육조 거리가 보이도록 설계되어 있었는데 그 앞을 완전히 막아버린 것이다. 게다가 조선총독부는 저 셋이 이루는 축에 맞지 않게 지어져서, 2006년 새로 복원하기 이전의 광화문은 총독부에 맞게 지어져서 각도가 약간 비뚤어져 있었다. 사실 이는 진북자북의 차이로 인한 것이었지만, 일제의 악의였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는 논란점 중 하나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로, 총독부 해체 결정이 난 후 온 외신 기자(특히 일본)들이 관계자에게 이런 건축물을 왜 헐어버리냐고 하자 관계자는 "우리가 너네 왕궁을 허문 후에 그 자리에 총독부랍시고 저딴 거 세우면 기분 참 좋겠다?"라고 쿨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또한, 개그맨 전유성"아깝다! 총독 집무실 자리에 화장실을 만들어서 전 국민이 시원하게 볼일을 볼 수 있도록 하면 좋았을텐데!"라고 신랄하게 이야기를 했다. 재활용 의견 중에는 전유성처럼 "화장실로 만들어서 재활용하자라든지, 쓰레기 저장고로 쓰면 되겠네?"라든지 일본을 비하하는 목적의 재활용 의견이 수두룩했었다.

아무튼, 독립기념관의 건축과 조선총독부로 쓰인 중앙청을 해체하여 첨탑을 독립기념관으로 옮긴 사건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건축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례인 것은 사실이다. 이렇게 중앙청은 일제 강점 86년, 건설된 지 70년(건설 시작부터는 80년)만에 이 땅에서 사라졌다. 일제강점기에 총독부로서 존속된 건 19년, 그 이후 중앙청으로서 쓰인 건 51년 만이었다.


2.3.3 청사 해체 논란

일본이 회수비용을 부담한다고 의사를 피력했기 때문에 일본에 팔아먹는게 이득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없지는 않았지만, 일단 일본이 회수한 뒤에 어떻게 치장해서 자신들의 업적(?)을 자랑할 지 걱정되는 것을 제외하고라도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경복궁 복원이라는 숙원사업을 진행할 것이 뻔한 상황이라 시간이 많이 걸리는 원형보존식의 회수보다 철거하는 방식이 우위로 여겨졌다. 이는 반일감정으로 대변되는 다수의 국민정서에 부합하는 조치였기 때문에 단행될 수 있었다.

정부 내부에서 건물을 독립기념관 부지로 이전시킨 다음 복원하자는 논의도 있었는데, 앞서 홍콩에서 영국 식민지배의 상징적 건물이었던 머레이 하우스(Murray House)[6]를 중심가 센트럴에서 외곽지역의 스탠리로 벽돌 하나하나의 순서까지 그대로 옮겨버린 사례와 비슷하다. 그러나 이 안 또한 앞서 말한 대로 국민정서에 불합치한다고 여겨졌던 데다 이전 복원 비용이 철거 비용을 초월했다. 철거 비용은 117억원, 이전하여 복원공사하는 비용은 2000억원... 그러자 정부가 내린 결론은 "그 정도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복원할 가치가 없다"였다.

물론, 이에 대한 반대 여론도 많았다. 1995년 8월에는 일부 서울특별시 시의원들이 서울시의회에 청사의 역사적 가치와 경제적 이유로 "구 조선총독부 건물철거보류 동의안"을 제출하기도 하였으며, 1996년 6월에는 <국립중앙박물관 건물 보존을 위한 시민의 모임>이 서울지방법원에 "건물 훼손 및 철거 금지 가처분"을 신청했었지만 모두 기각되었다. [강원용 목사의 철거 반대 의견에 대한 칼럼] 또 일부 신문은 사설을 통해 반대입장을 분명히 하기도 했으며, 조선일보같은 경우는 4컷 만화로 역사적 자료가 사라진다고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반대측의 요지는 3가지로 정리될 수 있는데,

  • 치욕의 역사도 역사이기 때문에 보존의 가치가 있다.
  • 대한민국 중앙청으로 존재한 기간이 일제 총독부로 존재한 기간보다 더 길어서 한국 정부로서도 상징성이 높은 건물이다.
  • 이미 제정이 폐지된 대한민국에서 궁궐을 복원해봤자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총독부의 역사적 의미를 차치하고 20세기 초의 아시아의 주요한 건축물 중 하나로써의 가치로 인해, 철거에 대한 국내외 건축계의 극심한 논쟁이 오간 바 있다. 아니, 한국 건축계는 거의 일치단결에 가까운 모습으로 적극적으로 철거에 반대했으며, 적어도 이전이라도 하여 복원을 하길 바랬다. 당장 現 서울시 총괄건축가 직을 맡고 있는 승효상부터가 해체 결정에 대해 [배타적 국수주의, 문화적 편협성, 반문화적 폭거, 천민문화]라고 극딜을 넣었고 [아직도 뜻을 굽히지 않고 있다.] 그 이후 승효상은 이 때 하던 천민문화주의이니 비난으로 "외세가 강제로 지은 건물을 지키는 넌 잘났으니 양반문화주의라고 하는 거냐?"는 비난을 엄청 당해야 했다. 그리고 이런 비난 속에 당시 그에게 건축관련 주문을 한 사람들까지 대거 그에게 보이콧하고 주문취소를 하는 등 건축의뢰까지 대폭 줄어 경제적 피해를 봐야 했다. 하지만 승효상 항목에서도 나오듯이 그는 지금도 아쉬워하고 그때 그 주장에서 물러서지 않고 있다. 국내 건축계의 경우, 서양이나 일본에서 수학한 사람들이 대부분인데다 고도성장으로 인한 근대 건축유산들의 무분별한 파괴에 반감이 크기 때문에 그런 태도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건축가들의 의견이 국민 여론과 동떨어졌고, 그 시대에는 민족주의가 지금보다 강하게 남아 있어 그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전술했듯 건축가들이나 전문가들 중에선 해체하지 말고 이전하자는 의견이 많았다. 이 중에서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많은 지지를 받은 의견으로는, 앞서 거론했던 "건물 전체를 독립기념관 부지 안으로 이전해서, 독립기념관 본건물인 겨레의 집 기준으로 서쪽 뜰에 재현하자"[7]는 의견이 있었다. 이는 건물을 조각조각 블록처럼 해체해서 독립기념관 부지 뜰 안으로 옮긴 후 다시 본래 크기로 재조립해서 재현하자는 것을 말한다.[8] 이런 사례로는 홍콩에서 영국 식민지배의 상징적 건물인 머레이 하우스를 비슷한 방식으로 시가지에서 외곽 스탠리로 옮긴 사례가 있다. 위에서 말한 일본의 통째로 옮겨가겠다는 의견과 방법은 같지만, 이 의견은 건물을 일본에 주지 말고, 독립기념관 뜰 안에 건물채 옮겨 봉인 세우고 이를 일제시대 전시관 또는 항일활동 전시관 등으로 활용하자는 것. 후술할 김종필 전 총리도 이와 맥을 같이 하는 의견을 냈다. 물론 이렇게 되면 한국의 건축계나 미술계들에게는 좋은 사료가 될 수 있었고 민족 기념관 부지 안에 식민시대를 되돌아보는 건물을 재현하는 면모로 의미는 있었겠으나, 돈도 철거비용을 상회할 정도로 어마무시하게 들고, 상징적으로도 식민지배의 흔적을 그대로 남겨놓는 것이므로 논란이 되어 사장되었다.

이 의견은 나가떨어졌으나 비슷하게 재현되어, 현재는 건물의 일부 석재만 독립기념관 부지 안에 옮겨져 있다는 게 아이러니한 사실. 하여간 전면 철거보다는 잠시 해체하여 독립기념관 부지 안으로 이전 후 재현하여 일제시대 역사관 등으로 활용하자는 주장 등 많은 논의가 있었으나, 짧은 시간동안 제대로 된 합의나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이러한 논쟁의 결론이 제대로 나지 않은 상태에서 1995년 8월 15일에 정부는 철거식을 강행하였다. [뉴스데스크에 보도된 철거식 영상] 다만 철거조치 당시 국민들의 지지는 높았으며, 이로 인해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율이 크게 상승하였다. 외환위기 전까지는...

이후, 김종필 前 국무총리도 [이를 회상하며 제한적이고 독선적인 YS의 역사인식에 대한 비판의 뜻을 내비쳤다.]

YS는 ‘역사의 후퇴’를 말했지만 역사는 어떠한 경우에도 뒤로 가지 않고 앞으로 전개되는 법이다. 어제는 어제의 논리로 최선을 다했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 오늘이 이뤄진 것이다. 어제는 오늘의 어머니, 어제가 있기에 오늘이 있는 것이다. 역사의 평가는 역사가에게 맡겨둬야 한다. 정치인이 역사를 단죄(斷罪)하려 들면 역사를 오도(誤導)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대통령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국립중앙박물관 건물의 중앙홀은 48년 출범한 제헌국회 의사당으로 쓰인 역사적 장소입니다. 그 중앙홀만은 부수지 말고 독립기념관으로 이전하시지요. 제헌국회가 탄생한 장소는 대한민국 독립의 명맥을 잇는 역사물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 앞 국기게양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가 해방됐을 때 가장 처음 태극기를 올린 게양대입니다. 또 6·25 사변으로 부산까지 피란을 갔던 우리 군이 석 달 만에 서울을 수복하고 태극기를 올린 바로 그곳이기도 합니다. 이 국기게양대도 함께 독립기념관으로 옮겨 남겨 놓으시죠."

2.3.4 해체 이후

국립중앙박물관2005년에 현재의 용산구 이촌동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임시로 쓰던 구 중앙청 후생관-사회교육관 건물은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사용하다 현재는 국립고궁박물관이 되었다. 왕궁박물관 건립에 291억원, 신 국립중앙박물관 건립에 3,300억원 정도가 들어갔다. 다만 10년간에 나누어 집행되기 때문에 1년에 300억 정도 들어간 셈.

현재 철거지에는 경복궁 복원 계획에 따라 경복궁 흥례문을 복원해 놓았고, 본격적인 철거 전에 행해진 첨탑 절단 행사 당시 잘린 첨탑과 일부 잔해는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독립기념관 부지내에 조선총독부 이전을 위한 부지를 마련해놓았는데, 그게 지금의 총독부 철거부재 전시공원이었다. 하지만 이 장식물들의 전시 목적은 능욕과 보존을 동시 추구(…)한다는 것이라, 어떠한 보호 설비나 장치도 없이 사실상 방치되어 있으니 비바람과 햇볕에 그대로 노출되어 부식되고 관람객들의 오물 세례 속에 부식되고 있다.[9] 심지어 관람객이 발로 차거나 돌을 던지거나 낙서를 해도 그냥 그대로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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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 첨탑은 이렇게 방치되어 있다. 탑안에 잡초가 자란다는 후문.

독립기념관 내부의 조경이 깔끔하기로 소문난 것을 감안하면 이 총독부 철거부재 전시공원 만큼은 정말 의도적으로 방치하고 있다는 뜻.

그래서 차라리 없애버리지 저렇게 방치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지적도 많다. 뭐 어때 게다가 당시 철거 현장 주변에서는 조선총독부의 돌조각을 기념품으로 팔기까지도 했다. (쌓아놓고 그냥 가져가라고 했던 것이라고도 한다.) 다만 조각, 중앙홀 대리석 등 보존 가치가 있는 일부 자재는 새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2.4 건물의 가치

이 건물은 분명 20세기 초의 아시아의 주요한 서구식 건축물 중 하나로서 역사적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아시아에 건설된 서구식 건축물 중 규모나 장식 면에서 상당히 독보적인 존재였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건축학적 사조에는 뒤떨어진다는 한계가 있었다. 일제는 조선을 영구 지배하려고 했고, 그 때문에 상당히 심혈을 기울여 총독부를 지었던 것이다. 미적으로나 가치가 있던 건물이고 민족감정과 학문적인 보존가치의 대립으로 논란이 많다.


2.4.1 미술학적 가치

건물의 기본 골격은 당시 최신재료였던 철근 콘크리트로 구성되어 있으며, 내외부의 치장은 과거 르네상스 시대 석조건축물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10] 이는 당시 유행하던 서양의 네오 르네상스 양식으로 처음에 설계하던 독일인 건축가 게오르크 데 랄란데의 영향을 짙게 받은 것이다.[11] 이후 일본인 건축가가 인계받아 설계가 완성되었지만, 이 때문에 전체적으로 서구의 건축 양식이 근대 동아시아에 어떻게 전파되었는지를 보여주고있다.

지금은 사진만으로 확인가능하지만, 철근 콘크리트를 골격으로 하여 실외는 조선에서 채굴되는 화강암 등을 적절히 활용하면서도 르네상스 석조 건축의 양식을 띠었고[12], 주요 장식은 석공들이 수작업으로 완성하였다.

중앙홀 북측중앙홀 남측천장 스테인드 글라스

실내는 벽과 바닥을 타일로 장식하고 부분적으로 암각한 석조각과 대리석, 콘크리트 부속등을 적절히 활용하여 치장하였다. 특히 바닥 타일의 경우 중앙홀을 중심으로 체계적으로 설계 및 계산되어 별모양의 모습을 갖추고 있고, 중앙 천장의 유리화에도 장식성을 가미하였다.

이는 기계화된 단순공정이 아니라 거의 모든 분야의 솜씨가 좋은 전문 시공인과 수공인들에 의한 것으로 하청계약과 전문수공인들 그리고 현장의 기능공들의 합작이 이루어진 증거이며 이로 인해 공사의 진행과정이나 서구형 건축양식의 도입양상등을 확인할 수 있다. 단지 설계상의 특징이나 건물 그자체의 의미뿐만이 아니라, 기술적으로 서구의 설계를 현지에서 조달한 건축자재와 인력을 통해 시공함으로써 서구형 건축문화가 동양에 정착되는 일련의 과정이나 방법등을 탐구하여 발전양상을 역추적할 중요단서가 되었을 것이다.

특히 석조 장식의 경우 조선에서 산출되는 화강암을 통하여 르네상스 양식을 구현한 것으로서 동양의 석공예와 재료로 서양양식을 재현하는 독특한 예술양식을 보여준다.

다만, 이미 옛 서울 역사와 한국 은행 청사와 같은 다른 근대 건축물이 존재하고, 한국전통건축과 괴리되어 세워진 근대건축물이니 만큼, 전통건축물인 훼손된 경복궁의 외관을 복원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더 가치있는 일이 아니냐는 반론을 맞았다.


2.4.2 각종 부속 미술품의 가치

외부에 있는 석재 구조물과과 금속 외장 그리고 실내 장식물들, 미술품 등이 높은 가치를 띄고 있다.

[내부 사진. (1993년 1월 촬영)]

총독부 청사 안에 있던 그림과 여러 미술품도 같이 폐기처분하려다가, 몇몇 그림은, 그것을 그린 일본인 화가들의 후손이 돌려달라는 요청[13]을 하여 폐기는 취소되었다. 그러나 반환은 되지 않고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물론 보관이지 전시가 아니다. 보관목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14] 내용 추가바람.

이 무렵 KBS에서 이 미술품들을 촬영하면서 다큐멘터리로 다루었는데, 일본한국식민지로 아주 오랫동안 가지리라 보고 일부러 조선총독부에 전시했다고 한다. 참고로 지하 구석에 대충 둘둘 말아서 통에 넣은 모습으로 당시 방송에서 약 650점이 넘는 그림이나 조각들이 보관된다고 나왔다. 그밖에도 벽화까지 있었는데 이건 정교하게 떼어냈다.


2.4.3 역사적 가치

민족적 관점에서는 치욕적인 역사를 보존하여 후세에 반성과 자성의 계기로 삼을 수 있다는 점을 제시할 수 있고, 민족적 관점을 배제한다면 일본의 조선 식민통치의 흔적을 보여주는 유적이자 오랫동안 대한민국 정부국립중앙박물관 건물로써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일제패망이후 조선총독이 미군에 항복을 한 장소도, 대한민국 헌법이 최초로 발표된 곳도, 한국전쟁당시 서울수복의 상징과 같은 태극기 게양식의 배경이 된 곳도 다 이곳이었다. 또한 보존상태가 양호했던 건축물이므로 근대건축유산에 들어갈 가치가 있었다.[15]

다만, 그 존재로 하여금 일제강점기를 연상시켜 논란이 되었고 결정적으로 위치가 문제였다. 경복궁을 가로막고 광화문 뒤에 서 있는 데다 흥례문을 파괴하고 지어졌으며, 서울의 중심부에 있어 매우 눈에 띄었다. 또한 이 건물을 보러 오는 일본인들은 과거 자신들의 침략과 식민지배 역사를 반성하기보다는 한반도를 식민지배했던 사실에 대한 우월감과 제국주의 시절에 대한 향수에 도취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독일에도 있었다. 독일에서는 프로이센 왕국의 베를린 궁전이 냉전시대에 철거된 후 그 자리를 오랫동안 공화국 궁전이 차지했었다. 그러다 2012년에 다시 공화국 궁전을 철거하고 베를린 궁전을 복원하기 시작하였다. 시민의식이 성숙하고, 민족주의가 적은 독일에서도 아주 최근에 과거 한국에서 일어났던 것과 유사한 사례가 발생한 만큼 역사적 가치를 둘러싸고 과거 건축물 철거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2.4.4 등록문화재

아이러니 한 것은 중앙청 철거로 인해 근대문화재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 되어서 2000년대 이후에 등록문화재라는 이름으로 근대 건축물 등에 대한 재평가와 보호제도가 생겼다는 점이 있다. 참고로 이 때 군산시동국사 등도 같이 헐려버릴 위기에 처했으나 살아남았고, 지금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다만 등록문화재는 법적인 강제성이 없어 보호기능이 미약하다.

2.5 기타

여담으로 일본한국의 정기를 억누르기 위해 서울에 박아넣은 '日本'글자의 '日'에 해당한다는 풍설이 있었다. 실제로 건물을 위에서 보면 '日'자모양으로 생겼다. 당시 일본인들도 이 떡밥을 좋아했는지 당대 일제의 3개 중추인 일본 국회, 조선총독부, 대만총독부가 모두 '日'자 형태로 생겨 제국주의 삼위일체를 이룬다는 말도 있었다. 물론 근거 없는 주장으로, 당시 서구식 건물들의 전형적인 형태 중 하나였다. 이 도시전설에 대해서는 일제풍수모략설 항목 참조. [여기]를 읽을것을 권한다.

1990년대 박물관이 있던 시절엔 일본인들이 관광하러 와서 반드시 들르는 곳이었다. 덕분에 해체 직전 일본 관광객들이 꽤 늘었다는 후문이 있다. [기사]

해방 당시 한국과 비슷하게 대만 총통부 청사는 1949년에서 지금까지 대만 총독부 건물을 그대로 쓰고 있다. 마잉주 정권 때부터 이전하자는 논의가 시작되기는 했지만 우리나라처럼 철거하자는 말은 없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도 상당기간 계속 썼다는 것은 한국인의 감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대만의 경우 청나라,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역사적 문제(독립문제, 지방의 소외감, 중앙정부에 대한 반감 등등) 등이 얽혀, 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일본의 대만 식민 지배를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대만 총독부 건물은 지금도 잘 쓰이고 있으며 타이베이의 유명 관광지 중 하나로 일본인 관광객이 항상 들리는 코스 중 하나.(…) 대만정복기념물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에서는 프롤로그 부분에 잠깐 모습을 비추는데, 2009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해서 국회의사당처럼 [건물이 조명으로 비춰지는 모습]으로 나온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상 자리에 대신 서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기마상(...)이 그 앞에 떡 서 있어 우리나라 사람들이 보기에는 충공깽. 디자인부터 혐오스럽다

한편 어떤 사람이 조선총독부 철거에 반대하던 이유로 풍수지리를 내세웠는데, 그 사람이 말하기를 만약에 조선총독부가 철거되면 [현대그룹이 망할 것이다]라는 얘기를 했었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일어났다.(일명 현대판 왕자의 난) 나름 유명한 네이버 블로그로 인지도가 있는데 조선일보롯데 등 친일기업을 망하게 하는 풍수지리학적 방법에 대한 글인데, 주장 중 하나는 운정신도시 수도론(교하천도론)이다...? 실제로 광해군 때 운정신도시 근처인 파주 교하로 천도하려는 시도가 있었긴 했다. 무산되었지만... 그리고 그 사람 주장에 의하면 교하천도로 청와대와 행정부를 그 쪽으로 옮기고 경제중심지를 일산호수공원 근처로 하자고 했었는데 조금 옛날 글이긴 하다.

  1. 광화문 콘크리트 외벽에 부착된 'Welcome' 환영 현판이 촬영 시점을 보여주는 힌트다. 과거에는 광화문 콘크리트 외벽에 이런 식으로 현판을 자주 부착했다. 이 사진은 서울 올림픽기간에 찍힌 사진이다.
  2. 참고로 경복궁을 복원한 현재 모습은
    1ce2d1dc327f2490183f3837dc6c2f83.jpg
    이렇다.
  3. 이 게양대는 중앙청이 해체되기 직전까지 남아 있었다. 수복 당시에 태극기를 걸었던 대한민국 해병대 제2대대 6중대 1소대장이던 박정모 옹(당시 소위)도 생전에 중앙청을 해체하더라도 게양대는 남겨줬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결국 게양대도 사라졌다. 이 태극기는 용산구 전쟁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4. 이후 2005년국립중앙박물관용산구로 신축이전하게 되었고, 해당 건물은 궁중유물을 중심으로 전시하는 국립고궁박물관이 되었다.
  5. 다시 말하지만 건물을 폭파한 적은 없다!
  6. 영국이 홍콩을 식민지화하면서 총독부 개념으로 세운 건물인데, 이전된 지금은 집무실을 포함한 내부를 고급 레스토랑으로 만들어 놨다고 한다. 영국 식민지로 있을 시절 중요하게 쓰인 건물을 박물관이 아닌 요릿집으로 바꿔 놓은 것이 아이러니.
  7. 왜 하필 서쪽이냐 하면, 해가 지는 방향이라 저물어버린 일제의 세력을 상징하기 때문. 현재 조선총독부 부재 공원도 그런 의미로 독립기념관 서쪽에 위치한다.
  8. 이걸 흔히 만화나 영화에서처럼 건물 겉껍데기를 헬기 등으로 옮기는 등 건물째로 이동시켜 세우는 연출을 생각할 수 있으나, 그런 건 가능은 하겠지만 위험성도 있고 해체후 조립보다 비용도 천문학적으로 많이 든다.
  9. 오죽하면 콘크리트가 사람의 침에 이렇게 무력하던가...라며 놀랄 정도.
  10. 이러한 콘크리트 구조에 석조건물형식의 건축물로 지은 예로는 오귀스트 페레의 샹젤리제 극장이나 덴마크의 크리스티안스보그성이 있다.
  11. 사설이지만 설계가 되었던 1910년과 달리 건물이 완공되었던 1920년대는 유럽을 중심으로 모더니즘이 유행하던 시기라 본의 아니게 유행에는 뒤떨어지게 되었다.
  12. 현 한국 은행 건물을 생각하면 된다.
  13. 유상반환 요청과 무상반환 요청이 섞여 있었다.
  14. 외교수단으로 사용되지도 않았고, 유상반환하여 재정충당에 이용되지도 않았다.
  15. 참고로 같은 일본근대건축물이자 역사적 가치와 건축학적 가치가 비교적 높은 한국은행 본관과 서울역은 현재 대한민국의 사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