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칸토나

(에리크 캉토나에서 넘어옴)


맨유 선수 시절

전체 이름에리크 다니엘 피에르 캉토나[1]
Éric Daniel Pierre Cantona
생년월일1966년 5월 24일
국적프랑스
신체 조건188cm, 88kg
포지션포워드[2]
프로 입단1983년 AJ 오세르
소속 클럽AJ 오세르 (1983~1987)
FC 마르티그 (1985~1986) (임대)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88~1991)
지롱댕 보르도 (1988~1989) (임대)
몽펠리에 HSC (1989~1990) (임대)
님 올랭피크 (1991~1992) (임대)
리즈 유나이티드 (1991~1993)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992~1997)
1993 Ballond'or
수상
로베르토 바조
2위
데니스 베르캄프
3위
에릭 칸토나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주장
장 피에르 파팽
(1992~1993)
에릭 칸토나
(1993~1995)
디디에 데샹
(1995~2000)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역대 주장
스티브 브루스
(1992~1996)
에릭 칸토나
(1996~1997)
로이 킨
(1997~2005)

1 개요

"King" Cantona

올드 트래포드의 왕

영국인이 사랑한 프랑스인

프랑스 국적의 前 축구-이종격투기-선수. 현재 MLS 뉴욕 코스모스의 구단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맨유 7번"의 계승자. 맨유 역대 최고의 주장이자 최고의 선수로 꼽히는데 일말의 주저함도 없던 선수.[3]

당시까지 서로 으르렁대던 사이였던 잉글랜드-프랑스 사이에서, "영국인이 사랑한 프랑스인"이라는 칭호까지 받았던 불세출의 플레이어.[4] 맨유 팬들은 그를 일컬어 '올드 트래포트의 왕'이라고까지 한다. 그 정도로 깊은 인상을 남긴 선수. (그리고 에릭 칸토나 역시 맨유, 잉글랜드 국대에 현재까지 끈임없는 지지를 보내고 있다.)

2 경력

2.1 데뷔 초기의 경력

프랑스 마르세유 출신. 사르데냐, 이탈리아, 스페인 카탈루냐 혈통이다.[5]

어렸을 때부터 축구에 특출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으며, 나이 17세에 AJ 오세르(정조국이 뛰었었던 팀)의 주전멤버로 선발되는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었다. 팬들은 17세의 소년이 필드에서 보여주는 뛰어난 플레이에 열광했고 또 엄청난 기대감을 가지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과연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지금도 "칸토나"하면 떠오르는 그 지랄 맞은 성격은 그때부터 이미 파릇파릇했다(…). 당시 팀의 주장이 정말 사소한 부탁(라커 룸에 놓고 온 자신의 가방을 좀 가져다 달라는)을 하자, 어린 칸토나는 "니가 뭔데 나한테 명령질이야"라는 말과 함께 장렬한 죽빵(…)을 날려주셨다.

오세르와의 계약이 만료되자 이적 시장에 나온 탈유망주급 선수를 잡기 위해 프랑스 굴지의 클럽 올랭피크 마르세유가 나섰고 마침내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데 성공하지만... 베르나르 타피 당시 마르세유 회장은 훗날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헤어진 후 나는 내가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라며 땅을 쳤다(…) 아니나 다를까, 실력이야 말할 나위 없으나 누구도 종잡을 수 없는 성깔머리가 시도 때도 없이 뛰쳐나와 주셨기에 그야말로 골치덩어리 그 자체였다. 당시 자신을 호출하지 않은 프랑스 국가대표 감독에게 서슴없이 육두문자를 날려주는 바람에 1년 국가대표 출장 정지라는 중징계를 먹는다거나, 경기 중 판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유니폼 벗어 던지고 뛰쳐나가 3일간 행방불명되는 등 지금의 어느 애송이도 깝치지 못할 정도의 망나니짓이 일상다반사였으니... 누구도 그를 종잡을 수 없었기에 팀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임대나 다니는 신세로 전락하는 것은 필연이었다.

결국 쫓겨나듯이 팔려간 님 올림피크에서도 판정에 빡친 나머지 심판에게 장렬한 축구공 어택(…)을 날려버린 사건으로 프랑스 축협은 거의 그를 매장시킬 분위기까지 치달았고, 칸토나 역시 축구 더러워서 못해먹겠다라며 은퇴를 결심한다.[6]

여기서 탁월한 재능이 성질머리에 묻혀 피지도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 한 성자 미셸 플라티니가 직접 나서서 에릭 칸토나에게 프랑스를 떠나 잉글랜드에 진출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조언을 해준다. 그래도 축구에 대한 열정은 남아있던 것인지 칸토나는 선뜻 잉글랜드 행 비행기에 올랐고, 축구종가에서의 그의 첫 도착지는 리즈 유나이티드였다. 오오 리즈 시절 오오 그리고 리즈 유나이티드는 진짜로 리즈 시절을 맞이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그 해 1991-1992년 이적 첫 시즌에 리즈 유나이티드는 1부리그에서 우승을 했다![7]

그래도 실력은 어디 가지 않았기에, 리즈 유나이티드에서도 칸토나는 A급 이상의 활약을 선보여서 팀의 잉글랜드 1부리그 우승에 큰 도움을 주었고, 리버풀과의 커뮤니티 실드에서는 해트트릭을 질러주는 등 그 재능을 잉글랜드 전역에 알렸다.

하지만...

또 그 성질머리가 문제가 되어 하워드 윌킨슨 당시 감독과 대판 싸우게 되었고, "이 놈을 어떻게 제거하나?" 하고 골치를 썩이던 윌킨슨 감독에게 구원의 손길(…)이 내려왔으니... 어느 껌 씹는 영감님과의 전화 통화로 윌킨슨은 칸토나를 "120만 파운드"라는 껌 값(…)에 팔아넘긴다. 이때 리즈 팬들은 칸토나를 파는 것에 반대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이후는 다들 아시다시피...

지난 시즌 리즈에게 리그 1위를 넘겨준 맨유는 칸토나의 합류와 동시에 리그 1위 자리를 빼앗았고, 이담 시즌에는 시즌 더블을 기록함과 동시에 칸토나는 팀 내 최다골을 기록해 주었다. 그러한 활약이 너무도 뛰어났기에 1994년 PFA 올해의 선수상 수상은 당연히 칸토나의 몫이었다. 신기하게도 당시까지 별다른 기행은 없었고, 이는 지금도 확연히 드러나는 퍼거슨 감독의 선수장악력이 아주 제대로 먹혔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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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아주 없던 건 아니고... 가끔 이런 짓도 하시긴 했지만. 아주 가끔(…)

하지만, 이후 칸토나는 그 동안의 폭력 사건을 잊게 할 정도의 초대형 사고를 터뜨린다.

2.2 쿵푸 킥 사건

1995년 1월, 크리스탈 팰리스와의 경기에서 상대선수에게 샤이닝 위저드(…)를 날리는 바람에 레드카드를 받고 이젠 익숙하게(…) 벤치로 향하던 중, 하필이면 그의 눈에 자신을 대놓고 야유하는 상대팀 서포터 매슈 시먼스 (당시 20세) 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칸토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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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바로 시먼스에게 날라차기 한 방을 먹였다.

이는 지금도 간간이 회자되는 "쿵푸 킥" 사건이었고, 칸토나는 9개월 출장 정지라는 그야말로 중징계를 먹었다. 더불어 이 사건 직후의 기자회견에서는 갈매기가 고깃배를 따라오는 이유는 어부들이 정어리를 바다에 버릴 것을 알기 때문이라는 개드립을 쳐서 기자들도 어안이벙벙(...)

너무나도 심각한 사건이었기에 여론은 "9개월로는 부족하다. 아예 축구를 못하게 막아버려라"라는 지경까지 치닫았는데, 놀랍게도 천하의 알렉스 퍼거슨이 직접 나서서 칸토나의 실드를 쳐주는 진풍경을 보여주었다. 멘탈이 글러먹었거나 팀 전술에 도움이 되지 않거나 자기 마음에 안 들면 가차없이 선수를 내치는 퍼거슨 감독이 직접 총대를 메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이자 은퇴를 시사하던 칸토나도 무언가를 느낀 것일까.[8] 9개월의 공백기 동안 인터 밀란이 적극적으로 칸토나를 영입하려 애썼으나, 이때 칸토나는 그 유명한 "나는 맨체스터에 뼈를 묻겠다"라는 한 마디만을 남겨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여담이지만 에릭 칸토나에게 요가 드릴 킥을 맞은 이 시먼스라는 남성의 2011년까지의 삶은... 그야말로 눈물 좀 닦고 봐야 할 정도의 안습 인생이 아닐 수 없다. 참고로 2007년 포포투 지가 축구사 유명한 사건의 중심 인물들을 취재하면서 그도 취재했는데 그는 평생 축구 경기장 출입 금지 처벌을 받았다고 한다. 왜 출입 금지 처분을 받았냐 하면 벤치로 가는 칸토나를 격앙하게 만든 그의 야유가 바로 병상에 있던 칸토나의 어머니를 모독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처맞을 만했네. 또한 그는 다른 면에서도 문제가 좀 많은 인물이었다고... 12년이 지난 당시에도 칸토나에 대하여 이가 갈린다나.

칸토나는 그 후 인터뷰에서 (2011년 3월) 쿵푸 킥 사건은 나의 커리어에서 가장 즐거운 순간이었다고 자평하면서 축구장에 있어서는 안 될 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걷어찬 것이라고 밝혔으나... 기자가 다른 선수들에게도 그런식으로 행동하라고 추천하겠냐고 물어봤을때는 손사래를 쳤다(...): "아뇨, 그건 실수였어요. 뭐, 저야 성공적으로 재기하긴 했지만요." [9]

이 당시에 걷어차이면서 칸토나가 순간 무방비 상태가 되자 겁도 없이 공격까지 시도했다가 오히려 칸토나의 무쇠 주먹 4방을 더 허용당하기도 하는 등 찌질함의 극을 달리던 시먼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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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2011년에 촬영된 시먼스. 헌데 맘고생 했다고 하기엔 등빨 좋네여. 이 모습이 왜 찍혔냐 하면 역시나 그 버릇 못고쳤는지 자신의 아들이 뛰는 축구팀의 감독에게 아들 기용 안해준다는 이유로 난입해서 고래고래 쌍욕을 하다 연행까지 당했고 불구속 기소되었다.(...) 그래서 그건으로 재판에 출석하고 있는 모습을 찍은거다. 하여튼 칸토나가 잘했다는건 아니지만 이놈도 정말 답이 없는건 마찬가지.

결론적으로 이러한 속사정과는 별개로 쿵푸 킥이라는 대응이 최악 중 최악이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기 때문에 다시 한번 말썽을 일으킨 칸토나였다. 심지어 퍼거슨은 십년이 넘게 뒤에도, 정확히는 감독 은퇴 뒤에도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이 일을 언급하자 한숨을 푹 쉬고 등을 뒤로 젖혔다. 강철같은 퍼거슨의 멘탈을 으깨버리다 못해 트라우마를 주는 위업을 달성한 셈.

2.3 이후의 경력

칸토나가 빠진 94-95시즌의 9개월동안 맨유는 결국 리그 우승을 블랙번 로버스에게 빼앗기고, FA 컵 우승은 에버턴에게 빼앗기는 등 한끗발 약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칸토나가 복귀하자마자 다시금 시즌 더블을 기록한다.[10] FA 컵 결승전에서의 결승골을 기록한 것도 칸토나였으니 맨유 팬들이 그를 바라보는 마음이 과연 어땠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그 때문일까, 퍼거슨은 1996-97 시즌부터는 아예 칸토나에게 주장 완장을 달아버린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클럽 역사상 최초의 非영국인 주장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해당 시즌에도 칸토나와 함께 한 맨유는 너무나도 당연한 듯이 리그 우승을 되찾으면서 다시 한 번 우승 트로피를 높이 치켜들었다.

2.4 은퇴 선언

그리고 1997년 5월 11일. 칸토나는 느닷없이 은퇴를 선언한다. 나이 31세라는 결코 많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은퇴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최고의 자리에 있을 때 명예롭게 은퇴하겠다라는 이유였다. 그렇다고 거창한 기자회견이나 은퇴식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구단 홈페이지에 깨작 글귀만을 남겨놨을 뿐이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제멋대로였던 그야말로 천상천하 유아독존. 그러나 결코 깎아내릴 수 없었던 올드 트래포드의 왕이 무대에서 내려가던 순간이었다.

은퇴한 후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도 맨유 역대 최고의 선수이자 최고의 주장으로 꼽히는 데 일말의 주저함이 없으며, 그 짧지 않은 커리어 속에서도 빛을 발한 건 맨유에서의 5년 남짓한 시간이었음에도 그는 너무도 당연하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설로 손꼽히고 있다. 2006년 당시 감독으로도, 코치로도 아닌 "선수로서" 복귀를 바라는 클럽 역대급 선수를 뽑는 투표(유나이티드 매거진 실시)에서 보란듯이 1위에 뽑히는 기염을 토하는 것을 보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들이 에릭 칸토나라는 선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여실히 드러나는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게다가 단순히 실력과 성깔(…)만 있는게 아니고 나름의 축구관이 확고한 선수였으며 그만의 카리스마가 있었다. 때문에 천하의 퍼거슨 감독도 칸토나가 자기 식으로 훈련하면서 행동하는 것을 어느 정도 묵인해주었고 둘이서 축구에 관해 토론을 할 정도였다. 어쨌든 둘은 서로를 아주 높이 평가해서 서로를 높이 띄워주는 인터뷰를 많이 한다. 칸토나 왈, "퍼거슨은 일종의 천재."라고.

3 플레이 스타일

처음 보는 사람들은, 척 보기에 둔중한 몸집과 떡대로 인해 타겟형 스트라이커가 아닌가 하는 생각들을 많이 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칸토나는 놀라울 정도의 테크니션이었고 그 플레이스타일은 오히려 섀도우 스트라이커에 가까웠다. 붉은 유니폼을 입고 찍은 스탯이 182경기 80골 66어시였음을 명시해보면 득점은 물론이요 어시스트까지 완벽했다는 뜻이다. 물론 명성에 비해, 또 비슷한 클래스(라 여겨지는)의 선수들에 비해 부족한 스탯[11]임은 사실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발롱도르 3위를 할 정도였던 이유는 그의 해결사 능력 덕분이다.

영입 첫 시즌에 리즈 유나이티드를 17년만에 리그 우승시킨 것 하며[12] 맨유에서의 5시즌 중 4시즌을 우승시킨 것이 그 증거. 그 중 두번이 더블이요 챔스 4강도 올려보냈다. 챔스 4강 한번이 왜 중요한 것이냐면 당시 EPL은 헤이젤 참사로 받은 징계의 여파가 사라지지 않은 상태로 출범해서 모든 EPL 팀들의 유럽대항전 성적이 낮았다. 그런 맨유가 챔스에서 재기하는데의 큰 역할을 한 것. 당시 긱스를 제외한 퍼기의 아이들이 모두 불완전한 상태인 걸 감안하면 대단... 경기력에서도 해결사 기질이 빛을 발했다. 대표적인 것이 복귀전인 리버풀전 득점과 FA컵 리버풀전 득점 등 더비나 빅매치에서의 중요한 골을 넣었다. 당시 맨유팬들은 결승골이나 역전골이 터지면 누군지 묻지도 않았다고... 당연히 칸토나일 테니까.

지금의 웨인 루니와 비슷하다면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그 포스는... 감히 루니 "따위가"... EPL 출범과 동시에 호흡을 맞춘 라이언 긱스와 이때부터 완벽한 짝짜꿍을 선보였으며, 긱스가 왼쪽을 초토화시킨 후 칸토나에게 왕이시여 받으소서 어떻게든 공을 넘겨주면 칸토나는 다시 최전방을 초토화시키고 골을 때려넣었다(…) 당시 칸토나-긱스 라인은 2007~08 당시 호날두-루니 라인에 비교해 나았으면 나았지 부족할 것이 하나 없었다는 평이다.

그 외의 능력으론 패싱력도 뛰어났고 그만큼 패스도 즐겼다.[13] 칩슛을 장난아니게 잘 찼다. 그의 인생골이자 EPL 역대 최고의 골도 사각지대로 빨려들어가는 유명한 칩슛골.

4 기타

  • 골을 넣은 뒤, 기뻐서 방방 뛰는 여타 플레이어들과는 달리 칸토나의 골 세레모니는 그야말로 특별했다. 옷깃을 칼같이 잡아 세운 뒤 무표정한 얼굴로 관중들을 한번 슥 훓어보는 어떻게 보면 거만함의 극치, 어떻게 보면 간지폭풍. 칸토나의 그 작렬하는 카리스마와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켜 "칸토나=옷깃"이라는 공식마저 성립되었다. 그리고 그 카리스마 넘치는 세레머니에 감명을 받은 박건하선수도 골을 넣은 후에는 옷깃 세레머니를 했다.
  • 1998년 프랑스 월드컵나이키의 광고 컨셉이었던 '월드 올스타 vs 악마 컨셉'의 광고 피날레를 장식하는 인물이 바로 칸토나이다. 잘보면 알겠지만 당시 세계적인 선수들을 이끄는 캡틴 포지션이 바로 칸토나.[14] 마지막 장면에서 옷깃 세우고 쿨하게 Au revoir(프랑스어로 '안녕이다. 잘가라.') 한마디 남기며 골키퍼를 뚫어버리는 불꽃슛의 간지.악마팀에서 박치기 장면이 나오는데 누군가가 연상되지만 신경쓰지 말자 위 컨셉을 그대로 재현한 모 축구게임불꽃슛 담당 캐릭터가 생각난다면 기분 탓이다. 이 광고 이후 나이키의 컨셉트 광고에 자주 등장한다.
  • 소싯적은 물론이요 나이를 먹고서도 여전한 그 지랄 맞은 성격은 맨유에서는 팀 전체를 규합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EPL 출범 때 이미 데뷔하여 EPL 짬밥은 칸토나와 동급이었던 긱스야 그렇다 치더라도, 당시 갓 유스에서 올라왔던 애송이들"퍼기의 아이들"이 함부로 기어오르지 못한 것(…)은 그야말로 칸토나의 성질머리 카리스마가 지대했다는 분석이다. 데이비드 베컴, 폴 스콜스, 게리 네빌 등이 멋모르고 나대지 못하도록 했다고 카더라. 또다른 개차반으로 유명한 로이 킨도 칸토나에겐 찍소리 못했다 하니...
  • 은퇴 후에도 계속 축구계에 몸담고 있었는데, 각종 미디어의 인터뷰는 물론이요 각종 광고, 축구 영화에도 출연해 주셨다. 축구 잡지나 광고, 영화에 수염 더부룩하고 머리까지 더부룩한 웬 노숙자같은 아저씨가 나왔다면 십중팔구 이 사람이다(…).
  • 배우로써 경력도 은근 있는 편. 1995년 프랑스 영화 Happiness Is in the Field로 데뷔해 작은 역들을 맡다가 2009년 좌파 영화로 유명한 켄 로치(!) 감독의 영화 <에릭을 찾아서>의 타이틀 롤(!)을 맡았다. 이 영화는 그 해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해 상당히 괜찮은 코메디 영화라는 평을 들었다. 덕택에 에릭 칸토나는 그 밟기 힘들다는 칸 영화제 레드 카펫도 밟았다. 이후로도 프랑스 영화나 영국 영화에 소소하게 출연하고 있는 중. 2015년 하반기에는 디즈니-픽사의 장편 애니메이션 굿 다이노의 프랑스어 더빙판에서 포레스트 우드부시 역의 목소리를 맡기도 했다.
  • 현재는 미국 MLS의 뉴욕 코스모스 구단주를 역임하고 있다.[15] 2011년 프리시즌 기간에 폴 스콜스의 은퇴 기념을 위해 마련된 맨유 vs 뉴욕 코스모스 간의 친선전 때 10여 년 만에 올드 트래포드를 방문했고, 팬들은 당연히 오오 칸토나 오오!!!!!!!!!!!!!!!! 참고로 스콜스 은퇴 경기에 칸토나가 초청된 것은 원래 스콜스가 칸토나를 잘 따랐던 것도 있지만 남에게 주목받기 싫어하는 스콜스가 '칸토나가 오면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될 테니 나는 아웃 오브 안중이 되겠지, 후후후'라는 노림수를 편 것이었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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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후광(...)이 비치는 듯한 건 기분 탓이다.

  • 2012년 프랑스 대선에 출마한다는 기사가 떴다(…).
  • 퍼거슨의 헤어드라이어에서 유일한 예외였다.
  • 뒤늦게 알려진 사실이지만 맨시티가 44년 만의 우승을 확정지은 순간에 칸토나의 쿵푸 킥이 그의 거실에 있던 커피 테이블에 작렬했고, 아들은 그걸 보며 아버지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한다(…). #

4.1 기록

  1. /e'ʁik danjɛl pjɛʁ kɑ̃to'na/
  2. 정의상 섀도우 스트라이커
  3. 하지만 맨유 역대 최고의 선수로는 대부분 라이언 긱스를 뽑는다.
  4. 이는 후에 다비드 지놀라, 티에리 앙리가 계승한다.
  5. 정확히는 부모님이 카탈루냐계 사르데냐인으로서 마르세유로 이민을 간 경우에 해당한다. 심지어 부모님은 카탈루냐 분리독립을 지지하는 편이었다고.
  6. 이 과정을 보면 더 쩌는 게, 최초 축협 측에서 "1개월 출장정지"를 먹이자 칸토나는 "X나 고맙습니다. 얼간이들아."라는 감사인사(…)를 전했고, 축협은 다시 "3개월 출장정지"라는 거의 캐삭빵 수준의 어택을 날려준 것이다. 아아...
  7. 플라티니는 최초 리버풀 FC에 칸토나를 받아달라 요청했으나 리버풀 측에서는 폭탄 끌어안기 싫다며 거절, 또다른 팀인 쉐필드 웬즈데이는 "땡기면 오라"라는 입장이었으나 "입단테스트 후 결정"이라는 조건을 내밀었기에 겨우 웬즈데이 정도의 팀이 자신에게 그런 요구를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거부했다고 포포투와의 인터뷰에서 밝힌바 있다. 리버풀로서는 땅을 치고 후회했으... 려나?
  8. 사실 이때는 퍼거슨도 칸토나를 포기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내 캐시의 만류로 생각을 바꾸어 그를 남기기로 했던 것. 은근히 맨유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캐시 여사님.
  9. http://www.telegraph.co.uk/sport/football/teams/manchester-united/8361054/Eric-Cantona-kung-fu-kick-on-hooligan-was-like-a-dream-for-some-fans.html
  10. 공교롭게도, 에릭 칸토나가 부재했던 이 시즌이 블랙번 로버스의 마지막 우승이었다. 당시 블랙번의 핵심 선수는 그 유명한 앨런 시어러와 크리스 서튼이었다.
  11. 물론 객관적으로 볼 때,당시 기준으로는 더더욱 괴수같은 스탯임을 사실이다.
  12. EPL까지 통틀어 마지막 리그 우승
  13. 때문에 상술된 기록처럼 어시스트가 어마어마하다.
  14. 동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멤버들이 쟁쟁하다. 호르헤 캄포스, 파올로 말디니, 후이 코스타, 루이스 피구, 페노메누 호나우두, 이언 라이트, 파트릭 클루이베르트, 토마스 브롤린 등이 나왔다.
  15. 참고로 이 팀의 명예 회장은 펠레. 구단 관계자들을 축구계의 전설들로 하나하나 채워가며 팀 리빌딩에 한창이다.
  16. 본인이 직접 인터뷰에서 그렇게 밝혔다. 아니, 자기 은퇴 경기에서 주목받기 싫어 이런 짓을 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