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릉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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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 역대 황제
3대 희종 완안합라4대 해릉양왕 완안적고내5대 세종 완안오록
묘호없음
시호해릉양왕(海陵煬王)
연호천덕(天德, 1149년 ~ 1153년 )
정원(貞元, 1153년 ~ 1156년)
정륭(正隆, 1156년 ~ 1161년)
여진어왕기얀(Wanggiyan)
중국어완안(完顔)
여진어적고내(迪古乃)
중국어량(亮)
생몰기간1122년 2월 24일 ~ 1161년 12월 15일
재위기간1150년 1월 9일 ~ 1161년 12월 15일

1 개요

파일:해릉양왕.jpg
1122년~1161년 (재위 1149년~1161년)

위에 왠지 멋있어 보이는 모습[1]에 속지 말자.

금나라의 4대 황제. 폐위되어서 묘호는 없고 시호는 양(煬).[2] 보통 즉위 전의 왕호인 해릉왕(海陵王) 또는 시호를 붙여서 해릉양왕(海陵煬王)으로 부른다. 자는 원공(元功), 휘는 완안적고내(完顔迪古乃), 중국식은 완안량(完顔亮).

아버지는 금태조 완안아골타의 서장자인 요왕 완안종간(遼王 完顔宗幹), 어머니는 대씨(大氏).[3] 황후는 여진 귀족의 도단사야(徒單斜也)의 딸의 도단황후(徒單皇后).

금나라 최악의 막장 황제. 정도를 넘어선 중국 역사상 최악의 막장 황제 중 하나.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유부녀 전문 사냥 황제이자 귀축 황제.[4] 금 역사상 최악의 폭군으로 폭정이 말로 못할 지경이었다.

2 생애

2.1 제위에 오르다

즉위 과정부터 막장인데 해릉양왕이 번왕이었을 때 당시 금나라 황제 희종(해릉양왕의 사촌 형)은 해릉양왕의 착실한 성품을 높게 사서 그를 자주 불러 이야기를 같이 나눴으며, 금태조가 나라를 창건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을 희종이 말할 때 해릉양왕이 눈물을 흘리자 희종은 그를 더욱 신뢰했다.

희종은 처음에는 의욕적으로 국정에 임하였지만 재위 10년이 넘어가면서 차츰 사치와 향락에 빠져 살며 술주정을 부려대거나 대신들을 때리거나 욕을 했으며, 무고한 대신을 함부로 죽이기도 하였다. 이런 그에게 실망한 신하들은 해릉양왕과 함께 역모를 논의했다.

당시에 좌승상인 당괄변(唐括辯)과 우승상인 병덕(秉德)에 해릉양왕은 금희종을 폐위시키기로 공모했는데 "그러면 지금의 황제를 폐위시킨 후 누가 황제가 될 것인가?"를 놓고 당괄변이 여러 이름을 제시했지만, 해릉양왕이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안된다고 하였다. 나중에는 더 이상 황제로 만들 만한 사람이 없자, 당괄변은 해릉양왕의 뜻을 눈치챘고 해릉양왕에게 "혹시 당신이 황제가 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오?"라고 물었다. 그러자 해릉양왕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역시 어쩔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나 말고 또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해릉양왕을 황제로 옹립하기로 결정하고 그들은 사촌형이었던 금희종의 호위군관을 매수한 후 일부 귀족 대신들과 짜고 금희종의 침실에 뛰어들어 금희종을 시해하고 황제에 올랐다. 1149년 쿠데타를 일어나자 희종은 황급히 동생을 찾았지만 손에 칼을 들고 들어온 해릉양왕이 나타났다.

2.2 성공한 쿠테타

쿠데타가 성공하고 제위에 오른 해릉양왕은 희종의 일족[5]을 모두 죽여 희종은 후사가 끊겼다. 해릉왕은 제위에 오르고 나서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짐은 고대의 현명한 군주들을 본받고 싶고, 경들의 직언을 듣고 싶소, 조정이 잘못하는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간언해 주길 바란다." 또한 병영을 순시하였는데 병사가 흙이 섞인 밥을 먹자 자신이 그걸 빼앗아 먹고 그 병사에게 더 좋은 밥을 주도록 하였다.

순행길에 마차가 넘어져 깔린 사람을 보자 자신의 친위대에게 마차를 들어올려 사람을 구해 주도록 시켰으며 해릉양왕은 자주 낡고 찢긴 옷을 입었고, 주변 신하들에게 이러한 것을 자랑하기를 좋아했다, 이렇게 자신이 아주 근검절약한다는 황제라는 것을 알리고자 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멀쩡한 옷에다가 구멍을 만들고, 구멍난 곳을 꿰매게 하고는 황제의 의식주행을 기록하는 관리에게 이를 기록하라고 하곤 했다.

2.3 희대의 막장 군주

2.3.1 NTR

그러나 이것은 그의 병신 짓의 서막을 알리는 연막작전이었다. 희종도 공포정치를 하던 폭군이었지만 해릉왕은 훨씬 그걸 넘어선 막장 군주였다. 쿠데타에 성공해서 황제에 오른 해릉왕은 취임사를 발표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국가의 대사는 모두 짐이 지배한다.
  • 군사를 이끌고 남송을 공격해서 토벌하고 남송 황제를 붙잡아 죄를 묻는다.
  • 천하절색의 미녀를 손에 넣어 모두 부인으로 삼는다.

천하를 정복하고 전무후무한 하렘을 이루려는 그의 깊은 뜻을 알 만한 대목이다(...). 귀축왕 란스의 모델일지도 그나마 여색을 밝힌 황제들은 중국 황제들 가운데 많았지만 이 작자는 대놓고 '짐은 풋사과보다는 단물이 철철 흐르는 농익은 사과를 더 좋아하느니라'라고 말했다.스스로 인처 모에 인증 유부녀를 건드리면 예나 지금이나 불륜이니 문제였다. 오죽했으면 신하들이 해릉양왕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제발 유부녀 말고 처녀를 건드리십시오". 그러나 해릉양왕은 처녀도 건드렸으니, 인처 모에가 아니라 그냥 귀축이다.

해릉왕의 여성편력은 다음과 같다.[6]

위에 글을 자세하게 풀어서 쓰면 이렇다. 쿠데타로 동생이던 금희종 황제를 암살하고 즉위하자마자 본래 맘에 두고있던 미망인을 거두어서 귀비로 봉했다. 그러나 곧 싫증이 나던 중에 눈에 들어온 여자가 바로 그 미망인 귀비의 딸. 그 딸을 역시 귀비로 봉하여 옆에 두고 검열삭제를 즐겼다. 딸에게 남편을 빼앗긴 귀비는 낙담하여 궁인과 동성애를 했고, 그러다가 해릉양왕에게 동성애 사실이 드러나자, 해릉양왕은 미망인 귀비와 궁인 모두를 잔혹하게 처형했다.

그 뿐만 아니라 신하들의 아내를 강간하기 일쑤였고 강간하러 신하들을 협박하거나 거부하면 신하들을 죽여버렸다고 한다. 게다가 더 큰 쾌락을 즐기러 검열삭제할 때 반드시 강간 대상의 남편이 아내의 강간 광경을 지켜보게 하였다고.아 씨바 할말을 잃었습니다

게다가 성격이 무지하게 더러워서 본인의 성미가 뒤틀리면 검열삭제 도중에도 갑자기 칼을 빼들어 검열삭제 중이던 여자의 목을 잘라버렸다. 신하 오대의 부인으로 하여금 남편을 버리고 자신에게 올 것을 명령하고 협박하여 버틸 수가 없었던 오대의 부인은 결국 남편을 독살하고 황후로 책봉되었으나 곧 해릉양왕의 총애를 잃어, 다른 남자와 간통하다가 걸려 역시 참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이 새끼는 자신의 숙모와 처제도 강간하려 들었으며, 처제는 강간을 겪기 직전에 자결했는데, 이 여자가 바로 해릉양왕을 폐위시킨 뒤 그를 죽이고 제위에 오르는 금세종, 당시 요양부 유수였던 완안옹의 부인이었다. 황제가 이 꼴이니 나라는 개판 그 자체였다.

2.3.2 이외의 패악질들

  • 해릉양왕은 특히 거위 고기를 좋아했는데, 순행 나가서도 산해진미를 물리라면서 '짐에게는 거위 고기면 충분하다' 라 하였다. 이렇게 보면 이놈이 이건 좀 평범하다 싶지만 시도 때도 없이 거위고기를 찾아서 문제였다. 나중에는 이놈이 거위를 하도 찾다보니 거위 가격이 크게 올라 신하들이 황제에게 바칠 거위를 구하러 고작 거위 1마리를 사는데 수만전을 들였으며, 또는 소 1마리를 끌고 가서 거위 1마리와 바꿔 오는 일까지 났다. 물론 못 가져오면 사형 크리.
  • 골수 중국 문화빠로 유명했다. 황족과 여진족 신하들을 제거하고[7] 그 자리에 자신들이 정복한 민족인 중국인을 앉혔을 정도였다.[8]
  • 스스로 쿠데타를 일으켜봐서 아는지, 자기한테 조금만 맘에 안드는 행동을 하거나 이상한 낌새만 있으면 그냥 죽였다. 해릉왕은 정치제도를 개혁하고 한족과 거란족 사람들을 관리로 등용했다. 한편으로는 한족문화를 힘써 배우면서 사서오경, 시, 사(詞), 가곡, 부(賦) 등을 읽었다. 그는 여진 귀족들의 회의 제도를 폐기하고 중앙 정부에 상서성과 추밀원만 두었다.
  • 1153년 수도를 중국과 가까운 중도대흥부(中都大興府, 지금의 베이징)로 옮겼는데, 나무 재료 하나를 운송하는데 비용이 2천만 전에 달하였으며, 궁전을 전부 황금으로 장식해서 금가루가 바람에 날아다니면 마치 눈이 온 듯 했다고 한다. 골 때리게도 이런 궁전을 짓는데만 억만금을 썼지만 충분히 화려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자기가 좋아하던 중국식 건물을 지으려고 원래 수도에 있던 건물을 모두 부쉈다. 그 다음에는 원래 수도인 상경회령부(上京會寧府, 지금의 하얼빈) 가까이 있던 자신의 조상들[9]금태조, 금태종 등 황제들의 묘를 모두 중도대흥부로 이장했다. 자신도 나중에 죽으면 이곳에 당연히 묻히기 위해 크고 아름다우며, 성대하게 묘역을 단장했으나... 아무래도 미친 것 같아요

2.3.3 무리한 남송 침공, 그리고 사망

취임사를 실천하러 무리하게 남송 침입을 시도했다.역시 수양제환생이었어 그런데 사실 남송을 정벌하려는 목적도 남쪽에 미녀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어서라니...[10] 이 때, 신하들에게는 하늘에서 사자가 와서 송나라를 정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개소리를 했다. 당시 남송과는 화평조약을 맺었지만 남송은 이전에 북방 민족들에게 당한 매우 아픈 정강의 변이라는 역사가 있어 강남으로 후퇴한 뒤에도 늘 전선을 만들고 성곽을 고치는 등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금의 신하들도 이것을 알았기에 여러 신하들이 남송 침공을 반대했지만 해릉왕은 그들의 목을 모두 베 여론을 탄압했다.

1160년 남송 침공을 반대하는 대신들을 대량으로 사형시키며, 심지어 이 과정에서 자신의 모친마저도 전쟁을 말라고 간언하자 어머니까지 살해하는 패륜을[11] 저질렀다. 게다가 죽였으면 그냥 조용히 묻어주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이놈은 어머니의 시신을 불태운 뒤에 뼈를 물에다가 뿌려버렸다.

한번은 기재(祁宰)라는 대신이 있었는데, 해릉양왕이 무슨 일이 있으면 직언해도 된다는 그의 말을 믿고는 남송을 공격하는 일에 반대의견을 냈다가 그 즉시 목이 잘렸으니 안습. 그리고 천하에 군주가 넷인데 남에는 남송, 동에는 고려, 서에는 서하가 있으니 이를 통일해야 진정 넓은 나라가 된다며 남송 정복이 끝나면 고려서하를 정복하겠다고 선언했다.[12]

그리하여 해릉양왕은 본인이 제위에 오를 때부터 밝혔던 남송 정복을 위해서 무려 50여 만명의 장정을 강제로 병사들로 징집하거나 배를 건조하는 일에 동원하도록 지시했다. <금사>에 따르면 금나라의 국고는 이미 파탄이 났고, 가족이 서로 떨어지거나 뿔뿔이 흩어졌으며 전쟁에 나가 죽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아서 이를 원망하는 울음소리가 하늘을 진동시킬 정도였다고 한다. 남송 침략을 개시했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금의 선박 기술은 남송에 뒤떨어졌고 번번히 수전에서 병사들은 물을 코로 먹기 일쑤였다. 총관 아린이 채석기에서 도강을 시도했지만 남송의 명장 우윤문이 이를 저지해서[13] 장강 도하를 못하여 양주로 이동해야 했다.

거기다 진회가 죽은 후 남송 침공이 번번히 실패하였는데 1161년 거란족이 북서쪽 지방에서 난을 일으켰으며[14] 거기다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에 있던 사촌동생 완안옹이 반란을 일으켜 중도대흥부에 입성했다. 그런데 괴상하게도제정신일 리가 없지만 해릉양왕은 난을 진압하기는커녕 아직도 남송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남송 침공에만 더욱 골몰하는 삽질로 시간을 보내다가 남송 정벌에 실패한다.[15]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천막으로 화살이 날아들었는데 해릉양왕은 깜짝 놀라 화살을 봤더니 그건 송나라 군사의 화살이 아니고 금나라 군사가 쓰는 화살이었다. 그렇게 부장이 일으킨 반란으로 양주(揚州)에 있는 자신의 막사에서 1161년 부장에게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2.4 사망 이후

그 뒤 완안옹은 황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금 최고의 먼치킨 황제인 금세종이다.[16] <금사>에 따르면 이 때 해릉왕을 죽인 부장이 '새로운 황제께서 중도대흥부에 입성하셨다!'라 알리자 해릉왕은 웃으면서 "옹이 황제가 되다니! 그 녀석을 먼저 처리했어야 하는데!"라고 마지막 말을 남긴다.

그는 사후에 진정한 굴욕을 맛봤는데, 금세종은 해릉왕의 태자 완안광영을 포함하여 그의 자손들을 모두 몰살하고 해릉왕을 서인으로 격하시켰다. 무엇보다 해릉왕의 시체를 중도대흥부에 성대히 세운 황제 묘역에 안 묻었다. 황제 자격이 없는 짓을 했고 서인으로 떨어졌으니 예를 갖추지 않았으며 중도대흥부에서 멀리 떨어진 모래밭에 그냥 파묻어 인과응보의 대가를 제대로 준 셈이다.이거 가지고는 모자라!

3 여담

1980년대에 《폭군 해릉왕》이라는 이름으로 소설이 나온 바 있는데 시대가 시대인 만큼 3S정책에 제대로 편승한 일종의 야설이다. 해릉왕의 엽색 행각에 따라 인처&로리물에 적나라한 성적 묘사가 일품인데 당연히 절판해서 구하기 좀 어렵다. 다만 국립중앙도서관과 몇몇 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200여년 뒤에 동쪽의 모 반도국가에서 환생했다 카더라.[17]

  • 해릉양왕의 아들들
    • 장남 : 숭왕 완안원수(崇王 完顔元壽) - 원비 대씨 소생.
    • 차남 : 폐태자 완안광영(廢太子 完顔光英) - 폐황후 도선씨 소생.
    • 3남 : 숙왕 완안신사아보(宿王 完顔矧思阿補) - 유비 야율씨 소생.
    • 4남 : 승왕 완안광양(滕王 完顔廣陽) - 재인 남씨 소생.

참고로 중국식 휘가 제갈량의 휘 '량(亮)'과 같다(...).

  1. 당연히 후대의 상상이다. 만주의 금나라 박물관에 있는 흉상인데 현재 중국에서는 사서에 요와 금의 상류층들이 송나라식 단령사모를 착용했다는 기록이 있음에도, 요나라와 금나라의 복식을 묘사할 때 중국식이 아닌 이민족식 의상으로 복원한다. 전 황제인 희종통천관과 24류 면류관, 강사포를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니까 고증오류.
  2. 수양제의 그 양(煬)이다!! 참고로 양(煬)은 '방탕하고 악랄하며 여색을 좋아하고 예를 무시했으며 하늘의 뜻에 거역하고 백성을 착취했다'는 뜻이다. 자세한 내용은 시법 참조.
  3. 발해의 왕손 맞다. 이 말고도 발해인의 후예가 금 황제의 황후나 비빈인 때가 꽤 있는데 발해인 출신인 정식 황제의 황후나 비빈은 각각 1명과 12명이었고 추존 황제의 황후나 비빈은 각각 3명과 2명이었다.
  4. 그러니까 취미가 NTR이라는 소리.
  5. 자손이 많아 다 합치면 70여명에 이르렀다고.
  6. 그 악질 란스도 이런 짓들은 안했다. 딸바보니까 근친상간은 거의 가능성이 없다라 봐야겠고 유부녀는 안 건드린다가 란스의 신조니까.당연히 미망인은 그냥 집어먹는다. 사실 란스가 모녀덮밥과 자매덮밥을 못하란 법은 없다. 다만 그런 상황이 안 와서일 뿐이지. 란스라면 모녀덮밥과 자매덮밥은 거침없었을 듯하다.
  7. 자신과 함께 금희종을 시해하는데 동참한 사람들까지 황제를 시해했다는 죄목으로 숙청했다. 명백한 토사구팽.
  8. 사실 정설이 국가기구의 중국화와 황제권의 독재화를 위한 정책으로 본다. 그래서 중국사 관련 개론서를 읽으면 해릉왕 부분에서 늘 중국 천자를 꿈꾸며 한족화를 꾀했다고 나온다.
  9. 역대 여진 추장들이었으며 황제로 추존받은 이들이다.
  10. 사실 한국은 남남북녀라지만 중국은 강남 미녀가 유명하다. 참고로 수양제도 강남총관을 하다가 강남 미녀에 빠져 후량 선제의 딸이었던 소씨를 부인으로 삼았다.
  11.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를 죽인 것은 아니다. 정확히는 '적모'(첩의 자식이 아버지의 정실 부인을 부르는 호칭이다)였던 선황제의 정실 부인인 황태후 도단씨를 죽인 것.자신의 생모인 대씨는 이미 사망했었고 황태후였던 도단씨가 '금왕조를 망칠 셈이냐?!'는 식으로 간언을 하자 죽여버렸다.
  12. 이 때의 고려는 100여년의 전성기가 끝나 기강이 해이해져 갔고 국력이 조금씩 주는 등 나사가 슬슬 빠질 조짐을 보였지만 그래도 국력이 수준급이었다. 해릉양왕의 절망적인 전술능력을 감안할 때 설령 침공해도 귀주대첩 재현할 가능성이 매우 컸다.
  13. 금군의 도강을 저지할 때에 화약 무기를 사용했다고 한다.
  14. 거란인들도 강제 징집을 당하여 이에 대한 반발이 거셌다. 남송 원정군에 속했던 거란인 장군들은 아예 남송에 항복해 길안내까지 할 정도. 거란의 반란은 후에 금 세종이 즉위하고 건도화약을 주도했던 복산충의가 진압했다.
  15. 양주로 이동한 해릉왕은 여기서도 도강에 실패하면 장수들을 죄다 죽이겠다고 했는데 호북의 남송 수군이 장강 중류에서 양주가 위치한 하류로 내려오는 중이고 남송군의 저항이 격렬해 도강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강을 건너자니 남송 수군에게 죽을 지경이고, 강을 못 건너면 해릉왕에게 목이 잘릴 판이었기에 장수들은 결국 해릉왕에게서 등을 돌렸다.
  16. 금세종은 해릉왕에게 부인 오림답씨를 뺏긴 적이 있었다. 해릉왕은 오림답씨가 미녀라는 까닭에 강탈했는데, 오림답씨는 남편의 목숨을 살리러 스스로 갔다가 해릉왕의 유혹을 거절하고 자살했다. 금세종은 황제에 오른 뒤 오림답씨를 황후로 추존했지만 늘 그리워했다.
  17. 하지만 해릉양왕의 아성을 넘어서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