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균옹호론

1 옹호론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

환빠는 발끝에도 못미치는 헛소리이자 궤변, 개지랄. 그리고 천하의 개쌍놈들

원균은 워낙 상상 이상의 간신배라서, 조선시대부터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하지만 현대에는 까가 빠를 만든다 라는 법칙 때문에, 오히려 원균을 옹호하는 미친 이론이 퍼지기 시작했다. 또한, 잘 모르는 대중에게 원균옹호론이 중립적이고 신빙성있는 이론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아직도 여기에 낚이고 있다. 모 소설가는 원균을 위해서 변명 비슷한 글을 썼더니 원씨 가문 사람이 와서 감사를 표하더라고 한다. 이건 뭐 원북공정도 아니고

의외로 박정희 시절부터 이순신을 띄워주는 동시에 원균이 지나치게 옹졸한 소인배로 격하되었지 않았냐는 의심이 있었고, 전두환 정권부터는 본격적으로 원균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악당으로 불린 인물은 피해자였고, 더 알아보니 영웅이었다'는 논리의 시작이었다. 이것은 20세기 후반의 기존 역사적 서술을 의심하던 역사수정주의가 한국으로 수입되면서 나온 흐름이라고도 볼 수도 있다. 비슷한 예로는 놀부옹호론도 있었다.

이렇게 물밑에서 떠돌던 이론은 1980년대 이재범의《원균정론》[1]에서 첫 스타트를 끊었다. 소설가 고정욱의 《원균, 그리고 원균》[2] 소설가 김탁환의 《불멸》로 이어지며 원균옹호론을 퍼트리는데 앞장섰다. 이덕일 또한 《우리 역사의 수수깨끼》에서 원균옹호론을 전개한 바 있다.[3][4] 자세히 읽어보면 원균보다는 선조를 재평가했음을 알 수 있는데, 전체적으로 원균을 기용하고 칭찬한 선조가 무능하지 않았다는 서술이 많다.

원균옹호론자들은 신빙성이 떨어지는 가문기록《원균행장기》을 내세우며, 난중일기와 장계들을 비롯한 이순신의 기록들은 무시한다. 또한, 선조수정실록의 기록들은 이순신의 친척이 원균을 고의적으로 왜곡했다고 주장한다. 논파당하면 "역사는 승자의 역사", "옛날 일을 네가 봤냐? 어떻게 아냐?", "원균도 열심히 싸웠다"라는 소리로 일관한다. 악명높은 환빠들과 주어, 목적어만 바꾸면 완전히 똑같다. (예 : 강단사학이 진실을 은폐한다. 숨겨진 진실을 찾아야 한다 등등)[5]

이러한 책이나 당시의 오류는 너무나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원균정론》: 원균옹호론을 처음으로 묶어서 만든 책이다. 하지만 원균을 옹호하기 위해서 무리한 해석이 많다. 일례로, "이순신이 원균 몰래 장계를 올렸다" 면서 실록 기사를 내놓는데, "이전 한산도 해전(옥포의 오기)의 장계와 같습니다" 라면서, 이순신이 원균을 따돌렸다는 내용이 있다. 그런데 실제로 위의 기사가 적힌 날짜는 한산도 대첩 직후이다. 그 밖에도, 경상우수영 병력이 1만이면 조선 수군은 10만이고 육군은 50만이다라는 주장이 실려있는데, 이건 일본 학자들의 주장으로서, 당시 조선 병력이 얼마였는지는 경국대전과 실록에 아주 잘 실려있다. 굳이 경국대전을 보지 않아도, 왜 십만양병설이 좌절되어야만 했는지만 생각해도 알 수가 있다.
《선조수정실록》에 대한 이해부족: 선조수정실록은 선조에게 미움을 받은 장수(이순신, 의병장)들에 대한 평가를 다시 쓴 기록이다. 70년대 사학계에서는 이순신을 지나칠 정도로 찬양했기 때문에, 선조의 평가가 담긴 선조실록을 다시 연구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즉 정권이 바뀌면서 겨우 해금된 연구였다. 원균옹호론은 선조와 이순신을 심층적으로 연구하기 위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80년대 이전에도 수정실록을 참조해서 이순신을 찬양했던 학자들은 없었다. 학자들은 처음부터 실록에 버금가는 신뢰도를 가진 임진왜란 기록들을 교차검증하면서 연구했다. 결과적으로, 선조가 이순신과 의병장들처럼 만만한 능력자들을 숙청했던 이유는 왕권을 수호하기 위해서였음이 분명해졌다. 애초부터, 선조수정실록은 몇몇 충신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준 기록일 뿐이고, 원균의 평가는 선조실록의 원본을 보더라도 별다른 차이가 없다.
원균 칭찬에만 도취하는 이론: 당시의 과도기적인 연구에는 이미 해답이 내려졌다. (="원균은 왕권강화를 위해서 이순신의 제거에 사용된 간신배 맞다"). 하지만 원균 옹호자들은 선조-원균-이순신을 재평가하려고 했던 80년대의 연구 중에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이론들만 인터넷과 책에다 무작정 퍼나르고 있다. 원균옹호론을 펼치는 사람들은 그동안 발전한 연구를 무시하거나, 원균에 대한 사학계의 결론마저도 부정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받아들이는 건 오직 원균의 칭찬 뿐이다.

결국, 원균옹호론은 한국 역사 재해석의 최대 흑역사로 남게 되었다.

처음에는 선조를 재평가했던 이론에서 원균이 포함되자, 원균옹호자들이 원균의 간신배적인 행보를 부정하고 이순신을 깎아내리는 통에, 반감을 느낀 역사학자들은 원균을 더욱 싫어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원균에 대한 평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공식적으로 조선정부에 보고된 기록에는 이순신과의 연합작전을 제외하면 아무런 전공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멸의 이순신 같은 작품에서는 원균을 이순신의 멘토로 만드는 상황이 벌어졌다. 공중파 대하사극에서 이런 짓을 저지르자 분기탱천한 김경진 등은 공저한 소설 《임진왜란》에서 원균옹호론을 공격했고, 다음 토탈워 카페지기 도현신은 자신의 책인 《원균과 이순신》에서 원균옹호론을 반박했다. 그럼에도 《원균, 그리고 이순신》, 모 재미교포 작가가 쓴 희대의 불쏘시개왕을 참하라!》, 《조일전쟁》 등 원균옹호론 저서들은 계속 나오고 있다.[6] OTL. 이우혁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슬픈 시각으로 본 원균명장설'이란 글을 올렸으며 이 글은 토론할 때 종종 인용이 된다.보러가기

현대의 원균옹호론은 자본주의 시장에서 마초적인 지휘관 동료로서 팔아먹기 좋은 캐릭터라서 유행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뭐라고? 이우혁에 의하면 마지막에 싸움터로 향했으므로 군인에 대한 보편적인 동정심을 이용하는 사람들, 학문적으로는 박정희 시대에 이순신을 너무 팔아먹어서 당시의 조선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한 연구였으며, 가장 최근의 사례로는 조선, 이순신, 한국인을 깎아내리기 위해서 국까 컨셉을 잡으려고 원균을 옹호하는 경우도 있다. 원균옹호론을 보면 이러한 심리가 꼭 하나씩 섞여있다. 궁예, 광해군 등이 재평가 되는 것과는 질이 다른 것이다.

오해를 고치기 위해서 말하자면, 원균은 절대로 영웅이 아니었다. 그는 전형적인 권력숭배자이자, 권력층과의 유착이 깊었던 간신배에 가까운 인물이다. 또한 철저한 개인주의자였기에, 부하와 백성들이 위험에 처하자 방패막이로 써먹고 도망치기만 했다. 당대의 같은 친척들도 원균을 부끄러워했을 정도였다.

근본적으로 따지면 원균옹호론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은 선조였다. 현대의 원균옹호론은 선조를 재평가하는 이론에서 시작되었으며, 원균옹호론자들이 내세우는 사료는 원균행장기와 선조의 변명을 짜집기한 것이다. 현대인들에게는 이해가 안 되겠지만, 원균은 이순신보다 권력자들의 이익이랑 관계가 깊었고, 결정적인 순간에 신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7] 당시 조정에서는 이순신처럼 우리편임이 명확하지 않은 장수에게 미련이 없었다.

정리하자면 나라 말아먹을 뻔한 정치군인, 권력자에게 이쁨받은 꼴통, 혈연만 끝내줬던 간신. 원균 재해석 운운하는 소리가 나오면 혹시 왜곡된 정보로 억지주장하는 것인지 잘 살펴보자.

재미있게도 영어 위키에선 원균을 Korean admirals 카테고리에 등재시키고 있다. 미국과 영국 해군 교과서를 쓴 이들이 쓴 책인 '해전의 모든 것'(휴먼 앤 북스 펴냄)에서도 이순신을 전설적인 명장 제독으로 추앙하는 반면 원균은 조선 수군을 아주 매장한 최악의 무능 제독으로 통렬히 비꼬고 있다. (단, 여기에선 박홍도 동류로 까고 있는데 이 사람은 적어도 원균에 견주면 훨씬 유능한 편이며 억울한 점도 크다.).

2 원균명장설

원균을 이순신에 필적하는, 혹은 능가하는 장군이라고 보는 견해가 원균명장론이다. 눈 흐릴 명(瞑)자를 써서 명장인가?앞에 실을 붙여야지 이순신의 전공은 모두 우상화한 측의 역사왜곡이라는 극단적인 주장.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대게 원균의 후손들이며, 근거는 주로 원균행장기이다. 하지만 정작 동시대 문중에서는 깠던 인물이다. 원균명장설을 믿느니 버기 최강설을 믿어라.

그러나, 행장기의 사료적 가치는 없다고 해도 좋다. 문중에서 조상들의 이름을 높이려고, 한참 후에 지어낸 책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난중일기는 전쟁 당시 당사자가 쓴 기록이며 다른 공식기록과 교차검증이 되지만, 원균행장기는 다른 기록과 교차검증되는 게 아무것도 없다.. 행장기를 사료로 삼는 원균빠들을 놀리면서 나온 농담이 바로 김억추 명장설. 똑같이, 김억추 행장기를 근거로 하면 김억추는 항우를 한참 능가하는 판타지스러운 장수가 되어버린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기록광이었다. 당장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항목을 보자. 이런 기록을 남길만한 지식인들의 여러가지 전쟁기록을 보면, 원균에 대한 당시의 여론은 모조리 원균의 탐욕스러움, 권력숭배주의(간신배), 권력자들의 감투놀음이 나라를 망쳤음을 기록했다. 당대 지식인들도 그를 간신으로 분석했다는 뜻이다. 원균명장론은 제대로 사료에 대한 교차검증만 해봐도 불가능한 이론이다.

결론부터, 원균은 명장이 아니다. 아군학살과 도망의 명수라고 보면 정확하겠지만 말이다.
대관절 어떤 명장이 자신의 함대 70여척을 불태우고, 이후에도 130척의 대함대를 버리고 도망치면서 전멸한다는 말인가? 참고로 원균이 불태우고 포기했던 배는 대부분이 판옥선이며 함포를 기본적으로 배치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일본의 전선은 갑판 위에서 활이나 총을 쏘는게 전부인 사실상 수송선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었으니 지고 싶어도 지기 어려운 정도의 전력차였다. 굳이 충무공 정도의 전략전술을 쓰지 않더라도 함포 사거리만 유지하면서 일방적으로 두들기기만 해도 이길 수 있는 전투들을 단 한번도 이긴 적이 없으니 까놓고 말해서 졸장이라는 말조차 쓰기 어려울 정도의 머저리다.

원균은 임진왜란 초기부터 전투조차 없이 75척~100척 가량의 경상우수영 함대를 불태우고 도망친 전례가 있다. 이때, 원균이 겁에 질려 배를 버리고 도망가려 하자 원균 휘하의 옥포만호 이운룡이 "나라의 중책을 맡은 장관으로서 강토를 사수할 것이며 더욱이 이 지역은 남방의 주요 방어선으로서 최대의 관문입니다. 전라수군과 힘을 합쳐 왜적을 쳐부숴야지 도망은 직분과 국가에 대한 배신행위입니다" 라고 항언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이런 걸 봐도 어떻게 원균 옹호론이 나오는지 의문스럽다.

굳이 유능한 점을 찾으려 한다면, 혈연을 통한 주류권력에 대한 후빨능력, 자리보전, 낙하산을 이용하는 능력정도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무관으로서 필요한 능력은 한없이 0에 수렴하면서 간신배의 필수소양은 가히 만렙을 찍고 있다. 원균: 내가 함대를 불태운 건 사실 고도의 청야전술이라능~!

3 원균맹장설

원균명장설이 너무 쪽팔리니까, 명장은 아니지만 용맹한 장수였다는 설이 나왔다. 1980년대 MBC에서 방영한 조선왕조 500년에서도 원균이 무능한 밥벌레는 아니었고 맹장 타입이었다고 옹호를 해주었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채택한 '해전에는 능숙하지 못하지만 육전에는 능숙해서 북방의 명장이었다'란 주장도 원균맹장설에 포함된다. 하지만, 원균은 육전에서도 활약은 없었다. 물론, 깐깐하기로 소문난 조선왕조실록에도 원균이 육군전문이라는 말은 없다.[8]

결론부터, 원균은 맹장이 아니다. 猛將말고 盲將이라면 모를까.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인체의 장기 이름 맹장 맹구+장군
당장 바로 위 카테고리에서 설명되는 수많은 적전도주 사례[9]나 자침기록들만 봐도 용맹과는 거리가 한없이 멀다는걸 세살배기 아기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원균이 지상전을 잘하는 장수라는 가설은 헛소리에 가깝다. 조선시대의 무관시험에는 수군 무과 육군 무과가 따로 있지 않았다. 훈련방법은 크게 차이가 났지만, 지휘관들이 배우는 기초적인 병법은 비슷했다. 물론, 해상에서는 군선이라는 별도의 도구를 써야 했으므로 이순신처럼 유연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면 적응기간은 길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원균은 수군을 맡으면 잘 싸울 것 같다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수군을 맡았다. 더 빨리 전멸시킬 수 있다는 뜻인 것 같다. 배는 버리면 그만이니.

결국, 원균의 행적은 낙하산 인사의 파멸기록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원균이 '최후에 군인으로서 싸우러갔다' 면서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원균의 지휘기록이란 자신의 도주로를 우선하다가 전멸했던 황당한 사례밖에 남아있지 않다. 심지어, 원균은 걸핏하면 백성이나 군인들을 버렸으며, 이렇게 인명을 내팽겨친 만큼 성공한 업적조차 없다. 이런 장수에게 맹장이라는 평가를 붙여주는 것은, 그의 명령을 따르다가 허무하게 산화했던 군인들을 모욕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즉 원균은 맹장이라기보다는, 단순히 정치적인 유착과 권력숭배에 취해서, 백성과 부하들의 목숨을 값싸게 낭비하면서 살았던 인물상에 가깝다.
백성들에게 포악하고 군인들을 닥달했다고 맹장이 아니다. 그냥 똥별이라는 평가가 어울리지 않을까...

4 옹호론이 나오는 이유

  • 높은 인지도가 자본주의 시장에서 가지는 가치 : 원균은 재평가를 들먹일 이유가 전혀 없는 간신배지만, 억지 논리와 사료의 취사선택으로 '재평가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나오는 것은, 높은 인지도 때문에 '돈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인지도가 높은 화제에 대해서 기존과 전혀 다른 주장을 하는 것 자체가 충분히 화제성이 담보되는 행동이다. 때문에, 역사적 신뢰성과 관계 없이 마구잡이로 자극적인 주장, 기존 학계의 연구를 '강단사학' 운운하면서 마구 비난하는 재야 저술가들은 그것만으로도 일정한 수입과 유명세를 얻을 수 있다.[10]단, 이들한테 그 식민사학 수괴인 이병도가 윤치호, 윤치영와 친인척이라 말하고, 그 윤씨들이 윤두수 후손들이라 말하며, 식민사학자 주제에 입 놀리지 말라는 식으로 비꼬자.
  • 종친회와 지역사회의 이기적인 활동 : 원주 원씨 종친회와 평택시에서 '지역 위인'을 만들려고 원균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특히 원균의 직계후손인 평택시(!) 새누리당 원내대표 원유철하필 그가 이런 일에 나서는 게 우연일까?이 유명하다. 이는 원균과 이순신을 감히 동급으로 포장하여, 자신들도 그 후광을 얻어보고자 하는 심성의 발로이다. 그러나 원주원씨는 정작 정말로 자랑스러운 조상은 외면한다.
  • 당대 임금/권력층과의 친분 : 원균이 이순신을 쳐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권력, 혈연적인 기반이 탄탄했기 때문이다. 물론 실력이 밝혀진 이후에는 원균이 선무공신 1등에 추서될 때 죄다 반대했지만, 이때는 선조 혼자 박박 우겨서 집어넣게 된다. 따라서, '원균이 엄청난 중책도 맡고, 죽고서도 공신이 되었는데, 찌질이로 나오면 이상하지 않겠느냐'하는 논리를 토대로 원균에 대한 선조의 호평을 팔아먹을 수 있게 되었다.[11][12] 당장에 원균이 저지른 짓은 호적에서 제명당해도 시원찮은 것이었지만, 선조의 두둔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평가가 유보되었다.
  • 가공 매체에서의 극적효과 : 불멸의 이순신 부류라고 할 수 있다. 가공매체에서는 원균을 약간 옹호해야 '작품의 재미'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원균옹호론이 논파가 끝난 헛소리라도, '이순신의 라이벌' 운운하기에는 굉장히 좋은 캐릭터인 것은 사실이다. 지장 이미지의 이순신과 맹장 이미지의 원균[13]을 대비시키면 흥미로운 전개가 만들어진다. 역사 그대로 묘사한다면, 원균은 처음부터 끝까지 찌질거리는 매우 평면적인 캐릭터라서, 현실적이고 재미있는 인물설정을 위해서 조금은 옹호하는 각본을 짜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이순신은 너무 비현실적으로 평면적인 먼치킨이고 원균은 비현실적으로 평면적인 빌런이다. 따라서 현실적인(!) 설정을 위하여 현실을 왜곡해야 한다는 흠좀무한 부조리가 발생하는 것이다(...) 물론, 재미에서는 플러스가 될 수 있어도, 욕은 오지게 먹을 각오를 해야한다.
  • 능동적이고 마초적인 맹장에 대한 갈망 : 보편적으로, 군인 캐릭터가 등장하는 이야기는 멋있고 영웅적이어야만 팔린다. 속된 말로 찌질하거나 약한 캐릭터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잘 통하지 않으며, 그것이 해당하는 장르에서 핵심적인 부류에 속한다면, 조금만 찌질한 행동을 해도 발암을 유도한다면서 등을 돌리는 고객들이 많다. 솔직히 원균이 스크린에 나오는걸 보고 싶냐? 당연히, 전쟁물의 주역인 군인 캐릭터인 원균은 이런 마초적, 자본주의적인 요구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막장도가 낮아지고 맹장으로 미화되는 측면이 생기게 된 것이다. 차라리 신립을 띄워라. 임진왜란에서 신립은 빠르게 광탈해서 비중이 없기 때문인가보다
  • 지나친 프로파간다에 대한 반발 : 박정희가 이순신을 존경[14]하면서 프로파간다에 써먹었다는 의혹이 사회에 퍼진 점도 원인이다. 대개는 전두환 시절부터 박통의 프로파간다를 균형있는 시각으로 분석해야 한다며 원균옹호론이 사회로 퍼져나갔다.[15]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당시의 프로파간다에서 나온 역반응에 불과하다. 반대로, 이런 흐름에 대한 비판자들도 이순신의 업적을 엿먹이는 경우가 있는데, 이 항목에는 북한에서도 이순신의 활약에 인민의 희생이 있다고 주장한다면서, 이런 여론에 대한 음모론을 써놓을 정도였다. 이순신: 참 잘들 하는 짓거리다. 어찌보면 현대사의 비극인 셈이지만, 잘 생각해보자. 원균을 만들어낸 것은 이념논쟁이 아니라, 권력자들이 명령을 잘 듣고 권력배경이 튼튼했던 원균을 선택했다는 점에 있음을.
  • 왕권 및 천조국 지상주의 : 원균옹호론의 최종보스. 선조실록과 국력주의자들의 역사관이다. 이순신이 없어도 선조와 천조국(명)의 힘으로 승리할 수 있으므로, 확실한 권력배경을 지닌 원균을 이용해서 이순신처럼 아군임이 확실치 않은 실무자를 제거한 것은 타당한 책략이었다는 관점이다. 전형적인 선조옹호론이자 강대국에 대한 종속주의를 드러내는 관점이다. 애초에 원균이 발탁되었던 이유는 권력층에게 이런 생각이 보편적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순신 없이도 승리했을 거라는 관점이 무조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명나라 병사들에게는 조선남부를 목숨바쳐 지킬 이유가 없으며, 혼란기에 조선이 해체되는 입장에 놓였을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무책임한 권력자 중심이론이다. 당연히 중국이나 일본, 그리고 조선까들에게 매력적인 학설이기도 하다. 그.러.나. 만약 명나라의 도움만으로 임진왜란이 종결되었다면 조선은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의 하삼도를 일본에 내주는 종전조약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렇게 될 경우 곡창지대를 모조리 잃어버린 조선은 누르하치가 발흥하기도 전에 멸망해도 하등 이상하지 않다는걸 생각해보면 결국 이 주장은 개소리에 불과하다. [16] 물론, 문제는 당시의 선조와 권력자들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점이고, 현대인들 중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지만...

5 원균옹호론의 사례

5.1 지역사례

  • 평택에선 권력층과의 유착을 빼면 무능했던 원균을 지역의 유명인사랍시고 홍보하는 입장이고 지역 유지인 원주 원씨에서 이것을 밀어주는 지라 심심하면 원균옹호론을 들먹이고 행사를 여는 등, 세금이 아까운 병크를 자주 보여주고 있다. 기대할 수 있는 돈이 더 많으니 계속 하는 거겠지 뭘. 졸장 이전에 간신배였던 주제에 사당과 묫자리를 왠만한 위인 묘보다 깔끔하게 관리해놓은 건 덤.

5.2 대중역사서 사례

『선조실록』 37년(1604) 6월 25일자는 세간의 이런 평가가 정당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해 준다. 임진왜란의 공신들에 대한 포상기록인데 …… 무신으로는 이순신 · 권율 · 원균이 선무일등공신이었다. …… 현재의 일반적 통념에 역적인 인물인 원균이 400년 전인 당시에는 당당히 일등공신으로 책봉된 것이다. 그것도 그가 모함했다는 이순신과 같은 반열에 올라 있다. 이 기록은 원균도 조조처럼 한 영웅을 위한 후세의 희생양인지 모른다는 의심을 갖기에 충분하다.

이덕일·이희근,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999, 197쪽 그런데 원균이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된 것이 신하들의 합의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선조의 무한 원균사랑 때문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마저도 원균은 본래 선무공신 2등이었는데, 선조가 생떼를 부리는 통에 1등으로 올라간 것이다. 애당초 역사의 희생양이고 자시고 원균과 조조를 동급 취급한다는 것부터가 제정신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원균은 당초에 군사가 없는 장수로서 해상의 대전에 참여하였고, 뒤에는 주사(舟師)를 패전시킨 과실이 있었으니 이순신·권율과는 같은 등급으로 할 수 없어서 낮추어 2등에 녹공했던 것인데, 방금 성상의 분부를 받들었으니 올려서 1등에 넣겠습니다. …… 사신은 논한다. …… 원균은 주함(舟艦)을 침몰시키고 군사를 해산시킨 죄가 매우 컸다.

『선조실록』 36년(1603) 6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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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점에서 볼 때 원균이 상대적으로 억울한 것은 사실이다. 그의 경력은 그가 불패의 신화를 지닌 용장은 아니지만 적어도 겁장(怯將)은 아님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순신보다 다섯 살이 많았던 그는 무과에 급제하여 조산만호로 있으면서 변방의 오랑캐 토벌에 세운 공으로 부령부사에 특진되었으며, 병사 이일과 시전부락을 격파한 공으로 선조 25년(1592) 경상우수사가 되었다. 이는 이순신이 자신의 실력이 아닌 유성룡과 정탁의 추천을 받아 종6품 정읍현감에서 정3품 전라좌수사로 파격 승진한 것과는 비교되는 것이다.

이덕일·이희근,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999, 200쪽 원균은 1564년 무과에서 부정시험 의혹으로 낙방했다가 15년 뒤에야 합격한 반면, 이순신은 1572년 무과에서 낙마 사고로 낙방했다가 고작 4년 뒤에 합격했다. 종성부사 원균은 인사고과에서 꼴찌를 기록한 반면, 발포만호 이순신은 인사고과에서 으뜸을 받았다. 시전부락 전투에서도 원균은 예비대인 계원장(繼援將)이었지만, 이순신은 포병대인 화열장(火烈將)으로 참전한데다 적장 우을기내까지 사로잡았다. 사실 충무공의 화력덕후 기질은 이때부터...
게다가 1591년 원균이 전라좌수사에 임명되자, 사간원은 인사고과를 들어서 그를 경질시켰다. 원균이 딱히 무슨 공적이 있어서 승진했던 게 아니었던 것. 사간원이 아뢰기를 "전라좌수사 원균은 앞서 수령이 되어 고적(考積)이 거하(居下)였는데 겨우 반 년이 지난 오늘 좌수사에 초수(超授)하시니 출척권징(黜陟勸懲)의 뜻이 없으므로 물정이 마땅치 않게 여깁니다. 체차를 명하시고 나이 젊고 무략이 있는 사람을 각별히 선택하여 보내소서"라 하니, 아뢴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선조실록』 24년(1591) 2월 4일

</ref> 게다가 원균 다음으로 임명된 유극량도 실력은 있지만 성품이 무르다는 이유로 경질되었던 것을 보면 전라좌수사 임명이 어지간히 깐깐했음을 알 수 있는데,[17] 그 다음으로 온 이순신이 단지 승진이 빠르다는 것만을 지적받았던 것은 오히려 그의 유능함을 보여준다. 이마저도 선조의 절대적인 지지로 유임되었다.[18]

주변 상황이 이런 마당에 원균은 착실히 전공을 인정받아 경상우수사가 된 인물이고, 이순신은 류성룡와 정탁이 앉힌 낙하산 인사라는 주장이 얼마나 웃긴 평가인지는 자명하다.[19] 실상은 오히려 그와 반대로 원균이 윤두수, 윤근수를 비롯한 조정의 서인 대신들과 교류가 많았다는 점 때문에 이들의 비호로 진급했다는 평가가 많다. 하지만 이들은 인과관계를 역전시켜 원균을 북인으로 만든다!

『선조수정실록』은 대체로 이순신에 대해서는 칭찬으로 일관하면서도, 원균에 대해서는 폄하를 일삼은 책으로서 '이순신=충신', '원균=역적'의 전거가 된다. …… 인조반정 직후 남인 이원익이 영상이 된 데서 알 수 있듯이 반정정권은 형식상으로 서·남인 연합정권이었다. 이순신은 남인 영수 유성룡의 추천을 받았으므로 남인으로 분류된 반면, 북인이 집권했던 왜란 말기 조정에 비호자가 많았던 원균은 북인으로 분류되었으므로 『선조수정실록』이 이순신은 후하게, 원균은 박하게 기술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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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이희근,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999, 201~2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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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북인이 편찬한 선조실록과 북인 윤계선이 쓴 달천몽유록에서는 원균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사신은 논한다. 한산의 패배에 대하여 원균은 책형(磔刑)을 받아야 하고 다른 장졸들은 모두 죄가 없다. 왜냐하면 원균이라는 사람은 원래 거칠고 사나운 하나의 무지한 위인으로서 당초 이순신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백방으로 상대를 모함하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일격에 적을 섬멸할 듯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고갈되어 군사가 패하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사졸들이 모두 어육이 되게 만들었으니, 그때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한산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이 함몰되었고, 호남이 함몰되고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사를 목도하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

<html> <p style="text-align: right;"><a href="http://sillok.history.go.kr/url.jsp?id=kna_13104002_002">『선조실록』 31년(1598) 4월 2일</a>

긴 시냇가에서 여러 귀신들이 손뼉을 치며 웃으므로 그 까닭을 물으니 통제사 원균을 기롱하고 있는 것이었다. 배는 불룩하고, 입은 삐뚤어지고, 얼굴빛은 흙빛이 되어 기어왔으나 퇴짜를 맞고 참여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언덕에 의지하여 두 발을 쭉 뻗고 주저앉아 주먹을 불끈 쥐고 길게 탄식할 뿐이다. 파담자 역시 크게 웃고 조롱하다가 기지개를 켜고 깨어나니, 그것은 한바탕 꿈이었다.

<html> <p style="text-align: right;">윤계선, 『달천몽유록』

그야말로 이게 무슨 지거리야! 게다가 선조 생전에 이순신에 대한 모함과 원균에 대한 비호의 선봉에는 서인 영수 윤두수와 북인 영수 이산해가 다투어 나섰고, 정유년에는 남인 영수 류성룡까지 소극적으로 편승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해서 윤두수가 북인이었다거나 윤계선이 서인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당파적 이해를 뛰어넘는 인식(이 경우에는 '선조에게 밉보이면 안 된다')이 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는 사안이다.

두사람에 대한 호불호의 감정을 배제하고 원균과 이순신을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원균은 용감한 무장으로서 이순신만큼은 못하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싸웠다. 둘째, 후배인 이순신이 상관으로 임명되자 반발하였다. 셋째, 이순신이 투옥된 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삼도수군통제사로서 도원수 권율의 명령을 받아 재침하는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다섯째, 선조의 호의로 선무일등공신에 책봉되었다.
종합해 보면 원균은 불패의 신장은 아니지만 공적이 되어야 할 이유도 없는 한 사람의 용감한 장수이자 왜적과 맞서 싸워 목숨을 바친 공신일 뿐이다. …… 이순신을 추앙하기 위해 다수의 문신들이 왜적의 침입에 놀라 달아나기 바쁜 와중에 힘을 다해 싸웠던 원균같은 무장이 희생양이 될 필요는 없다. 하물려 나라를 위해 전사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있으랴.
<html> <p style="text-align: right;">이덕일·이희근,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999, 203~206쪽

기껏 중립적인 을 하고 있지만 내용물을 뜯어보면 하나도 맞는 게 없이 엉망진창이다. 원균은 불패의 신장은 아니지만 개념 있는 장수는 더더욱 아니고,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으로 공익을 훼손시킨데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정치적 술수를 동원했다가 정작 싸움에서는 자기 혼자만 살겠다고 달아난 무다구치 렌야와 같은 민폐 개초딩 캐릭터다. 이런 사람을 전사했다는 사실만으로 추앙하는 건 반자이 어택을 조장하는 것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가 정말로 '전사'했는지도 확실치 않다!

  •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싸웠다.
최선을 다해 싸운다는 사람이 함선과 무기를 불태우고 달아나고, 칠천량 해전에서는 출정해놓고 술만 퍼마시다 적이 다가오자 육지로 튀어 사라졌다. 운봉전서에 나오는 활 쏘고 칼 쓰는 열심히 싸우는 것조차 했는지 의심스럽다. 원균은 무능한 장수조차 못 되는 게으른 간신이었다. 자꾸 이 인간에게 졸이라는 칭찬을 하여, 열심히 싸우며 목숨을 버려간 충신들을 폄하하지 말길 바란다.
  • 후배인 이순신에게 반발했다.
나이는 원균이 5살 더 많지만, 무과 급제는 이순신이 3년 더 빨랐다. 원균은 1579년, 이순신은 1576년. 그리고 5년 나이차는 이이의 격몽요결에 나오듯 당시에는 그냥 친구먹을 수 있는 나이로 쳤다. 원균의 진급이 빨랐던 것은 그가 유능해서가 아니라 이순신의 진급이 눈물겹게 굴곡졌기 때문이다. 이일이라는 쓰레기같은 놈이 이순신을 모함하지만 않았어도 되려 이순신이 훨씬 진급이 빨랐다. 임진왜란 중 원균의 뇌물과 전공조작을 보면 또 다른 측면에서 설명이 되지만서도.
  • 이순신이 투옥되자 통제사가 되었다.
그냥 사실이긴 하지만, 여기서의 뉘앙스를 고려하자면 이순신을 투옥'시키고'가 더 적절할 것이다. 지휘계통까지 무시하면서 말도 안 되는 빌미로 요시라가 던진 떡밥에 다시 불을 지피고 이순신을 파직시킬 빌미를 선조에게 제공해 준 사람이 바로 원균이다. 요시라, 원균, 선조 셋 가운데 하나만 없었어도 그런 비극은 없었을텐데...
  • 권율의 명령으로 싸우다 전사했다.
권율이 싸우라고 몰아붙인 게 아니다. 당시 조선 조정의 수군 운용 전략은 오히려 원균이 한산도에 머무르면서 소규모의 지속적인 파상공세로 보급선 자체를 교란시키는 것을 지시하고 있었다. 권율이 원균을 곤장친 것은 원균이 이러한 역할은 수행하지 않고 직접 부산까지 갔다가 전력만 까먹고 돌아온 데 대한 문책성 차원이었다. 하지만 원균은 자포자기 모드로 들어갔고... 망했어요.
  • 선조의 호의로 일등공신이 되었다.
말 그대로 선조의 호의였다. 선조는 위의 궤변들을 하나도 다를 바 없이 사용하면서 원균을 옹호했고, 그런 떼쟁이 선조의 의중이 반영되어 원균은 팔자에도 없는 일등공신이 되었다. 무슨 원균이 잘나서 일등공신이 아니라는 말이다. 원균을 이등공신으로 녹훈하는 소극적 저항은 있었지만, 녹훈 반대와 같은 적극적 저항이 없었다는 점은 분명 아쉬운 사실.
  • 원균이야기 칠천량의 백파 - 저자는 원주 원씨와 평택시의 지원을 받아 예전부터 관련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 책부터가 원주원씨와 평택시의 후원으로 쓴 비매품인 <원균 평전>을 출판용으로 다시 다듬어 나온 것이다. 원균 행장 21세기판이라 할 수 있는 책.

5.3 인터넷

  • 위키백과마저도 상당히 오랫 동안 원균행장록을 근거로 원균항목이 작성되어 있었다. 당연히 지금은 객관적인 비판이 훨씬 많다.
  • 네이트 백과사전도 비슷한 내용이었지만 서비스가 중지되면서 사라졌다. 네이트 백과사전은 한국역대인물정보의 내용을 기본으로 작성했는데, 애초에 # 한국역대인물정보의 원균 내용의 집필자가 바로 원균의 재조명을 주장한 논문을 작성한 당사자이므로 이런 내용이 나온 게 당연하다. 정작 만악의 근원이 남아있다.
  • 원균옹호론에 대한 논리적인 고찰은 이글루스의 블로거인 을파소의 블로그에서 잘 볼 수 있다. 원균 옹호론을 반박하기 위해 일부러 카테고리를 개설했고 연재도 마쳤다. 책으로 보는 것보다 인터넷으로 보는 게 좋은 사람은 을파소의 블로그를 방문해보자.
  • 언젠가는 모에선의 영향으로 모에화가 될지도 모른다...가 아니라 불멸의 이순신 방영 때 역사를 제대로 모르고 원균옹호론에 낚인 부녀자들이 실제 원균을 그네들 방식으로 모에화시켰다! 당시 부녀자들은 그들 방식대로 미화시킨 이순신과 원균을 가지고...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원균옹호론이 가진 시장성(?)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공단기 한국사 1타 강사라고 자랑하는 조선 후기사 전공자인 신영식의 경우 붕당정치 무료특강 등 강의에서 원균을 박정희 정권의 피해자라면서 원균명장론을 가르치고 있다. 공시생 100만명 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공시생들에게 대대적으로 퍼지고 있어, 우려되는 부분이다. [20]

6 원균옹호론 매체와 반박

원균옹호론은 생각 이상으로 곳곳에 퍼져 있다. 원균옹호가 포함되지 않은 책을 찾는 것이 더 빠를 정도. 임진왜란에 대한 아무책이나 찾아봐도 이순신에 대한 오류, 선조옹호, 원균옹호 3콤보 크리가 터진다. 의심가면 시중의 아무책이나 찾아 보자. 최소한 위의 3가지 중 한가지는 걸린다.

위의 항목에도 설명되어 있지만, 현대 시장에서 원균이 뜨게 된 이유는 조금 더 복합적이다. 특히, 군인이면 보편적으로 강하고 좋은 존재라고 묘사되어야 팔린다는 자본주의적, 마초적인 측면에서 원균 캐릭터는 재창조되었다. 어찌보면 수동적인 이순신에 대응하는 화끈한 군인을 보고 싶다는 열망이 원균에게 투영되었고, 여기에 자본시장에서의 특정한 이익분야가 결합되자 걷잡을 수 없이 번진 것이다. 물론 현실의 원균에겐 그런 것 없었다.

  • <난세에 간신 춤춘다>

원균은 경상우수영 바다에서 활동했으니, 자기가 길을 안내하지 않았으면 싸우지 못했을 텐데, 이순신이 혼자서 장계를 올려서 공을 훔쳤다고 생각했을 거라는 해석이 있다. 또한, 원균 논란은 무인들을 푸대접하던 조선의 체제가 만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당시 동아시아는 일본빼면 전부 문인우대국가였으며 그나마 조선이 나았다.) 그래도 원균에게 좀 동정적인 서술...
...이지만, 원균은 애초부터 혈연, 파벌, 정권후빨로 성공한 권력출신 간신배였기에, 원균의 행적을 두고 무인들을 천시했던 분위기를 문제삼기에는 무리가 있다. 오히려, 그런 문제 때문에 불이익을 받은 사람은 주류권력의 백업을 받기에 애매한 계층에 속했던 이순신이다. 이때는 연구가 그리 발달하지 않았으니 넘어가자.

  • <교과서와 함께 읽는 만화 한국 역사 32권(임진왜란과 항전), 33권(성웅 이순신과 정유재란)>
한국 아문센에서 나온 아동용 불쏘시개 역사만화.
아이들에게 소개하는 역사서로서,'조선장수가 이렇게 무능할 리가 없어'라는 생각으로 만든 만화지만, 기본적으로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원균 옹호가 있는 책이다. 역사 왜곡 우수 도서
불멸의 이순신과 같은 원균맹장론이다. 처음 적이 쳐들어 오자 부하를 보내 이순신에게 원군을 요청한다. (실제로는 적이 오지도 않았을 때 휘하 70여척 함대를 불태우고 도망갔다.) 그런데 이순신은 "전라도에도 적이 쳐들어 오면 막아야 하니 지원은 불가하오."라며 반대하고 결국 원균의 부하가 설득해서 이순신이 함대를 출동시켜서 적을 격파시킨 것 처럼 나온다. 이순신이 원균과 육지(...)에서 처음 만나 "장군", "오~ 이순신 장군"이라고 부르며 해맑게 뛰어오며 서로 포옹할려는 장면도 있다.
기본적으로 이순신이 전과를 세웠다는 설명이 없다. 즉 이순신의 전과는 원균과 함께 싸운 전투만 공로를 인정하고 있다. 때문에, 원균이 꼴랑 배 4척 타고와서 이순신 뒤만 졸졸 따라 다니며 싸움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어린이들은 이 책을 읽고 이순신과 원균이 대등했던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21] 한산도 전투에서는 쌩뚱맞게 중위장 권준이 왜적 함선 수십척을 격파하였다고 써있는게 전부이며, 철저하게 이순신의 전과를 없애놓고 있다. 선조: 흐뭇.
그나마, 이순신이 누명을 쓰는 장면은 "김응서는 왜국의 첩자 요시라의 말만 듣고 이순신으로 하여금 가토 기요마사를 잡게 하라는 청원을 상부에 올렸다."라는 부분으로 밝히고 있다. 그러나 두페이지 뒤에서 "이순신이 철저한 전략가라면 원균은 용장이였다."라며 원균 용장론을 주장한다. 이어 원균이 충청 병사로 떠날때는 부하들이 다같이 원균이 떠나간다며 운다. (...). 좋아서? 나중에 원균은 삼도 수군통제사로 돌아 오는데, 원균이 싸우기 싫어서 병영에서 술만 먹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용맹을 자랑하던 원균도 신중을 기해 싸움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배도 늘리고 지휘체제도 바꿔야 해'"라며 아예 왜곡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원균의 싸움 준비가 졸렬했던 이유는 전부 이순신이 거느리던 부장들과의 불화 때문이라고 하는등 철저하게 불멸의 이순신의 스토리를 따라간다. 잘못된 드라마 하나가 여럿 망쳤다
이어 도저히 싸울 수 없는 상황이지만 명령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출전한다는 점을 몇페이지에 걸쳐 설명한 후, 백여척을 이끌고 출전하여 웅천 앞바다에서 십여척의 적을 무찔렀다고 소설을 쓴다.[22] 위의 문장에도 나오듯이 이순신이 구체적으로 적 몇척을 격파하였다는 것은 원균과 합동으로 싸운 단 2건만 표기하고, 원균이 없는 전투를 소설을 써가면서 십여척을 무찔렀다고 표기하는 것을 보면 작가가 쓸데없이 원균을 옹호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무슨 마약하시길래 원균빠가 되셨어요
이후 풍랑이 심하여 군사들이 지쳐 있을 때 적의 함대를 만나 칠천량에서 적의 기습을 받고 결사적으로 싸웠지만 패했다고 나오는데, 역시 왜곡투성이의 거짓말이다. 조선의 대함대는 김완의 <해소실기>에서 나오는 것처럼, 일본군 40여척의 야습에 깜짝 놀란 원균이 명령하여 강제로 육지로 튀어서 도망갔고, 비어있는 배들은 전부 불타버렸다. 정말 결사적으로 싸웠다면 조선의 삼도연합수군 166척이 왜 일본군을 한 척도 격파하지 못한 걸까? 나의 원균이 이렇게 못 싸울 리가 없어
전반적으로 이순신의 전과는 축소되고, 원균은 없는 전과를 만들어서 양쪽의 균형을 잡으려고 했다. 이것은 어린이들에게 적당히 보기좋은(?) 조선장수들의 우애를 보여주기 위해서 넣은 내용이라고 보는것이 적당하다. 어린애들한테 간신배 놀음을 가르쳐서 어디 쓸려고?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애초부터 원균을 이순신의 동료장수로 설정하고, 원균을 팔아먹는 쪽의 지원을 받은 것이 실수였다고 볼 수 있는 책이다.
  • <조선왕조실록 43 임진왜란과 이순신 장군>

2008년 삼성비엔씨(주)에서 나온 아동용 불쏘시개 Mk2 역사만화

위의 책보다 훨씬 심각한 원균빠만화
위의 아동용 학습 만화가 그냥 커피라면 이쪽은 T.O.P.
교과서 따라잡기 논술 학습 만화라는 모토는 위의 책과 비슷하다. "원균은 안골포 앞바다에서 기습을 감행하여 적의 선단 십여 척을 침몰시켰으나 중과부적으로 물러나야 했다."라는 구절 부터 확실한 원빠 확정. 43권 제목이 이순신이지만 어지간히 이순신에 대해 쓰기 싫은지 거의 끝나가는 89페이지에서 처음 언급되는데 첫 구절이 "이때, 이순신과 원균 장군의 활약으로 기사회생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원균은 불과 십여 척의 전함을 기습 작전을 펼쳐 적선을 무너뜨렸다."로 원균과 공동 언급 했고 그 아까운 페이지에 없는 원균의 전과를 두번 언급 했다. 그림만 보면 누가 이순신이고 원균인지 구분 못하게 비슷한 주인공 포스는 덤. 이어지는 장면도 모두 용감한 원균 사마께서 일본군을 물리치는 장면뿐. 여기에 "원래 원균은 성미가 급하여 두려움을 모르는 맹장이었다."라는 구절은 덤. 이어서 4페이지에 걸쳐 계속 원균 사마가 싸우기 싫어하는 이순신을 억지로 끌어내어 싸우게 만들고 직접 선봉에 서서 일본군을 물리치는 등, 뒷목잡고 쓰러질만한 내용만 가득하다. 아예 제목을 '원균과 임진왜란'이라고 하지...근데 그러면 책이 안팔리겠지

제목만 '이순신과 임진왜란'이지 작가가 이순신을 등장 시키는 것이 참을 수 없는 치욕이기라도 한지 신립, 김시민 보다도 적고, 그나마 등장할때도 원균과 이순신은 동격이다. 이후 칠전량의 무너짐 챕터에서도 권율에게 곤장을 맞은 후 "더 이상 말하지 마라. 내가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니 죽어 주리라" 라면서 중2병 주인공 포스 넘치게 읊조린 후 "이렇게 하여 원균은 1백 척 함대를 이끌고 출진하였으나 5백여 척의 왜군 함대에 대패하고 말았다."라며 끝까지 소설 쓴다. 왜군은 40여척 아니었나요?

아무리 학습만화 특성상 재미를 위해서 조작을 해야 되기 때문에 따지는 것 자체가 뻘짓이긴 하지만, 위의 두 학습 만화 같은 것들을 읽고 자라는 어린이들이 걱정된다. 나중에 자라서 원균의 실체를 알게되는 순간 동심파괴

  1. 불멸의 이순신이 방영되자 《원균을 위한 변명》으로 재출간됐다.
  2. 마찬가지로 드라마가 방영되자《원균》으로 재출간되었다.
  3. 다만 이건 10년도 더 전의 일이며, 그 이후 다른 책에서 원균을 옹호한 적은 없다. 7080년대의 원균재평가 기류는 단순히 학문연구가 발달하는 과정에서 나온 과도기적인 트렌드였다.
  4. 게다가 이덕일이라는 사람이 믿을만한 사람도 아니다.
  5. 물론 이렇게 반박 가능하다. "옛날 그일을 너는 봐서 원균 옹호하냐? 어떻게 아냐", "원균보다 다른 의병장이나 관료이 더 열심히 싸웠다"고 역관광보내면 된다.
  6. 왕을 참하라나 조일전쟁은 원균옹호론 저서라기 보다는 조선까 서적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작가가 조선까니 더 말이 必要韓紙.
  7. 선조가 강하게 밀어붙인 것도 원인이지만, 조정에서는 권력층과의 연줄이 애매한 이순신이나 의병장들이 기존의 권력구조를 흔들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있었다. 반면에, 원균은 각 분야의 실세들과 혈연이 깊었다. 위급시에 이런 판가름이 발생할만큼, 이순신과 원균은 근본적인 처지가 달랐던 것이다. 즉, 태생적인 유착 관계만 갖고도 죽을 때까지 뽕을 뽑았다.
  8. 조선왕조실록에 신립은 기병을 잘한다는 묘사가 있으며, 전형적인 맹장에 어울리는 인간흉기였다는 점이 기록되어 있다. 즉, 당시의 싸움꾼은 신립이었다. 하지만 원균은 뭘 잘하는지에 대한 묘사가 없다.
  9. 심지어 싸워보지도 않고 튀어버린
  10. 따라서 별다른 레퍼런스 없이 무턱대고 '강단사학'을 격렬하게 비난하는 재야사학자들을 보면 각별히 주의하자. 제대로 배운 연구자는 절대로 그렇게 과격하고 자극적인 문언을 사용하지 않는다. 단, 원균옹호론이 등장한 것은 이런 격렬한 어그로를 끌어봐야 돈벌이가 신통치 않았던 시절부터이기에 원균옹호론이 주류적으로 퍼진 이유와는 연관성이 적다. 그런다고 보기에는 힘든 것이 전두환 때이다. 즉, 전두환 정권이 은밀하게 지원했다란 주장도 부정되기 힘들다.
  11. 비슷한 경우는 삼국지에도 있는데 바로 하후돈이다. 하후돈은 애꾸눈이 된 과정부터 장대한 삽질이고 박망파에서는 유비한테 패하고 도무지 승리한 업적이 없는 위인임에도 불구하고 조조의 최측근에 직책이 대장군이라는 이유로 인해 삼국지연의에서는 그야말로 관우와 쌍벽급으로까지 미화가 되어 있다. 물론, 하후돈은 다른 능력이 뛰어나고 인품도 훌륭했지만 원균은...
  12. 굳이 원균을 삼국지의 장수와 비교하자면 하후돈이 아니라 안량문추에 훨씬 가깝다. 순욱은 안량과 문추를 필부 이하라 평가했고 저수역시 안량과 문추에게 병력을 지휘하게 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평가를 내렸는데 이게 원균에게 이렇게 평가를 내리면 너무나 정확한 평가가 된다. 다만 안량은 하필이면 관우의 손에 살해당한 덕분에 삼국지연의에서는 엄청나게 미화되었다.
  13.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맹장이 아니었다. 원균의 패배는 모두 배를 버리고 도망가면서 벌어졌다. 원균은 단순히 부하들과 백성의 목숨값을 우습게 본 장수에 가깝다.
  14. 학창시절 춘원의 글을 보고 존경하게 되었다고 하나, 각종 치적사업을 벌인 것을 보면 희생적인 영웅인 이순신을 띄워 줌으로서 쿠데타를 일으킨 자신과 같은 '불행한 군인'이 생기지 않기를 바랬을 가능성이 높다. 이순신은 목숨을 버릴지언정, 조정을 배신하지 않은 군인이었다. 하지만 어느시대나 뒤에 나타난 놈들이...
  15.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명량해전 편에서 이와 관련된 나레이션이 나오기도 했다.
  16. 웬만한 사람들에게는 굳이 원균을 등용해서 나라를 말아먹을 이유가 없다는 정론이 통하지만, 조선(한국)의 개인(이순신)의 가치를 축소하고, 대국에 대한 종속관계가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영향력이 높다. 선조의 역사관이 바로 이것이었다. 호불호는 갈리겠지만 매우 현실적인 딜레마이며, 점진적인 발전보다 단기적인 국력주의를 숭상하는 사람들에게는 깊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이론이다. 물론, 여기서 나오는 선조옹호론, 원균옹호론은 현실을 한참 넘어선 미화가 맞다.
  17. "유극량(劉克良)은 인물은 쓸만하나 가문이 한미하기 때문에 지나치게 겸손합니다. 그리하여 군관이나 무뢰배들과도 서로 너니내니하는 사이여서 체통이 문란하고 호령이 시행되지 않습니다. 비단 위급한 변을 당했을 때에만 대비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방어하는 군졸을 각 고을에 보낼 때에도 틀림없이 착오가 생길 것이니, 곤외(閫外)의 일을 맡기는 것이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체차시키소서."

    『선조실록』 24년(1591) 2월 8일

  18. 사간원이 아뢰기를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현감으로서 아직 군수에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좌수사에 초수(招授)하시니, 그것이 인재가 모자란 탓이긴 하지만 관작의 남용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체차시키소서."라 하니, 답하기를 "이순신의 일이 그러한 것은 나도 안다. 다만 지금은 상규에 구애될 수 없다. 인재가 모자라 그렇게 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관작의 고하를 따질 필요가 없다. 다시 논하여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라."고 하였다.

    『선조실록』 24년(1591) 2월 16일

  19. 게다가 류성룡은 몰라도 정탁이 이순신을 추천했다는 말은 도저히 근거가 없다. 정탁의 문집인 약포집에 이순신을 대장(大將)으로 천거했다고 나오긴 하는데, 이 대목의 시점으로 보아 여기서의 대장이란 삼도수군통제사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는 이원익이 자신이 이순신을 천거하여 통제사로 등용시켰다고 말했던 것(『승정원일기』 인조 9년 4월 5일)과 같은 맥락이다.
  20. 공무원 인기강사의 무료특강의 경우 조회수가 최소 수십만 이상이고 보통 수백만을 넘기는 데다(중복 시청 포함), 본인이 조선사 전공자(석사)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고, 민주당 계통의 정치인이기도 해서 파급력이 상당히 클 부분이다.
  21. 함선숫자가 대등한 지휘관은 이순신(24척)과 이억기(25척) 함대였다. 원균은 연합함대의 1/10 미만의 규모이며 그것도 전투마다 후방에만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교묘하게 호도한다. 그에 반해, 박시백의 조선왕조 실록에서는 같은 만화이지만 이순신의 24척과 원균의 4척을 그려서 둘을 확실히 비교하고 있다.
  22. 물론 이런 일은 없었다. 반대로 무서워서 도망치는 왜군을 무리하게 좇으라고 닥달하다가 조선군 12척이 떠내려 가는 비전투 손실을 입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