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혁명당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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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정희 정권 시기의 대한민국에서 국제적으로도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던 대한민국의 흑역사이자 사법살인.
대한민국 사법부와 행정부, 중앙정보부의 합동 병크[1]

대구, 경북에서 민주, 개혁 세력이 상당히 치명타를 받았던 사건이다.[2]

국가보안법에 대한 논란이 일면 항상 언급되는 사건이며, 사형제 존폐 논쟁에서도 자주 언급된다. 한국에서 사형제도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이 늘어난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인혁당 사건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인민혁명당 사건이라는 이름 아래로는 크게 두 개의 사건이 있다. 하나는 1964년 일어난 "인혁당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과 관계되어 일어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다. 후자의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사법 살인으로도 유명하다.

인혁당 사건은 대한민국 사법부의 잘못에 의해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나간, 이른바 사법살인이다. 민혁당 사건과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박근혜 당시 대통령 후보자가 연설 도중 두 사건을 혼동한 적이 있다. 민혁당 사건은 진짜 공안 사건이다.

2 인민혁명당 사건 (1964년)

1964년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등은 좌익 계열 정당인 인민혁명당(인혁당)이 "북괴의 지령을 받고 대규모적인 지하조직으로 국가를 변란하려던" 사건을 적발, 일당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나머지 16명을 전국에 수배 중이라고 발표한다.

김형욱이 발표한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간첩 김영춘은 1962년 1월 북괴로부터 특수사명을 띠고 남하하여 인혁당 조직을 주도한다. 통일민주청년동맹 중앙위원장이었던 우동읍과 동 간사장 김배영, 김영광, 민주민족청년동맹 간사장이던 김금수, 동 경북도 간사장 도예종, 사회대중당 간사였던 허표, 전 진보당원 김한득, 빨치산 출신의 박현채 등이 참가하여 창당 발기인 대회를 갖고, 외국군 철수와 남북서신, 문화경제교류를 통한 평화통일을 골자로 한 강령과 규약을 채택하여 발족한다. 이후 조직을 확대해 오다 1964년 4월 북한 중앙당의 지령을 받고 중앙상임위원 도예종, 정도영, 박현채 등이 한일협정 반대 데모를 유발토록 획책하며 동시에 학생데모를 4월 혁명같이 발전케 하여 현 정권을 타도할 것을 결의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 사건으로 8년 간 옥고를 치른 정만진 씨 등은 '인혁당은 실체가 없으며 피고인들의 법정 진술까지 변조할 만큼 철저히 조작된 사건'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이 인혁당 사건은 그해 8월 18일 서울지검에 송치되었다. 그러나 중정의 발표와 달리 송치받은 검찰은 18일간의 철야수사에도 기소할 만한 혐의점을 찾지 못한다. 또한 사건 관련자들이 중정의 조사 과정에서 심한 고문을 당했음을 밝혀낸다. 결국 사건 담당 검사 중 최대현 검사를 제외한 부장검사 이용훈, 김병금, 장원찬 검사는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으며 공소를 유지할 자신이 없다."라는 이유로 기소 거부와 함께 사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검찰과 중정은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김형욱은 숙직 담당 검사에게 압력을 넣어 서명토록 해 간신히 기소했다. 사건은 국회로 비화되고 관련자들의 전기고문, 물고문 사실들이 속속 밝혀지자 검찰은 서울 고검 한옥신 검사에게 재수사를 지시한다. 그 결과 당초 국보법 위반혐의로 구속, 기소된 26명 중 학생 등 14명에 대한 공소 취하했고, 도예종 등 나머지 12명의 피고에 대해서도 국보법 위반을 반국가단체 찬양, 고무 등의 반공법 위반 혐의로 공소장을 변경했고 법원은 이들에게 최고 3년에서 1년까지 가벼운 형량을 선고한다.

한편 사건 관련자 김배영은 1962년 10월 일본으로 밀항하였다. 일본 경시청에서 그를 수배하자 1964년 11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를 통하여 북한으로 월북하였다. 그는 이후 1967년 10월 대한민국에 북한 공작원으로 남파되었다가 1971년에 대한민국에서 체포되어 사형이 집행되었다. 또한 "김형욱 회고록"에 따르면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 당시 주범인 金培永(김배영)은 체포된 후 일단 무혐의로 풀려난 틈을 타서 또 다른 공범인 미 체포된 禹東邑(우동읍)과 이북으로 도주하였고 지령을 받고 다시 남하하였다가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았다. 당시 그는 공작금과 난수표, 권총을 소지하고 있었고 북괴로부터 지령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뭐지??

인민혁명당(1964년) 사건에 연루된 도예종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1974년)으로 사형이 집행되며, 우동읍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우홍선과 동일인물이다.

김배영와 같은 케이스는 1950~60년대에는 종종 있었다. 동백림 사건에서 볼 수 있듯, 당시에는 분단이 된 지 얼마 안 된 상황이라 "뭐 좀 이따 통일 되겠지..."하고 월북 행위에 큰 문제의식이 없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해방 이전부터 사회주의에 대해 거부감이 없는 인물이라면 북한을 그냥 그런 사회주의 국가로 생각하고 적대시하지 않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들어갈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

인혁당과 관련없지만, 1960~70년대에는 북한에서 지령을 받고 남파된 간첩이 혁명운동을 조직하기도 했었다. 그 당시엔 부칸도 먹고살 만했고 대표적인 예가 바로 통일혁명당.[3] 다만 북한이 망조가 들기 시작하고 일반 사람들이 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어지며 남한의 국력이 더 강해진 1990년대 이후에는 이러한 접촉 시도가 크게 줄어들었다.

3 인혁당 재건위 사건 (1974년)

1972년, 10월 유신으로 시작된 소위 유신 정국이 가속되었다. 1974년 4월 3일 학생들의 대규모 반유신 저항 운동을 분쇄하고자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한다. 그리고 4월 25일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를 통해 학생 데모의 배후에는 공산당의 조종이 있었다는 민청학련 사건을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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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4월 3일, 유신정권 당국이 발표한 민청학련 사건 명단

발표요지에 따르면 민청학련은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혁당 재건위 조직과 재일 조총련계 및 일본 공산당, 국내 좌파, 혁신계 인사가 복합적으로 작용, 1974년 4월 3일을 기해 현 정부를 전복하려 획책했다는 것이다.

법무부장관 황산덕을 통해 인혁당이 학생 시위를 배후 조종했다고 새로운 주장을 발표했다. 정부의 발표와 더불어 이전 인혁당 연루자들은 1974년 5월 27일 비상군법회의의 검찰부에 의해 국보법, 반공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내란선동 등의 혐의로 기소된다. 6월 15일부터 시작된 재판은 비상보통군법회의, 비상고등군법회의를 거쳐 대법원 확정까지 10개월이 걸렸다. 3심을 거치는 동안 피고인들의 형량은 변함이 없었고 특히 도예종, 서도원,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우홍선, 송상진, 여정남 등 8명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형이었다.

이들 인혁당 연루자들은 수사기관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당시 피고인석에 자리했던 피해자들 중에 하재완은 혹독한 고문에 장이 항문으로 튀어나올 정도였다. 이 사실을 폭로한 조지 오글 목사와 제임스 시노트 신부는 강제 추방당했다. 시노트 신부는 동아일보 등에 인혁당 재판에 대한 부당함을 알리는 광고를 싣느라 무일푼 신세가 되었다. 그는 인혁당 사건 재판정에서 재판을 히틀러 재판에 비유하면서, "이것은 정의를 모독하는 당치 않은 수작이다! 공산주의 재판보다 더 나쁘다!"라고 외쳤다. 법정에서 조용히 해달라는 말에,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싸여 노골적으로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외쳤다. "법정이라고? 여긴 그저 오물들이 쌓여 있는 곳이라고!" (천주교인권위원회 2001)

3.1 사법살인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인혁당 및 민청학련 사건 관련 피고인 36명의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원심대로 형이 확정됐다. 그런데 선고 바로 다음 날, 형이 확정된 지 겨우 20시간밖에 지나지 않은 때에 이례적으로 도예종, 서도원,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우홍선, 송상진, 여정남 등 8명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다음날 위로차 면회를 갔던 유족들은 이미 형이 집행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졸도했다.

3.2 시신탈취

유신 정권은 사형당한 8인의 시신을 유가족들에게 돌려주려하지 않았으며, 유족의 동의 없이 멋대로 시신을 탈취하여 화장해 버렸다. 고문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었고[4] 심한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이 폭로될까 두려워했던 데다 유족들이 한데 모여 억울한 죽음을 호소할까 봐 그랬다고도 한다. 이 중 우홍선, 이수병 씨의 시신은 가족들에게 정식으로 인수됐으나 나머지 사람들은 집이 서울이 아니어서 바로 인수되지 못했다. 이때 경찰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남은 시신들을 빼앗기고 남은 송상진 씨 시신만이라도 가족들에게 보내기 위해 천주교 사제들이 응암동 성당으로 옮기려 했다. 그러나 경찰들은 크레인까지 동원해 시신을 강탈, 벽제 화장터에서 화장해 버렸다.[5]

이들에 대한 고문과 전격 처형, 화장 등의 잔혹성과 의혹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 기독교 인권위원회에서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3.3 평가

이 사건은 국내외적으로 사법 살인이라고 상당한 비난을 받았으며 스위스의 국제법학자협회는 형이 집행된 1975년 4월 9일사법 역사상 암흑의 날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엠네스티에서도 판결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다. #

또한 1995년 4월 25일 MBC의 설문조사에서 판사들이 뽑은 "우리나라 사법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재판"으로 꼽혔다.

사형 확정으로 끝난 이 재판에 참여한 대법관(당시 대법원 판사)은 민복기, 한환진, 민문기, 양병호, 주재황, 임항준, 안병수, 김영세, 김윤행, 이병호, 이영섭, 홍순엽이다. 유일하게 이일규 대법관이 반대하여 소수 의견을 냈다.

3.4 사건 이후

전격 처형된 8명을 비롯해 이 사건으로 전창일, 김한덕, 나경일, 강창덕, 이태환, 이성재, 유진곤 씨가 무기징역을, 김종대, 정만진, 조만호, 이재형 씨가 징역 20년을, 이창복, 황현승, 임구호, 전재권 씨가 징역 15년을, 장석구 씨 등이 징역 5년을 선고 받았다. 이들 중 장석구 씨가 1975년 10월 15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1982년 3월 2일 형집행정지로 유기수 석방, 8월 15일 무기수 20년으로 감형, 12월 24일 형집행 정치로 20년형 유기수 석방 등의 조치를 통해 출소했다. 그러나 출옥 후 전재권, 유진곤 씨가 지병으로 병사했으며 1차 인혁당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박현채 전남대 교수가 95년 사망했다.

사건의 발단에서 진행, 결과에 이르기까지 석연치 않은 일 투성이였다. 정치적 득보다는 해가 많은 사건으로 도대체가 왜 이런 악수를 두었는지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 이후 반정부 세력에서 강경파가 다수를 차지하게 된다. 당시 민청학련 사건 관계자들은 아무리 독재자라 해도 없는 죄를 만들어 죽이지는 못한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아니 잠깐만 무슨 배짱으로 확신했대? 사형 선고를 받아도 영광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인혁당 관계자 8명이 사형당하는 걸 보고 독재자가 누명을 씌워 멀쩡한 사람을 정말로 죽일 수도 있다는 걸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국제적으로 완전히 찍힌 사실만 봐도 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설령 이들이 실제 간첩이었다 하더라도 너무나 성급한 형 집행은 이해할 수가 없는 결정이다. 스파이란 존재는 죽여서는 아무 가치가 없다. 살려서 가지고 있는 정보를 있는대로 짜내고 나중에는 인질로서 적국과 거래용으로 이용하는 것이 정보전의 정석이다. 당시 중정이 발표한 대로 그들이 고위 간첩이었다면 당장 죽여야 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지나치다시피 한 형 집행이 자신이 조작한 사건임을 입증하는 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공안정국을 만들려 했다고 봐도 달리 같은 해 일어난 장준하 의문사 사건과 함께 국내 여론의 반발만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또한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으로 기대에 한껏 부풀었던 실향민들의 가슴에는 또다시 대못을 박는 짓에 불과했다. 이후 치러진 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의 참패가 이를 증명한다.

후폭풍도 컸다. 해외의 비난 여론은 긴 기간 외교적 짐으로 작용했다. 미국의 보수파 언론조차도 이 사건의 부당성을 강도높게 비난했을 정도였다. 다음해 미국지미 카터 정권이 도덕/인권 정치를 외치며 들어섰을 때 한미관계가 급격하게 냉각되게 만드는 간접적인 원인으로 열거될 정도이다.

박정희도 후에 이 사건을 크게 후회하였다는 증언이 있으나, # 박정희의 가치관[6]과 그리고 중정 요원들이 늘 유가족들에게 사사건건 감시하고 연좌제 묶었던 행태 등에 비추어봤을 때, 신빙성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이 사건으로 인해 대구광역시 경상북도 지역의 진보세력과 적은 숫자로 남아있던 좌파 세력들이 완전이 뿌리가 뽑혔다는 진단도 있다. 대구 10.1사건을 비롯해서 원래는 대구/경북 지방은 해방 직후 좌파의 세력이 상당히 강했던 지역이었고, 그 이후에도 60년대까지 경북 지방은 굉장히 진보적인 운동가들이 많은 지역이었지만, 이 사건 이후 완전히 보수화 된다.

3.5 연좌제에 묶여 살아왔던 유가족들

유가족들의 삶은 정말 비참한 그 자체였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중정 요원들[7]은 물론이거니와, 더욱 가혹하게도 가는 곳마다 '간첩의 집안'이라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다녔다. 예를 들어, 사형당했던 희생자 하재완 씨의 막내아들은 4살 때 동네 아이들이 자신을 새끼줄로 목에 매 끌고 다니며 당산나무에 묶어 놓고 '빨갱이 새끼는 총살해야 한다'며 놀리고 이른바 '총살놀이'를 했다고 한다. 소풍날에는 반 아이들이 몰려와 ‘간첩의 자식’이라며 도시락에 개미를 넣고 돌팔매질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인혁당 희생자 송상진 씨 가족의 경우, 아내가 죄책감에 자식들과 함께 '쥐약을 먹고 죽으려고까지 했다. 그 모습을 친정 어머니가 우연히 보고 말렸지만, 그 친정 어머니는 그 모습을 보고 깊은 충격에 빠져 몇 년 뒤 돌아가셨다고 한다. 송상진의 아들 송철환 씨는 '정말 학교 가기 싫었을 정도로 끔찍한 기억의 나날'이라고 증언했었다.

이런 식으로 인혁당 사건 유가족들은 수십 년 동안 사회로부터 멸시와 수모를 겪은 채로 살아왔다.

3.6 재심청구와 무죄선고

결국 2002년 9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이 사건이 일부 조작된 정황이 밝혀졌고, 유족들은 12월 서울중앙지법에 재심을 청구하였다. 사법부 내에서도 이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결국 2005년 다시 재판이 시작되어 2007년사형 선고가 내려진 8명에게 증거 불충분에 의한 무죄 선고가 내려졌다. 30년이 지났다고 증거 불충분이 된 게 아니다. 법원의 증거는 서류로 남는다.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선고가 내려진 것은 당시 택도 없는 증거로 유죄 판결을 내렸다는 소리다. 법원은 증거 능력이 있는 증거를 통해 범죄가 확실히 증명되었을 때만 유죄 판결을 내릴 수 있다. '위법하게 수집되었으리라는 심증은 있지만 철저하게 조작되어 조금의 꼬투리도 잡을 수 없는 증거를 법원은 외면할 수 없다.'라고 옹호하는 의견도 있지만, 당시 피고인들이 검찰에서의 자백이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이라고 재판 과정에서 항변했던 점 등을 생각하면 법원의 잘못이 맞다.

이명박 정부의 제성호 인권대사는 인혁당 사건의 무죄선고는 재고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었기 때문에 한동안 논란이 되기도 했다. 참고로, 보수라는 탈을 쓴 작자들은 이 사건을 절대 인정하지 않고 있다. 특히 조선일보는 인혁당 사건 피해자 분들과 유족 분들을 모욕하는 기사글을 여러 번 써갈겼다.## 댓글이 더 가관이다. 이 사람들 미친 거 같아요 해당 기사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해당 기사는 1964년의 1차 인혁당 사건에 대한 기사로, 19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와 유족을 모욕하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1차 인혁당 사건 당시 인혁당을 조직했다는 주범으로 주목됐던 김영춘은 남파간첩이 아니라 애초에 위장 월북을 한 북파간첩이었고 본명은 김상한이었다고 과거사진실위원회를 통하여 밝혀졌다.김영춘과 김상한은 동일인물

몇몇 언론에서는 인혁당은 실제로 존재했다며 사형 판결과 집행을 합리화하는 듯한 기사를 써냈는데#, 이건 이 사건의 본질을 잘못 짚은 기사다. 이 사건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인혁당이 실제로 존재했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충분한 증거 없이 법원이 판결을 내리고 사형 선고를 했으며, 그 사형 집행 또한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되어 있듯이 법원이 유죄 판결을 내리기 위해서는 적법하게 수집된 증거 능력이 있는 증거를 바탕으로 범죄가 확실히 증명되었을 때만 유죄 판결을 내릴 수 있으며 사형 판결이 확정되어도 실제 사형 집행에는 짧게는 몇 개월에서 길게는 몇 년 정도 간격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백 번 양보해 인혁당의 존재 여부가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왜 그 당시의 검찰은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적법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으며 법원은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재판을 진행하고 판결을 진행했던 것일까? 왜 저 링크의 인터뷰에 응한 사람은 4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인혁당이 존재했다며 주장하는 것일까? 아마 기사의 주장대로 저 사람이 실제로 인혁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인혁당이 실제 북한의 지령을 받은 반국가단체였다면, 저 사람은 아마 살아남지 못 했거나 감옥살이를 해야 했을 텐데 말이다.

또한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결문은 선고 직후 판례공보를 통해 일반에 공개되는 것이 원칙인데도 인혁당 사건의 판결문은 1975년 4월 21자 법률신문 제1104호에 전문게재 되었음이라는 이유를 들어 법원 판례공보에 실리지 않았다. 결국 판결문은 근 30년간 사실상 비공개였던 것이다.[8]

2013년 11월 28일, 1차 인민혁명당 사건의 재심에서도 무죄가 선고되어 1,2차 인민혁명당 사건 모두 무죄가 확정되었다.

3.7 무죄선고에 대한 박근혜의 입장

"나에 대한 정치공세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한국정치의 현실이다."뭐인마...?(2007년 1월 인혁당 무죄 판결에 대한 의견을 묻자 박근혜 의원이 대답한 말)

2004년 8월 29일 당시 한나라당 대표 박근혜에게 인혁당 사건 사과를 요구하자 박근혜 대표는 "이미 충분히 사과했다. 헐뜯기에 불과하다. 법적으로 이미 끝난 일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거 어디선가 많이 본건데? 그리고 2005년 12월 8일 국가정보원에서 인혁당 사건의 조작을 발표하자 "한마디의 가치도 없는 모함이다. 대통령과 코드가 맞는 인사들이 모여 역사를 왜곡하고 헐뜯는 수작에 불과하다."라며 정부를 비난하였다.

대선 후보로 출마했던 2012년에도 두 개의 서로 다른 판결이 있다'뭐인마...?2며 인혁당 무죄 판결을 끝까지 부정하는 행태를 보였다. 이로 인해 지지율이 떨어지고 여론의 질타가 이어지자, 참모들의 강권으로 인혁당 사건의 피해자들에게 사과하는 기자회견을 가졌으나 회견 도중 인혁당을 '민혁당'으로 발음하고, 회견이 끝난 뒤엔 대학생 지지자들과의 퍼포먼스로 강남스타일의 말춤을 추어 사과의 진정성을 의심받은 바 있다.# 아주 미쳤구만 이에 대해 박지원 당시 민주당 원내대표는 프롬프터 놓고 몇 분 읽고서 사과를 다 끝냈다고 하는 것은 진정성이 없으며, 단 하루라도 인혁당 사건 유가족들에게 (사죄의) 마음을 가지지 않고 사과를 발표한 날 오후에 말춤 추고 다니는 것은 국민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라며 박근혜 후보를 비판하였다.

3.8 배상금 논란

국사, 근현대사와 친숙하지 않은 대부분의 현대인에겐 아예 잊혀진 사건이었으나 국가가 배상금 600억 원을 지급하기로 한 판결이 나온 후 다시 관심을 끌었다.

국사교육의 부재로 인혁당 사건은 커녕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대다수의 네티즌들에게는 당연히 "배상금이 600억이나 되다니 무슨 일이야!"일 수밖에 없었다. 판결 당시 네티즌 반응

이 600억이란 천문학적인 배상금 액수 때문에 화제가 되었다. 산출기준은 배상액 230억 + 30년간의 이자와 기타잡비를 합친 금액이라고 한다. 2007년, 30억의 배상금이 책정되었을 때에 정부가 반환금 소송을 진행하겠다는 의사를 비추었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알려진 사법살인의 사례이자 인권 탄압이라는 점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여론에 밀려 반환금 소송은 진행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후 정부는 부당이득금 청구소송을 조금씩 진행해, 배상금을 너무 주었으니 돌려달라'는 내용의 소송을 진행했고 피해자와 유가족들은 연이어 배상금을 반환하라는 판결을 받는 중이다.

일부 음모론자들은 집권 1년차인 박근혜가 자신의 이미지 관리를 위해 퍼주기식 배상금을 남발, "나는 아버지의 잘못을 안다."라는 언론플레이를 벌인 후 과잉 배상과 부당 이득금이라며 소송을 걸어 돌려받는 치졸한 수법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정부는 지난 2011년부터 대법원을 통해 지연 손해에 대한 과잉 배상 문제에 대해 인혁당 사건 관계자들과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즉, 박근혜 정부이전인 이명박 정부 시기부터 진행된 소송이며 박근혜 정부의 행보와는 관련이 없다.

배상금을 돌려달라는 정부의 주장의 골자는 "30년 간 붙은 이자가 너무 많다." 사람 목숨 뺏어놓고 돈 가지고 지랄하냐라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는 관점에 따라 빨갱이로 몰려 30년 간 당해 온 온갖 손가락질과 부당한 대우에 대한 정신적 피해보상과 연좌제로 대표되는 각종 서류심사상 불이익[9]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고 해석 될수 있어 당분간 논란이 되리라 보인다.

4 그 외

"내가 죽는 이유는 민족민주운동을 한 죄뿐이다."

이수병 씨의 유언장

 
80년대 말 연극 "4월 9일"은 바로 이 사건을 소재로 했다. 중간에 나오는 히틀러풍으로 그려진 박정희 초상이 인상적.

올드보이의 감독 박찬욱의 평생의 프로젝트가 바로 이 사건을 소재로 한 리얼리즘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2차 인혁당 사건 재심판결 이후, EBS 지식채널e에서는 이 사건을 다루었다. 개요의 동영상 참조. 영상 본편이 끝나고 프로그램을 제작했던 김진혁 PD는 정치적 압력에 대한 묘한 여운을 주는 글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이후 정권이 교체된 후 지식채널e팀에서 하차하여 논란이 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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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학교 사회과학대학교 앞에가면 '여정남 공원'이라고 있는데, 이곳에 인혁당 희생자 여정남을 기리는 추모비와 흉상이 있다[10].그렇지만, 후배들은 그런거 모르고 담배를 신나게 물고 다닌다

시사 만화가 박건웅이 이 사건을 다룬 단편 만화를 그렸다. 출근길(1부) 출근길(2부)[11]

  1. 이 사건의 핵심 가해자격인 민복기, 신직수, 이용택 등 3명은 1차 인혁당 사건에 기획했었으며, 10년 뒤 2차 인혁당 재건위 사건 기획에도 관여를 했었다.
  2.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의 8~90%가 영남 출신#이었으며, 사형당한 8명 전부 영남 출신이었다. 그 가운데 4명이 대구, 경북이 본적이었다. 8명의 희생자들 묘소는 경북 칠곡 현대공원에 안장되어있다. 이 사건은 대구, 경북에서 지식인 사회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끼친 상징적으로 의미가 컸다. '고엽제 살포'하듯이...
  3. 통혁당 사건에서 핵심인물인 김종태 경우는 북한으로부터 직접적인 연계를 맺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기 때문. 다만, 신영복 등 말단 쪽에 위치했던 인물들의 경우, 통혁당 조직원에게 포섭당했지만 통혁당의 존재과 실체는 모르고 단순한 반독재운동으로 인식했었다고 한다.
  4. 발뒤꿈치가 사라지고 손톱과 발톱이 모두 뽑혀있었다.
  5. 이 과정에서 경찰에 맞서 저항했던 신부님들 가운데 한분이었던 문정현 신부가 추락하여 장애를 얻었다.
  6. 박정희는 자신의 청년 시절부터 강력한 군국주의적 사회를 지향했고, 의회 민주주의를 비효율로 규정했던 사람이었다.
  7. 유가족 분들의 증언에 따르면, 중정 요원들이 심지어 화장실까지 따라가 감시했었다고 한다.
  8. 물론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문제의 신문을 찾아볼 수는 있지만, 절차가 복잡하다고 한다.
  9. 연좌제는 공식적으론 1980년 폐지되었으나, 1990년대 중반까지 민간에서 이용되었다고 알려진다. 장교 임관이나 고급 공무원 선발 등에는 아직도 적용되고 있다고 알려진다.
  10. 여정남은 경북대학교 총학생회장 출신이다. 정치외교학과 출신이여서 사회과학대앞에 공원이 생긴것.
  11. 희생자 중 한 명인 고 우홍선의 가족분의 진술을 기반으로 그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