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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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巡査

일제강점기 일본 경찰들을 일컫던 단어. 조선에서는 일경, 왜경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순사라는 말 자체는 정확히는 일본의 경찰계급 중 최하위로, 경찰공무원 계급 중에서 순경에 해당하는 단어이다. 현재도 쓰이고 있는 단어이기 때문에, 일본의 미디어에 간혹 '순사'라는 계급이 등장하기도 한다. 다만 이 경우에는 오마와리상(お巡りさん)[1]이라는 애칭을 더 많이 쓴다.

무단통치 시기의 일본 육군 헌병경찰[2] 대신 신임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 제독이 내세운 문화통치를 표방하며 일반 경찰을 한반도 치안 유지에 투입했다.

당연히 한국인들에게는 헌병 못지 않은 증오의 대상이었는데, 말이 헌병에서 순사로 바뀌었을 뿐이지, 조선인들에 대한 탄압은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우는 아이를 달래는 방법이 바로 "왜놈 순사 온다!!"고 협박(!)하는 것이었을까.

특히 이 순사들이란 종자들은 대거 증원을 위해 육군 헌병 하사관들을 대거 전역시킨 뒤 순사로 임용하고, 경찰 내부 충원의 경우는 당시 일본 본토 내지나 벽촌의 유휴 경찰인력을 추천받아 차출한 것인데, 쓸만한 인재를 추천하랬더니 이게 도리어 추천제라서, 각 파출소는 이 기회에 경찰 내의 문제아들을 조직에서 쫒아버릴 의도로 별 찌끄레기 같은 놈들을 추천했다. 결국 조선에는 군복 대신 경찰복으로 갈아입은 헌병과, 일본 경찰 중에서 고르고 고른 인간쓰레기들만 오게 되었다.[3]

물론 일본인들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인들 가운데에서도 순사직(당연히 최하 계급인 순사보부터 시작)을 뽑았는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지원했다. 1935년에는 경쟁률이 무려 19.6대 1이나 되었을 정도. 당시 조선인으로서 가질 수 있었던 몇 안되는 철밥통 직장이었기 때문이었기 때문.# 이건 비단 순사만이 아니라, 우리로 치면 9급 공무원에 해당하는 하급 공무원 자리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 시골 동네에서 순사보나 면서기보에 누가 합격했다면 그 집에 동네 사람들이 돌던지러 가는 게 아니라 잔치를 벌이는 풍경이 더 흔했다. 1938년 조선인의 육군 병사로의 지원 입대가 허용되자 경쟁률이 엄청났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물론 제국주의 국가의 앞잡이가 된것을 두둔할수는 없으며 일제시대 당시 독립군을 잡고 고문하던 악질 순사들도 있었지만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혹은 순수하게 경찰이 되고 싶어서 순사가 된 사람들도 존재했다. 특히 조선이 강제병합된 후 일제강점기 아래 태어나고 자랐던 사람들이면 더더욱.[4] [5]

일제강점기 매체의 필수요소로 나올때는 보통 악역으로, 찌질하고 야비하며 무고한 사람을 패거나 고문하는 역으로 나온다. 아무리 고증이 이상하더라도 이 고증은 철저히 지켜준다. 물론 친일파 앞에서는 꼼짝 못한다.

이외수작가의 '사부님싸부님'에서도 '일본 순사 올챙이'가 나온다. 주인공인 하얀 올챙이에게 병먹금 당한 다음 털린다.

간혹 도시와 멀리 떨어진 시골 같은 곳에선, 일제강점기를 직접 겪으신 아주 나이 많은 노인들이 순경을 '순사'라고 말하기도 하며, 경찰로 재직중인 사람들도 이런 노인층에게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하여 자기 직업을 순사라 칭하기도 한다.[6]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가 분한 박두만은 스스로를 순사라고 부르며, 이끼의 천용덕도 자신이 순사 생활을 했다고 한다.

2 殉死

모시고 있던 주군이나 주인이 세상을 떠날 때 신하나 하인 등이 자결하는 것. 아내가 남편을 따라 자결하는 것도 포함된다. 기본적으로 자발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나, 사회 풍습에 따른 간접적 강제를 포함하여 실질적으로는 강제적인 경우가 더 많았다.

엄밀하게 말하면 순장의 일종이며 하위개념이긴 하지만, 양자에 미묘한 차이가 있으며 순장이 후대에 이르러 발전(?)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순장과 순사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 첫째, 순장은 주인의 무덤에 함께 묻히지만, 순사는 따라 죽는 것일 뿐 같이 묻히지는 않는다.
  • 둘째, 순장은 본인이 원하거나 말거나 이루어지지만, 순사는 형식적으로는 아랫사람 스스로의 의사에 따른 것으로, 자살에 해당한다.

라는 점. 즉, '자발성 + 다른 무덤에 묻힘'이라는 점에서 순장과 다르다.

이로 인해 고대 어느 시점에서부턴가 세계 각지에서 순장을 대체하여 등장하게 되었다. 원래 순장은 '불필요한 적이나 노예를 한꺼번에 처리하는 것'에서부터 '일종의 제례'로까지 발전한 것.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대규모의 인원을 강제로 처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워지기 시작하였다. 문명 수준이 발달함에 따라 대규모 노동력의 상실, 처리가 경제적인 손해가 되었으며, 사회 구성원들의 지적 수준이 향상되어 강제적으로 죽이는 일에 당사자의 반발이나 반항도 따르기 시작했던 것. 결국 강제로 껴묻거리 당하는 순장은 그저 병신짓이고, 자발적으로 주인을 따라 죽는 순사가 명예롭지 않냐? 정도로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이 발전하였다. 실제로 사기 등의 고대 기록을 보면, 시대가 흐를수록 순장보다 순사로 불 수 있는 경우가 더 많아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순사는 결국 순장과 달리 대규모의 사회 전통으로서 제도화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어찌됐든 순사가 순장과 다른 점은 자발성인데, 겉으로는 어찌됐는 속으로는 누구나 자기 목숨이 아까운 법. 이로 인해 시간이 지날수록 실제로 순사를 단행하는 사람의 수가 줄어들게 되었다. 순장은 강제로 때려죽일수 있지만, 순사는 그런게 불가능했다는 얘기. 게다가 세계 각지에서 한층 문명 수준이 발달함에 따라, 각각의 사회에서 '순사는 병신짓'이라 정의하는 것이 가능할만큼의 사상적 뒷받침이 가능해졌다.

서양의 경우는 아주 간단해서, 10계명에서 자살하면 안된다고 했음이라고 설명이 가능해졌다. 중화 문명권의 경우, 한나라의 성립 이후 통치 이념으로 유교가 들어선 뒤 고도로 유학적 개념과 논리가 발전하여, 주군을 따라 죽는 게 진정한 충(忠)이 아니라, 주군의 뜻에는 맞지 않더라도 목숨을 걸고 자신의 뜻을 표명하는 것이 진정한 충(忠)이라는 논리가 성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을 가장 충실하게 수행한 것이 바로 조선의 경우. 나, 김진사는 순사 따위 하지 않는다! 단지 목숨 걸고 상소문을 올려 사약을 받겠다! 다만, 어찌된 일인지 명나라청나라에서 순사도 아닌 순장 자체를 부활시키긴 하였다. 당연히 중국의 흑역사로 남아 있다(..).

어쨌거나 순사는 순장의 뒤를 이어 세계 각지에서 쇠퇴, 사회 전체의 주류적인 제도나 풍습으로 남지는 못하였다.

......는 것은 공식적인 설명이지만, 실제로는 아시아 지역에서 근대 이전까지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 대상은 바로 상대적으로 사회의 약자였던 여성들. 악명 높은 인도의 사티가 그 극단적인 예이다. 중국과 우리나라라고 다를 바가 없었는데, 미덕으로 칭송받던 '열녀 일화와 열녀문'이 바로 그것. 따지고 보면 열녀가 사티와 다른 점은, '불 속에 뛰어든다'는 외형상의 차이뿐 실상은 도낀개낀의 수준. 뭐 인도는 전국적으로 이런 짓을 벌였고, 동아시아 쪽은 미담으로 삼을 만큼은 특수하긴 하였다만.

문제는 조선의 경우. 이전까지는 그렇게 심하지 않았던 것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심할 정도로 케이스가 급증했던 것. 심지어 양반 유학자들조차 대놓고 비판하지는 못했으나 은근히 '너무 심한 것 아닌가?'라고 할 비판할 정도로 극성이었다. 이는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성리학의 교조화로 인해 여자에게 일방적으로 정절을 지킬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국가가 나서서 열녀제도를 운영해 순절을 사회적 도덕규범으로 만든데다, 만약 여자가 재가를 하면 그 자손이 벼슬을 못하도록 경국대전에 법으로 규정했으니 국가가 제도적으로 열녀를 양산하도록 부추긴 것이다. 만약 열녀문이 세워지면 그것만으로도 가문의 영광이고 여러 혜택까지 주어지니[7] 과부된 며느리에게 목을 메달라고 강요하거나 집안식구들이 짜고 죽이는 경우도 있었다. 말이 미담이지 실제론 가문을 위해서 살인을 저질렀다는 소리다.[8][9] 나중에 가서는 순절하는 여자가 하도 많아서 별 관심거리가 못되는 지경에 이른다.[10] 결국 조선이 멸망하고 난 뒤에야 이런 일들이 중단되었다.

하지만 조선의 여성 인권이 동시대 타국가들에 비해 특별히 낮았냐고 물어본다면 그렇지 않았다고 반박 할 수 있다. 물론 조선의 역사가 500년이란 긴 역사이다보니 여성의 지위는 시대별로 변화한건 사실이지만 적어도 조선 초기부터 중기까지만 해도 조선 여성의 지위는 결코 낮지 않았다. 정지영 교수가 박사논문에서 밝히길, 조선 중기 시대별(1678년, 1717년, 1759년, 1789년) 단성의 호적대장을 연구한 결과 1678년까지만 해도 11.1%가 여성호주(戶主)[11]였고 남편이 죽으면 장성한 아들이 있더라도 여성이 호주가 되는 경우가 절대다수(96%)였다. 더욱이 가부장적 질서가 완전히 정착한 18세기 후반까지도 여성호주가 6.7% 씩이나 될 정도였다. 또 17세기 중반까지 신분별 수절과부 비율 연구한 결과, 양반이 30%, 양인이 17%, 천인이 7%로 나타났다. 현대인들이 흔히들 조선의 과부는 무조건 강제적으로 수절해야 했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이는 단순히 고정관념으로, 실은 자손의 벼슬길을 막지 않기 위해 수절을 택하는 경우가 많던 양반층에 비해 자손이 벼슬길에 나갈 일도 없고, 여자 혼자서 먹고 살기도 어려운 양인이하 계층은 그럴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는 뜻이다. 먼저 떠난 남편을 못잊어 그런다면 모를까. 즉 수절과부 비율마저도 이러한데 자기 목숨을 내놓는 순절의 경우, 위의 주장대로 너무 빈번하게 일어나서 관심도 못 받을 정도가 되었다는 주장은 과장이 심한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일반적인 설명과는 다른, 역사적으로 특수한 순사의 사례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일본.

2.1 일본의 경우

전국시대 말에서 에도시대 초기인 17세기에 크게 성행하였고, 이후 금지되긴 하였으나 암암리에 행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의 순사가 특별한 점은 다음의 몇가지 이유 때문.

첫째, 한때 나라의 비공식적인 제도 내지 관습이 될 정도로 성행하였다는 점.
둘째, 공식적으로 금지되었음에도 암암리에 사회 미덕으로 여겨져 최근까지 전해져 왔다는 점.[12]
셋째, 사회 약자인 여성 등이 아니라 지배계급이 순사했다는 점. 다른 나라의 경우 지배계급의 순사는 상당히 이른 시점에 사라졌음을 감안하면, 일본은 매우 특수한 경우이다.

방식은 다음과 같다.

1. 주군인 다이묘가 연로하거나 병세가 심해져 죽을 날을 준비할 시간외 됨.

2. 주군의 사랑을 받는 주요한 가신들이 조심스럽게 돌아가시게 되면, 따라 죽어도 됩니까?라며 허락을 구한다.
3. 주군이 여러가지를 따져보고 허락 여부를 결정
4. 주군이 사망하면, 가신들이 기쁘게 할복
5. 다음 주군이 들어선 뒤 따라 죽은 가신들과 그 후손을 칭찬

사실 이런 일이 처음에는 소수로 이루어졌는데, 도쿠가와 막부가 천하를 통일한 이후 어째 유행을 타더니 규모가 커져 전국 단위가 되어버린 것.

예를 들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4남인 다다키치가 1607년 사망했을 당시에 순사한 가신은 네 명에 불과. 그런데, 1636년에 다테 마사무네가 죽었을 때는 15명이 할복 순사했으며, 1641년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아들로 구마모토 번의 번주였던 타다토시가 죽었을 때는 18명(+1명)[13] 1657년 초대 사가 번주인 나베시마 가쓰시게(鍋島勝茂)가 죽었을 때는 무려 26명이 순사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일이 일어난 이유에 대해선 여러가지 설명이 있다.

  • 1.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서'. 사무라이의 경우, 자신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은 목숨을 거는 것. 따라서 자연스럽게 주군이 죽게 되면 따라 죽자는 논리로 귀결되었다.
  • 2. 정치적인 이유. 그 이면에는 옛 가신들이 새로운 주군의 부담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한마디로, 단체 고려장이라는 것. 다만, 순사자들이 전부 죽은 주군과 동년배인 늙은 가신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고, 중장년의 나이로 한창때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어린 시동인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정치적인 것이 직접적인 까닭은 될 수 없었고 부차적인 것으로 보여진다.
  • 3.중도와 관련성이 있음. 순사자들은 주군과 육체관계를 맺은 자들에 해당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게 그냥 단순한 후대의 추측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당시 사람들은 "주군의 중도들은 당연히 따라 죽는 것이 도리" 라고 여겼다는 것. 당대 유학자인 야마가 소코(山鹿 素行 1622~1685) 또한 '순사는 명예로운 것이 아니라 그저 주군과 잠자리를 같이 한 자들이 따라 죽는 것일 뿐'이라고 논하였다.
  • 4. 순사자의 가문과 후손에게 실질적으로 이익이 존재함. 왜냐하면, '순사는 곧 명예 => 순사자들은 명예로운 자들 => 그들의 가문에게 명예 & 후손들에게 명예 ' 라는 논리가 성립하게 되는데, 이러한 경우 '명예 = 권위 = 권한 = 권력'이므로 당연히 실질적인 이익이 될 수 밖에 없다. 추상적인 부분에서뿐 아니라 영지 분배 등과 관련하여 실질적인 경제적 이득이 있었던 경우도 제법 존재. 당시 조선 유학자로서 유일하게 사무라이 계급을 관찰, 기록할 수 있었던 강항 '사무라이들의 자해(할복)은 이익을 바라고 하는 행위' 라고 논하였는데, 곧 이런 관점에서 할복과 순사의 이면을 관찰하고 결론지은 것이다.

뭐, 이것뿐만이라면 그냥 자기들끼리 병신짓 별 문제는 없었겠으나, 어느샌가 순사가 반쯤 제도화될 정도로 에도 사회 전체에 확산되어버리자 상당한 부작용이 발생하였다. 왜냐하면, 나름 사무라이입네 하는 자들이 전부 너도 나도 주군을 따라죽겠다고 나서게 된 것.

당연하지만, 가신이 선대를 따라 전부 다 죽어버리면 차기 다이묘 밑에서 일할 사람은 한없이 제로에 가까운 제로(..)가 되어 버린다. 물론 이 문제는 죽을 나이가 된 다이묘들 역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순사자들을 선정할 때 나름대로의 원칙을 따랐으며, 이렇게 허락받은 자들만 순사하였다. 또한 주군의 허락을 얻지 못했는데 따라 죽는 경우는 오히려 불명예스러운 개죽음으로 인정되었다. 그런데 이 원칙이라는 것이, 명문으로 확실히 정하거나 특별히 법으로 정한 것도 아니라 사실상 다이묘 꼴리는대로에 불과, 당연히 이로 인해 문제가 발생하였다. 예를 들어, '너는 후대를 위해 필요한 자'라며 순사를 허락하지 않아 죽지 않았는데 남들이 보기엔 '저 자는 따라 죽었어야 마땅한데 살았다'라고 평가하는 경우, 남들이 보기에 따라 죽을 자격이 없는데 자기 이름을 높이고 가문과 후손을 챙기기 위해 늙어 정신이 혼미한 다이묘를 꼬드겨 순사한 경우 등이 발생하였다는 것.

위에서 언급한 호소카와 타다토시가 죽었을 때 순사자 중 +1명이 바로 이러한 경우인데, 허락받지 못한 순사가 극단적인 결과를 낳은 끝에 아예 멀쩡한 가문 전체가 멸망해 버리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의 전말은 막말 유신초의 소설가 모리 오가이에 의해 아베 일족이라는 제목으로 소설화되기도 하였다.

호소카와 타다토시의 가신이었던 아베 야이치에몬 미치노부는 타다토시가 연로하자 주군에게 순사의 허락을 구했으나, 주군은 알 수 없는 이유로[14]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아베가 남들이 보기에 충분히 순사할 만한 자격이 있었다는 것. 이로 인해 타다토시가 죽은 뒤, '아베가 순사를 허락받지 못해서 오히려 다행으로 여긴다' 는 소문이 돈다.
이에 열 받은 아베는 허락이 없었음에도 불구, 할복순사를 단행한다.
그런데 타다토시의 아들이자 차기 번주인 호소카와 미쓰히사는 허락받지 못한 야이치에몬의 순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아베 가문의 봉토를 야이치에몬의 아들 전원에게 배분해버린다. 일반적인 경우 봉토는 장남에게만 상속시키는 것이며 분할 상속은 가문의 세력이 약화됨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러한 처사는 위에서 아베 가문을 하대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로 인해 사람들이 아베 가문을 멸시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열 받은 아베 가문의 장남 아베 곤베는 타다토시의 위패에 분향할 때 갑자기 자신의 상투를 잘라 위패에 바쳐 버리는 불경한 짓을 해버린다.
차기 번주 미쓰히사는 이 사태를 몹시 불쾌하게 여겨 곤베를 교수형에 처해버린다. 할복을 허락하지 않고 교수형에 처했다는 것은 곤베를 사무라이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곤베 뿐만 아니라 아베 가문 전체를 멸시한 것이다.
이러한 모욕을 당한 아베 가문은 주군에게 반기를 들고 자택에서 농성하였다.
미쓰히사는 군사들을 보내 아베 가문을 토벌하였다. 아베 일족 전원은 전사하거나 할복하여 멸문하였다.

한줄 요약: 병크 => 열받음 => 병크 => 열받음의 무한루트 끝에 가문 멸망

어쨌든 이렇게 가문이 멸망할 정도로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유사한 사례가 제법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순사 여부에 따라 남들이 깔봐 가문 전체의 명예와 위신이 떨어져 권위를 잃게 되는, 그러한 경우. 결국 상황이 이렇다보니 속으로는 죽기 싫은데도 어쩔 수 없이 자기 가문의 위세를 위해 순사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 늘어났고, 이는 순사자가 급증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는 것.

그러다 이러한 상황이 다이묘들조차 참지 못할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다이묘 중에서 처음으로 사가 번 2대 번주인 나베시마 미쓰시게(鍋島光茂)가 1661년 번 내에서의 순사를 금지한다는 포고령을 내리게 된 것. 이는 미쓰시게의 숙부 나오히로(直弘)가 죽었을 때 무려 36명이 순사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인데, 위에서 언급했듯이 나오히로의 형이자 미쓰시게의 아버지인 가쓰시게가 1657년 사망했을 당시에 이미 26명의 순사자가 나왔었다. 그러니까, 불과 4년 만에 62명이 순사하거나 순사하겠다고 나섰다는 이야기. 이 정도 숫자면 사가 번의 지배계층이 완전 소멸에 이를 지경이다.

당연히 도쿠가와 막부 역시 전국 각지에서 출몰하는 순사자와 그 규모에 골치를 썩였다. 결국 미쓰시게의 금지령이 내린 얼마 뒤인 1663년에 아예 막부가 직접 전국의 순사를 금지시켜 버렸다. 그리고 이 금지령 5년 뒤인 1668년, 우츠노미야 번주인 오쿠다이라 다다마사가 죽었을 때 한 가신이 순사해버리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막부가 넌씨눈이라며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이 가신의 아들 두 명을 처형시켜 가문을 단절시켜버리고, 심지어 번주인 오쿠다이라 가문의 영지를 아예 격이 한단계 낮은 야마가타로 옮겨버리는 초강경 자세를 보였는데, 이후 17세기 일본을 휩쓸던 미친지꺼리순사는 공식적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사라졌을 뿐, 일부 사무라이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계속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를 들어, 야마모토 츠네토모(山本常朝 1659~1719)란 사무라이는 순사를 금지당하자 은둔하여 후대 사무라이들의 정신적 지침이 된 하가쿠레를 저술하였는데, 이 하가쿠레에 따르면, 순사를 찬양받아 마땅한 것으로 논리가 귀결된다. 이런 저서를 저술한 장본인이 순사하지 않은 까닭은, 하필이면 그가 최초로 순사를 금지해버린 나베시마 미쓰시게의 가신이었기 때문(..).

물론 이론은 이론이기 때문에 실제로 모든 사무라이가 순사하지는 않았을 것이나, 중2병인 자들 하가쿠레 등의 영향을 받은 자들 가운데 막부 몰래 비공식적으로 순사한 경우가 제법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15]

그러다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가 사라지자 순사 금지령 또한 공식적으로 소멸. 개화기 이후 일본 정부가 순사 금지법 같은 것을 제정할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순사자들이 대놓고 다시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가장 유명한 사례가 메이지 덴노 사망 당시 일본 육군대장이었던 노기 마레스케 장군이 부인과 함께 동반순사한 사건.[16]

심지어 이게 끝이 아니라 불과 얼마 전인 1989년 쇼와 덴노 사망 당시에도 순사자가 출현하였다. 공식적으로 기록된 경우만도 네 명에 달하는데, 사망일 당시 와카야마 현에서 87세의 남성, 이바라키 현에서 일본 해군병학교 출신의 퇴역 해군 장교인 76세 남성, 며칠 후에 후쿠오카 현에서 38세 남성[17], 두달 후 도쿄에서 전 육군 중위 출신 66세 남성이 순사하였다고 한다. 과연 아키히토가 죽을 때는 몇명이나 따라 죽을지 한번 지켜보기로 하자(..).

  1. 우리 말로 의역하면 "경찰아저씨", "순경아저씨" 정도가 된다.
  2. 이들이 입던 헌병 군복은 일본군에 대한 한국인들의 대표적인 인상으로 뿌리 박히기도 했고, 그야말로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3. 아주 드문 '좋은 순사'의 사례로는, 독립운동가 이재유가 1934년 6월 13일 서대문 경찰서에서 탈출할 때 협조했던 모리타(森田)라는 순사가 있다.
  4. 친일파를 분류 할때도 이러한 부분이 애매하게 작용하기도 했다. 일본의 항복과 해방에 대한 당시 대부분 조선인들의 반응은 "꿈에도 이런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였다.
  5. 특히 일본군은 그 경직성으로 인해 일부 부대에서의 쏘가리 따돌리기같은 하극상은 있었지만 계급을 철저히 따지는 편이었고, 이는 계급이 높으면 특히 사병들은 일등병 이상으로의 진급도 100% 시험을 통과해야 할 수 있었던 제도 특성상 계급=능력으로 간주되어 후임병이라도 진급하는 순간 어제의 선임을 밟아버릴 수 있는 곳이었다. 이는 내지인이건 조선인이건 별 상관이 없었기에, 당시의 기록들을 보면 조선 출신 상급병이나 하사관들에게 꼼짝도 못하고 얻어터지며 가혹행위에 시달리던 내지 출신 사병들의 이야기가 수도 없이 나온다. 설령 그 조선인 선임보다 상급자인 내지인이 있어도 "조센진보다 못나서 진급도 못하는 한심한 놈"이라며 되려 조선인 선임 편을 드는 경우도 허다했다. 육군 하사에 해당하는 오장 계급까지만 진급해도, 매일밤 내무반에서 내지인들을 족치며 실컷 화풀이를 할 수 있는데다, 휴가라도 나오면 그간 자기를 괴롭히던 동네 일본인 주재소장(파출소장)의 싸대기를 때려도 주재소장이 꼼짝도 못했을 정도였다.
  6. 단 이 경우는 약간의 자조적인 뉘앙스가 있는 경우가 많다.
  7. 양반은 벼슬자리를 얻고, 양인은 부역과 과세의 경감 및 면제, 천민은 신분이 상승된다.
  8. 다모에서도 들병이가 위장 침투를 위해 과부로 위장해 목이 메달릴 뻔 하다가 구출을 받는데 시가(媤家)에서 열녀 지정을 받으려고 자기를 죽이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해서 정체를 숨긴다.
  9. 이는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이다. 일단 본문에서 주장하는것 처럼 수많은 열녀가 가문의 영광을 위한 위장살인으로 탄생했다는 증거가 필요한데 드라마의 내용만으로는 절때 증거가 될 수 없으며, 남편이 죽는다 해서 무조건 따라 죽어야 했던 것도 절때 아니며, 밑 문장에 후술하듯 수절 또한 강제적인 의무가 아니였다.
  10. 출처 바람
  11. 가문의 대표
  12. 심지어 1989년에도 발생하였다. 1889년을 잘못 쓴 것이 절대 아니다!
  13. +1명에는 사연이 있으며, 아래에서 설명한다.
  14. 명목상 다음 주군을 모시라는 이유였으나, 그냥 왠지 심술이 나 아베에게 엿을 먹이고 싶어서 그랬다(..)라는 기록도 있다.
  15. 당연히 이들은 기록상 병사 등으로 처리되었을 것이므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16. 노기 장군의 경우 일반적 순사와 약간 다른데 러일전쟁 당시 203고지 공략전의 최고 책임자였었다. 그러나 명망높은 장군이란 얼굴마담이었고 실질적 작전은 참모들이 진행했었다(그렇다고 해도 엉망인 작전을 그대로 실행한 노기의 책임도 크다) 그 결과는 이겼지만 졸전으로 인한 3만에 달하는 젊은이의 엄청난 희생이었으며 노기 장군의 아들들마저 공략작전에서 전사한다. 이에 노기 장군은 책임을 지고 할복할려고 했지만 메이지 덴노가 자기가 죽기전 할복은 허락할수 없다고 하여 죽은후 할복겸 순사를 택한 것이다. 당시 일본은 아직 제정신인 사람들이 많은 시기라 명망높은 장군이 전근대적 야만적 풍습을 행한다고 충공깽이란 반응이 대세였다.
  17. 심지어 할복까지 거행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