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혼상제 | |||
관례 | 혼례 | 상례 | 제례 |
祭祀
표준 제사상 차림표.[1] |
목차
1 개요
국어사전에는 신령이나 죽은 사람의 넋에게 음식을 바치어 정성을 나타냄. 또는 그런 의식이라고 나온다.
제사의 동기는 토테미즘이나 샤머니즘과 같은 원시신앙에 있다. 자연재해, 질병, 맹수들의 공격 같은 인간집단의 생존에 위협이 되는 재앙을 막기 위해 하늘이나 땅, 강이나 바다, 오래된 나무, 높은 산, 조상등에 절차를 갖추어 빌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기본적으로 모든 종류의 신성에 대하여 지내는 종교 의식은 '제사(祭祀)'로 통칭할 수 있다. 더불어 고대 중국 상나라(은나라)의 왕 조갑이 주변 토착신을 배제하고 조갑의 직계 조상만 섬기는 조상신 풍습을 만든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기록을 보면 상족의 조상은 직계인 근조선공과 직계가 아닌 원조선공으로 나뉘는데, 상나라에서 제사는 직계 선조인 근조선공에게만 지냈다. 조갑은 왕의 어령에 반발하는 사람을 막기 위해 자신의 조상을 숭배하면 농사가 잘 되고 전쟁에서 승리하며 재앙을 막아준다는 등 만사가 다 잘 돌아간다고 퍼뜨렸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조상 섬기는 문화가 생기기 시작한것이 제사의 시초이다.[2] 이후 상나라는 주나라에게 멸망하게 되는데 주나라는 위에서 조갑이 퍼뜨린 미신을 믿었기 때문에 상나라의 제사방식을 이어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상나라의 전 지도층을 제후로 임명해 상나라 조상에 대한 제사를 계속 이어가도록 했는데, 이것도 위의 미신과 마찬가지로 다른 가문의 제사를 끊기게 하면 그 사람에게 제사가 끊어진 조상 귀신들이 재앙을 내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후 떠돌이 생활을 하며 왕들을 가르치던 공자가 상나라 제사문화 띵호와 하면서 재정비 했다.[3] 공자는 유교의 대표이니 후대 유학자들이 공자를 떠받들며 제사문화가 쭉 이어지는건 당연지사... 그러면서 이 제사 문화가 우리나라에 흘러들어오는데 유독 한.중.일 3국 중에 제사 문화가 아직까지도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는건 한국이다.....(2010년대 기준으로 젊은이들은 생각을 많이 바꾸고 있지만 그들의 부모세대는 아직도 제사에 목매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일반명사로서 제사의 뜻은 이렇지만, 흔히 한국에서 '제사'라고 하면 유교의식에 기반을 둔 '조상 제사'를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4]
이런 수단으로서 행해진 제사는 중, 근세에 이르러 유교와 결합하여 조상숭배의 제도로 고착되었다. 또한 종교적 의미를 가지면서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정교가 분리된 이후에도 황제은 하늘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며, 자신의 조상을 신격화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권위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다만 제후국을 자처한 조선의 왕은 하늘에 대해 제사를 지낼 수 없었고, 왕조의 조상신(종묘)과 땅의 신(사직)에는 제사를 지냈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는 환구단을 지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또한 가정에서는 효의 의미를 가져 가문의 통치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종교적 면은 사후세계의 인정을 통한 유교 특유의 간접적 영생법의 의미를 가졌다.
조선 전기까지는 아들딸 상관없이 재산을 공평하게 분배받고 제사의 주체에서도 남녀차별이 없었으나 조선 중기 이후 소중화 의식이 강해지면서 유교에서 제사를 지내는 장남[5]이 아버지의 재산 2/3을 받고 나머지를 다른 아들들(딸은 받지 못한다)이 나누는 전통이 1990년대까지 유지되기도 했다.
이런 제도는 복잡하게 변천하여 가정마다 연간 제사 횟수가 48회 이상이나 되기도 하였다. 원래는 4대조까지 제사를 지내는 것이 원칙이지만, 위인을 많이 배출한 명문 양반 가문일수록 불천위라 하여 영구히 제사를 모시는 분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한 제례의 실용성 등에 대한 문제는 옛 유학자나 예문가들 사이에서 자주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2 차례와 제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명절에 지내는 제사를 차례라고 하며# 두산백과에 따르면 음력 매달 초하룻날과 보름날, 명절날, 조상 생일 등에 간단히 지내는 제사를 차례라고 한다.# 따라서 설날과 추석에 한해서 제사가 아니라 차례라고 부르기도 한다. 물론 차례도 제사에 포함되는 개념이므로 설날이나 추석에도 제사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3 한국의 제사
- 삼국시대 이전 : 신명에 의한 복을 받고자 자연숭배로서의 제사의식이 행해짐.[6]
- 삼국시대 : 자연신에 대한 제사가 자기 가문의 조상에 대한 제사의례로 발전하였다. 일반 민중보다 왕가에서 먼저 행해짐.
- 고려 말 : 성리학의 수입과 더불어 주자가례에 따라 가문의 무덤(가묘)를 설치하려는 운동이 사대부사이에서 활발해졌으나 별로 보급되진 않음. 절에 제사를 대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 조선시대 초기: 불교의례의 전통이 남아 주자가례와 같은 유교의례는 사회전반에 보급되지 않음.
- 16세기 중반 : 성리학이 심화되어 양반사회에서 주자가례가 정착되고 주자가례에 명시된 4대조까지 제사를 지내는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면서 조상에 대한 존경과 추모의 표시로 행하여 지고 있다.
4 의의
제사는 후손들에게 공경심과 효심을 나타내는 의식으로 사회적 소속감, 연대감을 증진하며 가족간의 우애와 화목을 다지는 의미를 가진다. 특히 현대 핵가족 사회에서 초래되는 단절과 공동체 의식의 결핍을 보완하여 현대적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안이 되기도 한다. 사방으로 나뉘어 살아가는 현대 가족들이 모여 정담을 나누고 가족애를 확인 할 수 있는 자리가 제사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제사를 올리는 집은 조상에 대한 숭배의 목적이 아닌 친척 형제와의 관계유지와 전통적인 관례와 풍습으로 하는것이지 조상신을 모신다는 종교적인 이유는 매우 약해졌다. 한국과 유교의 전통적인 문화 유산으로 남아 있다고 봐야 할것이다.
애초에 유교에서는 괴력난신을 인정치 아니한다.
5 논란
5.1 상차림 논쟁
보통 제사상 하면 떠올리는 상차림 대신 바나나, 피자 등 고인이 생전에 좋아했던 음식을 올리는 경우가 있다.[7] 이에 대해서 밤, 대추, 곶감, 약과 등과 같은 전통 상차림을 지켜야 한다는 의견과, 고인이 생전에 좋아했던 음식이라면 올려도 상관 없다는 두가지 의견이 충돌되고 있다. 허나, 애초에 우리가 전통 상차림이라 부르는 형식도 1969년 3월 1일 공포된 가정의례준칙과 80~90년대 언론 등에서 몇몇 가문의 제사상 차림을 종합하여 상차림은 이런식으로 하는 것이 좋다고 널리 퍼뜨린 표준 형식일 뿐, 한국의 전통 상차림이라 보긴 힘들다. 본래 유교에선 처음부터 제사 때 '홍동백서'니 '조율이시니 하는 엄격한 상차림을 처음부터 지정하지 않았다. 가령 이이의 저서인 격몽요결에선 제례에 대해 설명하면서 '집안 형편이나 사람 수에 맞게 적절히 올리면 된다'고 언급하고 있다. 관련하여 참고할 만한 글
전문가 견해도 주식인 밥, 탕, 나물 등은 반드시 올려야 하지만 그 밖엔 피자나 치킨이나 바나나, 파인애플 같은 외래과일을 올려도 무방하다는 의견이다.# 유림 전문가인 성균관 박광영 의례부장도 "과시욕, 허례허식 때문에 상차림이 과해졌다"고 말하며 "특히 명절날 차례상은 오히려 간소하게 차리는 것이 더욱 예법에 맞다"라고 설명하였다.
5.2 종교적 관점의 충돌
아래에도 나와있지만 제사는 각 종교마다 다양한 방식의 제사법이 존재하며, 이 때문에 개인의 종교적 관점이 그 집안에서 내려져오던 전통과 충돌할 경우 제사를 거부하는 등의 충돌과 갈등이 발생할 우려가 있으며, 실제로 이러한 종교적 관점의 충돌로 인한 제사 거부가 이혼 사유에 해당한다는 판결도 나왔다.#
조선 후기 청나라에서 여러 서양문물이 들어왔을 때 같이 들어온 천주교의 영향 때문에 생긴 제사 거부는, 천주교에서는 유일신인 하느님만 섬겨서 제사를 다른 신을 섬기는 것으로 여겨서 제사를 금지한 적도 있다고 한다.
5.3 무신론과 제사의 관계
무신론적 관점이나 과학적 회의주의의 관점에서는 사후세계, 영혼, 귀신등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선 회의적이기에 '무신론자들은 제사를 해선 안된다'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제사라는건 정말 영혼의 존재를 믿어서 하는게 아닌 말 그대로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로써 그것을 기리는 행사기 때문에 꼭 영혼의 존재를 믿냐 안믿냐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공자의 관점에서 제사를 정립해 보면 관습적으로, 피동적으로, 의무감으로, 체면 때문에 제사를 모셔서는 안 된다. 조상을 자신과 가족의 복을 비는 신으로 섬겨서도 안 된다. 자손이 함께 모여 자신을 존재하게 해준 조상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오랜만에 만나는 집안 어른께 인사하고 혈연의 정을 나누는 마음으로, 같은 동기끼리 우애를 나누는 마음으로 제사에 참여해야 한다.- 《제사의 참 의미는?》, 오마이뉴스.
실제로 무신론과 제사의 관계에 대해서 조사해본 기사#를 보면 민간에서 행해지고 있던 제사를 유교에 도입하여 발전시킨 공자야 말로 오히려 영혼이나 사후 세계의 존재에 대해서 회의적인 무신론자 였다고 한다. 공자가 제사를 도입한 이유는 영혼의 존재를 믿어서가 아닌 도덕국가 재건에 제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무신론과 제사의 관계에 대해서는 2000년대 이후로 국내에서 받아들여지고 해석되는 무신론이라는 것이 서구의 자유사상 및 계몽주의 계통의 신무신론이 아닌, 거의 무교 내지는 동아시아적인 비신론(nontheism), 세속주의에 가깝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8] 가장 크게는 현대의 제사 풍습이 종교색이 크지 않은, 친족단합을 도모하는 세시풍습에 가깝다는 데서 이유를 찾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과연 제사가 정말로 종교적 동기와는 "무관하다" 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할 수 있다. 예컨대 일부 어르신들 중에는 제사를 왜 드리냐고 물으면 "왜긴, 조상 덕 좀 봐야지!" 같은 식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위에 인용된 오마이뉴스 기사 내용과 비교하면 조금은 씁쓸한 현실. 또한 제사 절차 중에 잠시 집 밖으로 몸을 피해서 누군가의 "식사" 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과정이나,[9] 제사를 마치고 제삿상의 음식을 먹는 것을 음복(飮福)이라고 부른다거나, 이러한 행동을 음덕(陰德)을 입는다고 표현하는 것 역시 제사라는 행위가 초자연적인 섭리의 개입을 일부 전제할 수 있으며, 어떤 식으로든 종교적 내지 기복적인 동기로 활용될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보여준다.
5.4 유전학과 족보의 관점
사실 우리나라는 족보 세탁이 심해서 유전자로 성씨를 분석하면 절대 다수가 남의 조상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그러니 일부 사람들처럼 너무 복잡하고 번거로운 제사를 지내는 것은 남의 조상을 필요 이상으로 성대하게 대접하는 것일 수도 있다. 솔직히 가끔 밝혀지는 것[10]들을 보면 생각보다 막장인데 진위 여부를 정밀하게 가리지 않았다면 남의 조상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확인도 하기 전에 굳이 제사를 아주 잘할 필요가 있느냐라는 의견도 있다.[11]
6 폐해
명절증후군, 결혼/과정과 갈등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2010년대인 현재에는 죽은 사람의 정성을 드린다는 의미가 변질되고 있다. 여자들이 명절을 싫어하는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종가에서는 돌아가신 어르신들의 기일에도 제사를 지내야 하기 때문에 종갓집 맏아들은 결혼 기피대상 1순위 이다.(...) 제사를 지내는 날이면 제사상을 차리는 몫은 전부 여자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그냥 쳐다도 안 보거나, 설령 남편이 나서서 도와주려고 해도 집안이 보수적인 곳이면 "남자는 집안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면서 못 하게 한다. 이렇게 힘들게 제사상을 차려놓아도 누구하나 수고했다는 한마디를 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트집을 잡아 잔소리와 면박까지 주고 용돈을 건네주는 시누이나 동서들을 편애한다. 게다가 이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한다. 힘들게 일한 며느리 입장에서는 피가 거꾸로 솟을 지경...
때문에 명절만 되면 스트레스 때문에 싸우면서 이혼까지 하는 일도 생긴다. 실제로 명절 연휴가 끝난 뒤 제사상 차리는 스트레스로 인해 이혼률이 증가한다는 내용이 해마다 명절 전후로 뉴스 기사가 되는 지경.(...) 하늘에서 후손들을 위한다는 조상들이, 자신에게 상을 차려주기 위해 아랫사람들을 괴롭히는 모습들을 보면서 까지 음식을 차려주는 것을 과연 원할까? 서로를 위하면서 서로가 덕담을 건네며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까?
뿐만 아니라 종교나 가치관이 다른 이유로 제사를 지내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도 제사 지내는 것을 강요하는 등 여러 폐해가 생기면서, 젊은 세대들은 그저 없애야 할 악습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아래 문단만 보더라도 음식이 낭비되는 일이기도 하고.
6.1 허례허식
제사는 허례허식으로 과도한 낭비 등을 가져온다는 점이 지적되었다.[12] 그래서 1969년에 가정의례준칙 및 가정의례법이 제정되어 제사에서 4대 이상까지 제사를 지내는 일이 적어지고 부모, 조부모 및 배우자로 점차 국한되었다. 1999년 8월 31일에는 건전가정의례준칙이 공포되었다.[13]
사실 그렇게 맛있는 음식이 되지도 않는다. 제사상에 올라가는 음식은 공통적으로 밥, 탕, 국, 삼색나물, 전, 산적, 생선 정도가 올라가는데[14] 모든 음식이 그렇듯이 갓 만든 게 맛있는 법이다. 다양한 음식이 한 번에 올라가야 하고 어느 정도의 양이 또 필요한지라 조리 시간이 길어져 어쩔 수 없이 음식이 식는다, 제사 지내는 동안 또 식기 마련이고. 대개 먹을 때 되면 이미 식은 지 한참 된 음식들이다. 들인 돈은 많은데[15] 정작 먹을 때에는 죄다 식은 음식이 되어서 푸석푸석하거나 질겨지기 십상이다. 다시 가열하는 등의 방법도 있겠지만 그래도 갓 한 음식만 못하기는 마찬가지. 음식물 쓰레기가 양산되는 게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16] 좀 노골적으로 말해서 한 나라의 온 가구가 잔치를 벌이는 수준이라 낭비가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게 우스운 일이다.
현실적으로 부담이 크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는 가정에서도 의례를 크게 간소화해서 치르는 경우가 많다. 조상들의 제삿날을 아예 한 날짜에 몰아서 제사를 지내거나 제사상 진설을 FM대로가 아니라 가짓수를 줄여 지내기도 한다. 아무튼, 제사 간소화는 집안마다 가족마다 방법이 다 다르다.
7 음복
제사를 지낸 뒤에 제사에 쓰인 제주(祭酒)와 제물을 나눠서 먹는 것. 집안에 따라 제상에 올린 나물과 밥을 함께 비벼서 비빔밥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같은 메뉴라도 평소 먹는 것보다 더 맛있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무래도 재료 고르기와 다듬기, 조리에 있어서 워낙 공을 들인 음식이니 이상할 것은 없지만...[17]
다만 제물이 평소 먹던 음식보다 맛없다고 느끼는 경우도 있는데 음식이 식고 난 뒤에 먹기 때문이다. 특히 고기나 생선류는 한번 조리가 되고 나서 식으면 수조육류 특유의 냄새가 나고 다시 데우면 오히려 냄새가 심해진다. 양념이 안 되다 보니 양념이 들어갔을 때보다 냄새가 심하다. 음식에 간은 하지만 양념을 하지 않는 이유는 양념의 매운 맛이나 향이 영혼을 쫓아낸다는 믿음 때문이다. 무당들도 귀신을 쫓아내는 의식을 행할 때 마늘이나 고춧가루를 사용한다.
거기다가 남아서 냉장고에 넣어 두면 냉장고의 냄새까지 밴다(...) 밀폐용기나 지퍼백에 넣어둔다면 어느 정도는 괜찮지만 대부분의 집이 비닐봉지에 대충 담아놓는 환경을 생각한다면 지못미.(...)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먹다 버린 것 같은 느낌이나 음식에 상한 냄새가 난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음복 때에는 제사에 쓰인 술인 제주[18]를 제사에 참여한 모든 구성원들이 한 잔씩 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민짜"들이 공개적으로(…) 술맛을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 물론 이런 데 엄격한 집안에서는 이럴 때에도 아이가 술을 못 마시게 한다. 그래도 어른들 입장에서 장점을 찾아보자면 소위 "주도"를 훈육하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된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첫 술은 이렇게 순한 술로, 어디 어두침침한 양아치 소굴 말고 이렇게 중인환시리에 환한 자리에서, 적당히 긴장 타면서 배우게 하는 것이 지극히 바람직하다. 처음 술버릇이 평생의 술버릇에 미치는 영향이 정말 지대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명절에 차례나 성묘를 하고 제주로 음복을 하고는 음주운전을 하는 사례도 심심찮게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명절날 큰 묘지 주변에선 낮시간에도 음주단속을 하기도 한다. 아무리 소량이라도 술은 술인 만큼 운전할 사람은 제주를 마시지 말자. 단속 이전에 안전 문제다.
현대 이전에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에는 명절, 잔치와 함께 음식을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기회가 음복이기도 하였다. 아래 내용의 '헛제삿밥'의 기원으로 이를 꼽기도 한다.
영혼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의식이다보니 어른들이 남의 집 젯밥은 함부로 얻어먹으면 안 된다고 충고하는 경우가 있다. 제물에는 귀신이 붙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무당들도 제사를 지낸 음식은 귀신이 붙은 거라 먹게 되면 부정을 탄다고 하여 일절 손을대지 않는다고 한다.
8 가문별, 지역별 특색
- 제주도에서는 제사를 식게라고 부른다. 균분상속의 전통이 남아있어 시집간 딸과 사위도 제사에 참석한다.[19] 자녀가 생기면 자녀도 동행하므로 외손자가 제사에 참석하는게 유별난 일이 아니다.[20] 뿐만 아니라 친구를 제사에 초대하는 경우도 있다. 만약 제주도 사람이 제사에 초대한다면 혈족만큼 친밀하게 여기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된다.
- 제주도에서만 상에 올리는 음식들이 있다. 빵[21],
양애 양하(襄荷). 양앳간이라고도 부른다. 꽃부분(정확히는 꽃대)을 따다 무쳐서 나물로 제사상에 올린다. 향이 강하고다른 나물과 비교하는게 무안할 정도로질기고 아삭한 말 그대로 독특한 식감이다보니 호불호가 극도로 갈린다.생강맛 반창고 혹은 면붕대전북 남서부지역도 양애를 올린다, 빙떡 등. 갱도 생선국[22]으로 올린다(주로 생선미역국). 지역특성상 어적도 빠지지 않고 올린다. 적갈 재료는 주로 상어, 오징어, 옥돔. 명절 때 차례상에 만두를 올리지 않는 것도 특징이라면 특징. - 경북 지방의 경우도 제주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다른지방에서 보기 힘든 돔배기 같은 음식이 제사에 올라온다. 제사 음식들중에서도 비중을 상당히 높게 치는 편. 집안에 따라서는 문어도 삶아서 올라온다.
- 안동시에는 헛제삿밥이라는 음식이 있다. 안동의 제삿밥이 맛있기로 유명하자 그곳에 부임한 미식가 관리가 이를 원하였는데, 아랫 사람이 실제 제사에 쓰인 음식은 아니고 같은 재료로 똑같이 만들어 대접하자 관리가 이를 먹고서는 "향이 나지 않으니 진짜 젯밥이 아니구나(헛제삿밥)[23]"라고 하였다고 한다.
- 신숙주의 본관인 고령 신씨의 일부 집안에서는 제사상에 숙주나물을 올리지 않는다.
- 일반적인 제수와 달리 종묘제례나 사직제례에 쓰이는 제수에는 익히지 않은 날 것과 양념하지 않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 종종 산신제나 일부 종중에서도 볼 수 있는데, 산신제에서 이렇게 올리는 것은 유교의 영향이다. 산신제에는 고기를 잘 쓰지 않으나, 이는 현재 대부분의 산신각이 절 안에 있는 것도 있고, 남자 산신에게만 고기를 올리는 곳도 있다. 영월군의 태백산 산신제에서는 쇠고기를 쓰는데, 이는 영월에서 사망한 단종(조선)을 태백산 산신으로 존대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 개요에서 언급한 것처럼 조선 후기 이후 제사의 주체는 일반적으로 남성, 특히 장남이 지내는 것으로 인식되나, 현대에는 평등 의식으로 인해 형제들이 순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지내거나 함께 제사를 지내는 경우도 많다. 또한 노론 출신 문중에서는 처음부터 딸과 집안 며느리 또한 제사에 직접 참여시키는 경우가 많다.
-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발의 가문인 광산 이씨 문중에서는 칼로 고기나 무를 썰 때 '정철정철정철...'이라고 외운다고 한다. 이발의 가문은 정여립의 난 때 정철의 주도로 철저하게 숙청당해서 정철에 대한 원한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 이이의 제사상엔 소고기가 올라가지 않는다. 이이가 생전에 소를 사람들이 부려먹으니 소고기를 먹을수 없다며 소고기를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9 제사상에 올리지 않는 음식
후술할 기사에도 언급되듯이 이것은 문헌적 근거가 있는 게 아니라 민간에서 내려오는 풍습이니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아집은 피하는 것이 좋다.
- 복숭아 - 귀신을 쫓아낼 때 사용하는 과일이기 때문에 올리지 않는다고 한다.
- 고춧가루,마늘 등의 양념/향신료 - 고춧가루,마늘의 냄새가 귀신을 쫓는다고 하여 제사음식에는 간만 해두지 일절 이러한 양념을 하지 않는다. 때문에 음식의 맛이 심심하고 누리거나 비린냄새가 잡히지 않아서 맛이 없다. 어떤 곳은 소금도 안 넣는다 한다.
- 팥이 들어간 음식들 - 팥 역시 귀신을 쫓아내는데 사용하기 때문에 올리지 않는다고 한다.
- '치' 자가 들어간 음식들 - '痴(어리석을 치)','恥(부끄러울 치)' 와 같은 단어여서 부정하기 때문에 올리지 않는다고 한다. 또는 치 자가 들어간 생선을 올리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는 치 자가 들어가는 생선들은 등급이 낮은 생선이기 때문에 제사상에 올리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10 제사와 관련된 단어
제사상에 음식을 놓는 방식을 쉽게 외우기 위한 다양한 단어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런 단어들은 주자가례, 국조오례의 등과 같은 유교 서적에는 나오지 않는 근거 없는 단어들이고, 80~90년대 언론들이 몇몇 가문들의 상차림을 참고하여 상은 이런 식으로 차려야 한다며 만들어 전파된 단어들이다.
동쪽이니 서쪽이니 하는 말이 있지만 신위를 북쪽으로 치고 하기에 동쪽은 신위를 마주보고 오른쪽을, 서쪽은 왼쪽을 말한다.
- 어동육서(魚東肉西) : 물고기는 동쪽에 고기는 서쪽에 놓는다.
- 두동미서(頭東尾西) : 물고기의 머리는 동쪽으로 꼬리는 서쪽으로 가게 놓는다.[24] 반대로 일부 집안에서는 서수동미를 쓰기도 한다.
- 홍동백서(紅東白西) : 붉은 과일은 동쪽에 흰 과일은 서쪽에 놓는다. 그런데 과일이 꼭 붉고 흰것만 있는 것도 아니고, 과일줄에 약과나 산자등 다른 디저트류도 올라가기 때문에 애매한 경우가 많다. 이럴때는 보통 진한색은 동쪽, 옅은색은 서쪽에 둔다.
- 조율이시(棗栗梨枾) : 왼쪽부터 대추,밤,배, 감 순서로 놓는다. 다만 대추, 밤, 감, 배 순으로 놓는 조율시이(棗栗枾梨)도 혼용되고 있으며 이는 집안마다 다르다. 고로 남의 제사상에 감놔라 대추놔라 하지 말자. 홍동백서를 쓰는 집안에서는 조율이시를 쓰지 않는 경우가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위에 말했듯 제사 예법이라는게 집집마다 다 달라서 함부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조율이시를 쓰고 나머지를 홍동백서로 쓸 수도 있고. 제일 동쪽에 대추와 밤을 놓고 홍동백서를 따른후 마지막에 배와 감을 놓을 수도 있다.
- 좌포우혜(左脯右醯) : 포는 왼쪽에 식혜는 오른쪽에 놓는다.
- 반서갱동(飯西羹東) : 반(밥)은 서쪽에, 갱(국)은 동쪽에 차린다.
- 생동숙서(生東熟西) : 날것은 동쪽에, 익힌 것은 서쪽에 차린다.
- 건좌습우(乾左濕右) : 건한 음식은 왼쪽에 습한 음식은 오른쪽에 놓는다.
- 적전중앙(炙奠中央) : 적과 전은 중앙에 위치한다.
- 접동잔서(接東盞西) : 접시는 동쪽에 잔은 서쪽에 놓는다.
- 남좌여우(男左女右) : 남자는 제사상의 왼쪽에서 여자는 오른쪽에서 절을 한다.[25]
11 제사상 놓는 법 쉽게 기억하기
신주를 중심으로 첫 열에 밥, 두번재에 메인요리 (적), 세번째 열에 탕, 네번째 열에 반찬, 마지막 열에 디저트라고 생각하면 쉽다. 우리가 평소 밥 먹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제사 지내는 입장에서는 이걸 거꾸로 보니 (첫열에 디저트) 외우기가 어렵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제사상 놓는 법이 아니다. 고인이 좋아하신던 것으로 차릴 수도 있고 후손들, 특히 어린이의 참여를 높이기 위해 어린이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차려도 무관하다.
12 종교별 입장
12.1 불교
불교 국가였던 고려시대에는 집에서 직접 일일이 준비하기보다는 절에 조상의 위패를 맡기고 제사를 OEM 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의 일환으로 금지되었는데, 조선이 망한 현대에 들어서 다시 절에 제사를 맡기는 경우도 늘고 있다고 한다. 5만원만 내면 절에서 대신 차례를 지내준다고.
일본에서는 사후 일정기간(대략 수십년) 동안 불교식으로 조상의 성불을 기원하는 법회를 연다. 이를 법사(法事), 법요(法要)라고 한다. 여담으로 일본인에게 조상 제사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법사라고 하는 것이 간단하다. 공연히 자세히 설명하려고 '제사(祭祀)'라고 써버리면 마츠리(祭)로 착각할 수도 있다.(…)
참고로 불교에서 부처나 보살을 대상으로 하는 종교행사는 재(齋)라고 한다. 엄밀하게는 일반적인 제사는 제(祭)로 쓰고 둘을 구분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정작 절이나 불자들도 그다지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본래 재는 승려에게 식사를 공양하면서 이를 전후하여 간단한 예불 등의 불교의식을 치르는 것이었지만,[26]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49재/영산재, 수륙재, 생전예수재, 우란분재 등 기존 동북아의 민간신앙적 종교의식과 불교가 섞이면서 기존 민간신앙과 불교가 섞인 형태의 재가 나타났고[27] 이런 현상은 이미 인도 본토에서도 초기 불교 시대가 지나면서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본래 고대 인도에서 브라만교의 허례허식과 모순을 비판하면서 나온 게 불교를 비롯한 (당시 기준)신흥 종교들이었지만, 현실적으로 신도들이 원하는 종교행위에 대한 욕구와 그 효과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28]
12.2 천주교
1939년 교황 비오 12세가 '유교 문화권의 조상 제사는 민속적 관습일 뿐 가톨릭의 교리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고 발언한 뒤 천주교에서는 나름의 방식으로 제사가 허용이 되었다.
그 이전에는 조선시대 때 들어온 서학(천주교)에 대한 박해의 중요 원인이 될 정도의 문제였다.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제사를 금지한다는 것은 단순히 도덕성 문제가 아니라 국시인 유교 자체를 뒤흔드는 중대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물론 천주교 박해의 실질적인 원인으로는 황사영 백서 사건 등등으로 (모든 천주교인들이 황사영 같은 과격파인 것은 절대 아니었지만) 실제로 나라를 들어엎을 가능성이 있는 집단임이 드러난 점도 중요하게 작용했겠지만, 천주교의 교리가 유교의 가르침과 심각하게 충돌한다는 점도 '윤지충 신주단지 소각 사건(진산사건)'[29] 등으로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 당시의 신자들은 천주교의 가르침이 유학의 가르침과 모순되지 않으며, 오히려 더 풍부한 이해를 돕는다고 반박한다. 물론 이 의견은 깨끗하게 묵살당했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통해 허용된 천주교의 제사는 전통적인 제사 형식과 약간 차이가 있다. 우선 지방을 쓰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30], 지방을 쓰더라도 지방에 신위(神位)란 말을 쓰지 않고 그냥 이름과 함께 "주님, 그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라고 쓴다. 그리고 제문을 올리는 등 조상"신"에게 바치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제례의식들은 죽은 이를 위해 하느님에게 바치는 기도(연도, 위령기도)로 대신한다. 물론 집안에 따라, 특히 다종교 가정(?)인 경우 다양한 차이가 있기도 하다. 어쨌건 핵심은 천주교에서 인정하는 제사는 어디까지나 조상에 대한 추모와 그들의 평안을 하느님에게 비는 기도라는 선을 넘지 않는다는 것이다.인용 오류: <ref></code> 태그를 닫는 <code></ref>
태그가 없습니다 즉, 유교식 제사에서 조상"신"을 모시는 형식으로 된 의례를 삭제해도, 유교 관점에서도 문제가 없다는 말.</ref>[31]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그러하지만 간혹 이 선을 넘는 경우도 있는 법이기 때문에 천주교식 제사의 핵심이라 할 수 있겠다.
여담이지만 천주교의 공식 미사통상문에서는 미사를 '제사'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말씀 전례 후 이어지는 성찬 전례의 시작이 '봉헌(헌금)'인데, 이 헌금을 마치고 이어지는 '예물 준비 기도'에서 신자들이 다음과 같은 합송을 한다. "사제의 손으로 바치는 이 제사가 주님의 이름에는 찬미와 영광이 되고… (후략)" 왜냐하면 천주교에서는 미사를 구약 시대에 사제들이 양으로 속죄 제사를 바치던 게 신약 시대에 들어오면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대체된 하나의 희생 제사로 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성체는 제삿밥과, 성혈은 음복주와 어느 정도 통하는 면은 있다. 게다가 트리엔트 미사는 사제가 신자들을 등지고 미사를 집전하니 정말로 동양식 제사가 연상될 수 있다. 물론 구체적인 의미는 전혀 다르지만(…).[32]
요즘에는 명절에 제사를 지내거나 지내지 않거나 상관없이, 위령미사를 봉헌하는 신자들이 많다고 한다. 위령미사는 다른말로 연미사나 죽은 이를 위한 미사라고 부르며, 죽어서 연옥에 간 이들을 기억하며 그들이 천국에 하루속히 갈 수 있게 도와주기 위한 목적으로 봉헌하는 미사이다. 조상 제사를 드리더라도 위령미사를 봉헌하고 위령기도를 바치는 것은 가톨릭교회의 고유한 전통이어서 교회는 이를 적극 권장하고 있다. 원하는 날로부터 20일 이전(또는 수일 전)에 본당 사무실에 비치된 예물봉투를 사용하여, 미사의 종류와 지향(고인의 이름 혹은 목적), 일시 등을 조정 기록한다. 예물 액수의 규정은 없으나, 차례 때의 제물 값을 고려할 때 성의껏 드려야 한다. 비신자를 위해서도 연미사를 봉헌할 수 있지만, 사제가 그 이름을 공지할 수 없다. 천주교 수원교구 최윤환 암브로시오 몬시뇰은 "미사 때 지향은 신자와 비신자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도 개방돼 있다"면서도 "다만 비신자를 위한 연미사를 공식화하긴 어렵다"고 말했다.[33]
12.3 정교회
정교회는 조상 제사를 드리지 않으며, 대신 추도식(追悼式)과 기도 그리고 특별히 성찬예배 때 그들을 위하여 봉헌물을 바치며 또한 그들의 영혼을 위한 자선 등으로 도울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추도식은 세상을 떠난 지 3일, 9일, 40일, 1년 만에 할 수 있다(통상 관례와 가족의 합의에 따를 수도 있다). 오순절 전 토요일과 금육주일 전 토요일에는 돌아가신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추도한다. 추도식 때는 꼴리바라고 불리는 밀밥이나 쌀밥을 지어와서 성당 안에 준비된 작은 제단 위에 놓고 촛불을 밝히고 분향한다.
12.4 성공회
제사를 굳이 배척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천주교와 비슷하다. 종교적인 의미나 조상에 대한 숭배 행위로서 제사는 거부한다.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의 은혜를 기억하고 추모하며, 자손들 간의 화합을 도모하고, 그 부모를 자손들에게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예배 행위로서의 제사만을 인정한다. 즉, 행위의 대상이 하느님이 되는 경우만 인정하는 것이다. 또한 그 양식에 있어서는 종교적 의미를 가질 만한 것(대표적으로 '신주')을 제외한 부분만 인정한다.
12.5 개신교
개신교는 종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기본적으로 거의 모든 종파에서 제삿상에 절하는 것을 우상숭배로 죄악시하므로 제사 자체를 금지하는 편이다. 그러나 한국의 상황상 절은 우상숭배니 결코 인정할 수 없고, 서서 추도나 묵념으로 갈음하는 것을 권장한다. 교회다닌다며 절 안하고 한쪽으로 빠져서 서있는 사람들 하나쯤은 봤을듯. 개신교에선 사람이 죽으면 구원을 받았으면 천국, 못받았으면 지옥으로 보기에 제사상을 차려봤자 죽은 자가 와서 먹을래야 먹을 수 없다고 본다. 종교개혁시기 개신교의 가톨릭 비판중의 하나가 죽은자에 대한 미사 였기에 애초에 교리상 받아들일 수 없다. 한국에선 부부간에 종교가 다를 때 가정불화의 한 요인이 되는데, 혼인이 파탄난 경우에 종교가 원인의 하나라면 재판상 이혼사유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순전히 제사 거부만을 이유로 이혼사유가 되는 경우는 없다. 개신교에서는 제사 대신 추도예배를 권장하고 있는데, 천주교와는 달리 개신교 교리에서는 영혼을 위한 기도(위령기도)를 인정하지 아니하므로, 조상에 대한 추도의식 또한 상당히 제한적이다. 그나마 존재하는 추도예배도 교파나 목사에 따라서는 토착화요 상황화라고 반대하는 경우도 있다. 보통 추도예배조차 인정하지 않는 교파들은 명절 자체도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그냥 편하게 가족들끼리 모여서 먹고 즐기는 날로 지내라고 하는 편이다. [34] 물론 이렇게 까탈스러운 곳은 거의 드물긴 하다.
12.6 천도교
천도교에서의 종교의례에서는 청수일기(淸水一器)리 하여 항상 맑은 물 한 그릇을 준비하거나, 상황에 따라서는 맑은 물 한 그릇만으로 대체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식으로 제물을 진설하고 제사를 지낼 때도 있는데, 이 때는 벽 쪽에 위패를 놓고 위패를 기준으로 제물을 진설하는 일반적인 제사법(향벽설위)이 아니라 "향아설위"라 하여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을 기준으로 상을 차린다. 이는 만인에게 한울님이 깃들어 있는 사람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있으며, 2대 교주 해월 최시형부터 시작했다.
향아설위로 제사를 지내는 모습. 저 상태에서 청수를 모시고 둘러앉아 제사를 지낸다. 사진출처:국제신문
13 기타 얘깃거리
- 제사상의 동서남북은 실제 방위와 다를 수 있다. 같으면 좋겠지만 건물 구조상 불가능한 경우, 제사상의 방/신위가 있는 곳을 북쪽, 지내는 사람이 있는 곳을 남쪽, 동쪽은 지내는 사람의 오른쪽, 서쪽은 지내는 사람의 왼쪽으로 설정한다.
- 놀부는 제물 대신에 종이에 음식 이름을 써서 올렸다. 조선 후기 주자가례가 널리 보급되면서 사당을 지을 능력이 되지 않는 집에서는 사당을 그린 그림을 대신 걸고 제사를 지내긴 했지만, 놀부는 재력도 있으면서 구두쇠라 아끼려고...그 다음 해에는 제기 위에 그냥 동전을 올리고, 그 다음 해에는 무려 신위를 들고 시장바닥을 돌아다니며 음식 앞에다가 신주를 들이 밀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도 등장인물마다 다르게 묘사된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가난한 선비가 제사는 지내야 하는데 돈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조상님의 신주를 들고 시장을 돌아다녔는데, 그날 밤 꿈에 조상님이 나타나 배불리 먹어 만족스럽다며 은덕을 베풀었다는 이야기다.
- 제사 날짜는 대부분 음력으로 계산하는 경우가 많지만, 일부에서는 양력으로 계산하기도 한다. 성균관 문묘에서 행하는 석전대제와 종묘 제례는 양력으로 계산해서 치루고 있다. 석전대제는 9월 28일(공자의 탄신일)과 5월 11일(공자의 기일), 종묘제례는 매년 5월의 첫째 주 일요일에 행한다.
- 2월 29일이 제삿날이면 4년에 한 번[35]씩 제사를 지내게 된다. 이렇게 되면 평년에는 2월 28일이나 3월 1일로 땜빵하거나 음력으로 환산한 날짜에 제사를 지내야 한다. 음력으로 윤달이 제삿날이면 본달에 지내거나 양력으로 지내야 한다.
- 한복을 입고 제사를 지낼 때 여자는 두루마기를 벗고, 남자는 두루마기를 입어야 한다. 여자는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제사를 지내도 되지만 남자의 경우 바지저고리 차림(생활한복은 제외)이나 마고자 차림으로 제사를 지내서는 안 된다는 뜻. 현대 시중에서 파는 아동한복의 90% 이상이 두루마기가 없기 때문에 아이들의 경우에는 그냥 저고리나 마고자 차림으로 제사를 지낼 수밖에 없다.
- 양복을 입고 제사를 지내면 남자는 와이셔츠 단추를 끝까지 잠그고 넥타이를 맨 뒤 블레이저를 입으며, 여자는 블라우스 단추를 끝까지 잠그고 블레이저를 입는 것이 원칙이다. 즉, 와이셔츠나 블라우스 차림으로 제사를 지내서는 안 된다는 뜻. 다만 장례식장에서 철저히 지켜지는 것과는 달리 제사나 차례에서는 지키지 않는 집안도 많다. 교복이 한복이 아닌 이상 교복을 입고 제사를 지낼 때도 양복과 동일하게 적용된다. FM(?)을 중시하는 집안이 아닌 한, 단정한 차림이면 모두 허용하는 집도 많다.
-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국교이고 유교적인 제사문화가 완전히 정착하기 이전이라, 절이나 무당에게 땅이나 노비 등의 재산을 제사비용으로 주고 제사를 대리하는 경우도 흔했다. 이런 풍조는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중기부터 유교적 제사문화가 강화되어 없어졌으나, 유교의 영향력이 약화된 현대에는 부활하여[36] 점점 성행하고 있는 중. 때문에 불교 집안이라도 자주 다니는 절에 제사를 맡기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 집도 있다. 혹은 명절법회라 하여, 명절마다 절의 신도들이 한데 모여 합동 차례를 지내기도 한다.
- 고려 말기에는 유밀과가 크게 유행했는데, 불교국가인 고려의 특성상 살생을 터부시 하다보니 대충 동물 모양으로 유밀과를 올리던게, 점점 과일대신 과일 모양 유밀과도 올리고, 모양도 점점 호화로워지니 보다못한 조정에서 유밀과 금지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럴 만도 한게 전통 한과는 제조하는데 엄청난 비용과 노력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과 항목 참조.
- 천도교에서는 향아설위(向我設位)라 하여 위패가 아니라 제사를 지내는 사람을 기준으로 제물을 진설하고 제사를 지낸다. 다만 일반 가정에서는 그다지 엄격하게 지키지는 않는 듯.
- 홀수가 상당히 중요하다. 수를 셀 수 있는 제물들(ex-과일, 송편, 포 등)은 절대 짝을 맞춰 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제물 준비를 할때 밤을 10개를 샀다 해서 10개를 다 놓느냐 하면 10개는 짝수기 때문에 한개는 남겨놓고 9개만 올리는 방법이다. 사실 이는 음양의 철학문제로, 땅에서 난 것은 음의 속성을 가졌으므로 홀수로 놓아 고인과 더불어 음양의 조화를 꾀했다고 봐야한다. 마찬가지로 하늘에서 난 것, 이를테면 새종류는 원래 짝수를 놓았지만, 지금은 그런것이 의미가 없어지고 '홀수로 놓아야 한다'는 규칙만 살아남은 것.
- 현대에는 인간이 아닌 생물에게 제사를 지내는 경우도 있다. 이는 유교적인 의식 보다는 추모 행사에 가까운 것. 개인이 생전에 아끼던 반려 생물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나 혹은 의학 및 생물학 연구를 위한 실험 과정에서 희생된 생물들을 추모하기 위한 것 등이 있다. 또한 대구 치맥 페스티벌은 닭들을 위한 위령제를 개막행사때 진지하게 지낸다.
- 북한에서도 봉건적인 잔재라고 해서 없애려고 노력을 했고, 많은 가족들이 제사를 지내지 않게 되었다. 그렇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고, 80년대 이후 당국의 허용으로 제사를 다시 지내는 가족이 늘어나긴 했다. 하지만 많은 북한 사람들은 여전히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조상에 대한 예라고 해봐야 무덤에 가서 꽃을 바치고 묵념하는 정도이다. 제사를 할 경우 남한에서는 제사 때 2번 절하지만 북한에서는 3번 절한다.
- 남의 집 제사를 방해하면 제사방해죄로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 제사방해에는 제사장소에서 떠들거나 제사상을 뒤엎거나 제사를 진행할 수 없게 하는 행위등이 있다. 정말로 남의 집 제사에 감놔라, 배놔라 하면 제사방해로 졸지에 벌금형을 받을 수도 있으며#, 최악에는 3년 이하의 징역도 가능하다.#
- 무슬림은 샤하다[37] 때문에 제사를 지낼 수 없다.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제삿상에 절하는 것을 이슬람교 교리에 어긋나는 우상숭배라며 죄악시하기 때문.[38] 개신교의 경우는 워낙 신학적 스펙트럼이 넓기 때문에 제사에 대한 의견이 갈린다. 교회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한국의 경우 대부분의 개신교 교단은 제사를 금지한다.
- 사제(司祭)라는 직명을 직역하면 "제사를 맡는 사람"이라는 의미인데, 사실 이 말은 천주교 신학적으로 보더라도 절대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동양식 제사'와는 목적도 형식도 모두 다르다.
- 설날이나 추석 때 합동 차례를 지내는 군부대도 있다. 대상은 설날이나 추석 때 휴가를 안 나가는 부대원 전체(...). 부대 분위기에 따라서는
병들은 명절 안 그립겠냐? 지휘(자)관이 모범 안 보일 거야?간부들(특히 지휘관, 참모, 주임원사)도 상당수가 명절 땐 휴가를 못가고 당직이 아님에도 부대에 출근해서 이 행사를 같이 치뤄야 한다. 특히, 차레상 차리는 거 감독해야 하므로 조리부사관들은 태생적으로 명절 당일 반일 정도는 의무적으로 출근해야 한다. 축구대회 등 단결행사로 이어지는 경우도 흔하다(...). 높으신 분들은 명절 연휴 중 병들 무료하게 놔두면 고향 생각에 우울해지거나 심심함을 못 이겨 사고 친다고 여겨서 일부러 고생시킨다는 카더라가 많이 퍼져있다. 다만 실제로는 사서 고생을 시킨다기보다는, 명절때 이런저런 이벤트(?)를 많이 하는 것이 명분이 서기 때문이다. 이런 이벤트들은 휴가나 외박이 걸려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무작정 고생만 하는 것은 아니니까 힘을 내보자. 배에서 생활하는 해군의 경우에는 함정에서, 공군은 활주로 위에서 차례를 지낸다고 한다. 지휘관이 대인배인 경우는 종교별로 병들을 분류하여 각자의 종교에 따른 방식으로 제사를 지내게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종교적으로 제사가 허용되지 않는 병들은 안 해도 된다.
- 교도소에서도 설날, 추석에는 차례를 지낸다. 이를 "재소자 합동차례"라고 부른다. 물론 모범수에게만 허용되어 있다.
- BC3000년경 갑골문을 해독해 보니 은나라의 왕이 자신이 왕이 되고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주변에 있는 토착종교를 싸그리 배척하고 왕의 조상만 섬기게 하는 문화를 만들었고, 이에 대해 일어날 불만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 자기 조상을 섬기면 날씨도 좋아지고 전쟁도 이기고 하는일 마다 잘된다고 하고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또 믿었다. 그러다 은나라는 주나라에 멸망 당하는데 주나라가 자기 나라도 졔례의식을 잘 받아들이고 행해야 나라가 잘 될것이라고 생각해 은나라의 제사담당자를 불러들인다. 그러면서 주나라에도 조상숭배 문화가 퍼진것이다. 그러다 춘추전국시대 공자의 등장으로 공자의 개인적 생각이 들어가면서 귀천에 상관없이 부모에게 제사를 지내는건 당연한 일이라고 그래야 복 받는다고 공자 본인이 그렇게 정한것을 후대 유학자 들이 그대로 떠받들며 자기 생각을 한숟갈씩 추가하여 지금까지 오게 된것이다. 라는 주장이 있으나 해당 주장은 유학에 매우 비판적인 김경은 교수의 주장에서 나온것이므로 그 부분은 고려해서 판단하자.
-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정치가였던 안영은 "유자(儒者)들은 복상(服喪)의 예를 중시하고 가산을 기울여서라도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는데, 만약 그것을 백성들이 본받게 된다면 이 또한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주문왕(周文王)은 이미 가셨고 왕실까지 쇠퇴한지 오래 되었는데도 지금 유자들은 의례(儀禮)를 성대히 꾸미고 번잡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세상에 옛날의 예를 부활하려고 하더라도 헛수고에 끝날 것은 명백합니다."라고 하며 제사의 폐단을 지적했다.
- 남은 음식을 처리하는 방법은 나물은 비빔밥을 만들어 먹거나 전이나 고기,생선류는 찌게를 만들어 먹는 방법이 있다. 물론 양이 지나치다면 명절이 끝나고 1~2주 동안 먹어야 하는 장기전이 되어서 질리기는 마찬가지라 한계가 있다.
- 호주상속인에게 50%를 가산상속해주는 구민법규정의 후신격으로 제사주재자 [39]는 금양임야와 묘토 및 제구를 단독으로 상속받을수 있다.
14 제사를 지낼 수 없는 경우들
단순히 집안 행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40]가 아닌, 말 그대로 특정 이유 때문에 제사만 할 수 없는 경우들이다.
- 개신교도, 무슬림 : 이 쪽은 제사 자체를 교리에 어긋나는 우상 숭배라며 금지시킨다.
- 성매매 여성 : 현대에도 그런진 모르겠지만 전근대의 성매매 여성들은 자신들은 부정한 몸이기 때문에 제사에 참석하면 부정한 기운이 옮는다며 제사 참여를 금지당하기도 (또는 자발적으로 불참하기도?) 했다고 한다.
- ↑ 사실 이건 표준이라고 해야할지, 뭔가 기준에 없는 제사상차림이다. 때문에 가문 및 지역에 따라 변동사항이 상당히 크다. 고인이 생전에 좋아하시던 음식 등은 따로 올리기도 한다. 아주 싫어하던 음식이 있으면 빼기도 하고. 그래서 생겨난 속담이 "남의 집 제사에 감 놔라, 배 놔라 한다"이다. 각 가정마다 제례의식엔 사소하거나 또는 큰 차이점이 있는데, 그걸 무시하고 아는 척하는 걸 까는 데에서 비롯된 말. 거기에다, 후술하겠지만 사실 제사 관련 상차림은 원래는 딱 이거다 하고 고정되어 있지 않다.
- ↑ 이때 제사의 제물 중에는 상나라 사람이 아닌 다른 족속의 사람도 있다. 즉 인신공양을 한 것인데, 자세한 것은 상나라 항목 참조.
- ↑ 공자는 자신이 전생에 상나라 사람이라는 꿈을 꿨을 정도로 상을 숭상했다. 얼마나 심했냐면 후대 중국 학자들 일부가 은나라(상나라)는 공자의 이상세계를 투영한 것이지 실제 존재하는 국가가 아니었다고 착각했을 정도로...
- ↑ 여러 사람들을 위하여 비는 의식이 아니라, 왕권유지를 위하여 왕가와 민가를 구분짓고, 왕실은 대개 조상에게 왕실을 위하여 복락을 빌었고 양반들은 또한 각각 나누어져 각각의 조상에게 각자를 위하여 복락을 빌었다.
- ↑ 당연하지만 제사의 주체도 결격사항이 없으면 무조건 장남이 된다.
- ↑ 솔직히 이 때까지만 해도 제사라기보다 제천에 가까웠다.
- ↑ 반대로 고인이 생전에 아주 싫어했던 음식은 빼는 경우가 있다.
- ↑ 서구 영미권에서 개인의 가치가 그토록 강조되고 개인의 이성과 합리적 판단을 통해 그 어떤 타율적 도그마에도 얽매이지 않으려는 데에는 영미권 특유의 개인주의적 문화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문화는 정말 사뭇 다르다. 우리나라는 기본적으로 관계성(relatedness)이 평생의 대인관계를 알파부터 오메가까지 좌우하기 때문에, 무신론을 받아들이더라도 가족 친지 및 조상과의 현실적/상징적 관계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라면 거부감 없이 수용하는 경향을 보인다. 정작 영미권 무신론자들은 (문화의 상대성을 차치하고 원론적으로 본다면) 설령 오랜 풍습이나 전통에 근거한다 할지라도 개인이 가문의 일원으로서 조상숭배 행위에 동참하게 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어느 쪽이 더 옳다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 ↑ 과학적 회의주의까지 갈 것도 없이, 이러한 절차는 다른 상징을 배제한 세속적인 관점에서 봐도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현대에는 이것이 어떻게 변용되고 얼마나 잘 지켜지는지는 민속학 관련 전공자들의 확인바람.
- ↑ 알고 보니 관련이 전혀 없는 세탁한 남들
- ↑ [1]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자기 조상들을 버리고 세탁을 한 사람들 - ↑ 빚내 제사를 지내고 갚지 못해 노비로 전락한 경우도 있었다.
- ↑ 다만 제사 자체가 일종의 종교 의식이며 가정 내의 일인데 국가에서 법률로 제단하는 것 자체가 어떻게 생각해보면 국민의 자유를 과도하게 억압한 행위이다. 사실 이 가정의례법은 결혼식도 심하게 규제했다. 다만, 구 가정의례준칙이 그야말로 법적 효력이 있었던 것(위반시 처벌까지 하였다!)과 달리, 현행 가정의례준칙은 법적 효력은 없는, 이를테면 '실정도덕'(實定道德)이라고 할 수 있다.
- ↑ 조리가 필요한 음식만 포함해서 과일, 한과 등은 제외했다. 사실 밤까는 일도 보통 일은 아니다.
- ↑ 특히 차례 때는 모든 제사지내는 집들이 전부 제사상을 차리게 되느라 식재료 값이 폭등한다.
- ↑ 맛도 떨어지지만 양까지 많다. 한참 먹었는데도 양이 안 줄어들어서 먹다 버리고 말 정도고, 싸다주는 성의를 봐서 가져가는 게 대부분이라 정작 안먹고 썩혀뒀다 버리는 경우가 많다.
- ↑ 제사도 안 지냈으면서 제사와 똑같은 재료로 비빔밤을 만들어 먹으면 이걸 헛제삿밥이라고 하는데, 특히 경북 안동시의 헛제삿밥이 유명하다.
- ↑ 부재료가 들어가지 않고 주세법상 약주로 분류되는 전통식 청주를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다.
- ↑ 그러나 제사는 아들들만 번갈아가며 지내는게 보편적이다.
- ↑ 사실 한반도에서도 고려 때~조선 초까지는 유교적인 가례문화가 약해서 지금과 많이 달랐다. 딸과 외손자가 제주가 되거나 상속을 받는 게 당시는 특별한 게 아니었다.
- ↑ 본래 제주도는 토질의 특성상 벼농사를 짓는 것이 매우 어려웠고 따라서 쌀밥이 대단히 귀했다. 그래서 밀이나 보리를 쪄서 반죽해 쌀밥 대신 올렸는데, 현대에는 이것이 빵으로 정착되었다. 그러다 보니 육지에서는 크리스마스에 빵이 잘 팔리는 데 비해 제주도에서는 설날, 추석에 빵이 더 잘 팔린다.
- ↑ 제주도에서 생선이라 함은 옥돔을 지칭한다. 물고기 총칭하는 의미로도 쓰인다.
- ↑ 제사를 지내면 향을 피우고 그 향의 냄새가 음식에도 배야 하는데 그게 없으므로 진짜 제사를 지낸 음식이 아니라는 것.
- ↑ 이때 생선의 배가 신위를 바라보게 놓는다. 망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쪽이 먹기 편하니...
- ↑ 철저하게 유교성을 띤 집안은 아예 여자한테 절하지 못하도록 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도 역시 집안 차이. 유교성이 아니라 제실에 다 못들어가서(...) 여성이 제사에 참석 못하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 ↑ 때문에 중세까지만 해도 동북아 불교문헌에서 재라고 하면 현대의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재 외에도 나라에서 승려들을 모아 식사를 대접하는 경우가 많다.
- ↑ 원래 순수 불교 교리대로라면 업과 그 업으로 인한 대가는 철저하게 자신이 짊어져야 할 짐이지, 자손이 대신 짊어지거나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 ↑ 당장 현재까지도 인도에 남아있는 자이나교를 봐도, 허례허식과 물욕을 철저하게 배척하는 교리에도 불구하고 교조의 기념일에 거대한 창시자의 상에다 엄청난 양의 우유와 인도식 버터(자연버터는 '막칸', 가공버터는 '기'라 부르는데, 액체에 가깝다.), 염료를 뿌리며 공양을 올린다.
- ↑ 윤지충 바오로와 사촌 권상연 야고보는 결국 거열형으로 순교하고 만다. 그들이 순교한 터에는 천주교 전주교구 전동성당이 세워졌으며, 그들은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시복되어 복자품에 올랐다. 자세한 것은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항목을 참조.
- ↑ 이 경우 그냥 영정 사진으로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
- ↑ 흔히 동양식 제사를 유교가 만들었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공자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하던 것이다. 유교는 단지 제사의 의미를 재해석하고 자신들의 학풍에 제사를 흡수한 것 뿐이다. 즉 조상신을 모시자고 유교에서 만든 의식이 절대로 아니다.
- ↑ 여담으로 예수가 파스카 축제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빵과 포도주를 들고 자신의 몸과 피라고 한 것은, 우리로 치면 명절날 차례상에서 제삿밥과 음복주를 들고 몸과 피라고 한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자리에 있던 매우 친숙한 음식들을 가지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비슷한 것일 뿐이니, 지나치게 확대해석하지는 말자.
- ↑ 사실 비신자가 일부러 미사를 봉헌하러 오는 일은 가뭄에 콩 나는 것보다 드문 일이긴 하다.
- ↑ 뭐 이렇게 교파나 목사마다 다른가! 할 수 있는데 이건 개신교의 개교회(교회 개개별)특성이 그렇다... 애초에 교황청의 부패로 인해 종교개혁으로 나온 종파니까.
- ↑ 100으로 나누어 떨어지는 해를 끼고 있는 경우에는 8년까지도 벌어진다. 이는 4로 나누어 떨어지는 경우에는 윤년으로 하되 100으로 나누어 떨어지면 평년, 400으로 나누어 떨어지면 윤년으로 한다는 규칙 때문이다. 이 때문에 xx96년 2월 29일에 제사를 지내고 나면 4년이 지난 xy00년이 400으로 나누어 떨어지는 해가 아닌 이상 xy04년까지 제사를 제 날짜에 못 지낸다!
- ↑ 지금은 당연히 노비나 부동산이 아니라 돈으로 낸다.
- ↑ "알라 이외에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의 사도이다"라는 구절이다.
- ↑ 다만 '민속적 관습'이라는 시점에서는 지내도 된다는 일부의 의견이 존재하기도 한다.
- ↑ 망자의 자녀들간의 특별한 합의가 있거나 망자의 장손가 일원이 제사주재자로서의 지위를 유지할수 없는만한 특별한 사정이 없는한 제사주재자는 망자의 장남-장손이라는것이 판례
- ↑ 고3, 고시생, 유학생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