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고려의 국성으로 고려 왕조 개창 이후 475년 동안 번성하였던 대한민국의 성씨 집단이다. 시조는 처음으로 왕씨 성을 사용한 고려 태조 왕건의 증조부이자 국조(國祖)로 추존된 손보육(損寶育)이라 하지만 왕씨 가문을 신성시를 위해 지어냈다. 확실히 판명된 작제건 설화에 따른 이름으로 진짜 이름이 손보육인지도 확실치 않고 그 실체가 누구인지도 정확히 알지 못해 흔히 왕국조(王國祖)또는 왕보육(王寶育)이라고 부른다. 작제건 설화에 따르면 왕건의 외고조부가 되지만 왕씨 가문의 신성시를 위해 왕건의 조상들 중 중간에 억지로 당숙종을 끌어 들인 것으로 보인다.
작제건(作帝建) 설화의 따르면 왕건의 조부인 작제건이 당숙종과 왕국조 손보육의 딸 진의의 아들이지만, 당숙종이 신라 땅에 온 적은 없기에 이미 이제현은 이를 부정하였다. 다만 혹자에 따라서는 패서 일대에서 중국과 교역이 성행한 가운데 당헌종 이전까지 강력한 세력을 이루던 절도사 이씨 일족이 흘러들어온 것은 아닌가 짐작하는 경우가 있지만 물론 증거는 없다.
다만 고려사 서문에 인용된 바에 따르면, 외가 쪽 시조인 자칭 성골장군 호경(신천 강씨의 시조이기도 하다.)이 백두산으로부터 두루 유람하다 개경의 부소산(송악산) 왼쪽 골짜기에 정착해서 살다가 여산신과 결혼해 산신이 된 후 옛 부인을 찾아와 자식을 두었는데, 그 자식의 자손 중 거사[1] 왕국조(王國祖) 손보육의 막내딸 진의가 고려로 온 당숙종과 결혼해 작제건을 낳았고, 그 작제건이 서해 용왕의 딸과 결혼했다고 한다. 한글 위키백과 고려 태조/호경 항목이나 나무위키 왕건 항목 등에 나오지만 의종대에 김관의가 쓴 편년통록에서는 왕씨가 고구려 유민이라 적고 있다. 실제로 패서 일대 호족들이 고구려 멸망 후 남쪽으로 내려오거나 현지 고구려계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일리 있는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고구려계 호족들의 지역인 송악 출신인 왕건이 신라가 아닌 고구려계승을 표방하여 고려를 건국했으며 멸망한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고 요나라를 배척하고 북진정책을 추진하는 등 재위 내내 강력하게 고구려를 숭상한 신념도 해석에 힘을 싣는다.
여담으로 고려도경에는 개성 왕씨에 대해 왕씨의 선조는 대개 고려(여기서는 고구려를 의미)의 큰 씨족이다. 고씨(高氏)의 정사가 쇠퇴하게 되매, 나라 사람들이 왕건을 어질게 여겨 드디어 군장(君長)으로 세웠다.고 되어 있다. 실제 선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 악지에 따르면 중국의 칠현금을 개량해 거문고를 만든 왕산악(王山岳)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그가 두 번째 재상(제2상(第二相)이라고 나온다.(참조링크) 또한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에서 활약한 고구려 유민 왕사례를 볼 때에도 고구려에 본래 왕씨라는 성이 있었음은 확실해 보인다. 비록 부정확한 부분이 많지만, 기록이 맞다면 고구려 귀족계라는게 더 분명해지는 셈.
2 고려시대
호족과의 결혼으로 엄청난 수를 자랑했던 왕건의 자손들 상당수가 혜종~경종대 왕위 다툼, 특히 광종대 숙청에서 대거 살해되기는 했으나, 왕건의 아들 효은태자(孝隱太子)[2]의 자손이나 왕건의 손자 현종이 살아남았고 특히 현종의 자손들은 매우 번창하였다. 왕씨들은 고위 귀족과의 정략결혼이나 왕씨 일족간 근친혼을 하였고 이는 고려 말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면서 상당한 수로 늘어났으리라 여겨진다.
3 조선
3.1 탄압
그러나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개성 왕씨 일파는 왕우와 관련된 모반 사건 이후 대부분 학살당했으며 이 후 몇십년 간은 태조 이성계의 칠남 무안대군 이방번의 처가였던 정양군(定陽君) 왕우(王瑀)[3]의 일가 등 역모 등에 연루되지 않아 목숨을 건진 몇몇만이 살아남았다. 하지만 왕우의 두 아들 상장군 왕조(王珇)와 대장군 왕관(王琯)은 무인정사에 휘말려 목숨을 잃으면서 왕우의 대는 끊기게 된다. 거기다 왕우의 장녀 삼한국대부인 왕씨는 이방번의 아내였는데 자식도 없이 남편이 무인정사 때 사망하는 등 왕우의 자손들은 불운이 연달아 터진다.
다행히 조선왕조가 안정된 문종 때 왕씨 탄압정책을 완화하고 왕씨들을 찾아내어 우대하도록 했을 때 간신히 찾아서 몇몇은 복권되었다. 이중에 이름이 남은 이들이 후일 왕씨의 제사를 맡게된 고려 현종의 후손인 숭의전 부사 왕순례(王循禮)[4]와 개성왕씨의 동양군파 중시조인 왕미(王亹) 등이다. 왕미의 경우 그동안 외가 성인 민씨로 행세했다고 하는데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태조 3년 4월 26일 기사를 보면 왕손이 아닌 왕씨는 외가 성을 따르라는 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 후 소수나마 살아남아 조선왕조에 벼슬한 사람이 있기도 하였으며 대표적인 인물로 단종을 영월까지 호송하던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있다. 이 사람이 한성으로 돌아가며 쓴 시조 1수는 지금도 고전문학으로 배우고 있다.
3.2 복권
안정된 이후의 조선왕조가 태종 대 이미 왕씨들이 드러나도 처벌하지 않은 채 덮으며 넘어가고 문종 대에 이르러서는 전조의 왕족에게 고려 왕실의 제사를 지내게 해주고 그에 따른 물품등을 지급하는 식으로 예우해 주기 시작하면서 차츰 복성하였다. 세조는 생일 잔치때 개성 왕씨 일부를 초대해 손님으로 대우하기도 했다.
하지만 체계적인 복권은 정조 때로 문헌 등을 조사하여 왕씨의 세보를 다시 만들고 왕건이 수도로 정한 개성을 본관으로 하고 태조의 15대손 왕원을 1세 조상으로 하였다. 이것은 고려가 망한 지 거진 400여년만의 일로 정조 대에도 개성 왕씨를 찾아내 본성을 쓰게 하기도 했다. 흥선대원군 대에는 근 460년만에 공식적으로 왕씨 일족의 임관을 허용하기도 했다.
설이 조금 많은데 어떤 야사에서는 정조(!) 때까지 탄압이 유지되었다고 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경우에는 태종-세종 이후부터 대부분 다시 복성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사실 조선왕조가 왕씨를 탄압한 건 최초기의 일인데 그렇다고 해도 무척이나 무자비하게 숙청했는지라 남아나지 않았지만.아이고~ 의미없다!
4 현황
하여간 왕미의 후손들이 현재 개성 왕씨의 90%를 차지하는 동양군(東陽君)파[5]이외에도 계속 살아남아 근근히 씨족을 이어간 평양공(平壤公)파[6], 양양공(襄陽公)파[7], 안경공(安慶公)파[8], 시중공(侍中公)파[9] 등등이 존재한다. 현재 존재하는 개성 왕씨인구 2만명중에 동양군파 외의 나머지 파인 사람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겨우 2천명이니 이 성씨가 얼마나 조선시대에 근근이 이어져 내려왔는지 알 수 있다. 물론 이걸 거꾸로 얘기한다면 족보를 위조하거나 구입해서 가문에 편입된 사람이 적다는 얘기도 되지만...사실 개성 왕씨가 공식적으로는 복권이 상당히 늦게 되서 가문에 편입해봐야 메리트가 딱히 없었을 것이다.
지금 수백의 본이 이어지는 조선의 전주 이씨나 신라의 경주 김씨와 밀양 박씨, 가야의 김해 김씨와 비교해본다면 그야말로 안습일 따름이다.
다만, 왕씨 복귀가 허용된 이후로도 복귀하지 않고 외가의 성이나 바꾼 성을 그대로 쓴 경우도 많다는 이야기도 있다. 가령 문화 유(柳)씨 중 곤산군파(일명 약목유씨)는 고려 희종의 손자 광평공 혜의 자손, 곧 고려 왕실의 자손이라는 주장도 있다.
개성 왕씨 유명인으로는 연예인 전지현[10], 왕종근이 있다.
5 기타
왕씨가 멸족를 당하게 되자 왕씨를 변형시켜 옥(玉), 금(琴), 마(馬), 전(田), 전(全), 김(金)씨 등의 다른 성으로 행세하며 숨어 살면서 혈통을 유지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사실인지는 불명확하다. 이때 변성한 왕씨로부터 내려온 대표적인 성씨가 바로 내(乃)씨이다.[11]
사실 옥씨, 금씨[12]는 중국에서 건너 온 귀화성이고 마씨는 한국에서 제일 오래된 성씨[13]이며 전씨는 본은 달라도 계보를 따라가면 시조가 한 명[14]만 나온다. 해당 성씨들 입장에서는 성씨가 존립하는 그 의미 자체인 혈통이 문제되는 중대한 문제라서 저들에게 저런 이야기를 하면 화낸다.
이러한 야사가 남게 된 이유론 조선 왕조의 잔혹한 왕씨 압박과 실제로 성을 바꾸어 숨었던 몇몇 사례들의 기록, 외가성을 따르라는 조선왕조의 명령 등이 후세에 와전된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쨌건 간에 대부분의 개성 왕씨가 복성한 것으로 추정되므로 현재로서는 그냥 떡밥에 지나지 않는다.
야사에 의하면 우왕이 처형될 때 "왕씨는 용의 후손이라 겨드랑이에 비늘이 있다."면서 웃통을 벗어 보여줬다고 한다.[15] 실제 왕건의 조상에 관한 전설 중에 작제건이 용과 결혼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쨌든 지금 살아있는 개성 왕씨 중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말이 없는 걸로 봐서는 비늘이 있다는 건 그냥 전설이겠지만(…). 겨드랑이 털이 비늘처럼 생긴 건가
- ↑ 속세에 살면서 불도를 닦는 사람을 말한다.
- ↑ 어머니는 유금필의 딸 동양군부인 유씨이다.
- ↑ 신종의 7대손이자 충렬왕의 외현손자로 공양왕의 형이었다.
- ↑ 성씨를 숨기고 살았으나 이웃과 밭 경계를 놓고 다투다 이웃이 관가에 왕씨라고 밀고해서 정체가 드러나게 된다.
이웃死촌이때 왕씨 인 것이 들통 났으니 죽을 것이라고 두려워 했지만 문종의 어명으로 복권되었다. - ↑ 광종 때 피살된 왕건의 아들 효은태자로부터 파생되었다. 정사에는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개성 왕씨 족보에는 왕원(王垣)로 기록되어 있다.
- ↑ 현종의 사남 왕기(王基)로부터 파생되었다.
- ↑ 신종의 차남 양양공 왕서(王恕)로부터 파생되었으며 그의 6대손이 공양왕이다.
- ↑ 고려 고종의 차남 안경공 왕창(王淐)으로부터 파생되었다. 사실 임연의 압력으로 인해 형 원종의 양위로 잠시 왕위에 오른 적이 있었는데 5개월 정도 왕위에 올랐다가 원나라의 압력으로 원종은 복위하고 물러났다. 영종(英宗)이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중요한 것은 묘호가 아니다! 고려사 안경공열전 말미에 後追謚爲英宗(후에 시호를 영종이라고 추증했다.)라고 되어 있는데 묘호가 아니라 시호가 영종인 것이다. 즉, 왕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라 죽은 후 시호를 내린 것이다.
- ↑ 충정왕의 서자 왕제(王濟)로부터 파생되었다고 하는데 이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자세한 것은 충정왕 항목 참조.
- ↑ 본명 왕지현. 상술했듯 현대 대한민국에는 왕씨가 드물기 때문에 전지현도 화교설이 있다.
- ↑ 내씨의 선조 왕씨가 왕씨탄압에서 달아나던 중 검문을 받자 성씨를 물을 때 네?라고 하는 바람에 내씨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Mr.Yes - ↑ 기자와 함께 왔다고 한다.
- ↑ 마한시대이다.
- ↑ 놀랍게도 온조왕 때의 개국공신이다.
- ↑ 용의 눈물과 정도전에서 이 야사를 재현했다. 전자는 야사를 그대로 재현한 반면 후자는 나름 독창적인 해석을 가한게 특징이다. 우왕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