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첸 사태

(제2차 체첸 전쟁에서 넘어옴)

러시아어: Чеченский конфликт, Росси́йско-чече́нский конфли́кт (체첸 분쟁, 러시아 체첸 분쟁)
영어: Chechnya crisis (체첸 분쟁)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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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부터 시작되어 2009년에 종전한 러시아체첸 공화국 사이의 전쟁을 통칭한다. 체첸이 위치하고 있는 캅카스 일대는 풍부한 지하자원과 천연자원으로 인해 러시아에겐 매우 중요한 전략거점이다.[1]

사실상 러시아 영토 내에서 러시아에 속해있는 공화국이랑 전쟁을 하였으므로 러시아 내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체첸에게는 독립전쟁

2 배경

16세기부터 캅카스 지역의 한 민족이던 체첸인들은 이슬람 문화권에 고유의 체첸어를 사용하는 독자성을 띄고 있었다.

18세기 말부터 러시아 제국의 캅카스 일대에 대한 정복이 시작되었는데, 이 전쟁을 캅카스 전쟁이라고 한다. 격렬한 저항 때문에 거의 반세기에 걸쳐 1859년에서야 러시아는 이 일대를 장악할 수 있었다.

이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을 때는 일시적으로 체첸인들이 독립하여 다게스탄 체첸 이슬람국을 성립하기도 했으나, 소련1921년에 이 지역을 다시 점령하였다. 이후 체첸-인구시 자치공화국이 성립되어 소련으로 편입되었으나, 곧이은 이오시프 스탈린숙청으로 인해 10만여명에 이르는 체첸 지식인·공산당원들이 처형당하거나 타 지역으로 강제 이주를 당한다.

제2차 세계대전독일군이 캅카스 지역으로 진군할 때, 이들에게 협력했다는 명목으로 1944년 2월에 체첸 인구의 거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50여만명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한다. 이 과정에서 관리 소홀, 수많은 이탈자와 게릴라 투쟁으로 인해 23여만명의 체첸인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니키타 흐루쇼프의 개혁 노선에 편승하여 체첸인들은 1957년에 명예를 회복함과 동시에 고향으로 돌아갈 권리를 얻는다.

소련이 붕괴되던 1991년, 그 해 10월에 체첸의 대통령에 취임한 조하르 두다예프는 1993년에 체첸의 독립을 선언, 비 체첸계 주민들을 추방하기 시작했다[2]. 신생 러시아에게는 체첸 지역의 유전과 송유관 시설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전략적 가치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체첸의 독립은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에 대한 의지를 표명하고자 러시아는 잉구쉬 공화국과 체첸 공화국을 1993년의 러시아 연방헌법 채택으로 신생 러시아 연방공화국의 구성원으로 편입시킨다. 또한 두다예프의 비 체첸계 추방에 따라, 1994년부터 체첸에서는 비 체첸계 주민들의 무장투쟁이 시작되었고 러시아는 이들에게 무기를 지원하면서 두다예프의 실각을 꾀했다.

3 전쟁, 그리고 테러

3.1 1차 체첸전쟁

러시아어 : Первая чеченская войн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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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그로즈니가 아닙니다.

이곳은 연옥입니다.
- 당시 시가전에서 적의 대전차보병 수십 명을 발견한 T-80BV의 전차장

1994년 12월, 당시 러시아 대통령인 보리스 옐친은 체첸 내부의 상황이 악화됨에 따라 직접 정규군을 투입하여 두다예프를 대통령 자리에서 축출시키고자 하였다.

러시아군은 수도 그로즈니에 대한 기갑부대 강습으로 두다예프를 실각시킨다는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작전이 시작되기 전만 하더라도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이나 체코프라하처럼 그로즈니는 쉽게 떨어질 목표로 보였다.

12월 31일, 러시아군은 6,000여명의 병력을 필두로 기갑부대가 수도 그로즈니를 향해 돌격했다. 초반에는 철도역 등의 요충지가 별 저항 없이 접수되면서 작전이 성공했다는 낙관론이 들었다. 그러나 그로즈니 시가에 진입한 뒤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선봉부대인 제 131 마이코프 여단만 해도 T-72 전차 26대 중 20대, BMP 보병전투차 120대 중 102대를 손실하였다. 관련 내용.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은 체첸군의 전술 때문이었다. 당시 체첸군은 진격해 오는 러시아군 전차의 주로 측면이나 후면을, 아니면 상대적으로 취약한 전차 상부를 노리고 RPG-7으로 공격했다. 또한 전차 대열 사이사이를 공격하거나 건물을 무너트려 전차의 이동을 차단한 다음 일제 돌격해 박살내는 경우도 있었고 이 경우 러시아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마련이었다. 그냥 격파당하거나, 전차를 버리고 도망치거나.

물론 러시아군이 제대로 싸웠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의 러시아군은 너무나 형편없었다. 당시 러시아군이 얼마나 대책 없이 계획을 세웠냐 하면 장갑차에 승차할 보병이 아예 없거나, 운전병이 없어 장교가 차량을 운전하는 경우가 빈번할 정도로 보병 전력이 매우 부족하였다.[3] 그리고 러시아군 전차들이 장착한 반응장갑 중 상당수가 화약 없는 종이호랑이였다고 한다.[4] 그래서 RPG에 맞으면 여지없이 파괴되는 셈.

또한 야전 지휘관들을 위한 전술지도도 없이 그냥 대축적 지도 몇 장만으로 작전을 계획해야 했으며, 러시아군 정보부는 체첸 반군이 그로즈니 시내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다는 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반대로 체첸측은 두다예프가 전직 소련 공군소장, 참모총장 마스하도프는 소련 육군 포병대령이었던 데다가 소련군 복무자, 러시아에서 훈련받은 압하스 전쟁 참여자가 다수를 이루어 경험도 풍부했고, 러시아의 전술에 능통했다.

러시아 기갑부대의 장교들은 지원 포격이나 근접항공지원 유도에 서툴렀으며, 81전차연대의 총 120여대의 T-80BV전차와 장갑차가 투입되었지만 유기적인 연결이 이루어지지 않아 시가 중심부로 돌진하다가 무려 105대가 파괴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들을 지원하기로 했던 다른 차량화 소총 여단은 같은 러시아군과 오인 교전을 해 체첸인들에 포위된 러시아군을 구출하지 못했다.

또한 시가전 교리 역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크게 다듬어지지 않았던 데다 그때 얻은 교훈들조차도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바람에, 최종적으로 그로즈니 전투에 러시아군 5만명, 체첸군 1.2만명[5]이 투입되어 6:1의 병력우세를 보였음에도 이를 잘 활용하지 못했다. 그래도 어찌어찌 그로즈니는 95년 2월에 접수하는데 성공했다. 그 이후 한동안은 매우 쉽게 승기를 거두나 6월 샤밀 바사예프가 이끈 부데노프스키 병원 인질극으로 발목 잡히는 동안 체첸군이 재정비를 해버렸다.

러시아군은 이후 막대한 희생을 치렀고 96년 6월 두다예프를 공습으로 암살하는데 성공하지만 체첸군의 게릴라전에 지속적인 출혈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96년 8월, 샤밀 바사예프의 지휘 하에 체첸군은 그로즈니 시가지를 기습, 3,000여 명의 러시아군 병력을 포위하는데 성공한다. 러시아는 당시 수년 간의 지속적인 게릴라전 때문에 발생한 사상자들로 대내, 대외적 여론이 안 좋았으며, 구원군을 보낼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협상으로 1차 체첸전을 종결시킨다. 이 전투로 인해 한국군 등 일부를 제외하면[6] 전 세계적으로 냉전과 같은 대규모 정규전보다는 소규모 국지전을 연구하는 풍조가 일게 된다.

96년 11월부터 시작된 러시아군의 철군은 5년 간의 체첸의 지위에 대한 협상 유보, 행정기구와 체천 정규군의 유지로 볼 때 러시아의 실질적인 패배로 볼 수 있다.[7]

그러나...

3.2 2차 체첸전쟁: 불곰의 대(大)설욕전

러시아어 : Вторая чеченская войн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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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곰: 러시아의 전력(戰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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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 : 종소리 울려라, 종소리 울려...

러시아 전차 측면: 죽어도 그로즈니로[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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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 체첸 반군의 불곰 덫)

불곰: 퉷

1차 체첸전에서 러시아군은 뼈아픈 대가를 치루고서야 새로운 전력과 전술을 개발하게 된다. 관련 링크.

이븐 알 하타브로부터 와하비즘과 전술을 전수받은 샤밀 바사예프는 2,000여 체첸 반군을 이끌고 러시아 내에 이슬람 신정국가를 아니 민족 독립은 어디 갔는데 건설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1999년 8월에 다게스탄 공화국[9]을 침략한다. 이에 러시아는 체첸 반군의 다게스탄 월경을 연방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보아 강력한 군사적 대응으로 반군 세력을 와해시켰다.

그러나 이후 1999년의 모스크바 극장 테러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의 연이은 테러로 수백 명의 러시아 국민이 사망했고, 러시아는 이를 체첸 반군의 소행으로 규정, 2차 체첸전이 본격적으로 발발한다. 이번에 동원한 병력도 5만 명 안팎으로 1994년과 다를 게 별로 없었지만 체첸에게는 결정적으로 불리한 요소가 몇 가지 있었는데, 우선 내부 권력 다툼. 특히 샤밀 바사예프가 다케스탄 침공이라는 희대의 병크를 저지르면서 상당수의 체첸인들이 중앙 정부를 외면했고[10] 러시아군도 이번에는 철저하게 준비해서 병력을 훈련 및 조직화시킨 데다 고속기동전술 같은 새로운 전법을 개발하고, 여기에 처음부터 시가전 과정에서 사용 가능한 건물의 수를 최대한 줄일 목적으로 대규모 포격과 공중폭격 이후 진입한다는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간단한 문제다. 시가전에 약하면 도시를 없애면 된다

이에 따라 1999년 말부터 전쟁이 시작되었고, 러시아군의 총공세에 체첸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했으며, 이후 2000년 1~2월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지시로 강력한 공세를 펼쳐 그로즈니를 최종적으로 점령하게 된다. 살아남은 체첸군은 그로즈니 남부의 산악 지대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는데, 여기서 도망치지 못하거나 러시아군 눈 밖에 난 체첸인들은 러시아군에게 붙잡혀 감옥으로 끌려갔으며 그들 대부분은 사실상의 사형을 선고받고 살아서는 더 이상 감옥에서 나올 수 없었다. 고문이 의심되지만 테러리스트의 시신을 반환하지 않는 법안[11]이 통과되면서 이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 수 없게 되었다.

얼마나 심하게 해댔는지 러시아군의 공격 후, 그로즈니 시내는 그냥 녹아버렸다(...)

아예 대놓고 열압력탄두나 신형 다연장로켓 등등 , 신무기 실험장으로 썼다고 봐도 될 정도. 군에 채택되지 않은 프로토타입 총기도 러시아 특수부대가 극소수로 사용했다. AEK-971 같은 총기.

3.3 계속되는 전초전

그러나 체첸 정부 및 체첸군 병력의 도피를 허용하는 바람에 이후에도 전쟁은 지속되었고, 2004년에는 그로즈니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해 아흐마드 카디로프 체첸 대통령과 수행원 수십 명이 사망하는 등, 크고 작은 테러가 발생했다. 현 람잔 카디로프 체첸 대통령은 최근 인터뷰에서 "나는 소련을 파괴했고 러시아 연방을 무너트리려는 자(서방)들이 반군 뒤에 있음을 공식 선언한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12]

현재까지도 체첸 사태는 해결되지 않고 있으며 체첸 내부도 러시아에 충성하는 친러계인 체첸 공화국과 독립을 희망하는 이츠케리아 체첸으로 나뉘었다. 물론 이츠케리아 체첸이 구 체첸 정부. 그나마 서방의 동정 여론과 이슬람권의 지원 속에 저항을 지속하지만 샤밀 바사예프가 또 2004년 베슬란 학교 인질사건을 통해 러시아에 명분을 제공하자 깜짝 놀라서 체첸인들과 지원 세력들이 등을 돌려버렸고, 전 대통령이자 저항세력의 지도자인 아슬란 마스하도프가 2005년 전사, 샤밀 바사예프가 2006년 잉구세티야에서 러시아 특수부대에게 사살되면서 적어도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체첸 저항세력은 완전히 무력화되었다. 이후 도쿠 우마로프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실권을 잡으면서 사실상 체첸 정부는 소멸되었다. 러시아 정부는 승리를 선언하며 자축했다. 특히 제2의 반란을 막고 체첸인들을 포섭하기 위해 반군과 반러시아 인사만 족쳤지 무고한 체첸인들에 대한 폭력과 처벌은 엄히 금했다.

체첸 반군 중 일부는 터키로 피신 중인데, 당연히 러시아가 가만 놔두지 않고 암살팀을 보내 3명을 사살하자 터키 경찰에게 신변보호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기사.

경제적으로 매우 어렵고[13] 러시아의 입김이 커서[14] 체첸 민중들은 불만이 많으며, 러시아에게 아첨하면서 독재 중인[15] 람잔 카디로프를 크게 증오한다고 한다.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에 참가하는 체첸 연고지팀인 데렉 그로즈니에 막대한 투자(물론 2000년대 와서 더 막대한 투자를 하는 안지 같은 러시아 구단들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지만)를 하고 있는데, 정작 리그 성적은 중하위권에 맴돌고 있다. 덕분에 《포포투》지와의 인터뷰에서 카디로프가 데렉 그로즈니가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노린다고 한 발언은 희대의 코미디라며 웃음거리가 된 바 있다.

하지만 카디로프가 권력을 잃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기존 체첸 정부가 이미 붕괴되면서 람잔 카디로프와는 비교도 안되는 이슬람 극단주의 집단으로 대체된 상태고, 게다가 카디로프는 비록 독재자이긴 하지만 특유의 권력 장악[16] 및 여론 판단 능력으로 극도의 혼란에 시달리던 체첸인들에게 어쨌거나 안정을 가져다 준 인물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의 후원자는 다름아닌 러시아 연방 전체의 지배자인데 후원자의 눈 밖에 나는 것을 감수하며 람잔 카디로프에게 반기를 들 사람은 거의 없다. 감당 못할 큰 사고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 종신 통치를 할 듯하다.
  1. 체첸인과 러시아인의 인종갈등은 1785년부터 현재까지 지속 중이다.
  2. 두다예프는 참고로 소련 붕괴 이전에는 소련공군의 전략 폭격기 사령관이라는 상당한 위치에 있었으며, 체첸에서 독립 운동의 대부로서 활동하기 전 에스토니아 주둔 장거리 폭격군의 사령관으로 지내며 에스토니아어를 배우고 현지인들과 큰 친분을 나누다가 소련 붕괴 당시 에스토니아에서도 반소 봉기가 터지자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라는 명령을 묵살하고 에스토니아의 독립이 유혈 사태 없이 이루어지는데 큰 공헌을 했다. 지금도 그가 근무했던 에스토니아 제2의 도시인 타르투에는 그가 집무실로 쓰던 호텔방이 박물관화 되어 보존되어 있고,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는 등 두다예프를 크게 존경하고 감사해 하고 있다.
  3.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군이 대규모 감축을 진행하면서, 예전과 같은 군단-사단 편제가 대부분 사라지고 필요한 경우 각 지역의 소규모 부대들이 그때그때 뭉치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제승방략 체제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4. 반응장갑 대신 벽돌을 넣었다고 한다.
  5. 두다예프를 대신할 친러 계열의 정부군.
  6. 공통점은 전면전 상황에 우선 대비해야 할 만큼 강력한 적과 대치한다는 것이다.
  7. 냉전 기간만 해도 소련 눈치만 보던 영국, 프랑스, 일본과 같은 선진국들한테 경제 제재압력을 당하는 대굴욕을 겪었다고 한다. 하지만 1999년 새로 당선된 어떤 러시아 대통령이 그 굴욕을 갚는데...
  8. ~ or bust라는 영어 표현은 ~ 아니면 아무 의미없다 내지는 무조건 ~ 이란 의미기 때문에 Grozny or Bust는 러시아군의 진격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하면된다.
  9. 똑같이 북캅카스 전투종족 국가임에도(...) 옆동네 체첸과 달리 다게스탄은 예전부터 러시아 정부와 딱히 문제 없이 잘 지냈었고 샤밀 바사예프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침공 이후에는 다게스탄과 러시아 연방정부의 사이가 더 좋아졌다. 거기다 복잡한 민족 분포에도 불구하고 "자마트(djamaat)" 라 불리는 전통적인 정치 체제 덕에 어느 한 민족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는 것도 견제되는 등 정치 면에선 오히려 체첸보다 나았다. 그 대신 이 동네는 캅카스 에미레이트의 하부 조직인 빌라얏 다게스탄이라는 극단주의 또라이들이 난장판을 치고 있다는 게 함정(...) 2013년 볼고그라드 폭탄 테러도 이들이 주범이었다. 어느 정도냐면 이놈들은 캅카스 에미레이트 따위 쌩까고 지들 맘대로 ISIL에 충성 맹세를 할 정도다.
  10. 아슬란 마스하도프가 어떻게든 제어하려 했으나 애시당초 군권은 샤밀 바사예프가 잡고 있었기 때문에 소용 없었다.
  11. 참고로 러시아는 체첸 저항세력을 테러리스트로 취급한다. 특히 러시아 같은 비민주 국가에서는 고문이 일어난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
  12. 물론 헛소리다. 애시당초 서방은 체첸 반군에게 동정적이었을지언정 적극적인 지원은 하지 않았고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잡은 뒤에는 테러단체 지정까지 검토하는 상황이었다.
  13. 2009년 체첸의 PPP 기준 1인당 GDP는 2,792$로 산유국임에도 인도베트남보다도 낮았다. 다만 경제사정은 카디로프 이전 두다예프 시절이 훨씬 엉망이었다. 두다예프는 개인의 카리스마나 군사적 역량은 뛰어났지만 근대 국가수반으로써의 역량은 형편없었다. 독립 이후 체첸은 석유시추, 정제산업의 중심인 러시아인들이 전쟁을 피하여 이탈하는 바람에 기간산업이 마비되고 각 씨족들의 이권 다툼과 납치, 강도, 밀수 등으로 아비규환이었다.
  14. 내전 일으킨 곳이니 신경 안 쓸 수가 없다.
  15. 물론 러시아 정부의 눈치를 보며 일시적인 자치권만 받은 독재다.
  16. 두다예프나 마스하도프도 어쩌지 못했던 유력 가문들을 가볍게 정리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