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샹달 전투 | ||
제1차 세계대전 중 서부전선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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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
1917년 7월 31일 ~ 1917년 11월 6일 | ||
장소 | ||
벨기에 파스샹달 | ||
교전국 | 독일 제국 | 대영제국[1] 프랑스 제3공화국 |
지휘관 | 에리히 루덴도르프 프리드리히 식스트 폰 아르민 루프레흐트 왕자 | 더글러스 헤이그 후버트 고프 허버트 플러머 프랑수아 앙트완 |
결과 | ||
연합군의 전술적 승리 | ||
병력[2] | 77~83개 사단 | 영국군 50개 사단 프랑스군 6개 사단 |
피해규모 | 사상자 21만 ~ 41만 명 포로 2만 4,065명 | 사상자 20만 ~ 44만 8,614명 |
목차
1 개요
영어 : Battle of Passchendaele(패젼데일 전투)
프랑스어 : Bataille de Passchendaele
베르됭 전투, 솜 전투와 함께 제1차 세계대전 중 최악의 전투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 1917년 7월 31일부터 동년 11월 6일까지 벨기에의 파스샹달이라는 곳에서 대영제국, 프랑스 제3공화국의 연합군과 독일 제국군 간에 벌어진 전투. 1914년부터 1918년까지 5번 동안 계속되는 이프르 전투 중에서 제3차 이프르 전투를 가리키는 이름이기도 하다. 베르됭 전투, 솜 전투 같은 소모전의 극치를 달리는 네임드급 전투에 가려 그렇게 인지도가 높은 전투는 아니지만 파스샹달 전투도 만만찮은 인계의 지옥도였다.
2 배경
조제프 조프르의 뒤를 이은 프랑스군 사령관 로베르트 니벨르가 내놓은 니벨 공세(1917년 4월~5월)[3]가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실패한 무의미한 소모전이 되자, 프랑스군은 전투 의지를 상실하였고, 영국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는 영국 원정군만으로 공세에 나서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 판단했다.
하지만 영국 원정군 사령관 더글러스 헤이그 장군은 결정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고 곧이어 있을 미군의 참전과 더불어 주도적인 압박에 실패할 경우 프랑스군이 독일군에게 치명타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더불어 1918년에 독일군이 패배시키기 위해서라도 독일의 전력을 반드시 소모시켜야 했다.[4]
헤이그는 플랑드르에 위치한 항구들을 일소한다는 이른바 ‘북부 작전’을 계획했고 계획의 타당성을 설명하여 유보트로 골치를 앓던 제1해군경 젤리코에게서 강력한 지지를 받았으나, 로이드 조지 전시내각은 7월 21일이 되어서야 최종 승인을 내렸다. 설상가상으로 헤이그는 만약 인명 피해가 공세로 거둘 수 있는 실질적인 성과를 상회할 경우에는 공세를 중지시킬 수 있다는 통지를 받았다.[5]
3 전개
3.1 영국군의 상황
헤이그는 '북부 작전'에 대한 승인을 받았지만 뉴포르 일대에서의 독일군의 선제 포격과 공격으로 '북부 작전'은 연기되었고 곧 폐기되었다.
이때 헤이그는 결정적인 두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하나는 제5군 사령관 후버트 고프 장군에게 본 공세의 핵심 역할을 맡김으로써 제5군이 공격 위치로 이동할 때까지 ‘북부 작전’ 계획의 실행을 지연시킨 것이고, 또 하나는 주공을 시작하기 전에 겔루벨트 고지대의 서부 지역 점령 작전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술 더 떠 헤이그가 구체적인 공세 계획 수립을 맡김에 따라 영국 원정군은 재앙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고프가 세운 지나치게 야심찬 계획들은 앞서 언급한 헤이그의 실수들이 가져올 악영향을 더욱 중폭했다.
6월 말, 기본적으로 신속한 돌파 작전을 구상하고 있던 헤이그는 실제 공격 개시일이 다가오자, 갑자기 방향을 바꿔 일련의 제한된 공격을 순차적으로 감행하는 단계적 공세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헤이그는 군사령관들과 작전 계획에 대해 논하는 것을 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렇게 상하급자 간의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고프는 여전히 헤이그가 무엇보다 먼저 신속한 돌파를 원한다고 생각했다.
고프가 최종적으로 내놓은 제안은 자신이 지휘하는 제5군을 동원하여 공세 첫날에 6,000야드라는 서부전선 기준으로는 엄청난 거리를 진격해 들어가 독일군 포병대의 주요 집결지를 지나 독일군의 제3방어선까지 진출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독일군의 저항이 약할 경우 공격 부대는 제3방어선 후방의 목표를 향해 진격을 계속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쯤에서 2, 3일 정도 공세를 중지한 후 그 틈을 이용하여 공세 나흘째에 예정된 파스샹달 능선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포병대를 전방으로 추진할 계획이었다.
헤이그는 현장 지휘관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고프는 자신의 비현실적인 계획을 그대로 밀어붙일 수 있었다. 헤이그는 분명 고프에게 겔루벨트 고지대를 장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주지시키기는 했지만, 고프의 계획이 고지대의 점령에 초점을 충분히 맞추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적하고 재차 겔루벨트 고지 점령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영국군은 다시 한 번 모호한 목표물들에 대한 잘못된 계획을 갖고 대규모 공세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헤이그가 선택한 지역은 공세를 펼치기에는 적절하지 못한 장소였다. 영국군의 공격 대상 지역은 거의 대부분 독일군이 감제하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공격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독일군 포대를 제압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장기간에 걸쳐 엄청난 포격을 퍼부어야 했다. 다시 말해 제3차 이프르 전투에서 영국군은 이제 거의 구식이 되어버린 장기간의 연속 포격 전술을 다시 한 번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몰렸던 것이다.
한편 이프르 지역은 원래 삼림 지대였으나, 계속되는 전쟁의 여파로 철저한 진흙 수렁이 되어 있었고 이것이 재앙의 원인이 된다.
▲ 영국군은 이 수렁을 건너 독일군과 싸우러 가야 했다.
영국군은 2,299문의 포를 5야드에 1문씩 전개했는데, 이는 솜 전투 때 배치한 포의 10배를 넘는 수량이었다. 허버트 고프가 지휘하는 제5군은 1마일에 1개 사단을 촘촘하게 배치했으며, 근위사단과 제15스코틀랜드사단, 하일랜드 사단이 배속되어 영국 근위사단과 독일 근위사단이 대면한 이프르 북쪽 필켐과 1914년에 첫 번째 영국 원정군에 피신처를 제공했던 이프르 남쪽의 박살 난 나무 그루터기만 남은 생츄어리 숲(Sanctuary Wood) 사이에 밀집하여 정렬했다. 그리고 전투 지역에 총 508대였던 항공기 중 180대가 제5군에 할당되었다. 이들 항공기의 역할은 전선 위에서 독일군 관측 기구의 한계선인 5마일 높이까지 제공권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3.2 독일 제국군의 상황
프리드리히 베르트람 직스트 폰 아르민[6]이 이끄는 독일 제4군은 소규모 병력이 지키는 전방 방어 지대 후방에 구축된 콘크리트 토치카와 요새화된 농장들을 중심으로 단단한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토치카들은 지상에 건설되어 있었고, 교차 사격으로 서로를 지원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8인치 곡사포 이하의 포를 가지곤 도저히 파괴할 수 없을 만큼 두꺼웠다. 3년 간의 전쟁으로 완전히 늪지대가 되어버린 이프르 지역에서 독일군은 참호를 더 깊게 파고 철조망을 확장시켰으며 때로는 무너진 건물에 토치카와 벙커를 설치하여 작업조에게 엄폐물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시설에 완벽한 위장을 제공했다.
그러나 메신에서 영국군이 거대 지뢰를 이용해 독일군에 큰 피해[7]를 입히자 독일군은 연합군의 공세에 두려움을 가져 플랑드르 선으로 전선을 후퇴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때 6월 13일 특급 방어 전술가로 알려진 폰 로스베르크 대령이 참모장으로 부임하게 되었고, 재정비를 통해 플랑드르 진지는 서부전선에서 지리적으로, 군사적으로 가장 강력한 진지로 변모하게 되었다.
완성된 플랑드르 진지는 9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전방에는 방어군 사단의 1선 대대들이 3겹의 참호선에 은신해 있었고 그 앞으로 포탄이 떨어져 생긴 구덩이에 청음초[8]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그다음 전투 지대는 기관총 초소들이 차지했는데, 1열의 토치카 선이 지원했고, 마지막 후방 전투 지대에는 지원 포대 진지 사이에 산재한 콘크리트 벙커에 반격을 맡을 사단들이 숨어 있었다.
독일군은 진지를 방어하는 데 2개의 별개 대형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했으며 이에 따라 사단들을 재조직했다. 최초 공격을 견뎌내야 했던 참호 주둔군은 숫자가 줄어 몇 개 중대와 대대로만 구성되었다. 그 뒤 후방 전투 지대에는 반격 임무를 맡은 사단들이 배치되었고 그 임무는 1선 부대들의 고정 방어와 국지적 역공에 의해 적군 공격이 중단되면 전진하는 것이었다. 플랑드르 진지 방어군은 1917년 7월에 10개 사단으로 이루어졌다. 제3근위사단과 제11사단 같은 강하고 훈련이 잘된 정예 부대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11km를 조금 넘는 전선에 1556문의 야포와 중포가 배치되었다.
3.3 공세 시작
파스샹달 전투에서 점령해야 할 중요 지점은 이프르 남동쪽의 겔루벨 고지였다. 영국군 전선에서 2마일 떨어진 이 고지는 주변 저지대보다 약간 높은 곳으로 관측에 유리했다. 그리고 겔루벨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열닷새동안 400만 발 이상을 퍼부은 포격은 7월 31일 직전에 절정에 달했다.
7월 31일 오전 3시 50분, 고프의 제5군 9개 사단은 영국 제2군과 프랑스 제1군의 일부 포병대를 비롯해 야포 2,936문의 포격 지원을 받으며 공격을 시작했다. 제5군의 좌측에서는 프랑스 제1군의 2개 사단이 스테인스트라트와 부싱어 사이의 지역을 공격해 들어갔다. 영국 제2군도 제5군의 우측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공세 초기 성과는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필켐 능선의 대부분과 능선의 중요 관측소들, 그리고 겔루벨 고지대의 서쪽 끝단이 영국군의 손아귀에 떨어지면서, 독일군은 1915년 5월 이래 장악해 온 유리한 고지들을 상실했다. 플루머의 병사들도 홀레베커와 리 서쪽의 독일군 전초선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며, 프랑스군은 스테인스트라트를 점령하고 빅스호터 외곽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핵심 공격 목표인 겔루벨 고지대에서 영국 제2군단은 독일군의 제1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악전고투를 벌어야 했다. 영국군은 전차까지 투입해 공격을 시도했으나 제2군단에 할당된 48대의 전차 중 공격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은 단 19대뿐이었고, 이마저도 호허 동쪽의 메냉 가도를 감제하고 있던 거대한 토치카에 설치된 독일군 야포의 먹이가 되고 말았다. 제2군단의 공격 기세가 꺾이면서 제5군의 공격 전면은 사실상 절반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오후부터 내리기 시작한 부슬비가 오후 4시가 지나자 폭우로 바뀌면서 시야 범위도 크게 줄어들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반격에 나선 독일군이 영국군을 몰아내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겔루벨로 전진하는 제18군단과 제19군단 병사들의 머리 위로 포격이 가해졌고 포격은 선두 부대가 급히 탈출해야 할 정도로 맹렬했다. 독일군의 포탄이 빗발치는 가운데 호우가 쏟아져 파괴된 전투 지역은 곧 걸쭉한 진창으로 바뀌었다.
8월 2일이 되어서도 악천후가 계속되자 영국군은 공세를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공세 초반, 제5군은 3,000야드 정도를 전진했지만, 고프가 공세 첫날의 목표로 정한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가야 할 길은 멀기만 했다. 호우가 계속되자 영국군은 8월 중으로는 더 이상 제대로 된 대규모 공세를 펼칠 수가 없었다. 제5군은 8월 16일 랑에마르크를 점령하는 데는 성공했고 적의 주의를 분산시킬 목적으로 랑스 근처의 탄광 지대에 캐나다군 군단을 투입했다. 겔루벨 고지대를 점령하려는 두 차례의 시도는 메냉 가도에 근접한 인버네스 숲과 글렌코스 숲에서 격전을 벌인 끝에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겔루벨 고지에 일련의 성과 없는 공격을 퍼부었지만 얻은 땅은 없었고 인명의 손실은 커졌다.
8월 25일, 헤이그는 뒤늦게 작전 입안 단계에서 고프에게 지휘를 맡긴 것이 실수였음을 인정하고 전체 전투의 지휘와 제2군단의 전선을 제2군 사령관 후버트 플러머 장군에게 넘겼다. 헤이그는 플러머에게 3주의 시간을 줄 테니 다음 단계의 공격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본국에서 내려오는 엄청난 압력의 공세 중지 명령을 자기 선에서 최대한 막아 내었다.
7월 31일에서 8월 3일 사이에 제5군은 전사자와 행방불명자가 7,800명이라고 보고했고, 제2군은 1,000명 이상으로 보고했다. 부상자를 포함한 총 사상자는 프랑스 제1군의 사상자를 더하여 약 3만 5000명이었고, 독일군도 비슷한 손실을 입었다. 그렇지만 독일군은 사활이 걸린 땅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었고 반격 사단을 조금도 투입하지 않았다. 바이에른 왕국의 루프레흐트 왕자는 7월 31일 저녁 일기에 "결과에 매우 만족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루프레흐트는 희생이 얼마나 커지든 전장이 얼마나 진창이든 계속해서 공격하겠다는 헤이그의 결의를 알지 못했다.
3.4 연합군의 승리
젋고 성급한 성격을 지닌 후버트 고프와 다르게 허버트 플러머는 신중했으며 자신이 맡은 병사들을 걱정했다. 플러머는 2년 동안 이프르 구간을 지휘했으며, 위험 장소를 모조리 알고 있었고 사병들의 복지를 걱정하여 병사들로부터 1차 대전의 장군 중에서는 가장 큰 사랑을 받았다. 이제 플러머는 다음 단계를 조심스럽게 준비하려면 휴식이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플러머는 동시에 이 기회를 이용해 보다 유기적인 공격 전술을 도입했다. 공격 시 먼저 보병들이 산병선을 이루며 전진해 나가면 방어 거점과 토치카를 우회하기 위해 느슨하게 배치된 소규모 보병 팀들이 그 뒤를 따를 예정이었다. 각각의 팀은 밀스 수류탄 투척병과 루이스 기관총 사수, 총류탄 사수들을 보유하고 독립적인 작전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이 한 차례 독일군 방어선을 뚫고 나가면 소규모 부대들이 후속하여 앞서 전진한 부대들이 남겨 놓은 잔적을 소탕하고 선두 공격 부대를 지연하는 후방 부대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 공격 부대 뒤에는 항상 보병 예비대가 배치되어 혹시 있을지 모르는 독일군의 반격에 대비했다. 이들은 반격에 나선 독일군에게 치밀하게 계획된 포격과 기관총 탄막 사격을 집중적으로 가할 예정이었다.
플러머는 제한된 목표물에 대한 치밀하고도 단계적인 공격 전술을 철저히 훈련시켰다. 이러한 전술은 고프가 시도한 것보다 한층 더 더 얕게 독일군 전선을 연이어 침투하는 형태가 될 것이었다. 이 무렵 비가 그치고 건조한 날들이 이어지는 등 기상 조건까지 유리해졌다. 공격에 나선 영국군은 9월 20일에서 25일에 걸쳐 벌어진 메냉가도 능선 전투 및 9월 26일에서 10월 3일에 걸쳐 벌어진 폴리곤 숲 전투와 같은 소규모 전투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고 이러한 작전들에 공을 세운 것이 바로 제1안잭군단(Anzac, 호주-뉴질랜드 연합군)이다.
'조금 빼앗고 지킨다' 방식의 플러머의 공격 전술이 큰 효과를 거두면서 이프르 일대의 독일군은 유기적인 종심 방어 체계를 버리고 다시 한 번 더 많은 전력을 동원하여 전방 방어선을 지키는 전술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종심 방어 전술로는 플러머의 공격을 막을 수 없었던 독일군으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구식 방어 전술은 전방 방어선의 병사들이 영국군의 치열한 포격을 고스란히 받아야 한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는 게 문제였다.
10월 4일 제2안잭군단이 플러머의 제3단계 공격에 투입되었다. 이 군단의 목표는 브로드세인더 능선과 겔루벨 고지대의 동쪽 끝단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영국 제10군단은 폴리곤 숲으로부터 최종적으로 독일군에 대한 소탕 작업을 완료했고, 뉴질랜드 사단 역시 그라펜슈타펠을 점령했다. 그러나 주요 목표물을 점령하기는 했지만, 다시 시작된 호우로 인해 전장이 또다시 늪지대로 바뀌면서 영국군은 이러한 성과를 활용하여 전과 확대에 나설 수가 없었다.
11월 6일 마침내 캐나다 군단이 파스샹달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파스샹달 마을은 이 무렵 거대한 돌무더기로 바뀌었고, 11월 10일, 마침내 플랑드르 공세가 종료되었다. 무지막지한 피해를 양 측에서 입었지만, 솜 전투보다 훨씬 적은 사상자였고, 1일 평균 사상자 수도 1917년 초의 아라스 공세보다 훨씬 적었다.
4 전투에 대한 의문
분명 영국군은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목표달성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 피해도 솜 전투와 아라스 전투에서의 엄청난 피해보다 크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계속되는 공세가 굳이 필요했던가에 있었다.
처음 세 차례의 공격, 특히 브로드세인더 공격은 독일군에 강력한 타격을 입혔다. 플러머의 밀집된 포대는 10월 4일에 지나치게 전방으로 집결한 독일군 반격 사단들을 습격했고 많은 사상자를 낳게 했다. 특히 제4 근위사단이 큰 타격을 입었다. 그 결과 독일군은 다시 한 번 전선 방어 체계를 다듬기로 결정했다. 브로드세인더 공격 이전에 독일군은 보호 탄막 뒤에서 나타나는 영국군 보병을 타격하기 위해 반격 사단들을 전투 지대에 가깝게 배치했다. 그러나 독일군이 영국군 포대의 한층 더 강하고 깊은 포격에 노출되는 결과만 초래하자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반대의 명령을 내렸다. 전선은 다시 적은 병력으로 지키고 반격 사단들은 후방 멀리로 내려와 그곳 진지에서 강력한 포격과 탄막으로 계획적인 되치기를 준비할 수 있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아야 했다.
진창 위에서 수행한 작전은 본질적으로 마치 협의한 듯이 서로 똑닮았다. 공격군은 엄청난 포격으로 방어군을 기진맥진하게 한 다음 포탄이 떨어진 좁은 지대를 점령한다. 그 다음에는 방어군이 반대 방향에서 잃은 땅을 되찾을 수 있기를 바라며 같은 과정을 되풀이 한다. 결정적인 승리가 목적이라면 이는 완전히 쓸데없는 방식이었다.
대전의 기술적인 측면에 집착하는 역사가는 야포 포탄의 신관이나 박격포 사거리 발전의 간과된 의미를 언제나 강조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그 점에서 가장 열성적인 역사가조차도 헤이그가 브로드세인더 이후에 전투를 중단했어야 했다고 인정한다. 헤이그는 강경하게 반대의 결정을 내렸다.
헤이그는 브로드세인더를 공격하기 전에 군 지휘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적은 비틀거리고 있으며 ....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면 결정적인 결과를 얻을 것이다."
그 직후 로이드 조지가 이프르에서 입은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프랑스로 갈 증원군의 숫자를 은밀히 제한하려 했을 때, 헤이그는 참모총장 로버트슨에게 이렇게 썼다.
"영국군 홀로 대공세를 수행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공세를 최대한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해서 .... 모든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데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10월 12일 뉴질랜드 사단과 오스트레일리아군 제3사단은 이프르 동쪽 해발 45m 고지에 남은 파스샹달의 한 부분에 도달하려 했다. 그곳 독일군의 2차 플랑드르 진지 참호선과 토치카는 영국 원정군과 적군 후방 사이에 남은 마지막 장애물이었다. 헤이그는 10월 9일 종군 기자 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실제로 적군 방어선을 뚫고 있다. 적군은 온몸으로 우리에 맞서고 있다."
독일군은 분투하여 제2안잭군단을 격파하고 안잭군단은 3000명의 사상자를 입었다. 제2안잭군단을 헛된 희생으로 내몬 헤이그는 캐나다 군단에 의존했고, 캐나다 군단을 지휘한 장군 아서 커리 경은 이프르에서 병력을 잃고 싶지 않아 했으며, 헤이그가 요구한 공격은 1만 6000명의 사상자를 낼 것이라 예상했다. 자국 정부에 호소할 수 있고 명령을 거부할 수도 있었지만 결국 캐나다 군단은 헤이그의 명령에 따라 전투에 참여했고 제1차 플랑드르 진지를 돌파하여 500야드를 전진했고, 그 구간을 방어하던 제11바이에른 사단에 큰 피해를 입혔지만, 아서 커리 경의 예상대로 사상자 1만 5,634명의 피해를 입었다.
5 영향과 결론
파스샹달 전투는 동부전선에 치중하던 독일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이제 더 이상 독일군에게 또 하나의 베르됭 공세를 전개할 여유도 없었으며, 앙리 필리프 페탱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슈맹데담 근처에서 10월 23일 공세를 실시하여 5km 정도의 진격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 이프르에서 99일 동안 영국군이 많은 노력을 쏟은 것과 대등한 성과였다.
영국의 역사가 제임스 에드먼즈는 파스샹달 전투를 끊임없이 재개한 헤이그를 두둔했다. 이프르 전선에 88개의 독일군 사단을 묶어두었고, 공세에 나선 연합군 사단은 6개의 프랑스 사단과 영국군과 자치령 사단 43개 사단이라는 것이 그 논지다.
문제는 이프르 사단에 있던 독일군은 당시 전체 독일군의 1/3수준에 불과했고 헤이그의 사단은 그 절반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연합군의 연이은 공세로 전쟁 초와 다르게 적정 인원이 턱없이 부족했으며, 농장과 공장에서 병적에 오를 인원들을 모조리 올렸음에도 그 수가 부족하여 병자와 약자, 노령자들을 신병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파스샹달 전투로 청년들은 더욱더 그 수가 많이 줄어들었다.
연이은 공세로 사기와 전력이 거의 한계에 다달은 영국군은 사상 최초의 전차 집중 운용 전투인 캉브레 전투를 치르게 된다.
6 답이 없는 파스샹달의 환경
상술했듯 평범한 초원이던 파스샹달 지역은 3년 간의 전쟁으로 인해 완전히 수렁으로 변했다. 병사들은 그 지역을 이동하기 위해 나무 판자로 길을 만들었고. 그곳으로 끊임없이 포탄이 날아들었다. 포탄을 피하기 위해 병사들은 길 옆의 진창으로 뛰어들었고 적지 않은 수가 빠진 진창에서 다시는 나오지 못했다. 또한 죽지 못한 부상자들이 끊임없이 신음과 비명을 질렀고, 구덩이 속으로 차오른 물들은 부상자, 때로는 운이 없는 몸이 성한 병사들까지도 익사시켰다. 그리고 살아남은 병사들은 그 신음소리를 들으며 상당히 괴로워했다. 파스샹달 전투의 상당수의 행방불명자들이 이렇게 포탄 구멍이 속에서 익사한 자들이 차지했다. 그리고 연이은 포격으로 시체들을 갈아 엎고 또 그 위에 전사자와 부상자들이 쓰러져 죽어가는 인외마경으로 변했다.
7 기타
8 출처
-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 제1차 세계 대전 1914~1918 (피터 심킨스, 제프리 주크스, 마이클 히키 지음, 플래닛 미디어)
- 1차세계대전사 (존키건 지음, 청어람 미디어)
- ↑ 당시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던 호주, 네덜란드, 캐나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이 참전하였다.
- ↑ 정확한 수치는 양측 모두 불명이다.
- ↑ 엔 강에 구축된 독일 제국군 방어선을 뚫기 위한 프랑스군의 대규모 공세로서 일부 지역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18만 7000명의 프랑스군 사상자가 나왔고 곧 대규모 항명 파동이 일어나 니베르가 물려나고 앙리 필리프 페탱이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된다.
- ↑ 1917년 6월에 있었던 메시느에서의 작은 승리로 독일군이 약화되었다는 착각을 한 탓도 있었다.
- ↑ 로이드 조지의 이런 조치는 타당한 측면이 있었다. 지난 3년 간의 전쟁으로 소득은 적은 데 반해 갈수록 인명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느는 바람에 인력 동원에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고 게다가 미국 역시 슬슬 참전하는 시기에 벌어지는 성공을 확신하기 어려운 작전에 큰 피해를 감수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로이드 조지는 평소 의회와 당을 휘어잡던 모습과 다르게 "계속해서 적과 교전할 필요가 있다"며 작전에 자신만만한 헤이그를 말로 제압하는 데 힘겨워 했고 결국 견해를 받아들였다.
- ↑ 독일 국방군 소속 중장 한스 하인리히 직스트 폰 아르민(Hans-Heinrich Sixt von Armin)의 아버지. 여담으로 이 사람은 독소전쟁 중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제113보병사단장이었고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와 같이 항복하였다.
- ↑ 영국군 사상자가 2만 5000명이 나왔고 독일군 사상자는 2만 3000명이 나왔다. 이중 1만 명은 지뢰 폭발 당시 아예 증발하거나 토사에 매몰되었다.
- ↑ 적의 움직임을 눈으로 볼 수 없는 흐린 날씨나 밤에 소리를 들어 적의 행동을 탐지하려고 전방에 둔 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