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후연

위서 「제하후조전(諸夏侯曹傳)」
하후돈하후연조인조홍조휴조진하후상


夏侯淵
(? ~ 219)

1 개요

후한 말의 인물. 조조 휘하의 장수. 하후돈의 족제, 조조의 동서. 는 묘재(妙才).

조조의 친척 장수 4인방인 하후돈, 하후연, 조인, 조홍 중 조인과 더불어 군의 상장 노릇을 제대로 수행해주었다.

2 정사

2.1 초기 생애

조조가 고향집에 있을 때 일찍이 현의 관리에게 일을 저질렀는데 하후연이 중죄를 대신 떠맡았고 조조가 방책을 내어 그를 구하여 죄를 면한 적이 있다.

위략에 따르면 연주, 예주에 대란이 일었을 때, 하후연은 기근 때문에 어린 아들을 버렸으나 죽은 아우의 딸(하후씨)은 살렸다.

조조가 군을 일으키자 별부사마, 기도위로 삼아 수행했고 진류태수, 영천태수로 승진했다.

2.2 관도대전

원소와 관도에서 싸울 때는 독군교위의 직을 맡았다. 원소가 격파되자 연주, 예주, 서주의 군량을 감독했는데 식량이 모자랄 때 하후연이 계속 군량을 이어서 보내주어 군이 다시 분발할 수 있었다.

2.3 창희 토벌

장료전에 따르면 장료는 하후연과 함께 서주 동해군에서 창희를 포위했는데, 여러 달이 지나 군량이 소진되자 회군 문제를 논의하게 되었다. 장료가 하후연에게 말했다.

며칠 사이 매번 포위된 곳을 순시할 때마다 창희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들이 화살을 쏘는 일이 드물었소. 이는 필시 창희가 마음속으로 망설이는 게 있어 전력을 다하지 않는 것이오. 내가 그와 얘기를 나눠볼까 하는데 어쩌면 그를 달랠 수도 있을 것이오.

이에 창희는 투항을 허락했다.

위략에 따르면 200년, 하후패의 종매(하후씨)가 13살일 때 고향 집에 있었는데, 땔나무를 줏으러 나왔다 장비에게 사로잡혔었다. 장비는 그녀가 양가의 딸임을 알아채고 아내로 삼아 딸을 낳았는데 뒤에 그 딸이 유선의 황후가 되었다.

창희가 모반하자 우금을 보내 공격하게 했는데 이기지 못하자 다시 하후연을 보내 우금과 힘을 합치게 했다. 마침내 창희를 공격하여 10여 둔영을 항복시켰고 창희는 우금에게 나아가 투항했다.

우금전에 따르면 창희는 우금과 교분이 있었으므로 우금에게로 나아가 항복했다. 제장들은 모두 창희가 이미 항복했으므로 응당 조조에게로 호송해야 한다고 했다. 우금이 말했다.

포위당한 후에 항복한 자는 사면하지 않는다 했소. 비록 창희가 옛 벗이긴 하나 나 우금은 절개를 잃을 순 없소!

직접 창희의 형을 집행했는데 눈물을 흘리며 참수했다.

하후연이 돌아오자 전군교위에 임명했다.

위서에 따르면 하후연은 장수가 되어 행군이 매우 빨라 항상 적이 예상치 못한 곳에 나타났으므로 군중에서 이를 두고 말했다.

전군교위 하후연은 3일에 5백리, 6일에 천리를 간다.

2.4 서화 토벌

청주 제남국, 청주 낙안국의 황건적 서화, 사마구 등이 성을 공격하여 관원을 살해했다.

여건전에 따르면 제남군의 황건군 서화 등은 도처에서 관리를 죽이고, 성읍을 공격하여 점거했다. 여건은 병사를 이끌고 하후연과 연합하여 그들을 공격했는데, 앞뒤로 수십 차례 싸워 머리를 베거나 포로로 잡은 수가 수천 명이나 됐다.

하후연이 연주 태산군, 청주 제국, 청주 평원군의 군사들을 이끌고 공격하여 대파하고 서화를 참수하여 여러 현들을 평정했고 그들의 양곡을 거두어 군사들에게 공급했다.

2.5 뇌서 토벌

209년, 하후연을 행령군으로 임명했다. 조조가 손권을 정벌하고 돌아올 때 하후연으로 하여금 제장들을 지휘해 여강에서 반란을 일으킨 뇌서를 공격케 했다.

2.6 상요 토벌

뇌서를 깨뜨리자 또 정서호군으로 서황을 지휘해 태원의 도적을 공격했는데, 20여 둔영을 함락시키고 도적의 우두머리 상요를 참수하고 그 성을 도륙했다.

2.7 관중 평정

무제기에 따르면 211년 봄, 장로가 한중을 점거하니 3월에 종요를 보내 장로를 토벌했다. 조조가 하후연 등에게 하동에서 나와 종요와 합류하게 했다. 이때 관중의 제장들은 종요가 습격하고자 하는 것으로 의심하니, 마침내 마초한수, 양추, 이감, 성의 등과 함께 모반했다.

한수를 정벌하는데 수행하여 위남에서 싸웠으며 주령을 이끌고 유미, 견저를 평정했다. 조조와 안정에서 만나 양추를 항복시켰다.

212년, 조조가 업으로 돌아갈 때 하후연을 행 호군장군으로 삼아 주령, 노초 등을 지휘해 장안에 주둔케 했다. 남산의 도적 유웅을 격파하고 그 무리들의 항복을 받았다. 한수, 마초의 잔당인 양흥을 사례주 우부풍 호현에서 포위하여 무찌르고 양흥을 참수하고 박창정후에 봉해졌다.

마초가 양주자사 위강을 양주 천수군 기현에서 포위하자 하후연이 위강을 구원하려 했는데, 도착하기 전에 위강이 패했다. 기성에서 2백 여 리 떨어진 곳까지 마초가 와서 이에 맞서 싸웠는데 군이 불리했고 견저가 모반하자 하후연은 군을 이끌고 퇴각했다.

214년, 조구, 윤봉 등이 마초 토벌을 도모하자 강서가 노성에서 군을 일으켜 이에 호응했다. 조구 등이 마초를 속여 성을 나가 강서를 공격하게 한 뒤 마초의 처자를 모두 죽였다. 마초는 한중으로 달아났다가 다시 돌아와 기산을 포위했다.

무제기에 따르면 마초가 한양에서 다시 강족, 호인에 의지해 해악을 일으키자 저왕 천만이 모반하고 마초에 호응해 흥국에 주둔했다. 하후연을 시켜 이를 토벌하게 했다.

강서 등이 급히 구원을 요청했는데 여러 장수들이 의논하기를 조조의 절도(節度)를 기다리자고 했다. 하후연이 말했다.

공(조조)께서는 업에 계시니 왕복하는데 4천리 길이오. 회답에 따르려 하다가는 강서 등은 필시 패할 것이니 급히 공격해야 하오.

마침내 이를 실행해 장합에게 보병과 기병 5천을 주어 선두에 서서 진창의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게 하고 하후연 자신은 군량을 감독하며 후미에 있었다. 장합이 위수 가에 도착하자 마초가 강족과 저족 수천 명을 이끌고 장합에 맞섰다. 싸우기도 전에 마초가 달아나니 장합은 진군하여 마초군의 무기를 거두었다. 하후연이 도착했을 때는 여러 현들이 이미 다 항복한 상태였다.

한수는 양주 천수군 현친현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하후연이 공격하려 하자 달아났다. 하후연은 한수의 군량을 거두고 추격하여 양주 천수군 약양현에 이르렀고 한수와 20리 떨어져 있었다. 제장들이 이를 공격하고자 했는데 어떤 이가 말하길 마땅히 흥국성의 저족을 공격해야 한다고 했다. 하후연이 말했다.

한수의 군사가 정예하고 흥국성이 견고하므로 공격하여 급히 함락시킬 수 없으니 장리의 여러 강족들을 공격하는 것이 더 나은 계책이오. 장리의 강족들 다수가 한수군에 있으므로 필시 돌아가 자신의 가족을 구원하려 할 것이오. 한수가 만약 강족을 포기하고 홀로 지키면 고립될 것이고, 장리를 구원하고자 하면 관병(官兵)과 들판에서 싸워야 하니 반드시 사로잡을 수 있소.

이에 하후연은 독장(督將)을 남겨 군수물자를 지키게 하고 경무장한 보병과 기병으로 장리에 이르러, 강족의 둔영을 공격해 불태우고 많은 수의 무리들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한수의 군중에 있던 강족들은 각기 자신들의 종족의 부락으로 돌아가니 과연 한수는 장리를 구원하였고 하후연 군과 진영을 벌여 대치했다.

제장들이 한수의 병력이 많음을 보고 이를 꺼려 영채를 구축하고 참호를 만든 뒤 싸우려 하자 하후연이 말했다.

내가 천리를 이어 싸워왔는데 지금 다시 영채와 참호를 만들면 병졸들이 피로해지니 오래 견딜 수 없소. 적이 비록 그 숫자가 많으나 쉬운 상대일 뿐이오.

그리고는 북을 울리며 진격해 한수군을 대파하고 대장기를 빼앗아 약양으로 돌아왔다. 진군하여 흥국성을 포위하자 저족의 왕 천만은 마초에게로 달아나고 남은 무리들은 투항했다. 군을 돌려 양주 안정군 고평현의 도각(흉노)을 공격하니 모두 흩어져 달아났고 그들의 양곡과 우마를 거두었다. 이에 하후연에게 절(節)을 내렸다.

무제기에 따르면 당초 농서의 송건이 하수 평한왕을 자칭하고 양주 농서군 포한현에서 무리를 끌어모아 연호를 고치고 백관(百官)을 두어 30여 년이 흘렀다. 하후연을 보내 흥국으로부터 이를 토벌하게 했다.

당초 양주 농서군 포한현의 송건이 양주의 혼란을 틈타 하수 평한왕을 자칭했었다. 조조는 하후연을 보내 제장들을 지휘해 송건을 공격하게 했다. 하후연이 포한에 도착해 포위한 지 한 달 남짓 만에 이를 함락시키고 송건과 그가 두었던 승상 이하 관원들을 참수했다. 하후연은 별도로 장합 등을 보내 양주 농서군 하관현을 평정하고 황하를 건너 소황으로 들어가자 하서의 강족들이 모두 항복하여 농우가 평정되었다.

조조가 조령을 내려 말했다.

송건이 처음 반역한 지 30여 년인데 하후연이 일거에 섬멸하였고 관서를 씩씩하게 걸으니 그가 향하는 곳에 앞을 가로막을 자가 없었다. 중니(공자)가 나도 너와 함께 안회에 미치지 못한다라 한 적이 있도다.

216년, 식읍 3백 호를 더 늘려주어 이전과 아울러 8백 호가 되었다. 돌아와 무도의 저족과 강족을 양주 무도군 하변현에서 공격하여 저족의 양곡 10여 만 곡을 거두어들였다.

2.8 장로 정벌

조조가 서쪽으로 장로를 정벌할 때 하후연 등은 양주의 제장들과 후왕(侯王) 이하 관원들을 이끌고 휴정에서 조조와 합류했다. 조조가 매번 강족과 호인(흉노)들을 접견할 때마다 하후연으로 그들을 두렵게 했다.

유방전 주석 손자별전에 따르면 손자가 대답했다.

예전에 무황제(조조)께서 남정의 장로를 정벌할 때 친히 가셔서 하후연군을 구출할 때 하후연군이 무사히 빠져나온 것을 기뻐한 것입니다.

장로가 항복하고 한중이 평정되었을 때 하후연을 행 도호장군으로 삼아 장합, 서황 등을 지휘해 파군을 평정케 했다. 조조가 업으로 돌아갈 때 하후연을 남겨 한중을 지키게 하고 하후연을 정서장군에 임명했다.

2.9 한중 공방전

당초, 하후연이 비록 여러 차례 싸움에서 이겼으나 조조가 늘 경계하여 말했었다.

장수가 되어 마땅히 겁을 내고 나약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고 항상 용맹에만 의지해서는 안되오. 장수는 본래 용맹을 근본으로 삼으나 이를 실행함에는 지모와 계책을 써야 하는 법이오. 오직 용맹만을 알고 그것에만 의지한다면 일개 필부에 대적할 수 있을 뿐이오.

218년, 유비가 양평관에 주둔하자 하후연들이 제장들을 이끌고 이에 맞섰는데 서로 지키면서 해를 넘겼다.

장합전에 따르면 유비가 주마곡에서 도시 주변을 불태웠다. 하후연이 불을 끄러 다른 길로 왔다 유비와 서로 만났다.

219년 정월, 유비가 밤에 녹각을 불사르며 포위하자 하후연이 장합에게 동쪽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경병을 이끌고 남쪽을 지켰다. 유비가 장합에 싸움을 걸었는데 장합군이 불리했다. 하후연은 지휘하던 병력의 절반을 나누어 장합을 돕게 했는데 유비의 습격을 받아 마침내 하후연이 싸우다 죽었다.

태평어람에 따르면 하후연이 적에게 녹각을 소각당했다. 녹각은 본영 15리 밖에 있었는데, 하후연은 4백의 병력을 거느리고 녹각으로 가서, 병사를 시켜 고치도록 하였다.

법정전에 따르면 법정이 말했다.

가히 공격할 만합니다.

유비가 황충에 명해 높은 곳에 올라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이를 공격하게 하여 하후연군을 대파했고 하후연 등은 참수 당했다.

태평어람에 따르면 적이 산상에서 바라보다가, 계곡을 따라 병사를 내보냈고, 하후연은 병사로 하여금 싸우도록 하였는데, 적이 결국 그 배후를 둘러싸서, 병사는 물러났으나 하후연은 오지 못했다.

2.10 사후

장합전 주석 위략에 따르면 비록 하후연이 도독이었으나 유비는 장합을 꺼린 반면 하후연은 경시했다. 이에 하후연이 죽자 유비가 말했다.

응당 우두머리를 잡아야지, 이 자를 잡아서 무엇하겠는가!

곽회전에 따르면 하후연이 살해된 후, 군대 안의 인심은 불안하였다. 곽회가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탕구장군 장합을 군주로 추천하자, 각 진영은 비로소 안정되었다.

위략에 따르면 하후연이 죽었을 때 장비의 처(하후씨)는 청하여 하후연을 매장했었다.

태평어람에 따르면 하후연은 본디 용병에 능하지 못했기에, 군중에서는 백지장군(白地將軍)이라 불렀었는데, 도독이 되었으면 오히려 직접 싸워도 안되는 것이거늘, 하물며 녹각을 고치는 것임이랴!

시호를 내려 민후(愍侯)라 했다. 시법에서 근심할 민(愍)은 나라가 어려움을 만나게 했거나 근심에 근심을 더한다는 의미이다.

제왕기에 따르면 조방은 조서를 내려 고인이 된 공신들을 조조의 제묘 앞 정원에서 제사지내도록 했다. 그 중에는 하후연도 포함되어 있다.

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하후돈의 동생이라고 나오는데 정사에서 하후연은 그냥 하후돈의 집안 동생일 뿐, 친동생은 아니었다.

하후돈과 더불어 위나라의 더블 펀치로 묘사된다. 그에 따라서 여남의 유비 공격에서는 유비를 아군으로 한 황건적의 잔당인 공도를 토벌하기도 하는 추가 장면이 생겼다. 하지만 하후돈에게 임팩트를 몰아줌에 따라 2인자 포스가 물씬나는 악역 중간보스 정도의 인상 밖에 없다(...).

동작대 완공을 축하하는 행사에서 조휴, 문빙, 조홍이 차례로 과녁에 화살을 모두 명중시켰다. 그러자 장합이 일명 파르티안 궁법이라고 불리는 번신배사를 구사해서 또 과녁에 명중시켰다. 네 발의 화살이 가지런히 홍심에 모여 있었는데 하후연이 나선다. 하후연도 번신배사를 구사하여 활을 쏘아 과녁에 꽂힌 4개의 화살 한가운데를 꿰뚫는 솜씨를 선보였다. 연의에서 하후연이 활쏘는 장면은 이것 뿐임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으로 인해 하후연은 2차 창작물에서 활에 능하다는 설정이 붙게 된다. 덕분에 나중에 황충과는 궁대 궁 대결이 되었다. 참고로 정사에서 하후연의 궁술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연의에서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조조가 관로의 점괘를 듣는 장면이 있는데, 관로는 '삼팔종횡(三八縱橫) 황저우호(黃猪遇虎) 정군지남(定軍之南) 상절일고(傷切一股)'라는 정체불명의 시를 한 수 써 준다. 이는 그냥 해석하면 '3과 8이 종횡하면 누른 돼지(하후연)가 호랑이(황충)를 만나 정군산 남쪽에서 다리 하나가 부러진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3과 8을 곱하면 24, 즉 건안 24년이 되고 누른 돼지는 돼지해인 기해년, 호랑이는 범의 달인 정월을 의미하니 하후연이 죽는 시기까지 암시하고 있다.

또 연의에서 추가된 전공이 있다. 장로를 정벌할 때 하후연과 장합이 선봉으로 가던 중 양앙양임의 기습에 패한다. 다시 안개 속에서 습격하여 양평관 점령에 공을 세우고 창기양임을 벤다.

난폭하며 지모가 모자란 장수로 묘사되어 상당히 안습한 행보를 보여준다. 한중 공방전에서 조조가 '하후연은 성급하니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라는 누군가의 참소를 듣고 글을 써서 하후연에게 보내었다. 글에는 "경의 '기묘한 재주'를 보고자 하니, 신중하게 전투하라."는 대목이 있었는데, 저 기묘한 재주를 한자로 쓰면 묘재(妙才), 즉 하후연의 자다. 오히려 이 글이 기폭제가 되어 하후연이 더 날뛰었다.

황충과의 일기토에선 접전을 이루면서 황충을 물리게 하는 등 촉의 명장들과의 일기토를 했을 때 꿀리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앞서 장합이 장비한테 내리 깨지고 온 것 때문에 장합의 충고를 무시하고 패기있게 기마병 몇기와 진군했지만 황충의 기습을 받아 죽었다.

4 가족 관계

하후연의 아내는 조조의 처제였다. 하후연의 자식, 인척들은 대를 이어 위의 중진으로 존재감을 내비쳤다. 그리고 이들이 우직하게 조씨에게 충성했던 하후연과 달리 저마다 다른 길을 택했다는 점도 흥미로운 요소. 일곱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귀재였다고 전해진다. 이들 중 18세에 요절한 삼남 하후칭과 한중 공방전에서 13세의 나이로 전사한 오남 하후영을 제외하고 장성한 아들은 5명. 맏이 하후형은 조조의 조카사위가 되었고, 차남 하후패는 대촉전선을 담당하다 고평릉 사변으로 정권을 장악한 사마씨에게 위협을 느끼고 촉한으로 망명한다. 하후위와 하후혜는 주목이나 태수까지 역임했고 막내 하후화는 사마씨에게 적극 협력해 서진의 공신이 되었다. 하후연의 조카인 정남장군 하후상과 그의 아들 정서장군 하후현도 있다.[1] 이렇듯 하후씨의 비중이 높은 것은 그들이 사실상 위나라 종친 가문이기 때문.

기근이 심해 먹일 식구가 한정되자 하후연이 자기 자식을 버려서 조카딸 하후씨를 구했다. 이 애가 나중에 산에서 장비에게 납치당해서 장비의 처가 되었다고 한다. 장비의 두 딸은 유선의 황후가 되었으니 위와 촉한 두 나라 종실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현대의 윤리관에 비추어 볼 때 장비에게 페도필리아 성향을 의심케 하는 대목이기 때문에 위략의 기록이라는 점을 들어 이 내용을 인정하지 않으려 드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현재 위략에서 문제가 되는 기록은 배송지 등이 주석을 달면서 타당한 이유를 들어 반박했기 때문이지 위략 전체가 가치없는 찌라시 사료라서가 아니다. 하후씨의 기록은 주석에 아무런 반박이나 이의가 없으므로 위략의 기록이라는 것만으로 이를 부정할 수는 없다. 게다가 촉인들만 연관된 것이 아니라 위나라의 공신인 하후연의 신상 명세이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거기에다 하후씨의 사촌오빠 하후패가 촉에 귀순할 때, 유선이 그를 외척이 주로 맡는 거기장군에 임명한 것을 보면, 장비와 하후씨가 연관이 없는 관계였다고 부정하기 어렵다. 근래에는 혼인 자체는 사실이되 납치혼이 아닌 정략혼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5 평가

관도대전 이전의 시기는 조조가 입지를 다지던 때로서, 대표 명장인 오자양장의 라인업이 채 갖춰지기 전이며, 자연히 친족들이 활약할 기회도 더 많았다. 형양 전투에서 조조를 구한 조홍, 연주를 방어하고 여포와 싸운 하후돈, 숱한 초기 정벌전에서 활약한 조인의 기록이 이를 증명한다. 그런데 하후연은 조조의 거병 시절부터 종군했으면서 의외로 관도대전까지 별다른 기록이 없다. 동시기에 조인은 조조군 초반의 거의 모든 적들과 싸우면서 전공을 쌓았고 하다못해 하후돈조차도 여포에 맞서 성을 지킨 기록이 있음을 감안하면 더욱 이상한 부분. 물론 하후연 역시 잡다한 일을 맡아 조조를 수행했겠지만, 이는 결국 하후연이 처음부터 특출난 군재를 뽐내던 인사는 아니었음을 뜻할지도 모른다.

조조군의 최대 사업인 하북 평정이 전개되던 때엔 장료, 악진, 장합, 서황 등 명장 대다수가 조조와 함께 남피, 업, 호관, 유성 등지에서 활약하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하후연은 이 정벌에 참전한 기록은 없고 잡다한 반란군 토벌에만 쓰이고 있었다. 조조군의 명장들이 하북 각지를 정복하던 시점에, 하후연은 후방에 남아 있었단 뜻이다. 원가에 비하면 군대의 규모나 지휘 계통 모두 처지는 군소 반란군 토벌에만 쓰인 것을 감안하면, 하후연은 애초부터 정복 전쟁을 수행한 명장이 아니라, 애시당초 후방에서 반란 진압과 보급을 전담한 장수임을 알 수 있다. 훗날의 행보로 보아, 조조의 기준에 하후연의 군재는 아직 정벌에 나설 수준은 아니고 하후연을 사령관의 재목으로 키우기 위해 이런저런 경험을 쌓게한 것으로 추측된다. 적어도 이 부분에 대해선 하후연은 충실히 조조의 명을 이행한 괜찮은 장수에 속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하후연의 단점은 용맹에만 의존해도 충분했던 '토벌 대장의 사고 방식'을 끝내 버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정사에 기록된 하후연의 계책은 그 모두가 용맹에 의존하는 방식이었다. 하후연의 이런 기질은 차후 그의 발목을 잡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마초를 공격할 때는 빨리 들이치면 이긴다였다. 이는 어떤 치밀한 전략에 대한 '사령관의 구상'이 아니라, 우리가 세니까 이래도 된다는 '장수의 용맹'에 가까웠다. 한수를 공격할 때도 하후연의 지모는 허를 찌르는 지모라기보단, 공성은 몰라도 야전은 우리가 이긴다는, 본인 군대의 용맹성을 신뢰한 결정에 가깝다. 그렇게 끌어내서 적이 대거 도착했을 때도 숫자만 많지 쉬운 상대다라며 적을 공격했고, 결국은 승리했다.

하후연의 가장 큰 전공인 관중 평정은 장합, 서황, 주령 등 당대 톱 클래스의 지장들과 함께 했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측면도 크다. 장합, 서황의 열전엔 하후연을 도와 실제 정벌을 벌인 정황이 역력하며, 실제로 마초와의 1차전에서 한 차례 패배한 하후연은 2차전에선 가장 강한 카드인 장합을 앞세우고 자신은 보급을 맡은 뒤, 장합이 마초를 몰아내자 진군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관중 평정 당시의 마초군과 한수군이란 이미 212년 당시 위수 전투에서 10만에 달하는 주력이 다 털린 상태였다. 그들의 기세가 예전같지 못했고, 양부, 강서를 위시한 농우 지방의 민심 또한 위나라로 돌아섰기에 그처럼 손쉬운 승리가 가능했던 것이다.

사서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하후연에 대한 거의 유일한 찬사가 바로 조조의 안회 드립인데, 해석하면 조조 자신도 하후연의 용병술엔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나 사실 하후연이 조조보다 뛰어난 인물이라 보긴 힘들고 그만큼 조조가 하후연의 전공을 가상하게 생각했다고 보는게 옳다. 그마저도 얼마 안 가 예전처럼 백지장군으로 회귀됐으니 애초에 찬사 자체의 무게가 컸다고 보긴 힘들다. 여러모로 하후연과 입장이 비슷한 조인의 경우만 해도, 장수로서의 군재나 위용에 대해선 조조의 입이 아니라 진교나 부현 같은 타인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반면 하후연에겐 그런 부분은 전혀 없다.

하후연이 맹장임에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선봉이나 후방 지원용 장수로서는 나무랄 데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하후연의 용맹 의존은 좋게 말하면 과감함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무모함이었다. 때문에 조조는 거듭된 승리에도 하후연의 용맹 의존을 경계했다. 그러나 문제는 사령관으로서의 자질을 위해 중요한 '용맹에만 의지하지 말라'는 조조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이다. 군량 보급 매니아이자 닥돌도 마다하지 않는 솔선수범형 지휘관인 하후연은 이 말이 전혀 와닿지 않았던 듯 싶다. 그리고 사실 하후연은 조조 밑에서 30년 간 종군하면서 선수필승의 원칙을 시종일관 고수했고, 한중 공방전을 제외하면 이게 언제나 먹혀서 실제로 필승공식화 된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까놓고 조조 역시 지나친 과단성으로 인해 위험에 처할 뻔한 일이 꽤 있어서 조조의 말은 설득력이 없었다(...).

한중 공방전에는 군주 유비, 참모 황권+법정, 명장 황충+조운+장비, 군수 담당 제갈량, 후방 책임 이엄 등 촉의 초호화 공격진이 투입됐으니, 하후연으로선 변명의 여지가 있을만도 하다. 위에서 고평가를 받은 장합 역시 한중 공방전 당시 파군에서 장비에게 전멸에 가까운 대패를 당하는 등 전반적으로 촉군의 기세가 매우 강성했다. 그리고 이 난리가 날 때까지 조조 본인은 후방에서 한중을 구원하는데 미적거리고 있었다. 유비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전력을 투입한데 반해 하후연은 파군에서 장합이 장비에게 궤멸적인 패배를 당해 이미 병력이 부족해진 상황이었음에도, 조조는 218년 9월 친정을 결의한 후 반년을 장안에서 관망만하며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다(...).

한중 공방전에서도 장합과 서황은 각각 광석과 마명각에서 유비군을 격퇴하며 하후연을 철통같이 지켜주었다. 결과적으론, 이를 깨닫지 못한 채 승리만을 거듭하여 자만심을 가지게 된 것이 그를 수렁으로 몰아넣은 원인이었다. 끝내 하후연은 정군산 전투에서도 적의 눈 앞에서 총지휘관이 신변을 노출해 소수의 병사들과 함께 직접 진채를 보수한다는 기상천외한 만행을 저지르며 자신을 죽음으로 내 몰았다. 하후연의 전사 당시 상황은 녹각 하나가 불타서 고치러 간 것이 아니라 유비군이 돌아다니면서 사방팔방 공격하며 여러군데서 녹각을 불사르며 날뛰고 있던 상황이었고 하후연 뿐만 아니라 장합도 동원되서 여러군데서 치고 들어오는 유비군을 방어하며 녹각 수리와 방어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거기에 하필 유비가 장합에 싸움을 걸었는데 장합군이 불리한 상황에서 하후연이 지휘하던 병력의 절반을 나누어 장합을 돕게 한 직후 하후연이 기습을 당한 것이다. 하후연의 패배는 단순히 하후연만 아니라 당시 위군 전체가 얼마나 수세의 입장에 몰려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고 위군은 어쩔수 없이 성동격서의 계략에 당했다고도 볼 수 있다. 화공으로 주위를 분산시켜 적의 주의를 흐트려 놓은 후 단병으로 기습했다는 건데 이건 법정의 계략으로도 볼 수 있다.

지휘관이 최선두에서 전황을 파악해야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하인츠 구데리안의 견해도 있지만 그건 제대로 했을 때의 얘기일 뿐이다. 적이 기습했는데도 사령관이 장막 안에서 보고만 받는다면 그건 그거대로 욕먹을 일이다만 문제는 하후연 같이 너무 솔선수범하면 그건 그거 나름대로 곤란하다는 점이다. 적에게 지휘부를 무방비로 노출하는 장수는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지휘관 실격이다. 하후연의 죽음은 명장의 불운이 아니라, 용맹 과신이 낳은 예견된 참사였다. 총사령관 신분을 망각하고 적에게 뻔히 노출되는 상황을 초래해 목숨을 잃은 것이다.

분명히 역량은 뛰어났으며 경험도 충분한 장수였으나, 용맹에만 의존하는 고질적인 근성을 버리지 못해 그 이상 발전할 순 없었던 비운의 장수라고 할 수 있다. 하후연은 변방의 도적이나 반란군을 제압하는 용장으론 충분했으나, 유비 같은 강자와 붙을만한 사령관 재목은 아니었던 것.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위나라에서 사령관 신분으로 전사한 장수는 오직 하후연 뿐이다.

법정은 하후연과 장합을 모두 쉬운 상대들이라고 평한 바 있지만, 유비와 제갈량 이하 모든 장수들은 언제나 장합을 두려워했고 하후연이 죽자 유비는 장합을 잡아야지 이런건 잡아서 어디다 쓰냐고 평했다. 위군 내에서도 총대장이 참살되어 군심이 혼란한 순간에도 장합에 대한 믿음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전투 전에 아군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적장을 까내리는 건 흔한 일이나, 하후연에게 부족한 점은 이처럼 그가 상대한 적수들은 물론, 아군들조차도 그에 대해 보인 반응이 미미하다는 점이다.

하후연의 영향력이란 것도, 하후연 사후에 보여준 위군의 행보를 생각하면 의문이 드는게 사실이다. 고금을 통틀어 지휘부의 궤멸은 패배로 직결된다. 그러나 총대장이 전사한 상황에서도 곽회는 침착하게 장합을 대장으로 추천했고, 이에 장합이 군을 정비하자 전군이 안정을 되찾았음은 물론 한술 더 떠 직후에 이어진 유비의 공세를 막아내기까지 했다. 결국 장합이 이끄는 위군은 조조의 본대가 장안을 출발해 도착할 때까지 유비군에 맞서 한중 전선의 방어에 성공했는데, 이 모든 것이 하후연이 사령관일 때보다도 더욱 줄어든 병력과 사기로 이뤄낸 결과였다. '사령관 하후연'의 존재감이 얼마나 미미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

'사령관 하후연'에 대한 혹평은 유비 뿐만 아니라 이미 조조군 내에서도 만연한 관점이었다. 군중에서도 하후연을 가리켜 백지장군이라는 조롱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조조 본인부터가 하후연에게 용맹에만 의존하지 말라는 주의를 수 차례 주고 있었지만 하후연은 지키지 않고 죽었고 조조는 이 일로 어지간히 화가 안 풀렸는지 위무군책령에서 백지장군이라고 강하게 하후연의 실책을 디스했다. 물론 백지장군 운운은 적벽에서의 패배 후 그런 것처럼 조조가 습관처럼 하는 변명일 수 있고, 여러가지 이유에서 나온 조조의 오버일 수 있지만, 하후연의 패배와 당시 평을 감안하면, 그저 흘려 들을 말도 아니다. 군중에서도 하후연에 대한 모욕적인 별명이 공공연히 돌았고, 조조 본인부터가 하후연의 자질에 대한 경고를 지속했고, 종국엔 회한 섞인 통렬한 비판을 가해던 점 등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그를 실질 이상으로 고평가하기는 어려워진다.

하후연의 식읍 800호는 결코 적은 수준이 아니기도 했다. 조조는 왜 하후연을 사령관으로 쓴 것일까 이는 당시 조조의 군권 분배 경향에 기인하는데, 당시 합비의 장료를 제외한 전선의 대장은 모두 조씨 일족이었다. 하후돈이 거소호구에서 26군을 이끌었고, 조인은 번성에, 하후연은 한중에 주둔했다. 다른 장수는 그렇다쳐도, 하후돈은 굉장히 예외적인 인사인데, 이러한 친족 우대 정책은 훗날 조비에게로 그대로 계승되어 하후돈→조휴(회수), 하후연→조진(관중), 조인 →하후상(형북)으로 교체되면서 조씨 일족의 군권을 더욱 굳혀나가게 된다. 조휴, 조진이 비록 유능하지만 장료, 장합에 비해 경력이건 실력이건 뒤쳐짐에도 사령관을 해먹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런 친족 우대 정책에 힘입은 바가 크며, 하후연에 대한 인사도 이와 다르지 않다.

너무 혹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당대부터 하후연은 피아 양측에게 그저그런 장수로 인식되었고, 후대 왕조에서도 역대 명장을 기리는 무성왕 묘에 분봉되지 못했으며, 똑같이 무성왕 묘에 분봉되진 못했지만 장합, 서황 등이 광명장전이나 십칠사백장전 같은 저술에선 명장으로 언급되는 것과 달리, 하후연은 여기서도 뽑히지 못했다. 물론 이런 사찬서의 선발이 명장의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후대에서도 딱히 재평가 받진 못했다는 의미다. 그래도 십칠사백장전과 광명장전에 나오는 삼국지 시대 인물이 30명도 안되고 무성왕묘엔 중국 4천년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들만 들어가서 훌륭한 공적을 쌓았지만 여기에 못 들어간 장수들도 수두룩하기 때문에 재평가의 기준이 너무 높기도 하다.

6 미디어 믹스

  1. 여기에 하후현의 여동생 하후휘는 사마씨의 역심을 눈치챘다가 남편 사마사에게 독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