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시/역사

창원시의 역사에 대해 설명한 문서.

1 삼국시대

기원은 옛 삼한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간다. 물론 사람은 선사시대부터 살았던 모양으로, 그 옛날 바다가 창원 분지 한복판까지 들어차 있던 시절의 흔적은 성산구에 있는 성산패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선사시대판 난지도가 요기잉네 그런데 이런저런 부장품들이 출토되는 걸로 봐서는 단순한 그 시절 조개껍데기 투척장소는 아니었던 듯하다. 여튼 날 따뜻하고 농토와 바다까지 끼고 있어서 옛날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택지 지대였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역사에 등장하는 창원의 첫 모습은 삼국지에 나타난다. 이 시절 창원지역에는 미오야마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가 가락국의 압박으로 마산 현동지역으로 옮겨 골포국(骨浦國)으로 바뀌어서 이웃나라들과 제휴해 포상팔국(浦上八國)울 구성해 가락국및 신라와 항쟁하다가(포상팔국의 난 문서 참조) 패하고 이후 구 창원지역에 탁순국(卓淳國)이 들어섰다. 탁순국은 이후 신라가 점점 커지면서 결국 항복해 복속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창원시의 옛 지명은 굴자군(屈自郡)인데, <삼국유사>와 <고려사>에는 구사군(仇史郡)이라고 나오며, <일본서기>에는 구사모라(久斯牟羅), 또는 기질기리성(己叱己利城)이라고도 나온다. 그리고 신라 시대에는 현재의 마산합포구 지역에 옛 이름을 따서 '골포현'을 두었는데 이것이 합포구의 기원이라 전한다. 한때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이 기거했으며, 그 흔적과 전설이 돝섬과 월영대 등 여러 곳에 남아 있다. 합포라는 지명 자체는 고려시대에 붙여진 이름.

2 고려시대

이후 '합포'는 고려시대에 몽골(원)의 군대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역사에 자주 등장한다.[1] 현재의 어린교 부근을 합포라고 불렀는데 삼호천, 양덕천, 봉암천 등 여러 물줄기가 합쳐지기 때문에 붙은 이름. 그리고 현재의 '합성동'의 이름이 바로 합포성에서 유래했다. 합성동 일부 시가지에는 성곽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후 세종 대에 대마도를 완전히 정벌할 때까지, 고려 말의 합포는 왜구와의 격전지였다. 이 때 싸우다 전사한 무명 의병 장군[2]의 묘가 현재까지 남아 있는데, 마산합포구 장군동의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했다. 최영 장군도 이 일대에서 왜구 토벌로 전공을 세웠고, 최윤덕 장군 또한 현재의 창원 의창구 출신이기도 하다. 소싯적 왜구들을 물리친 경험이 북방의 여진족을 물리치고 4군을 개척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을 것이다.

3 조선시대

명목상 '창원(昌原)'이라는 이름의 시작은 조선왕조실록(태종 8년 7월 기록)이 최초라고 할 수 있다. '의창(義昌)'현과 '회원(會原)'현에서 한 자씩 따 왔다고 전해진다. 의창은 국사책에도 나오는 대민 구휼 기관으로 현재의 의창구 근방에 있었다. 이 당시의 창원은 현재의 창원 전 지역을 아울러 낙동강 하구까지 인접했던 도호부(都護府)[3]였다. 이를테면 창원부 안에 마산과 진해가 있었고 이후 떨어져 나가거나 합쳐지다가를 반복하지만 크게는 하나였던 것이다.

이후 임진왜란일본군을 매어두었다 하여 '마산(馬山)'이라는 이름이 생겨났고, 현재의 구마산 일대를 마산포라고 불렀다. 임진왜란 이후 16세기 즈음에는 마산포 아래 바닷가에 어시장이 생겨나 합포성터를 대신하여 번성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현재의 마산어시장이다. 마산포는 한성으로 조세를 실어나르는 배(조운선)의 출항지이기도 했고, 현 남성동파출소 네거리에는 크고 아름다운(...) 조창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시대 초기까지 있었고 사진기록도 남아 있는데 이후 도시계획으로 헐린 이후[4]에는 다른 곳으로 옮겨 지었는지 아니면 불쏘시개(...)가 되었는지는 불명.[5]

3.1 구한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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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트랄 하다

1906년 대한제국의 월경지 정리 이전까지의 행정구역 상황. 구산면은 원래 칠원군(현 함안군 칠원면, 칠서면, 칠북면 일대를 관할하던 옛 군)의 월경지였으며, 대산면은 김해군에 속해 있었다. 1906년 구산면과 대산면은 창원부로 편입되었으며, 진주군 양전면은 진해군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창원부, 진해군, 웅천군은 1908년 창원부로 대통합되었다.

대한제국 시대에 이르러 1899년 창원부 마산포(당시 창원부 외서면)가 개항장으로 지정되었다. 개항장이 되면서부터 현재의 신마산 월영동~월남동 일대에 일본이 조계지를 건설[6]했고, 현재의 월영마을 아파트촌에는 러시아인 조계지가 있었다.[7] 일본/러시아 조계지와 마산포 사이에는 허허벌판과 백사장만이 있었고, 사람들은 이를 두고 '구마산(원마산)'. '신마산'으로 구분해서 불렀다. 한편 구마산과 마산포 사이 철로변에는 중국인들이 차이나타운을 형성했는데, 지금의 창동네거리에서 부림시장, 서성동 일대 블록이다. 그러나 화교들은 1910년대쯤 일본인 이민자들에게 상권을 빼앗기고 철수한다.[8] 철로 너머에는 관립 소학교가 문을 열었다. 이것이 마산성호초등학교의 전신이다.[9]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하기 이전부터 이 지역의 지리적 이점[10]에 눈독을 들였고 군사적으로 활용했다. 삼랑진으로부터 분기하는 철도를 부설하여 진해선이 먼저 건설되었고[11] 창원역으로부터 일본인 조계지인 신마산까지 철도를 연장, 백사장을 매립한 후 부두 항만시설을 만들었다. 이것이 경전선의 전신인 옛 마산선으로, 철로의 흔적은 현재의 합성동-불종거리 사이 3.15대로로 남아 있다.[12] 옛 마산역은 마산중부경찰서 앞에 1977년까지 있었다. 원래는 여객철도가 아닌 군용 선로 용도였으나, 마산역에서 진주까지 이어지는 경남선이 개통된 이후에는 여객영업을 했다. 이를테면 이 당시의 기차는 부산역에서 삼랑진으로 갔다가 다시 신마산까지 남하한 후, 철로를 도로 거슬러올라가 진주로 갔던 것이다. 이러한 비효율은 1977년 소위 3역통합[13]이 이루어진 후 해소되었다.(그와 동시에 구 마산지역은 천천히 쇠락하게 된다.) 현재 마산시내 시가지를 따라 길게 이어져 있는 항만인입철도 '임항선(마산항제1부두선)'은 옛 경남선의 흔적이다. 자세한 내용은 마산역 항목 참조.

4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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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개편된 마산부창원군. 당시의 마산부 영역은 현재의 마산합포구 시가지 일대만이 해당되었다. 일본인 조계지였던 월영동~두월동 권역과 현재의 어시장인 원마산 일대를 포함한다.

1910년 국권피탈과 함께 창원부는 마산부로 개칭되었으며, 1914년 시가지를 부(府), 외곽지역을 군(郡)으로 분리하는 조선총독부의 도농분리정책에 따라 마산부의 영역을 개항장 일대(현 마산합포구 일대)로 축소시키고, 마산부의 나머지 영역을 창원군으로 분리시켰다. 창원군청은 마산부 내에 두었다. 창원군의 경우 철도와 14번 국도가 지나가는 현 창원역 인근 외에는 이렇다 할 시가지의 발전이 없었고, 다만 상남리 일대 등 전형적인 남부지방식 자연취락이 형성되어 있었던 듯하다.

마산부는 일제강점기 시절 항구로 급부상한 지방 중심도시로 성장했다. 당시 마산의 인구는 5만명 정도로 군산, 진주와 맞먹는 정도였으며, 부산, 군산과 함께 일본으로 가는 관문 역할을 했다.[14] 늘어나는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일제 당국은 국유지로 묶여 있던 중앙동 백사장 일대에 구획정리를 실시하고 도로를 놓았다. 옛 마산시청과 세무서, 마산중학교, 마산고등학교, 마산여자고등학교 등이 모두 이 일대에 몰려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 있다. 중앙동이란 지명 자체가 이 당시에 개발하며 붙은 '중앙마산'이라는 지역구분에서 유래했다. 원마산과 신마산 중앙부에 붙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낀마산

진해의 경우 1910년대에 계획도시로 건설된 이후 군항의 기능을 옛 신마산으로부터 박탈(?)하다시피하며 시세를 확장한다. 사실 지금도 군사도시로서의 기능이 상당량 남아 있다. 일본의 요코스카사세보보다도 크다! 굳이 따지자면 히로시마를 끼고 있는 구레 군항과 비슷한데 실제로 옛 진해시 시절부터 자매결연을 맺고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진해구 문서 참조. 광복 직전 인구가 진해읍만 3만 8천여 명이었다.

1918년 부내면이 창원면으로, 웅읍면이 웅천면으로 개칭되었다. 1931년 진해면이 진해읍으로 승격되었다. 1942년 내서면, 창원면, 구산면의 일부가 마산부로 편입되었다.

5 광복 이후~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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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시 마산부와 창원군의 행정구역 상황. 일제 말기인 1942년 내서면과 구산면의 각 일부, 창원면의 봉암리 등이 마산부에 편입되어 마산 시가지가 좀 더 넓어졌다.

8.15 광복6.25 전쟁을 겪으며 마산 시가지는 피난민들과 농촌에서 몰려든 사람, 그리고 귀국한 사람들 등으로 북적거리며 증식하기 시작했다. 경남대 앞의 '해방촌'이 생겨난 것도 이 즈음이다. 1949년 8월 15일 마산부가 마산시로 개칭되었다. 1960년 3.15 부정선거에 따른 3.15 학생의거(마산시위)는 당시 마산의 한국 내 도시규모를 보여주는 예 중 하나이다. 동아일보에서는 이만섭(전직 국회의원이자 국회의장도 역임했던 그 이만섭 맞다.)기자를 특파원으로 보내놓고 있었을 정도였다. 마산발 항쟁은 전국으로 번져나가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으니, 이 즈음의 마산은 그야말로 대처(大處)였다. 이때가 마산의 최전성기였고, "7대 도시" 소리 듣던 시기다. 한편, 창원군 진해읍도 1955년 진해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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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마산시의 행정구역 확장 당시 상황. 옛 마산시 시가지의 관할 구역은 이 때 완성된다. 또한 박정희 정부의 남동임해공업단지 계획이 탄력을 받으면서 옛 창원시 시가지에 해당되는 창원군 창원면, 상남면, 웅남면 일대를 일단 마산시에 편입시키고 이들 지역을 별도로 관할하는 경상남도 직할 창원출장소를 설치하여 관리한다.[15] 같은 해 진해시 역시 창원군 웅천면을 편입하여 관할 구역을 넓혔다.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이때부터 창원군은 군역이 3개로 쪼개지게 된다.

1970년대에는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및 국토개발 10년 계획 등의 일환으로 남동임해공업벨트가 들어서게 된다. 마산지역에는 한일합섬이 건설되었고, 창원에는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기 위해 공장 건설을 추진하였다. 정부에서는 창원 분지싸그리 밀어버리고 테크트리 새로 올립시다 계획도시를 입안하게 되는데, 즉 지금의 창원시는 광복 이후 무질서하게 성장한 마산과는 달리 시작부터 계획된 도시였다. 전체적인 계획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수도 캔버라의 계획을 참고하여 짜여졌으며[16],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10차로, 12차로 대로 등이 짜여져 있었다. 이는 유사시 군수공장을 보호하는 소개공지 및 비상활주로를 겸할 예정이었다.[17] 하지만 지금은 지하차도에 화단까지 있는지라 써먹을 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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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당시의 행정구역 상황. 마산시에서 창원출장소 지역이 독립하여 창원시가 설치되었으며, 창원군은 의창군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1983년에는 의창군 웅동면이 진해시에 편입되었으며, 1989년에는 의창군 천가면(가덕도)이 부산직할시 강서구에 편입되었다. 1990년 마산시에 합포구와 회원구가 설치되었으며, 1991년 의창군은 창원군으로 다시 명칭을 환원하였다.

1980년, 마산시에서 창원출장소가 분리되어 창원시로 승격되고 창원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부산에 있던 경남도청은 창원으로 이전했고, 마산여고밑에 있던 KBS 마산방송총국이 창원방송총국으로 변경, 용지못 인근으로 옮겨갔다. 마산지방법원은 비교적 늦게 이전한 축에 속했는데 대략 1990년대 초반경 창원으로 이전했다. MBC의 경우 옛 마산시의 노력으로 창원 이전 계획을 취소하고 현재의 양덕동 부지에 신사옥을 마련했으나 통합 이후 결국 창원MBC가 되었다. 현재는 이마저도 진주MBC와 통합하여 MBC경남 창원지역본부가 되어 있으며 3.15 아트센터가 개소하기 전까지는 마산MBC홀이 이 지역의 문화공연 허브 역할을 했다. 그리고 법원과 검찰청은 마창진 통합 이후에는 원래 자리인 옛 마산시청 인근으로 돌아왔다(...)

이러한 행정기관의 대규모 이전 이후에도 옛 마산은 한동안 상업지로서의 활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2000년대부터 벌어진 옛 마산시의 유통업체 전쟁[18]의 직격탄을 맞으며 창동 상권이 문자 그대로 망했어요. 결국 지속되는 인구 감소로 일반구 폐지라는 굴욕을 당한 유일한 지역이 되었다. 이후 창원이라는 이름으로 합쳐지게 된다.위키백과 참조 # 배꼽이 더 커져서 배꼽이 배를 먹어버린 셈. 이름만 따지면 배꼽이 아니라 그냥 원래대로 돌아갔다고 볼 수도 있는데, 결국 기억도 안나는 옛날로 돌아간 셈이 된다. 사실 지금 창원시를 개발하는데, 지금 창원시 공단부분을 마산시로 편입시킨 다음 마산의 자본으로 개발했으니 지역민 입장에선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수준의 공론일 듯. 물론 지역기반에 사활을 걸고 있는 높으신 분들의 생각들은 좀 다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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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전국 행정구역 개편(도농통합) 당시 마산시, 창원시, 진해시의 개편된 행정구역 상황. 창원군은 폐지되어 각 읍면들은 인접 도시가 누구냐(마산시/창원시)에 따라 분할 편입되었다. 이 상태로 2010년 현재의 창원시로 대통합될 때까지 유지된다.(단, 마산시의 합포구와 회원구는 2000년에 폐지되었다.)

5.1 통합 이후

2010년 3월 2일, 창원, 마산, 진해시의 통합 설치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19] 이로써 2010년 7월 1일자로 통합 창원시가 정식 출범했다. 인구는 통합 당시 108만으로, 기초자치단체 중에서는 단연 1위의 규모다. 2012년 3월 현재 1,091,827명으로 늘어났고 시 자체적으로는 2025년까지 150만명(!)을 예상하고 있다고 한다. 마산 권역은 통합시가 되면서 2000년에 폐지되었던 일반구(합포구, 회원구)가 앞에 '마산'을 붙이고 재설치되었다(마산합포구, 마산회원구).

통합시의 명칭을 정하는 데 갈등이 있었으나 결국 자율적으로 통합한 시에 지원되는 예산을 마산과 진해가 40%씩 반띵하는 대신 사실은 당시 황철곤 마산시장의 호버쉽 대중교통 같은 사업에 예산을 쏟아붓고는 진척없이 돈만 낭비하여 생긴 큰 규모의 적자를 창원시 통합지원예산이란 이름으로 채운 셈이다. 그런 상황에도 마산의 "지역 유지"라는 어르신들은 지자체 사업예산을 먹고 뭐했는지 알 수 없는 업체들에 대한 검찰조사 요청은 커녕 마산시가 없어진다면서 소리만 질러댔다. 통합시의 이름을 창원으로 하는데 합의했다. 창원시는 상당히 큰 기업도시인지라 예산에 꽤 여유가 있으므로[20] 돈보다는 명예를 추구했고, 그렇지 못한 진해와 마산은 실리를 얻은 셈.실리 정도가 아니라 재정부실화 책임 문책도 피하고, 적자보전을 위한 마산, 진해 각자의 피나는 노력도 통합 창원의 이름으로 상쇄되었으니 얼마나 좋은가 나름대로 윈윈일지도...

한편으로, 창원시의 구심점으로 삼을 요령으로 창원 연고의 야구단을 창설했다. 자세한 것은 NC 다이노스 항목 참고.

통합 이후에는 높으신 분들끼리 알력이 많은 듯, 창원시청을 이전해야 한다 말아야 한다, 경남도청이 마산으로 와야 한다 말아야 한다 등등 말이 많다. 창원시 의회에서는 마산지역 분리 결의안을 통과시키기도 하고, 이에 질세라 마산 쪽에서는 재분리 후 함안과 통합하는 방안을 추진키도 하는 등 그 사이에 껴 있는 NC 다이노스 홈구장 문제는 답도 안 나오고 있는 상황 투닥거리고들 있지만, 정작 시민들 입장에서는 원래부터 한 생활권이었는데 높으신 양반님들 뭐하심? 이 정도 반응(...)[21]
  1. 이 당시 식수를 공급하던 곳이 바로 몽고정. 지역 명산물인 몽고간장은 이 이름에서 유래했다. 옛 본사는 몽고정 옆 굴다리에 있었으며, 일제시대에는 진해의 양조장에서 몽고정의 물을 실어갔다. 해안가임에도 불구하고 무학산의 토질이 화강암지대이기 때문에 수질이 좋은 편이었다. 하이트맥주(구 조선맥주) 공장이 천주산에 있는 것도 같은 이치.
  2. 성씨만 '장'씨였다고 전한다.
  3. 한 때는 안동처럼 대도호부로 지정되기도 했었다. 로비성 승격이었긴 하지만...
  4. 도시계획을 보면 의도적으로 조창을 헐어버린 것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남성동파출소 네거리는 정확히 조창 건물부지를 4등분한다..
  5. 이 당시에는 옛 건물을 헐어 옮겨짓거나 새로 짓는 건물의 서까래 등으로 활용하는 일이 잦았다.
  6. 이 당시 일본이 건설한 도시구획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구 의창군청 자리가 바로 일본 공사관이었기 때문에 이 위치를 중심으로 길이 방사형으로 나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현 제일여고는 일본인들의 신사가 있었으며, 제일여고 정문부터 함흥집까지 벚꽃길이 가꾸어져 있는 것은 그 흔적.
  7. 경술국치 후 일제는 이 터를 국유지화했다. 옛 국군통합병원이 그 자리에 있던 이유. 애초에 러시아에서 캐삭빵으로 삥뜯은 국유지였기 때문이다. 이는 현 마산합포구 청사(구 마산시청)의 경우도 마찬가지.
  8. 재미있는 사실 한 가지는 1905년까지 폭증하던 일본인 상권에 대해 1920년대까지는 다시 원마산의 조선인+일본인 상권 연합이 신마산으로부터 도로 상권을 탈환해오는 양상을 보인다는 것. 그러면 뭐하나 1930년대 되면 쌀 수탈해다 일본에 팔아서 신마산 사묵겠지
  9. 구버전 문서에는 일본인 자녀들을 위한 심상 소학교라고 되어 있는데 절반만 맞는 이야기다. 반면 신마산 쪽 월영초등학교의 경우 교장부터 교사, 학생까지 대부분 일본인이었다고 한다.
  10. 배산임수 지형, 맑은 수질, 잔잔한 내항 포구는 군대를 주둔시키고 식민지를 세우기에 알맞다. 택지로서 나쁘지 않고 식수 걱정이 없으며 여차하면 병력증강의 교두보가 될 수 있기 때문.
  11. 이후 진해에는 군용 항만시설이 들어섰지만 군용시설 자체는 신마산지역이 다소 빨랐다... 라기보다는 진해의 경우 마산 주둔 시설의 확장 기지 격. 다만 진해로 옮겨간 일본해군과 달리 일본육군은 옛 국군통합병원 부지에 일제 패망 때까지 그대로 주둔하고 있었다.
  12. 단, 회원1동 근처에선 크게 반원형으로 휘어졌는데 이 흔적도 산호초등학교 근처에 그대로 남아 있다.
  13. 현재의 상남광장(육호광장) 자리는 마산선 중마산역, 그리고 북마산 가구거리 위쪽 교방동 들어가는 어귀에는 경남선 '북마산역'이 있었다. 이 역의 흔적은 지금도 플랫폼 부지가 덩그마니 남아 있다.
  14. 지금도 시모노세키로 가는 배편이 띄엄띄엄 있기는 하다.
  15. 박정희 정부 당시에는 효율적 행정을 우선으로 하는 정부조직개편이 의외로 잦았는데, 이를테면 구 창원시 권역을 도 직할로 놓아서 공단조성 드라이브에 박차를 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비슷한 사례로는 산림녹화 사업을 위해 산림청이 1970년대 당시에 농림부에서 내무부 직할로 이관되기도 했다.
  16.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창원에 캔버라호텔이 있다.
  17. 해당 지역에서는 농담 삼아 유사시에 용지못의 물이 몽땅 빠지고 그 안에서 대공발칸이 나타난단 우스개소리가 정말로 돌아다녔다.
  18. 인구 35만의 도시에 국내외 7개 업체가 잇달아 대형마트를 건설했다. 썩어도 준치라고, 소비 여력은 여전히 있다는 증거이기도.
  19. 함안군을 배후지로 통합하는 방안도 있었지만 행정안전부에서 기각했다. 함안을 통합하게 되면 국회의원 선거구 책정 문제도 있었기 때문이다.
  20. 비수도권 도시중 재정자립도 1위였다. 물론 지금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지역을 편입한지라 내려간 상태.
  21. 이는 예전부터 마창진의 버스체계가 하나로 통합되어 있었고, 생활권역이 겹치는 탓도 크다. 1970~80년대에는 창원공단 노동자들이 마산의 산호동, 오동동에서 놀았고 90년대에선 창원에서 마산으로 출퇴근하는 사람도 많았으며, 무엇보다도 고등학교 평준화 이후 연합고사는 2000년대까지 마산-창원 학군 분리가 되어 있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