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1 개요

동명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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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l/Karl

일반적으로 카를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경우의 철자는 독일어Karl 혹은 영어와 북유럽어의 Carl. r을 묵음으로 처리할 경우 '칼'이라고 읽히기도 한다. 다만 은 '날붙이'의 한 종류인 단어이기도 한지라 인명으로 쓸 경우 구분의 편의성 때문에 '카를'이 더 범용성이 높은 편. 어원은 '남자', '자유인'을 의미하는 고대 게르만어 'Karal'이다. 러시아어 까롤(Коро́ль), 불가리아어 크랄(крал), 세르비아어 크랄례(краљ), 폴란드어 크룰(Król) 등 슬라브어에서 을 의미하는 어휘도 이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같은 인명을 국가별로 부르는 방식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영어권에서는 '찰스', 프랑스어권에서는 '샤를', 스페인어권에서는 '카를로스', 이탈리아어권에서는 '카를로', 라틴어로는 '카롤루스' 등으로 비슷비슷하면서도 다양하게 불리는 편. 다만 러시아의 경우는 이름으로 쓰는 사람이 소수이긴 해도 의외로 게르만과 같은 '카를(Карл)'이다. 이를테면 러시아 공사관이였던 카를 베베르(Карл Вебер)가 있다.

보통 서유럽 인명이 기독교 성인들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은 것을 보면[1] '야만인' 취급을 받던 게르만의 이름을 쓴다는 것이 의아해보일지는 몰라도 헨리, 윌리엄, 리처드, 루이스 같이 유럽 여러 나라에서 흔하게 쓰이는 이런 이름들은 알고 보면 다 고대 게르만어 어휘에서 비롯된 이름들이다. 한편 한국 가톨릭에서 세례명으로 쓸 땐 '가롤로'라는 표기를 쓴다.

아래는 이 명칭에 해당되는 인물들. 일반인들은 동명이인으로 묶어 처리했으며 국왕들은 따로 항목이 있는 경우에 한해 계보 및 배경 국가 설명에 필요한 간단한 언급을 해두었다.

2 실존인물

주로 독일권 출신 인물들이다. 여기에 없는 인물들은 문서 참조.

2.1 신성 로마 제국황제

프랑크 왕국-신성 로마 제국으로 이어지는 계보상에 이 이름을 이어받은 제왕들이 분포한다. 심지어 왕가가 바뀌어 혈연이 무관해지더라도 정체성만은 그대로 이어받아 후속 넘버링을 사용할 정도. 경쟁 의식 탓인지 같은 어원임에도 프랑스의 '샤를' 국왕들과 영국의 '찰스' 국왕들은 이 계보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넘버링(?)을 사용했다.

흥미롭게도 여기 해당하는 군주들은 본인의 대에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으나, 아들들에게 다시 쪼개서 분할 상속시킨 예가 많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아예 후계 상속 자체가 난항인지라 절대 순탄하게 상속시켰다고는 할 수 없다. 어쨌든 어느 쪽이건 그 영향이 서유럽 각국에 끼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 게다가 공교롭게 재위중 다른 왕들에 비해 굵직한 이슈가 많았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2.1.1 카롤링거 왕조
프랑크 왕국 최전성기의 군주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로 취급받는 인물. 카롤링거 왕조의 시조 피핀의 아들로서 교황이 황관을 씌워주는 전통을 만들어냈다. 프랑스식 이름은 샤를마뉴.
  • 카를 2세 (대머리왕)
루트비히 1세의 아들. 서프랑크(프랑스)의 국왕이었다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겸직. 본거지가 서프랑크여서 그런지 프랑스에서도 자국 왕가의 실질적인 시조격으로 취급하며 샤를 2세로 부른다.
  • 카를 3세 (비만왕)
루트비히 2세의 3남. 동프랑크(독일) 출신으로 서프랑크를 흡수하여 프랑크 왕국의 재통일을 실현했으나 다시 그 아들들에게 영지를 분할했다. 프랑스에선 샤를 3세지만 일반적으로 넘버링을 붙이지 않고 비만왕으로 불리며, 대신 비슷한 시기의 '단순왕'이라는 이명을 갖는 공식 계보상의 '샤를 3세'가 따로 있다.
2.1.2 룩셈부르크 왕조
보헤미아 군주인 맹인왕 요한의 아들. 즉 현재의 체코 출신으로 체코어에도 능통했다. 황위계승권을 성문화한 '금인칙서'의 제정으로 유명하다.
2.1.3 합스부르크 왕조
부르고뉴와 플랑드르의 군주인 필리프(카스티야의 군주로서 펠리페 1세)의 장남. 통일 스페인의 초대 국왕 카를로스 1세이기도 하다. 부친이 물려준 부르고뉴를 기반으로 출발해 선대의 후광 및 본인의 기지에 힘입어 차츰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약관의 나이에 카스티야와 아라곤을 아우르는 스페인 및 그 식민지의 군주가 되었으며, 마침내는 최대 경쟁자 프랑수아 1세를 이기고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까지 손에 넣어 스페인, 독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이탈리아 모두의 역사에 굵직하게 거론될 정도로 직접적이면서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2]. 재위중 쌍독수리 문장을 사용.
신성 로마 황제 레오폴트 1세의 차남. 처음에는 신성 로마 황위 대신 왕가가 끊어진 스페인의 왕위를 노렸으며, 실제로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에 뛰어들어 스페인과 중유럽을 아우르는 카를 5세 시대의 영광을 재현하려 했다. 그리고 루이 14세를 상대로 한 이 전쟁에서 사실상 이겼는데, 카를 5세 시절과 같은 초강대국 복귀를 걱정한 주변국들의 압력 탓에 스페인의 왕위는 포기하고 대신 신성 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다만 본인은 스페인 왕위를 내준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그런데 그 본인도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처럼 합스부르크 직계의 대를 끊은 장본인이기에, 그 유명한 딸 마리아 테레지아가 결혼으로 후계를 이었다.
2.1.4 비텔스바흐 왕조
바이에른의 군주 막시밀리안 2세의 아들. 카를 6세의 사망으로 일시적으로 대가 끊긴 합스부르크 왕가를 대신해 잠깐 제위를 차지했다. 애초에 혈연성도 없으면서 계승 원칙까지 씹어가며 프랑스를 끌어들여서 즉위했고, 본인의 야심도 대단했기에 잘하면 합스부르크를 몰아내고 새로이 비텔스바흐 왕가를 부활시킬 수도 있었겠지만 정작 즉위 후 3년만에 죽었다(…). 계보상 카를이라는 명칭을 이어받은 마지막 황제.

2.2 기타 유럽 국가들의 군주

  • 부르고뉴의 카를 (용담공)[3]
15세기 부르고뉴를 강국으로 이끈 정복 군주이자 카를 5세의 할머니인 마리의 부왕. 부르고뉴를 독립 왕국으로 성장시키려는 야심을 갖고 재위중 주변 소국들을 빠르게 흡수 합병했지만 스위스를 치다 대패를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으며 로렌을 둘러싼 낭시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또한 그의 유산은 딸 마리와의 혼인을 통하여 합스부르크가 어부지리로 챙겼다. 근데 따지고 보면 결과적으로 후대 합스부르크 왕가에 그의 피가 흐르게 된 셈. 이쪽도 프랑스에서는 샤를로 불린다.
레오폴트 2세의 아들(1771~1847). 신성 로마 황족이면서 당대의 먼치킨 지휘관 중 한 명. 이미 약관의 나이부터 몸소 전투를 지휘하여 연전연승해 네덜란드 방면의 총독까지 역임했고, 이후 나폴레옹 전쟁을 맞아 젊은 나이로 맹활약하며 연합군측의 뛰어난 지략가로 이름을 날렸다.[4] 나폴레옹 전쟁 당시 휘하 원수들, 개중에서도 최고급인 앙드레 마세나를 격파한다던가 장 란을 전사시킨다거나 하는 가공할 수준의 전적을 올렸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나폴레옹의 리즈시절 최대의 적수 중 한명으로 꼽힌다. 나폴레옹과의 전적을 제외한다면 1800년 호엔린덴 전투에 종군했을때 딱 한번 졌다.(...) 단, 그의 불운은 상대가 최종 진보스 나폴레옹이였다는 점. 결국 1809년 바그람 전투에서 몸소 총지휘권을 쥐고 나폴레옹과 쌍방 모두 거의 전군을 동원하여 거국적으로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여 패전.[5] 이후 그 책임을 통감하고 이후로는 나폴레옹 전쟁에 가담하지 않았다. 만년에는 테셴의 공작 직위를 누리며 전술서 집필 등으로 활약했다.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카를 1세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뒤를 이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다. 사실상 망조는 이미 부왕 때에 들어있었고 그 본인은 뒷수습 정도의 위치에 불과. 사실 그 자신도 평화주의자라는 점에서 제국의 지도자로는 부적격이었다. 같은 명칭의 카를 1세(카를 대제)가 제국의 창업자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가 마지막 군주라는 사실은 꽤 아이러니한 일이다. 결국 제국이 해체된 후 스위스로 망명하여 포르투갈에서 죽었다.
전통적으로 스웨덴 왕가에서 '구스타프'와 함께 즐겨 차용된 이름. 심지어 프랑스 출신으로 베르나도테 왕조를 개창한 칼 14세 요한도 즉위 후 칼(카를) 넘버링을 이어 칼 14세 요한이 되었다. 스웨덴에서는 현재 칼 16세 구스타프가 즉위해 있다.

2.3 가상인물

  1. 가령 영미권에서 매우 흔한 이름 '마이클'은 미카엘, '피터'는 사도베드로에게서 비롯되었고, '폴'도 사도 바울에게서 비롯되었다.
  2. 간접적으로 끼친 영향으로는 서유럽과 그 식민지들 전역에 광범위하게 걸쳐 있다고 봐도 된다.
  3. '용감공'으로도 불리지만 용담공이 더 일반화되어 있다.
  4. 당시 나이가 고작 20대 후반~30대였다. 나폴레옹도 나폴레옹이지만 이쪽도 ㅎㄷㄷ.
  5. 하지만 포로를 제외하고 전사자만 따졌을 경우 오히려 나폴레옹 측이 오스트리아를 능가하는 큰 인명 피해를 냈다. 만약 카를 측의 병력이 더 우세했다면 나폴레옹의 몰락은 몇년 더 앞당겨졌을지도 몰랐을 정도. 사실 나폴레옹으로서도 큰 피해를 감수하고서까지 이기지 않으면 안 되는 전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