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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l Richter, 1926.10.15~1981.2.15
독일의 오르가니스트, 쳄발리스트이자 지휘자. 주로 바로크 음악을 다루었고, 특히 바흐 작품의 연주와 지휘에 일생을 바친 인물로 유명하다.
1 생애
드레스덴 근교의 소도시 플라우엔에서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고,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봉직하던 드레스덴 크로이츠 교회 성가대에 입단해 찬송가와 코랄 등을 부르며 자연스럽게 종교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2차대전 후 라이프치히 음악원과 부속 교회음악 연구소에서 당대 바흐 음악 연주의 대가들이었던 칼 슈트라우베와 귄터 라민, 루돌프 마우어스베르거에게 음악 이론과 파이프오르간/하프시코드 연주, 합창 지휘를 배웠고, 1949년에 교회음악 국가고시에서 합격하고 졸업한 직후 바흐가 봉직했던 라이프치히 장크트 토마스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부임했다.
이듬해인 1950년에는 라이프치히에서 바흐 사망 200주년 기념으로 개최된 바흐 국제 음악 콩쿠르의 오르간 부문에서 아마데우스 베버징케와 함께 공동 우승했고, 같은 해 동독 국가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사회주의 체제의 경직성 때문에 실망했는지, 이듬해 뮌헨의 장크트 마르쿠스 교회 오르가니스트로 옮겨가면서 서독으로 영구 이주했다. 뮌헨에서는 오르가니스트 외에 뮌헨 국립음악대학의 오르간과 개신교 교회음악 강사로도 일했고, 동시에 종교 합창곡 연주를 위해 하인리히 쉬츠의 이름을 딴 아마추어 합창 모임인 하인리히 쉬츠 크라이스(Heinrich-Schütz-Kreis)의 지휘자로도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어 1953년에는 합창곡 반주를 위해 뮌헨의 3대 관현악단들인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바이에른 국립 관현악단에서 연주자들을 모집해 뮌헨 바흐 관현악단을 창단했다. 이듬해에는 합창단 명칭을 뮌헨 바흐 합창단으로 바꾸었고, 1953년 11월에는 이들을 이끌고 도이체 그라모폰 산하의 바로크/고음악 전문 서브 레이블인 아르히프에서 쉬츠의 장송곡인 무지칼리셰 엑세크빈(Musikalische Exequien)을 녹음해 첫 음반을 만들었다. 이듬해 10월에는 영국의 데카 기술진들과 스위스 제네바에서 바흐 작품과 리스트 작품으로 채운 오르간 리사이틀 음반을 제작했고, 이 음반은 리히터의 첫 스테레오 음반으로도 기록되었다.
1956년에 스승인 라민이 세상을 떠나자, 그가 칸토어(Kantor)[1]로 재직하고 있던 토마스 교회에서 후임 요청이 들어왔지만 거절하고 서독 국적을 취득했다(다만 거주지는 스위스 취리히에 두었음). 같은 해에는 뮌헨 국립음대의 오르간 교수로 승격되었고, 바이에른의 소도시 안스바흐에서 매년 개최된 바흐 음악제의 예술 감독과 뮌헨 바흐 음악제 창설자로도 활동을 시작했다. 서독 외무부의 재정 지원을 받아 뮌헨 바흐 합창단과 관현악단을 이끌고 첫 미국 순회 공연을 개최한 것도 이 때였고, 텔레풍켄에서 바로크와 고전 작품들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음반 작업을 시작한 것도 이 시기부터였다.
1958년에는 아르히프에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녹음했는데, 당시 축약판 연주가 일상적이었던 시점에서 생략 없이 전곡을 녹음하고 낭만주의식 연주 관행을 상당 부분 타파하는 등의 면모를 보여주어 화제가 되었다. 동시에 프리츠 레만의 지휘로 시작했다가 레만의 급서로 중단되었던 바흐 칸타타의 연속 녹음 프로젝트도 떠맡았고, 이 작업은 1978년까지 계속 진행했다. 바흐의 오르간 작품들[2]과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비롯한 하프시코드 독주곡의 녹음도 계속 만들었고, 바흐 외에 헨델 등 다른 바로크 시대 거장들의 작품이나 하이든의 교향곡 등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1968년에는 뮌헨 바흐 합창단과 관현악단을 이끌고 소련을 방문했고,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바흐의 요한수난곡과 미사 B단조를 공연해 화제가 되었다.[3] 이듬해에는 같은 단체를 이끌고 일본을 방문해 역시 수난곡과 미사, 칸타타를 지휘하는 한편 오르간과 하프시코드 리사이틀도 개최했다.[4] 이외에도 유럽 각지를 비롯해 미국과 캐나다, 아르헨티나 등지에서도 정기적으로 순회 공연을 했고, 음반 녹음도 계속 진행했다.
하지만 1970년대 초반 들어 이후 평생 동안 지병이 된 심장발작 증세를 겪기 시작했고, 시력도 무대에 설 때를 제외하면 두꺼운 안경에 돋보기까지 사용해야 할 정도로 급격히 악화되었다.[5] 결국 눈 수술을 받고 시력 감퇴 증상은 호전되었지만,[6] 심장 질환은 계속 간헐적으로 발병해 건강 악화를 재촉했다. 하지만 의사의 충고를 무시하고 계속 빡빡한 스케줄을 무리하게 소화했고, 1981년 1월에 빌헬름스하펜에서 마지막 연주회를 마친 뒤 뮌헨의 한 호텔에서 공연을 준비하던 중 심장발작으로 급서했다. 유해는 스위스 취리히의 엔첸뷜 묘지에 안장되었다.
2 수상 경력
- 라이프치히 국제 바흐 콩쿠르 오르간 부문 1등상 (1950)
- 동독 국가상 (1950)
- 뮌헨시 연주예술 부문 장려상 (1964)
3 음악 성향
연주자와 지휘자로서 바로크에서 후기 낭만에 이르는 레퍼토리를 보유하고 있었지만[7], 주로 다룬 것은 바흐와 헨델의 작품이었다. 특히 바흐의 경우 자신의 합창단과 관현악단 이름으로 삼았을 만큼 평생에 걸친 애착을 보여주었고, 4대 대작들인 마태수난곡과 요한수난곡, 미사 B단조,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의 1950~60년대 녹음들은 지금도 명반 대열에 들어간다.[8]
칸타타 녹음도 비록 음반사의 뒷심 부족으로 전집 완성까지는 하지 못했지만, 1958년부터 20년 동안 총 75곡을 녹음해 그 때까지 가장 많은 칸타타를 녹음한 기록을 세웠다. 세속 기악곡에서도 걸출한 녹음들을 수없이 남겼는데, 오르간 작품들과 골트베르크 변주곡 같은 독주곡에서부터 오렐 니콜레와 레오니트 코간 등의 본좌 독주자들과 협연한 소나타, 지휘와 독주를 겸해 제작한 브란덴부르크 협주곡과 관현악 모음곡, 하프시코드 협주곡 전곡, 뮌헨 바흐 관현악단의 단원들과 소편성으로 녹음한 음악의 헌정 등이 있다.
헨델의 작품도 1965년과 1972년에 각각 독일어와 영어판으로 녹음한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비롯해 합주 협주곡(콘체르토 그로소) 전집, 왕궁의 불꽃놀이 등을 음반으로 만들었다. 특히 메시아 영어판의 경우 기존의 뮌헨 바흐 합창단과 관현악단 대신 존 알디스 합창단과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영국인 독창자들을 섭외해 런던 현지에서 녹음하는 등 영어 원어와 영국의 음악 전통에 충실하려고 했다.
하지만 연주와 가창에 있어서 기존의 낭만주의 연주 관행을 타파하려고 노력했고, 덕분에 현대 악기를 사용하면서도 질척거리는 신파조에 빠져 멘붕하고 있던 올드비식 연주와는 다른 영역을 개척했다는 평을 받는다. 특히 합창단 단원들을 뽑을 때는 대부분 비전공 아마추어들을 데려왔는데, 바로크 종교음악의 투명한 음색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벨 칸토 스타일의 성악 교육을 받은 전문 성악인 보다는 순수한 두성으로 노래하는 일반인이 낫다는 판단이었다.
그 대신 종교음악 독창자들의 경우 노련한 프로 성악가들을 기용했는데, 이블린 리어, 에디트 마티스, 군둘라 야노비츠, 마리아 슈타더, 우어줄라 부켈, 이름가르트 제프리트(이상 소프라노), 헤르타 퇴퍼, 마르가 회프겐, 크리스타 루트비히(이상 알토), 에른스트 헤플리거, 페터 슈라이어, 프리츠 분덜리히(이상 테너),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 헤르만 프라이, 키트 엥엔, 프란츠 크라스, 지크문트 님스게른(이상 바리톤/베이스) 등 당시 독일과 오스트리아, 스위스, 영국 등지에서 알아주던 본좌들이 협연자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 만큼의 빠방한 올스타급 라인업으로 바흐 칸타타와 종교음악 녹음을 진행하는 지휘자는 지금도 없다고 할 정도.
바흐 관현악단 단원들이나 협연자들도 뮌헨 관현악단들의 수석/부수석급을 비롯해 당시 떠오르는 뉴비들이나 중견 연주자들을 대거 섭외했는데, 한스하인츠 슈네베르거(바이올린)와 오렐 니콜레(플루트), 한스-마르틴 린데(리코더), 만프레드 클레멘트(오보에), 헤르만 바우만(호른), 피에르 티보(트럼펫) 같이 독주자로도 대성한 인물들이 관현악단 단원들로 거쳐갔다.
다만 이후 연주 경향을 당대의 악보와 악기, 연주 양식에까지 끌고 간 시대연주 방식에 대해서는 '너무 기술적인 면의 고증에만 몰두해 음악 자체의 표현을 무시하고 있다'면서 회의적인 입장이었고, 비올라 다 감바나 리코더, 류트를 제외한 당대 악기의 사용을 자제했다. 심지어 자신이 연주하던 하프시코드도 20세기 초중반 현대적으로 개량된 노이페르트(Neupert)의 소위 '모던 하프시코드'를 고집했다.
이 때문에 1970년대 중반 이후 점차 세를 얻고 있던 원전연주 유행에 밀려 생애 후반에는 다소 구닥다리 연주자로 취급받기도 했지만, 워낙 바흐 음악의 보급에 열성적으로 이바지한 탓에 원전연주 계통 음악가들도 이 사람은 쉽게 못까고 있다. 다만 심장병 등으로 시력이 안 좋아지고 건강이 나빠지는 시점부터 1950~60년대에 보여주었던 강직함과 절도 대신 점점 느려지는 템포와 프레이징 때문에 다소 느슨한 음악을 만들었다는 지적은 종종 나오고 있다. 특히 말년의 골드베르크 녹음을 들어보면 틀리는 부분이 많다.
1990년대 들어서 텔레푼켄과 아르히프에 남긴 녹음들이 CD로 재발매 되었고, 2000년대에는 정규 스튜디오 녹음들 외에 독일과 일본의 방송국들에서 남긴 실황 녹음과 영상들이 정규 음반과 영상물로 발매되고 있다. 특히 이들 중에는 브루크너의 교향곡 4번이나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 베르디의 레퀴엠 같이 스튜디오 녹음이 없는 낭만 시대 작품들도 있어서 주목받고 있다. 또 독일의 음악영화 전문 제작사인 유니텔에서 1970년대 초반에 집중적으로 제작한 마태수난곡과 요한수난곡, 미사 B단조,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의 연주 영상도 도이체 그라모폰을 통해 DVD로 정발되었다.[9]
4 사생활
교회음악 전문가였지만 자신이 경배했던 바흐와 마찬가지로 정상적으로 결혼을 하고 자식[10]도 뒀는데, 음악할 때 만큼은 상당히 완고한 고집불통으로 유명했다. 물론 토스카니니처럼 단원들에게 욕질을 하고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안풀리는 대목이 있을 때는 잘 될 때까지 집요하게 반복을 시키고 유머 감각이라고는 전혀 없이 딱딱하고 건조하게 리허설을 진행했기 때문에 합창단원이나 관현악단원 입장에서는 꽤 피곤한 스타일이었다.
물론 이렇게 타인에게 엄격하게 한 것 외에 자기 자신에게도 엄격했는데, 이미 라이프치히에서 배우던 시절부터 집에 안들어가고 오르간에 앉아서 자다가 다음날 다시 연습을 하고 밤늦게까지 악보 연구에 몰두하는 등 상당히 집요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뮌헨 바흐 합창단의 전신인 쉬츠 크라이스의 지휘를 맡았을 때도 자신이 직접 홍보와 오디션을 주관해 일일이 단원을 재선발하고 연습을 시키는 등,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만들기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세세하게 지도하고 통제하는 독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원체 당대 바로크 음악의 전문가로 평가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엄격한 조교조련 방식에도 불구하고 알아서 유명 독주자들과 독창자들이 협연하자고 올 정도였다. 비록 연습이나 공연에서는 완고했지만 평소에는 단원들도 잘 챙겨주는 등 인망이 높았고 독일 정부와 음반사도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올스타 작업이었는데, 다만 1970년대 이후로는 그 완고함과 고집이 점점 심해지면서 섭외된 독창자나 독주자와 필요 이상의 마찰을 빚는 경우가 점차 잦아졌다. 건강이 악화되는 데도 불구하고 제발 좀 쉬라는 의사와 가족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다망한 활동을 한 것이 후반기의 침체와 이른 죽음의 원인이 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결국 리히터가 일생을 다 바쳐가며 키워낸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는지, 뮌헨 바흐 합창단과 관현악단도 리히터 사후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리히터 사후 완전히 대세가 된 시대연주와 음반 시장의 불황 탓이 큰데, 다만 창단 때부터 상설 단체였던 합창단은 한스-마르틴 슈나이트와 한스외르크 알브레히트가 차례로 지휘를 맡아 계속 활동하고 있다. 홈페이지
5 그 외
- 1977년 발사된 우주 탐사선들인 보이저 1호와 2호에 실린 골든 레코드에 리히터의 지휘로 뮌헨 바흐 관현악단이 연주한 바흐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2번 1악장이 음악 부문의 첫 수록곡으로 들어가 우주 공간을 돌아다니고 있는 중이다. 외계인이 만약 발견하고 틀 수 있다면 맨 먼저 접하게 되는 지구의 음악인 셈.
- ↑ 독일 개신교 교회에서 종교음악의 연주와 지휘를 전담하는 음악가의 직책
- ↑ 재미있는 점은, 칼 리히터는 바흐 오르간 작품 모두를 녹음, 연주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DG 오리지널로 나온 3장의 오르간 리사이틀과 과거 갤러리아 시리즈로 나온 바흐 오르간 협주곡, 텔레풍켄과 데카 녹음, 시디 두장 분량의 실황 녹음만이 남아있을 뿐이며, 이 안에서도 꽤나 중복되는 곡들이 많기에, 그가 녹음으로 남긴 오르간 곡은 극히 적다.
- ↑ 이 소련 공연은 녹음이 남아있긴 하지만, 음반으로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다.
- ↑ 대표적으로 1969년도 b단조 미사. 실제로 일본에서 가진 실황 녹음은 매우 많지만, 일부만이 상업적으로 유통되고 있다. 아직까지 나오지 않은 녹음중 대표적으로 1960년대 일본에서 가졌던 마태 수난곡 실황 등등
- ↑ 그가 습관처럼 펴댄 담배가 원인이라는 소리가 있다.
- ↑ 완전히 나아진 것은 아니어서, 생의 말년에는 되도록 많은 곡을 외우려고 했었다.
- ↑ 드물지만 바그너까지도 연주했으며, Hans Knappertsbusch가 자기 이후에 바이로이트에서 파르지팔을 연주할 지휘자로 지목했었다.
- ↑ 몇 곡은 여러번 녹음하기도 했다. 마태수난곡은 스튜디오 녹음으로 3종이 존재한다.
- ↑ 유니텔에 남아있는 녹음은 총 다음과 같다. 바흐의 오르간/쳄발로 리사이틀, 마태수난곡, 요한수난곡, b단조 미사,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헨델의 오르간 협주곡 (OP 4, OP 7)과 왕궁의 불꽃 놀이. 그리고 그의 아들이 만든 다큐 한개. 이중 DG을 통해 정식으로 발매된 것은 본문에서 언급한 바흐 작품과 아들이 만든 다큐 한개이다. 나머지는 아직까지는 미발매이며, 미발매 영상은 유튜브에서 사람들이 녹화한 영상물을 찾아볼 수가 있다. 참고로 리히터가 남긴 유니텔에 남긴 영상물 전체가 LD나 비디오 테이프로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아시는 분은 수정바람.
- ↑ 토비아스 리히터(Tobias Richter, 1953-). 주네브와 취리히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뒤 오페라 연출가와 음악행정가로 활동하고 있고, 브레멘 오페라극장과 뒤셀도르프/뒤스부르크의 라인 도이치 오페라극장 총감독을 역임한 바 있다. 1986년에는 아버지의 사망 5주기를 맞아 ZDF에서 특집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