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역사

캐나다의 역사
History of Canada
원주민누벨프랑스아카디아영국령 캐나다캐나다 자치령캐나다

본래 나무 많고 네이티브 아메리칸[1]들이 사는 좀 춥고 한가한 땅이었으나 1600년대부터 프랑스식민지 개척이 시작되어 프랑스인들은 퀘벡과 몬트리올에 식민지를 세웠다. 뒤늦게 온 영국인들은 뉴펀들랜드, 프린스에드워드, 허드슨 등의 식민지를 세웠고 영국 식민지들은 미국의 식민지들과 마찬가지로 독자적으로 발전하여 약 160여년 간을 프랑스와 함께 북아메리카 대륙을 지배했다. 마침내 1763년 프랑스-인디언 전쟁 끝에 프랑스 식민지들이 영국의 식민지로 굳어졌다. 영국은 캐나다 지역이 미국의 독립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막기 위해 퀘벡의 프랑스계 주민들이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고 프랑스어를 계속 사용할 수 있도록 특권을 인정하였다.

1800년대 들어 미국이 발전하면서 영국은 캐나다 지역이 미국에 합병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식민지의 행정, 정치적 통합에 나섰다. 이에 따라 퀘벡, 온타리오, 뉴브런즈윅, 노바스코샤의 4개 주로 이루어진 캐나다 자치령이 1867년 형성되었다. 이후 캐나다는 서부 개척을 시도하여 영토와 인구를 늘리면서 독자적인 발전을 시도했고 연방 구성주도 늘어났다.

처음에는 비중 없는 영국 자치령 수준이었지만 모국인 영국의 요청에 보어전쟁제1차 세계대전영국군 휘하가 아닌 캐나다군으로 참가해서 큰 활약을 함으로서 상당한 명성을 얻었고 하나의 국가로서 인지받을 수 있는 틀을 마련했다. 1909년에는 외무부가 설치되어 서서히 영국으로부터 외교권을 가져오게 되었고, 1927년에는 워싱턴 D.C. 주재 캐나다 대사관이 처음 문을 열고 미-캐나다 어업 협정도 캐나다 수산 장관이 직접 서명하였다.

1931년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헌장의 효력으로 영국 본국과 영연방 구성국들의 관계가 당시 국왕 조지 5세 아래 동등한 관계로 바뀌어 사실상 행정적 독립을 이루게 되었으며 1947년 캐나다 국적법이 시행되어 영국 여권 대신 캐나다 여권이 발부되기 시작하였다. 1949년 캐나다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법관으로 가득해 불만의 대상이었던 런던의 추밀원에서 최고재판소를 캐나다대법원으로 옮겨와 사법독립을 이루었다.

1982년에는 캐나다의 헌법(Canada Act)이 영국과 캐나다 의회에서 통과되고 엘리자베스 2세에 의해 정식 공포되어 영국과의 법적 예속 관계는 완전히 종료되었으며 동시에 대외적 명칭도 캐나다 자치령(Dominion)에서 캐나다로 변경하여 명실상부한 독립국이 되었다.

1 카르티에의 캐나다 발견

캐나다라는 땅은 서기 1000년 바이킹들이 들린 후, 드러난 적이 없었다. 이때 1492년, 콜럼버스가 미대륙을 다녀가며 상인들 사이에는 대서양을 따라 서쪽으로만 가면 동양에 다다를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후, 캐벗이라는 이탈리아인은 영국의 헨리 7세의 재정적 지원으로 도착을 하지만, 다다른 곳은 동양이 아닌 신대륙이었다. 이에 캐벗은 지명을 뉴펀들랜드라고 명명하며 영국의 땅이라고 선포한다.코딱지만한 땅인데 무슨 선포까지. 이에 경쟁심을 느낀 프랑스 왕국은 1534년 자크 카르티에를 머나먼 땅에 보낸다. 카르티에는 20일간의 항해 끝에 가스페 반도에 다다르게 되고 그곳에 "프랑스 왕 만세"라는 글귀가 적힌 깃발을 꽂는다.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이로쿼이 족의 일파였던 스타다코나의 추장 돈나코나의 두 아들을 배에 싣고 프랑스라 돌아갔다. 프랑스 왕은 황금어장과 빽빽한 삼림이 있다는 말을 듣고 2번째 원정을 보내게 된다.

Jacques Cartier.jpg

이후, 다시 스타다코나에 도착을 한 후, 두 아들을 돈나코나에게 다시 돌려주게 된다. 카르티에는 원주민들에게 강 상류에 가면 큰 마을과 더욱 더 큰 강이 존재한다는 것을 듣고, 탐사에 나선다. 그 강은 지금의 세인트 로렌스 강이다. 이때, 원주민들이 북쪽 연안을 가리키면서 '가나타'라고 했는데 이것이 지금의 국명 캐나다의 유래이다. 그들은 지금의 몬트리올까지 도달하나 너무나 추운 날씨에 괴혈병이 돌아 결국 실패하게 된다. 원정이 끝난 후 추장 돈나코나를 프랑스에 데려갔을때, 고향에 가고 싶은 돈나코나가 신비의 왕국이 있다는 거짓말을 하고;; 그 다음 원정에서 더 많은 선원을 잃는다. 그렇게 카르티에의 업적은 잊혀져 가게 된다.

2 아카디아의 탄생

3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캐나다가 완전히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이전이었던 1940년대까지 영국의 국가를 나라의 공식 국가로 사용한지라 특히 세계대전 추모식 때는 추모식장에 캐나다와 영국, 양국의 국기가 게양되고 캐나다 국가와 함께 영국 국가를 부르기도 한다. 영국 왕족이 캐나다를 방문할 때도 환영식을 상당히 성대하게 치루는 편이다. 특히 세계대전 당시 영국계 캐나다인들에게 영국의 이미지는 캐나다의 모국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하였다.

하지만 아래 역사적 설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캐나다인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서서히 영국으로부터 독립심을 키우기 시작하였으며 현재 세대는 위의 과거 세대와는 달리 영국을 캐나다와는 완전히 남남인 나라로 취급한다. 심지어 최근 2010년에 캐나다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된 설문조사에서는 응답자의 69%가 현재의 입헌군주제를 폐지하고 영국 국왕이 아닌 캐나다인을 자신들의 국가 원수로 정하고 싶다고 하기도했다.

캐나다는 총 아래 3번의 영국과의 헌법 법안을 통해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였다.

  • 1791년 헌법 (Constitutional Act of 1791): 당시 캐나다에 위치한 영국 식민지를 현재 퀘벡 주에 해당하는 프랑스계 지역 하류 캐나다(Lower Canada)와 현재의 온타리오 주에 해당하는 영국계 지역 상류 캐나다(Upper Canada)라는 2개 주로 나누고 2개 주가 각자 주 정부를 형성하여 영국의 허락 아래 자치적인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을 허용하는 내용의 헌법이 만들어졌다.[2]
  • 1867년 영국령 북아메리카법 (British North America Act of 1867): 일단 이전에 상류와 하류 캐나다가 각각 온타리오와 퀘벡이라는 이름으로 정정되었다. 당시 영국령 북아메리카라 불리던 온타리오, 퀘백, 뉴브런즈윅, 그리고 노바스코샤 식민지들을 통합아여 캐나다라는 이름의 체계적인 영연방 자치령 국가로 승격시켜 영국 정부의 허가 아래 헌법을 수정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는 당시 서로간에 협동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힘이 부실했던 네 식민지를 침략할 낌새를 보이던 미국을 견제하기위한 영국의 결정이었다. 캐나다는 이때부터 실질적인 국가가 되었으며 법안이 통과된 7월 1일이 현재 캐나다의 건국을 기념하는 국가 공휴일인 캐나다 날 (Canada Day)로 지정되어있다.
  • 1982년 캐나다 법 (Canada Act 1982): 캐나다가 점점 독립적으로 성장하면서 헌법 수정안을 통과시킬 때마다 영국 정부의 허가를 받는 것이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귀찮은 불필요한 절차가 되어버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캐나다는 한 국가로서 영국 의회의 허가없이 자치적으로 캐나다만의 헌법을 만들고 수정할 수 있다는 사항을 영국 정부가 허락하는 법안이었다. 이 법이 통과됨으로인해 캐나다는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게 되었다.

군사/외교적으로도 영국으로부터 독립적인 위치를 키워나갔는데 제1차 세계대전 때 캐나다가 영연방의 일원으로서 의무적으로 참전한 것에 대하여 전쟁 초기에 영국계 국민들은 당연히 영국을 도와야한다며 정부의 결정을 상당히 지지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상당한 수의 캐나다인들이 전사하였는데도 모자란 연합군 병력 때문에 정부가 강제로 징병령을 내린 것. 이에 대해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크게 반발했다. 이유는
1. 자신들과 관련도 없는 영국을 위해 왜 목숨을 바쳐야하느냐?
2. 퀘벡에서 살던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대체로 농부여서 원래 제외였으나, 징병으로 인해 전쟁에 강제로 가야만 했다.
3. 퀘벡 주 이외의 다른 주에서는 프랑스어를 사용할 수 없었기에 자신들이 캐나다의 소수민족 분류에 속하여 있으며 그로 인해 영국계에 비해 차별 대우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캐나다 병사들이 캐나다군이 아닌 영국군으로서 싸워야 했던 것, 그리고 전쟁에서 캐나다 병사들의 극적인 활약들 등으로 인해 캐나다인들 사이에서 자국에 대한 자부심과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심이 매우 커졌다.

때문에 1차 세계대전 후 승리한 연합군 국가들이 패전국들과 맺었던 베르사유 조약에서 캐나다는 영연방의 자치령 국가라는 영국의 관계국이 아닌 캐나다라는 국가로서 조약을 체결할 것이라 주장하여 관철되었으며 국제연맹에도 자발적으로 가입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에는 1차 대전 때처럼 영연방의 일원으로 의무적으로 참전한 것이 아니라 국회에서 회의를 통해 직접 참전을 결정하였으며 1956년 수에즈 전쟁 당시 중립과 평화를 주장하여 영국의 파병 요청을 거절한 사건이 캐나다가 과거에 비해 영국에 대한 군사/외교적 독립성을 갖췄음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4 과거 미국과의 관계

1770년대에 미국 독립전쟁이 한창 벌어질 때 미국 독립군이 당시 정복당하여 영국에 악감정을 가지고 있던 노바스코샤와 퀘벡 식민지 지역의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에게 자신들과 손잡고 영국에 대항하여 같이 미합중국을 이루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심지어 추후 독립전쟁에서 승리할 경우 미합중국에 가입할 식민지 목록에 노바스코샤와 퀘벡을 위해 두개의 빈칸을 남겨두기도 했었다. 약 몇 천명의 캐나다인들은 미국 독립을 지지하여 독립군을 지지하였으나 프랑스계를 포함한 대부분은 중립을 선언하였으며 노바스코샤와 퀘벡 식민지 정부 역시 미국 독립 정부의 제안에 공식적으로 답하지 않았다.

1775년 미국 독립군은 당시 북미 대륙에 주둔하는 영국군을 갈라놓을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데 비해 허술한 방어를 가진 그러니까 북미 영국 식민지들 중 제일 만만해보이던 퀘벡을 공격하기 위해 몽고메리와 아놀드 장군을 지휘관으로 보낸다. 몽고메리 장군은 빠르게 몬트리올을 점령하며 캐나다 측 지휘관인 칼튼 장군이 간신히 피신한 퀘벡 시를 공격하기 이전, 물자가 부족하여 보급병력을 지휘하던 아놀드 장군을 기다렸는데....메인 주에서 병력을 보트에 태워 강줄기를 통하여 빠르게 퀘벡으로 이동시키려 했던 아놀드 장군은 거센 강물 때문에 빠른 이동은 커녕 대부분의 보트가 침몰하는 참사를 겪었고 퀘벡에 든든한 보급병력 대신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거의 굶어 죽어가는 군사 600명과 함께 도착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물자는 부족한데 겨울이 가까워지며 폭설이 내리기 시작한다. 이 상황에서 두 장군은 무리하게 퀘벡 시 공격을 강행하였고 당연하게도 결과는 대패. 이 전투에서 대부분의 병사들과 몽고메리 장군을 잃었으며 아놀드 장군 역시 부상을 입고 퇴각한다. 그 후 미국은 1776년에 추가 병력을 퀘벡에 보냈으나 칼튼 장군은 오히려 마침 군 내에서 천연두가 돌아 사기가 많이 떨어진 독립군에게 반격을 가하여 퀘벡 밖으로 몰아낸다. 퀘벡을 공격한 것으로도 모자라 점령한 몬트리올 주민들에게 횡포를 부렸던 미국 독립군은 이미지가 크게 추락하여 그나마 캐나다에 내에서 소수인 독립군 지지자들도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된다.

독립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약 75,000명의 미국 내 왕정파들이 캐나다로 피신하여 캐나다는 명실상부한 친(親)영국 국가가, 미국은 반(反)영국 국가가되었다. 그 후에는 서로 평화롭게 왕래하는 시대가 왔으며 특히 캐나다 동부가 비옥하여 미국의 농부들이 캐나다로 오기도 하였다.

자신들을 이기고 독립을 한 미국이 아니꼬왔던 영국은 나폴레옹 전쟁이 터지자 영국군 탈영병들을 수색한다는 이유로 미국 상선들을 맘대로 수색하여 압수하고 미국인 상인들을 탈영병으로 몰아 영국군에 강제로 징집하거나 프랑스군과 내통한다고 몰아서 미국 상선들에 발포까지 한다. 이에 화가 난 미국인들 가운데서 영국과 다시 싸우자는 강경파 여론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때문에 당시 영국령 국가였던 캐나다는 다시 미국을 경계하게 되며 두 나라의 분위기가 험악해진다. 당시 초강대국대영제국을 형성했던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것은 미국에게는 그림의 떡이었고 미국은 영국이 나폴레옹과 싸우느라 다른 곳에 파견할 여유 병력이 부족한 틈을 타 선전포고는 영국에 하고 또다시 만만한 캐나다를 공격하여 영미전쟁이 발발한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영국의 지원 병력이 없던 캐나다는 속수무책으로 밀리며 미국에게 5대호 지역과 토론토, 그리고 몬트리올까지 내준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준비한 전쟁으로 공격하던 미국 역시 준비가 잘 안된 상태였으며, 특히 영국의 지원을 받으며 미국의 원주민 탄압에 대항하던 족장 테쿰세가 본격적으로 캐나다 방어를 도우면서 전쟁은 미국이 원하지 않았던 장기전으로 돌입하였다. 결국 미국의 우려대로 그 시간 안에 영국은 나폴레옹을 잡고 눈길을 캐나다로 돌리게 되고 오히려 캐나다에 병력을 파견하여 미군을 몰아낸 뒤 미국 본토를 침공한다. 그후 미국은 순식간에 뉴욕을 영국/캐나다 군에게 빼앗기고 수도 워싱턴 DC를 점령 당하여 백악관이 불태워지는 수모까지 겪는다! [3] 하지만 미군의 반격도 거세서 영국군은 결정적인 승리없이 각지에서 큰 피해를 입었고 해전에서도 미군은 의미있는 승리들을 거둔다. 이렇게 교착상태에서 나폴레옹의 엘바섬 탈출로 대 프랑스 전쟁이 다시 발발하자 상황이 급해진 영국과 더 전쟁을 해서 좋을게 없던 미국은 급하게 종전협약을 맺지만 21세기인 지금과는 달리 통신기술이 없던 시대인지라 종전 겨우 2주뒤에 아직 소식을 모르던 미군과 영국군과의 전투로 전쟁을 마무리한다. 이 전투가 그 유명한 뉴올리언스 전투.

영미전쟁 이후 캐나다와 미국의 관계는 다시 회복되기 시작하였으며 1800년대 초반에는 캐나다 서부에서도 골드러시가 일어나 많은 미국인들이 캐나다로 건너왔었다. 1800년대 후반 부터는 미국의 캐나다보다 훨씬 빠른 산업화로 인해 더욱 더 많은 캐나다 사람들이 미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으며, 1870년대에는 약 캐나다 인구의 1/6이 미국으로 이주한 적도 있다. 또한 캐나다에 라디오를 통한 미류열풍이 불어 대부분의 캐나다 라디오 방송 시간을 미국 노래들이 차지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얼마나 심했던지 캐나다 정부는 캐나다의 예술문화 발전 대책 마련을 위한 여러 협회들과 위원회들을 만들고 캐나다 최초의 방송국을 개국하였는데 이것이 현재 캐나다의 유명한 공영방송CBC의 시초이다. 그와 더불어 이 떄부터 여러 미국 기업들 캐나다에 진출하여 캐나다 시장에서 점유율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각각 1867년과 1903년에는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와 미국 워싱턴 주, 그리고 캐나다와 미국 알래스카 주 사이에 국경 분쟁이 일어나 잠깐 시끄럽기도 하였다.

세계대전 동안에는 같은 연합국 동맹으로 협력하며 더욱 우호적인 관계를 키우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우호적인 관계는 냉전시대에 돌입하면서 다시 수그러들고 만다. 캐나다가 되도록이면 중재 외의 이유로 국제 분쟁에 끼지 않기를 원했던 것과는 달리 미국은 캐나다 정부에게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달라고 하거나 캐나다에 소련을 견제할 핵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는 등의 적극적인 군사적 협조를 요구하였으며, 또한 캐나다 정부의 허락없이 캐나다에 영향을 줄 수도 있는 외교적 행동들을 독단적으로 감행하며 캐나다와 마찰을 빚었다. 캐나다의 트뤼도 수상은 워싱턴 DC 방문 당시 "당신네들 옆에서 사는 것은 마치 큰 코끼리와 자는 것 같군요. 당신들이 아무리 친절하고 얌전한 맹수라고 쳐도 그 옆은 움찔거리거나 잠자는 소리 하나하나가 신경쓰이니까요."라며 대놓고 미국을 까는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4]

냉전시대 동안 여러 전쟁에서 미군의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작전이나 학살,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미국 국내적으로 훌륭한 인물들이 잇달아 저격을 받는 참사들도 캐나다인들로부터 엄청 경악과 불평을 사며 캐나다 내에서 미국의 이미지가 하락하는데 한 몫하였다. 여담으로 냉전시대 당시 캐나다는 상공 방어를 위해 에브로 에로우(Avro Arrow)라는 당시 세계 최첨단 기술의 초음속 전투기를 개발하던 중이 였는데 거의 완성 단계까지 왔던 이 전투기 개발 프로젝트는 갑작스럽게 취소되며 백지화 되었다. 이에 정부는 예산 문제 때문에 취소되었다 발표하였으나 아직도 프로젝트가 취소된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며 여기서 당시 자신들을 능가하는 군사 기술력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이 캐나다 정부를 압박했다는 음모론도 존재한다.

소련의 붕괴로 냉전시대가 끝나고 미국이 캐나다에 군사적 요구나 행동을 하는 것도 줄어듬에 따라 냉전시대 이후 때 부터 현대까지 다시 관계를 회복하게 되었다.

5 역대 캐나다 수상

역대 캐나다 수상 항목 참조.

6 캐나다의 원주민 정책과 학대

개척자와 원주민의 존속을 건 정면 무력충돌이 끝없이 이어지던 미국과는 달리 학살은 별로 없었다만 이 이유는 캐나다나 영국이 원주민들을 사람대우 해줘서 그런게 아니고 제국주의 하의 식민지 통치질에 신명이 난 대영제국이 피보지 않고 합병해 먹으려고 벌인 만렙 사기질에 원주민들이 사실상 손놓고 당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보면 된다.

원주민들은 부족마다 달랐지만, 영토의 소유에 대하여 내꺼 니꺼 같은 개념이 강하지 않았다. 그래서 영국계 개척자들이랑 땅을 공유한다는 계약서를 쓰게 되는데, 원주민들은 이들이 기껏해야 몇백명 남짓 하겠거니... 하고 생각하고 있었고, 원주민들도 연합체가 아닌 부족국가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살았으며 서로 말도 다른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영국계 캐나다인들이 대려온 원주민 통역사들과도 말이 달라 계약을 하긴 했지만 계약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했다. 그래서 어느 부족은 다른부족들 보다는 상대적으로 유리하게 계약을 채결해 연금을 몇백년간 받는데 어느 부족은 아예 쫒겨나서 살기도 한다.

연금을 몇백년간 준다니 꽤 인도적인거 같지만, 웃기는건 이 연금도 사실 대영제국의 술수중 하나라는것이다. 원주민 보호구역이라고 불리우는 오늘날까지도 완전 흙밭에 다 비포장도로, 부실한 전기사정, 1800년대에 지어진 공동주택이 뜨문 뜨문 지어져 있는 생지옥에서 나오는 순간 연금을 받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어짜피 그 연금이라고 캐나다가 생색을 내가며 푸는 돈은 상업에 종사하는 캐나다 국민에게로 가서 결국 캐나다 내수시장에서 돌게 된다. 결국 캐나다만 유리한 이야기.

물론 계약 초기에야 마을이라고 불릴것도 주변에 없으니 그들에게 있어서는 꽁돈을 준것 같아 그들로써는 만족했겠지만, 이는 원주민 공동체로 하여금 농사도 지을 필요가 없게 만들었고, 그들이 직업을 가질 이유도, 가져야한다는 의무감도 없어지게 만들었다. 계약서 한방에 원주민들을 영국과 캐나다가 발행하는 화폐와 시장이 없으면 모조리 죽어야하는 사람들로 만들어 버린것이다. 그후 캐나다에 100% 의존하는 원주민들을 마구 휘두르게 되는데, 그것이 결국 오늘날에 이르러선 저학력 + 후술할 레지덴탈 스쿨로 인한 원주민들의 가정폭력과 강간 그리고 정신병 + 알콜중독 + 도박중독 + 저학력으로 인한 금전감각의 부재 + 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함 이라는 헬게이트급 악조건들의 시너지로 원주민들을 모조리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무너지게 만들었다.

아무튼 이렇게 부족마다 계약을 한 후, 그 부족 하나 하나에 1번 트리티 [5], 2번 트리티 이런식으로 이름을 붙힌 후, 불공평한 대우를 하기 시작했다.

일단 원주민들을 문명화 시킨답시고 온갖 병크들을 저질렀는데, 그 일례로 Residential School이 있다.

20세기, 캐나다는 국가의 구성원 전체가 같은 국가관과 여러 동질성을 공유하기를 원했고, 따라서 원주민들을 residential school에 보내 동화하려고 했다. 초기에야 들어오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으니 들어와라~ 하는 식이었지만, 이후에는 강제로 RCMP[6] 전신인 NWMP[7]와 Dominion Police를 앞세워 무력까지 동원해 가며 강제로 납치해 입학시켜버렸다. 학교에서는 영어만 사용할 수 있었으며, 이름도 영국식으로 바꾸었고, 강제로 머리카락이 잘렸으며, 옷도 "캐나다인"처럼 입게 했다. 교육 수준은 매우 낮았다. 자신의 문화와 관련된 행동을 하면 처벌을 받았다. 그것도 매우 가혹하게. 결국 학교를 졸업한 후의 원주민들은 더이상 원주민이 아니었지만, "캐나다인"도 아니어서 그 어디에도 속하게 되지 못했다. 몇몇 원주민들은 자신의 문화와 관련된 행동을 하는 것이 수치스럽게 느끼기 까지 했으며, 이로 인해 원주민 문화의 존속은 절단이 나버려서 요즈음에 들어서야 학자들에 의해 겨우 보존되는 판국이며, 원주민 언어 사용자들의 수는 급감했고, 원주민이라는 정체성이 희석됨에 따라 원주민 사회의 협동력이 떨어졌고, 캐나다영국이 그토록 바라던 반란분자들이 발생할 기회 제거라는 목적이 달성 되었다. 또한 학교나 교회를 개조해 만들어진 급조 학급들에서 백인들에 의해 어린 소녀들이 자주 강간 당했으며, 이 때문에 지금 까지도 백인 기독교 선교사 하면 원주민들은 치를 떤다.

또 어릴때부터 부모와의 강제로 떨어지고 가혹한 1900년대의 기숙사 생활과 이유없는 인종차별 그리고 강간은 원주민들 대부분에게 정신적인 충격을 강하게 안겼으며, 그들에게 성격장애나 알콜중독, 조울증을 안기는건 기본이고, 이들이 후에 가정을 형성하고 그들의 가정에서 가정폭력이 흔하게 일어나게 되는 이유가 된다. 이후 그런 개막장 가정에서 자라난 자녀들이 사회에 아무문제 없이 적응할 수 있을까? 이후 이들은 강간에 대한 심각성을 알지 못해 치안 부재와 더불어 여성 인권의 하락을 야기했다.

대영제국의 비 인간적인 식민지 통치 노하우에서 나와 원주민들을 파멸까지 몰고간, 인간이 도대체 어디까지 다른 인간을 지옥까지 몰고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 Residential School은 1840년도에 처음 생겨나서 1996년에 마지막 학교가 문을 닫았다.

2008년 6월 11일, 당시 스티븐 하퍼 정부가 처음으로 이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이후 쥐스탱 트뤼도 현 수상도 공식 사과했다.
  1. 캐나다에서는 개척 이전 이들이 살던 상황을 First Nations이라 부른다.
  2. 여기서 상류와 하류라는 명칭은 신분적 의미의 상류와 하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두 주를 지나던 세인트 로렌스 강의 상류와 하류를 뜻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하류 캐나다는 상류 캐나다 보다 북쪽에 위치하여 있으면서 이름에 하류가 들어가는 헷갈리는 명칭으로 특히 캐나다 역사 시험 때 고등학생들을 괴롭히게 되었다(...)
  3. 미국 역사상 워싱턴 DC가 적군에게 점령당하고 불태워진 적은 이때가 유일하다.
  4. 미국을 코끼리에 비유하며 미국이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행동 하나하나가 캐나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도 미국은 아무렇게나 행동한다는 뜻의 연설이다.
  5. 계약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6. 밑동네 양키 친구들과 해외에서 오는 포경업자들이 캐나다에서 깽판치고 난리도 아닌데, 끽해야 권총이나 든 유럽식 경찰 가지고는 제압에 무리가 있겠으니 헌병대 비슷하게 만들어야 겠는데 이름을 군대처럼 하면 프랑스인들과 원주민들이 반발해 폭동을 일으킬테니 경찰처럼 이름을 지어 만든 경찰대다. 예전에는 그런 이유로 만들어서 휘하에 라이플로 무장한 보병들, 기병대, 포병대 (...) 까지 끼고 다녔지만 지금은 미국의 FBI와 같은 연방경찰의 업무를 수행한다.
  7. North-West Mounted Poli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