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의 인물은 마리 퀴리의 남편인 피에르 퀴리.
< 1903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 | ||||
1902 - 헨드릭 A.로렌츠, 피에터 제만 | → | 앙투안 앙리 베크렐, 피에르 퀴리, 마리 스쿼도프스카 퀴리 | → | 1904 - J.W.S 레일리 |
< 1911년 노벨화학상 수상자 > | ||||
1910 - 오토 발라흐 | → | 마리 스쿼도프스카 퀴리 | → | 1912 - 빅토르 그리냐르폴, 사바티에 |
목차
1 개요
각기 다른 노벨 과학상을 수상한 유일무이한 학자.
성차별이 심하던 과학계에서 여성으로서 정점까지 찍은 학자.
마리 스크워도프스카[1] 퀴리(Marie Skłodowska-Curie, 1867년 11월 7일 ~ 1934년 7월 4일)
폴란드 바르샤바 출생. 프랑스인 물리학자 피에르 퀴리와 결혼해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고, 연구도 프랑스에서 했지만 단 한순간도 폴란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저버리지 않고 조국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했다. 무엇보다 최초로 발견한 원소에 폴로늄이라는 이름을 붙여줄 정도의 애국자였다.
앙리 베크렐과 함께 방사능연구의 선구자이며 과학계 전체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여성이다. 예전에는 조국인 폴란드의 2만 즈워티 지폐[2]와 업적을 이룬 곳인 프랑스의 500프랑 지폐 모두에 퀴리 부인의 얼굴이 찍혀 있었다.[3] 그만큼 업적이 대단한 인물.
2 고난의 인생
2.1 처녀 시절
분할되어 러시아 제국의 치하에 있던 폴란드 태생으로 원래 이름은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Maria Skłodowska). 마리의 삶은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1867년 11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가난한 교육자의 자식 5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는데 가족 모두가 불행을 겪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교사였다. 아버지는 물리학을 가르치는 교감이었고, 어머니는 바르샤바에서 손꼽히는 명문학교의 교장이었는데 폐결핵이라는 질병을 앓게 되면서부터 집에서 요양하게 된다. 부모님은 금슬이 좋았고 특히 아버지가 가정적이여서 마리의 가정은 화목했다. 마리 퀴리가 훗날 학자로서의 길을 가게 된 데에는 이런 부모님(특히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폴란드어로 쓴 답을 정답으로 처리했다는 것 때문에 교감자리에서 쫒겨나 평교사로 강등되다가 결국엔 교사직을 박탈당하면서 가족들의 불행이 시작된다.[4] 설상가상으로 평소 신중했던 아버지가 큰돈을 사기당하면서 생활이 급격하게 어려워진다. 결국 교사일 외에 집을 기숙사 형식으로 바꾸어 학생들을 가르치는 부업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게 되었다. 이외에도 큰 슬픔이 닥치는데 어느날 하숙생중 한명이 장티푸스에 걸렸는데, 그 병이 그녀의 언니들에게 전염되어 첫째 언니 조샤가 병을 이기지 못하고 12살의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또한 마리 퀴리가 10살이 되던 해, 결핵으로 오랜 투병생활을 하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게 된다. 마리 본인도 기관지염을 자주 앓았다.
게다가 공부는 대단히 잘 했지만 가난한 데다가 폴란드의 바르샤바 대학교는 남녀공학이 아니라 남대(!)여서 공학이 있는 프랑스 유학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집안이 워낙 가난했기 때문에 부유한 집안의 가정교사[5]로 일하다가 23세가 되어서야 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이 당시 가정교사로 일하던 집안의 아들과 사랑에 빠졌으나 당연히 가난뱅이 폴란드 여성을 며느리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집안의 반대로 결혼을 이룰 수 없었다. 만약 결혼에 성공했더라면 위인전에서 '퀴리 부인'이란 이름으로 알려졌던 그녀를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 때, 타이밍 좋게도 소르본 대학에서 합격통지서가 와서 이 집 아들과 눈물로 이별하게 된다.
마리의 청소년 시절에 대해 잘 알려진 에피소드가 있다. 당시 폴란드는 제정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폴란드의 학생들은 러시아어와 러시아 역사를 배우도록 강요받았다. 그리고 이를 감시하기 위해 러시아 관리들이 폴란드 학교들을 점검하는 경우가 잦았다. 어느 날 러시아 장학사가 마리의 학교를 불시에 방문해서 평소 성적이 좋다는 마리에게 러시아어와 러시아의 위인들, 그리고 러시아의 통치자 등에 대해 질문하자 마리는 유창하게 대답하면서도 속으로는 폴란드인으로서 커다란 모멸감을 느꼈다는 이야기. 마리 퀴리의 위인전에도 자주 등장하는 에피소드로 딸 이브 퀴리가 쓴 전기에도 언급된 내용이다. 마리의 폴란드에 대한 애국심을 강조하기 위해 사실을 바탕으로 각색한 이야기일 가능성도 있지만, 폴로늄의 이름을 러시아에서 독립도 안된 폴란드의 이름을 따서 지었을 정도면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할 수 있을 것이다.
2.2 결혼
소르본 대학에 진학하면서 어느 정도 부유한 사업가인 프랑스인[6]과 결혼하여 꽤 경제적으로 잘 살던 둘째 언니 브로냐 집에서 머물게된다. 언니와 형부는 퀴리를 극진히 대접했으나 되려 이런 과한 대접을 부담스럽게 여겨 일부러 헐값인 하숙집을 구해 지내게 된다.
그러다가 난방도 안되는 하숙집에서 추위에 떨면서 열심히 공부하다가[7] 제대로 먹지못하여 영양실조로 쓰러지기도 했다. 어린이 위인전에서도 하루에 빵 한 조각과 당근 하나만 먹으며 공부를 했다고 묘사할 정도니 실제로는 이보다 더했을 것이다. 다행히 이를 발견한 하숙집 주인이 빨리 의사를 불러 응급조치를 받아 목숨을 구했다. 이 때문에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언니와 형부는 경악했고, 곧바로 마리는 언니 집으로 끌려가게 된다. 그리고 강제로 스테이크를 먹어야 했다 울면서 그러다가 죽으면 어쩌냐고 슬퍼하는 언니에게[8] 사과했으나 민폐끼치기 싫다며 언니 집에 지내지 않고 다시 하숙집에서 지낸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언니와 형부가 지원해준 돈으로 좋은 하숙집을 구하고 좀 여유롭게 지내면서 공부에 전념했다고 한다.
소르본 대학 물리학과 수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이후 당시 35세의 노총각이었던 피에르 퀴리[9]를 만나 이듬해인 1894년에 소박한 결혼식을 올린 뒤 방사능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2.3 노벨물리학상 수상
마리의 연구를 지켜보던 피에르는 부인의 연구를 도와주었고, 결국 두 사람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1898년 방사능 물질인 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하게 된다. 이 업적으로 두 사람은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이게 왜 물리학상인가 하시겠지만 당시 방사능 현상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위배되는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E=MC2 으로 유명한 질량-에너지 등가 법칙은 한참 뒤에야 증명되었다.
그러나 폴로늄은 정치적인 논란을 불러일으킨 첫 번째 원소인데, 이때는 폴란드가 독립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러시아로서는 이런 이름을 좋게 볼 수가 없었던 것. 물론 폴란드인들의 반응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원래 마리는 (자기가 시작한 연구임에도 불구하고) 노벨상을 받지 못할 예정이었고, 피에르와 베크렐만 노벨상을 받기로 되어 있었다. 당시 마리는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아니었기에[10] 논란이 일었던 것. 게다가 형광 유리 제작에 필요한 우라늄을 빼낸 피치블렌드 10톤에서 라듐과 폴로늄을 분리해 내는 과정은 그야말로 단순 작업 노가다였기 때문에[11] '남편 잘 만난 덕에 노벨상을 받았다고'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그래도 마리의 업적을 인정하는 사람도 많았고, 남편인 피에르가 부부수상하게 해 달라고 죽어라 탄원서를 올린 까닭에 부부 공동수상이 겨우 가능했다. 그리고 마리와 피에르는 단숨에 세계적인 천재로서 유명해졌다.
그러나...
2.4 남편의 죽음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1906년 4월 19일, 피에르가 마차 바퀴에 깔리는 참사로 즉사하는 참변이 일어났다.[12]
당시 비가 와서 앞이 잘 안보였고 설상가상 화물마차를 운전하던 마부는 술이 덜 깬 상태였다.(아침에 대학으로 나가던 길에 사고를 당했다.) 마부는 횡설수설하여 어느 미친 놈이 자살했다고 헛소리나 했지만 사고현장에서 어느 사람이 신문에서 본 노벨상 수상자를 닮았다고 증언하면서 경찰이 와서 소지품을 보고 피에르 퀴리임을 확인하자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 마부를 두들겨팼다고 한다. 경찰들이 막지않았으면 죽었을 것이라고. 이 마부는 프랑스의 위대한 과학자를 죽인 살인죄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망했어요. 현대의 기준에서 보면 음주운전에 해당되기 때문에 자업자득이지만.
참고로 지금은 단종된 프랑스 프랑 500프랑에 마리아 퀴리와 함께 피에르 퀴리도 그려져 있는데, 그 왼쪽에는 마차[13]가 그려져 있다.
2.5 교수 취임
피에르가 죽은 이후 소르본 대학에서는 마리에게 어떤 대우를 해야 할지를 놓고 고민했다. 마침 피에르가 죽으면서 교수 자리도 하나가 비었기에, 피에르의 후임으로서 방사능을 연구할 사람도 결정해야 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소르본 대학은 마리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기로 결정했고, 이렇게 해서 마리는 프랑스 고등교육 역사상 최초로 대학의 여성 교수가 되었다.
교수직 인수 후 들어간 첫 수업에서 인사만 간단히 한 후 정확히 남편의 마지막 강의 이후 진도를 나갔다고 한다. 보통 교사가 바뀌면 새로 온 교사는 자기 나름의 커리큘럼대로 다시 수업을 진행하는데, 마리의 남편에 대한 존중이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2.6 불륜
그러나 이러한 위대한 위인도 흠이 있기 마련이니...
바로 폴 랑주뱅이라는 프랑스 물리학자와 불륜을 한 것이다.
폴 랑주뱅은 가정생활이 좋지 못했다고 한다. 끊임없이 처가와 아내 쟌느가 구박과 폭행으로 랑주뱅을 괴롭게 했고[14] 그는 퀴리 부부로부터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고 한다. 그러다 남편이 죽고 남편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서로 위로해주다보니 연인사이로 발전하게되었다고 한다.
“친애하는 폴, 어제 저녁과 밤은 당신과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들을 생각하며 보냈어요. 지금도 당신의 선량하고 부드러운 눈과 매력적인 미소를 떠올립니다. 당신 존재의 모든 감미로움을 다시 발견할 순간만을 생각하고 있어요.” -마리 퀴리가 랑주뱅에게 보낸 편지 일부 발췌-
하지만 결국 아내 쟌느에게 들켜 분노한 쟌느가 죽여버리겠다며 싸움이 일어날뻔 했지만 이들과 친한 물리학자 장 페랭과 신문사 편집자였던 쟌느의 형부 앙리 부르조아의 중재로 헤어진다는 조건 하에 사건은 잘 마무리 되는 듯 싶었다. 하지만 쟌느가 고용인을 통해 조사해보니 그 둘은 지속적인 만남을 계속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15]
“그는 떨리는 가냘픈 손으로 내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마그리트, 랑주뱅을 그 자신으로부터 구해줘야 해요. 당신이나 나는 강한 사람들이지만 그는 연약해요. 그는 이해와 따뜻한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제노아로 가는 도중 마리 퀴리를 회상하는 마그리트-
스웨덴에선 이 일로 소란이 있었지만 무사히 노벨상을 받게된다. 하지만 프랑스에선 이 일을 여러 신문사에서 떠드는 상황인지라 결코 프랑스는 그의 편이 아니였다. 편지와 함께 독설로 인해 결투까지 벌어졌지만 다행히 죽은 사람은 생기지 않았다. 결국 스웨덴은 노벨상을 거절하라는 편지를 주기에 이른다.
허나 마리 퀴리는
“상은 과학자의 사생활이 아니라 업적에 주어지는 것”
이라는 말과 함께 시상식에 참석하고 노벨상을 다시 한번 받게 된다. 이러한 사건은 랑주벵과 쟌느, 그리고 마리 퀴리까지 모두 헤어지게 만들었다.
“마리 퀴리는 여전히 나에 대한 애정과 내 슬픔에 대한 동정을 보여준다”, “그의 애정없이 어떻게 살아야할지 모르겠다” -1915년 랑주뱅이-
사실 동료들은 마리 퀴리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진 못한대신 숨겨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여담으로 아인슈타인은 이 소식을 듣고 마리가 결백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근거라는게, '마리가 남자를 사귈 능력이 없는데 뭔 소리?'라는 거. 나의 누나는 그렇지 않다능(...)했지만, 언론의 입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마리는 자살까지도 생각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마리는 기자들을 기피하게 되며, 이 태도는 1920년대에 멜로니라는 미국의 여기자와 만날 때까지 유지된다. 마리를 위해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라듐 1g을 선물한 인물이 이 사람.
여담으로 이때 마리는 하도 시달린 나머지 알프스로 딸들과 도망쳤고 거기서 아인슈타인을 만나 교류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이 마리와 산책을 하다가 문득 던진 한마디가 엘리베이터가 허공에서 떨어지면 거기 탄 사람들은 어찌될까?였는데 이는 일반 상대성 이론의 단초가 되었다고 한다. 마리가 이 질문에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엘리베이터가 낙하하면 탄 사람들은 죽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마리의 손녀 엘렌의 남편의 이름은 바로 미셸 랑주뱅. 폴 랑주뱅의 손자다.[16][17]
마리 퀴리와 불륜을 맺은 물리학자
마리 퀴리(Marie Curie 1867~1934) 노벨상을 두 번 탄 여성 과학자
2.7 노벨화학상 수상
여러 시련을 이겨내며 1910년 금속라듐을 분리해낸 공로로 1911년 노벨화학상을 타면서 최초의 노벨상 2회 수상자가 되었다. 이후 2회 수상자는 4명으로 늘어났지만 물리학, 화학에서 수상을 받은 사람으로써는 유일하다. 다른 분야로 2개를 탄 인물은 라이너스 폴링이 유이한 인물인데 이 분은 하나가 전공과는 쌩판 다른 평화상이라…[18]
이로써 과학계에서 이름이 높아졌지만 마리에 대한 프랑스의 차별은 여전했고, 그것이 1911년에 드러나게 된다.
2.8 여성이니까 안 된다
1911년 1월에 마리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후보가 되지만 두 표 차이로 떨어진다. 이민자이고 여자인 마리를 과학 아카데미 같은 곳에 들어오게 할 수 없다는 높으신 분들의 주장과, 위에서 소개한 스캔들이 시너지 효과를 냈기 때문이다.그래봤자 이분보다 멍청할텐데...
그리고 이들은 여성은 영원히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될 수 없다는 결의안까지 통과시켰다. 아무래도 미친 것 같아요 이 정신나간 관행은 1962년까지 계속되었다고.[19]
2.9 제1차 세계대전
제1차 세계대전에서 마리는 스스로 개발한 '리틀 퀴리'라는 자동차로 전선을 누비게 된다. 이 차에는 X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장치가 붙어 있었으며, 20대 정도가 만들어져서 부상병들을 진단하는데 큰 활약을 했다. 이때 마리에게 도움을 받은 부상병은 100만 명이 넘는다. 그러나 훗날에 밝혀진 바로는 이때 마리가 X선에 과다하게 노출된 것이 사망의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라고 한다.
마리의 딸인 이렌도 이 작업에 참가함으로서 무공훈장을 받지만, 막상 마리에게는 훈장 쪼가리 하나도 돌아가지 않았다. 게다가 마리는 이때 국가에 전 재산을 바쳤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동전 한 푼 안 가진 신세가 되고 만다.
2.10 일코강제해제
전쟁이 끝난 후 마리는 연구소로 돌아가지만, 연구소에는 라듐이 1g밖에 없었던 데다가 여기저기서 의학용으로 라듐을 빌려달라는 요청이 쇄도했기에 연구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 무렵 미국에서 마리를 인터뷰하러 온 여기자 멜로니가 사연을 듣고 모금운동을 전개, 라듐 1g을 구입할 돈을 마련하게 된다.[20]
이 소식을 들은 프랑스 정부는 자신들이 그동안 마리를 너무 막 대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마리가 미국으로 라듐을 받으러 가면 "어째서 프랑스 정부는 저렇게 훌륭하신 분을 그렇게 함부로 대하는가?"라는 소리가 나올 게 분명했던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 정부는 재빨리 마리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그것을 사양했다.
미국에 간 마리는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으며, 이때 일코강제해제를 당했다. 이전까지는 두 딸들과 주변 사람들도 그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니라고 착각하고 있었지만, 이날 이후로는 그럴 수 없게 된 것이다. 마리의 딸 이브는 이후 어머니의 전기를 쓰면서 이 사실을 기록했다. 엄마 속였구나 엄마
이후 마리는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라듐을 받게 되지만 수여식때 받은 것은 상자 뿐이고, 진짜 라듐은 귀국할 때 안전요원과 함께 배에 실렸지만 이는 라듐이 위험한 물질이므로 그만큼 주의깊게 관리되어야 했기 때문이라고. 그냥 주면 그건 그냥 암살인 거고
2.11 드, 드리겠습니다 필요없...
마리가 귀국한 후 프랑스 정부는 마리에게 국가상을 수여하기로 하고, 이번에도 마리가 사양하거나 거부하지 못하도록 거부권을 박탈한다.[21] Shut Up and Take My Medal 답정너 이 상에 딸려온 종신연금 덕분에 마리도 가난으로부터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고, 세계 각국을 방문하며 수많은 상을 받게 된다.
그리고 프랑스 의학 아카데미는 1923년에 마리를 회원으로 받아들인다. 마리 본인은 입후보한 적이 없었지만 의학 아카데미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그를 추천했으며, 다른 후보들도 마리의 입후보 소식을 듣고 모두 자발적으로 사퇴했기에 경쟁자가 하나도 없었다고.
그 이후에는 병치레를 제외하고는 비교적 순탄한 삶을 살게 된다.
2.12 마리 퀴리의 죽음
계속된 방사능 연구 탓에 말년에 방사능에 의한 악성 빈혈 등으로 몹시 고생하며 요양원을 전전하다가 1934년 사망. 하지만 방사능 노출도에 비하면 오래 살았다는 평으로, 그도 그럴 것이 라듐을 주머니에 대강 넣고 다녔던(!) 사람이었다 하니.(in 과학동아)[22][23][24]
다만 나중에 시신에 대한 방사능 측정이 이뤄진 결과, 잔류 방사능이 거의 남지 않았기에[25] 라듐에 의한 피폭보다는 1차대전 당시 부상병들을 진단하는 과정에서 X선에 과다하게 노출되었기에 병을 얻었다는 설에 무게가 실리게 되었다.
3 마리의 딸들
마리의 딸들 역시 범상치 않은 삶을 살았다. 장녀 이렌은 어머니의 뒤를 이어 과학자가 되었고, 차녀 이브는 피아니스트 겸 저널리스트 겸 작가로 활동하였다.
3.1 장녀 이렌(1897.9.12 ~ 1956.3.17)
< 1935년 노벨화학상 수상자 > | ||||
1934 - 해롤드 유리 | → | F. 졸리오 퀴리, I. 졸리오 퀴리 | → | 1936 - P. 드베이어 |
결혼전 이름은 이렌 퀴리. 이렌 퀴리는 어머니 마리의 제자였던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1900~1958) 결혼했는데 프레데리코는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기 위해, 그리고 퀴리라는 성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자신의 성 졸리오에 퀴리를 붙였다. 결혼 후에도 연구에 전념하였으며, 1935년에 인공 방사성 원소의 연구로 노벨화학상을 탔다.[26] 그는 핵분열 현상을 관측하기도 했는데, 검출된 원소들이 핵분열 생성물이 아니라 초우라늄원소라고 오류를 범하는 바람에 두 번째의 노벨상을 놓치고 말았다. 오토 한, 리제 마이트너, 프리츠 슈트라스만, 오토 프리슈[27]로 구성된 베를린팀이 핵분열을 발견하자 땅을 쳤다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프랑스가 함락되었을 때 그와 남편은 프랑스에 남았으며, 퀴리 연구소에서 종전까지 머물렀다. 이 연구소에는 나치 관계자들도 드나들었지만, 나치는 연구소 지하에 레지스탕스의 무기고가 있다는 사실을 전쟁이 끝나는 그 날까지, 단 한 순간도, 끝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어머니와 달리 그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회원에 여러 번 입후보했지만, 그때마다 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으며, 여성 인권 신장에 큰 기여를 했다.
1946년에 그의 인생에 먹구름이 낀다. 연구소에서 일어난 폭발사고로 폴로늄이 몸에 침투한 것. 이로 인해 그는 백혈병에 걸렸고, 1956년에 세상을 떠났다.
남편 프레데리크와의 슬하에 딸인 엘렌과 아들인 피에르를 두었으며(나이 순), 두 사람 모두 집안의 전통대로 훌륭한 과학자가 되었다. 엘렌은 파리 대학교 핵물리학과 교수 및 프랑스 국립 과학연구센터(CNRS) 연구부장직을 지내고 있다. 피에르는 생물학자이며 CNRS 소속 과학위원회의 위원이었다. 피에르의 아내인 안네도 생물학자다.
3.2 사위 프레데리크
< 1935년 노벨화학상 수상자 > | ||||
1934 - 해롤드 유리 | → | F. 졸리오 퀴리, I. 졸리오 퀴리 | → | 1936 - P. 드베이어 |
훌륭한 과학자이기도 했지만, 정치계에 몸담았기에 구설수에도 오른 사람이다. 공산주의자와 가까웠기에[28] 미국에서는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단, 이런 정치적 행보를 단순히 구설수에 오르내린 것이라고 보는 것은 다소 일방주의적인 시각이라고 볼 수도 있다. 2차대전 이후에는 핵의 군사적 사용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했고,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에도 중요한 서명자 중 하나로 참여했으며 이에 대한 평판은 상당히 높은 편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여담이지만, 버트런드 러셀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러셀-아인슈타인 선언 당시 핵의 무기화로 인한 위험(특히 방사능의 위험)을 경고하기 위한 풍자적 표현으로써 '(핵무기의 피해를 입은 사람 중에서) 운이 좋은 소수는 즉사할 것이고, 그보다 운이 좋지 못한 사람들은 오랜 고통속에서 서서히 죽어갈 것이다' 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에 대해 '어찌됐건 사람의 죽음을 행운이라고 볼 수는 없다' 고 거부감을 보였다고 한다. 이 점에서 보면, 풍자나 비꼬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진지한 성격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내 덕을 보려고 결혼했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상당히 노력을 했으며, 그 결과 아내와 함께 노벨화학상을 받기도 했다.[29] 전쟁 중에는 이렌과 함께 프랑스에 머물렀으며, 이때 레지스탕스의 활동을 몰래 지원하기도 했다.
전후에는 프랑스 원자력청 장관까지 지냈으며, 이렌이 죽은 후 2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3.3 차녀 이브
이브 퀴리(1904.12.6 ~ 2007.10.22)는 퀴리 집안의 전통을 어기고 과학자의 길을 포기했으며, 이후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찾기 위해 상당히 고생했다고 한다. 이때 마리의 친구들의 시선이 따가워서 힘들어했다고 한다. 마리 본인은 이브에게 과학자의 길을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딸이 연주회에 입고 나가는 드레스에 대해서는 불평을 했다고 한다. 수수한 옷만 입고 복장에 대해선 어느정도 보수적이었던 마리에게 딸이 입는 드레스는 '등이 몇 km는 파인' 것처럼 보였다고. 당대 유명한 미인에 늘 하이힐을 신는 등 언제나 맵시 있게 차려 입는 멋쟁이이고 사교적이라, 파티 등에서도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혼자 돌연변이
그래도 퀴리 집안의 딸답게 유명한 피아노 연주자 겸[30] 저널리스트 겸 작가로 활동하였으며, 마리가 죽은 이후 어머니의 전기인 <퀴리 부인전>을 썼고, 이 책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브는 프랑스에서 탈출하여 미국으로 피했는데, 비시 프랑스 정부는 이브의 반나치 활동에 분개하여 프랑스 시민권을 박탈해버린다. 그러나 그 소식을 들은 미국 정부는 아싸!!! 기다렸다는 듯이 미국 시민권을 주었고, 이후 그는 미국에서 살게 된다. 물론 나치의 패망 이후 이브의 프랑스 시민권은 회복되었다.
이브는 남편인 미국인 외교관 헨리 라부아스 주니어(1904~1987)와 함께 유니세프(UNICEF, United Nations Children's Fund. 국제연합 아동기금. 개발도상국의 어린이와 어머니를 돕기 위해 만들어졌다.)에서 활동하였으며, 이 단체는 1965년에 노벨평화상을 받게 된다. 이때 남편이 UNICEF를 대표하여 상을 받았는데, 이 일 때문에 이브 퀴리는 "저는 우리 집안의 수치입니다."라는 농담을 하곤 했다고 한다. 아버지, 어머니, 언니, 형부, 남편까지 모두 노벨상을 타는데 자신만 못 탄 게 이유라고. 노벨상 대신 레종 도뇌르, 전미 도서상(National Book Award), 폴란드 부활기사십자훈장(Order of Polonia Restituta) 등 훈장으로 찰갑을 만들고 100세 생일에 세계 국가원수들로부터 축전을 받은 사람만이 칠 수 있는 희대의 개드립이다(...)
이브 퀴리는 UNICEF에서의 활동으로 존경 받는 일생을 살았지만, 남편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31] 그래서 입양한 의붓딸인 앤 페레츠 라부아스가 이브를 어머니로 모셨다.
4 기타
- 마리 퀴리에 가려져 있지만 피에르 퀴리도 충분히 엄친아이다. 결정학, 전자기학, 방사선 연구의 선구자이며 특히 형 자크 퀴리와 함께 압전효과를 발견한 공로가 있다.[32] 무엇보다 공부를 독학으로 했다는 점에서...근데 아내가 워낙 유명해서...라기 보다는 너무 일찍 죽었기 때문. 살아 있었다면 부부가 함께 이름을 날렸을 지 모른다.
콩라인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명성을 얻은 후에도 자신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라는 찬사를 바쳤다.
- 마리는 의사들을 싫어했는데, 이는 의사들이 지루하며, 진료비를 안 받아가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물론 의사들이 마리에게서 진료비를 받지 않은 이유는 무시해서가 아니라 존경하기 때문이었다. 마리는 라듐 관련 기술을 공짜로 공개했고 라듐의 방사선은 수많은 환자들의 생명을 살렸다. 특허만 냈다면 단숨에 갑부가 되었을 텐데도 그 돈을 미련없이 뿌리친 것. 이런 사람에게 어느 의사가 감히 돈을 달라고 하겠는가.
- 노벨상을 탄 후, 마리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훈자로 결정되지만 그것을 사양했다. 그래서인지 제1차 세계대전때 수많은 부상병을 구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정부는 훈장을 주지 않았다.[33] 그러나 마리 퀴리가 미국에 라듐을 받으러 간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프랑스 정부는 다급하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하려고 했지만 사양했다.
- (다행히도) 이렌과 이브는 둘 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이렌은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이브는 UNICEF 활동 때문이다.
남들은 못 받아서 안달하는 훈장인데
- 랑주뱅과의 스캔들을 보도하면서 마리를 욕했던 신문들이 나중에 마리에게 붙여준 수식어는 "우리 민족의 가장 순수한 대표자"였다.
너네 민족이 아닌 거 같지 말입니다세계 어디든 간에 꼴통 언론들은 똑같구나.
- 사후 61년이 지난 1995년 4월 20일,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프랑스 팡테옹에 남편과 같이 이장되었다. 이 이장식에는 마리의 딸인 이브와 손자 손녀들, 그리고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과 폴란드 대통령 레흐 바웬사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참석했다. 방사능 원소를 연구하느라 백혈병으로 59세에 죽은 이렌과 달리, 당시 이브는 아직 생존했기에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있었다. 명심할 것은, 마리는 유명인의 아내라서가 아닌, 자신의 업적으로 팡테옹에 묻힌 최초이자 유일한 여성이다.
- 여담으로, 이장식 이후의 여론조사에서는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 4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여성 중에서는 단독 1위.
- 마리의 유품은 90년대에 박물관에 기증되었는데, 이때 이렌의 딸인 엘렌은 "이거 방사능을 띄고 있어요"라고 말했고, 곧바로 대소동이 벌어졌다고 한다. 엘렌의 증언에 따르면 그 말을 듣는 순간 박물관 직원들의 표정이 싹 변했다고. 직원들은 곧바로 비닐로 유품을 덮는, 실로 적절하지 못한 대응을 했지만 곧 전문가를 불러 제대로 된 처리 작업을 했다고 한다.
- 파리 대학교 중 파리 제 6대학교는 마리 퀴리와 남편 피에르 퀴리의 이름을 따서 "유니베시떼 삐에흐 에 마히 큐히 Université Pierre et Marie CURIE"라고 불린다. 이름처럼 과학과 의학에 특화된 대학교이다.
- 한국에서 위인전에 단골로 소개되었는데 1938년 딸 이브 퀴리가 쓴 전기 "마담 퀴리"를 직역한 퀴리 부인이란 이름으로 알려져있다. 가끔 퀴리 부부로 나올때도 있지만 그래봤자 마리의 유년시절부터 시작하고 피에르는 결혼 이후에나 등장한다.
- 폴아웃 4의 동료 중 하나인 퀴리(폴아웃 4)는 여러모로 마리에게서 따 온게 많은 캐릭터다. 이름부터 퀴리인데다[34] 과학적인걸 매우 좋아한다. 그리고 호감도 올리는 방법에 방사능 피폭되기(?!)나 핵탄두 발사기인 팻 맨을 발사하는 것도 있다(...)
- ↑ 흔히 스'쿼'도프스카로 알려져 있지만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ł가 자음 뒤에 올 때에는 두 음절로 갈라 적는다는 규정이 있기 때문에 외래어 표기법에 맞는 표기는 '스크워도프스카'이다.
- ↑ 신 즈워티가 아닌 구 즈워티
- ↑ 500프랑에서는 단독이 아니고 피에르 퀴리와 부부동반으로 올라왔다.
- ↑ 아버지는 애국심이 깊어 러시아어를 쓴다는 것을 혐오했다.
- ↑ 이전 문서에 천한 일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당시 가정교사는 사용인(하녀)보다는 그나마 대우가 좋았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높은 대우를 받지는 않았다. 모리 카오루의 엠마 빅토리안 가이드에 보면 자세한 해설이 있다.
- ↑ 정확히는 이 형부도 폴란드계 이민자 후예였다. 사업가이니 마당발이 넓었는데 폴란드인들과 매우 친했고 폴란드어도 잘했기에 마리나 아내인 언니에게도 매우 잘 대해주었다. 폴란드 독립에도 은근히 경제적인 후원을 해서인지 폴란드가 독립하고 나서 폴란드로 가서 사업을 크게 차리기도 했는데 바로 폴란드 초대 대통령인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 독립영웅이지만 그도 독재자가 되면서 결국 폴란드를 말아먹게 한다.)와 매우 친했다고 한다.
- ↑ 전기의 표현을 빌리자면, 물리공부를 하다 너무 힘들면 대수학을 공부하여 머리를 식혔다고 한다...
- ↑ 그도 그럴것이 어머니와 언니 조샤가 병으로 죽는 것을 보았으니 이렇게 걱정했던 것이다.
- ↑ 그래도 18살에 물리학 석사학위를 받고 결정구조의 대칭원리와 압전현상을 발견한 촉망받는 과학자였다.
- ↑ 물론 여성은 가입이 제한되어 있었다. 심지어 20세기 초중반까지만 하더라도 과학계의 지배적인 의견은 여성의 정신 구조로는 과학을 할 수가 없다라는 지금 정서로는 충공깽일뿐인 것이였고, 실제로 페미니스트 운동에서 제일 치열하게 싸운 분야 중 하나가 과학 분야이다. 바바라 매클린톡의 일화와, 리처드 파인만의 자서전에서 파인만이 자신의 여동생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부분을 참조할 것.
- ↑ 피치블렌드 원석 10톤을 아궁이에서 계속 가열해서 폴로늄 10g을 얻었다고 한다.
- ↑ 에브 퀴리가 쓴 전기에는 바퀴에 머리가 깔려 (중략. 위키러의 상상에 맡긴다.) 사망했다고 적혀있다. 어린이 위인전에조차 '부서진 머리뼈에 붕대를 감았다' 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니(...)
- ↑ 실제로는 마리 퀴리가 고안한 방사능 운반차
- ↑ 사실 랑주뱅의 잘못도 없지는 않다. 아내한테 잘해주지도 않으면서 특이한 성격의 자신을 이해하기만을 바라니 이런 남편을 아내가 좋아할리가 없다. 장모와 처제도 아내한테 잘하지 않는 사위이자 형부인 랑주뱅을 정말 싫어하여 걸핏하면 말다툼을 벌였다. 하루는 랑주뱅과 심하게 말다툼하던 장모가 폭발해 사위한테 철제 의자를 집어던지고 말았는데 이게 랑주뱅 얼굴에 맞아 상처투성이가 된채로 출근한 사건도 있을 지경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정도의 폭행은 너무 심하다.
- ↑ 아내와의 관계에서 아들 둘을 낳았으나 이 사건 때문에 부부관계는 파탄이나버려 랑주뱅이 가출하다가 결국엔 부부가 별거하고 만다. 나중엔 아내도 지쳐서 자식들에게만 신경쓰고 남편이 비서를 정부로 삼는것에 신경쓰지 않았다.
- ↑ 손자와 손녀가 결혼!
- ↑ 폴 랑주뱅은 이후에도 장녀 이렌 퀴리의 지도교수를 맡았고, 마리를 비롯한 퀴리가문과의 친분도 계속 이어갔기 때문에 새삼 놀라운 일은 아니다는 평이 많다.
- ↑ 2차 대전 당시 나치에 반대하는 운동을 했고 승전 후에도 미국 정부에게 공산주의자라고 몰리면서까지 핵무기 사용 금지와 세계정부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다니신 과학계의 양심이시다. 여담으로 다른 노벨상 2회 이상 수상자들은 타인과 공동 수상을 한 반면 폴링은 유일하게 2회 모두 단독 수상을 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 ↑ 결국 퀴리 부부의 제자인 마르게리테 프레이가 처음으로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여성 회원이 되었다.
- ↑ 자기 소유의 라듐은 1g도 없고, 라듐이 너무 비싸서 구입할 수가 없다 말에 놀란 멜로니가 "부인께선 라듐에 대해 특허권을 갖고 계시지 않습니까?"라고 하자 그런 거 없다는 답을 한다. 그리고 "라듐은 하나의 원소이며, 모든 사람들의 것."이라고 말한다. 마음만 먹으면 백만장자가 될 수 있었는데, 그 기회를 인류를 위해 포기한 것이다.
- ↑ 수여식장에서 진짜로 이런 말이 나왔다.
- ↑ 마리 퀴리의 유품인 논문이나 요리책 등은 방사능을 띄고 있다. 보고 싶으면 보호의를 착용해야 한다. 퀴리 부부가 라듐을 분리할 때 1주일에 1렘씩 방사선을 뒤집어썼고, 그 이후에도 방사선에 자주 노출되었던 영향이다. 선구자의 숙명일지도.
흔히 하는 소리로 뭐(독약 같은 거) 먹으면 죽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누군가가 그거 먹고 죽었기에 아는 거다. - ↑ 휘하의 연구원들은 모두 안전수칙을 철저히 지켰다.
- ↑ 이는 스펀지 45회에서도 소개되었다.
- ↑ 팡테옹에 안장될 때 이 검사가 이루어졌으며, 잔류 방사능은 기준치를 훨씬 밑돌았다고 한다.
- ↑ 최초의 모녀 수상. 마찬가지로 부자 수상도 있는데 바로 닐스 보어와 그의 아들 오게 보어다. 둘 다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 ↑ Otto Robert Frisch, 리제 마이트너의 조카
- ↑ 공산주의자와 가까웠다기 보다는, 프랑스 공산당 당원이었다. 스탈린 정권의 실태가 알려진 뒤 탈당하긴 했지만.
- ↑ 마리가 노벨상을 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때 언론은 "남편 잘 둬서 노벨상을 받았다"며 이렌을 깠다. 아무래도 그 버릇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 ↑ 그의 어머니가 피아노 치는 것을 장려했다고 한다.
- ↑ 그도 그럴것이 첫 결혼을 50이 넘는 연세에 하였으니...
- ↑ 쿼츠 시계 및 고주파수가 필요한 전자회로, 일렉트릭 기타의 픽업, 라이터와 가스 버너의 점화부, 초기형 점화 플러그 등 응용 분야가 무궁무진하다.
- ↑ 이브가 쓴 어머니의 전기에서는 "(부상병을 구한 공로로) 훈장을 주었다면 어머니는 그것을 받았을 것이다"라는 언급이 있다.
- ↑ 본래는 미스 내니인 C.V.R.I.E(Contagions Vulnerability Robotic Infirmary Engineer, 전염성 취약성 로봇 의료 엔지니어) 이지만, 스스로 이렇게 바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