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 반도

(크림 자치 공화국에서 넘어옴)


크림 반도. 그림 출처

1 개요

흑해, 아조프 해반도.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영토 분쟁 지역이다. 중심도시는 심페로폴(Симферополь)이며 크림타타르어로는 아크메스지트(Aqmescit, 하얀 모스크)라고 한다.

이곳의 이름은 영어식인 '크리미아(Crimea)'와 러시아/우크라이나식인 '크림'이 혼용되어 쓰이고 있다. 국립국어원에서는 '크리미아', '크림' 두 표기를 모두 옳은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반도 전역의 면적은 2만 7064㎢이다. 소련 시대에는 소련 내부의 러시아 소속으로 있다가 1954년 소련니키타 흐루쇼프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로 편입시켰고, 소련 붕괴 이후 신생 독립국 우크라이나의 일부가 됐다가 2014년에 투표를 거쳐 다시 러시아로 옮겨갔다. 세바스토폴 특별시와 크림 공화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바스토폴을 제외한 면적은 2만 6100㎢이다. 크림 반도의 인구는 235만(2007년 기준)으로, 크림 (자치) 공화국에 197만명이 살고 세바스토폴 특별시에 38만명이 산다. 수도 심페로폴의 인구는 2013년 기준 36만으로, 세바스토폴과 비등하다.

2 행정

우크라이나에 속해있던 당시에는 세바스토폴을 제외한 크림 자치 공화국세바스토폴 특별시로 구성되어 있었다. 2014년 크림 위기의 와중에 독립을 선포하면서 크림 반도는 독립국인 크림 공화국을 선포하고 세바스토폴은 크림 공화국 내의 특별시가 되었다. 러시아의 행정 구역으로 가입하는 조약을 맺으면서 세바스토폴이 빠진 지역이 러시아의 구성 공화국인 크림 공화국이 되고 세바스토폴은 연방시가 되었다. 조약이 비준되면서 러시아는 크림 반도 전체를 크림 연방관구로 지정하였다.

반면 우크라이나에서는 러시아의 합병을 러시아의 무력 점령으로 간주하며, 2014년 <우크라이나 일시적 점령지에서 인권과 자유 제공에 관한 법>을 제정, 자국의 영토라고 간주하고 있다.

3 역사

크림 반도의 역사는 상당히 역동적이다. 기원전 5세기경 크림 반도 및 케르치 해협 우안 지역에 보스포루스 왕국이 성립되어 번영하다가 폰투스 왕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이후 부활하였으나 로마 제국의 종주권하에 놓이게 되면서 영향을 크게 받았다. 340년 고트족의 침입으로 로마의 지배권이 상실되었고 370년 훈족의 침입을 받은 이후 명맥이 거의 끊기는 듯했으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치세 당시 동로마 제국이 반도 남부의 지배권을 다시 확립하였다. 반도 중북부는 고트족에 이어 고대 불가르인, 그리고 하자르족이 지배하다가 10세기 키예프 공국이 이 곳에 진출하면서 비잔틴의 영향을 받고 동방 정교로 개종하게 된다. [1] 서 동로마의 붕괴 이후 이 지역 대부분은 킵차크 칸국에 속했으며 1475년 오스만 제국이 해안 지역의 카파 등 제노바 공화국 식민지와 비잔틴계 국가인 테오도로 공국을 멸망시키고 전 지역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18세기, 킵차크 칸국의 후예이자 오스만 제국의 속국인 크림 칸국예카테리나 2세 치하의 러시아 제국이 정복하면서 이후 쭉 러시아령이 되었다.

지배층인 칸과 그 일족은 몽골 계열이었지만 피지배인은 튀르크계 부족들로 구성되었고 그것도 얼마 뒤에는 둘이 서로 섞여버려서 크림 칸국은(사실은 시조인 킵차크 칸국부터 이미) 이미 전형적인 튀르크계 이슬람 국가였으며, 오스만 제국 시기 사실상 속국으로 지내다보니[2] 튀르크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어 오늘날의 크림타타르인의 언어는 터키어와 별반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아제르바이잔어와 터키어보다 크림타타르어와 터키어가 더 가까울 지경이니 할 말 다했다[3]. 물론 그냥 타타르어도 같은 튀르크 어군이나 크림 타타르어는 오우즈 어군, 카잔 타타르어 등 나머지 타타르어는 킵차크어군으로 전혀 다르다.

그러자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흑해 영해상을 통해 접경하게 되고 이 때문에 2번에 걸쳐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발발했으나 여전히 분쟁 지역이었다. 당시 러시아는 부동항을 얻기 위해 남진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고, 부동항 확보을 위한 1차 목표가 바로 크림 반도였다.[4] 그리고 영국프랑스서유럽 열강들은 이런 러시아의 남진을 잠재적인 위협으로 간주하고 이를 막기 위해 오스만 제국을 지원했다. 또한 직접적 이득이 없던 사르데냐 왕국이탈리아 반도 통일을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지원받기 위해 이 전쟁에 끼어들었다. 이것이 크림 전쟁이다.

전쟁은 1854년부터 1856년까지 3년 간 지속되었고 러시아는 열강의 지원을 받은 오스만 제국에 패해 1856년 파리 조약을 통해 흑해 일대의 통제권을 잃고 남진이 저지되었다.

이 전쟁에서 나이팅게일이 영국의 여성 간호사 부대를 창설해 전장에서 간호병으로 활약해 현대전 간호병의 전략을 정립하는데 기여했다. 그 외에도 여러가지 의미에서 크림 전쟁은 근대 전쟁과 현대 전쟁의 경계선을 그은 전쟁이라고 평가한다.

image012.jpg
1919년 11월 말의 상황. 사실 이 해만 해도 엄청난 격동이 벌어졌기에 지도가 조금씩 다르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러시아 혁명 이후 크림 반도 지역과 그 북부의 오늘날 헤르손(Kherson) 주 지역은 크림타타르인에 의해 일시적으로 독립했으나, 1921년 소련에 편입되었다. 이때 헤르손 지역은 우크라이나에 편입되고, 크림반도만이 소련 내의 크림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 공화국(Крымская Автономная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ая Советская Республика)이 되었다.

독일군이 소련에서 얼추 물러난 1944년 5월에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나치 점령기 당시에 자행된 민족 차원의 대 소련 반동행위에 대한 보복 조치"를 운운하면서 크림타타르인들을 저 멀리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켜버린다. 스탈린 이 작자는 중앙아시아로 사람 보내는 게 취민가 봐 사족이지만 이때 반도 전체에 흩어져있는 23만여 명에 달하는 남녀노소들을 화물열차편에 잔뜩 쑤셔넣어서 출발시키기까지 딱 이틀 걸렸다고 한다.[5] 인종청소가 끝난 후 이 지역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내에서 누리던 소수민족 자치공화국 지위를 잃고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일개 주로 격하당했다가, 1954년 당시 소련 서기장이었던 우크라이나 출신의 니키타 흐루쇼프에 의해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편입되었다.
소련이 해체될 무렵이던 1991년 1월, 러시아계 주민들의 요구로 다시 크림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 공화국이 되었고 1992년 헌법 개정을 통해 크림 자치 공화국이 되었다. 사실 이 때까지만 해도 러시아는 크림 반도에 워낙 미련이 남아있었다. 특히 크림 반도에 거주하던 러시아계 주민들은 1992년 독자적인 헌법 제정을 통해 우크라이나와 따로 놀려고 할 정도로 친러 성향이 매우 강한 편이었고, 트란스니스트리아같이 러시아군이 개입할 경우 사실상 러시아 통제 아래 독립국으로 분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옛 소련 해군에 속했던 흑해함대 관할 등의 문제를 두고 우크라이나 정부와 조율 중이던 러시아 정부 측에서는[6] 우크라이나를 크림 반도의 관할 문제로 자극시키고 싶어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1994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참여한 부다페스트 협약(Budapest memorandum)을 통해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가우크라이나의 영토 주권을 보장하기로 한터라 협약을 부득이 어겨가면서까지 크림 반도를 차지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1997년 우호친선조약을 통해 흑해함대를 양국 해군 관할로 분할하고, 세바스토폴에 러시아 흑해함대 주둔을 허용시키며, 크림 반도를 우크라이나 영토로 인정하면서 겨우 막을 내리게 되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저 역사가 다사다난한 지역 중 하나였을 것이다.

3.1 러시아의 크림 합병

2013년부터 2014년 사이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로 친러 성향의 야누코비치 정권이 붕괴되고 반러, 친서방 성향의 임시정부가 구성되었다. 당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경제지원을 당시 러시아에서 추진하고 있던 유라시아경제연합의 관세동맹으로 유도시켜 유라시아 연합을 보강시키려 하고 있었던 터라, 우크라이나 정부의 정권교체는 곧 세력권 이탈로 해석했다. 즉, 러시아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우크라이나를 끼워들이려 하면서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시키려고 공들이던 프로젝트가 친러정부의 전복으로 전부 물거품이 된 것이다.[7]

이에 러시아에서는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던 친러 인구를 자극시켜, 크림 자치정부 및 러시아계 주민들은 2014년 2월, 영토 내의 공항을 장악하고 독립 움직임을 보이며 우크라이나 중앙정부와 마찰을 빚었다. 러시아군은 세바스토폴에 주둔 중이던 해군 병력을 이용해 의용대를 빙자한 군사력으로 크림 반도를 점차 장악해 나갔다.

이후 러시아에 의해 장악된 크림 자치공화국은 3월 16일 주민들을 상대로 독립의사를 묻는 국민투표를 진행해 독립 여론을 확인, 3월 17일 크림 공화국으로 독립해 다음날인 3월 18일 러시아 연방에 가입하면서 사실상 러시아로 편입되었다.

한편, 미국과 EU를 비롯한 서방에서는 이 사건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제를 시작했으며, UN에서는 총회 결의안 68/262호를 통해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을 불법이라고 규정했다.[8]

4 인문, 지리

지형적으로 반도이지만 사실상 이나 월경지와 다름 없는 위상을 지녔다. 크림 자치 공화국을 기준으로 한 우크라이나 본토와의 경계는 10km가 안 되고, 그나마도 중간에 5km짜리 호수가 있다. 좁은 지협으로 본토와 떨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연결되었고 오히려 끝부분이 넓게 퍼져있다는 점에서 우리네 고흥군이나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반도와도 비슷하다. 러시아 본토와는 육로 연결은 되어 있지 않고 무조건 흑해, 아조프 해를 건너야 한다는 게 문제로, 당장의 전기나 수도 등 사회 기반을 우크라이나 본토에서 제공받고 있어 어찌 될지 모른다. 제2의 싱가포르? 다만 러시아 본토와의 사이에서 가장 좁은 케르치 해협이 5km밖에 안 되고 러시아 본토와 연결되는 다리를 건설하는 중이다.

제주도와 지리조건이 상당히 비슷하다. 국토의 남쪽에 위치하고 섬(이나 다름없는) 입지, 해당 국가에서 가장 따뜻한 기후 등등. 세바스토폴러시아 흑해함대 기지가 있는 것처럼 제주도에도 해군기지가 들어설 예정이기도 하고.

터키의 영향과 크림타타르계의 비중이 높다 한들 스탈린의 강제 이주 등으로 10% 내외의 소수민족이다. 러시아계가 58% 이상을 차지하며, 우크라이나에서는 러시아계, 러시아어 사용자의 비중이 가장 높은 곳이다. 특히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계 인구의 자치권 확대 및 독립 요구가 종종 있었던 곳으로, 2014년 우크라이나 시위에서도 러시아로의 편입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가장 높았다.

얄타 회담이 열렸던 얄타(Ялта)시가 이곳 남부의 흑해와 맞닿은 도시이다. 인구 13.5만 러시아의 소치와 함께 유명한 흑해의 여름 휴양지로, 소설가인 안톤 체호프1899년부터 1904년까지 이곳에 살기도 하였다. 알룹카(Алупка) 역시 유명한 크림 반도의 휴양지이다. 그래서 유로마이단 초기엔 크림 위기가 경쟁 관광지인 소치를 띄우고 크림을 엿먹이려 한다는 일부 우크라이나 정치인의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크림이 독립했지 다만 관광객의 70%는 우크라이나인이고 25%는 러시아인인 크림 반도의 특성상 이번 사태로 관광에 타격을 입을 가능성은 적지 않다.
  1. 블라디미르 1세 대공이 동방 정교를 받아들이고 비잔틴 황제 바실리우스 2세의 동생인 황녀 안나와 결혼하면서 세례를 받은 것으로 전해지는 지역이 현재의 세바스토폴 근처인 케르네소스이며, 이런 까닭에 러시아 혁명 이후 공산화되기 이전의 크림 반도는 정교회와 러시아 국민의 성지 역할을 했다.
  2. 그냥 속국도 아니라 만약에 오스만 제국의 제위가 끊어져버린다면 크림 한국의 칸이 오스만 제국의 제위를 잇는 조건이었다(!) 거의 청나라와 내몽골 수준.
  3. 사실 단순히 거리만 따지면 크림 반도와 오스만 제국 본토가 제법 멀어보이지만, 흑해 덕분에 서로 접근이 편리했던 영향도 있다. 애초에 동로마 제국 시절어도 제국 도시 케르손이 있었고 폴리스 시대에도 흑해를 통해 그리스 문화권과 긴밀히 교류해 왔음을 생각해 보면 전통적으로 크림 반도와 그리스, 발칸, 소아시아 문화권과 아주 가까웠음을 알 수 있다.
  4. 당시 제정 러시아가 제국주의 (...)에 거하게 취해있던지라 크림 진출은 부동항이 주 목적이었지만, 크림 반도가 바로 동로마가 제대로 개척해 놓은 땅이고, 이 루트를 통해 키예프 공국이 정교회로 개종함으로써 러시아 문명이 시작되었다는 점 때문에 더욱 의미심장한 진출이었다. 전략적 거점이거니와 역사적 의미까지 있고 제국주의까지 동반되니 눈에 불을 켜고 점령하려 들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
  5. 기차 안에서만 최소 7천여 명이 사망하였다. 또한 2천 4백여 가구에서 이산가족이 발생하였는데, 그 과정에 굉장히 혐의쩍은 구석이 있어서 가족끼리 생이별하라고 고의적으로 찢어놓았다는 음모론이 종종 제기되고 있다. 중앙아시아에 끌려간 사람들은 1980년대가 다 돼서야 고향 땅으로 돌아올 권리를 되찾게 된다. 크림 타타르인의 관점에서 이 사건을 바라보는 노래의 뮤직비디오. 공식 영상은 아니다.. 우크라이나는 2016년 5월 스톡홀름에서 열린 제61회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위 곡을 출전시켰다. 러시아를 포함한 유럽과 소아시아 모든 나라의 공중파방송에서 프라임타임에 생중계되는 행사 임을 감안해도 현재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반러감정이 얼마나 심한지 알 수 있는 부분. 사실 전전해와 전해 유로비전 콘테스트에서 러시아 가수들에 대한 반응을 생각해보면 지금 유럽에서 전반적으로 러시아의 이미지가 매우 좋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 실제로 흑해함대는 1997년 우크라이나 해군과 러시아 해군 흑해함대로 분할되기 전까지 러시아, 우크라이나 공동관할이었다.
  7. 물론 우크라이나에 새로 수립된 민주정부를 인정하고 이후 몇 차례 영향력 행사를 통해 친러 정부의 성립을 지원하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실제로 2004년 오렌지 혁명 이후 집권한 빅토르 유셴코 정권에도 비슷한 방법을 썼다) 유로마이단의 경우 워낙 야누코비치 정권의 부패와 실정으로 친러 성향 정치세력이 인심을 잃었던지라, 적어도 러시아가 바라던 근시일 내민주적인 방식(선거)을 통해 친러 정권이 집권하기는 힘들었다.
  8.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