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드 비야

뉴욕 시티 FC No.7
다비드 비야 산체스 (David Villa Sánchez)
생년월일1981년 12월 3일
국적스페인
출신지아스투리아스
신체 조건175cm, 69kg
포지션스트라이커, 윙어
주로 쓰는 발오른발(양발)
등번호7번
프로 입단1999년 스포르팅 히혼 입단
소속 팀스포르팅 히혼 B (1999~2001)
스포르팅 히혼 (2001~2003)
레알 사라고사 (2003~2005)
발렌시아 C.F. (2005~2010)
FC 바르셀로나 (2010~2013)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2013~2014)
뉴욕 시티 FC (2014~)
멜버른 시티 FC (임대) (2014)
국가대표97경기, 59골[1]
별명El Guaje[2]
스페인 올해의 축구 선수
사비
(2005)
다비드 비야
(2006)
산티 카소를라
(2007)
EURO 2008 BEST XI
FW
안드레이 아르샤빈
FW
다비드 비야
MF
루카 모드리치
MF
차비 에르난데스
MF
마르코스 세나
MF
하밋 알틴톱
DF
유리 지르코프
DF
카를로스 마르체나
DF
카를레스 푸욜
DF
필립 람
GK
이케르 카시야스
2010 FIFPro World XI
FW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FW
다비드 비야
FW
리오넬 메시
MF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MF
사비 에르난데스
MF
웨슬리 스네이더
DF
카를레스 푸욜
DF
헤라르드 피케
DF
루시우
DF
마이콘
GK
이케르 카시야스
2010 FIFA 월드컵 올스타 팀
FW
다비드 비야
FW
디에고 포를란
FW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MF
차비 에르난데스
MF
웨슬리 스네이더
MF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DF
마이콘
DF
세르히오 라모스
DF
카를레스 푸욜
DF
필립 람
GK
이케르 카시야스
HC[3]
비센테 델 보스케
2010 FIFA 월드컵
골든 볼
디에고 포를란
실버 볼
웨슬리 스네이더
브론즈 볼
다비드 비야



1 개요

스페인 국가대표 역사상 최고의 공격수.

2010년 월드컵 스페인 우승의 일등공신

스페인 출신의 축구 선수로 현재 뉴욕 시티 FC 소속이다.
데이비드 빌라가 되었다.
다비드 비야가 데이비드 빌라 유니폼을 입고 뛰는 이유.

클럽에서의 활약상을 놓고 보면 라울 곤살레스가 개인 기록상으로나 커리어상으로나 우위에 있으나 국가 대항전에서의 활약과 성적을 놓고 말하자면 단연 비야의 우위.[4] 유로 2008 우승을 기점으로 시작된 스페인 황금기를 이끌었던 공격수로서, 비록 자신의 첫 월드컵이었던 2006 월드컵은 아쉽게 16강에서 탈락했으나 2년 뒤 유로 2008에서는 눈부신 활약으로 우승을 이끌었다.[5] 그리고 특히 2010 월드컵에서는 스페인이 이겼던 6번의 경기 중 총 4번에 걸쳐 결승골을 넣으며 위기의 순간마다 팀을 구원해낸 구세주이자 스페인에게 월드컵을 안긴 주역이었다. 다만 유로 2012의 경우에는 아쉽게도 부상 때문에 참가하지 못했다.

9살 때 대퇴부 골절로 인해 축구 선수로서의 생활이 힘들어질 뻔했으나 특별한 합병증 없이 완벽히 회복되었다고 한다. 이때 아버지가 왼발을 연습하라고 한 덕에 오른발이 낫자 그는 양발잡이가 되었다.


2 유년기와 유스시절

비야는 스페인 북부 지역 아스투리아스 랑그레오의 작은 마을인 투이야 출신으로, 광부인 호세 마누엘 비야의 아들이다. 그는 9세때 오른쪽 다리의 넙다리뼈에 금이 가면서 축구 선수가 되기 위한 기회에 큰 위협을 받았으나, 완전히 회복하였다. 이 부상으로, 그와 그의 아버지는 왼쪽 다리의 힘을 강화시키는데 힘을 썼고, 그에 따라 비야는 양발잡이가 되었다. 그는 그의 아버지의 꾸준한 지원을 회상하며 "제가 9살 때 오른쪽 다리를 골절하고 깁스를 맬 당시, 그는 옆에서 공을 계속해서 던지고 던지며, 왼쪽 다리로 공을 차도록 했어요. 저는 아버지가 불참한 훈련 세션이 한번도 잘 기억나지 않지요. 저는 축구장에서 혼자였던 적이 없었습니다." 라는 말을 밝혔다.[6]

비야는 14세가 되었을때 감독과 멀어져 환멸감을 느끼고 축구를 거의 그만두려 한 것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의 부모의 격려로, 그는 꿈을 계속 쫓아 나갔고, 그가 재능으로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도록 현실화시켰다. "그 당시 단 한푼도 벌지 못하고 시즌 내내 벤치에만 앉아 있었던 저는 아무도 아니였고, 축구에서 빠져나와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었죠. 그러나 제 아버지는 뒤에서 지원하였고, 제 경력의 전환점까지 응원해 주셨습니다." 라고 그는 말하였다. 그는 랑그레오에서 축구 경력을 시작하였고, 17세가 되었을때 그는 마레오 축구 아카데미에 입학하였다.


3 클럽 경력

3.1 스포르팅 히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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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야는 다수의 아스투리아스 연고의 클럽들의 관심을 받았으나, 지역의 대형 클럽들 중 하나인 레알 오비에도는 비야가 키가 너무 작고, 충분한 잠재력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그의 유년시절 우상인 키니의 발자취를 따라 지역 클럽인 스포르팅 히혼에서 입단하였고, 프로무대에서 대 도약을 하였다. 클럽의 유소년팀에서 시작한 그는 2000-01 시즌에 1군에 데뷔하였다. 2시즌 간 25골을 득점한 후, 그는 1군 주전이 되었다. 당시 스포르팅 히혼의 감독이었던 페페 아세발은 "비야가 위협적인 존재가 되기에 체력이 부족했었다"고 말하였고, 기회를 조금씩 부여하였으며, 비야의 체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은 "선례에 없을 정도로 열정적이었다"고 덧붙였다.


3.2 레알 사라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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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히혼의 1군에서 1번의 풀 시즌을 보내며 40골에 가까운 득점을 기록하였다. 비야는 스포르팅이 재정난을 겪게 되면서 스페인 1부 리그로 이적해 활약할 기회를 잡게 되었고, 2003년 여름에 새로이 승격한 레알 사라고사가 그를 약 €3M에 영입하였다. 이 스트라이커는 상위 리그에 적응하는데 큰 문제를 겪지 않았고, 사라고사에서의 첫 시즌에 17번 득점하였다. 그의 리그 데뷔전은 그가 이적하고 나서의 사라고사 첫 라 리가 경기로 팀은 갈리시아 연고의 데포르티보 라코루냐 원정에서 0-1로 패하였다. 그의 첫 골은 2경기 후에 터졌는데, 레알 무르시아와의 경기에서 그는 8분에 득점하여 사라고사의 리드를 2-0으로 벌렸고, 경기는 3-0 승리로 종료되었다. 2003년 12월 4일, 그는 2-2로 비긴 아틀레틱 빌바오전에서 처음으로 멀티골을 삽입하였고, 2004년 4월 25일에 비야는 4-4로 비긴 세비야 원정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것은 물론, 4골을 모두 자신이 득점하였으며, 이 중 두 번의 득점은 팀에게 리드를 가져다 주기도 하였다.

사라고사는 2004년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 진출하였고, 그는 아라곤 연고의 클럽이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2-1로 리드해 나가는 천금같은 골을 득점하였고, 경기는 3-2 승리로 종료되었다. 국가대표팀 첫 차출과 데뷔 이후, 사라고사는 그의 업적에 대해 자랑스러워 하였고, 그들은 축구 응원가 "이야 이야 이야, 비야 마라비야" ("illa illa illa, Villa maravilla") 를 부르기 시작하였는데, '비야' (Villa) 와 '마라비야' (maravilla) 의 말장난으로, 여기서 '경이로움'을 뜻하나 '아주 멋진'이나 '굉장한'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3.3 발렌시아 C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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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인 킬러본능이 정점에 달한 전성기 시절

숱한 명장면을 만들어낸 박쥐군단의 골사냥꾼

다비드 비야하면 무엇보다 빼놓고 설명할 수 없는게 귀신같은 수비라인 부수기, 치명적인 골결정력, 그리고 외로운 공격 상황에서도 선봉장으로써 자신의 몫을 100% 다 해낸다는 신뢰를 주는 믿음직한 플레이였는데 이러한 장점들이 최고조에 달했던 것이 발렌시아CF 시절이다. 이 시절 그는 팀이 최고의 페이스를 달릴 때도, 감독의 해괴한 운영으로 팀의 조직력이 와해되는 상황에서도 꾸준히 최전방에서 공격을 이끌었고 심지어 키플레이어로써 전방에서 조율을 해주면서도 발렌시아 득점의 대부분을 완벽히 책임져주었다.

레알 사라고사에서 성공을 거둔 후, 팀은 자금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 결과, 비야는 2005-06시즌에 스페인 축구의 거함들 중 하나이며 신임 감독인 키케 산체스 플로레스가 취임한 발렌시아에 €12M의 가격으로 매각되었다. 발렌시아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나서의 첫 경기인 벨기에의 헨트와의 UEFA 인터토토컵 경기에서 비야는 발렌시아에서의 첫 골을 신고하였고, 팀은 2-0으로 이겼다. 그는 2005년 8월 27일, 1-0으로 승리한 레알 베티스와의 경기에서 교체 출전하며 리그 데뷔전을 치르었다. 그 다음 경기에서 친정팀 레알 사라고사의 경기에서 대체적으로 1-2로 끌려가는 와중에 비야는 루벤 바라하와 81분에 교체 투입되어 1분만에 동점골을 득점하였고, 경기는 2-2로 종료되면서, 발렌시아는 승점 1점을 챙겼다.

9월 21일, 비야는 바르셀로나와의 캄프 누 원정경기에서 극적인 골을 득점하며 발렌시아에 또다시 귀중한 승점 1점을 안겼는데, 한때 빅토르 발데스의 걷어내기가 비야에 리바운드되어 골네트 안으로 빨려들어가면서 발렌시아가 리드를 잡기도 하였다. 10월 23일, 비야는 또다른 스페인 축구의 거함인 레알 마드리드를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결승골로 격침시켰다. 그리고 2006년 2월 12일에는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또다시 득점하였고, 그의 한 골로 1-0으로 승리하여 승점 3점을 쟁취하였다. 비야는 2006년 2월 4일, 데포르티보 라코루냐와의 리아소르 원정에서 또다시 득점하였는데, 이 골을 ESPN에서는 "훌륭한"으로 묘사되었으며, 득점 과정의 "터닝"을 더욱 강조한 시드 뢰베는 "그의 최고 (골)"이라고 묘사하였다. 그는 볼을 중앙 부근 (45m 외곽) 에서 공을 찼고, 이 공은 키퍼의 머리를 지나 네트를 갈랐다. 2006년 4월 23일, 그는 아틀레틱 빌바오와의 산 마메스 리가 원정 경기에서 5분 간격 (80분과 85분 사이) 으로 첫 해트트릭이자 라리가 역사상 최단 시간 해트트릭을 기록하였다. 이 시즌동안 그는 발렌시아 소속으로 35번의 리그 경기에서 25번의 득점을 기록하였고, 이 시즌 득점왕에 오른 바르셀로나의 사무엘 에투에 이어 득점 2위에 랭크되었다. 비야가 이 시즌에 기록한 총 득점 횟수는 에드문도 수아레스가 60년도 더 전에 기록한 이래 발렌시아 선수로는 역대 최고이다.

비야는 2006-07 시즌에도 훌륭한 활약을 계속하였고, 전 레알 마드리드의 거물 페르난도 모리엔테스와 공격 듀오를 구축하였다. 비야와 모리엔테스는 모든 대회를 통틀어 43골을 합작하였다. 같은 해, 비야는 UEFA 챔피언스리그에 데뷔하였고 그의 첫 경기는 0-1로 패한 잘츠부르크와의 경기로 막판에 교체 투입되었다. 2차전에서는 선발로 출전해 득점을 기록하여 3-0 승리에 일조하였고, 발렌시아는 챔피언스리그 조별 리그 진출에 성공하였다. 로마와 샤흐타르 도네츠크를 상대로 기록한 순도 높은 골은 발렌시아의 16강 진출을 도왔고, 인테르나치오날레와 맞붙게 되었다. 비야는 1차전 원정 경기에서 프리킥으로 득점하였는데, 인테르나치오날레의 수비수들 중 한 명은 비야가 "우리를 바보같이 보이게 만들었고, 그가 혼자 다 하였다."며 불만스러워 하였다. 발렌시아는 8강에 진출하여 첼시를 상대하였다. 비야는 1, 2차전에 모두 출전하였으나, 득점에는 실패하였다. 발렌시아는 결국 런던 연고의 팀에 합계 2-3으로 패해 탈락하였다. 2006년 10월, 그는 발롱도르(올해의 유럽 축구 선수로 흔히 지칭되던 시절) 50인 후보들 중 한명으로 선정되었다.

에스파뇰과의 경기에서의 천금같은 골, 세비야전의 결승골로 비야는 이 시즌에 16골을 기록하였고, 그는 이 시즌의 라 리가에서 최다 득점 6위에 랭크되었고[7], 더 많은 어시스트를 기록하였다.

2007-08 시즌은 비야나 그의 팀 동료에게 있어서 힘든 시즌이었다. 비록 그는 헤타페와의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 승리하며 발렌시아 소속으로 트로피를 한개 들어올렸으나, 시즌 초에 그들의 지도자였던 키케 산체스 플로레스가 해임되었고, 이후 4월 22일에 성적 부진으로 후임이자 최악의 운영을 보여준 로날트 쿠만이 경질당하였다. 쿠만의 뒤를 이은 감독은 알메리아 감독으로 높은 평가를 받은 우나이 에메리였다. 쿠만 감독 하에, 비야는 26경기에 출전하여 18번 득점하였다. 그는 발렌시아 이적 후 처음으로 트로피를 획득하였는데, 그는 개인 통산 두 번째 코파 델 레이 트로피를 준결승전에서 바르셀로나를 3-2로, 결승전에서 헤타페를 3-1로 이기면서 획득하였고, 팀은 이로 인해 UEFA컵 진출권을 획득하였다. 시즌 종료 후, 그는 발렌시아와 6년 계약 연장을 하면서, 2014년까지 클럽에 남게 되었다.

이 시즌에, 비야는 또다시 챔피언스리그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1-0으로 이긴 샬케 04와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득점하였고, 첼시와의 경기에서 1-0 선제골을 득점하였으나, 조 콜과 디디에 드로그바에게 연달아 실점하며 1-2로 패하였다. 발렌시아는 죽음의 B조에서 최하위로 탈락하였다. 발렌시아 리그 100호 출전 경기에서, 비야는 레반테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하였는데, 이는 발렌시아에서의 54, 55, 56호 리그 골이었다. 그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시즌 최종전에서 2골을 추가하며 시즌을 통산 18골로 마무리하였다.

UEFA 유로 2008에서 득점왕을 차지한 후, 비야는 2008-09 시즌에도 그 기량을 유지하였는데, 그는 3-0으로 이긴 마요르카와의 시즌 개막 경기에서 시즌 1호골을 득점하였다. 베언트 슈스터 당시 레알 마드리드 감독이 비야 영입에 실패한 후 비야에게 "야망이 없다"라고 비판하였고, 비야는 이에 대해 "축구 야망은 입으로 꺼내는 것이 아니라, 발로 보이는 것이다. 당신은 많은 이유를 대어 가며 비판할 수 있다. 안 좋은 하루를 보내거나, 기회를 놓치거나, 많은 이유로. 그러나 나는 항상 야망을 가지고 있고 항상 그럴 것이다. 나는 그 이유를 사라고사, 스포르팅, 랑그레오, 그리고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필드 위에서 증명하였다고 생각한다."라고 대응하였다. 2008년 12월 2일, 비야는 2008년 발롱도르 투표에서 최종 7위에 랭크되었고, 2009년 1월 12일에 비야는 국가대표팀 팀 동료이자 바르셀로나 선수인 안드레스 이니에스타와 더불어 2008년 FIFA 올해의 선수 시상식의 2008년 최고의 선수 랭킹에서 공동 9위에 랭크되었다.

발렌시아는 UEFA컵 조별 리그를 2위로 통과하였으나, 비야는 이 대회에서 많이 출전하지 못하였고, 주로 미출전 교체 요원이거나 막판 교체 선수였다. 그는 마리티무와의 경기에서 막판 결승골을 득점하였고, 디나모 키예프와의 32강전에도 출전하였으나, 득점하는데 실패하였다. 1, 2차전에서 합계 3-3으로 동률을 이루었으나, 원정 다득점 원칙에 따라 다음 라운드 진출권을 디나모 키예프에게 내주어야 했다.

시즌 중반에 꾸준히 득점을 기록한 비야는 데포르티보 라코루냐에서 득점하였으나 경기 도중에 다니엘 아란수비아에게 반칙을 하면서 두 번째 옐로카드를 받은 그는 경고 누적으로 퇴장 당하였다. 그 결과 레알 바야돌리드와의 다음 홈 경기에 결장했고 팀은 1-2로 패배하였다. 징계에서 복귀를 준비하는 과정에 비야는 왼쪽 무릎 연골에 부분 전위로 인한 염증에 시달리면서 보름 간 추가로 결장하였다.[8] 2009년 4월 5일, 그는 마침내 복귀하였고, 큰 문제 없이 기량을 회복하였으며, 4-1로 이긴 헤타페전에서 득점하였다.

4월 12일, 비야는 스포르팅 히혼의 홈그라운드이자 그가 프로 무대에 입문한 엘 몰리논으로 귀환하였다. 그는 이 경기가 그에게 있어서 감정적일 것이라 인정하였으나, 팀의 두번째 골을 득점한 후 경기 전의 약속대로 골 세레머니를 펼치지 않았고, 팀은 3-2 승리를 거두었다. 그의 비야레알전 골은 이 시즌의 리그 26호골이었고, 그는 이후 시즌 최종전인 아틀레틱 빌바오전에서 2골을 추가하며 시즌 통산 28골을 넣으며 마쳤고, 마리오 켐페스와 프레드라그 미야토비치가 각각 1978년과 1996년에 세운 기록과 동률을 이루었다. 켐페스는 34경기 28골, 미야토비치는 같은 골 수를 40경기 출전으로 기록하였고, 비야는 결국 33경기 출장 28골의 기록으로 이들보다 높은 득점률인 경기당 0.84골을 기록하였다. 같은 시즌, 비야는 득점 횟수만으로 발렌시아에서의 최고 시즌을 보냈다.

이 시즌까지 합쳐, 비야가 발렌시아에서의 4시즌간 기록한 득점 횟수보다 더 기록한 선수는 에토 (6골 더) 가 유일하였다. 영국의 칼럼니스트 시드 뢰베는 에토가 "비야의 팀보다 129골을 더 넣은 팀에서" 업적을 달성하였고, "대체로 비야가 발렌시아의 코너킥과 프리킥을 담당하였으며, 요점은 좋은 선수일지라도 스스로 자신의 크로스를 헤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라며 관심을 환기시켰다. 비야는 28골로 디에고 포를란 (32골) 과 사무엘 에토 (30골) 에 이어 라 리가 최다 득점 3위에 랭크 되었다. 발렌시아 선수로써의 최고 통산 골을 60년만에 기록한 그는 2005-06 시즌보다 2008-09 시즌에 3번 더 기록하는데 성공하였다. 28골과 타 대회에서 기록한 3골을 더해서, 비야는 180번의 발렌시아 공식 경기에서 101번 득점에 성공하였다.

스페인 국가대표팀이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충격적인 탈락을 경험한 후인 2009-10시즌 7월 27일, 비야는 휴가를 마치고 언론들이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리버풀, 첼시, 그리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같은 거함 클럽들과 링크되었다는 보도를 연이어 내는 와중에 복귀하였다. 비야는 "여름 내내 보도 내용에 부인만 하고 보낼 수 없으므로, 조용히 보내고 싶습니다... 저는 발렌시아에 이득이 되기 위해 떠나야 한다고 들었고, 그 이후로 모든것이 바뀌었으며, 제가 여기 바깥에서 활동하는 것을 상상도 못했습니다. 유로 대회 전에, 클럽은 제 값이 얼마면 좋겠냐는지, 그리고 저는 그들이 저를 매각하려는 줄 알았으나, 휴가에서 돌아왔을 때, 비센테 소리아노는 제가 발렌시아를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것이 제 의혹을 모두 씻어냈습니다. 저는 발렌시아와 스페인 국가대표팀에서 이룬 성과 덕분에 제가 놓친 열차는 한 대도 없습니다." 라며 계약을 끝까지 이행하여 메스타야에 잔류하겠다고 이적성을 일축하였다. 발렌시아 팬들에게 사과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받자 그는 "저는 살인한 적 없고, 저는 용서를 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라며 대답하였다.

2009년 8월 20일, 비야는 시즌 첫 공식 경기인 스타벡과의 UEFA 유로파리그 예선전에서 1호골을 쏘았고, 팀은 3-0으로 이겼다. 그는 9월 13일 레알 바야돌리드와의 경기에서 멀티골이자 2009-10 시즌의 리그 1, 2호골로 흐름을 이어나갔다. 그는 일주일 후, 2-2로 비긴 친정팀 스포르팅 히혼과의 메스타야 홈 경기에서 2골을 추가하였는데, 이 경기에서 그는 주장 완장을 차고 경기에 임하였다. 경기 종료 후, 비야는 우나이 에메리 감독의 결정에 대해 "후반전의 접근 방식은 옳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방심하였고, 작년과 동일한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무엇이 발생했던간에, 이미 일어난 일이나, 상대 골키퍼가 잘 하였고, 그와 대조되게 우리는 잘 하지 못하였습니다." 라며 불만을 표출하였으나, 다음 날, "접근 방법에 대해 말하자면, 저는 팀에 대해 얘기하는 것으로, 저는 진심으로 말했는데, 저는 2점을 잃은 방식에 대해 짜증이 났었고, 저는 제 생각에 대해 말했으나, 해명해야 할 것은 모두 해명했습니다." 라며 에메리를 비난한 것을 부인하였다.

2009년에 그는 스페인 국가대표팀과 발렌시아 소속으로 54번의 공식 경기에 출전하여 43골을 득점하면서 그 어느 선수보다 더 많은 골을 득점하였다. IFFHS는 그를 "2009년 세계 최고의 골잡이" 목록의 4번째에 올려놓았다.

10월 18일, 비야는 발롱도르 후보로 명명되었고, 약 2주 후인 10월 30일, 그는 FIFA 올해의 선수 후보로 선정되었다. 3번의 리그 경기에서 무득점으로 침묵한 후, 비야는 4-1로 이긴 2010년 1월 17일의 비야레알 전에서 멀티골을 득점하였고, 이 중 첫 번째 골은 그의 발렌시아 리그 100호골이었다. 2010년 2월 22일, 그는 헤타페전에서 또다시 멀티골을 득점하였는데, 두 번째 골은 호르디 코디나를 상대로 한 "멋진 치핑" (ESPN의 묘사) 이었다. 3월 14일 발렌시아는 유로파리그에서 베르더 브레멘과 베저슈타디온 원정 경기를 치르었다. 비야는 해트트릭을 달성하였는데, 그의 3번째 골은 7미터 밖에서 넣었다. 경기는 4-4 무승부로 끝나면서 발렌시아가 원정 다득점 원칙에 따라 다음 라운드로 진출하였다. 2010년 5월 4일, 발렌시아는 헤레스를 상대하였는데, 비야는 선발로 출전하지 않았으나, 62분에 교체 투입되었고, 경기는 3-1로 종료되었다. 발렌시아는 리그 2경기를 남겨 두었으나, 비야는 이 두 경기에 모두 결장하였고, 헤레스전은 그의 발렌시아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그리고 2010년 5월 19일, 현지 시간으로 1시 30분 경 바르셀로나로 이적이 완료되었다. 40m 유로(대략 34m 파운드)에 합의. 그리고 입단식까지 거치면서 완벽하게 바르셀로나행이 결정되었다.


3.4 FC 바르셀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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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 시즌에서는 첫 경기에서 데뷔 골을 터뜨렸지만 이후 활약이 지지부진하다. 먹튀니 오발탄이니 해도, 즐라탄이 떠난 이후로 바르셀로나를 상대하는 팀들은 대놓고 밀집 수비를 펼치고 있고, 스피드와 공간 침투를 활용하는 비야는 역습 전략의 발렌시아에서와는 달리 바르셀로나에서는 그 강점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거기다 월드컵 이후에 골 결정력도 떨어져서... 바르사의 원 톱 자리에는 에투의 저주가 걸린 것 같다

하지만 세비야전 이후로 헤타페전에서 연속 골을 성공시키며 슬슬 부활의 기미를 보이고 있다. 특히 국대에서 여러 번 뛰어 봤던 다른 선수들보다도, 처음 호흡을 맞추는 메시와 찰떡 궁합을 보이고 있다. 이후에는 좀 주춤했고 알메리아전에서 바르샤가 8:0으로 이길 때도 무득점이라 다시 주춤하나 했더니, 엘 클라시코에서 메시의 킬 패스 2번을 모두 성공시키며 2골을 기록하는 대활약을 펼쳤다. 라이벌 에스파뇰전에서도 메시와 사비의 어시스트를 골로 연결하며 드디어 인간 중에서 득점 순위 1위로 올라섰다.

여담으로 바르사로 이적한 후 비야의 거품이 빠졌다든지, 이게 비야의 현실이라든지 등 여러 까들의 비판이 많은데 절때 비야가 못하는 게 아니다. 팀에서 메시가 너무 잘해서 그럴 뿐, 실제로 비야는 바르사로 이적한 후 출전 시간 대비 득점력이 더 늘었다.

하지만 이후 매번 피치치를 앗아간 특유의(...) 후반기 슬럼프(체력 부족으로 인한)가 찾아오는 바람에 10경기 연속으로 골을 넣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하필이면 엘 클라시코 4연전 기간이라 꾸레들에게 포풍 까임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까이거나 말거나 이적 시즌의 대미는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맨유에게 멋진 쐐기 골을 박아 넣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11/12 시즌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1차전에서는 클래스를 보여주는 슈퍼 골을 넣어 팀을 패배에서 구해냈으나, 2차전에서는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고, 파브레가스에게 마르셀루가 가한 태클에 서로 항의하던 중에 메수트 외질과 싸우고 퇴장당했다.

2011년 12월 15일, 알 사드와의 클럽 월드컵 준결승전에서 정강이뼈 골절로 시즌 아웃을 당했고, 유로 2012에도 출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이것은 향후 바르셀로나에게 큰 문제점으로 작용했는데, 놀랍게도 메시가 공격 포인트 100개를 찍는 와중에도 중요한 경기마다 골 결정력 부족을 보이며 자멸했다는 것이다. 파브레가스와 알렉시스 산체스를 메시와 스리 톱으로 내세워 가짜 공격수(펄스 나인) 전술을 사용했으나 큰 효과를 보이지 못했으며[9], 이는 첼시 1차전(원정)-엘 클라시코(홈)-첼시 2차(홈)전에서 바르셀로나로 하여금 찬스를 잡지 못하는 화근으로 작용했다. 그뿐이랴? 10-11 시즌 페드로-비야-메시 중 페드로 역시 부상으로 폼이 확연하게 떨어져 시즌 내내 테요나 쿠엔카 등의 선수들에게 자리를 빼앗겼다. 소위 MVP 라인으로 불리던 비야-메시-페드로 스리 톱의 경우 득점력 면에서 메시에게 의존도가 높다는 것은 파브레가스-메시-산체스의 스리 톱과 비슷하지만, 페드로와 비야는 둘 다 결정지어야 할 상황에서 확실하게 결정을 지어버릴 수 있다는 차이가 있다.[10] 이 차이점은 향후 바르셀로나의 중요한 경기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비야가 비록 리오넬 메시만큼의 득점력을 자랑하는 선수는 아니더라도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는 점과 큰 경기에서 득점력이 매우 뛰어나다는 장점이 있는데,[11] 바르셀로나는 비야가 있을 때에는 그 점을 크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기에 결국 비야가 시즌 아웃을 당하자 골을 결정지을 수 있는 선수가 메시밖에 없다는 점이 치명적인 문제점으로 작용했다.

다행히도 스페인은 제로 톱 전술과 네그레도-토레스 등의 선수들을 활용하여 이 문제점을 어느 정도 해결했지만, 이후 극단적인 공격적 점유율 축구를 구사하는 바르셀로나로서는 앞으로 강팀과의 경기나 중요한 경기에서 내세울 공격수가 절실하다는 것이 증명됐다. 비야가 떠나고 바르샤는 가히 축구역사상 최고의 공격진을 달성한다.

2012-2013 시즌, 페드로와 산체스와의 주전 경쟁에서 밀리며[12] 여러 클럽들로의 이적설이 뜨기 시작했다. 특히 아스날이 1천만 파운드를 써서 웬 일이래 벵거가 돈을 쓰다니 영입하려고 했지만 빌라노바 감독이 거절했다. 30줄에 들어선 나이지만 다시 한 번 이적 시장의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토트넘, 아스널과 강력하게 연결된 듯했으나 뜬금없게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의 이적이 확정되었다.[13]

이적료는 최대 5.1m 유로(약 75억)이고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13/14 시즌 2.1m 지급, 14/15 시즌 2m 지급, 15/16 시즌까지 AT에 비야가 남을 경우 잔여 1m 지급. 추후 이적 시 바르사에 이적료의 50% 지급이다. 나이와 바르셀로나에서의 폼 때문인지 낮은 수준으로 책정된 듯하다.


3.5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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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4 시즌 아틀레티코에서 라리가 36경기 13골 4어시스트를 기록하였다. 비록 시즌 내내 패스 성공률이 저조했고, 자주 고립되는 모습을 보였으나 중요한 순간에는 득점을 기록하며 골게터로써의 역할은 충분히 해낸 듯. 또한 팀이 리가 우승을 거머쥐며, 개인통산 세번째 라리가 메달을 휙득했다.

리그가 막내린지 얼마되지 않아 5월 31일 미국 메이저리그 사커팀으로 창단되는 뉴욕 시티 FC 멤버로 뛴다는 소식이 [발표되었다.] 참고로 이 팀은 리얼부 구단주 만수르가진돈을 주체하지 못해 1조원짜리 경기장을 일시불로 질러버린 뉴욕 양키즈가 합작해서 만든 팀이다. 2015시즌부터 뉴욕 양키즈의 홈구장인 양키 스타디움을 홈구장으로 사용하게 된다. 다만 지분은 맨체스터 시티가 조금 더 많이 가지고 있다.

2014년 6월 1일부로 뉴욕시티 FC의 첫 번째 선수가 됐고, 뒤 이어 프랭크 램파드 역시 뉴욕 시티 FC에 영입이 되었다.


3.6 뉴욕 시티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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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시티 FC에서 정리한 다비드 비야의 커리어

2014년 6월 1일에 입단하였으나 뉴욕 시티는 2015시즌 부터 참여하기 때문에 당시 뉴욕 시티의 선수는 다비드 비야와 프랑크 램파드 두 명만 있는 상황이었다. 선수선발을 위한 MLS 드래프트와 이적시장은 2014 시즌이 끝난 뒤에야 시작이 되고 팀의 트레이닝 캠프는 15년 1월, 시즌은 15년 3월부터 시작 되기 때문에 그 전까지 경기를 뛰기 위해, 그리고 같은 시티 풋볼 그룹 산하인 호주 A리그 멜버른 시티 FC의 홍보를 위해 멜버른 시티로 임대 가게 되었다. 다비드 비야가 먼저 임대를 가고 프랑크 램파드가 뒤 따라 가기로 되었으나 멜버른 시티의 임대 제한 조항에 걸려 프랑크 램파드는 맨체스터 시티로 임대가게 되었다.


3.7 멜버른 시티 FC(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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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버른 시티의 트레이닝 캠프부터 참가 하게 되었고 10월 11일 A리그 데뷔경기에서 시드니 FC를 상대로 63분에 득점하여 데뷔경기에 데뷔득점을 기록했다. 10월 19일 뉴캐슬 제츠와의 경기에서 0:1로 패배하고 있는 가운데 87분에 극적인 동점골을 넣었고 그 뒤 10월 25일에 멜버른 빅토리, 10월 31일에 애들레이드과의 경기에 출전하였고 득점은 기록하지 못했다. MLS 개막과 뉴욕시티의 트레이닝 캠프 일정에 맞춰 최소 10경기는 출전하여 2014년은 멜버른 시티에서 보낼것으로 예상되었으나 10월 31일 애들레이드 경기를 끝으로 뉴욕 시티로 복귀하였다.


3.8 뉴욕 시티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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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이 시작되자마자 맨체스터 시티로 임대 간 프랭크 램파드의 이적 파동으로 시끄러워졌고, 프랑크 램파드는 뉴욕 시티 FC가 아니라 시티 풋볼 그룹과 계약을 맺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램파드의 뉴욕 시티행은 위장 전입과 다름없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 때문에 다비드 비야 역시 맨체스터 시티의 위장 영입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나왔으나, 뉴욕 시티의 트레이닝 캠프에 멀쩡히 참가하고 있었고 별 다른 소식이 없기 때문에 비야는 램파드와 다르게 애초부터 뉴욕 시티에서 영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15년 2월 11일, 영국 맨체스터에서 펼쳐진 스코틀랜드 프리미어십 클럽 세인트 미렌과의 친선경기에서 첫 득점을 기록했다. 뉴욕 시티의 역대 최초 등록 선수이자 뉴욕 시티의 역대 최초 득점을 기록한 것. 다만 2월 17일 덴마크의 브뢴비와의 경기에서는 묻혔다(...). 그 이후 북미 프리시즌 컵 대회인 첼린지 컵 등에도 참가 하였고 2015 MLS 개막전에는 카카의 올랜도 시티와 경기를 치루며 MLS에 데뷔했다. 3월 15일 뉴 잉글랜드 레볼루션과의 경기에서 MLS 데뷔 득점을 기록. 이렇다 할 공격 옵션이 없는 뉴욕시티에서 다비드 비야 혼자 분전했으나 신생팀의 한계인지 15년 5월 까지 1승 5무 8패라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고 다비드 비야 역시 중간에 부상까지 당하면서 공백이 있었다. 하지만 다비드 비야가 복귀한뒤 5월 30일 경기부터 7월 10일까지 5경기 중 6골을 기록하고 팀도 4승 1패를 기록하며 순항 중이다.

뉴욕 시티는 현재 유일한 공격 옵션인 다비드 비야가 미드필더진까지 내려와 볼 배급을 하고 공격까지 마무리 하는 등 혼자 팀을 이끌고 있는 중이며 얇은 미드필더진이 약점으로 지적받고 있으나 이 부분은 안드레아 피를로프랭크 램파드의 영입으로 해소될 예정. 7월 26일 안드레아 피를로가 후반전에 잠시 출전한것에 그쳤지만 그럼에도 미드필더 진을 장악하며 특유의 롱패스로 공격을 진행했고 덕분에 다비드 비야는 공격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신생팀의 주전 스트라이커로 분전하며 30경기 18골을 넣으며 수준급의 활약을 보여줬지만 신생팀의 한계 때문인지 34경기 10승 17무 7패 컨퍼런스 8위로 시즌을 마쳤다.

2016년에는 2경기를 제외한 모든 경기에 나와 33경기 23골 5어시스트라는, 정말 나이가 무색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활약덕에 국가대표 복귀설까지 나오고 있다.

4 국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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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국가 대표 역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

2006 독일 월드컵에서 파트너 페르난도 토레스와 함께 3골을 넣어, 팀 내 최다 득점을 기록한다. 유로 2008에서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골을 기록하며 팀에 기여했고, 대회 유일의 해트트릭을 달성했다. 또한 4골을 넣으면서 골든 부츠를 수상하였다. 명실상부 현존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한 명.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스페인을 지옥에서 구해내며 우승에 기여했다. 스위스와의 첫 경기에서는 몸 개그하는 토레스와 함께 한 골도 기록하지 못하면서 팀의 패배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으나, 온두라스와의 2차전에서는 두 골 다 본인이 만들다시피 하며 그 명성을 재확인시켰다. 칠레와의 경기에서도 한 골 추가. 곤살로 이과인과 함께 득점 공동 선두를 달리며 유력한 득점왕 후보로 올랐다.

포르투갈과의 16강전에서 결승골을 넣으며 역시 16강에서 한 골씩을 추가한 이과인과 비텍 (하지만 이쪽은 16강 탈락)과 함께 공동 선두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8강에서 또 결승골을 넣으며 탈락한 이과인과 추격하는 클로제 등을 따돌리고 단독 선두로 올라섰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베슬러이 스네이더르도 5골로 올라서고 4강에서 득점을 하지 못함에 따라 결승전에서 골 넣는 쪽이 아디다스 골든 볼(MVP), 득점왕, 우승이라는 삼관왕을 가져가는지라 혈투가 예상되었다. 결승전에서 비야의 스페인이 승리하여 우승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스네이더르와 비야 둘 다 한 골도 못 넣으면서 득점왕은 토마스 뮐러, 골든 볼은 디에고 포를란이 차지했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도 대표팀에 승선했다. 세월이 많이 흐름에 따라 폼도 많이 죽었고, 당시 클럽팀[14] 동료였던 디에고 코스타의 스페인 귀화로 선발로의 입지는 많이 줄어든 상황이었다. 그가 없는 스페인이 초반 조별리그 2경기에서 충격의 2연패를 당하면서 탈락을 확정지은 이후,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 호주전에서 왼쪽 윙으로 선발 출장하였다. 초반부터 경쾌한 움직을 보여주며 호주의 수비진을 괴롭히다 전반전 37분경에 후안 프란의 크로스를 백힐로 재치있게 밀어넣으며 월드컵 통산 아홉번째 골을 득점했다. 이날은 그가 치르는 국가대표로써의 마지막 경기 였으며, 월드컵에서도 사실상의 마지막 경기였다. 후반들어서 델 보스케 감독이 이른 시간에 마타와 교체시켰는데, 이후의 인터뷰에서 대표팀 은퇴경기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경기 후에 MOM으로 선정되며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5 다비드 비야에 대한 언사

비야는 피니셔로만 그곳에 서 있지 않는다. 비야는 심도 있게 연계된 플레이를 펼친다. 그 뜻은 열린 공간에 패스 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며, 수비진을 교란시키며 동료 선수들에게 열린 공간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한다.
- 요한 크루이프
나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카카보다 다비드 비야를 원한다.
- 비센테 델 보스케 이래놓고 2014 월드컵에선 비야의 A매치 고별경기도 몰랐다.
비야는 최고의 스페인 축구선수다. 내가 함께 축구를 하고 싶은 선수는 발렌시아의 다비드 비야이다.
- 카카 (2008년 10월 카날플뤼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양질의 기술을 가졌었습니다. 그의 퍼스트터치는 환상적이었고, 비록 누군가가 이 만큼 할지에 대해서는 불확실합니다만, 그가 재능 있었다고 단언지을 수 있습니다. 그는 수평적으로 영리하게 질주하며, 수비를 농락하고, 그리고 그는 언제나 옳은 결정을 내립니다. 그는 매우 직감적입니다.
- 페페 아세발 (前 스포르팅 히혼 감독)
다비드는 놀라운 선수입니다. 그는 민첩하며, 득점을 하고 용감합니다. 저는 그와 아스널에서 함께 하고 싶습니다. 그는 잉글랜드 리그에서도 훌륭할 겁니다.
- 세스크 파브레가스
다비드 비야는 경이로운 인물입니다. 유럽의 최고죠.
- 키니 (5차례 피치치 수상자)

6 플레이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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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킥과 패스의 흐름을 잘 읽는 눈, 그리고 무서울 정도의 침착함으로 원샷 원킬이 무엇인지 보여주다.

오프사이드 트랩을 교묘하게 깨는 솜씨가 가히 일품이었고, 양발을 사용하기 때문에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 있으면 어디에 있든 위협적인 슛을 때릴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즉 페널티 에어리어의 지배자. 발렌시아CF 시절 리가에서는 슛 대비 득점률이 항상 리가 탑급에 위치했었다.

정통 스트라이커이긴 하지만 이런저런 스타일을 많이 소화할 수 있는 다재다능함도 그의 장점이다. 순간 주력 역시 훌륭해 스트라이커로서도 뛰어나지만 윙 포워드로서도 뛰어나고,[15] 조금 처져서 뛰는 세컨 탑으로도 솜씨가 좋다. 아이마르가 떠났고 다비드 실바가 아직 애송이인 데다가 심심하면 병원으로 출장가서 이렇다 할 플레이 메이커가 없었던 2006/07 시즌의 발렌시아에서 혼자 공격 전개 과정을 주도하다시피 하며 리가에서만 16골 12어시스트를 기록한 것이나 좌측 윙 포워드에 가깝게 뛰며 유로 2008 지역 예선부터 대회 본선까지 스페인 팀 내 최다 득점을 기록한 당시의 활약은 그 백미.

장거리 드리블을 즐기지는 않지만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수비수 한두 명은 여유롭게 제친다. 하지만 가장 큰 장점은 킥의 정확도와 침착함. 당시 거의 혼자 공격을 주도하다시피 한 시기도 길었는데, 이런 경우 선수는 어떻게든 공격을 마무리하기 위해 무리한 슛도 많이 때리게 되기 때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서운 골결정력을 뽐냈다는 것이다.

굳이 단점을 꼽자면 시즌 후반부에 나타나는 고질적인 뒷심부족. 아무래도 체력적인 문제인 듯 한데 프리메라리가시절 항상 초중반에 무서운 기세로 골을 때려 박다가 시즌이 말미에 접어들면 리그 초중반의 페이스를 끝까지 이어가지 못하는 뒷심부족이 번번히 득점왕 경쟁에서 미끄러지곤 했다.


7 기타

이제는 유명한 고전이 된 '코너부근 시간끌기에 의한 다비드 실바 골'에서 미친듯한 시간끌기를 보여준 장면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엄청난 양발 볼 컨트롤과 키핑, 템포조절 능력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사커걸'이라는 카페의 한 회원이[16] 비야에게 선물을 보낸 적이 있다고 한다. 이때 보낸 선물 박스를 비야가 가지고 있는 게 사진으로 포착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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쭈구리 군단 FC 바르셀로나에서 외모가 가장 뛰어난 선수로도 종종 꼽다.차승원 닮았다. 페르난도 토레스, 이케르 카시야스 등 미남 선수들이 많은 데다가 2010 남아공 월드컵의 우승으로 여자 팬이 늘어난 스페인 국가 대표팀에서도 잘생긴 축에 드는 선수라 유명세를 탔다. 그렇지만 매우 가정적이며, 아내 패트리샤와 딸 사이다,[17] 올라야를 매우 챙긴다고 한다. 특히 토레스 부부와도 사이가 좋아, 둘째 딸 올라야의 이름은 토레스의 부인 올라야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지었다고 한다.[18]

이적 시즌만 되면 항상 폭풍의 진원지가 되는 선수이기도 했었다.[19] 그만큼 비야를 노리는 팀이 많고, 비야 이적은 축구 팬들에게 엄청난 관심이 되는 터라 이적 소문을 남발하는 언론 기사들의 목표가 된다. 칼카나마가 이런 상황을 [신랄하게 깠다].

기레기들이 좋아하는 최고의 떡밥이에 맞먹는(?) 떡밥으론 바이에른의 리베리 떡밥, 볼프스부르크의 제코 떡밥,[20] 모스크바의 아킨페프 떡밥, 모스크바의 혼다 떡밥[21] 등이 있다. 이래저래 스포츠 신문들만 살판나는 떡밥들이다.

친정팀 발렌시아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것으로도 유명한데, 바르셀로나 팬이 다비드 비야에게 바르셀로나 유니폼에다 사인을 해달라고 요청하자, "미안하지만 난 발렌시아 유니폼에만 사인한다."라면서 거절한 일화도 유명하다. 하지만 2010년에 바르셀로나로 가버렸다


8 기록

8.1 대회 실적

  • 레알 사라고사 (2003/04 - 2004/05)
  • 발렌시아 C.F (2005/06 - 2009/10)
    • Copa Del Rey (1) : 2007/08
  •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2013/14)
    • La Liga (1) : 2013/14
    • UEFA Champions League Runner-Up (1) : 2013/14


8.2 개인 수상

  • 2005-2006 올해의 스페인 선수
  • 2005-2006 프리메라리가 Zarra Trophy
  • 2006-2007 프리메라 리가 최다 어시스트 선수(!)
  • 2006-2007 프리메라 리가 Zarra Trophy
  • 2008-2009 프리메라 리가 Zarra Trophy
  • 2009-2010 프리메라 리가 Zarra Trophy
  • 2008 UEFA 유로 2008 골든 부츠
  • 2008 UEFA 유로 2008 Team of the Tournament
  • 2009 FIFA 컨페더레이션스 컵 브론즈 슈
  • 2009 FIFA 컨페더레이션스 컵 Team of the Tournament
  • 2010 FIFA 월드컵 실버 슈
  • 2010 FIFA 월드컵 브론즈 볼


8.3 리그 출전 기록

시즌클럽소속리그리그FA컵대륙대회
경기득점경기득점경기득점
1999/00스포르팅 히혼 B스페인 세군다리가 디비전B3012----
2000/01스포르팅 히혼 B스페인 세군다리가 디비전B3513----
2000/01스포르팅 히혼스페인 세군다리가10----
2001/02스포르팅 히혼스페인 세군다리가401842--
2002/03스포르팅 히혼스페인 세군다리가392010--
2003/04레알 사라고사스페인 라 리가381784--
2004/05레알 사라고사스페인 라 리가351512103
2005/06발렌시아 C.F.스페인 라 리가35254211
2006/07발렌시아 C.F.스페인 라 리가361520115
2007/08발렌시아 C.F.스페인 라 리가30186173
2008/09발렌시아 C.F.스페인 라 리가33282151
2009/10발렌시아 C.F.스페인 라 리가322120117
2010/11FC 바르셀로나스페인 라 리가341861124
2011/12FC 바르셀로나스페인 라 리가1553163
2012/13FC 바르셀로나스페인 라 리가28105571
2013/14아틀레티코 마드리드스페인 라 리가36134270
2014멜버른 시티 FC호주 A-리그42----
2015뉴욕 시티 FC미국 메이저리그 사커301800--
2016뉴욕 시티 FC미국 메이저리그 사커332300--
  1. 스페인 국가대표 최다득점
  2. '엘 구아헤'라 발음하며 어린이, 소년이라는 뜻.
  3. Head Coach - 감독이다.
  4. 심지어 A매치 출장 수 대비 골 기록으로는 리오넬 메시크리스티아누 호날두보다 말그대로 훨씬 우위에있다.
  5. 준결승전에서의 부상으로인해 결승전에서 결장했음에도 불구하고 4골을 기록, 득점왕을 수상했다.
  6. 네이트 인터뷰에서 사실이라고 밝혔다.
  7. 국가대표팀 동료 라울 타무도와 같은 횟수의 득점을 기록
  8. 누만시아, 레크레아티보 우엘바, 그리고 라싱 산탄데르전을 결장하였다.
  9. 이전에는 파브레가스나 산체스가 전문 공격수가 아니라는 잘못된 서술이 있었으나, 파브레가스는 본업이 미드필더이므로 맞는 이야기지만 산체스는 전문 공격수라고 보아야 한다. 중앙 공격수 역할을 주로 맡는 선수가 아니라서 그렇지.
  10. 산체스의 경우에는 양발잡이인 비야나 페드로에 비해서 왼발을 거의 사용하지 못한다는 제약을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의 밀집수비를 수시로 뚫어내어야 하는 바르셀로나의 제약된 상황에서 효과적인 공격을 하기에는 아쉬운 측면이 있었다. MVP 라인이 가장 잘 가동되던 10-11 시즌에 비야와 페드로는 기회가 생기면 오른발 왼발 가리지 않고 득점을 해낼 수 있었지만, 산체스는 왼발을 사용하지 못하기에 오른쪽 윙포워드로 나서면 슈팅 각도가 매우 제약된다. 반면에 왼쪽 윙포워드 자리에서 잘했나 하면 또 그건 아니었고... 이러한 약점은 라리가에 비해서 신체적인 압박은 강하더라도 조직적인 압박은 느슨하여 공간이 어느 정도 나오는 EPL에서 산체스가 리그를 씹어먹는 활약을 하는 것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11. 유로 2008, 2010 남아공 월드컵, 그리고 10-11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등등 엄청 많다. 그 중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비야가 팀 득점 7골 중 5골이나 책임져 스페인의 비야에 대한 의존도가 엄청났다.
  12. 라 리가 27경기 출장이지만 16경기 선발, 11경기 교체였다.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10경기 중 5경기 선발, 5경기 교체 출장.
  13. 사실 생각해 보면 가장 유력했어야 할 팀이 AT 마드리드였다. 33살의 비야로서는 피지컬을 중시하는 EPL 축구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고, AT 마드리드는 그 전 시즌 3위로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확보한 상태였다. 거기다가 라다멜 팔카오도 떠난 아틀레티코는 공격수 보강이 시급했던 데다, 공격수뿐만이 아니라 양쪽 윙도 소화할 수 있는 비야는 나이와 주급 같은 문제를 제외하면 가장 이상적인 대상이었을 것이다(물론 비야의 폼 하락이 걸리긴 했을 테지만). 또한 선수 본인도 영국으로 가기보다는 스페인에 남는 것을 선호했다고.
  14.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5. 특히 양발을 잘 쓰고 특유의 감아차기 솜씨가 좋기 때문에 남아공 월드컵때 당시에는 측면에서 주로 뛰었다.
  16. 물론 여성 회원이다.
  17. '비야는 비야를 낳고' 등으로 축구 선수와 닮은 꼴인 2세를 소개할 때 나오는 아이다. 짤만 보고 아들이라고 오해하지 말자.
  18. 포포투 2010년 7월 호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19. 가끔 '다비드'라 하여 같은 클럽의 잘생기고 잘하는 선수인 다비드 실바랑 엮이기도(...) 했다. 둘다 팔릴 거라는 떡밥. 그리고 10-11 시즌을 앞두고 둘 다 팔렸다(...). 실바는 맨체스터 시티로 이적했다.
  20. 특히 밀란과 많이 엮인다. 제코 자신이 밀란빠. 하지만 결국 현질의 제왕 맨체스터 시티로 갔다.
  21. 결국 밀란으로 이적했다. 하지만 밀란에서의 모습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