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데전쟁

(방데반란에서 넘어옴)

프랑스어: Guerre de Vendée
영어: War in the Vendée

1 개요

1793년부터 1796년까지 프랑스 혁명 정부의 징집령에 대항해 봉기한 농민군과 프랑스 혁명정부[1] 사이에 벌어진 반란, 전쟁을 일컫는다. 반란은 루아르아틀랑티크(Loire-Atlantique) , 메네루아르(Maine-et-Loire) , 되세브르(Deux-Sévres), 방데(Vendée) 이렇게 프랑스 서부 4개 도(Départements)에 걸쳐 일어났으며 농민 봉기의 시발점이자 중심지가 방데였기 때문에 이후 방데전쟁, 방데반란이란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2] 프랑스가 숨기고 싶어하지만 프랑스 혁명, 아니 프랑스 최대의 흑역사 중 하나.[3]

2 과정

1793년 봄, 제1차 대프랑스동맹으로 인한 대외전쟁으로 말미암아 프랑스 혁명정부가 30만 징집령을 선포하자 이를 계기로 프랑스 서부의 농민들이 최초 봉기했다. 3월 11일 징집관이 방데에 나타나자 농민 시위가 전개되었고 농민들이 관리와 병사들을 내쫓는 과정에서 무력충돌이 발생했다. 그 결과 마쉬쿨에서 공화파 시민들이 학살당하는 일이 발생했고,[4] 소식이 전해지자 소요는 순식간에 서부 전역으로 퍼졌는데 행상인 출신 자크 카텔리노(Jacques Cathelineau)가 이끄는 1만5천여명의 농민군이 방데의 주요 도시인 숄레를 장악했으며 여기에 방데의 귀족출신 왕당파 장교들이 가세했다. 스스로를 왕실과 가톨릭의 군대라고 칭한 이들은 정부군을 몰아내면서 각지에서 봉기한 농민들과 세력을 합치기 시작했다. 혁명정부인 국민공회는 왕당파의 휘장을 착용한 이들과 손에 무기를 든 모든 반란자들을 사형에 처하겠다고 공표하고 진압군을 파견했으나 오히려 이들은 농민군에 의해 패퇴되었고 놀란 혁명정부는 23일부터 공식적으로 '방데와 인근 도의 전쟁(La guerre de vendée et des département circonvoisins)'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정부군은 4월에 숄레 탈환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6월까지 방데군은 지역 거점인 앙제, 소뮈르를 점령하는 등 승전을 거듭했고 루아르강 이남 전역으로 세력을 넓혔으나 6월 29일 낭트 전투에서 패배하고 자크 카텔리노가 부상으로 사망하면서 세력이 꺾였다.

8월, 정부는 반격을 시작하며 방데전역에 대한 파괴명령을 내렸고 이에 따라 방데인들에 대한 학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0월 17일 방데군대가 숄레에서 패배하면서 방데군은 브르타뉴노르망디 지역의 봉기세력과 결합하여 최후결전을 준비하기 위해 이동을 시작했다. 방데군과 학살을 피해 도망친 주민 10여만 명은 영불해협을 향해 이동했으나 11월 14일 노르망디의 항구도시 그랑빌에서 정부군에게 패했고 갈레른 회군이라 불리는 회군이 시작된다. 방데군은 다시 남하하던 중 12월 12일 르망에서 대패했다. 잔존세력은 루아르강 남쪽을 향하여 철수했으나 12월 23일 루아르강 북쪽의 사브네에서 미처 도강하지 못한 마지막 방데군이 따라잡혀 전멸당했으며 포로와 민간인 수천명이 루아르강 익사형에 처해졌다. 이로써 방데군은 와해되었고 이후 전투는 게릴라성을 띄게 되었다. 1794년부터 프랑스 정부는 지옥종대(colonnes infernales)라고 이름붙여진 부대를 방데로 파견하여 파괴와 학살을 가했고 방데군대의 주요인물들에 대한 체포와 처형을 집행했다. 전투는 산발적으로 계속되었으나 정부군의 승리는 명확했고 마지막 방데군 지도자 샤레트(Charette de La Contrie)도 총살되었다. 1796년 7월 15일 정부가 서부의 모든 문제가 종결되었다고 선언하면서 방데전쟁은 끝을 맺는다.[5]

3 봉기원인

3.1 전통적인 역사관 : 반혁명

Anti-Revolution
당대 혁명 정부는 서부 농민들의 봉기를 조국과 혁명에 대한 배신행위라고 비난했으며 왕당파와 보수적 가톨릭 세력이 주도한 반혁명으로 간주했다.[6] 프랑스 혁명 정부의 최대 목표가 중앙집권적 국민국가의 강화였기에 국민의 대다수를 구성하는 농민들이 혁명정부를 향해 반기를 들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나의 농민쨩은 그러지 않아 때문에 쥘 미슐레(Jules Michelet)[7]를 비롯한 당대 역사학자들은 순진한 서부의 농민들이 귀족과 성직자들의 기만과 음모에 놀아나 구체제 타파를 추구한 혁명에 반대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으며 이러한 역사적 해석은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19세기 말 공화주의 역사가들은 방데 전쟁의 규모를 1793년 3월 발생해 그 해 12월에 끝난 작은 내전으로 축소시켰는데 이는 초기 방데의 봉기만을 강조함으로써 1794년 이후 공화국 군대에 의해 벌어진 초토화 작전과 학살 등의 보복행위를 은폐시켰다.

이런 국가 주도의 공식적인 기억, 즉 혁명에 거역한 방데라는 국가기억의 형성은 방데 전쟁에 대한 실체적 접근을 방해했다. 국가기억 속의 방데전쟁에서는 농민들의 단순한 무지와 광신,[8] 그리고 귀족과 성직자들의 음모가 강조되었다.19세기에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장악한 공화주의자들은 체계화된 공교육 제도를 이용해 방데를 반혁명이라고 공식화시켰고 봉건적 질서와 절대 왕정을 혁파한 혁명에 대한 저항은 이해할 수 없고 비난받아 마땅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방데란 용어는 20세기 중반까지도 '공화국의 적, 망명귀족, 왕당파, 반란' 등의 용어로 이해되었는데 방데라는 단어가 반혁명과 반란의 이미지를 담게 되면서 자연히 방데는 반혁명주의자들의 근거지가 되었고 방데 주민들은 반혁명주의자들의 후손이 되었다. [9][10] 낙인 속에서 방데 주민들이 겪어야 했던 학살과 파괴는 무시되었다. 방데 전쟁의 생존자들과 그 후손들, 주민들은 국가적 무관심 속에서도 방데 전쟁의 발발이 반혁명적인 귀족과 성직자들의 음모가 아닌 방데 민중들의 자발적 저항에 따른 것이었음을 기억하고 주장했으나 19세기 동안에 이러한 민간기억의 움직임은 미약했고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11]

3.2 새로운 역사해석의 대두 : 대항혁명

Counter-Revolution
20세기 중반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두와 전후 사회경제사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방데 전쟁에 관련해서도 기존의 주류 역사학계에 대한 해석에 도전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1960년대 연구들은 방데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연구를 비판하면서 방데 농민들을 음모에 놀아난 무지한 반란군이 아니라 신흥 부르주아 및 그들과 동일시되었던 혁명정부에 자발적으로 저항한 능동적 행위자로 간주했다. 이 시기의 연구들은 방데 전쟁의 원인을 단순히 귀족, 성직자들의 음모가 아닌 사회구조적, 지리적, 경제적 요인에서 찾기 위해 노력했다. 구조적 원인에 대한 학문적 접근은 근대국가 형성 과정에서 나타난 위로부터의 강제적인 통합이 전통적 농촌 세계에 가져온 충격과 이에 대항한 농민들의 자발적 대응 양상을 추적했고 이로써 한세기 넘게 방데 주민들을 억눌러온 번혁명주의자들이란 낙인이 점차 옅어질 수 있었다.

이후 1970~80년대 연구가 계속되면서 혁명 당시 방데의 특수성이 주목받게 되었다. 당시 방데를 비롯한 서부 지방은 봉건적 의무의 비중이 다른 지역보다 낮아 구체제의 압제로부터 얼마간 자유로웠다. 지역 귀족들은 부재지주의 비중이 타지역보다 낮았고 이에 따라 지역 주민들과 좀 더 친밀할 수 있었다. 또 가톨릭 교구가 단순히 종교적 단위로만 기능한 것이 아니라 농촌 공동체 역할을 했고 이로 인해 사제와 농민들 간에도 결속력이 높았으며 교회의 재산이 공동체의 부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방데 지역의 특수성은 사제들을 반혁명주의자로 몰아붙이는 분위기, 성직자들을 탄압하는 성직자민사법, 수도원의 폐쇄 등에 반감을 가지게 만들었고 이는 곧 그러한 법을 제정한 혁명정부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다. 더욱이 혁명정부가 신설한 조세가 농민들에게 새로운 부담이 되어 혁명에 대한 박탈감까지 생겼으며 이런 상황에서 귀족과 교회의 몰수된 재산이 혁명정부를 통해 외지의 부르주아들에게 넘어가자 이를 본 농민들은 공동체의 부가 탐욕스러운 개인들에게 넘어가는 것으로 느꼈다. 결국 결정적으로 1793년 2월 혁명정부가 30만 징집령을 선포한 것에 더해 징집대상에서 부르주아들인 지방 하급관리들이 제외된 것이 봉기의 불을 당겼다. 실제로 방데의 봉기는 왕실과 가톨릭의 군대를 자처한 점을 제외하면 딱히 특정할만한 정치적 계획이 없이 진행되었는데 학자들은 이에 대해 정치체제를 결정하는 문제보다 공동체의 관습들과 일상에 침입해 들어오는 혁명정부의 조직적 시도에 어떻게 대응하는지가 더 중요했기 때문으로 보았다.

이러한 연구결과들에 힘입어 반혁명 대신 대항혁명이란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반혁명이 구체제의 특권층에 의해 주도되어 구체제의 복귀를 추구하는 움직임을 의미한다면 대항혁명은 혁명정부의 급진적 행정에 대한 민중들의 반발을 의미한다. 즉, 대항혁명이란 용어의 사용은 혁명에 대한 전면적 거부가 아닌, 정치사회적 변화의 특정 측면에 대한 선택적 거부임을 규정한 것이다. 20세기 중반 이후의 학술적 연구와 성과는 19세기 이래 고착화된 공화주의적 역사서술, 즉 국가기억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이로써 방데에서 시작된 프랑스 서부지역의 봉기는 혁명정부가 지역적 특성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추진한 정책에 대한 농민들의 반발과 저항을 정부군이 잔혹하게 진압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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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데 학살을 제노사이드로 규정하지 않음을 풍자하는 그림[12]

여기서 더 나아가 방데에서 있었던 학살을 제노사이드로 규정하려는 움직임도 작지만 존재한다. 방데 지역 정치인들과 일부 학자들에 의해 계속해서 제기는 되고 있으나 거의 받아들여지지는 않고 있다. 단, 제노사이드라는 용어가 적용되는 기준이 복잡하고 엄격하기 때문에 제노사이드가 아니라는 견해를 밝히는 사람이나 학자가 있다고 해서 모두 방데에서의 민간인 학살을 비롯한 전쟁범죄가 있었던 그 자체까지 부정하는 건 아니다.

제노사이드 명칭이 많은 역사학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당시 중앙이 군대에 대한 통제가 가능할정도의 중앙통제체제가 아니었다는 점[13]

2. 근대식 학살이라기엔 전근대의 왕권정부의 학살과 유사하다는 것

2같은 경우 공화파가 전근대 왕당파와 똑같다고 까는 의미도 있다.
그리고 제노사이드가 아라는 의견 일부에선 오히려 제노사이드라는 주장 측보다 희생자 숫자를 더 높게 잡기도 한다.

4 학살

방데전쟁의 구체적인 희생자수가 주요 역사문제로 떠오른 것은 1980년대로 이미 방데전쟁으로부터 200년 가까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오랜기간 관심을 못 받은 탓에 학살의 규모에 대한 추정치는 지금도 상당히 오락가락하고 있다. 추정치는 최소 12만 명에서 최대 60만 명까지 존재하며 학살인지 제노사이드인지에 대해서도 말이 갈리지만 엄청난 사람들이 희생된 것은 사실이다. 민간 기록에 따르면 믿기 힘든 잔혹한 기록들도 많다. 결혼식이라며 남녀를 묶어 수장시키거나 아이를 말로 짓밟거나 아기를 총검으로 토스하거나 임산부를 포도압착기로(...). 1794년 12월 1일 방데전쟁의 주 무대였던 3개 도 대표 9명의 국민공회의원들은 파리에 제출한 집단 선언서에서 40만 명이 죽었다며 로베스피에르를 비난했다.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한 뒤의 일이니 다행이지 아니었으면[14] 또 정부군 사령관이었던 루이 라자르 오슈(Louis Lazare Hoche)가 1796년 2월 1일 내무장관에게 쓴 편지에서 방데 주민 60만 명을 절멸시켰다고 쓴 부분이 있다.[15] 다만 희생된 사람들의 비율은 지옥종대가 활동했던 지역이나 정부군과 방데군의 충돌이 잦았던 지역에서 특히 컸고 다른 지방은 그보다 피해가 적었기 때문에 때문에 40만 명이나 60만 명 희생자 가설은 현재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1990년대 이후 연구결과들은 대략 15만 명에서 20만 명 정도가 전쟁 과정에서 죽거나 학살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봉기한 지역의 인구가 80만 명이 안된 것을 생각하면 그래도 여전히 어마어마한 수치라고 할 수 있다.[16] 특히 숄레같이 방데군의 중심지였던 곳에서는 인구 손실이 40%에 달했다. 프랑스 좌파를 비롯한 대다수 시민들에게 방데 이야기가 나오면 껄끄러워하는 경우가 많지만[17] 이 부분만큼은 대혁명의 대의고 뭐고 병크가 맞다. 이런 예를 들어 프랑수아 퓌레(François Furet)같은 역사학자는 프랑스 혁명, 특히 이 시기 프랑스의 권력을 차지했던 자코뱅을 공산주의파시즘같은 전체주의의 기원이라고까지 보기도 한다.

전체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준 예로 조셉 바라(Joseph Bara)라는 14살 소년이 혁명의 열의에 도취되어 방데의 반란을 진압하는 혁명군에 지원했다가[18] 전사했는데, 반란 진압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도 주민들을 학살하는 짓거리를 정당화려는 진압군과 혁명 정부의 이해 관계가 일치하여 포로가 되었다가 농민들이 바라의 나이가 어린 점을 감안해서 "국왕 만세!"라고 외치면 살려준다고 했으나 "공화국 만세!"라고 외치자 목이 잘려 살해당했다고 주장[19]하면서 바라를 대대적으로 추모하고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그를 본받을 것을 권장했으며 어린 소년을 잔혹하게 죽인 방데인들을 야만인으로 몰아붙였다. (비뚤어지고 전체주의적이고 타집단을 배려하지 않는)애국심을 앞세워 국가와 정치 세력을 위해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목숨을 아끼지 말고 희생할 것을 강조하는 모습이 과연 옳은 일인지는... 바라의 비극적인 죽음과 이용은 조상격 누나(?)에 해당되는 잔 다르크[20]와 대한민국의 이승복 어린이가 생각난다고 볼 수 있으나 이들은 최소한 비무장 민간인에 대해서까지 탄압하기 위한 폭력[21]에는 가담한 적이 없다. 결국 순수한 애국심을 가졌음에도 공격적인 애국심에 이용당한 희생양에 더 가깝다.

상기 언급대로 프랑스 좌파에서는 학살에 대해 반성은 커녕 그다지 인정하는 모습조차도 보이지 않고 있으며 중도우파도 일단은 공화정을 지지하는 입장이어서 이에 대해 애매한 입장인 반면에 가톨릭[22], 국민전선을 비롯한 극우파[23]들은 이 사건에 대해 정부 차원에서 공식사과할 것과 진상규명에 대한 법안 제출을 요구하고 있으나 당연히 매번 묵살당하고 있다.(여태까지는 정부 차원에서 제대로 밝히고 사과한 적이 없다는 얘기다.) 제기하는 놈들이 대부분 이상하긴 해도 아예 무시하는 프랑스 정부는 더 답이 없다.

이 책의 서문에 따르면 프랑스 역사 교과서에서도 학살을 별로 얘기하지 않는 모양이다. # 다만 이 책은 혁명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인 시각이기 때문에 과장이 있을 수 있고 프랑스는 역사를 국정교과서로 배우지 않기 때문에 학교의 지역과 정치 성향에 따라 채택하는 교과서 내용이 제각각일 수 있다. 상황을 자세히 아는 위키러 추가바람. 어차피 방데 지역에서는 학살 사건을 다룬 교과서를 채택할 가능성이 높고 싣지 않은 교과서로 수업해도 따로 얘기할 것이 분명하다. 예를 들면 부르고뉴 지방 학교에선 채택한 역사 교과서 내용과 상관 없이 선생들과 학생들이 자기 지역 조상들의 적이었다고 잔 다르크를 욕할지도 모른다
알제리 전쟁 당시 벌어진 학살에 비해 언급이 훨씬 덜 되긴 하지만 터키에서는 프랑스가 아르메니아 대학살[24]을 거론하며 자신들의 EU 가입을 막으려는 프랑스를 비난하고 골탕 먹이는 요소로 쓰이기도 한다. 자기 나라 국민 학살한 건 사과 안하면서 남의 나라 학살엔 간섭한다 이거지?

방데 전쟁에 벌어진 학살에 대해 프랑스 정부가 제대로 사과한 적이 없기에 사과의 요구가 나오고 있는만큼 반대의 주장도 있는데, 사과를 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는 이렇다.
일단 200년 넘게 지난 일이라 피해를 호소할 피해자가 남아 있지 않고, 어차피 시간이 별로 안 지난 그 당시에도 보이는대로 전부 다 죽였으니깐 현재 프랑스 제5 공화국은 1795년 방데 학살을 벌인 프랑스 혁명정부와 직접적으로 법통이 이어지지 않는다. 말하자면 철종 조선 순조 시절 홍경래의 난을 진압할 때 정주성 함락때 사로잡힌 모조리 처형한 사건을 현재 대한민국 정부가 사과해야한다는 논리다.[25]

이에 대한 반론은 이렇다. 일단 프랑스는 지금처럼 민주주의 공화국을 세우게 한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 200년 넘게 기념하고 혁명 당시 쓰던 삼색기를 국기로, 혁명군 군가인 라 마르세예즈[26]를 국가로 부르며 정신을 기린다. 조선 왕조와 대한민국 정부처럼 완전히 연관이 없는 그런 관계가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따지면 프랑스 혁명 얼마 뒤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시대 아이티에서 해방과 독립을 요구하는 봉기를 잔혹하게 유혈 진압하고 학살을 한 거에 대해서 지금의 프랑스 공화국은 아이티에 사죄의 의무가 전혀 없는 것일까? 병인양요 당시에 외규장각 도서 약탈은 현재 프랑스 제5공화국과 전혀 관련 없는 제2 공화정 또는 제2 제정 때인 나폴레옹 3세 때 발생한 일이니 제5 공화국의 프랑스 정부는 이 문화재의 반환 문제에 대해 전혀 책임이 없는 것일까?[27] 또한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수립하기 전에 발생한(진압 자체는 수립 후에도 이뤄졌긴 하지만) 제주 4.3 사건에 대해서 노무현 정부는 사과했는데 말이다.(막말로 프랑스 혁명 당시의 공화정부랑 제5공화국이 전혀 상관 없다고 말하면 노무현 정부도 이승만 정부랑 큰 상관이 없다.) 그리고 만약 21세기의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 등 전쟁 범죄에 대해 국제법이 지금처럼 엄격하지 않았고 군부가 장악하던 일본 제국 시대의 일일 뿐 지금의 일본 정부와는 상관이 없다라며 사과 요구를 거부하면 그것이 옳다고 볼 수 있을까? 독일 정부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홀로코스트에 대해 지금 독일연방공화국과 전혀 상관 없는 일이라면서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 경우 어떤 반응과 상황이 발생할까? 아르메니아 학살의 경우 터키 극우파가 부정하는 수법 중 하나가 오스만 제국 때의 일이니 지금의 터키랑 상관없으니 우리는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다. 게다가 미국의 경우 발생한지 200년이 넘어간, 심지어 미국이 독립하기 이전인 세일럼 재판에 대해서도 주정부 차원에서 사과했고, 버락 오바마] 정부는 2010년에 들어서야 프랑스의 혁명정부와 프랑스 제5공화국 사이의 관계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법통이 이어진다고는 해도 자신의 행정부와 큰 관련이 없던 시대의 미국 정부에 의해 벌어진 아메리카 원주민 탄압 문제에 대해서도 미국 정부의 잘못을 인정하고 개선을 약속했다.

사실 프랑스 정부가 방데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의 책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하는 일은 복잡한 문제다. 프랑스 제5공화국이 혁명정부 그 자체를 계승한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혁명의 정신을 계승한 민주주의 공화정부라는 입장에서 혁명정부의 과오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은 프랑스 공화국의 정통성과 국가관에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부정적인 영향과 인식이 생길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좌파는 말할 것도 없고, 중도보수나 우파도 민주주의 공화정의 입장이고, 방데 지역을 제외한 국민들은 관심이 없거나 심지어 성향에 따라서 오히려 방데 학살의 인정과 사과에 대해서 반발할 수도 있기 때문에[28] 사실을 말해줘도 저런다.] 이런 거에 부담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국민전선이나 왕정복고주의자 같은 거의 극우 수준이면 모를까.

오랜 시간이 지났고 피해자 등 직접적인 관계자들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고 해도, 방데 주민들의 혁명 정부에 대한 반감과 끔찍한 기억은 일부 계승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1차 세계대전 승전 후 방데 지역은 승전 기념을 거부하고 대신 학살당한 양민들을 위한 추모식을 거행했으며, 1989년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맞아 프랑스 전국이 들떠 있을 때 이 지역과 관련해서 혁명을 축하하지 않는다는 시가 나오기도 했다. #[29]

1993년 프랑스를 방문한 러시아의 문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방데에서 학살을 저지른 프랑스 혁명정부를 비판하기도 했다. # 당연하지만 당시 프랑스 집권 사회당 정부에서는 불쾌해하며 연설을 방해하기 위해 압력을 넣었으나 조국 소련에 살던 시절에는 소련을 까고 추방되어 미국에 살던 시절엔 미국을 까던 모두까기 인형 사람답게 별로 거리낌 없이 비판했다.

자크 시라크 정부 때 청소년, 국립 교육 연구 부장관을 한 뤽 페리라는 철학자는 2015년 방송에 나와서 프랑스 혁명 당시 방데에서 학살이 있었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 방송 날짜는 공교롭게도 한국 시간으로 5월 18일이었다.

5 한국에서

한국에선 그다지 잘 알려진 사건이 아니다. 한국에선 일단 프랑스 혁명 자체에 대해서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져온 긍정적인 사건이라고 대부분 인식하기 때문에 이 사건에 대해선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일단 저연령층이 보는 세계사 학습만화[30]에선 프랑스 혁명의 긍정적인 상황만을 거의 언급하며 실상을 말하면 동심파괴니깐 중고등학생들이 보는 세계사 교과서에서도 자코뱅의 공포정치로 인한 처형들에 대해 언급하면서도 이 사건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사실 알제리 전쟁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러한 시각은 군사독재정권 시절에도 딱히 부정되지 않았다.대신 같은 군사정권 독재자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은근히 띄워줬다. 그리고 주로 러시아 혁명을 깠다.[31]

그러나 외국 서적들이 한국에 들어오고 인터넷이 발달되며 외국 자료들이 한국에 유입되어 방데 학살의 존재가 한국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한국으로 들어온 프랑스 혁명과 관련된 외국 서적 자체가 프랑스 혁명을 좋게 말하고 방데에서의 일을 가볍고 정당하고 필요악 정도의 진압으로 여기거나 혁명의 혼란 중에 일어난 충돌 사건들 중 하나 정도로 보면서 사실상 어두운 면은 생략하는 프랑스 좌파 성향의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1980년대에 나온 La Vie Privée des Hommes라는 역사 그림책 시리즈(한국에서는 동아출판사에서 세계생활사라는 이름으로 들여옴)에서는 프랑스 혁명에 대해 직접 따로 말하지 않고 마지막권인 프랑스의 역사 부분에서만 언급하는데 방데에서의 농민 반란을 프랑스 혁명 부분에 제일 큰 그림으로 보여주면서 귀족과 사제들에게 선동당한 농민들이 반혁명 반란을 일으켰다고 언급했다. 물론 정부군도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원정을 하여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학살했다고 언급하며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는 듯 싶지만 방데의 주민들이 일방적으로 먼저 일을 저지른 것으로 오해할 수 있게 서술해놨다.(그림도 그냥 지나가는 정부군을 족칠 준비를 하고 매복하는 방데 반란군만 묘사했다.) 참고로 이 책은 대항해시대 편에서는 흑인 노예 사냥을 저주스러운 거래라고 언급하고 미국의 서부개척 편에서는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이 야만인이 아니라 자연의 리듬에 맞추어 살고 있었는데 백인들이 그들의 땅을 빼앗았다고 진보적인 면을 보이면서도 프랑스의 역사편에서는 프랑스 식민지 개척 부분을 꽤 자랑하는 모습을 보인다.(...) . 사실 여기 문서에서도 알 수 있듯이 프랑스 좌파도 의외로 국가주의적인 성격이 있다. 인터넷에서의 정보도 전문적으로 옮긴 건 없고 간단히 서술된 탓에 그다지 잘 알려진 것도 아니고 가볍게 이야기 될 뿐이다. 한국어 위키백과에 간략하게 있다 최근에 와서야 나무위키에서 보다 더 자세하게 저술되었을 뿐.

한국의 진보계열에선 친프랑스적인(그것도 프랑스 좌파) 성향[32], 반란의 원인이 프랑스 혁명의 민주주의에 대항하는 목적으로 일어났다고 보는 시각, 그리고 이 사태를 그나마 진정시킨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독재자로 경멸하는 시각 때문인지 대부분 언급을 하지 않고 언급을 하더라도 가벼운 사건처럼 얘기하며 심지어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이 나쁜 거지 프랑스 혁명정부는 잘못한 일이 아니라며 정당화하기도 한다.(...) # 좀 심각하게 맛간 쪽에서는 혁명정부가 방데의 무지몽매한 수꼴들을 쳐없앤 것을 본받아 대한민국 정부도 경상도 수꼴들을 쳐없애(...)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아야 한다 운운하는 궤변을 지껄이기도 했다. 바로 앞의 링크 참조. 보수계열에서도 그다지 큰 관심을 두고 있지는 않다.

다만 인터넷에서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가 나오면 관련된 논쟁이 종종 벌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일부 극우 성향의 사람들은 이 사건을 두고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혁명 세력이 4.3 사건, 5.18 민주화운동의 봉기 세력, 투쟁적인 운동을 하는 진보 세력과 똑같다고 빗대서 비판하며 어라?[33] 반면에 일부 진보 성향 사람들은 상기된 링크에서 볼 수 있듯이 대국적인 혁명 과정에서 수구 세력이 반동을 일으켜 진압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한 가벼운 사건이나 필요악 정도로 취급하며 혁명 정부를 옹호하고 방데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말하며 프랑스를 비판하는 사람들을(심지어 진보주의자 내부에서도 이건 너무 심하다며 방데의 학살을 거론하는 사람들도) 반민주주의자로 몬다.(...) 다만 위의 각주에서 언급되었듯이 프랑스 혁명에 대해 세계사 교과서 수준보다 더 자세히, 여러 책들을 읽고 공부한 사람들은 이러지는 않고 사실을 말하긴 한다. 그리고 엉뚱하게 극우파 주장을 쉴드 친다면서 역시 반민주주의자로 몰린다.[34] 결국 방데에서의 학살 사건의 실상을 말해줘도 쉴드치거나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은 무식하거나 진영논리에 빠져서 그러는 거다.

사실 방데전쟁에서의 학살 상황은 오히려 4.3 사건, 보도연맹 학살사건, 5.18 민주화운동 상황에 벌어진 학살에 더 가깝고 프랑스 혁명의 결과로 자유주의자[35]와 부르주아들이 패권을 차지하고 성장했다는 걸 생각하면 그냥 둘 다 병림픽이다.(...) 한국 근현대사에 벌어진 학살에 대한 이념 논쟁과는 반대로 좌우 입장이 바뀐 경우이기에 흥미와 성찰을 줄 수 있는 부분.

다만 긍정적인 측면에서 진보 계열에서 방데에서 벌어진 사건을 봉기 목적과 주체가 다르다고 할지라도 5.18 민주화운동의 상황과 연관시켜서 보는 측면도 있긴 하다. # 또한 징병제에 대한 비판의 예로 이 사례를 언급하기도 한다. #

5.18 민주화운동/왜곡문서에선 프랑스 대혁명과 5.18 민주화운동은 성격이 다르고 오히려 방데전쟁을 4.3 사건과 유사하다며 방데의 학살 부정세력을 한국의 학살 부정세력과 동급으로 취급한다. 부흥 카페에선 방데의 대학살을 4.3 사건과 같은 선상에서 보며 국민회의와 1공화국의 행위가 같다고 까기도 한다.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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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데 저항군(슈앙, Chouans)들은 성심을 상징으로 삼았으며, 간혹 Dieu et le Roi(하느님과 왕을 위해)라는 문구를 적기도 했다. 이 상징은 오늘날 방데 주의 깃발과 문장에도 반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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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불을 지르고 방데의 민중을 학살하고 있는 프랑스 공화국군을 묘사한 그림이다. 아기를 산 채로 우물에 집어던지려고 하고 있다. 이미 살해 당한 어머니는 죽은 상태에서도 아기를 구하기 위해서 병사를 막으려고 옷자락을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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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데 지방의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에 그려진 민중 학살의 모습. 어머니가 막으려고 하는데도 어린이를 총검으로 찌르려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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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데의 반란을 진압하고 민간인을 학살한 프랑스 공화국군을 묘사한 그림. 오랜 세월이 흘러 많이 잊혀지긴 했지만 이런 그림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현대의 일부 방데 주민에게도 혁명 당시의 공화국군을 그다지 긍정적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증거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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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당한 방데 민중들의 유골이 발굴된 모습. 보면 머리 부분에 총격 등으로 강한 타격을 줬는지 두개골들이 깨져 있다.

이제 방데는 없습니다. 여자들과 그 자녀들이 우리 칼에 죽었습니다. 나는 그들을 사브네의 소택지와 숲에 묻었습니다. 내게 내려진 지시에 따라 나는 말발굽으로 어린이들을 짓이겼으며 부녀자들을 살해했는데 적어도 이런 조치로 도적의 자식들은 더 이상 태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비난할 포로도 두지 않았습니다. 나는 모두 없애버렸습니다. 아주 자랑이라고 썼다.

- 프랑수아 조세프 웨스텔만(François-Joseph Westermann), 프랑스군 장군, 정부 공안위원회 보고서[36]

그러나 사실 웨스텔만보다 더 확실하고 규모가 큰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던 건 루이 마리 튀로(Louis Marie Turreau,1756~1816)인데 이 인간은 줄을 잘 탔는지 주지사까지 하고 감옥에 1년 가량 잠깐 갇혀 있다가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판결까지 받고 출소. 증거불충분이 나올 수 밖에 없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은 다 죽였으니깐. 이것도 원래는 정부에서 그냥 사면해주려고 한 건데 본인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거부한 거다. 양심에 찔려서였을지는 알 수 없다. 이후 주미대사까지 임명되며 승승장구하며 나폴레옹 시대가 끝난 이후에도 살며 천수를 누렸다. 물론 딱 환갑 정도로 살아서 그렇게 오래 산 건 아니지만 온갖 풍파가 벌어지던 시기에 자연사로 편하게 죽었으니 인생의 승리자. 아니, 나폴레옹 정권이 무너지고 왕정 복고가 되었는데 기소를 당하기는 커녕 루이 18세한테 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도 개선문에 이 사람의 이름이 자랑스럽게 당당히 적혀 있다. 뭘 잘 했다고 개선문을 야스쿠니 신사처럼 격 떨어지게 만들 생각이냐 당연히 이에 대해 항의의 목소리도 있지만 먹혀들지 않고 있다. 물론 튀로 본인은 진압을 그다지 원하지는 않은 모양이지만(가능하면 진압에 빠지려고 했다고 한다.) 명령을 받고는 정말 충실히 이행을 했다. 방데의 진압군 지휘관들이 본인들은 꺼렸지만 위에서 명령을 받아서 학살을 충실히 이행한 것이 용서될 수 있는 건 절대로 아니다. .

빅토르 위고의 마지막 장편소설인 <93년>이 방데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설 제목은 방데전쟁이 격화되었던 1793년을 의미하며, 대혁명과 전쟁의 물결 속에 묻혀버린 기본적인 인간성과 인간의 권리가 진정한 혁명의 본질이었음을 알리는 내용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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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알렉상드르 뒤마의 아버지인 카리브해 출신의 혼혈 흑인인 토마 알렉상드르 뒤마(Thomas-Alexandre Dumas)가 이 전쟁에서 공화국군 장군으로 자랑거리는 절대로 아니지만 활동했다. 프랑스 공화국이 어느 정도는 인종차별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아니고 좀 복잡하다. 사실 프랑스와 영국 등 식민제국들이 식민지 점령이나 세계대전 등의 전쟁에 기존 식민지 출신의 유색인종들을 용병으로 써서 활용한 경우가 많은데 이걸 굳이 이들 나라들이 인종차별을 하지 않았다면서 긍정적으로 인식할 수 있을까?[37] 태평양 전쟁일본제국이 내지인(일본인)과 동등하게 대우하는 거랍시고 조선대만 등 식민지 사람들을 징집해서 전투에 쓴 걸 생각해보자. 정말로 말 그대로 그들을 동등하게 여겨서 징집한 걸까?[38] 바로 혐한 불쏘시개 <추한 한국인>(1993)에서는 가짜 한국인 이름으로 써댄 가세 히데아키(새로운 역사 교과서 모임 중심인물이다)가 이런 논리로 일본이 최고라능 개드립을 했다. 일본이야말로 차별없이 홍사익의 경우처럼 조선인을 장군으로 등용했는데 영국이나 다른 나라는 없었다고 짖었다가 역시 무식하다. <추한 한국인이 아닌 추한 일본인>이란 제목으로 한국에서 낸 반론 책자에서 바로 토마 알렉상드르 뒤마를 들먹이며 같이 깠다.

그리고 노예에서 해방된 신분인 자유 흑인들을 공적으로는 차별 대우를 대놓고 하지는 않았지만 사적으로는 흑인이라고 멸시하고 드러나지 않게 차별하는 일이 꽤 있었다. 특히 유색인종을 백인처럼 동등하게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 로베스피에르와 달리 나폴레옹은 유색인종을 차별했고, 아이티에서 반란이 일어날 때 흑인들끼리도 자유민과 노예가 복잡하게 서로 이해 관계가 얽혀 심지어 각자의 편을 드는 백인군들과도 국적을 가리지 않고 손을 잡는 모습까지 보이면서 서로 싸우긴 했지만 나폴레옹이 아이티에서의 반란을 진압을 명령하는 과정에서 흑인이면 전부 학살하라고 명령을 내리고 진짜로 학살을 벌이자 결국 흑인들이 신분에 상관없이 뭉쳐서 프랑스에 저항해서 독립을 했다.

방데 전쟁에서 희생당한 양민들을 기리기 위해 '방데 시네세니' 라는 방데 지역에서 지역 주민들이 자원봉사로 참여하여 여는 오페라를 포함한 지역 행사가 있다. 위에서 언급된 광주와 연관시켜 보는 시각도 이 문화행사에 대한 참고로 언급된 것이다. 이 행사는 프랑스 대통령도 관람하였다고 한다. 좋긴 한데 공식적인 사과부터 먼저 좀 # 처음엔 규모가 작았으나 이후 방데 전쟁을 포함한 지역 역사를 재연하고 공연하는 테마파크 퓌 뒤 퓌로 발전해서 프랑스는 물론 전세계의 관광객을 불러모으고 있다.[월드 리포트 숨 막히는 지상 최대 공연 ‘역사 속으로’]]
  1. 제1공화정, 국민공회 시절
  2. 다만 절정일 때도 방데 도 전체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지역은 참여하지 않았다.
  3. 자코뱅의 공포정치는 어느 정도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었던 반면에 방데전쟁에서의 학살은 단순히 반란군만이 아니라 여성과 어린이, 아기 등 비무장 양민에 대해, 심지어 공화파 시민일지라도 학살하라고 정부에서 분명히 명령했고 충실하게 시행됬기 때문에 얄짤없이 흑역사가 맞다.뭐 프랑스가 저지른 알제리 학살이나 아이티, 베트남 학살 등 흑역사로 벌인 제국주의 치부도 넘치긴 하지만 이 학살은 프랑스 자국민에게 벌였다는 차이가 있다.
  4. 이는 프랑스 혁명정부군의 방데 주민들에 대한 학살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실상은 이미 그 전부터 혁명파와 군대가 대규모는 아니었지만 이미 방데의 농민들을 총살하고 단두대로 처형하는 막장스러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600명 이상이 죽었다는 선전과 달리 150에서 160명 정도의 공화파 시민들이 학살당했다. 어차피 진압군은 공화파 시민들도 방데에서 발견만 하면 학살했으니 이런 정당성이 무색해진다.
  5. 나폴레옹이 방데부흥정책을 제시하고 교황청과 화해한 1801년을 방데 전쟁이 끝난 해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1815년, 1831∼1832년까지 한동안 종종 작은 봉기들이 일어나곤 했다.
  6. 방데를 비롯한 서부일대는 지금도 보수성과 가톨릭 신앙이 강한 지역이다. 그리고 이들을 비난하기 전에 혁명 공화국 정부가 했었던 짓을 보면 당연한 모습일 수 있다. 다만 2015년 지방선거 때는 이민자, 난민 문제와 파리 테러의 영향으로 우경화가 드러나는 결과가 예상 되면서도 1차 투표와 2차 투표에서 극우인 국민전선이 이 지역에서 한 번도 승리하지 못한 걸 보면(특히 1차 투표에선 국민전선이 전국적으로 맹위를 떨쳤다.) 중도 보수성향이지 극우 수준까지는 아닌 듯. 1차 투표결과 2차 투표결과
  7. 웃긴 건 잔 다르크를 찬양하는 글을 썼다. 프랑스 혁명 때랑 시대는 다르지만 어쨌든 당신이 싫어하는 왕정한테 도움을 준 사람인데요? 아하 그래서 혁명 당시 공화파가 기념물들을 훼손하고 탄압하기는 했지
  8. 이건 그나마 점잖은 수준이고 방데인들의 외모와 풍습을 특정화해서 공화주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미개한 야만인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거의 인종차별이나 마찬가지. 같은 자국인 백인에게도 이런 식이니 식민지의 다른 인종인 민중들은 어떻게 취급했을지 말이 必要韓紙?
  9. 어느 정도냐면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랑빌 주민들이 방데인들을 시체로 만들어 그랑빌을 사수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정도다. 이 속에는 단순히 지역 사수에 대한 기쁨이 아닌 반혁명 세력을 몰아냈다는 자부심도 담겨있다. 한국으로 치면 조선 시대 홍경래의 난 때나 동학농민운동 때 농민군의 공격을 격퇴한 지역이 21세기까지 농민군을 죽인 걸 자랑하는 격. 사실 이런 사례는 별로 존재하지 않고 엄밀히 말하면 해방 이후와 6.25 전쟁 당시 이념 갈등으로 다른 사람들을 죽인 사례가 더 적합하겠지만.
  10. 물론 이런 낙인 속에서도 성공해서 주류에 편입한 방데 출신 사람들도 있긴 했다. 대표적으로 1차 세계대전 당시 총리를 지냈던 조르주 클레망소인데, 이 사람이 정치권에서 활동했음에도 방데 사람들의 억울한 낙인은 지우지 못했다. 왜냐하면 클레망소의 집안은 혁명을 지지하는 공화파 집안이었기 때문에. 어차피 무의미한 경우였다. 결국 1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가 독일에게 승리해서 전국적으로 축하 행사를 벌였는데 방데 지방은 축하 행사를 거절하고 방데에서 학살당한 사람들을 위한 추모 행사를 거행했다.
  11. 방데의 사례는 단순히 프랑스만의 사례가 아니라 19세기 근대적 국민국가의 성장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였던 '국민 만들기'의 과정을 보여준다. 국민국가가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공동체로 부각되면 이와 상충하는 다양한 사회집단들은 망각되도록 강제되는데 방데전쟁은 그것이 극단적으로 터져나온 예인 것이다.
  12. 책상 옆에 제노사이드로 인정받은 홀로코스트, 르완다 학살, 킬링필드, 아르메니아 학살을 적어놓아 대조를 이루고 있다.
  13. 책임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조직적인 학살지시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래에서 알 수 있듯이 당장 로베스피에르의 입장도 매우 미묘하다.
  14. 정말로 피해자들을 생각해서라기 보다는 이미 실각하고 죽은 로베스피에르에게 죄와 책임을 다 떠넘기는 의도가 강하다. 막상 방데의 반란에 대해서 로베스피에르가 어땠는지는 미묘한데, 직접적으로 강경진압을 찬성하고 학살에 대한 명령을 내렸는지는 알 수 없고, 오히려 <무엇을 위하여 혁명을 하는가>라는 책에 따르면 로베스피에르는 방데 반란을 둘러싼 격론에 참여하지 않았고, 방데에 대한 명령체계가 약탈과 강간 등을 억제했다고 주장한다. 즉 민간인 학살은 파견 나간 군대가 우발적으로, 임의로 저질렀다는 주장. 오히려 로베스피에르는 지방에서 벌어지는 학살 사건에 염증을 느껴 관련 책임자들을 소환해서 처벌하려던 상황이었으나 반동을 당해 죽음을 당하고 앞에서 얘기한대로 비난을 뒤집어 쓰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결국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부대가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고, 로베스피에르가 속한 중앙정부가 그걸 제대로 통제하고 책임자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못한 책임이 무거운 건 어쩔 수가 없다.
  15. 원래 전쟁범죄의 가해자 측은 자신들이 죽인 희생자 수를 가능하면 최대한 줄여서 얘기하고 피해자 측은 희생자 수가 적어도 가해자 측의 주장보다는 많다고 말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 경우는 반대로 가해자 측이 많이 얘기하는 경우. 60만 명보다 더 많은데 줄여서 얘기하는 건 현실적으로 인구 숫자를 볼 때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만약 가해자가 일부러 희생자 수를 늘려서 얘기한 거라면 적군을 많이 죽인 공적을 보고하는 것처럼 학살을 자랑스럽게 여겼다는 뜻일 수도 있다.(...)
  16. 참고로 프랑스 좌파에서 유난히 강조하고 추모하는 파리 코뮌 때 학살당한 사람의 수는 대략 3만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것도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죽은 사건이긴 하지만 파리 코뮌보다 훨씬 더 많은 인민들이 학살당한 방데에서의 사건을 폄하하는 걸 보면 상당한 위선임을 알 수 있다.
  17. 특히 프랑스 극좌파의 방데에 대한 반응은 한국 극우파에게 4.3 사건, 보도연맹 학살사건, 5.18 민주화운동에 벌어진 학살, 터키인들에게 아르메니아 대학살, 일본 극우파에게 난징 대학살, 벨기에 극우파에게 레오폴드 2세가 아프리카 콩고를 지배하면서 원주민들의 손목을 자르거나 학살한 사건, 중국 공산당원에게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당시의 중국 정부, 마오쩌둥홍위병이 벌인 삽질과 만행, 그리고 천안문 사태티베트위구르의 독립 요구에 대한 강경 진압과 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의 반응과 거의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쉽게 말해 자국이나 자기 진영의 치명적으로 도덕적인 약점인 사건을 건드려서 싸우자는 소리다. 좋게 봐야 혁명이라는 대업의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한 유감스러운 일이었지만 잘못은 분명히 아니고 사과할 일까지는 아니다라는 반응이고 심한 경우는 여태까지의 전통적인 시각이었던, 무지한 농민들이 귀족과 사제, 영국에 선동되고 지원받고 협조해서 반란을 일으켜서 정당하게 진압하고 죽을 짓을 한 놈들만 처형했을 뿐 무고한 양민에 대한 학살은 거의 있지도 않았고 오히려 반란군이 그랬으며 방데에서 공화국이 양민을 학살했다라는 소리는 프랑스 공화국과 혁명을 음해하는 자들의 거짓말이라는 수준이다.(...)
  18. 나이는 어렸기에 전투병은 아니고 북 치는 역할 수준이었지만 이것 역시 적군의 표적이 될 수 있기에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게다가 그 역시 혈기에 휘말려 국가를 향해 반란을 일으킨 방데 주민들에 대한 적개심과 그들에 대한 학살에 어느 정도는 동의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19. 바라의 죽음에 대해선 방데 주민이 말을 훔치는 걸 막다가 살해당했다는 설도 있다.
  20. 현대의 역사연구로는 당시 봉건주의인 중세시대여서 지금처럼 국가와 민족이 명백히 구분되는 것도 아니고, 같은 프랑스인인 부르고뉴인과도 전투를 벌였고 종교적인 성녀의 이미지가 강한 잔 다르크가 과연 프랑스에 대한 애국의 상징으로 보는 일인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다만 그녀 스스로가 프랑스인과 영국인을 구별해서 얘기한 걸 보면 그녀 스스로는 영국군을 섬을 넘어서 온 침략자, 부르고뉴인을 그와 손잡은 매국노 정도로 인지했으며 (당연히 그 시대에는 있지도 않았던 사상이고 본인 스스로는 인식하지 않은 사상이지만)민족주의애국주의를 가지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부르고뉴인과 결국에는 전투를 벌이긴 했지만 사실 부르고뉴와 협조 노선을 가지고 있던 샤를 7세보다 오히려 먼저 부르고뉴인들에게 편지를 보내 협력을 요청했지만 무시당했다. 종교적인 성녀의 이미지가 강하다는 지적의 경우도 나라와 민족을 침략자로부터 지키기 위해 신에게 기도를 많이 하고 마침내 그 계시를 받아서 그렇다고 설명할 수 있다. 이 항목에서도 여러번 언급되지만 정작 바라보다 선배격인데도 이 당시엔 가톨릭와 왕당파의 끄나풀로 몰려서 흔적이 파괴되는 상황이었고 바라보다 좀 더 나중에서야 전국적인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21. 잔 다르크 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적군인 영국군에게조차도 자비를 베풀었거나 민간인에 대한 약탈을 금지시켰다는 이야기들이 있다. 프랑스 영지로 침략해온 영국군을 물리치고 영국군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는 일에 관심이 있었을 뿐 영국 본토(당시엔 영국령으로 분류되던 노르망디, 가스코뉴 등의 프랑스 내 영국령까지도)에 쳐들어가자는 주장을 한 적은 없다. 사실 일찍 세상을 떠나서 그럴지도 모른다. 사실 보헤미아의 후스파 농민 반란군을 정벌하겠다는 편지를 보냈다는 흑역사도 있지만 그게 진짜인지는 알 수 없다. 어차피 그 편지 얼마 뒤에 적에게 붙잡히는 바람에 직접 진압가지도 못했다.
  22. 프랑스 혁명 당시 가톨릭은 수난을 많이 당했으며,(물론 기득권 성직자들이 왕권과 귀족과 결탁해서 세금을 내지도 않고 대지주를 겸하여 백성들을 착취하기도 했으나 민중의 편에서 혁명정부를 인정하고 혁명에 협조한 성직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도 곧 탄압받았다.) 자코뱅 좌파 에베르파(로베스피에르와 당통은 딱히 찬성을 하지 않고 막기는 했다.)에 의해서는 교회와 기념물이 파괴되기도 했는데, 심지어 잔 다르크 동상과 기념물까지도(이 때는 교황청에서 공식적으로 성녀로 인정받아 시성된 건 아니었지만 그녀가 구해낸 곳인 오를레앙 지역과 그녀의 고향인 로렌 지역의 교회에서는 자신들의 수호성녀 개념으로 인정받아 왔다.) 왕정과 가톨릭의 끄나풀의 상징이라며(하지만 잔 다르크가 어떤 출신 성분이고 누구에게 배신당하고 희생당했는지 고려해본다면 웃기는 얘기고 멍청하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그 막장스러운 북한조차도 이순신 장군 같은 민족 구국의 영웅을 왕조에 충성했다고 평가 절하는 하더라도 그 자체까지 깎아내리진 않았다.) 파괴되고 불태워지는 수난을 당했다. 이 정도면 그냥 중국의 문화대혁명이랑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 수준이다. 일부 성직자들과 신도들이 혁명 공화국 정부에 충성을 거부하다가(이것은 당시 교황이 프랑스 혁명정부를 인정하지 않은 삽질을 벌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단두대로 처형당하였고 이들 중 일부가 교황청에 의해 순교자로 인정되어 복자로 시복되기도 했다. 물론 이들이 시복될 때는 혁명이 일어난지 100년이 넘어서 프랑스 정부와 교황청이 화해하고 사이가 개선될 때이긴 했지만. 그리고 이미 언급되었듯이 방데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이 많았던 곳이다.
  23. 심지어 왕정 복고를 주장하는 부류도 있다.(...) 당연하지만 학살된 양민들에 대한 추모와 반성의 의미로 촉구하는 것보다는 정치적인 목적이 더 강하다.
  24. 아르메니아계 프랑스인들의 영향 때문인지 프랑스가 유난히 이 일에 관심을 가지고 터키를 자주 비난한다. 심지어 이 사건을 부정하면 처벌하는 법안을 제정하기도 했다.물론 터키에서는 알제리 학살을 이야기하고 알제리를 끌어들이는데 당연히 알제리는 프랑스를 욕하고 늬들이 저지른 학살에 대하여 터키랑 차이가 없다라고 분노한다.(200만 정도 학살 희생자 수에서 프랑스는 터키처럼 10% 정도 일부 학살을 인정하는 것도 똑같이 때문...)
  25. 단, 현대의 대한민국 정부가 사과하며 책임질 이유가 없긴 하지만 일단 일반대중적으로 홍경래의 난과 동학농민운동 등 민중봉기를 거의 긍정적으로 보고 있고, 이를 유혈진압한 조선 왕조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군사정권시절에 나온 신동우 화백의 한국의 역사에서도 이런 봉기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 진압한 조선 왕조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으로 나왔다. 물론 조선 왕조라는 직접적인 가해 당사자가 무너진 탓이긴 하지만.
  26. 특히 라 마르세예즈의 가사는 적들의 더러운 피를 넘치게 해서 죽이자는 그 적들이 굳이 혁명 당시의 적국 오스트리아 등의 외국인 뿐만 아니라 바로 방데의 양민도 포함될 수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방데의 반공화국군들이 라 마르세예즈를 개사해서 불렀다.(...) 아이티의 흑인들도 마찬가지로 라 마르세계즈를 부르며 프랑스군에 저항을 했다.
  27. 실제로는 프랑스 정부가 실질적인 반환인 영구임대로 외규장각 도서를 돌려주긴 했으나 명목상은 프랑스의 소유권이 있는 문화재를 완전반환이 아니라 빌려준다는 개념으로 읽힐 수 있다.
  28. 프랑스처럼 민주주의 공화국 혁명으로 세워진 미국만 해도 극우파들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서에서 원주민 탄압 문제 등을 다룬다고 미국의 정통성을 깎아내린다면서 시위를 하기도 한다. #
  29. 다만 사이트의 특성상 방데의 반란군을 미화하고 정부군을 지나치게 깎아내리는 점이 있으므로 진짜로 1989년 당시에 쓰여진 시인지는 객관적으로 알기 힘들다. 아시는 위키러 내용 추가 및 수정 바람.
  30. 말할 것도 없이 이런 종류의 만화에선 높은 확률로 마리 앙투아네트도 그냥 사치스러운 악녀로 나온다.(...) 프랑스 혁명 얘기한다면서 로베스피에르 같은 혁명가 이름도 제대로 안나오는 학습만화도 있는데 애초에 많은 걸 바라지 말자.
  31. 당장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 프랑스편은 5공 때 나온 책이면서 부당한 독재자를 시민의 힘으로 끌어내리자면서 프랑스 혁명을 칭송했다.
  32. 물론 보수계열도 기본적으로는 6.25 전쟁 당시 우방국이고 국제관계에서 한국 정부의 편을 대부분 들어주는 프랑스에 우호적이나 주로 미국과 영국을 좀 더 선호하는 반면, 진보계열에서는 미국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할 말을 하며 대립하면서도 리버럴하고 민주주의적인 이미지를 가진 프랑스가 좀 더 선호된다. 다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프랑스와 혁명에 관해서 어느 정도 공부한 진보적인 사람들은 일단 프랑스 좌파에 비해 입장이 자유로운 편이기에 이 일에 대한 문제점 정도는 인식하고 있다. 이 일 자체가 한국에서 큰 관심을 끌지 않아서인지 그렇게 눈에 띄게 혹은 자주 언급하지는 않지만.
  33. 심지어는 프랑스 혁명을 폭동으로 볼 수 있다는 시각이다.(...)
  34. 드립만은 아닌 것이 나무위키에서도 민주주의와 혁명을 위해선 어떠한 학살과 폭정도 용납되며 심지어 외국에 나라를 파는 매국행위를 해도 그것이 옳은 행위라고 실드를 치며 자신에게 동조하지 않는 자들을 모두 자코뱅의 단두대에서 죽었어야 할 자들이라고 비방하던 인물이 활동하기도 했다.
  35. 이 당시에는 사회주의란 개념이 거의 없었을 때고 자유주의자가 진보적이었음을 감안할 필요는 있지만.
  36.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 편지 내용이 진짜인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사실 말투에서 보면 은근히 명령을 내린 혁명 정부에 불만을 드러내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참고로 웨스텔만의 이름이 얼핏 독일어처럼 보이는데 알자스-로렌 출신이라 그렇다. 이후 줄을 잘못 탄 탓인지 1794년 조르주 당통과 함께 단두대에서 처형된다.(...) 인과응보
  37. 그런데 프랑스 극우 인종차별주의자들 중에서는 세네갈, 알제리 등 당시 프랑스 식민지 출신의 사람들이 세계대전 등 프랑스를 위한 전쟁에 참여하고 희생되었던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38. 물론 단순한 총알받이로 징집한 일본과는 달리 저 경우는 일단은 장군으로 활동한 만큼 동일한 상황이라고 보기는 어렵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