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경궁 홍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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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대 왕세자빈
진종
현빈
장조
혜빈
정조
빈궁 김씨
(왕세손빈)

틀:조선의 추존 왕비


대한제국의 추존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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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735년 음력 6월 18일[1] ~ 1815년 음력 12월 15일

상명지통[2], 붕성지통[3], 할반지통[4]을 모두 겪고 친정이 풍비박산 나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비운의 여인

그리고, 조선 역사상 2번째로 비극적인 빈궁.[5]

영풍부원군 홍봉한의 딸. 사도세자의 정실이며 정조의 어머니. 그 외의 자녀로는 일찍 죽은 의소세손, 청연공주, 청선공주가 있다. 영안위 홍주원의 5대손으로 홍주원의 부인이 선조의 딸 정명공주였기 때문에 선조의 6대손이기도 하다.

1744년 10살의 어린 나이로 동갑내기 사도세자와 혼인하였다. 명목상 간택을 치르기는 했지만 초간택 때 이미 대비인 인원왕후 김씨, 정성왕후 서씨 등 높으신 분들을 뵙고 궁인들이 그녀가 괴로워할 정도로 그녀를 안으려 다툰 것을 보아, 간택 전에 이미 그녀는 세자빈으로 낙점이 되어 있던 듯 하다. 이 때 그녀의 조상 정명공주가 사용하던 물품들이 혼수로 들어와 기이하게 여겼다. 특히 병풍에는 아버지가 꾼 그녀의 태몽에 나타난 흑룡과 똑같은 흑룡이 수놓아져 있었다고 한다.

1750년 의소세손을 낳았는데, 이때 꿈에 이미 죽은 시누이 화평옹주가 보여서 혹시 해산하다 죽은 화평옹주가 무슨 해코지를 하러 온 것은 아닌가 불안해했다. 처음에는 사랑하던 딸 화평옹주의 3주기 즈음에 태어난 아이라 탐탁치 않아 하던 영조가 갑자기 와서 아이를 살피는데, 화평옹주와 같은 곳에 점이 있어 화평옹주의 환생이라 여기고 귀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의소세손은 3세의 어린 나이에 사망하였으며 같은 해 정조를 낳는다.

1762년 임오화변으로 사도세자가 죽으면서 혜빈(惠嬪)의 빈호를 받은 그녀는 아들 정조를 데리고 친정으로 내려간다. 그러나 얼마 후 아들을 영조에게 보내 생이별을 하게 된다. 한번은 어린 정조가 그녀에게 와서는 울면서 떨어지지 않으니 영조가 "이렇게 어미를 그리니 놔두고 가는 게 좋지 않겠냐"고 하자 혹 영조가 항상 함께 있는 할애비보다 어미를 더 좋아한다고 섭섭해 할까봐 영조의 성격상 충분히 섭섭해하고 그 뒤로 무한증오를 퍼부었을 확률이 높다 '여기 있으면 위를 그린다'며 무정하게 떼어놓았다고 회고한다.

정조가 즉위한 뒤에 혜경궁(惠慶宮)의 궁호를 받았으며 자궁(慈宮)이라 불리게 된다.[6]

아들의 지극한 효도를 받으면서 기쁜 나날을 보냈으나, 정조 사후 더 큰 고난이 시작된다. 그녀의 친정과 정순왕후 김씨의 친정이 대립했기에, 정조 사후 정순왕후가 그녀의 남동생 홍낙임을 처벌하려고 하자 단식 투쟁을 벌였으며 여기에 순조의 생모인 가순궁 수빈 박씨도 합세해 정순왕후의 뜻을 일단 꺾었으나 결국 홍낙임은 사사된다.

1814년 결국 그녀의 친정은 복권되었고 그 다음 해 그녀는 눈을 감는다.

고종 대에 남편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헌경왕후로 추존되었고, 대한제국 성립 후 장조가 황제로 추존되면서 함께 헌경의황후로 높여졌다. 그녀는 손자의 치세에도 왕비로 추존되지 못했는데, 생전에 그리도 싫어하던 은신군의 양자의 손자에 의해 추존되었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다만 고종은 익종, 즉 효명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즉위하였으므로, 호적상으로는 사도세자가 고조할아버지이다. 나라를 세우거나 칭제를 하면 4대조까지 추존하는 관례를 따르면 사도세자까지 추존하는 게 맞다.

2 한중록

혜경궁 홍씨가 만년에 쓴 수필.

해당 항목 참조.

3 유사역사학계에서 퍼트린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악처"

그러나 이덕일이나 같은 단체원인 이주한 같은 사람 때문에 '무고한 사도세자에게 누명을 씌운 여자'가 퍼지고 있다. 이덕일이 활동하기 수십년 전부터 홍씨가 악녀로 나온 건 <조선왕조 오백년> 에도 있지만 이덕일은 역사학박사였다는 게 문제.

문제는 그게 제대로 근거가 없거나 날조된 것이라는 것이 문제다. 이덕일은 혜경궁 홍씨를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악처'"[7]라면서 사도세자의 정신병 서술을 조작이라 설명하는데 사도세자의 정신병은 한중록 말고도 증거가 여럿 있다.

권두환 교수는 2007년 사도세자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를 발견했다.해당 편지 내용을 보면 사도세자가 우울증 때문에 약을 부탁했다고 나온다. 원문을 번역한 내용은 이렇다.

열은 높고 울증은 극도에 달해 답답하다. 우울증을 씻어내는 약을 남몰래 보내 달라(1753년 또는 1754년 모월 모일)[8]

조선왕조실록에도 광증을 나타내는 서술이 있다. 단, 광증이 기록된 시작점이 61년이며 사도세자는 62년에 죽었고, 대리청정을 무려 14년이나 한 사람이라는건 기억해 두자. 영조 허수아비로 15세부터 14년간 대리청정했는데 우울증 안생기면 그건 철인이지. 영조는 그정돈 해야 왕노릇한다고 여겼을지도...

영조 99권, 38년(1762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윤5월 13일(을해) 2번째 기사

천자(天資)가 탁월하여 임금이 매우 사랑하였는데, 10여 세 이후에는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되었고, 대리(代理)한 후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 처음에는 대단치 않았기 때문에 신민(臣民)들이 낫기를 바랐었다. 정축년15394) ·무인년15395) 이후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 임금이 매양 엄한 하교로 절실하게 책망하니, 세자가 의구심에서 질병이 더하게 되었다. 임금이 경희궁(慶熙宮)으로 이어하자 두 궁(宮) 사이에 서로 막히게 되고, 또 환관(宦官)·기녀(妓女)와 함께 절도 없이 유희하면서 하루 3차례의 문안(問安)을 모두 폐하였으니, 임금의 뜻에 맞지 않았으나 이미 다른 후사가 없었으므로 임금이 매양 종국(宗國)을 위해 근심하였다.

영조 99권, 38년(1762 임오 / 건륭(乾隆) 27년) 5월 22일(을묘) 2번째 기사

한참 후에 세자가 입(笠)과 포(袍) 차림으로 들어와 뜰에 엎드렸는데 임금이 문을 닫고 한참 동안 보지 않으므로, 승지가 문 밖에서 아뢰었다. 임금이 창문을 밀치고 크게 책망하기를,

네가 왕손(王孫)의 어미를 때려 죽이고, 여승(女僧)을 궁으로 들였으며, 서로(西路)에 행역(行役)하고, 북성(北城)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 사모를 쓴 자들은 모두 나를 속였으니 나경언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왕손의 어미를 네가 처음에 매우 사랑하여 우물에 빠진 듯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마침내는 죽였느냐? 그 사람이 아주 강직하였으니, 반드시 네 행실과 일을 간(諫)하다가 이로 말미암아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또 장래에 여승의 아들을 반드시 왕손이라고 일컬어 데리고 들어와 문안할 것이다.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하니, 세자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나경언과 면질(面質)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책망하기를,
“이 역시 나라를 망칠 말이다. 대리(代理)하는 저군(儲君)이 어찌 죄인과 면질해야 하겠는가?”
하니, 세자가 울면서 대답하기를,
“이는 과연 신의 본래 있었던 화증(火症)입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차라리 발광(發狂)을 하는 것이 어찌 낫지 않겠는가?”
하고, 물러가기를 명하니, 세자가 밖으로 나와 금천교(禁川橋) 위에서 대죄하였다.

신하나 궁녀를 죽여버리는 일을 여럿 저질렀고, 그 설명은 사이코패스가 아닌 정신병인 것으로 보이는 게 분명한 서술들이 나온다. 사도세자 본인도 본래 있던 화증이라고 말했다.

박종겸이 쓴 소론 준론계 당론서인 현고기에 이런내용이 나온다

평양 사람 이갑(李甲)이 용력이 있었는데 환관을 통해서 동궁을 모시게 되었다. (그가)일찍이 말하기를.

"동궁이 어떤 사람과 즐겁게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심화가 치밀어 오르자, 철편(鐵鞭)을 휘둘러 그 옆에 있던 사람이 맞아 죽었다. 애증을 분간하지 못한 것이 마치 날씨가 갠 날에 밝았다가 어두운 구름이 갑자기 가리는것과 같았다"

소론계열 당론서로써, 시종일관 사도세자에 우호적이고 노론에 적대적이지만 사도세자의 병 자체는 부인하지 않았다.

폐세자반교에도 분명 이런 내용이 들어있다.[9]

세자가 내관, 내인, 하인을 죽인 것이 거의 100여 명이오며, 그들에게 불로 지지는 형벌을 가하는 등 차마 볼 수 없는 일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지난번 제가 창덕궁에 갔을 때 몇 번이나 저를 죽이려고 했는데 겨우 제 몸의 화는 면했습니다만, 지금 비록 제 몸이야 돌아보지 않더라도 우러러 임금의 몸을 생각하면 어찌 감히 이 사실을 아뢰지 않겠습니까?

또한 이덕일은, 혜경궁 홍씨가 영조사도세자의 관계를 조작하기위해 거짓말을 했다며 다음을 증거로 하였다.

혜경궁은 '한중록'에 세자가 22살이 되도록 영조가 능행할 때 한번도 수가[10]하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이 또한 부자 간의 갈등을 표현하기 위해 혜경궁이 의도적으로 꾸민 거짓말에 불과하다. 세자는 그전에 이미 여러 차례 영조를 수가해 능행에 다녀왔다. 혜경궁이 처음이라고 주장했던 해보다 4년 앞선 영조 28년(1752) 7월 태묘에 거등할 때로 수가했으며 또한 같은 해 12월 태실에 나아갈 때와 다음 해 첫날 태묘에 나아갈 때도 따라갔다. - <사도세자의 고백> 181쪽

이덕일은 태묘에다 '태조의 묘 '고 용어 풀이까지 달아놓았다. 근데 태묘는 무덤이 아니다. 종묘(宗廟)의 정전 을 말하는 것이다. 이건 굳이 정병설 같은 전문가까지 갈 필요도 없이 국어사전만 보면 알 수 있다. 해당 뜻 국어사전에 있는 단어도 확인하지 않고 1차 사료를 부정했다. 이에 대해 이덕일 본인은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서문을 통해 이미 <이덕일의 여인열전>에서 태묘의 뜻을 바로 풀어 썼다며 사소한 실수 하나로 작가를 매장시키지 말라고 반박했다.

이주한은 한술 더 떠서 혜경궁 홍씨를 가해자로 기본전제해서 논리를 전개한 적이 있다. 혜경궁 홍씨를 가해자로 전재해놓고, 이덕일의 사료 왜곡에 반박했던 정병설정병설은 중요한 살인 사건에 대해 가해자의 말을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반사실적 가정의 오류를 범했다.[11] 그러나 정작 실제 정병설은 그딴 논거를 쓴 적 없고, "사도세자가 정신질환이 있다는 건 '한중록'에만 있는 사실이 아니다. 영조가 사도세자 무덤에 두려고 직접 쓴 묘지 이름, 사도세자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간찰, 정조가 사돈 김조순에게 한말 등(후략)"라고 여러 사료와 교차검증하여 이덕일을 반박했다. 이건 관련 논거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오류를 써서 상대의 논거를 날조한 것이다.

일단 혜경궁 홍씨는 당연히 무조건 믿을 수는 없다. 그녀가 거짓말을 했다는게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료는 저자의 주관에 따라 편향성이나 왜곡될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특히 한중록은 그 특성상 혜경궁 홍씨의 친정인 홍봉한 집안의 책임을 실제보다 작게 묘사했다는 의혹을 피하기 힘들다. 위에서 계속 언급된 정병설 교수도 한중록을 완벽히 믿지 않는다. 사료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는 모든 학자들이 가져야 할 기본 태도이다. 그러나 혜경궁 홍씨는 그 가능성을 넘어서 딱히 고의적인 날조를 했다는 정황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데도 이덕일은 제대로 증거도 없이 의심을 넘어 확신을 하며 유사역사학방법을 동원하는 게 문제다.

2014년에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서울아산병원 정신과 의사들인 정하은·김창윤이 한중록을 분석했다. 그 내용이 정신병 증상에 맞으며, 모르는 사람이 서술했다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해당 서술이 현대의 정신의학적 지식을 가진게 아니라면 허구로 기록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한다.

한중록은 사도세자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친정 홍씨 집안을 방어하기 위해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 사후에 기록한 것이므로 내용이 왜곡되었을 수 있다는 것을 근거로 세도세자는 당쟁에 의해 희생된 것이라 설명하기도 한다. ( Lee DI. The world dreamed by Prince Sado. Goyang: Wisdomhouse;2011. p.53-54. ) 하지만 한중록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신병적 증상에 들어맞는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어, 정신증상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이 순전히 상상력을 동원하여 기술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접근 가능한 역사적 자료의 양이 부족하여 자료 수집에 제약이 많았고, 이로 인해 근거가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연구의 가장 큰 제한점이다. 또한 연구자가 역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1차 자료에 직접 접근하기 어려운 문제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중록을 살펴보면 증상에 대한 기술이 상당히 상세하고 구체적이어서, 현대의 정신의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허구로 기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그 논문

참고로 이런 건 정신의학 분야 맞다. 역사학자들도 자기가 모르는 분야는 관련 전문가들에게 의뢰해서 조사를 받는다. 예로 해방 후 미군들이 독도에 폭격을 가했을 때 관련 미군의 증언이 남아 있었다. 국사학과 박사학위 정병준 교수는 '독도 1947 (전후 독도문제와 한.미.일 관계)'에서 폭격이 고의가 아닌가를 분석하기 위해 실제 공군장교에게 분석을 의뢰하고 인터뷰를 했고, 국사학과 박사학위 김태우 교수도 '폭격 미 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에서 위의 정병준처럼 미국의 고의성을 조사하기 위해 공군장교에게 분석을 의뢰하고 인터뷰 했다. 정병준과 김태우는 순수하게 군사적 전문가의 분석을 위해서 인터뷰 한 것이다.

모순적이게도, 음모론자들은 정조가 즉위한 뒤 그녀에게 극진한 효도를 다한 것에 대해선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음모론대로라면 혜경궁 홍씨는 정조에겐 '훌륭한 아버지를 정신병자로 모함해 죽인 원수이자 정적'인데도 왜 정조는 친모에게 이에 대한 하소연조차 하지 않았는지 의문이다.정조가 성인군자라서?

4 가계

5 사극에서의 모습

영조-사도세자-정조 연간이 한국 사극에서 자주 다루어지는 인기 소재이기 때문에 자주 등장한다.

  • KBS 사극 '하늘아 하늘아'는 혜경궁 홍씨가 주인공으로 한중록을 기초삼아 만들어졌으며 혜경궁 역은 이재은(아역), 하희라(성인역)이 맡았다. 내용은 고전적인 해석인 비운의 여인으로 나왔다. 그 외 왕도에서는 정영숙, 조선왕조 오백년에서는 최명길이, 대왕의 길에서는 홍리나가 출연하였다.
  • MBC 이산에서는 견미리가 출연했다.이산임오화변 한참 후의 시기를 메인으로 삼았기 때문에 비운의 여인 이미지보다는 자애로운 어머니 이미지. 단 남편을 잃고 아들도 몇 번이고 잃을 위기를 맞은 것에는 당연히 한이 맺혀 있기에 노론측에는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다. 정조 즉위 후에는 엄한 내명부의 주인 역할을 맡기도 한다. 단, 히로인인 의빈 성씨가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아들 정조와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청국에 보내버리기도 하는 등 무서운 시어머니 역할을 제대로 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의빈 성씨는 혜경궁의 아버지인 홍봉한 집안에서 일하는 시종의 딸이었고, 이 인연으로 혜경궁 처소의 궁녀로 입궁한다. 또, 혜경궁이 거두어 친히 길렀다고 한다. 또한, 궁녀 시절 혜경궁의 딸들과 함께 소설을 필사하기도 하는 등 꽤 밀접한 사이였던 듯 하다. 그리고 의빈 성씨가 문효세자를 낳을 때 혜경궁이 친정에서 데려온 몸종 복례와 유모 아지를 보내 출산을 도왔다고 한다.
  • 반면 채널 CGV 정조 암살미스터리-8일이덕일 식 역사관을 참고했기 때문인지 혜경궁 홍씨를 '친정을 위해 남편을 버렸고 이제는 아들까지 버리려 하는' 냉혹한 이미지로 묘사했으며 정애리가 연기했다.[15] [16]
  • 현빈정조 역을 맡았던 영화 역린에서는 김성령이 혜경궁 홍씨 역을 맡았다. 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했기 때문에 남편을 버린 비정한 면이 아니라 아들을 위해 어린 시어머니 정순왕후에게 굴욕을 당하고 인내하는 등 어머니로서의 모습이 부각되었다.
  • KBS 드라마 스페셜 2015 시즌2- 붉은 달에서는 박하나가 혜경궁 역으로 출연하였다.
  1. 여담으로 친손자인 순조와 생일이 같다. 혜경궁 시책문에도 이 내용이 언급된다.
  2. 아들을 잃은 슬픔
  3. 남편을 잃은 슬픔
  4. 형제를 잃은 슬픔
  5. 가장 비극적인 빈궁이라는데에는 의문이 드는 것이, 혜경궁 홍씨는 아들이 왕위에 오르기라도 했지, 민회빈 강씨병자호란 이후 청에 볼모로 잡혀가 갖은 고생을 하고 위의 3개의 슬픔을 모두 겪고도 아들들을 왕위에 올리지도 못하고 본인은 사약까지 받았다. 혜경궁은 그에 비할건 아니지만 그래도 비극적인 삶을 살긴 했다. 그래도 혜경궁 홍씨는 자식들이라도 있었지, 공회빈 윤씨효순왕후 조씨는 10대 때 남편을 잃고 자식도 없이 평생 외롭게 살았다.
  6. 전통적으로 조선왕실에서 국왕의 정실 어머니를 일컫는 칭호는 자전(慈殿)이었다. 그러나 혜경궁 생전에 끝내 사도세자가 국왕으로 추증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혜경궁은 대비가 되지 못했고, 정조가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되면서 법적으로는 국왕의 어머니조차 아니었기 때문에 '자전'이라는 칭호를 쓰지 못한 것은 물론 그 지위도 공식적으로 확실하게 보장받지 못했다. 정조는 궁여지책으로 '자궁'이라는 칭호와 함께 실질적으로는 왕대비 정순왕후 김씨보다는 낮고 중전 효의왕후 김씨보다는 높은 대우를 하여 결과적으로 대비에 준하는 대접을 함으로서 어머니인 혜경궁을 위로했다.
  7. <사도세자의 고백>, 25쪽
  8.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79&aid=0000167062
  9. 정병설, http://cafe.naver.com/mhdn/29204에서 재인용
  10. 어가를 따라가는 것.
  11. 이주한, 노란 300년 권력의 비밀, 2011, pp.39~40 「3장 비판 아닌 비판을 비판하다」
  12. 혜경궁 처소의 궁녀 출신으로 혜경궁이 거두어 친히 길렀다고 한다. "惠慶宮 爲收昭容于侍側 親鞠育"(황윤석, 이재난고)
  13. 혜경궁이 그 유명한 《한중록》을 맡겼다.
  14. 1769년, 정조를 데리고 기생놀음(...)을 했다.
  15. 하지만 마지막엔 아들 정조에게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려주고 남편과 아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으로 극이 마무리되었다.
  16. 한성별곡에서 정애리가 정순왕후 김씨를 모티브로 한 대비로 등장하고 혜경궁을 모티브로 한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