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생애

二九登祚、號爲永樂。太王恩澤洽于皇天、威武桭被四海。掃除不□、庶寧其業、國富民殷、五穀豊熟。昊天不弔、卅有九、宴駕棄國、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遷就山陵。

18세에 등극하여, 호를 영락(永樂)이라 하였다. 태왕의 은택(恩澤)은 황천(皇天)에 미치고, 위무(威武)는 사해(四海)에 떨쳤다. …지 아니한 것을 쓸어버리자, 사람들이 그 업에 편안히 하게 되었으니,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은 은성하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하늘이 돌보지 않아 39세에 나라를 버리고 편안히 떠나시니, 갑인년 9월 29일 을유에 산릉으로 옮겨 모셨다. -『광개토왕릉비』 1면 5~6행

광개토대왕의 생애 한줄 요약

1 즉위 이전 : 주위 정세와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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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 즉위 시의 고구려 주위 국가[1]

담덕이 성장하던 시절의 고구려는 안으로 고국원왕 시대 손실되었던 국력이 회복되고, 소수림왕 시대 이루어진 통치체제의 정비가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밖으로는 영 좋지 않은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서쪽으로는 고국원왕 시절 환도성을 털어간 전적이 있던 선비족의 연나라(전연)가 다시 일어나(후연) 화북을 휩쓸었고, 남쪽으로는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전적이 있던 백제가 여전히 한반도의 패권을 쥐고 있었다.

서북으로는 거란이라 불리기 시작한 일군의 유목부족이, 동북으로는 동부여가 자리 잡아 지속적으로 배후의 위협이 되었다. 그리고 달가의 정벌 이래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던 숙신도 이 즈음에는 고구려의 지배력이 약화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고구려 외부의 불안은 내부의 발전과 맞물리면서 고구려의 대외적인 확장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소수림왕은 백제 방면으로, 고국양왕은 후연 방면으로 각기 진출을 시도했지만 그다지 적극적인 것은 아니었고 성과도 그리 신통치 않았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성장한 담덕은 그 나름대로 고구려의 상황을 분석하고, 여기에 청소년기의 도전적인 활달함을 바탕으로 고구려의 현실에 알맞은 미래상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에 대해 《삼국사기》는 '나면서 웅위롭고 남달리 높은 뜻이 있었다'는 의미심장한 평가를 전하고 있다.[2]

서기 384년 11월, 담덕의 큰아버지 소수림왕이 아들을 남기지 못한 채 죽자 소수림왕의 동생이자 담덕의 아버지인 고국양왕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이에 따라 담덕은 그로부터 2년 뒤인 고국양왕 3년에 12세의 나이로 태자가 되었다. 그리고 절노부에서 주씨를 태자비로 맞아들인 이듬해, 태자 책봉 6년 뒤인 서기 392년 5월, 고국양왕이 병으로 죽자 담덕은 그 뒤를 이어서 18세의 나이로 고구려의 새로운 왕이 되었다. 광개토대왕과 그의 전쟁의 시작이었다.[3]

2 원년~6년 : 남정백제 북벌거란

2.1 즉위년의 맹활약

秋七月、南伐百濟、拔十城。九月、北伐契丹、虜男女五百口、又招諭本國陷沒民口一萬而歸。

가을 7월에 남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10성을 무너뜨렸다. 9월에 북으로 거란을 정벌하여 남녀 5백 구를 사로잡고, 또 본국의 잡혀간 백성 1만을 불러서 타일러 돌아왔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대왕 원년

임진년의 맹활약[4]

광개토대왕은 즉위하자마자 전쟁을 치루었다. 즉위한 지 고작 두 달 밖에 지나지 않은 원년 7월에 직접 군사 4만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백제를 정벌한 것이다. 이로 인해 석현성(石峴城)을 비롯한 10여 성과 한강 이북의 부락 다수가 고구려에 함락되었다. 이때 광개토대왕이 보여 준 군사적 재능은 대단한 것이어서, 당시 백제의 왕이었던 진사왕이 '담덕이 용병에 능하다'는 말을 듣고 감히 나아가 막지도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9월에는 반대 방향인 북쪽으로 거란을 정벌하고, 거란에 끌려갔던 고구려 백성들을 되찾아 오는 것과 더불어 거란족 500명까지 사로잡아 왔다. 사실 광개토대왕 원년의 북부 전선에서는 광개토대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갔다는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광개토대왕은 여전히 남부 전선에 머물러 있고, 북부 전선에서는 다른 장수가 활약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관미성이 함락되고 남부 전선이 정리된 뒤에는 광개토대왕도 거란 전선에 합류했을 것이다.

『광개토왕릉비』 의 비려 전선 기록에는 광개토대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토벌했다(躬率往討)'는 말이 분명히 나온다. 흔히 이때 되찾아 온 고구려 백성들을 14년 전인 소수림왕 8년(378)에 거란이 고구려 북쪽 여덟 부락을 약탈해간 사건과 관련지어 해석하곤 하지만, 이때까지 잡혀간 사람의 수가 자그마치 1만에 달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거란의 약탈은 그 뒤에도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간단히 말하자면 채무 불이행으로 이자까지 쳐서 강제 압류 들어가겠습니다 호갱님

다시 10월에는 백제 북방의 요충지인 관미성을 공격했는데, 관미성은 사면이 가파르고 바닷물이 에워싸고 있는 곳이라 공략이 쉽지 않았다. 때문에 군사를 일곱 길로 나누어 20일 동안 끈질긴 러시를 감행한 끝에[5] 갑자기 수군들을 이끌고 방어가 늘어진 면을 집중공격해 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관미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강화도나 교동도라는 설이 있고,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파주 오두산성이라는 설도 유력하며, 소수설로는 예성강 하구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관미성이 어느 곳이든 한강의 물길을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 위치라는 점에서는 모든 견해가 일치한다. 즉 관미성이 무너졌다는 것은 곧 백제의 목줄을 쥐고 흔드는 위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국가적 위기에 맞서 진사왕은 구원행성으로 사냥하러 나갔다. 그것도 열흘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사실 군주의 사냥이란 무력 과시와 군사 훈련의 의미를 겸비하는 것이므로, 이는 진사왕이 군대를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하려 한 것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정작 진사왕은 그렇게 달을 넘겨 11월이 되자마자 구원의 행궁에서 급사하고 말았다.(...)

진사왕의 갑작스러운 사망에 대해서도 이설이 엇갈리는데, 바로 진사왕 사후 백제의 왕위가 아들이 아닌 조카 아신왕에게로 계승된 것이다.[6] 이에 대해 《일본서기》에서는 본디 왕위를 이어받았어야 할 침류왕의 아들 아화가 즉위하기도 전에 진사왕이 왕위를 빼앗았고, 이후 진사왕이 일본 천황에게 실례하여 일본에서 사람을 보내 진사왕을 죽이고 조카 아화를 세우고 돌아왔다고 한다.

이를 종합해보면, 진사왕의 죽음이 타살이라는 《일본서기》의 주장이 상당히 유력해진다. 다만 실제로 일본이 백제의 왕을 죽이고 살리고 했을 가능성은 무한히 0에 수렴한다. 진사왕의 구원 행차가 실제로 사냥 본래의 목적에 충실하여 즐겁게 놀고 덤으로 왕실의 위엄을 과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원래 인적이 드문 곳이기에 유인만 잘 한다면 사람 암살하기엔 더 없이 적합한 장소로 변한다는 사냥터의 속성을 이용해 아신왕이 제거했을 것이다.

물론 《삼국사기》 기록에 '행궁에서 죽었다'는 표현을 분명히 하고 있으므로, 적어도 행궁으로 옮겨진 뒤 죽었을 것이다. 아니면 사냥 중 빗나간 화살에 맞은 곳이 덧나 죽었다고 하면 너무 자비로운가... 또 군대 정비와 반격 준비가 목적이었다고 하면, 진사왕이 진성 레임덕 상태인 가운데 왕위를 노리고 있는 왕족과 군사를 이끌고 한 자리에 모인 귀족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여기에 《일본서기》의 기록을 일정 부분 신뢰한다면 아신왕은 즉위과정에서 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은 것으로 보이고, 이는 『광개토왕릉비』 의 이른바 '신묘년조 기사'와도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아신왕이 왜와 친선 관계를 유지하느라 태자를 왜국으로 보내는 등 저자세 외교까지 불사한 것도 어느 정도 설득력 있게 해명할 수 있을 것이다.

2.2 근성의 아신왕

이후 영락 5년에 비려 토벌이 완료되기까지, 광개토대왕은 거란-비려를 상대로 한 북방 전선에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인지,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2년부터 광개토대왕 4년까지 남방 전선에서 줄곧 백제의 공격을 받아주는(...) 역할을 맡았다.

백제 아신왕은 즉위한 이듬해 정월에 동명왕의 사당과 천지신명에 제사를 올리고, 개각을 단행한 듯 자신의 외삼촌 진무에게 군사 업무를 맡겼다. 그리고 그해 8월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다음과 같이 비장하게 말하며 고구려로의 반격(?)을 시작한다.

關彌城者、我北鄙之襟要也。今爲高句麗所有、此寡人之所痛惜、而卿之所宜用心而雪恥也。

관미성이란 곳은 우리 북쪽 변경의 요충지다. 지금 고구려가 가진 바 되었으니, 이는 과인이 분하고 슬퍼하는 바로, 경은 마땅히 마음을 써서 설욕하라! -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신왕 2년

그러자 진무는 군사 1만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남쪽 변경으로 쳐들어가, 석현성 등 다섯 성을 회복하기 위해 먼저 관미성을 포위하였다. 진무는 몸소 사졸보다 앞장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며 공격해 들어갔지만, 군량 수송이 끊어지자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이에 대해 고구려본기에서는 단지 쿨시크하게 "백제가 쳐들어오자 장수를 보내 막았다."라고 써놓은 게 고작이다.(...)

이와 더불어 평양에 아홉 개의 절을 창건했다고 하는데, 영명사와 중흥사가 이때 지어진 절로 꼽힌다. 영명사는 목은 이색의 부벽루에도 등장하는 절이다. 부벽루만이 아니라 다른 문학작품에도 자주 등장하고, 일제강점기 때는 31본산 중 한 곳이였을 정도로 유명한 절이다. 그리고 바로 이 부벽루도 광개토대왕때에 지어젔을 것으로 추정되곤 한다.

이어서 광개토대왕 3년 7월에는 아신왕 본인이 직접 군을 인솔하여 수곡성을 공격하자, 광개토대왕도 직접 정예기병 5천을 이끌고 수곡성 밑에서 싸워 격퇴했다. 이듬해인 광개토대왕 4년 8월에도 백제의 좌장 진무가 다시 쳐들어오자, 광개토대왕도 다시 직접 군사 7천을 이끌고 패수 가에 진을 치고 격퇴했다. 이 전투로 백제군 8천이 고스란히 갈려나가거나 생포되었다. 여기서 좌장 진무가 전사했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수급 8천여 개를 노획했다(虜獲八千餘級)'고 나오고, 백제본기에는 '죽은 자가 8천 명(死者八千人)'이라고 나온다.

그해 11월에 아신왕은 패수에서의 대패에 보복하고자 직접 군사 7천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청목령 밑에 이르렀지만, 때마침 폭설을 만나 군사들이 죽어나가자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한산성(漢山城)으로 돌아가 군사들을 위로했다. 이때 아신왕의 심정은 훗날 나라의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발해를 공격하기 위해 출정했다가 눈 핑계로 돌아온 신라의 통쾌한 기분과는 정반대였을 것이다. 백제 역사상 최악의 대설이었을지도.

백제는 가을마다 고구려를 공격하는데, 추수기를 노리고 쳐들어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백제만 그런 것도 아니다. 비상시에는 군량의 약탈을 통한 현지 조달이 가능해지는데다, 빼앗을 것도 많아지기 때문이다. 간단히 천고마비의 고사를 생각해 보면 된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삼국사기》 광개토대왕 원년의 관미성 전투 기록이나 광개토왕비문 영락 6년의 전쟁을 제외하고는 전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이 더욱 상세한 전황을 전하고 있다. 이건 백제본기의 기록이 고구려나 신라 것을 참고한 게 아니라, 백제 측의 기록이라는 것이고, '사료가 부족해서 아신왕의 승전이 전해지지 않는게 아닐까'하는 추측도 가능성이 낮아진다.

자잘한 규모의 전투들도 전부 기록되었고 또한 거의 1년 주기로 가을마다 고구려를 공격하는 것으로 보아 광개토대왕 2년에서 광개토대왕 4년까지 백제가 고구려에 반격한 것은 한국 고대사에서 보기 드물게 누락 없이 기록이 살아남은 사건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덕분에 아신왕의 호구스러움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2.3 거란-비려 원정

위서 거란전에 따르면 거란은 388년에 북위가 동으로 고막해를 정벌하면서 고막해에서 분리되어 나온 세력이라 하고, 실제로 중국 사서에서 거란이라는 칭호는 5세기가 되어야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이보다 10년 앞선 378년에 이미 거란이 고구려의 북변을 침탈하는 기록이 나온다. 이것으로 미루어 이 시기의 거란은 아직 하나의 집단으로 형성되지 못한 초창기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초창기부터 고구려에 개발살

광개토대왕의 대략적인 비려 정벌 루트

영락 5년에 광개토대왕은 사람을 돌려보내지 않는 비려[7]를 토벌하기 위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그 3개 부락을 격파하니, 6~700영에 마소와 양떼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한다. 이후 돌아오는 길에 요동을 거쳐 국경을 돌아보고 사냥을 즐기다 왔다.

여기서의 비려 또는 패려에 대해 학계에서는 대체로 《삼국사기》의 거란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우선 요동과 인접해 있는 점에서 위치가 들어맞고, 사람을 돌려받으러 갔다는 점에서 《삼국사기》의 서술과 일치한다. 구체적으로는 거란의 필혈부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이외에도 많은 이설이 있지만, 적어도 요하 중상류 지역이라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한다.

즉 광개토대왕 원년부터 시작된 거란 정벌이 이 시점에 와서 마무리되었다고 보는 것이 중론. 특히 광개토대왕은 복수의 전선을 함께 운용한 것으로 보이고, 훗, 양면전쟁 따위... 『광개토왕릉비』 는 《삼국사기》와 달리 광개토대왕의 정복 과정을 시간의 흐름대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한 정복이 마무리되면 당시까지의 경과를 몰아서 정리하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영은 유목민 마을의 단위라고 한다. 보통 100개의 게르가 모여 1영을 이룬다고 하는데[8], 이에 따르면 비려의 인구는 700영×100게르×5인[9]으로 자그마치 35만에 달한다.(...) 하지만 실제는 그보다 훨씬 적었을 것이다. 유목민 마을이라는 것이 애초에 100개 단위로 정확히 끊어서 통제되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위서에 따르면 당시 거란은 대다수 북위의 침공을 피해 달아나 흩어진 상태였다. 또한 영(營)과 부(部)가 서로 병렬적인 관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후한서 오환전에 따르면 초원의 공동체는 부(국가)-읍(마을)-락(가족)의 단위로 구성되어 있으며, 영이라는 단위는 찾아볼 수 없다.

요동을 거쳐 돌아왔다는 서술을 자세히 보면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동으로 역성(力城)과 북풍(北豊)에 왔다고 되어 있는데, 양평은 요동군의 치소로 흔히 요동성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바로 그곳이고 북풍과 역성은 모두 요동군에 소속되어 있는 곳이다. 그런데 고국양왕 때까지만 해도 요동은 후연의 땅이어서, 거란으로부터 돌아오면서 요동 일대를 확보했다는 설도 존재한다.

그러나 후연의 양평령 단등의 묵인하에 요동 땅을 맘대로 지났거나, 이미 그 이전에 양평을 제외한 요동 일부, 즉 역성과 북풍을 미리 확보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역성과 북풍의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확한 설이 존재하지 않는 실정이다. 특히 북풍의 위치에 대해 혹자는 요양 북쪽이라거나 심양 서쪽이라 하기도 하고, 막가면 통화 즉 국내성 인근이라고도 한다. 심지어 중국역사지도집에는 요동반도 한가운데로 표시되어 있다.

광개토왕비문의 이 부분에서 비려라는 판독을 따를 경우, 碑麗라고 쓰는데, 여기서 앞글자는 비석이라는 뜻이고 뒷글자는 매다라는 뜻이 되어 비석에 매달아놓은 제물이라는 뜻으로 해석할수 있게 된다. 왠지 고어하다 백제를 백잔으로, 왜를 왜구 등으로 멸칭한 것과 같은 거란의 필혈부에 대한 멸칭이 되는 것이다.

  • 비려(패려?)의 정체는?
    • 부산적 : 신대왕 5년 (기원 후 169년) 왕은 대가 우거(優居), 주부(主簿) 연인(然人)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현도태수 공손도(公孫度)를 도와 부산적(富山賊)을 토벌하였다. - 삼국사기 // 이 기록의 부산적이 비문에 나타난 부산이라는 지명과 통하는 점에 착안하여 부산적이 비려와 모종의 연관이 있는 세력이 아닌가 하기도 한다. 부산은 요하 서쪽 법고현 서북쪽 일대라고 한다.
    • 진서에 나오는 비리 : 당나라 시기에 편찬한 동진의 역사를 다룬 진서에 비리라는 세력이 나온다. 숙신의 서북쪽으로 말을 타고 이백 일을 가야 나온다고 한다. 너무 멀다... 물론 숙신의 서북쪽에 있는 것은 맞지만, 이백일 어쩌고 하는 부분이 잘못이라고 볼수도 있다. 기록 자체는 바로 밑 위서의 것보다 좀 늦지만 시기는 아래 위서의 기록이 5세기이나 이것은 4세기로 좀 빠른 편.
  • 북위 측 기록의 필혈부 : 위서 거란 열전에 나오는 필혈부와 같은 세력이라는 설이다. 위서의 편찬 시기가 6세기 북제 시기임을 고려하면 그럴싸하다.
    • 거란 측 기록의 비리 : 저 멀리 거란의 역사를 다룬 요사의 지리지에 비리군(陴離郡)이라는 지명이 보이는데, 거란에서 집주 회중군을 설치했다고 한다. 한나라 때 험독현에, 고구려 때 상암현에 속했다고 한다. 이 비리군이 비려족의 위치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요사 지리지의 신뢰도와 500여년을 훌쩍 뒤어넘는 어마어마한 시간적 격차를 생각해보자.
    • 또다른 고구려 라는 설 : 거란계의 부족이라는 일반적인 논지와 달리 완전히 안드로메다로 가버리는 설. 고구려의 끝 글자인 麗자가 비려의 끝 글자이기도 한 점에 주목하여 비려라는 뜻을 고구려에 반발적인 고구려계의 부족에 대한 멸칭비석에 묶어놔야할 고구려 놈들으로 보고 고구려의 선조인 대수맥과 대립한 소수맥으로 보기도 한다. 다만 소수맥은 이미 고구려 초기에 고구려에 흡수되어 안드로로 사라지고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2.4 백제의 항복

영락 6년, 북방 전선에서 거란-비려와의 전쟁도 마무리되었고, 이제 광개토대왕은 그동안 백제의 아신왕이 고구려에 집적거린 것을 응징하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백제로 밀고 들어갔다. 수로와 육로 양면으로 진공하여[10] 아단성, 미추성, 대산한성, 고모루성 등이 무너지고 백제의 수도로 압박해 들어가니, 그때까지 함락된 백제의 성이 모두 58성에 700촌이었다.[11] 일본서기에는 이때 빼았긴 땅을 침미다례, 현남, 지침, 곡나, 동한이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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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럼에도 근성의 남자 아신왕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군대를 성 밖으로 보내어 응전하려 하자, 광개토대왕은 분노하여 아리수를(을) 건너서 성을 압박하였다. 마침내 군대가 격퇴되고 성이 포위되기에 이르러 처지가 곤란해진 아신왕은 광개토대왕에게 항복하고 남녀 1천 명과 세포 1천 필을 바치면서 '지금부터 이후 영원히 노객이 되겠다'는 맹서를 했다. 광개토대왕은 백제 왕의 아우와 대신 10명을 데리고 수도로 돌아왔다.

이로서 백제와 고구려의 직접적인 전쟁은 끝이 났다. 고구려는 남방 전선에서 백제를 완전히 압도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포기를 모르는 근성남 아신왕은 계속해서 반격 시도를 멈추지 않았는데, 보는 사람이 애처로울 정도로 족족 실패한다.

광개토대왕 6년 5월에 아신왕은 태자 전지를 왜국으로 보내어 우호를 맺고 7월에는 한강 남쪽에서 크게 군대를 사열한데다, 다시 이듬해 봄에는 진무를 병관좌평으로 삼고 사두를 좌장으로 앉히고 새로 쌍현성을 축조하는 등 반격을 노렸다. 그리고 그해 8월에 드디어 야심차게 군사를 내어 한산 북쪽의 목책에 이르렀으나 하필이면 그날 밤에 병영으로 유성이 떨어졌다.(...) 그러자 하늘의 뜻이라 여겨 회군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신왕은 바로 다음달에 도성 사람들을 모아서 활쏘기를 가르치며 긴장 국면을 유지했다.(...)

3 6년~9년 : 주변 정리

3.1 요동 확보

이렇게 백제를 항복시킨 광개토대왕은 다시 군대를 북으로 돌려서 광개토대왕 6년에 후연의 요동성을 차지하고, 요동을 고구려의 영역으로 삼았다. 이 사건은 《동사강목》에만 기록되어 있어 후대의 추산이 아닌지 정확한 사실 여부가 의심되는 점이 있지만, 어찌되었든 이 즈음에 광개토대왕이 요동을 고구려의 영역으로 삼았다는 점은 상당히 개연성이 있다.

우선 당나라위진남북조 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양서'와 '북사' 고구려전에 "모용수가 죽고 모용보가 즉위하자, 광개토대왕을 평주목으로 삼고 요동·대방 2국 왕으로 봉했다. 요동군을 공략하여 가졌다."[12]는 기록이 있다. 모용보의 재위기간이 396~398년임을 보면 요동으로의 진출은 대략 이 사이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광개토대왕이 요동 방면으로 진출하자, 모용보가 이를 인정하는 셈으로 광개토대왕을 책봉한 것 같다는 주장이 현재까지의 통설.

또한 원래 요동을 관할하는 평주자사의 치소는 요동반도의 평곽이었는데, 402년에 평주자사 모용귀가 평곽이 아닌 숙군성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적어도 402년 이전에는 후연이 요동에서 밀려난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해동고승전에는 396년에 승려 담시(曇始)가 요동에 와서 불법을 전하니, 이것이 고구려가 불법을 들은 시초라고 전하고 있다. 따라서 397년 이전에 광개토대왕이 요동을 확보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높아보인다. 다만 자치통감에 400년 3월 후연의 양평령 단등이 모반하여 살해당했다는 기사가 있는데, 양평현은 본래 요동군의 치소다. 그렇다면 요동군이 400년까지 버티고 있었다는 생각도 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 400년에 후연이 새로 점령한 신성과 남소성에 양평을 교치했다는 주장도 있고, 요동군의 영역이 고구려에 분점되어 있었다는 주장도 있고, 하여튼 논의가 분분한 상태다.

후연의 역사를 보면, 이 시기 후연이 극심한 내분을 겪고 있었다는 점과 이어서 생각할 수 있다. 396년 후연은 북위를 상대로 참패를 겪고 모용수까지 분사하면서 국운이 뿌리째 흔들리는 상황이었다. 이후로도 북위에게 국토가 유린당하자 모용수의 뒤를 이은 모용보는 397년 용성으로 달아나게 된다. 하지만 398년 용성에서도 난한의 쿠데타로 모용보가 제거되고, 난한은 다시 모용성에게 제거되는 막장 상황. 이러한 후연의 위축과 혼란은 광개토대왕의 요동 진출을 도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의 요동 진출이 완전한 것은 아니라서 훗날 후연이 요동으로 쳐들어오기도 하고 그를 격퇴하는 과정에서 전선이 요서까지 확장되며 요하를 중심으로 후연과 고구려가 공방을 거듭한다. 402년 숙군성을 깨뜨리고도 그것을 유지할 능력이 안 되었는지, 406년 후연이 다시 숙군성에 자사를 배치하는 것이 좋은 예.

3.2 숙신족 복속

영락 8년, 광개토대왕은 요동의 정반대인 고구려 동북방 변방으로 한 부대의 군대를 파견해 숙신족(광개토왕 비문에는 식신이라 나옴)을 순찰하였다. 이때 그들의 막사라성 가태라곡의 남녀 삼백여인을 붙잡았다. 이후로 숙신족은 고구려에 조공을 약속하고 내정을 보고하며 고구려의 명을 받기로 하여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이전의 서천왕대에도 숙신족을 복속시킨 적이 있기 때문에 이때의 숙신족 복속은 재복속이나 지배력 강화, 또는 서천왕대에 복속시킨 숙신족과는 다른 숙신족 세력을 복속시킨 것으로 보인다. 다른 숙신족 세력을 복속시킨 것으로 보는 경우 서천왕 대 복속된 숙신은 송화강 유역, 이 때 복속된 숙신은 목단강 유역의 것으로 보는 주장이 유력하다.[13]

이때의 숙신이란 세력은 훗날 물길-말갈로 변모하는 세력으로 발해를 거처 여진-만주족이 된다라는게 학계의 통설이긴 한데, 연구가 축적되면서 숙신,읍루,물길,말갈,여진,만주가 서로 별 연관없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들은 북쪽으로는 흑룡강,동쪽으로는 오호츠크해에 이르며 서남으로는 현재의 연길지방 이북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매우 광범위한 영역에 숙신이라 통칭되는 숙신계 종족이 분포하고 있었으며 중앙집권화가 되지 않고 서로 남남으로 퍼저있었다.광개토대왕대에 복속한 숙신은 그 규모로 보아 숙신족중 일부 세력으로 보인다.

이때 복속된 숙신은 장수왕대에 고구려에 얹혀 북위에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부용세력이 된것 같다. 하지만 또다른 숙신계인 물길이 성장하여 고구려를 괴롭힌다.

※식신(백신?)의 정체는?

  • 이상의 사실은 광개토왕비문에 나와있는 백신토곡(帛愼土谷-백신 땅의 곡이라는 뜻. 곡은 골짜기를 말한다. 토욕혼이 아니라...) 복속 기사를 바탕으로 도출한 것인데, 백신의 백자를 백으로 판독하느냐 식으로 판독하느냐에 따라 복속대상이 달라질수 있다. (숙신이 식신으로 불리기도 한다.) 비문이 워낙 훼손이 심해서 정확한 판독이 어렵다. 백(帛)자나 식(息)자 가운데 하나로 보인다.

1.동예 계통의 세력 : 백신으로 판독하면 숙신이 아닌 강원도 방면의 동예 세력으로 추측할수 있다. 광개토대왕이 399년~400년에 한반도 방면으로 남진한 것이 근거다. 그 전에 미리 교통정리를 하며 신라로 가는 길에 강원도에 위치한 동예 부족을 손봐주었다는 이야기. 하지만 이 동예 세력으로 알려진 세력들중 백신이란 이름을 가진 세력이 없다. 또한 강원도 방면의 동예 세력은 이미 선대에 고구려에 복속된 것으로 보인다.

일단 태조대왕이 동예를 복속하기도 했거니와, 앞선 동천왕대에 신라와 충돌하는 것으로 보아[14] 적어도 동천왕대까지는 고구려에서 동예의 방해 없이 신라로 가는 길이 열린 것으로 보기도 한다. 아니면 396년 백제를 정벌할때 백제의 58성 700촌에 편성되어 있던 동예 세력을 점령한 것으로 보인다.

2.숙신 계통의 세력 : 식신으로 판독하면 숙신의 이칭으로 파악된다. 학계에서는 숙신이란 설이 지배적이다. 다만 한국 고대사 관련 자료에는 숙신이라고 나오는 것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고 동예와 숙신이 번갈아가며 나온다. 가끔 동예와 숙신이 한꺼번에 나오는 실수도 보인다. 하지만 백신이라는 판독이 정확하다는게 확증될 경우 숙신설은 안드로메다로 가버린다. 숙신을 백신이나 그와 비슷한 명칭으로 칭한 사례가 없기 때문. 물론 그렇다고 동예라는 확증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냥 누군지 모르겠다가 되어버린다.

3.신라 설 : 왜구로부터 구원해주러 가며 손봐줬다는 설.

4.백제 설 : 중국 학자 왕건군의 주장. 백제의 일부 영토를 순찰했다는 설이다.

4 9년~17년 : 서방의 연, 남방의 왜

4.1 신라 구원과 임나가라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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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 때 고구려가 신라에 하사한 호우명 그릇.[15]

399년, 백제에서는 아신왕이 다시 한번 군사를 모아 고구려를 공격하려고 하지만, 백제는 백성들이 징집을 피해 외국으로 달아나버려(...) 군사력이 고갈되어 있었다. 달아난 백성 가운데 궁월군(弓月君)을 필두로 한 일부는 다시 왜로 건너가려고 했지만, 신라의 저지를 받았다고 보기도 한다.[16] 이런 내부적인 문제로 인해 고구려에 복수할 기회를 노리던 백제는 맹서[17]를 어긴 채 와 화통하게 되었고, 마침내 백제에 의해 끌어들여진 왜가 신라를 침공했다.

영락 9년, 이러한 남방의 정세를 감지한 것인지 광개토대왕이 평양에 행차하고 있는데, 신라가 사신을 보내서 왜인의 침공을 받았다며 구원을 요청하였다. 광개토대왕은 사신에게 밀계(密計)를 알려준 뒤 돌려보내고, 광개토대왕 9년에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인지 후연으로 사신을 보내어 조공했지만[18] 모용성은 사신이 무례하다는 핑계를 잡아 그대로 신성과 남소성을 먹어버렸다. 하지만 곧장 양평령 단등의 반란 크리가 터지고 마는데...

어쨌든 영락 10년에 이르러 광개토대왕은 보기 5만의 대군을 편성하여 신라로 보냈다. 참 여기서 적 연합군은 20만명이였다 고구려군은 남거성에서부터 왜인을 구축하며 신라성까지 이르렀고, 왜인이 버틸 수가 없다를 외치며 퇴각하자 이를 추격해 임나가라에 이르러 성을 항복시켰다. 항복시킨 성에는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했다.

사실 이 대목은 설이 굉장히 다양하게 갈리는 부분인데, 주로 임나가라·종발성·안라인수병의 해석이 문제가 된다.

  • 임나가라(任那加羅)의 경우에는 이것을 '임나라는 가라'로 보아서 김해의 임나가라로 보기도 하고, '임나의 가라'로 보아서 김해의 가라국으로 보기도 하고, '임나와 가라'로 보아서 창원의 임나와 김해의 가라로 보기도 한다.
  • 종발성(從拔城)의 경우에는 종발(從拔)을 동사로 봐서 '따라서 성을 무너뜨렸다'로 보기도 하고, 이 자체를 하나의 명사로 보아서 '종발성'이라 보고 이를 부산이나 김해에 비정하기도 한다.
  •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의 경우에는 안라(安羅)를 명사로 봐서 '안라국 사람 수비병'으로 보기도 하고, 안(安)을 동사로 봐서 '라인(羅人) 수비병을 안정시켰다'로 보기도 한다. 이 경우에는 '라인'이 누구냐는 문제가 겹쳐서 신라인이라는 설, 가라인이라는 설, 안라인이라는 설, 라인(邏人)이라는 설이 서로 엇갈리는 상황. 아 입맛대로 골라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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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가야-왜국의 연결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를 계기로 고구려는 한동안[19] 신라에 내정 간섭 수준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며, 또한 근초고왕 대 이룩되었던 백제-가야-왜국의 국제 커넥션이 사실상 와해되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김해의 가락국은 기존까지 담당해오던 국제사회의 중간 매개자 역할이 축소되면서 가야 내부의 주도권도 점차 상실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른바 '전기 가야연맹의 와해'로 지칭되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시 의논이 갈리지만 그 뒤로도 김해 가락국은 일단 존속하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고구려가 가야지방에 유형지를 두었다는 기록과 가야의 정치에 고구려가 개입한 적이 있었다는 말이 있지만 이는 명확한 출처가 필요하다.

이후 영락 14년에 왜가 다시 대방계(帶方界)로 침입해 들어오긴 하지만[20] 이내 평양에서 출정한 광개토대왕에게 궤멸당한다.[21]

백제는 광개토대왕 14년에 전지왕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한바탕 내분을 겪기도 하거니와, 왕권을 강화하려는 시도 속에서 친위세력으로 해씨와 목씨가 주도권을 잡다가 어린 구이신왕이 즉위하여 태후의 섭정을 받고 비유왕은 모종의 이유로 들판에 가매장되는 등 이리저리 치이면서 왜국·중국·신라와의 외교에나 전념(...)하게 된다. 훗날 이것을 수습하고 백제를 중흥한게 아신왕이 죽고나서 반세기쯤 뒤에 즉위한 개로왕이지만,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성은 함락되고 개로왕은 죽임당한다.

여기까지 정리하면 392년에 남으로 백제 침공, 북으로 거란 침공. 395년까지 남으로 백제 방어, 북으로 비려 침공. 396년에 대대적인 백제 강습. 397년까지 요동에서 후연 세력 구축. 398년에 잠시 북으로 숙신 좀 손봐주고, 400년에 요동에서 후연 공격 방어. 401년까지 신라에서 왜군 몰아내고 가야까지 진출... 군대를 동원하기 힘든 계절을 제외하면 거의 쉬지 않고 정복만 했고, 그야말로 전방위적인 전선의 공격-방어 교차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민심이 동요하지 않고, 가는 족족 이겨먹었다. 사실 고대나 중세 국가들 중엔 이런 식으로 연속적인 군사활동이 이어지는데도 나라가 부강하고 민심이 안정적인 사례가 의외로 많은데, 대표적인 것이 아틸라 시절의 훈이나 카롤루스 대제시절 프랑크다. 이는 강대한 군대를 그 국가가 장기간 보유하기 힘들 경우 나타나는 현상으로, 잇단 승리와 전리품을 통해 군대를 유지하고 그 승리가 계속되는 동안 국가가 군대를 유지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물론 이건 상당히 외줄타기에 가까운 국가 운용방식이며 적정선을 지키지 않으면 국가가 위태로워진다.

각설하고, 이렇게 한반도와 만주의 이런저런 세력들을 손봐주는 과정에서 서서히 요동의 패자 자리를 놓고 숙적 후연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4.2 고구려의 왜 원정?

일본서기 리추 덴노(履中天皇) 5년 기록인 404년 영락 14년에 묘한 기록에 대한 기술부분이 나온다. 이 부분에서 리추 덴노(履中天皇)가 신화적 문구로 기록되어서 애매하게 기술되어있으나 년도수를 얼추보면 덴노가 자신의 아내까지 죽고 화를 부른 차지군(車持君)에게 책임을 묻고 삼신(三神)을 받쳤다라고 되어있다. 피냄새와 재해재난의 주범이 검도태자왕(劍刀太子王)이라고 되어있다.

더욱이 한제이 덴노(反正天皇)는 고구려계로 알려진 인물로 리추 덴노(履中天皇)가 죽고 405년에 그 자리에 앉는다. 이 기록을 두고 고구려가 당시 일본 열도로 신라에서 가야와 왜의 군사력을 몰아낸이후 왜를 공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들이 나오고 있다. 기록상으로 볼때 404년이면 왜가 다시 대방계를 공격하여 고구려가 격퇴했던 시기와 완전히 일치한다. 더욱이 기록에 언급되는 츠쿠시(筑紫)/아와지 섬(淡路島)은 오늘날 큐슈지역이라고 한다. 고구려가 당시 이 남방전선에 집중하는 사이 후연이 공격해왔던걸 감안한다면 충분히 당시 백제와 가야를 지원하는데 병력을 보낸 왜를 공격하여 정벌전을 펼쳤을 확률이 있다. 고구려 해상력의 능력은 5세기때부터 본격적으로 최절정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고 광개토태왕이 백제정벌등에서도 해상력을 운영하여 대규모 동원을 해본바가 있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더욱이 재침을한 왜군을 섬멸하고 그대로 왜 본토로 진격해가는것 역시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만 이 부분은 현재 기록상으로만 존재하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 기록에 대한 해석이 아직은 불분명하다. 물론 경상남도지역와 큐슈지역에서 고구려 유물들이 발견된건 사실이고 실제로 경상도 지역에 신라구원이후에 고구려 수군기지가 설치되어 운영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충분히 생각해볼수 있으나 명확하게 나온건 없다.

4.3 후연과의 8년 전쟁과 후연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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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를 건너 후연의 숙군성으로 진격하는 광개토대왕 민족기록화[22]

상술한 바와 같이, 400년에 모용성은 조공까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신이 무례하다는 이유를 들어 쳐들어왔다. 모용희를 선봉으로 신성과 남소성을 무너뜨리고 700리에 달하는 땅을 먹었으니, 사실상 요동의 방어선에 구멍이 난 셈이었다. 다행히 직후 양평령 단등의 반란으로 후연의 요동 진출이 주춤하면서 한숨 돌린 고구려군은 남쪽 신라로 내려와 왜군을 몰아냈고, 이내 다시 북쪽으로 돌아와 반격을 시작한다.

401년, 반란을 진압하던 와중에 모용성이 사망하고 모용희가 즉위하는 등 후연에 내홍이 계속되는 틈을 타서 광개토대왕은 다시 신성과 남소성을 점거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402년 1월에 후연이 서쪽으로 요서에서 북위를 몰아내자, 광개토대왕은 후연의 군사력이 서쪽으로 향한 틈을 타서 5월에 군사를 보내 야간잠입작전으로 평주자사가 머무르고 있던 숙군성을 쳤다. 이에 숙군성에 주둔하고 있던 평주자사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지만, 그대로 숙군성을 점거한 채 영역화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로부터 다시 2년 뒤인 404년 11월에 모용희는 왕후 부씨와 함께 사방으로 쏘다니면서 사냥을 벌이는데, 이 와중에 호랑이와 이리에게 죽거나 얼어서 죽은 자가 5천여 명이나 되었다. 이에 12월 광개토대왕은 다시 한번 후연을 공격해 연군에서 100여인을 살육·약탈했다. 연군은 본래 베이징의 계현이 치소지만, 연군은 399년에 태수 고호가 북위에 갖다 바친고로 이 시점에는 대릉하 유역에 이치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23]

우리역사문화연구소의 김용만 소장은 저서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에서 앞선 모용희의 사냥을 고구려의 공격을 막기 위한 출정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짐승이나 동사로 5천여 명이나 죽는다는게 사리에 맞지 않고, 무엇보다 한참 전쟁중인 상황에서 적군이 코앞까지 처들어왔는데 사냥이나 하고 있는다는게 쉽사리 수긍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대 자체가 사냥이 11월이고 전쟁이 12월이라고 되어 있어서 앞뒤가 맞지 않는 문제가 있다.

그 뒤로도 광개토대왕 13년에 광개토대왕은 군사를 내어 후연을 쳤으나, 이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만 전하고 그마저도 별다른 기록이 없다.

장해현지에 따르면 404년에 고구려가 요동반도 남쪽의 여러 섬들을 점거하고 성을 쌓았다고 한다.

뒤치기는 반복된다. 영락 14년에 왜군이 대방계로 침입해와 광개토대왕이 직접 이를 섬멸하는 사이, 광개토대왕 14년 모용희가 요동성으로 직접 쳐들어 온 것이다. 모용희는 요동성을 함락 직전까지 몰아붙였으나, 모용희가 동행한 황후 부씨과 함께 성을 깎아버리고 가장 먼저 입성하겠다며(...) 시간을 끄는 바람에 이를 틈타 고구려군이 방어태세를 정비하여 결국 요동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해 12월, 후연의 황제 모용희는 다시 거란을 정벌하러 용성을 출발해 이듬해 1월 형북에 이르렀다가 거란의 위세에 놀라 퇴각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동행한 황후 부씨가 바가지를 긁는 바람에(...) 치중까지 내버리고 3천 리를 달려서 고구려의 목저성을 기습했으나, 얼어죽는 사람이 길에 이어지는 마당에 이런 군대를 가지고 이길 수 있을 리가.(...)

광개토대왕 15년 봄에 고구려에 가뭄이 들었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이 기간에는 고구려의 국내 사정이 안 좋은 관계로 후연에 공세를 취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듬해 고구려의 사정은 궁궐을 증축할 정도로 호전되었다고 여겨진다.

광개토대왕 16년 7월에 후연에서는 드디어 풍발이 반란을 일으켜 막장 황제 모용희를 살해하고 모용운을 추대했다. 모용운은 본래 과거 고국원왕 시절 환도성전투에서 모용황에게 포로로 끌려갔던 고구려 왕족의 후손, 즉 고구려의 지파로서 모용보의 양자였는데, 이 때문인지 왕위에 오른뒤 고씨로 성을 갈았다. 후연이 북연으로 바뀐 것이다.[24] 하필이면 고구려 사람인 모용운을 골라 세운 것으로 미루어 풍발이 고구려와의 관계를 고려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가능하지만, 일단 고구려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아 반란을 일으킨 것은 아니다.

그리고 광개토대왕 17년 3월, 광개토대왕은 북연으로 사신을 보내어 '종족을 베풀었다.(叙宗族)' 모용운이 고씨로 성을 회복한 것을 본가(?)인 고구려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북연이 고구려에 복속되었다고 보기도 하지만, 이는 다소 확대된 해석으로 고구려 우위의 화친이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어디까지나 명목상인 것이지만, 북연은 황제국이고 고구려는 왕국이었기 때문이다.[25]

한편 영락 17년에 광개토대왕은 보기 5만으로 모종의 적과 사방합전(四方合戰)하여 모조리 참살했다. 노획한 개갑이 만여 령이고 군수물자가 부지기수에 돌아오며 깨뜨린 성이 사구성, 루성, 우불성 등이라고 하는데, 하필이면 이 부분에서 적이 누군지 알려주는 내용이 판독 불가다. 때문에 학계에서는 적을 후연으로 보는 설과 백제나 왜로 보는 설이 갈리고 있다.

5 17년~22년 : 말년

5.1 남연과의 교섭

408년 광고를 도읍으로 삼아 산동 일대를 장악한 남연에 사신을 보내어 천리인(千里人) 10명과 천리마 1필, 큰 곰 가죽, 장니[26]를 선물로 주었다. 남연 왕 모용초는 기뻐하며 물소[27]와 (말하는) 앵무새를 답례품으로 보냈다.[28]

전후맥락을 알 수 없는 기록으로 그냥 단순한 국가 간 교섭인지 다른 배경이 있는지 알기 힘들다.

5.2 태자 책봉 등

광개토대왕 18년 4월, 광개토대왕은 거련(장수왕)을 태자로 삼았다. 7월 나라 동쪽에 독산등 여섯성을 쌓고 평양의 민호를 그곳으로 옮겼다. 비교적으로 인구가 빈약한 동쪽에 평양의 반동적인 인구를 이주시켜 평양 지배를 강화하고 동쪽을 개척하면서 동부여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 보인다. 8월 남쪽을 순행했다. 아마 백제를 염두에 둔 순행이였을 것이다.

5.3 동부여 정벌

광개토대왕의 릉이라는 주장도 있는 태왕릉. 물론 근거는 없다[29]

410년 고구려의 동북방에 위치한 부여(동부여)가 고구려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왕이 직접 토벌했다. 고구려군이 동부여의 수도에 이르자 동부여가 항복했다. 이때에 동부여를 떠받드는 5압로(5부)가 고구려에 투항했고 64개의 성과 1400개의 마을을 공파했다. 바로전에 고구려가 상대한 후연은 서방인데 동부여는 그 정반대인 동북방이다. 광개토대왕은 동서남북 사방을 가로질러가며 정복전쟁을 벌인 것이다. 정말이지 근성가가 아닐 수 없다...

일각에서는 64개의 성과 1400개의 마을이 광개토대왕 생전에 공략한 성과 마을의 전부라고 하는데 근거가 매우 부실하다. 그 근거가 광개토왕 비문에 나와있는 함락된 성의 개수를 도합하면 64개가 되고 비려에게 얻은 6~700영에 백제에게 얻은 700개의 마을을 더하면 1400이 된다는건데... 유목민의 마을 단위인 영과 백제의 마을을 의미하는 촌은 병렬적으로 셈할 수 있는 같은 단위가 아니다. 무엇보다, 비문에서 6~700개라고 애매하게 적어놨지 700개라고 콕 집어놓지 않았다. 6~700개라고 하니까 700개라기보다는 600개에서 700개 사이 650개 정도로 보는게 옳다.

아마 동부여는 고구려가 동천왕대,고국원왕대에 걸처 약화되는 틈을 타 자립하고 세력을 강화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광개토왕비문』등에 보이는 고구려가 동북방 방면에 행한 일련의 조치는 동부여를 의식하고 한 것으로 보인다. 동부여에 인접한 숙신 복속도 동부여 정벌을 위한 전초전이였을 가능성이 크다. 머 부여의 인구가 40만 인데다가 고구려가 망할때 부여천(부여 지방) 인근의 성만 40개이고 동부여의 옛 땅에 위치했던 발해의 초기 인구가 50만 정도라고 했으니 64개의 성에 1400개의 마을이 꼭 오버는 아니다.

암튼 마지막으로 이루어진 동부여 정복은 동부여의 세력 규모나 숙신 정복이라는 전초전까지 필요했던 점을 볼때 거란-비려 정복이라는 전초전을 치룬 후연 정벌과 신라 복속이라는 부가적인 전쟁을 치룬 백제 정벌에 비견될만한 규모의 정벌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동부여의 위치는 숙신의 인근으로 삼강평원 즈음에 위치했던 것 같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노태돈의 주장 이래 동부여의 위치를 두만강 유역과 책성(현재의 훈춘?)으로 보는게 대세다. 그 근거는 부여가 선비에게 망했을 때 부여의 왕족들이 두만강 유역에 위치한 고구려의 속주 옥저로 도망왔고 이들이 나중에 자치권을 행사하다가 고구려가 힘을 잃은 틈을 타 동부여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송기호의 지적처럼 두만강 유역에서는 동부여라는 존재의 고고학적 확인이 안된다. 더구나 고구려가 아무리 힘을 잃었다한들 일개 망한 나라의 유민들에게 자신들의 속주를 떼어주면서 까지 동부여같은 큰 나라를 세울 발판을 마련해줬을까...

5.4 내치

광개토대왕때에 고구려 왕권을 정당화하는, 천손의식으로 대표되는 고구려의 천하관이 완성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 천하관은 광개토왕비문에 잘 나타나 있다. 광개토왕비문을 보면 백제, 신라, 동부여 같은 우리 민족의 국가는 속민 취급하며 구원과 고구려로부터 이탈억제의 당위성을 내세우고 있는데 반해 패려, 숙신, 후연, 왜와 같은 이민족 세력에 대해선 무참히 분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삼국통일 의식의 시초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민족 통합의 상징으로 볼 수도 있다. 단재 신채호도 왜와 선비족으로부터 민족을 구원한 사람으로 봤다.

우리가 현재 널리 알고 있는 고구려 건국신화를 전하는 가장 이른 기록도 광개토왕비문이다. 광개토대왕 관련 유물에서 빈번히 발견되는 #자 모양이 광개토대왕이 이끌었던 고구려군의 문장이라는 설도 제기된 바 있다. 한 편 광개토대왕은 독자적인 연호 영락(永樂)을 제정하였다. 한국 역사상 사용된 연호로 확인되는 것중 가장 이른 것이다. 또한, 소수림왕 이래 대대적으로 지배층이 밀어오던 불교 진흥책을 계승하여,불교와 관련한 몇가지 업적을 남겼다.요동을 차지한 뒤 이 지방의 혼란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승려 담시[30]를 파견하여 민심 교화 사업을 펼첬다.[31] 장수왕대의 평양천도를 위한 기반을 닦았다. 안학궁을 건설했다. 기록에는 광개토대왕대에 안학궁 건설을 시작했다는 것이 확인되지 않지만 안학궁이 427년에 완공되었는데 규모로 보아 장수왕 즉위후 십여년 남짓한 시간동안 뚝딱 지었을 리는 없고 광개토대왕대부터 이미 기반을 닦고 있었을 것이다. 자주 평양에 행차했다.

장사,사마,참군등의 관직을 신설했다. 사마, 참군은 군사에 관한 관직이다. 후연을 정탐하기 위해 만든 관직이라는 설도 있다. 이 관직들이 신설된 시기는 북사 고구려전의 기록으로 보아 396년~398년 즈음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왕릉의 묘지기들의 인생이 망가지는걸 걱정하여 수묘인 제도를 정비했다. 단순히 묘지기들에 대한 걱정뿐 아니라 과거 미천왕의 능이 전연에게 털린 일이 있었는데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한듯 하다. 수묘인의 구성에는 광개토대왕이 일생동안 잡아온 한(韓)인[32]과 예인으로 구성된 생구(노비)들이 주를 이루었던듯 하다. 수묘인 제도를 정비한 구체적인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대강 정복전쟁이 마무리된 이후로 보인다. 수묘인 착취 자체가 대부분 피정복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대의 수묘인 제도 정비에 대해서는 아래 인용문을 참조하면 된다.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이 살아 계실 때에 교(敎)를 내려 말하기를, ‘선조(先祖) 왕들이 다만 원근(遠近)에 사는 구민(舊民)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지키며 소제를 맡게 하였는데, 나는 이들 구민들이 점점 몰락하게 될 것이 염려된다. 만일 내가 죽은 뒤 나의 무덤을 편안히 수묘하는 일에는,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略取)해 온 한인(韓人)과 예인(穢人)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소제하게 하라’고 하였다. 왕의 말씀이 이와 같았으므로 그에 따라 한(韓)과 예(穢)의 220가(家)를 데려다가 수묘케 하였다.

그런데 그들 한인과 예인들이 수묘의 예법(禮法)을 잘 모를 것이 염려되어, 다시 구민(舊民) 110가(家)를 더 데려왔다. 신(新)·구(舊) 수묘호를 합쳐, 국연(國烟)이 30가(家)이고 간연(看烟)이 300가(家)로서, 도합(都合) 330가(家)이다. 선조(先祖) 왕들 이래로 능묘에 석비(石碑)를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수묘인 연호(烟戶)들이 섞갈리게 되었다.
오직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께서 선조(先祖) 왕들을 위해 묘상(墓上)에 비(碑)를 세우고 그 연호(烟戶)를 새겨 기록하여 착오가 없게 하라고 명하였다. 또한 왕께서 규정을 제정하시어, ‘수묘인을 이제부터 다시 서로 팔아넘기지 못하며, 비록 부유한 자가 있을 지라도 또한 함부로 사들이지 못할 것이니, 만약 이 법령을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판 자는 형벌을 받을 것이고, 산 자는 자신이 수묘(守墓)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 『광개토왕릉비

413년 사망했다. 시호를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 하고 414년 9월 29일(음력)에 그의 아들인 장수왕이 광개토왕비를 세우고 국강상 지역의 산릉에 매장되었다.

5.4.1 요동성 육왕탑 설화

삼국유사에 나오는 요동성 육왕탑 설화에서 고구려의 '성왕'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이 누군지 삼국유사 저자 일연도 몰랐다.

고구려에 '동명성왕 주몽'이 있는데 일연은 동명성왕은 아니라고 했다.

한편 모두루 묘지명에서 광개토대왕을 '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라고 부른 칭호가 보인다.

그래서 요동성 육왕탑 설화의 고구려 성왕은 광개토대왕이라는게 일반적인 설이다.요동성 육왕탑 설화의 내용은 이곳에서 볼수 있다.

6 삼국사기 기록

一年夏五月 광개토왕이 즉위하다
一年秋七月 10개의 백제성을 빼앗다
一年秋九月 거란을 정벌하다
一年冬十月 백제 관미성을 빼앗다
二年秋八月 백제의 침략을 물리치고 평양에 사찰을 창건하다
三年秋七月 정예기병으로 백제의 침략을 물리치다
三年秋八月 나라 남쪽에 7성을 쌓다
四年秋八月 패수에서 백제와 싸워 이기다
九年春一月 사신을 후연에 보내 조공하다
九年春二月 후연이 고구려의 신성과 남소성을 빼앗다
十一年 후연 숙군성을 공격하다
十三年冬十一月 후연을 침략하다
十四年春一月 후연이 요동성 공격에 실패하다
十五年秋七月 해충과 가뭄으로 농작물이 피해를 입다
十五年冬十二月 후연이 목저성을 공격해왔으나 패배하다
十六年春二月 궁궐을 증축 수리하다
十七年春三月 북연에 사신을 보내다
十八年夏四月 왕자 거련을 태자로 삼다
十八年秋七月 나라 동쪽에 6성을 쌓다
十八年秋八月 남쪽 지방을 순행하다

二十二年冬十月 광개토왕이 죽다
  1. 동부여 같은 경우에는 위치가 통설에 따른 것이며, 다소 이견이 있다.
  2. 생이웅위 유척당지지(生而雄偉 有倜儻之志). 이 문구의 해석은 '나면서부터 기개가 웅대하고 활달한 뜻이 있었다.(네이트 한국학 《삼국사기》)'거나 '태어나서 씩씩하고 뛰어나며 대범한 뜻이 있었다.(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사기》)'거나 '웅위하고 뛰어난 뜻이 있었다.(한국고전종합DB 《동사강목》)'거나 '태어나면서부터 체격이 크고, 생각이 대범하였다.(허성도 번역 《삼국사기》)'거나 '어려서부터 체격이 웅위하고 뜻이 고상하였다.(이병도 번역 《삼국사기》)'는 등 수많은 바리에이션 해석이 있지만, 어차피 모두 의미는 비슷하다.
  3.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해를 391년으로 보고 《삼국사기》에 고국양왕 말년에 벌어진 것으로 기록된 신라와의 수교, 불교의 권장, 종묘와 사직의 수리 사건을 모두 광개토대왕의 원년의 것으로 넣으려는 주장이 오늘날 대세를 차지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내용은 본 문서의 '기년 수정론' 항목을 참조할 때 그다지 성과도 없거니와 오히려 연대가 꼬이는 현상이 발생한다. 따라서 《삼국사기》와 『광개토왕릉비』를 모두 최대한 존중하여 이하 연대는 모두 광개토대왕 X년(《삼국사기》)/영락 X년(『광개토왕릉비』)으로 표기하겠다. 암만해도 엿가락처럼 《삼국사기》의 기록을 늘리고 떼어서 붙이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4. 실제로 삼국사기의 연표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해도 임진년으로 추산된다. 다만 능비문에 따르면 신묘년이 되지만... '기년 수정론' 항목 참조.
  5. 사실 이 러시는 바닷쪽 방면의 수비를 허술하게 만들기 위한 훼이크였다.
  6. 그런데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괴랄하게도 아신왕을 진사왕의 아들이라고 하고 있으니...
  7. 능비문의 판독에 따라 비려(碑麗)는 패려(稗麗)로 읽기도 한다.
  8. 우리나라 삼국지 4권 325쪽 각주. 그러나 우리나라 삼국지는 소설이기에 이에 대한 정확한 근거는 확인이 필요하다. 참고로 김용만의 역사서적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에도 이런 내용이 나오는데 우리나라 삼국지 자문을 김용만이 했다.
  9. 한 게르는 한 집으로 곧 한 가족이고, 한 가족의 구성원을 5인으로 본 기준.
  10. 능비문의 판독에 따라 '水軍'이라는 글자를 판독 불명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공략된 성의 위치로 미루어 일단은 수군이 동원되었다고 보는 것이 중론이다.
  11. 아단성보다 앞에 각미성(各彌城)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관미성과 동일한 성으로 보인다. 따라서 능비문의 해당 숫자는 이보다 앞서 즉위 원년부터 함락된 모든 성을 망라한 숫자로 여겨지고 있다.
  12. 요동군 공략 시점에 대한 통설과 그에 대한 이견은 링크을 참조.
  13. '고구려의 영역지배방식 연구'(김현숙 저) 참고
  14. 더 멀리 가면 이미 대무신왕 대에 신라와 부딪힌다...
  15. 소설가 최인호는 만주등지를 뒤집고 다니며 연구한 끝에 저 호우명 그릇 바닥의 상단에 보이는 # 문장이 광개토대왕의 문장이라고 추측해내었다. 그리고 최인호 작가는 중국 입국 금지를 당했다. 지못미...
  16. 신라에서 이들이 왜로 이주하려는걸 막아버린 덕분에 백제·신라·가야·왜 사이에 글로벌한 분쟁이 벌어지고, 이것이 이후 국제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17. 396년에 백제왕이 항복한 일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18. 398년에 모용성이 모용보를 시해한 난한을 몰아내고 황제로 등극했는데, 이해 설날에 자신을 '천왕'으로 낮추었다. 이에 사신을 보낸 것으로 보이긷 한다. 하긴 '황제'라고 했다가 '천왕'이라고 낮추었으니 사신이 어느 장단에 맞추어야 할지 헷갈릴 만도 하지.
  19. 약 20~30년 정도로 추정된다.
  20. 대방계는 앞서 대방군이 있던 황해도 지방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 지리상으로 이 또한 백제가 왜를 끌어들인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위의 선례도 있거니와 그렇지 않고서는 멀리 황해도까지 왜인이 독자적으로 공격해 올 이유도 보급선도 없다는 주장.
  21. 물론 영락 17년 기사에서 '사방합전'으로 '참살탕진'된 적국이 백제라고 본다면 이것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22. 뛰어난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70년대에 그려진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수준 높은 고증을 보여준다. 서울대 미대 이종상 교수의 작품으로 자세한 정보는링크 참조.
  23. 끝까지 강단사학의 단정 운운하며 연군이 북경이라고 믿고 광개토대왕의 영토를 넓혀보려는 사람들이 있으나, 아니 북경을 치려면 코앞의 용성부터 먼저 작살내던가.(...) 그 근거는 알아서 판단하기로 하자.
  24. 물론 모용운 시기까지를 후연으로 보기도 하고, 모용운 시기만 뚝 떼어서 대연으로 보기도 한다. 어쨌든 국호는 다 같은 연(燕).
  25.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모용운은 황제가 아닌 '천왕'으로 즉위했기에 명칭상 황제라기보다는 조금 격이 높거나 동급 정도기는 하다. 행세는 황제로 한 것이 맞지만.
  26. 障泥 ; 말의 배를 덮어 흙이 튀어 오르는 것을 막는 물건
  27. 이 시대 사서에 수우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들은 대부분 물소 짐승 자체 보다는 물소의 뿔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각궁을 만드는 주재료.
  28. 출처는 태평어람 359권에 십육국춘추의 일문으로 실려있다.
  29. 장군총과 함께 광개토대왕릉 후보로 꼽히는 곳 중 하나인데 확증할만한 근거는 없다. 어쨋든 광개토왕비문이 다른 곳에 있던 걸 뽑아다 박아놓은게 아니고서야 광개토왕비문 주변에 왕릉이랄 만한 무덤이 장군총과 태왕릉 정도밖에 없어서 장군총이나 태왕릉 둘 중 하나가 광개토대왕의 릉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참고로 태왕릉에서 태왕릉출토전명과 호태왕이 새겨진 귀고리가 발견되었다. 《화랑세기》의 저자 박창화는 『광개토왕비』를 고려(왕건이 세운)에서 뽑아다가 현재의 위치에다 박아놓은 거라는 괴랄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 이때는 대략 정신이 멍해진다.
  30. 신라에 불교를 전파한 묵호자와 동일인물이라는 설도 있다.
  31. 해동고승전
  32. 韓은 가야를 가리키는 말로 많이 쓰였기 때문에 가야인일 가능성도 있다. 특히 일본쪽 기록에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