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용 vs 김성근

1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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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6월 21일 KBO 올스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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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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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용 감독과 김성근 감독을 비교하는 문서이다. 다만 이 문서가 본래 김응용 문서에 있다가 분리된 문서이고, 주로 신규 야구팬들이 가진 오해에 대한 반박 위주로 이루어졌음은 감안하여야 한다. 사실 오해가 정말 많기도 하고(...)

김응용 감독은 2004년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서 치른 현대 유니콘스와의 한국시리즈 이후로 일선에서 물러나며 감독직을 수행하지 않아서인지 2000년 후반 들어 불어난 신규 야구팬층 에게는 왕년에 잘한 명감독 수준으로 인식되며 야신보다 격이 떨어진다고 여겨지는 감이 있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은 포스트시즌 에서 김응용 감독과 3번 붙어서 이겨 본 적이 한 번도 없다.[1] 애초에 김성근 감독은 2002년 전까지 한국시리즈에 진출해본 적도 없었다. 다만 이것이 김응용 감독이 김성근 감독보다 뛰어나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그러나 좋은 전력의 팀에서 최고의 성적을 이끌어내고, 그 팀을 지속 가능한 강팀으로 유지하는 것도 능력이라는 점 역시도 감안해야 한다. 또한 김응용이 감독이 당대의 강팀을 맡았기 때문에 잘한게 아니라 김응용이 강팀을 만들었기 때문에 잘한거라는 점은 잊혀지고 있다.

예를들어, 김성근이 SK라는 팀 에서 4회 연속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는데 SK는 강팀이니 한국시리즈 진출이 당연한 것일까? 김성근의 업적은 없고 그냥 팀빨인가? 아니면 김성근 감독이 SK를 강하게 만들어서 강팀이 된 것인가? 애초에 해태 타이거즈라는 팀에 처음 부임했을 때 해태가 그렇게 강팀이 아니었다.[2] 그 팀을 최다 우승팀으로 만든 것은 엄연한 김응용의 공적이다.

선동열, 이종범이란 초대형 스타가 존재했다고 하지만, 한화는 류현진, 김태균이란 역대급 스타가 있는 상황에서 우승하지 못했다. 이만수, 김성래, 장효조, 이승엽, 김시진, 김일융 등 그야말로 전통의 강호이자 올스타급 선수 라인업을 가졌던 삼성 또한 2002년까지 만년 준우승 이미지가 박히며 한국시리즈 우승 가뭄에 시달려야 했다. 분명 슈퍼스타의 존재는 우승에 큰 도움이 되지만 슈퍼스타가 있다고 해서 우승하는 것은 아니다. 김응용 감독은 그냥 강팀을 받아서 다 해먹은게 아니라, 재임 기간동안 끊임없이 리빌딩을 해가면서 팀을 강팀으로 만들고 유지했다. 김일권->이순철->이종범으로 교체되는 과정에서도 새로운 선수 키우고 기존선수들도 세대교체를 착실히 했다.

슈퍼스타가 없다고 해서 우승을 못한 것도 아니었다. 이종범과 선동열이 없었을때에도 우승했다. 게다가 정규시즌 1위를 못 한 상태에서도 여러번 우승했다. 역대로 정규시즌 우승팀이 아닌 우승이 몇번 안 되는데 그 몇 번 안 되는 경우의 상당수가 김응용의 해태시절 이루어진것이다. 삼성이라는 당대의 최강팀, 빙그레 이글즈라는 당대의 최강팀을 상대로도 족족 우승을 일구어내었다. 절대적인 전력의 차이로만 우승한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약한 전력에서도 우승을 이뤄내기도 했다.

한편 2013년 한화 이글스를 맡아 보여준 운영은 많은 사람들에게 팀을 갉아먹는 쌍팔년도식 후진 운영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그러나 이 점은 2004년 이후 무려 8시즌을 현장에서 물러나 있었던 것이 가장 크다. 또한 현장 밖의 다른 감독들과는 달리, 당시에는 감독 복귀 의사 자체가 없었고 따라서 복귀를 대비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김성근 감독도 노리타들의 망상과 달리 한화 이글스 부임후 행보를 보면 전형적인 쌍팔년도 야구였던 것이 드러나고 있다. SK의 선수층이 두꺼웠기 때문에 벌떼야구라는 이름으로 그럴듯하게 포장된 것 뿐이었다.

그러나 팬들에 의해 자주 비교 당하는 것과는 달리 두 사람의 사이는 꽤 좋은 듯하며 김성근도 자서전이나 인터뷰 등에서 김응용을 인정한다는 류의 발언을 자주 했다. 직언을 잘하는 김성근의 성격을 생각할때 지어내는 말은 아닌듯. 거기에 2013 올스타 브레이크 기간 동안 특별 편성 된 김성근의 돌직구에서 한화에 대한 비평이 나왔을때 김응용 감독에 대해선 일체의 언급이 없었다는 점만 봐도 확실히 김응용 감독을 존경하거나 혹은 높게 평가하거나 둘 중 하나인 듯. 혹은 본인도 혹사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해서 그런걸지도..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둘이 한솥밥을 먹은적도 있다. 1993년에는 김성근 감독이 해태 타이거즈의 2군 감독을 역임한 바 있다. 이때 김성근은 김응용의 지도술을 한수 배우기 위해 직접 자청해 갔다고 이야기 한 바 있다. 어쨌든 간에 1990년대만 해도 해도 김성근의 커리어는 김응용에 비해 보잘것 없었다. 물론 2000년대 들어서는 김응용이 은퇴하고 김성근이 대성하면서 이 평가는 미묘하게 바뀐다. 아무래도 해태의 포스를 기억하는 올드팬들은 김응용의 손을 들어주지만, 2000년대 후반에 유입된 프로야구 신규팬들은 SK의 포스가 워낙 강렬한지라...

2 상세

2.1 김응용은 강압적으로 선수들을 다루는 후진야구?

2000년대 이후 부쩍 늘어난 김성근감독 팬들에 의해, 김성근 감독은 일본에서 선진야구를 배워 세밀한 투수운용, 기민한 작전 지시 등으로 당시 체계적인 지도자 수업을 받지 못한 다른 감독들보다 한 수 위의 야구를 선보인 반면 김응용 감독은 수틀리면 선수 패고 군대처럼 강압적으로 선수들을 굴리는 악바리 야구라는 말이 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근거없는 허위사실이다.다 노리타들이 지어내는 헛소리

김응용 감독은 그전까지 실업야구 감독을 하다가 1981년 미국으로 야구 유학을 갔다. 대한야구협회에서 보내준 일종의 지도자 해외연수로 거기서 자율 야구를 도입해서 김영덕, 김성근 등의 재일야구 지도자들의 대척점에 섰다. 김성근이 해태 타이거즈 2군 감독으로 와있을 때에는 난 2시간이 지나면 무슨 연습을 더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스프링캠프에서 매일 수비위주로 오전 팀훈련만 시키고 김성근 감독의 추가훈련을 막았다고 한다. 당시 해태는 전지훈련은 물론 평소에도 훈련시간이 타팀의 절반수준이라 트레이드돼서 온 선수들은 벌써 끝나요?? 하면서 놀라기도 했단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를 전성기 해태가 소수의 인원으로도 운용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꼽기도 한다. 훈련으로 인한 체력소모가 적었기에 그만큼 경기에 집중할 수 있다고 본 것.

거기다가 경기에선 희생번트나 작전 지시를 거의 내리지 않았고 작전을 내도 선두타자가 나갔을 경우 치고 달리기 정도 뿐이었으며 그나마도 어쩌다가 한 번 나오는 수준이었다. 기습번트나 도루 등은 대부분 선수 개개인의 판단에 맡겼다. 초지일관 강공에 1년 내내 타순도 고정이었다. 어찌 보면 1994년 이광환 감독이나 2008년 제리 로이스터 감독보다 훨씬 먼저 자율야구를 시작한 감독이다.

다만 투수 운영은 전형적인 구식 야구로 감독 초기에는 선발, 마무리 가리지 않는 혹사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이상윤은 1983년 혹사를 당하고 그 해 우승한 뒤 2년간 개점휴업 상태였다가 1986년에나 부활하게 된다. 다만 프로야구 초창기 대부분의 에이스급 투수들이 혹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장명부의 혹사는 너무나 유명하고, 최동원, 박철순, 김시진 등의 초에이스들도 혹사로 20대 후반에 맛이 간 경우가 많았다. 최근 투수 수명이 30대 후반까지 올라간 것을 보면 수명이 10년은 단축된 셈. 그리고 2013시즌 한화에서 이런 식의 운용을 했을 땐 여지없이 통렬한 지적을 받았다. 최소한 선수의 잠재력을 깨우는 과정이라며 금칠하는 사람이라고 쓰고 노리타라고 읽는은 감독 본인 포함 아무도 없었다.

1990년대 해태의 투수층이 두터워지자 김응용의 투수운용법이 진화하게 된다. 최고의 투수를 마무리로 돌리면서 셋업맨들을 활용하는 방법이다. 해태에선 선동렬임창용을 특급 마무리로 뒀고 한때는 이대진도 마무리를 했다. 삼성에선 노장진중무리로 무지막지하게 굴렸다. 강력한 마무리를 박아두고 방수원이나 송유석을 앞서 등판시키는 등 현대 야구의 셋업맨이라 할 수 있는 투수 기용을 일찍부터 하기도 했다. 그 밖에도 투수 자원이 많았던 1980년대 해태 시절에 김대현, 차동철, 이광우 등의 두터운 중간계투진이 끝판왕 선동열에게 경기를 넘겨주는 역할을 했다. 홀드 기록이 뒤늦게 시작되어 당시 해태 중간계투진의 활약이 기록상 잘 나타나지 않는 것이 아쉬운 부분. [3]

임창용이 비인간적 혹사를 당한 시기는 1997~1999년인데 1997년과 1998년은 김응용 감독 밑에서 선수생활을 하던 시기다. 임창용의 최고 혹사기는 삼성으로 이적하고 나서 서정환 감독 시절이었던 1999년으로, 김응용 때보다 훨씬 심했다.[4] 나중에는 김응용 감독도 방침을 바꿔서 삼성에 부임한 이후인 2001년부터 2003년까지는 임창용을 선발로 기용했고 2004시즌 마무리로 복귀시킨 다음엔 61경기 67이닝으로 철저히 1이닝 마무리로 기용했다.

구타 문제는 당시 해태 타이거즈의 주축 선수들이 대부분 군산상고나 광주제일고 등 학벌로 연결되어 있었던 까닭에 학교 야구부에 있던 악습이 그대로 프로구단으로 옮겨온 것이 한 원인이다. 해태에서 이 악습을 제일 마지막으로 이어받은게 바로 이호성. 이호성이 은퇴하고 이종범이 최고참이 되면서 최소한 선수들끼리의 구타는 사라졌다. 물론 김응용 본인도 종종 폭력을 통해 선수들을 휘어잡기도 했으나,[5] 실력만 확실하다면 사생활 간섭을 하지 않았고 일부 사정이 어려운 선수들을 도와주는 등 무조건 채찍질만으로 선수를 짓누른 건 아니다. 또한 시대적인 문제로 체계적인 지도자 교육을 받지 못한 이유도 존재한다. 무엇보다 하와이 항명 사건 때문에 감독 인생이 끝날 뻔 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 이후로 자제하는 편이기도 했다.

사실 제대로 구타 문제를 파고 들어간다면 여기에서 자유로운 1980년대 감독은 정말 몇 명 없다. 김성근 감독은 그 중에서도 1순위에 들어가는 사람이다. 애당초 스포츠 폭력의 기원은 일본이며, 이는 군대와 마찬가지로 일본 집단문화의 고질적인 문제다. 1990년대 일본 여자 농구 리그에 용병으로 왔던 한 미국 선수가 코칭스탭의 구타 문화를 보고 충격을 받아 계약기간도 채우지 않고 미국에 돌아가 일본 체육계를 비난하는 기자회견을 했을 정도로 일본 체육계는 구타문화가 만연해 있다. 그리고 김성근 감독은 그 시절 일본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친 사람이다. 이런 사정에서 김성근이 구타와 무관할리 만무하다. 자기에게 인사 안하고 갔다고 숙소까지 따라가 폭행한 적도 있을 정도다. 김성근에게 맞으면서 자란 배영수가 아직도 현역으로 뛰고 있으며 심지어는 일본 지바 롯데 시절에도 일본선수들을 폭행했다. 그리고 이걸 자랑스레 인터뷰에서 밝혔다.그렇게 자랑할 것도 없냐 1980년대 만년우승팀인 김응용이 좀 더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서 그렇지 김성근도 한술 더 뜨면 떴지 절대 덜하지 않다.

김응용은 1990년대 후반에는 우승도 많이 해봤고, 동렬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 해서 성적에 대한 기대도 없어져 우승강박증이 사라진 다음이라서, 구타는 자제했으며 [6], 숙소가 없는 어린선수들을 자택의 남는방에 묶게 하거나, (한화시절에는) 훈련 챙겨주고 밥 먹이며 맘씨 좋은 할아버지 감독이 되었지만 김성근 감독은 2000년대 후반인 SK감독 재임기간에도 구타를 했다. 자기 질문에 건성으로 대답했다고 싸대기를 날리거나, 인사 안했다고 따로 불러서 때렸다거나, 어떤 투수를 조련할때 제구가 안될때 마다 투수 옆에서서 한 방씩 갈겼다거나, 밤에 후배한테 술 사오라고 한 죄로 불러내서 싸대기를 20대 때렸다던지. 훗날 잘 되라는 의미에서 죄의식 없이 때렸고 결과는 좋게 나왔지만, 요즘 이런 식으로 선수 훈련시키면 경질 이전에 폭행죄로 감옥 들어간다. 김성한21세기에 그랬다가 한동안 프로야구계에서 활동을 못했다. 이진영의 경우 KBS 베이스볼 야!에서 직접 증언했다. "당시 선수들이 훈련중에 김성근 감독이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계시길래 그냥 지나쳤는데 나중에 불러서 그 때 왜 인사 안 했냐고 때리셨다."

다른 감독들을 돌아봐도 술 취해서 선수하고 코치 팬 김동엽이나,자기가 싫어하는 별명을 말했다고 타팀 선수 귀싸대기를 날린 김영덕[7]의 사례나, 투수가 지시한 공을 안 던졌다고 때리고 쓰러진 백인천과 체벌을 시도하다가 항명 사건이 터져서 사임까지 한 OB의 윤동균 등등 끝도 없이 나온다. 김응용이 이들보다 더한 '폭력감독'으로 찍힌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잘렸다 복귀했다를 반복하는 동안 너무나 오래 재직했고, 해태라는 팀이 원래 주목을 받는 팀이었을 뿐만 아니라, 시즌 경기중에도 판정 문제로 심판에게 다가가 니미 시X 하면서 멱살을 잡고 수십 차례 퇴장을 당해 역대 감독 퇴장 1위를 기록하는등 강경한 인상이 두드러졌기 때문일 뿐이다.

프로야구가 출범한 이후 상당히 시간 지난 후에도 프로의식이 정착되질 않아서 선수들이 무책임하게 움직이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선발등판 전날 잠안자고 술 퍼마신 일을 선동열이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곤 하지만, 요즘 그랬다가는 당장 언론과 팬들에게 탈탈 털리고 어지간히 급한게 아니면 2군행이다. 쉽게 말해 야구계가 전반적으로 미성숙했다. 선수들은 프로의식이 부족했고 감독들도 대등한 인격체라는 인식이 부족해 별 생각없이 손찌검을 했다. 2000년대가 아니라 그 1980년대니까 그랬다는 말.

2.2 김응용은 선수빨로 경력을 쌓은 무능력한 감독?

갓끼리사마께선
일단 덕을 많이 보긴 했다. 초창기 한국프로야구는 선수층이랄 게 없었다. 장명부를 앞세워 2위까지 치고 올라간 삼미 슈퍼스타즈의 예에서 보여지듯이 약팀도 특급 선수 한둘만 있으면 성적을 낼수 있었다. 또한 1980년대 중반까지는 무제한 1차 지명이 가능했고 고졸 선수들은 자유계약으로 무제한 영입이 가능했다. 그런 상황에서 해태 타이거즈는 첫 해 6팀중 4위이긴 했지만 팀 홈런, 도루에서 1위를 차지한 잠재력있는 팀이었고,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던 전라도 팜을 끼고 있었다.[8] 삼성 시절이야 말할것도 없고. 적어도 김응용은 2012년까지 한화 이글스같은 약팀은 맡아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해태가 잠재력이 있었으며 팜이 괜찮았다 한들, 1982년 리그 첫해 6팀중 4위 찍던 인원수 채우기 급급한 팀을 다음해 우승시킨건 엄연한 사실이며, 이런 이유로 "XX는 우승할 팀"이라고 한다면 세상에 우승 못할 팀이 없다. 극단적인 예로 2009년과 2012년의 한화 이글스는 리그 최고급의 강타자KBO 역대급의 슈퍼 에이스를 동시에 보유했지만, 이것을 가지고 한화의 당해 성적은 좋지가 않았으며, 6668587667 시절의 LG 트윈스에게는 전국 최고의 서울팜이 있었다. 또한 능력있는 선수들을 관리하는 것도 감독 능력이고 1996, 1997년 우승 당시의 해태 전력은 선동열, 김성한, 한대화 등의 주력선수들이 해외로 이적하거나 은퇴, 트레이드 등으로 빠졌고, 투타의 핵인 이종범 이대진의 방위복무도 시즌 초반까지 안끝났었다. 시즌 전까지 중하위권 전력으로 평가받던 상황이었기에 무조건 선수빨이라고 폄하할 근거는 마땅히 없다. 진짜 무능하다면 좋은 팀에 있어도 시원찮을 테니까.

그리고 호남팜타령으로 선수빨이란 비판은 말이 안되는게 1970~80년대는 호남팜도 나쁜편은 아니지만 대구경북 팜이 제일 좋았다. 특히 대구경북팜 야수들은 거의 국대타선으로 봐도 무리가 없었다. 호남팜은 대구경북팜 서울팜에 이어서 부산경남정도로 좋긴 하지만 일부 안티들이 주장하는대로 줏어먹기만해도 우승이라는건 역사왜곡이다. 초기멤버들은 광주출신이 오히려 적고 군산상고 출신이 많지만 군산상고 조차 1970년대 신흥 명문이었다.

1980년대 중반 선동열, 1980년대 후반 조계현과 이강철이 나왔으니 전국구급 아니냐는 지적도 있는데 투수들 배출은 상급이었지만 야수들 수준은 실제로 좋다고 보기 어렵다.[9] 1980년대 4년연속 우승 당시에도 해태 왕조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공격력은 빙그레나 삼성보다 약했다. 실제로 호남팜이 매우 좋아진 건 1990년대로 '해태 왕조가 좋은 성적을 찍자 광주지역 유망주들이 야구로 몰리며 좋아진 것 이다. 김응용이 호남 팜을 줏어 먹은 게 아니라 키운 것에 가깝다.

그 좋아진 호남팜 덕을 본것은 1990년대 중반 이종범 이대진 김종국 김상진이 마지막이고 해태의 모기업이 중소재벌이라 스카웃에 인색하면서 박재홍은 실업팀 현대 피닉스[10] 서재응은 메이저리그 뉴욕 메츠로, 김병현최희섭은 각각 성균관대와 고려대라는 아마야구팀에게 몇천만원 스카웃 머니가 딸려서 뺏기는 안습 처지였다. [11] 오히려 호남팜 덕을 본건 쌍방울 시절 김기태, 조규제, 김원형, 박경완으로 팀 주축을 삼고. 쌍방울 해체선수와 지명권(이진영 이승호)를 인수한 김성근이 덕을 보았다고 봐야한다.

또한 20년간의 장기집권은 계속되는 시기적절한 선수단 교체도 한몫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해태타이거즈의 3루수는 김종모->이순철->한대화->홍현우로 전환되는데 이 전환시기가 딱딱 맞아 떨어졌다는 것. 그리고 이런식으로 적절한 세대교체를 성공시켜 지속가능한 강팀을 유지하는 것도 엄연히 지도자의 능력이다.

본인이 재능을 알아보고 데려온 선수도 꽤 있는 편. 한대화의 경우 OB베어스에서 김성근 감독에게 버려지다시피 한 것을 김응용 감독이 거둬[12][13] 골든글러브 3루수로 만들어냈고, 이순철의 경우 김응용 감독이 직접 숙소에서 훈련장까지 차를 태워서 바래다줬을 정도로 애정을 쏟아 키웠고 1986년 한대화가 들어오자 이순철의 포지션을 외아수로 변경해 자연스럽게 김일권을 대체했다.[14] 또한 신고선수로 들어와 배팅볼 투수를 하고 있던 송유석을 미들맨으로 써서 대성했다. 또한 이호준을 타자로 전향시킨 바가 있는데, 일류 장타자로까지 성장시킨 건 강병철 감독의 공이지만 가능성을 보고 타자로 전향시킨 것은 김응용이었다. 해태 말년 덩치 좋은 좌완투수 강영식도 그 재능을 아껴 김응용 감독 본인 집으로 데려가 같이 살면서 김응용 감독이 직접 까지 구워주면서 밥먹이고 이후 2001년 삼성 감독으로 간 뒤 삼성의 주전 외야수였던 신동주를 내주면서까지 데려가서 애지중지 했다.

물론 한화 이글스 시절은 김응용 감독의 커리어에 있어서 부정할 수 없는 흑역사임도 사실이다.

다만, 김응룡 감독이 취임하고서 한화 이글스는 2군 구장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으며 모기업의 지원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었다. 김응룡 감독 취임 이후 구단 사장 경력을 통한 구단 프런트의 지원을 이끌어 내기 시작했고, 김인식, 한대화시절에 빛을 보지 못했던 선수들이 등용되기 시작했다.

2010년에 입단해 2012년까지 1군기록이라고는 1경기 방어율 13.50[15]인 이태양이 터질꺼라고 공언하고 2013년부터 지속적으로 기회를 부여했고, 2014년에는 처음부터 선발로 낙점하고 칼같이 관리해 아시안게임 대표로 만들었다. 제구력 문제가 두드러진 유창식송창현도 인내를 갖고 선발로 키우려 했다. 개막전 포수로 언급되었던 한승택은 결국 군입대 후 이용규의 보상선수로 KIA 타이거즈로 이적하게 되었으나 경찰청에서 3할대 고타율을 보여주어 가능성을 어필했다. 2차드래프트로 영입한 최윤석 역시 경찰청에서 3할대 타율을 기록했으며 역시 2차 드래프트로 2014시즌 영입된 이동걸은 시즌 후반기부터 추격조 역할로 그런데로 던지고있다.

한화 이글스 갤러리에서 2011년에 존재만으로 한화의 암흑기라 보았던 김회성을 2014시즌 주력선수로 꼽았을때 많은 한화팬들이 충격과 공포에 떨었으나 입대 전보다 나아진 실력으로 장타력있는 3루수의 잠재력을 보여줬다.

김응룡 재임 후 2014년 선수단을 보면 투수진이나 야수진이 2012년 한화에 비해 상당부분 교체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평균연령을 보아도 신생팀인 NC 다이노스와 비교해보아도 상당히 젊다. 투수진의 경우 노장이라곤 박정진하나에 불과하며 야수진의 경우 최선참이 30대 중반, 대부분 군필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한화 이글스의 리빌딩 여부는 임기 만료후 3년정도 뒤에 확실히 판단 할 수 있는 부분이라 현재 언급하기엔 시기상조인 부분이 있으나, 선수구성 부분에서 상당부분 달라졌다는 것을 부정하긴 힘들다. 또한 계속 강조되는 부분이지만, 8시즌을 현장 밖에서 보낸 감독이라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2.3 김성근은 아웃사이더고 김응용은 성골?

상당부분 김성근과 그 팬덤의 언플이 만들어낸 낭설

흔히 김성근재일동포란 이유로 갖은 모욕을 겪은 아웃사이더라고 묘사하지만, 김성근의 파란만장한 경력은 그냥 윗사람과 융화가 안되는 독선적인 성격 탓이다. 당시 야구계에 재일교포가 김성근 혼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김영덕, 송재박, 김일융, 장명부 모두가 재일교포 출신으로 한국야구 무대에서 뛰었지만 실력만 있으면 별다른 차별이 없었다. 오히려 실력이 떨어지는 재일교포들이 선진야구를 습득했다는 이유 하나로 국내선수들을 제치고 주전을 꿰차는 경우도 있었으니, 우대를 받았다고도 할 수 있다.

프로야구가 출범하게 될때도 재일교포이자 전설적인 3085안타의 장훈 선생과 그 외 일본 프로야구 관계자들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이루어 졌으며, 일본에서 기회를 받지 못하던 재일동포 선수들이 한국 프로야구에 진출했다. 그리고 야구단 구축 당시 프런트에 일본통도 많았기에 재일동포라 선수단 내에서 차별당했다는 것은 억측에 가깝다. 삼성 라이온즈의 경우 이건희사장이 일본통 이었으며, OB 베어스의 경우 박용곤 구단주가 일본통 이었다. 롯데 자이언츠는 아예 일본프로야구롯데 오리온즈라는 팀까지 있었다. 또한 기업인이자 한국야구계 행정에 있어서 큰 족적을 남긴 최인철은 일본에서 태어나서 코시엔을 밟아본 최초의 조선인이었다. 1956년부터 있었던 재일교포 야구단들과의 친선경기에선 재일교포 야구인들이 자신들의 장비를 낙후된 장비를 쓰던 한국선수들에게 주고 오던 실정이었다. 현장이나 윗선이나 다 이러니 야구계는 전반적으로 재일동포에 대해 무척 우호적이다. 까놓고 말해 안그랬으면 2군감독, 코치, 프런트 경험만 가졌던 사람30년 전통의 충청도수도권 구단 감독자리를 꿰찰 수 있었겠는가? 그 사람이 1년만 하고 잘린게 어디 국적 때문이었던가?

삼성의 간판투수였던 김일융은 일본에 돌아가서 '한국에서 타국인 취급을 받아 서운했다'는 이야기를 하긴 했으나, 이는 순전히 그가 한국어를 못했던 탓이 크다. 본인이 적응할 생각을 안해서 한국에서 선수생활을 마칠 때까지 한국어를 한 마디도 못했다. 오히려 팀의 많은 배려를 받아 시즌 중에도 일본을 오갈 수 있었다. 정작 김일융은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할 당시 5천 5백만엔(당시 한화 2억원 정도)를 받았으며 차량+숙소등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50평대의 강남 아파트가 오천만원(...) 하던 시절이다 지금으로 환산하면 10억원을 훨씬 넘는 대우를 받은 셈. 오히려 김일융은 일본을 뜨기 전보다 훨씬 더 큰 연봉을 받았다.

예로부터 인맥과 지연을 중시한 한국이지만 열악해서 이런저런거 가릴 사정이 아니었던 야구계는 비교적 실력 위주로 인물을 평가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지역색이나 학벌의 폐해가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았다. 팬들이야 연고를 따졌지만 어디 팬심따라 구단운영하던가? 김성근도 차별받았다고 볼 정황이 별로 없다. 실업야구 시절 김성근이 기업은행 실업팀 창단 멤버로 들어갔던 데 반해 김응용은 농협 입단이 좌절되고 한국운수에 연습생으로 들어가 겨우 야구를 시작했다. 또한 김성근은 실업야구선수 시절 국가대표로 발탁되었으며, 1970년대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에 국가대표 코치로 우승을 이뤄 체육훈장까지 받았다. 그러나 당시 김응용은 김영덕, 김성근 등에 밀려 1977년도까지 한 번도 국가대표 감독이나 코치를 해 본 적이 없었고, 1977년 나카라과 야구 월드컵 때 감독을 해본 게 처음이다.

1982년 한국프로야구가 처음 출범했을 때도 김영덕, 김성근OB 베어스의 감독과 투수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했지만, 당시 미국에서 연수중이었던 김응용은 언제든 불러만 주면 갈 생각으로 짐을 쌌으나 어떤 팀에서도 연락이 없어서 자존심이 매우 상했다고 한다. 프로야구 출범식을 할 당시 몰래 귀국해서 보고 갔을 정도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고 한다.[16]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후에도 83년 해태가 불미스런 일로 김동엽 감독을 해임하기 전까지는 불러주는 팀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김응용은 실향민이다. 출신지를 가지고 성골이네 진골이네 언급할 게 없다. 게다가 위에서 보이듯이 연습생 출신으로, 지도자로나 선수로서나 그렇게 차별 많이 받았다는 재일교포 출신들보다 경력이 뒤쳐졌었다.

김성근 감독과 언론의 관계를 들어서 김성근 쪽이 상대적으로 아웃사이더라는 의견도 있으나, SK 와이번스 나온 이후의 김성근 감독은 오히려 언론으로부터 야구계 원로 대우를 충분히 받고 있는 감독이며 섣부른 비판은 언론들도 자제하고 있다. 언론에게 피해봤다고 그의 팬덤에서 주장하는 사례의 대다수는 SK 감독시절 현역 감독으로서 받은 비판이었고 그 중 태반은 내로남불식 인터뷰로 본인이 자초한 바였다.[17] 일개 야구감독인 김성근을 정치인들도 주목하는 오피니언 리더로 만든건 분명히 언론과 그걸 제대로 이용한 김성근의 언론플레이 능력이었다. 노리타들은 언론을 가장 능수능란하게 활용한 감독을 데려다 놓고 언론 플레이 할 줄 모르고 묵묵히 정진하는 구도자로 포장하고 있다. 한화를 맡은 이후에는 비판 기사도 올라오고 있으나, 현역 감독으로서의 비판은 김응용 역시 한화 시절에 똑같이 받은 부분이다.

사실 이런 논란이 나오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한국 야구 초창기에 영구귀국을 선택한 재일교포 출신 야구인들의 미묘한 입지 때문이다. 당시 야구계가 워낙 열악해서 이것저것 따질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재일교포들을 적어도 실력적으로 차별하는 것은 불가능했던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구귀국을 선택한 재일교포 선수들에 대해서 정말로 아무런 차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적어도 실력 외적인 감정적인 면에서는 차별이 존재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이는 재일교포 출신 야구선수들의 일종의 원조격이라고 볼 수 있는 김영덕 감독의 경우를 보면 명확해지는데, 김영덕 감독이 한국에서 야구선수나 지도자로서 직접적인 차별을 받은 정황은 없고 실제로 본인 또한 "실력적인 면에서는 차별을 받은 적이 없었다"고 꾸준히 언급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야구가 좋아 한국으로 와보니 여기선 ‘반쪽바리’라고 외면을 당했죠. (김)성근이나 나나 ‘무조건 실력으로 이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모질게 야구만 했어요." 라고 언급하는 등, 실력 외적인 면에서의 차별이 존재했다는 발언 또한 한 적이 있다.

여하튼 정리하자면, 김성근이든 김응용이든 누가 아웃사이더고 성골이고 논할 건 없다는 것이다. 굳이 따지고 들자면 한쪽은 재일교포, 한쪽은 실향민 출신이므로 양쪽 모두 비주류 출신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2.4 둘은 라이벌인가?

국내 통산 승수 1위 감독 김응용과 통산 승수 2위의 김성근을 두고 언론에서는 둘에 대해 라이벌 기믹을 붙여 잘 이용했었다. 하지만 두 감독은 서로를 라이벌로 보는 것에 대해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라이벌은 무슨. 라이벌 뜻이 뭐야? 뭐냐구? 서로 이기고 지는 사이 아냐? 나는 김성근 감독한테 한 번도 지지 않았어. 내가 현역으로 있을 때 김성근 감독이 우승한 적 있어? 그런데 무슨 라이벌이야. 지난번 김승우의 '승승장구'에 나가서 그 얘기를 했더니 편집해서 내보내지 않지 뭐야.

실제 스포츠 한국에서 김응용이 직접 한 말이었다. 실제로 김성근은 포스트시즌에서 김응용을 만나 "단 1번도" 이겨본 적이 없다.

1987년 플레이오프에서 OB 베어스를 맡았던 김성근에게 3:2로 이겼고, 1989년 태평양 돌핀스를 맡은 김성근을 역시 플레이오프에서 3:0으로 잡았다. 그리고 대망의 2002 한국시리즈에서도 4:2로 승리했다.

김성근 역시 김응용의 라이벌이란 말을 탐탁찮게 여긴다. 오히려 해태 시절 김응용에게 열등감과 질투가 가득했으며, 라이벌 관계에 대한 질문에 '맨날 지기만 했는데 무슨 라이벌이냐'며 인하대 강연에서 밝힌 바 있다. 각각 원년과 이듬해에 프로야구판에 뛰어들어 통산 1위와 2위의 경력을 올린 명장들이지만 서로에 대한 관계에 대해 라이벌이니 뭐니 하는것은 당사자가 아닌 기자와 야구팬들만의 생각인 듯하다.

2000년대 중반 야구 열기가 뜨거워진 시기(올림픽 이후)와 맞물려 SK 왕조가 건설되었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야신의 이미지를 얻은 김성근 감독의 평가가 높긴 하나 경력상으로는 V10을 이룬 김응용 감독과 라이벌로 놓기에 조금 모자란 것이 사실이다. 제반 환경의 차이나 쌍방울의 기적 등을 고려하면 김성근 감독과 비견할 만한 감독은 김영덕 감독이지 우승횟수에서 세 배 이상 차이가 나는 김응용 감독이 아니다. 김영덕 감독은 김성근 감독보다 우승횟수가 하나 모자라지만 프리미엄으로 칠 만한 원년 우승을 이뤘으며 두 명밖에 없는 소속을 바꿔가며 팀을 우승시킨 감독중 하나, 팀승률 7할을 두 번 달성한 유일한 감독이다. 또한 쌍방울 못지 않게 최하위권에서 놀던 빙그레 이글스를 굴지의 강팀으로 환골탈태시킨 업적이 있다. 쌍방울이 2년간 반짝했다가 모기업 쌍방울의 부도 여파로 인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주축 선수들을 팔아치운 끝에 순식간에 하위권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해체를 하고 만 것과는 달리 김영덕 감독이 강팀으로 탈바꿈시킨 빙그레는 수 년간 최상위권의 전력을 유지하며 한국시리즈에 네 번 진출했고, 이러한 성과가 축적되어 1999년의 우승으로 이어졌다. 애초에 현역 시절만 봐도 김성근은 일본프로야구팀에 입단하지도 못하고 한국에 와서 실업야구에서만 활약하다가 혹사로 일찍 은퇴했지만 김영덕은 5~60년대 당시 퍼시픽리그를 씹어먹던 엄청난 강팀 난카이 호크스에서 데뷔해 활약하다가 한국에 와서 실업야구에서 더 대활약한 바 있다.

논란을 길게 끌 것 없이 위의 인터뷰에서 김응용 감독은 김성근 감독이 자신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고 있으며, 김성근 감독 또한 김응용에게 열등감을 항상 느껴왔다고 자인하고 있다. 기록에서 큰 차이가 있고 당사자들도 인정하는 바를 굳이 삼자가 해석이 다양하게 나올 수 있는 가치판단을 끼워넣어 우열을 가리려 할 필요는 없을 것.

사실 김응용 하면 대개 해태 V9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고, 김성근 하면 쌍방울의 기적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게 일반적이다. 애초에 대다수의 야구팬들이 이들에 대해 떠올리는 이미지 자체가 다른 장르의 것이다. 그러면 왕조 건설 VS 기적의 승부사 중에 뭐가 대단한가 우열을 가리자...는 것이 다시 논쟁의 떡밥이 되지만 김성근 감독은 그와는 또 다른 상황에서 성공을 거둔 적이 있었다. 바로 2007~2010 3회 우승과 1회 준우승에 빛나는 SK 왕조의 건설. 한편 널리 알려져 있는 '선수 17명 1/2군 코치 3명으로 우승시킨 1983해태의 기적'은 사실이 아니다. 박동희와 김응용 감독의 인터뷰에서 이 말이 나오고 와전되었나, 사실 1982년 해태는 창단 당시에는 매우 수가 적었으나 겨우 겨우 영입해서 시즌 기록을 남긴 선수는 총 20명이다. 김응용이 부임한 1983년 해태는 총 27명이었다. 그해 준우승팀 MBC는 31명, 그 다음 승률팀 삼미는 29명이 기록을 남겼다.

그래도 주요 커뮤니티에서도 김성근 감독을 현 시대에 가장 앞서나가는 명장 중 하나로 꼽는데는 주저함이 없었으나 김응용에 비한다면 손색이 있다는 것이 대다수의 평이었다. 역시나 우승 10회의 커리어에 범접하기는 힘들다는 것이 대세였다.

2.5 2010년대 이후의 평가

두 감독의 VS놀이는 2013년 4월부터 재점화된 감이 있다. 김응용이 지휘봉을 맡은 한화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투수 운용과 전년도에 비해 더 하락한 수비기량, 그리고 경기를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느낄 수 있는 조급증을 드러내 연패를 기록하자 김응용에 대한 평가는 곤두박질쳤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야구 팬덤에서는 그 전까지는 비교대상이 되지 않았던 김응용과 김성근의 비교가 시작되었고 주요한 논쟁으로 자리했었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체로 김응용 감독의 우위라고 결정나 있던 평가가 이토록 순식간에 진흙탕 싸움이 되어버린 것은 김응용 감독이 무능한 모습을 보여준 것도 있지만, 야구를 지켜보던 팬들이 전력이 약한 팀을 끌어모으고 추스려서 우승권에 올려 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실감해버린 것도 크다. 김성근 감독이 그동안 보여줬던 약체팀을 끌어올리는 기적은 감독의 엄청난 역량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김응용은 이 상황에서 실패하고 있다는 것. 'V10은 결코 실력 없이는 이룰 수 없다'는 말이 이제는 'V10은 결코 실력만으로 이룰 수 없다'로 변질되고 있다.전 세계에서 김응룡 감독보다 우승을 많이 한 감독은 뉴욕 양키즈의 조 토레 감독 뿐이다. 뉴욕 양키즈와 해태 타이거즈의 공통점은? 실력뿐만 아니라 운빨과 선수빨이 겸비돼야 가능한 기록...[18]

이에 양측은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설전을 벌이고 있는데, 김응용 감독측이 "우승 10회 무시마라"를 들고 나오면 김성근 감독측은 '그럼 우리나라 명장 넘버2는 우승 4회 김재박 ㅋ맞잖아', '백골퍼도 개막 13연패는 안했음 ㅋ'을 들고나와 우승 = 명장론을 부정하고, 김응용 감독측이 '2팀에서 모두 우승했음. 까불지마'를 들고 나오면 김성근 감독측은 '호남팜 해태[19]나 100억 지른 삼성이면 내가 가도 우승 ㅋ'하지만 김성근은 100억 지른 삼성가서 556을 만들었다, 200억 들인 한화 가선 6위.ㅋㅋㅋ을 들고 나오며 댓글양상을 격화시켰다.

김성근 감독이 한화 이글스 감독이 되고, 2015시즌 초중반까지는 5위에 자리하면서 김성근 감독의 우위가 굳혀지나 싶었지만, 후반이 되어 어마어마한 혹사의 여파가 드러나면서 하위권으로 추락하자 평가가 다시 뒤바뀌었다. 김응용은 최소한 한화 이글스 감독이 되어 자신의 과거까지 대차게 먹칠하지는 않았지만, 김성근 감독은 한화 이글스 감독 경력으로 인해 자신의 과거까지 상당부분 먹칠당했다. 여러 구설수 속에 과거에 했던 발언이 발굴되면서 내로남불의 대명사가 되었고, SK 왕조의 혹사는 물론 고양 원더스의 현실까지 팬들에게 인식 시켰다.

한편 진흙탕이 될 수 밖에 없는 까닭으로 일단 김응용에게 호의적인 대표적 팬덤이 KIA 타이거즈삼성 라이온즈[20], 김성근에게 호의적인 대표적 팬덤이 SK 와이번스LG 트윈스다.[21] 이 넷이 얽힌 것만 해도 이미 레알 헬게이트인데 여기에 더해 빙그레한화 이글스라든가 롯데 자이언츠의 팬들도 두 감독들과 이런저런 인연 내지 악연으로 얽혀있는 상황이다. 지금까지 언급된 구단의 팬들이 다들 한 가지 분야쯤에서는 시대를 풍미했던 전력이 있는 팬덤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꿈도 희망도 없다. 김응룡: 안되겠어 LG 감독으로도 한 번 가야지.

한화 이글스 감독 시점에서는 LG 팬들은 관심이 떨어졌거나 등을 돌렸고 SK 팬들도 이것보다는 낫지만 적극적이지 않으며 기존 한화의 팬들은 분열되어 김성근 지지세력이 약한 상황에서 소위 노리타로 불리는 김성근 감독의 강성팬덤이 여러 모로 김성근 감독과 원수가 된 롯데 자이언츠 팬덤, 김응룡을 강력히 지지하는 기아 타이거즈, 그리고 이 둘 다에 해당하는(...) 삼성 라이온즈 팬덤을 상대로 장판파를 시전하는 수준이다. 여기에 까를 위한 까를 시전하는 악성 어그로까지 끼어들었는데도 여전히 꿋꿋하게 1:4[22]무쌍을 펼치고 있다는 점에서 노리타의 위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2016년. 상향평준화되어 4월 말 기준 8개팀이 나름 대동소이한 경기력을 보여주고 하다못해 최하위 후보 기아도 나름 선전하는 가운데, 한화만이 홀로 꼴찌로 처지면서 김응룡에게 무게추가 확 기우는 모양새다. 김응용 감독이 그래도 '노장을 내주고 유망주를 받아오는 트레이드', '자기 사비를 털어 유망주들에게 식사 및 훈련장소 제공', '젋은 선수 위주의 라인업 구성', '안-정-진으로 이어지는 필승조구축' 등의 공이 언급되면서 무능했지만 그래도 없는 살림에 체질개선을 시도한 감독, 선수 보는 눈만은 살아있던 감독의 평가를 어렵지 않게 볼수 있는 반면[23], 김성근감독의 경우에는 속칭 '쉴드'의 화력이 확 줄었다.

탈꼴찌, 5강싸움 등으로 '어느정도의 혹사는 어쩔 수 없다'라고 평하던 한화팬들조차 돌아서는 모양새.
전반기가 마무리되고 극적으로 7위로 상승하면서 비난 여론은 많이 줄어드는 것으로 보였으나 정우람의 부진, 지친기색을 보이기 시작하는 베테랑, 결정적으로 8월 첫째 주중 기아와의 3연전에서 1, 3경기를 모두 역전패하면서 다시 비난 여론에 불이 붙고 있다.

유망주 김민우의 부상, 그리고 결정적으로 신나게 굴려댄 권혁송창식의 부상재활 중이던 전병두의 은퇴선언 소식이 전해지면서 언론과 팬 모두에게 십자포화를 맞고 있는 중. 언론에선 매일같이 강도높은 저격성 기사를 마구 뿌려대고 있으며 팬들의 반응은 험악 그 자체. 흔히 볼 수 있었던 '9개구단은 종신감독을 기원합니다' 같은 조롱조차 노리타와 정상인 야구팬들 사이에 껴서 분탕치는 자들이나 일부 극성 노리타를 빼고 찾아보기 힘들 정도.

2.6 야구 외적 차이

김응용 감독과 김성근 감독의 프런트 와의 관계를 비교한 샤브샤브뉴스 기사
2015년 10월 07일 샤브샤브뉴스 '김성근 감독, "원 없이 돈 써봤다"던 강만수의 데자뷰'

이후 LG 트윈스에서도 김응용 감독의 삼성 라이온즈에 맞서 6차전까지 가는 명승부를 연출한 2002년 한국시리즈를 뒤로 한 채 “이건 김성근 야구지, LG 야구가 아니다”라는 이유로 해고당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김 감독의 후임은 1980년대 후반 OB 베어스와 마찬가지로 이광환 감독이었다.

이렇듯 김 감독은 가는 팀마다 프런트와의 마찰이 있었다. 이것은 김 감독에게 독이었지만 한편으로 득이기도 했다. 야구팬들은 야구단 프런트를 기득권자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김 감독의 열성팬들은 이런 경향이 욱 강하다. 김 감독은 이런 일련의 사건들로 강자와의 타협을 거부하며 원칙을 지키는 소신파로 이미지화되었고, 열성팬들은 이를 추종하게 된 것이다.

프런트는 강자, 감독은 약자?

실제로 한국 프로야구에서는 프런트의 횡포로 인한 사건이 빈번하다. 바로 지난해에는 롯데 자이언츠 프런트에서 호텔 CCTV 자료를 입수해 선수 사생활을 사찰한 것이 발각됐다. 어떤 구단에서는 고관절 수술을 한 프랜차이즈 선수에게 각서를 요구하다가 그 선수가 다른 팀으로 이적함으로써, 팬들의 분노를 유발한 일도 있었다. 야구팬들 사이에서 프런트란 감독과 정치 게임을 하며 선수단을 방해하는 존재라는 인식이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프런트의 현실도 돌아봐야 할 필요도 있다. 야구단은 재벌그룹 내 대표적인 적자 발생 집단이며, 애초부터 수익 발생을 기대할 수 없는 집단이다. 야구단 운영비용은 광고나 홍보 등을 매개로 그룹 내 계열사들의 수익 배분을 토대로 만들어진다. 따라서 야구단의 사장과 단장은 그룹의 명을 거역할 수 없다는 딜레마가 있다. 야구단의 운영비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사장이 그룹 사장단 회의에서 아쉬운 소리도 하고 하소연도 해야 만들어진다.

김 감독은 일본인 코치를 대거 영입하기로 유명하다. 올해 한화 이글스에서도 1군과 2군을 통틀어 총 5명의 일본인 코치를 두고 있다. 일본인 코치 영입비용도 돈이다. 전원을 대동하고 훈련을 했으니 더 많은 훈련비용이 발생한다. 태평양 돌핀스에서 프런트와의 갈등 원인은 비시즌 훈련수당이었다.

그래서 “FA 한 명도 잡지 않았다”는 그의 항변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이진영은 FA로 LG 트윈스로 이적했지만, 조웅천·이호준·박경완·김재현·박재홍 등 김 감독이 재임했던 2007년부터 2011년까지의 내부 FA 선수는 비교적 잘 붙잡아뒀다. 특히 이호준에게는 4년 동안 34억 원을 보장하는 큰손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김 감독이 말하는 FA는 외부 FA를 말한다. 실제로 SK 와이번스는 김 감독 재임 당시 외부 FA를 영입하지 않았다.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FA 선수를 영입하기 위해서는 준척급은 대략 4년간 20억 원 내외, 특급은 30억 원에서 40억 원 사이의 비용이 발생했다. 선수 1명 영입에만 발생하는 비용이다. 여기에 영입 선수의 원소속 구단에 지급해야 하는 보상금과 보상 선수까지 출혈이 생기는 상황이었다.

그 돈은 어디서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구단 경영진이 그룹 상층부나 사장단 회의에서 아쉬운 소리를 해야 만들어진다. 그래서 대개 프로야구팀 감독들은 구단에 내부 FA 단속은 공개적으로 요구하지만, 외부 FA를 영입해달라는 말은 쉽게 꺼내기 힘들어한다.

기업이 구단에 제공하는 그 돈은 기업의 뼈대를 이루는 직원들이 곳곳에서 힘들게 생산하고 영업해서 만들어진 수익을 기반으로 한다.

그런데 김 감독은 자신의 성과를 설명하면서 “구단이 (외부) FA를 잡아주지 않았다”는 불만을 표출한 것이다. 김 감독의 해임 과정에서 오갔던 이런저런 논란은 일단 차치하더라도, 이런 불만 자체가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김 감독의 시즌 운용에는 필연적으로 다른 팀보다 더 큰 비용이 들어간다. 김 감독이 이런 부분은 고려한 것인지 의문이 간다.

어느 ‘짠돌이 구단’의 프런트와 감독

김응용 감독이 왕조를 구축했던 해태 타이거즈는 당시에도 대표적인 ‘짠돌이 구단’이었다. 김응용 감독의 회고에 따르면, 연봉은 짜기 이를 데 없어 매년 봄이면 선수들이 불만을 품었으며 명절 보너스는 종합과자 선물세트였다.

프런트가 하는 일은 혹시 선수들에게 인센티브를 지급하는 구단이 있으면 “왜 그런 걸 지급해서 우리를 곤란하게 하느냐”는 항의전화를 거는 일이었다고 한다. 김 감독 본인부터도 연봉이 적어서 “계약금은 주지 않아도 좋으니 연봉을 더 달라”고 요구하는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응용 감독은 해태 타이거즈가 선동열·이종범을 일본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시켰을 때와 본인 자신도 삼성 라이온즈 이적이 확정된 1990년대 후반 외에는 구단과 마찰을 빚은 바 없었다. 삼성 라이온즈 이적 자체도 삼성과 해태의 사전 협의가 있었다. 그렇다고 김응용 감독이 구단의 허수아비에 머무른 것도 아니다. 금전적으로 극도로 열악한 상황에서도 김응용 감독은 프런트와 비교적 이상적인 관계를 구축한 것이다. 어떤 차이일까?

이런 스타일 때문일지는 몰라도, 김응용 감독은 2005년부터 2010년까지 삼성 라이온즈의 사장으로 활약했다. 야구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당시 감독이던 선동열에게 아쉬운 소리를 한 적도 없다고 한다. 김응용 감독 스스로는 사장 역할을 “단장과 감독의 방패막이”라고 규정했다고 한다.

2.7 한화 감독으로서

2.7.1 김응용 우위론

두 사람 모두 말년에 명장 슬레이어 한화 이글스의 감독이 되었고 둘 다 총체적 난국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래봐야 옛날 야구하는 감독들이라는 평가가 나오게 되었다.

우선 김응용 감독은 기본적으로 선수층 자체가 부족한 상태에서 시작했다 했지만 신생팀인 NC 다이노스보다 2년 연속 순위가 더 낮았다.

심지어 일부는 2014년 이른바 삼미 슈퍼스타즈의 평균자책점 기록을 깼다는 점에서 누구도 부정하기 힘든 최악의 성적을 기록한 감독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발언은 타고투저라는 개념을 무시한 것이다. 조정 평균자책점과 같은 기록이 왜 생겨났는지 생각해보자.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의 리그 평균 자책점은 3.89점이었고, 2014년의 리그 평균자책점은 5.22점으로 유일한 5점대 리그 평균자책점이며 독보적인 역대 1위이다. 팀 평균 자책점 1위였던 NC 다이노스가 4.30점으로 1982년의 평균에도 못 미친다. 이런 방식으로 따진다면 2014년 시즌의 어느 팀도 6668587667, 그중에서도 8위를 찍었던 2006년도의 LG 트윈스보다 강한 팀은 없다(...)[24] 2006년 8위를 찍었던 LG 트윈스의 팀 평균 자책점은 4.22로 2014년 1위였던 NC 다이노스 보다 0.08점 가량이 낮다. 순위만 놓고보면 2014년에도 2015년에도 한화의 팀 평균 자책점은 9위이다.누가 국내최고 투수조련사라고?

거기다 2년차에 보여준 이용규 당겨쓰기는 비판의 여지가 있지만 무리한 이태양 운용이라는 것도 재고되어야 한다. 이태양이 버두치 리스트를 넘긴 것은 사실이나 김응용 감독은 이태양의 등판 간격은 확실히 지켜줬다. 이를 혹사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조금 무리하게 운용했다 정도가 맞다고 해야한다. 이 정도 무리한 운용은 혹사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한국 야구계에서는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오히려 김성근 감독 하에서 투구폼을 개조하기 위해 무리한 연습투구를 한 것이 비극을 키웠다. 2월부터 폼개조한다고 1000구씩 던지게 했다.기사 또한 김성근 감독의 극성팬들의 주장대로 김응용 감독의 운용이 이태양의 부상을 태동시켰다 하더라도 김성근 감독은 부상위험이 있는 선수를 무리하게 훈련시킨 감독이 되는 것이다.이태양의 등판 일지가 정리된 이후 김응용의 이태양 혹사설이 거의 일축된 것은 차치하더라도 김성근 감독은 어떠한 경우에도 이태양의 부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외 김응용 감독이 투수를 지나치게 혹사하여 최악의 감독[25]으로 평가하기에 충분했다고 본다라고 여겨졌던 때가 있었다.

게다가 김응용은 선수 지원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한화 선수단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던 류현진이 떠난 뒤[26] 투수진은 사실상 붕괴 상태였는데 이 상황에서 2014시즌에 구단이 잡아준 FA는 이용규정근우. 물론 둘 다 특급으로써 제몫을 다했지만 한화 타선의 위력을 좀 더 강화시켜주는 수준에 그쳤고 정작 필요한 투수는 사 주지 않았다. 그 결과가 사상 최악의 방어율에도 불구하고 42승을 49승으로 올리고 KIA와 막판까지 9위 다툼을 한 정도.

게다가 김성근 감독은 SK에서도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실제로는 상당한 내상을 남기고 떠났다. 다른 팀에 비해서 선수층이 깊다 보니 그 피해가 덜했을 뿐이다. 물론 그게 바로 터진 것은 아니라 2012시즌까지는 한국시리즈도 연속으로 진출하는 등 강팀이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2013시즌 6위로 추락함으로써 결국 한계가 드러났고 2014~2015시즌 연속으로 5위 다툼을 하면서(2014시즌에는 성공) 김성근 이전으로 돌아갔다. 게다가 김성근이 굴린 선수들 가운데 선발투수인 김광현, 역대급 내구성과 유연함의 소유자인 정우람과 어지간히 굴려도 그렇게 심한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 야수들 정도를 제외하면 투수진은 큰 타격을 입은 상황이다. 비슷하지만 혹사가 약간은 덜한 감독으로 꼽히는 김경문 감독의 두산시절에 대해서도 김진욱 재평가론 때문에 과도할 정도의 비난이 한때 가해졌던 것에 비하면 2015년 이전까지 김성근 감독이 얼마나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는 스탯티즈에서 sk의 연도별 투수진 스탯을 살펴보면 명백하게 드러난다. 11시즌부터 이미 sk의 투수력은 평범해졌다.

2015년 9월 이후 이 논쟁은 사실상 끝난 거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다.

2.7.2 김성근 우위론

꼴찌에서 허덕일때도 응원하던 골수팬들과 충청 대전지역의 라이트팬들의 반응은 인터넷보다 확실히 김성근에 호의적이다. 한화는 올해 홈경기 매진을 이끌면서 김성근을 비판하는 기자들까지 KBO 흥행에 기여한 점은 인정하고 있다. 디시인사이드 한화 갤러리만 바도 김성근을 김응용과 같은 급이라 하는 글들은 베스트에 오른 글들 중에 찾아보기 힘들다. 한 마디로 한화팬의 여론에 대해 아무런 통계적 근거가 없는 주장을 사실처럼 서술하고 있다. 시즌이 끝난 이후 김성근 해임설이나 한화팬들에 이에 대한 요구조차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 김성근에 대한 비판이 거세진건 사실이지만 한화팬들이 등을 돌렸다는 사실은 가치판단 문제가 아니라 사실 왜곡이다.

먼저 김응용이 구단 지원을 못 받았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이용규, 정근우라는 FA 거물들을 데려와놓고 구단 지원이 없다면 도대체 뭐가 구단 지원일까? 투수를 사주지 않았다 그러는데 이건 당시 한화 구단이 지원을 안해서라기 보다는 마땅한 거물급 투수 매물이 2014 스토브 리그때 존재하지 않았다. 당장 영입때 김응용의 의사가 단 하나도 반영 안됐을거라는 부터가 편향적 서술. 한화는 비로소 김성근때 투수를 보강했는데 이 셋은 액수로만 봐도 거물급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한물 간 투수들에 가까웠으며 실제로 권혁 정도를 제외하면 기대에 못 미쳤고 이들의 FA 총액은 윤석민 한 명의 총액, 장원준 한 명의 총액에도 미치지 못한다. 다시 말해 김응용이 구단 지원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 왜곡. 물론 김성근이 더 많이 받았고 후반기 마운드가 붕괴 될때쯤 로저스라는 KBO 사상 가장 비싸고 강력한 외국인 선수를 지원받은건 사실이지만 김응용 시절에도 류현진의 이탈은 뼈아프지만 여론이나 선수 개인의 의사를 존중해서 구단에서 막을수 없는 상황이었고, 이용규 정근우 두 특급 FA를 지원받았기 때문에 지원이 없었다는건 어불성설이다.

더군다나 김응용이 그렇다고 리빌딩을 제대로 한 것도 아니다. 한화는 2015년에야 나온 김민우 정도를 제외하면 김응용 재임기간동안 별다른 뉴페이스가 발굴된 적은 없다. 이태양이 있긴했지만 다들 아는대로. 승률에 있어서는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첫 해야 류현진과 박찬호가 떠난 상태라 그렇다 쳐도 두번째 부임해까지 3할대 승률을 찍은건 별다른 변명의 여지가 없다. 물론 혹사에 있어서 김성근이 넘사벽이었던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김응용이 선수 관리를 잘했냐 하면 그것도 절대 아니다. 이 시기 부상선수 당겨쓰기에 투수 혹사가 합쳐진 결과 2014년 시즌이 끝났을 무렵 부상자들이 수두룩하게 나오고 말았다.

성적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물론 김성근은 아직 재임 1년 차이고 말 그래도 혹사 논란 때문에 내년을 지켜봐야 겠지만 4할 7푼의 승률을 찍었다. 전년도 대비 거의 1할에 가까운 성적 향상이 있었다. 2014 후반기 기아와 8위 경쟁을 했다는건 잠깐 이었고 4게임차 꼴찌라는 최종 결과를 보면 경쟁이라 하기도 민망한 압도적 꼴찌였다. 두 시즌 연속 50승도 못한 마당에 후반기 전련을 일궈놨다고 하는 것은 더욱 자의적 서술. 팀의 전후반기 성적은 여러가지 요소가 있으며 후반기에 잘했으니 무려 다음 시즌 전반기에 그 흐름을 탈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KT 때문에 그렇지 않냐고 하는데 6위라는 성적이 말해주듯 전년도 8위와 4게임 차 꼴찌였던 것에 비하면 김성근이 가을야구를 노릴 정도로 팀을 선전시킨 것은 맞다. 더군다나 KT의 승률은 전년도 한화보다 약간 떨어지는 수준이다. 2013년은 KT 보다도 훨씬 성적이 떨어져서 3할 초반이었다. 그 자신이 KT의 성적을 찍은 감독과 3년 연속 꼴찌한 팀을 나름 가을 야구 경쟁을 했던 감독을 성적을 가지고 비교하는건 어불성설이다.

일각에서는 피타고리안 승률을 이야기하며 김성근이운영을 잘해서 라곤 하는데 피타고리안 승률은 총득실차이를 단순하게 승률로 계산한것이라 경기 운영이랑 별 상관이 없다. 그건 김성근, 김응용, 아니 모든 감독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다. 한 마디로 논점일탈. 연봉 순위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2014 김응용의 한화는 연봉 총액이 하위권이 아니었다. 타자진은 2위였고 전체 연봉을 합해도 상위권이었다. 김성근의 피타고리안 승률은 언제나 실제 승률보다 낮은 경향을 띄는데, 이걸 가지고 감독 WAR이니 뭐니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정도를 벗어난 불펜 혹사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일 뿐이다. 김성근의 비인간적인 혹사 때문에 김성근이 머무른 팀의 불펜은 후반기에 되면 모든 불펜의 성적이 다 함께 쳐지는 경향이 있는데, 피타고리안 승률의 불일치가 일어나는 가장 큰 이유중 하나가 투타 엇박자다. 정도를 벗어난 혹사로 막바지에 투수진이 단체로 하향곡선을 그리게 되면서 투타간의 엇박자가 일어나서 그렇게 보이는 것 뿐이다. 대부분의 경우 투타 엇박자는 그냥 운으로 보지만 이 인간의 경우에는 그걸 운으로 치부할 수가 없다. 또, 승리에 크게 기여한 불펜도 이러한 후반기에 집중타를 맞고 가비지 이닝을 소화하면서 WAR이 깎여 나가 피타고리안 승률이 떨어지는 것도 원인으로 들 수 있다. 2015년 그렇게 개처럼 구른 권혁의 WAR은 0.08이다. 완전히 혹사당하고 가비지 이닝을 처리하러 올라와 7실점 하는 등, 혹사 당한 후에 WAR이 엄청나게 깎여 나가서 1득점=1실점이라는 피타고리안 스케일이 잘 맞지 않게 된다.

또한 김성근은 한화팬들이 김응용시절 치를 떨어했던 팀에대한 무관심을 적극적인 훈련으로 위로해줬다. 2군 훈련장에 코빼기도 보이지않고 드라마 드립이나 쳐대다가 은퇴하고선 타이거즈 먹칠드립을 치는데 그어떤 한화팬이 김응용에게 애정을 보이겠는가. 완벽한 김응용 옹호자의 헛소리.

요악하자면 적어도 2015 시즌만 놓고보면 김성근의 한화는 김응용의 한화보다는 성적면에서 분명 향상되었다. 물론 혹사 문제가 있기에 과연 투수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내년을 봐야겠지만 그건 김성근이 김응용 처럼 2년을 채운 이후에 평가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2016년을 보면? 바로 본문에 2015년 나왔다고 서술되어있는 김민우 팔이 2016년에 갈려나감 ㅜㅜ

※ 2016 시즌 종료가 막바지에 다다른 현재. 송창식 권혁은 결국 부상으로 시즌 중 이탈했다. 5위 기아의 남은경기 전패라는 전제하에 트래직 넘버는'-2'. 이 싵낱같은 가능성 때문에 장민재는 3일휴식 후 선발등판했으며 심수창은 시도때도 없이 올라오고 있다. 이제 충분히 평가할 수 있는 시기가 되었다. 김성근 야구는 틀린야구 이며 김성근의 우위란건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김성근 우위론 작성자 이불킥행

2.7.2.1 김성근 우위론에 대한 반론

우선 해당 서술에서 한화팬의 여론과 위키 서술이 거리가 멀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다면 살려조를 비롯해 김성근 감독을 비판하는 서술들은 삭제되거나 그 표현이 엄청나게 온건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표현은 오히려 과격해지는 추세고 여기에 심지어 종신감독 드립까지 나오고 있는데 이건 김성근이 김응용에 비해 우위에 있다고는 볼 수 없다는 방증이다. 물론 김성근 해임설까지 나올 정도는 아니지만 이건 김응용도 마찬가지였다. 2년 임기는 지켜주자는 게 대세였다. 2016년에 들어서는 관중석에 감독나가라는 플래카드도 걸리기 시작했다.

김응용이 구단 지원을 받은 것은 사실이고 이용규정근우가 탑클래스급 FA인 것도 사실이다. 일부 김응용 옹호자들은 투수가 필요했다고 하지만 당시엔 괜찮은 투수매물이 없었고 가뜩이나 FA영입을 안하기로 소문난 한화입장에서 정근우 이용규영입은 구단 역사상 전례가없는 지원인것. 하지만 코치진과 프런트까지 자기사람으로 쓰고 600억을 들여 모든 구단중에 페이1위를 자랑하는 김성근의 2016년만 할까?

김응용은 살려조 등의 극심한 혹사를 하지 않았다. 물론 송창식 70이닝[27][28] 등 혹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김성근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적어도 김응용은 퍼지면 쉬게 했고, 김성근은 누가 봐도 확연히 퍼진 선수를 마른 수건 쥐어짜듯 더 갈아댔다. 김성근 체제 하에서 살려조 5인방 중에 윤규진은 수술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았고윤규진의 수술은 웃자란 어깨뼈를 깎는수술이므로 인대나 근육에 칼을대는 수술과는 거리가 멀다. 나머지 4인방도 이전의 선례를 보면 2016시즌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29] 김응용이 이렇게 많은 투수를 한꺼번에 소진시켰던가? 물론 그렇기에 김응용이 9위를 기록했다면 할말은 없지만 미래와 맞바꾼 6위가 서정환 감독 시절 KIA 타이거즈와 얼마나 다른가? 그나마 서정환 시절의 KIA는 4위 찍고 준플레이오프는 나갔지. .

또한 타자 연봉 2위라는 것도 허울만 좋은 것이 이용규, 정근우, 김태균 등 몇몇 특급 선수와 나머지 간의 격차가 엄청나게 크기 때문이다. 물론 이 세 명은 모두 제몫을 해줬지만 나머지가 못한다면 큰 의미가 없을 수밖에 없다. 일단 김성근 옹호론자들이 주장하는 타자 2위라는게 악의적인 왜곡인데 실제 총연봉액수를 비교하면 2014년 김응용에 비해 2015년 김성근은 무려 팀연봉 20억원이 올랐다(용병 제외). 전체 연봉을 비교하지 않고 계약금이 연봉에 포함된 국내최고연봉 김태균이 있는 타자 연봉만 딱 떼서 2위였다고 우기는건 누가봐도 시합당 1억 단기알바 로저스 등 초고액 용병진을 빼고도 전년도 비해 총액 20억이나 상승한 선수단을 가지고 가을야구조차 가지 못한 김성근을 실드치기 위한 물타기이다.

작년 한화 타선은 KIA 타이거즈 타선 같이 아예 타선이 팀을 끌어내리는[30] 상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팀을 끌어가는 수준도 아니었다. 그저 중위권 수준이다. 투수진이 바닥인 상황에서 타선이 중위권이라면 점수는 내도 결국 패하게 된다. 단, 중위권인 이유는 결국 용병타자와의 불화에 있는데, 불화의 중심에 또 그분이 계신다.

또한 김응용이 받은 2013 한화는 전년도 꼴지팀에 류현진 박찬호 양훈이라는 토종선발 3명이 빠져나간 팀이었다. 당해는 아무 지원도 받지 못했고 2014년도에 정근우와 반쪽짜리 이용규를 받았는데 저 두명 합쳐도 선발 3명은 고사하고 류현진 한명 구멍 메꾸는데도 부족한 지원이다.

2014년도 한화와 포스트시즌 커트라인인 4위와의 최종 승차는 13경기였다. 2015년은 10.5경기차이다. 이중 단기알바 로저스가 올려준 6승을 제외하면 실제 작년보다 나아진게 하나도 없다. 올해 9위 LG가 4위와 14경기 차이이다. kt가 들어오고 총시합수가 늘어나 각팀별로 승률과 승수가 늘었을뿐이지 4위와 9위의 차이는 작년과 대동소이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심지어 9위인 LG마저도 이런 요인으로 인해 60승을 돌파했다. 김성근이 잘나서가 아니라 9위도 60승을 돌파하는 시즌이었다는 얘기다. 로저스가 없었으면 전년도에 비해 코치진 전면교체, 원하는 선수수급, 단장 및 사장 교체 등등 프런트가 해줄수 있는 모든 지원을 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4위와의 승차를 줄이기는 커녕 LG보다도 순위가 밑이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물론 로저스가 없었더라도 그가 거둔 6승을 전패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로저스가 등판했던 경기들은 대부분 완투경기여서 불펜을 아낄수 있었기에 실제 그런 요소까지 따져보면 6승만 잡아주는건 오히려 낮게 쳐주는 꼴이다. 그가 없었더라면 더 일찍 불펜들이 퍼져서 더욱 처참할 성적을 거뒀을 가능성이 높다.

3 종합

한줄 요약: 김응룡 승리

  • 김응용 감독 우위론
    • 압도적인 커리어가 말해주듯 1990년대에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단기전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김성근과의 맞대결에서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다.
    • 같은 팀을 맡았을 때의 성과도 김응용이 훨씬 낫다. 똑같이 당대 최강 전력이었던 삼성 라이온즈를 맡았을 때는 대망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김응용) / 포스트시즌 광탈(김성근) 이라는 상반된 성과를 보였으며, 한화 이글스에서는 성적은 대차게 망했지만 유망주들을 사비를 들여가면서까지 어떻게든 챙기면서 키워냈던 모습(김응용) / 그나마 있던 유망주를 노망주로 바꿔오는 것도 모자라 남아있는 자원들까지 다 갈아버리는데도 성적을 밑바닥으로 처박는 모습(김성근) 을 각각 보여주었다.
    • 선수 발굴을 통해 팀 전력을 상승시키는 능력뿐만이 아니라 적절한 세대교체를 통해 유지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김응용은 감이 떨어진 한화 시절에도 성적과는 별개로 젊은 선수들을 발굴하고 기용하려 했다.[31]
    • 김성근이 강팀을 받았다면 잘 했을거라는 의견에 대한 반론으로 김성근도 삼성 시절에 전년도 준우승팀이라는 강팀을 기본으로 원하는 선수와 코치들을 죄다 싹쓸이해서 시즌 전 언론들로부터 삼성 역사상 최강 전력이라는 칭호까지 받게 되는 등 엄청난 전력을 받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한 가을 진출 후 빠른 가을 광탈이라는 흑역사를 연출한 바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32]
  • 김성근 감독 우위론지금은 그저 허상. SK 감독 취임기 때까지만의 이미지로, 한화 부임한 뒤 전부 다 뻥인 게 밝혀졌다.
    • 삼성 시절 흑역사를 연출하였다고는 하지만, 치바 롯데 마린즈에서의 연수 이후 김성근은 한 단계 더 발전하였음... 인줄 알았으나 sk시절은 전임감독들이 꾸려놓은 젊은 선수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플루크였음이 밝혀짐. 똑같은 방식으로 한화에 적용하자 그 결과는.....
    • 1980~90년대를 제외하고 2000년대 이후로만 제한해서 본다면 단기 작전 수행에 있어 상당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33][34]
    • 무너진 선수단을 결집시키고 더 중요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도록 조직하는 능력은 국내에서 우수한 편이라는 평을 들음... 이었지만이 역시 2016년 한화의 밑바닥으로 주저앉은 상황을 통해 허상으로 드러났다.
  • 말년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서
    • 김응용이 한화에서는 실패한 감독일 뿐이지만 김성근은 종신감독 소리조차 못 듣는다.[35]
    • 송창식 71이닝의 김응용[36][37]살려조를 굴려대며 100이닝 불펜투수를 3명 만든 김성근.
    • 성적만큼은 정말 처참했던 김응용과 혹사만큼은 정말 레전설이란 말로도 모자를 김성근. 2016시즌은 그 처참하다는 2013을 넘어섰다.
    • 유망주 키우는데 자기 사비도 들인 김응용과 그나마 있는 유망주를 노망주로 바꿔오는 김성근.
    • 프런트 입장을 존중하며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 김응용과 구단 단장과 사장까지 경질하며 무소불위 독재자 야구를 하고 있는 김성근. 김성근은 구단주의 전적인 맹신에 가까운 신뢰를 바탕으로 아예 사장-단장역을 하면서 프런트까지 장악, 프런트가 영입을 반대하던 여러 고액연봉의 노장선수를 영입하였으나, 전력 향상에는 별쓸모는 없었고, 오히려 유망주의 성장만 막는 악영향을 끼쳤다. 이는 재임시 거의 지원을 받지 못한 김응룡과는 대조적.
    • 김성근의 한화 이글스에서의 행보는 자신의 장점이라고 알려져 있던 것과는 정반대이다. 치바 롯데 마린즈 연수 후 좋아졌다던 운영은 퇴보하였으며, 단기 작전 수행 능력 또한 주자 나가면 번트대타 식으로 간파당했고, 한화 선수들의 장악에도 실패하였다.[38] 물론 프로야구 감독을 그만두고 4년이 지났다는 점을 참작해야 겠지만 그런 식이면 김응용도 한화에서의 운용에 대해 실드를 받아야 한다. (2013~14시즌 기아,삼성팬들이 신나게 실드쳤던 적도 있었다. 물론 지금 특정 팬덤들의 실드질에 비하면 새발의 피도 안되지만) [39]
김응룡 감독이 비록 한화에서의 2년은 무능하단 소리를 들었으나 여전히 야구계의 큰 어르신이시며 통산 커리어 1위에 빛나는 명감독임을 부정하는 이는 거의 없다. 해태시절 강영식, 한화시절 이태양 등 선수들을 자기 사비로 먹이고 재우며 훈련까지 시켜 준 이야기는 이미 유명하고, 강연 요청이 들어올 때 거절하고 대신 자신의 제자를 보냈다거나[40] 한화감독을 그만 둔 이후에는 사비를 탈탈 털어 유소년야구를 후원하는 등.... 파면 팔 수록 감춰져 있던 미담들이 계속 나오며 통산 커리어에 걸맞는 야구계 큰 어른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반면[41]김성근 감독의 경우 한화에서의 폭망과 함께 온갖 구설수가 쏟아지고 기존의 포장된 이미지가 허상이었음이 밝혀지면서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야구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vs 놀이 자체가 김응용 감독에게 모욕과도 같은 상황. 사비를 털어 유망주를 키우려 노력하고, 유소년과 사회인 선수들을 위해 아낌없이 사비를 쏟아 야구장을 짓는 코끼리 김응룡과 독재자처럼 군림하며 자서전이나 강연등에서 내 뱉었던 말을 몸소 부정하는 일구이언 김성근으로 요약할 수 있다. 즉 성적이야 이래저래 경합시킬 내용이 있다고 하더라도 총체적인 야구인, 인간으로서의 깊이는 김성근과 비교하는 것이 모욕인 수준이다. 2016 KBO 리그 페넌트레이스가 종료되고 한화가 연 102억을 받고도 7위를 찍으며 이 VS놀이는 사실상 무의미하다는 평이 많다.
  1. 공교롭게도 김경문 감독도 김성근 감독과 포스트시즌 에서 3번 붙어서 3번 모두 졌다.
  2. 해태 시절이 30년전 과거이므로 이 사실을 무시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글은 김응용vs김성근이지 13김응용vs김성근이 아니다.
  3. 사실 선동열의 마무리기용은 선동열의 건초염 때문에 어쩔수 없었던 측면이 있다. 원래 선발로 뛰던 선동열은 건초염 발병 이후 짧은 이닝만 소화할 수 있었고 1994년에는 다시 선발로 전향시키려 했으나 실패, 다시 마무리로 돌렸다.
  4. 그 해 불펜으로 무려 138이닝을 던지며 정규 이닝도 채우고 평균자책점 1위까지 먹었다.
  5. 여기에 폭력이라고 해서 실제로 선수들을 구타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기물 파손등으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해서 위압하는 경우도 많았다. 김응용 감독이 덕아웃에서 의자를 때려 부쉈다는 이야기등은 이미 유명하고, 1990년대 초반에는 라디오 중계중에 김감독의 욕설이 전파를 탄 적도 있다. 중계중에 갑자기 터져나온 욕설에 캐스터와 해설자가 잠시 침묵하다 "에.. 해태 김응룡 감독이었습니다"라며 난감함이 담긴 웃음으로 얼버무린 적이 있는데, 덕아웃과는 어느정도 거리가 있는 중계석에서도 정확하게 들릴게다가 그게 또 제대로 마이크에 잡힐만큼정도로 큰소리로 욕설을 날리는게 일상적이었다는 점도 폭력 이미지에 일조했다고 할 수 있겠다
  6. 물론 삼성시절이나 한화시절 어이없는 에러를 범한 선수들을 불러 개인적으로 얼차려를 시키긴 했지만 해태 시절처럼 직접 구타한 경우는 (알려진바로는) 없다.
  7. 이건 당시 OB에서 삼성으로 매끄럽지 않은 이적을 한 김영덕 감독을 비하하려고 김성근이 선수들에게 일부러 시킨 거였지만.
  8. 프로야구 출범 당시만 해도 인지도가 있던 전라도 고등학교는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뿐이었을 정도. 호남 야구가 꽃피기 시작된 것은 1970년대이후다. 경북 쪽의 야구 명문고들이 1950년대부터 나온 것을 보면 한참 늦었던 셈.
  9. 당장 호남팜 출신으로 이종범보다 먼저 프로에 데뷔한 광주일고 출신 감독인 염경엽 감독과 김기태 감독 이 두 사람의 선수시절을 보면 약간 답이 나오는데 둘 다 해태에서 뛴 경험이 없음에도 한 명은 수비 실력은 좋지만 타격 능력이 안 좋았고 한 명은 반대로 타격 능력이 좋았지만 그냥 돌글러브였다.
  10. 훗날 현대 유니콘스 투수 최상덕과 박재홍 1차 지명권과 트레이드. 훗날 이런 약탈적인 선수영입 방지룰로 신인지명권은 트레이드 금지됨.
  11. 임창용도 2년 써먹고 삼성에 현금 트레이드로 팔렸다. 그나마 써먹었으니 다른선수보단 낫다. 참고로 임창용은 고졸 신인부터 1군이라 알려진것과 달리 김성근이 붙잡고 오래키운것도 아니다. 해태 1군 수코-투코였던 유남호의 공이 크다.
  12.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김응용 감독이 한대화의 아버지와 동향 출신이라서 한대화 영입을 요청했다고 한다.
  13. 한대화는 처음에 구타에 질려 임의탈퇴까지 가려고 했다.
  14. 이순철은 이후 자신과 유사한 수비의 달인 김창희의 등장으로 자리를 잃게 된다.
  15. 12년 2군 성적은 방어율 5점대
  16. 당시 비행편이 좋지 않아 미국에서 비행기를 3번 갈아타고 프로야구 출범식을 보고 갔다고 한다.
  17. SK 감독시절 정말 공연히 비난받은 부분도 없진 않겠지만 그건 기자들 전문성부재나 보도윤리 문제다. 헌데 노리타들 머리속에선 언론이 조용히 외길을 걷는 구도자를 반쪽바리, 인맥없어서 매장한다는 기적의 논리가 나온다.
  18. 하나 더 있다. 프런트와의 관계. 김응용 이전 감독인 김동엽해태 타이거즈의 창단조건이었을 정도로 공들인 인물이지만 1시즌도 못채웠다. 조 토레 이전 뉴욕 양키스 감독은 직전 10년간 3년임기를 채운 감독도 없다. 보스 조지 스테인브레너와 이리치이고 저리 치받으면서도 감독자리 유지한 것은 조 토레 뿐이다. 김성근 감독의 전력을 봐도 한 팀에서 가장 오래 버틴 기록이 5년이다(OB 시절과 SK시절).
  19. 다만 예로부터 호남팜은 질은 좋지만 양적인 면에서는 그리 좋은 평을 듣지 못한다. 당장 해태 타이거즈를 언급할때면 소수정예란 말이 빠짐없이 나올 정도.
  20. 삼성 라이온즈 팬덤의 경우 해태 시절의 김응용이 1980~1990년대 한국시리즈 제패를 막은 장본인이지만 한국시리즈 첫 우승의 숙원도 풀어준 감독이라 김응용의 능력에 매우 호의적이다. KBO 초창기 삼성을 콩라인으로 만든 장본인이라서 싫어하는 팬도 있지만, 그만큼이나 삼성팬들의 뇌리속엔 '김응용=명장' 공식이 강렬하게 남아있다. 게다가 그 악마같던 명장이 아군이 되서 자신들을 우승시켰으니 더더욱. 거기다가 김성근은 1990년대 556 암흑기의 주범중에 한명이며, 삼성의 올드팬들에게 선동렬만도 못한 놈 취급을 받고 있다. 여기에 SK 와이번스 감독 교체 당시 이만수김성근의 대립까지 엮이면서 김응용을 지지하는 경향이 더 강하다. 생각해보면 삼성 라이온즈김성근김응용을 모두 겪은 유일했던 구단이다. 그리고 2015년 부터 한 팀이 더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KIA는 해태시절 1군 감독2군 감독이 동시에 있었다.
  21. 하지만 이것도 옛말인것이 김성근이 한화 이글스에 부임한 이후 반 김성근 입장이 강한곳이 LG 트윈스 갤러리다. 그리고 그 이전에도 LG팬들 사이에서 마지막으로 4강간거 때문에 묻혀있었지 혹사논란으로 말 많았던게 김성근이다.
  22. 말이 1:4지 진짜 머릿수로 따지면 더한 상황이다.소수정예의 위엄
  23. 속터지고 답답한 마음은 알겠으나 시즌도중 코치들에게 맡기고 포기한 듯한 언행(이를테면 경기복기대신 드라마를 본다라거나...)을 하지 않고사실 김응용의 평소 츤데레식 스타일을 고려하면 그냥 농담일 가능성이 높다 팀에대한 애정을 드러낸 상태로 퇴임했다면 지금보다 평가가 훨씬 좋았을것이다. 각종 포털사이트에서 한화감독시절 김응용에 대한 글을 보면 위에 나온대로 젋은선수 영입 및 라인업구성, 사비를 털어서까지 어린선수를 키우려했던 점 등을 높이 사는 글을 종종 볼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몇 가지 언행들로 인해 한화팬들에게 금새 반박당하고 비공감이 쌓여버린다.
  24. 2006년은 극심한 투고타저 시즌으로, 리그 평균 자책점이 3.59였다.
  25. 여기에 "야구 하이라이트 프로를 봐도 창피해서 우리팀 경기 요약은 안본다" 같은 인터뷰도 한몫했다. 이조차 김성근의 내로남불식 인터뷰 때문에 묻혔지만.(...)
  26. 거기에 클로저로 쓰려고 했던 박찬호의 갑작스런 은퇴는 덤.
  27. 마무리나 셋업의 연간 소화이닝은 대체로 50~70이닝 사이다. 보통은 60이닝 전후 던지는 경우가 많으므로, 70이닝은 좀 많이 던지긴 했지만 혹사라고 보기엔 애매한 수치다. 송창식이 일반적인 투수였다면 말이지만.
  28. 그 일반적이지 않은 송창식을 2년 넘게 혹사시키면서 굴리면서 팔꿈치의 이상을 불러온 것은 김성근 감독이며, 마찬가지로 고등학교 때 수술을 받아 관리가 필요한 김민우를 당시 송창식보다 더 빡세게 굴렸다.
  29. 투수 어깨는 쓰면 강해진다는 이야기나 좀 더 기다리자는 이야기도 있는데 대부분의 결과는 이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투수 어깨는 소모품이기에 미국에서도 대박 FA를 뽑기 어려운 것이다.
  30. 특히 후반기에는 진짜 답이 없었다. 막판 4연패도 타선에 그 원인이 있다.
  31. 반면 김성근은 역대경력을 보면 알겠지만 SK시절을 제외하면 모든 팀에서 첫해에 우수한 성적을 낸 뒤 해가 갈수록 계속 성적이 떨어지는 공식이 있다. 잘 보면 그 긴 커리어 동안 부임중에 전년도보다 높은 성적을 낸건 2010 SK 단 한 번 뿐임을 알 수 있는데 그마저도 사실상 1위 KIA와 대등한 성적이다. 심지어 LG트윈스 시절에도 시즌 승률은 첫해인 2001년 시즌(중간에 선임된 이후 시즌 종료까지)이 4위로 포스트시즌 진출하여 한국시리즈 준우승까지 만든 2002년보다 더 높다.
  32. 김응용 감독도 2001년에 압도적인 전력 차이와 정규시즌 1위라는 이점을 가지고도 3위로 포스트시즌에 올라왔던 두산 베어스 에게 떡이 되도록 얻어터지며 한국 프로야구 처음으로 업셋 우승을 허용하였던 적이 있긴 하다. 그거야 삼성 콩라인 기질 때문이고. 김응용 커리어에서 준우승은 삼성에서 한 게 전부다. 물론 포시 승률 전체를 놓고 보면 김성근은 김응용 발밑에도 미치지 못한다. SK왕조 4년 합쳐서야 가까스로 5할 턱걸이하는 승률에 대 김응용전에서 한번도 이겨본 적이 없다. 즉 페넌트레이스포스트시즌도 김응용 > 김성근이라는게 최종결론이다.
  33. 2002년 4위였던 LG로 한국시리즈 진출, SK시절 우승 3회와 준우승 1회.
  34. 현재는 단기전에 강하다는 이미지가 있으나 김응용의 전성기였던 20세기에 김성근은 가을야구만 나가면 그냥 더 볼 것 없이 그냥 바로 탈락이었다. 이게 어느 정도냐 하면 OB로는 1986년, 1987년 플레이오프에서 각각 김영덕/김응용에게 첫 시리즈에서 바로 패배했고, 1989년 태평양으로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을 이긴 적이 있으나 1990년대 에는 삼성 2회, 쌍방울 2회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통틀어 총 4번 포스트시즌에 진출해서 단 한번도 이겨 본 시리즈가 없다. 가을야구 진출하면 그냥 그게 끝으로 김성근은 단기전에 매우 약한 감독으로 평가받았다. 20세기의 김성근은 포스트시즌에 7회 진출하여 태평양때 1번 이겨본 게 끝으로 가을야구 승률이 아주 낮은 감독이었다. 되짚어 보면 페넌트레이스에서의 막대한 혹사의 결과가 포스트시즌에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포스트시즌에 강했던 김응룡의 해태와는 대조적인 부분.
  35. 타팀 팬들은 세이콘김성근 종신감독 드립을 쳤는데, 유망주를 노망주와 바꿔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오준혁, 노수광 등을 받은 KIA가 있다. 하지만 2016년 후반기에 와서 분탕들 빼고 부상으로 신음하는 투수들이 속출하자 타팀 팬들조차도 투수들 죽는다면서 종신감독이 아니라 경질을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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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 2013년 송창식의 등판 일지로 보았을 때 타 팀의 클로저들에 비해 혹사를 당하긴 했다. 김응용 감독은 이로 인해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살려조의 행보가 시즌 중반까지도 투혼이라며 포장되었던 것과는 상당히 대조된다.
  38. 다수의 기자들이 한화 선수들이 감독 뒷담화를 하고 있다는 기사를 올렸다. 이건 단순한 카더라로만 볼게 아니라 실제로 휴식일에도 훈련을 시키거나, 2군 외박일이라 선수들이 대부분 외출한 상황에서도 도로 불러들였다는 사실은 2군 선수들의 SNS와 기자 및 팬들의 증언으로 교차검증되었다. 정해진 휴일도 안 지켜주는데 좋은 소리가 나올리가?
  39. 하지만 김성근식 야구는 퇴보한 것이 아니라 80년대나 SK때나 고양 원더스나 한화랑 똑같고, 달라진 것이라면 SK때는 선수층이 두터웠기 떄문에 잘 굴러갔고, 원더스에서는 외국인 용병을 신나게 굴려서(이걸 은폐시킨 건 덤) 명장 소리를 들었으나, 한화에서는 그게 안되니 망했다는 반론이 강하다. 즉 김성근이야 말로 (선수를 불쏘시개로 소모시켜 성적을 거두는) 선수빨 감독이라는 것이고, SK시절 성적으로 포장되어 있었던 여러 무리수들이 한화에서는 극단적으로 부작용을 불렀다고 볼 수 있다.
  40. 동열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는 유행어로 당시 많은 개그맨들의 단골 성대모사 소재였다. 즉, 당시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었을 뿐 아니라 통산 10회 우승이라는 화려한 커리어까지... 많은 이들이 간과하는 사실인데 김응룡 감독 역시 본인이 마음만 먹었다면 강연 등을 다니며 김성근 감독 못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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