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콩!! 묘하게 2분닮았다
이름 | 皇太子德仁親王妃雅子(こうたいしなるひとしんのうひ まさこ) |
황족 | 일본의 황족. 나루히토 황태자의 부인. [1]인용 오류: <ref></code> 태그를 닫는 <code></ref> 태그가 없습니다 일본의 前 외교관이며 현재는 일본의 황태자비이다.</ref> |
출생 | 1963년 12월 9일생. [2] |
목차
젊은 시절 촉망받는 외교관이었으나 현재는 비운의 황태자비
1 어린 시절
2살 무렵의 마사코.
아버지 오와다 히사시(小和田恆)[3]는 도쿄대학 출신의 외교관[4]이며, 어머니 오와다 유미코(小和田優美子)[5]는 게이오기주쿠대학에서 프랑스어를 전공한 후 에어 프랑스에 근무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히사시와 유미코.
마사코는 1963년 히사시와 유미코의 3녀 중 장녀로 도쿄에서 태어났다. 마사코가 2살 때 아버지는 모스크바로 발령을 받았다. 마사코는 현지에서 유치원을 다니며 러시아어를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었다. 스위스 제네바에 살던 1966년 7월에는, 쌍둥이 여동생들이 태어났다. 아직 어린 아기였던 마사코에게 한꺼번에 동생이 2명이나 생긴 것. 마사코는 맏언니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면서 일찌감치 강한 책임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자신의 고민을 내색하지 않고 스스로 다스리는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5살 때부터는 뉴욕에서 살면서 영어를 배웠다. 히사시와 유미코는 외국 생활을 하는 중에도 딸들이 일본을 잊지 않게 하려고 나름대로 애썼다. 일본어와 일본 문화를 가르치고, 일본 요리를 먹이고, 기모노를 입히고, 일본의 전래동화를 읽어주는 등등. 그럼에도 마사코는 귀국한 후 문화충격으로 다소 혼란을 느꼈다고 한다.
8살 때 귀국한 마사코는 공립 초등학교 2군데를 거쳐 가톨릭계인 덴엔쵸후 후타바(田園調布雙葉) 여학원[6] 초등학교 3학년에 편입, 동(同) 학원에서 고등학교 1학년까지 다녔다. 마사코는 우수한 성적에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인기가 많았으며, 수예부ㆍ생물부ㆍ소프트볼 팀 등에서 활약했다. 중3 때는 소프트볼 팀을 조직하여 열심히 연습, 대회에 나가 우승까지 하는 등 운동능력과 리더십을 보였다. 또한 이과 과목에서 뛰어난 성적을 올려, 고1 때 담임교사는 마사코에게 의대 진학을 권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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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4월, 덴엔조후 후타바 여학원 중학교에 입학한 마사코. 아버지 히사시, 어머니 유미코, 동(同) 학원의 초등학교 4학년이 된 쌍둥이 여동생 이케다 레이코(池田禮子)ㆍ시부야 세츠코(澁谷節子)와 함께.[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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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이후로 보이는 가족 사진. 앞줄 오른쪽이 마사코.
2 하버드 대학교 졸업 및 외무고시 합격
마사코가 고1 때 아버지는 다시 미국으로 발령을 받아, 오와다 일가는 미국으로 이주했다. 마사코는 매사추세츠 주의 Belmont 고등학교 1학년에 편입했다. Belmont 고등학교에서도 합창ㆍ수학ㆍ소프트볼 등 여러 동아리 활동을 활발하게 했으며, 미국인 학생들을 따라잡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여 여러 명문 대학에 합격했다. 마사코는 그 중에서 하버드 대학교에 진학하여 경제학을 전공했다.
마사코는 대학 기숙사에 살며 학업과 여러 활동들을 열심히 하였으며, 국제 무대에서 일할 꿈을 가지고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 외국어도 공부했다. 그리고 1985년 6월, 우수한 성적으로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8]하였다. 미국에서 좋은 기회가 많았지만, 어린 시절의 많은 기간을 외국에서 자라난 마사코는 일본을 더 잘 알아 정체성을 찾고 싶어서 귀국했다. 그 기회들을 다 뿌리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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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대학 법학부에 편입하여 다니던 마사코는 외무고시를 준비, 1986년 10월 단 한 차례로 당당히 합격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외무성에 입성하게 되었다. 부녀(父女) 외교관의 탄생으로 큰 화제가 되었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마사코는 "외교관이 된 이유는, 일본에서도 남녀가 차별을 받지 않고 동등하게 일할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일본을 남녀 차별이 없는 나라로 만들고 싶습니다!!" 라고 딱 부러지게 대답하였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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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으로 활동하던 당시.
이렇게 마사코는 촉망받는 외교관이었고, 그녀의 성공을 누구도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3 나루히토 친왕과의 만남과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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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농담으로 달린 틀이지만, 촉망받는 유능한 여성 외교관이었던 오와다 마사코의 삶은 나루히토 친왕과의 결혼으로 인해 지옥으로 떨어지게 된다.
아래에 적힌 말처럼 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책임감과 소신이 있는 좋은 남자가 지덕체를 겸비한 좋은 여자에게 순수한 사랑을 바쳤는데 그 결과가 비극일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이다…
1986년 10월 스페인 엘레나 공주의 영접식에 참석한 신입 외교관 마사코는 그 자리에서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바로 그는 쇼와 덴노의 장손 히로노미야 나루히토 친왕.[11] 나루히토 친왕은 그 자리에서 마사코를 보고 호감을 느끼게 된다.
나루히토 친왕은 마사코에게 연락을 지속하였고, 그녀에게 청혼하였다. 그러나 마사코는 외교관으로서 커리어우먼의 인생을 살고 싶었기에 청혼을 거절한다. 게다가 마사코의 외할아버지 에가시라 유타카(江頭豊)가 미나마타병 추문을 일으킨 칫소 사(社)의 회장이었기 때문에, 마사코는 신붓감 후보 목록에서도 사라지게 된다. 그 외에 나루히토 친왕보다 키가 크다는 점, 딸만 낳은 가정이며 쌍둥이를 낳은 가정 출신이라는 점도 흠이 되었다.
마사코의 집에서도 반대를 하였다. 일본 황실에 시집가면 엄청 빡센 시월드의 왕따에 혼수[12]로 집안 기둥뿌리가 뽑히고, 현대 일본 안의 1천년 전 세상이 그놈의 황실이니[13] 누가 그런 시월드에 가는 짓을 하고 싶겠는가?
나루히토 황태자는 단념하고 새로운 신붓감을 물색하였으나 결국 마사코를 포기하지 못하였고, "오와다 마사코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선언한다. 황실은 뒤집어졌고, 마사코는 주변의 엄청난 직간접적 압력에 시달리게 되었다.[14] 나루히토 황태자는 몇 번이나 더 청혼하였고 결국 마사코는 청혼을 받아들이게 된다. 약 7년간 청혼하고 거절당하고 청혼하고를 반복했다고 하니 그저 흠좀무.
참고로 나루히토 황태자가 마지막으로 프로포즈할 때 했던 말이 "전력을 다해 당신을 지키겠습니다!" 였다고. 이 말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엄청난 유행을 불러왔고, 1990년대 일본 남자들이 프로포즈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말이 되었다. (요즘도 쓰는 사람이 있다!!)
1993년 1월 19일 일본 황실이 두 사람의 약혼을 공식적으로 언급하였고, 같은 해 6월 9일 결혼식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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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기자회견 당시 모습. 마사코는 본래 개성 넘치는 멋쟁이였으나,[15] 이때부터 일본 황실 특유의 촌스러운 패션을 따라야만 했다. 그러나 옷은 바뀌었어도 알맹이는 당장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여자가 감히 자기 주장과 의견을 이야기하였다고, 게다가 신랑감인 나루히토 황태자보다 길게 말했다고 비난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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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앞두고 있을 무렵, 미혼 여성의 예복인 후리소데를 입은 마사코. 아버지 히사시, 어머니 유미코와 함께.
결혼식 날 아침, 정든 친정을 떠나는 마사코. 친정에서 기르던 강아지 쇼콜라와 작별인사를 나누는 모습.
결혼식에서. 보시다시피 마사코 황태자비가 나루히토 황태자보다 키가 더 크다.[16] 우익들은 애써 "나루히토 황태자가 2cm 가량 더 크다"고 주장한다는데, 소가 웃을 일이다. 또한 마사코 황태자비의 웨딩드레스는 목 부분이 장미 꽃잎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신부가 한 송이 꽃처럼 보이게 하려는 디자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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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날의 마사코 황태자비.
4 '불행의 연속' 이었던 황태자비의 삶
나루히토 황태자와 오와다 마사코의 결혼은 일본 최대의 이슈였다.[17] 이미 나루히토 황태자보다 5살이나 어린 남동생 후미히토 친왕은 형의 결혼을 기다리다 3년 먼저 결혼, 딸까지 하나 낳은 상황이었다. 모든 일본인들이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했고, 마사코 황태자비가 엘리트 외교관 출신이라는 사실은 그녀에 대한 기대를 높여주었다.
그러나 마사코 황태자비는 결혼 직후부터 2가지 난제에 부딪히게 된다. 일본 황실의 보수성과 아들 출산이 바로 그것이다.
마사코 황태자비는 다른 서양의 왕족들처럼 황태자비로서 해외 순방 등을 통하여 일본의 외교에 보탬에 되고 싶었다. 나루히토 황태자는 일본의 황족들이 나라의 외교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황태자 부부는 이 점에서 의견이 일치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 황족들의 해외 순방은 서양 왕실의 그것보다 형식적인 성격이 더 강했다. 거기에 일본 황실은 보수적인 일본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입장에 남존여비가 심해서, 여성 황족들의 사회 생활은 엄격히 금지(or 자제)되며 단순히 남편을 내조하는 역할만을 요구받았다. 서양에서 오랜 시간을 성장하며 자유분방한 사고방식을 가졌던 마사코 황태자비에게는 넘을 수 없는 가치관의 차이였다.
마사코 황태자비가 했던 단순한 행동, (외국인이 보기에는 지극히 평범함 그 자체인) 인터뷰[18] 등이 오만한 것으로 지적받기까지 할 정도다. 그녀가 나루히토 황태자보다 키가 조금 더 큰데, 그것을 옳지 못하다고 지적하는 경우가 있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19] 이런 가치관의 차이로 마사코 황태자비는 황실과 계속 충돌, 갈등하게 된다.
또한 마사코 황태자비는 황실의 다른 여성들과는 달라서 어려움이 있었다. 모두 대학을 졸업하긴 했지만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는 영문학, 아랫동서 키코 비는 심리학, 시누이 사야코 공주는 일문학을 전공했다. 즉 여성들이 선호하는 전공과목들이다. 하지만 마사코 황태자비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도쿄대학과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법학 및 정치학, 국제관계 등을 공부했다.
그리고 사야코 공주는 대학을 졸업한 후 조류 연구소에 근무하기도 했지만, 미치코 황후와 키코 비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황실로 시집왔다. 직업을 가진 여성이 황실로 시집온 것은 마사코 황태자비가 최초였다. 게다가 키코 비는 형님 마사코 황태자비보다 3년이나 먼저 시집와서 황실에 적응해 있었으며, 황실 학교인 가쿠슈인에 다니던 학창시절부터 황실 가족들과 돈독한 친분관계를 맺어오고 있었다. 마사코 황태자비는 그 틈에 끼기 어려웠다.
하지만 마사코 황태자비를 더 괴롭혔던 것은 바로 아들 출산의 문제였다. 1965년 후미히토 친왕이 태어난 이래 일본 황실에는 아들이 태어나지 않았고, 딸들만 줄줄이 태어나고 있었다.[20] 따라서 만세일계의 혈통을 이을 후계자, 즉 황태자의 아들을 낳는 것은 황태자비의 가장 큰 의무였다. 그러나 당시로써는 늦은 나이에 결혼한 황태자 부부에게 아이는 쉽게 생기지 않았고,[21][22] 그럴수록 주변의 심한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임신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궁내청에서 마사코 황태자비의 해외 순방을 허용하지 않는 등 생활을 엄격하게 제약하자, 마사코 황태자비는 대상포진과 우울증 등 스트레스성 질병에 시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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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무렵의 마사코 황태자비. 그녀의 표정에서 고뇌가 다 느껴질 정도.
여러 번 유산을 했으며, 2000년에는 유산 후유증 때문에 시할머니인 나가코 태후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기도 했다.[23] 오랜 불임 끝에 그러다 결국 2001년, 임신이 되었다. 전 일본이 마사코 황태자비의 임신에 주목하였고 아들의 탄생을 바랐지만, 딸이었다. 2001년 12월 1일에 태어난 이 딸이 바로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이다. 아이코 공주를 낳은 후에도 마사코 황태자비는 아들을 낳아야 한다며 임신을 권유(라고 쓰고 '강요' 라고 읽는다)당했으나, 아이코 공주를 낳을 때도 노산이었던 데다가 스트레스를 받으니 임신이 될 리가 없다. 이후에는 더 이상 자녀를 낳지 못하였다.
5 일본 황실의 혼란과 마사코 황태자비의 고통
마사코 황태자비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제약받고 아들 출산을 강요당하면서 각종 스트레스성 질병에 시달리게 되었고, 결국 우울증을 이유로 모든 공식 활동을 중지하고 장기간 칩거에 들어간다.[24]
나루히토 황태자는 이러한 압력에 대하여 일본 황족으로서는 드물게 "황실 내에 마사코 황태자비의 인격을 부정하는 세력이 있습니다!!"라는 발언을 하여, 아내를 부당하게 음해하는 세력이 있음을 공개적으로 시사하고 마사코 황태자비를 지켜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 내에서는 발언의 직설성과 "황태자가 보호하는 황태자비를 부정할 수 있는 세력이란 덴노 내외뿐이지 않느냐??"는 점에서 논란이 일었다.
이 발언은 결혼 10년이 지나면서 황실과 마사코 황태자비의 불편한 관계에 다들 지쳐 있을 때쯤이라, 나루히토 황태자의 충격적인 발언을 계기로 마사코 황태자비의 호감도가 하락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남동생 후미히토 친왕의 비난과 아버지 아키히토 덴노의 질책까지 들어 대단히 난처한 입장에 처했다.[25]
6 여왕 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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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나루히토 황태자와 무남독녀 아이코 공주와 함께 찍은 사진. 아이코 공주의 첫돌 무렵.
마사코 황태자비는 칩거 중에도 아이코 공주를 정성을 다해 양육하였으며, 아이코 공주는 무럭무럭 자라서 2006년 4월 가쿠슈인 유치원에 입학하게 된다.[26] 이런 도중에 일본 정부는 남자 황족의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황실전범을 개정하여 여자 황족에게도 황위 계승권을 인정하려 하였고, 그 당시 일본 수상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이에 대하여 어쩔 도리가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렇게 된다면 아이코 공주가 제2계승자가 되고 장래 여성 덴노가 되므로, 여론의 관심은 아이코 공주에게 집중되었다.
7 히사히토 친왕의 탄생
그런데 황실전범 개정을 논의하기 일주일 전 시동생 부부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 비가 셋째 임신을 발표함으로서 황실전범 개정은 흐지부지되고, 2006년 9월 6일, 늦둥이 아들이 태어났다. 그 아들이 바로 히사히토 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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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2월 1일 아이코 공주를 낳은 마사코 황태자비(왼쪽)와, 2006년 9월 6일 히사히토 친왕을 낳은 키코 비(오른쪽). 병원[27]도 다르고 5년이라는 시간의 차이도 있건만, 옷과 포대기는 물론, 목걸이와 귀걸이마저 통일했다.(…)
히사히토 친왕의 탄생 후 황태자 일가는 쩌리 신세가 되어버렸다. 모든 황족들과 국민들의 관심은 히사히토 친왕과 차남 일가에게 집중되었고, 황실전범 개정 움직임은 쏙 들어갔다. 이후 히사히토 친왕의 아버지인 후미히토 친왕은 덴노 부부의 총애를 등에 업고 황실에서의 발언권이 강화되었으며, 나루히토 황태자와 아키히토 덴노&후미히토 친왕의 사이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8 아이코 공주의 이지메 사건과 극복
그러나 히사히토 친왕의 탄생 이후, 세간에서는 마사코 황태자비가 아들 출산의 압력에서 벗어나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확실히 언론과 황실의 관심에서 벗어나서 그런지는 몰라도, 마사코 황태자비는 조금은 건강을 회복하여 공식 석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찍힌 사진 같은 것을 비교해보면 확실히 얼굴이 좋아진 게, 차라리 본인은 히사히토 친왕의 탄생 이후 본인에게 지워진 부담과 긴장을 덜어낼 수 있어서 도움이 많이 된 모양.
그러나 아이코 공주는 가쿠슈인 초등과 2~3학년 시절, 학교에서 왕따[28]를 당하여 등교 거부를 하는 등 순탄치 않은 학교 생활을 하였다. 다행히 고학년에 들어서는 학교생활에 적응하고 성적도 우수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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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동서 키코 비와 함께 찍은 사진.
동물원에서 조카 히사히토 친왕과 함께 동물에게 먹이를 주는 모습. 히사히토의 탄생으로 아이코 공주의 덴노 등극은 물 건너갔지만, 마사코 황태자비는 기나긴 아들 타령에서 해방되었다.
9 그 이후부터 현재까지
개인적으로는 불행이라고 할 수 있으나, 아무튼 요양 생활이 10년 이상 지속될 정도로 오래 이어지면서 일본 내의 여론도 마사코 황태자비에 대한 여론은 지속적으로 악화되었다. 지금으로서는 '좋게 봐서 폐인, 나쁘게 보면 남편에게 실드받는 한없는 게으름뱅이' 로밖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 황실은 국비로 생활을 지원받는 입장이다 보니, 아무런 대외활동도 없는 모습이 오래 지속되면서 국민 여론도 악화될 수 밖에 없었던 것. 하지만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워낙 동정론이 많이 불고 있어, 동정적인 기사를 내보내는 곳도 상당히 많아졌다.
나루히토 황태자에 대해서는 별 비난 여론이 없는데, 그는 아내의 입장에 서서 지속적으로 아내를 지켜주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이다. 위에서 서술된 인터뷰 사건은 나루히토 황태자가 아내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애초에 일본 황실은 인터뷰에서 절대 저런 직설적인 말을 하지 않는다. 저 인터뷰는 상당한 후폭풍을 불러 일으켰으며, 궁내청이 해명하는 상황까지 발생하였다.
이후 나루히토 황태자는 지속적으로 아버지 아키히토 덴노와의 불화설에 시달리게 된다. 심지어는 아키히토 덴노가 나루히토 황태자를 폐위하고 차남 후미히토 친왕을 황태자로 책봉할 것이라는 설까지 나돌았을 정도. 게다가 나루히토 황태자를 지지하는 측에서도 "제위를 지키시려면 이혼하고 젊은 여자를 새 황태자비로 맞아 아들을 낳으셔야 합니다!!라며 나루히토 황태자를 압박하고 있는 상황이다.
2013년에는 결혼 20주년을 맞은 마사코 황태자비의 요양이 10년째 이어지자 "치료가 해를 넘겨 계속되면 적응장애가 아니라 우울증일 가능성이 높다"며 황태자 부부의 분가 생활이나 여름 해외 요양 등 보다 적극적인 치료가 필요하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2013년 3월에는 "황실을 위해서 나루히토 황태자가 퇴위하라!!"는 주장이 나왔다. 명목상 개인의 의견이라고는 하지만 일본에서 황실과 관련해서 어떤 분위기인지 알면 이게 절대로 한 개인의 의견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나루히토 황태자의 53세 생일 기념 공식사진 촬영 때 마사코 황태자비와 아이코 공주가 함께 사진을 찍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
사실상 나루히토 황태자의 퇴위나 강제이혼만이 남은 것 아니냐는 관측이 있지만, 퇴위는 나루히토 황태자 스스로 결단을 내려야 하는 건데 그럴 가능성이 없거니와,[29] 강제이혼을 가만히 당할 만큼 나루히토 황태자의 성격이 호락호락하지는 않다.[30]
2013년, 만 50세 생일 기자회견에 세간의 인식과 남편과 딸의 입지문제를 인식한 탓인지 공식활동을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적응장애에 대해서도 완치를 위해 계속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10 아이코 공주의 여왕 계승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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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무남독녀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의 가쿠슈인 여자 중등과 입학식에서.
그리고 최근 기사에 따르면, 마사코 황태자비의 공무 참석 횟수가 많이 증가한 배경으로 아이코 공주의 독보적인 성적을 들 수 있다고 한다. 연일 기사에서는 아이코 공주의 성적에 대해 칭찬 일색이고, 황족 중에서 제일 머리가 좋다는 등 딸의 심상치 않은 성적이 마사코 황태자비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 것으로 보인다. 아이코 공주는 향후 도쿄대학을 노릴 수 있을 만큼 가쿠슈인 초등과에서도 최상위권의 성적이라는데, 여기에는 황태자 부부의 영재 교육이 뒤따랐다고 한다. 이를 두고 저널리스트는 아직 "황태자 부부가 아이코 공주의 여왕 즉위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도 염두하고 있는 것"이라고 추측을 하기도 했다.
물론 아이코 공주가 도쿄대학에 합격할 경우 특혜 입학 내지는 일반 수험생의 기회를 박탈했다는 얼토당토 않은 시비에 휩싸일 수도 있기에 아예 마사코 황태자비처럼 해외 유학을 선택할 수 있으며, 이 경우 옥스포드나 하버드를 노려서 직접 영국 A-level/미국 SAT에 응시할 가능성도 있다. 만약 이런 단계를 거쳐서 정말로 합격할 경우에는 아버지 나루히토 황태자가 덴노 지위를 승계하게 된 이후 확실히 황실 내에서 반격을 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황태자비보다 신분이 낮은 아랫동서 키코 비의 공무량이 상대적으로 많아 비교를 당하고, 요양이 약 10년을 넘어갔으나, 2015년 5월부터 일본 내 공무를 계속 늘렸다. 그리고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의 80세 생일 기념 음악회에도 참석했다. 거기에 2년 만에 외국 공무를 나가, 7월에는 통가 국왕의 대관식에 황태자 부부 동반으로 참석했다. 이를 위해 아이코 공주의 수업 참관을 하지 않았다. 마사코 황태자비는 아이코 공주의 따돌림 문제 때 직접 수업 참관을 했을 정도로 딸에게 애정이 각별한 것을 보면, 공식 활동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같다. 좋지 않은 여론을 의식했거나 정말로 황실 적응을 극복했을 수 있다.
11 두 모녀의 성장
2016년 3월 말 황족들이 참석한 음악회에 참석했다. 작년부터 눈에 띌 만큼 대외활동을 점차 늘려나가고 있다. 물론 여전히 여론은 긍정적이진 않지만, 아이코 공주의 우수한 성적은 어딜 가나 찬양 일색이다.[31]
2016년에 들어서도 아이코 공주의 성적이 우수하다고 한다. 그에 비해 키코 비는 히사히토 친왕을 장래 도쿄대학에 진학시키려 하는데, 문제는 키코 비가 직장생활 경험도 없고 고전적인 비(妃)라는 이미지가 강한 반면, 형님 마사코 황태자비는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외교관으로 일한 희대의 수재이자 커리어우먼에 새로운 시대의 상징적인 존재라는 것. 게다가 황태자 부부도 아이코 공주를 도쿄대학에 진학시키려 한다는 소문 및 아이코 공주의 우수한 성적을 찬양하는 주간지의 기사를 보고 들으며, 키코 비는 애태우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문에 대한 키코 비의 공식적인 입장은 없지만, 일본 황족들 중 히사히토 친왕의 또래는 5살 위의 사촌누나 아이코 공주뿐이라, 세간에서도 일본 황족들 사이에서도 비교를 많이 당할 것은 뻔한 일이다. 그래서 키코 비는 히사히토 친왕이 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있다. 키코 비는 히사히토 친왕에게 게임을 금지시키며, 텔레비전은 뉴스와 다큐멘터리만 보게 하고, 그 외에는 다 금지시킨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 황실에 대해 다루는 주간지의 기사에 의하면, 히사히토 친왕을 너무 억압한다는 느낌이 강하다고 한다. "본인이 배우고 싶은 학문이 도쿄대학에 있다면 좋겠지만, 미래의 덴노라는 이유로 너무 억압하는 것이 아닐까?? 진로에 대해서는 히사히토 친왕이 좀 더 성장한 후에 논의해야 바람직하지 않을까??"라고 썼다. 기사가 이럴 정도면 키코 비의 억압이 엄청나긴 한 듯
아이코 공주의 방학이기 때문인지 7~8월에 들어서 나루히토 왕세자와 아이코 공주와 셋이서 자주 공무에 나온다. 무척이나 밝아진 얼굴에다 아이코 공주는 살도 빠지고 얼굴도 갸름해지는 등, 성적뿐만 아니라 외모도 점점 뛰어난 모습으로 나왔다.
최근 들어 아이코 공주는 키가 크고 성숙해진 모습에다 점점 마사코 황태자비를 닮아가고 있다[32]
12 현재
2016년 8월 8일 시아버지 아키히토가 퇴위 의사를 표명하면서 남편인 나루히토 황태자가 아키히토 덴노의 뒤를 이어 새 덴노가 될 경우 황태자비에서 황후가 될 것으로 보여진다.
그 이후 8월부터 현재 (10월)까지 아키히토 덴노의 퇴위가 논의되는 와중에 10월 6일, 마사코 황태자비는 바쁜 공무중에도 아이코 공주와 함께 병원에 다녀왔다.
결국 아이코 공주와 마사코 황태자비는 미치코 황후의 생일파티에 가지않았고 여전히 정확한 병명을 말하지않고 있다고 한다
13 세간의 평가
일본 사회에서도 마사코 황태자비를 안타깝게 여기는 의견이 많다. 하지만 일본 사회가 보수성이 강하다 보니, 적극적으로 그녀에 대한 동정 여론이 활발하게 전개되지는 않는 모양. 오히려 그녀에 대한 동정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하는 측은 외국 언론들이다. 독일과 일본의 언론인이 집필한 <일본 왕실에 갇힌 나비 마사코>라는 그녀의 일대기를 담은 책이 출판되어, 일본 황실을 비판하고 마사코 황태자비에 대한 동정 여론을 펴기도 하였다. 한국에서도 번역되어 출판되기도 했다.
마사코 황태자비는 일본의 모순에 희생당한 전형적인 경우로 볼 수 있다. 그나마 국왕과 국민, 의회가 충돌, 대립하고 투쟁하고 국왕이 자발적으로 왕권을 포기하여 입헌군주제, 의원 내각제등 정치 개혁이 실현되고 구습 잔재들이 상당부분 타파된 유럽의 군주국들과 달리[33],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 되는 등의 정치적인 격동을 겪었으나 국가 자체가 크게 변화하거나 정치 개혁이 이루어진 적은 거의 없었다.[34] 부락민 항목에서 알 수 있듯 일본은 과거의 악습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자민당 1당 정권의 유지 등에서 알 수 있듯[35] 이념 성향 자체가 매우 보수적인 편에 속한다. 특히 일본 황실은 '살아 있는 일본 전통의 상징'과 다름이 없다. 하지만 마사코 황태자비는 서구적이고 현대적인 사고 방식의 전형적인 커리어우먼이었고, 애초부터 일본 황실과는 전혀 맞지 않는 여성이었다.
황태자와의 결혼이 한 촉망받는 여성 외교관의 일생을 망쳐버린 것이라고까지 표현할 수 있다. 사실 커리어나 능력으로만 보면, 나중 일본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
다만 외국에서는 동정적인 여론이지만, 일본에서는 요양을 오래 하고 공무를 하지 않은 탓에 동정적인 여론이 줄어든 편이다.
특히 넷우익들이 마사코 황태자비를 싫어한다. 황태자비나 황태자 가족에 관한 뉴스에는 시종일관 비웃는 댓글이 달린다. 또한 우익을 자청하고 황실에 관심을 가지는 일본의 몇몇 블로그를 들어가 보면, 마사코 황태자비에 대하여 일관적으로 비관적인 어조로 써놨다. 그리고 트집을 잡아 하버드나 도쿄대, 옥스포드에 관한 학력이 외교관이었던 친정아버지 히사시의 빽으로 들어가서 졸업했다며 학력과 능력을 부정한다.
싫어하는 좌익과 황위 계승 문제를 엮어, 친정아버지 히사시가 좌익이며 황실을 없애기 위해 외손녀 아이코 공주에게 황위를 잇게 하려 한다고 음모론까지 펼친다.[36] 딸인 아이코 공주가 자폐설이 있는 것에서 발전한, 아이코 공주가 장애가 있고 대역(카케무샤)을 쓰고 있다는 주장까지 하는 것은 덤. 마사코 황태자비가 요양 문제와 아들이 없는 문제가 겹쳐졌으니 황실을 숭배하고 만세일계[37] 에 집착하는 넷우익에게는 황실의 골칫덩이로 찍힌 셈이다.- ↑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의 어머니.
- ↑ 일본 황실로부터 받은 문양은 해당화(ハマナス)
- ↑ 히사시의 아버지 오와다 다케오(小和田毅夫)는 교사였으며, 고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 ↑ 2009년 2월 6일 국제사법재판소장으로 선출되었다.
- ↑ 유미코의 아버지 에가시라 유타카(江頭豊)는 미나마타병으로 물의를 일으킨 칫소 사의 회장을 역임했으며(단, 유타카는 사건이 일어난 후에 부임했다고), 할아버지 에가시라 야스타로(江頭安太郞)는 일본 해군 중장이었다.
- ↑ 친정어머니 유미코와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초등학교)도 이 학교를 다녔다.
- ↑ 레이코는 UN 난민고등판무관 사무소에서 근무했으며, 세츠코는 번역가이자 문화인류학자이다. 레이코는 2000년에 도쿄대 법학부와 하버드 로스쿨 출신 변호사 이케다 마사히사(池田祐久)와, 세츠코는 1999년에 도쿄대학 출신의 의사 시부야 켄지(澁谷健司)와 결혼했다.
- ↑ 졸업 논문의 제목은 <수입 가격 쇼크에 대비한 국제 간 조정>이었는데, 이 논문은 나중에 일본 외무성의 참고자료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 ↑ 이때는 마사코가 살을 빼기 전으로, 외무고시를 합격한 뒤 살을 빼면서 본격적으로 미모가 드러났다. 흠좀무.
- ↑ 하지만 정작 본인이 그 피해를 제일 심하게 받았다.
- ↑ 만 31세가 되던 1991년 2월 23일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 ↑ 재벌 가문의 딸인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는 6t 트럭 3대 분량, 요즘 시세로 3억엔 어치의 혼수를 들고 시집왔다. 가쿠슈인 대학 교수의 딸인 아랫동서 키코 비도 혼수깨나 들고 시집왔는데, 대학 교직원용의 작은 아파트에 살았던지라 혼수품을 보관해 둘 공간이 없어 애먹었다고 한다.
- ↑ 일본 황실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이 말은 절대로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 황족 남자와의 결혼 대상으로 거론되는 여자들은, 외국으로 가버리거나 아예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일이 수두룩하다. (공개적으로는 하지 않지만) 일반인들이 황족들의 좋지 못한 소문을 뒷담화하면서 낄낄거리는 건 덤, 현대 한국에 고질적으로 잔류 중인 남존여비 의식은 아예 철없는 투정으로 보일 수준.
- ↑ 황실의 끈질긴 청혼에 못 이겨 시집와서 모진 시집살이를 겪은 점은,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와 비슷하다.
- ↑ 이 부분은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도 마찬가지이긴 했다.
- ↑ 실제로 現 일본 황실에서는 시동생 후미히토 친왕 다음으로 키가 크다.
- ↑ 사실 일본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당시 꽤나 큰 관심사를 불러 일으켰다.
- ↑ 약혼 발표 기자회견 때 마사코가 나루히토 황태자보다 불과 몇 초 길게 말했다 하여 비난이 쏟아졌을 정도였다. "이렇게 남편을 깎아내리다니!!" 라는 등등.
- ↑ 그래서 마사코 황태자비는 공식 석상에서 언제나 낮은 굽의 구두를 신는다. 사진을 확인해보라.
- ↑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1969), 미카사노미야 아키코 공주(1981), 미카사노미야 요코 공주(1983), 다카마도노미야 쓰구코 공주(1986), 다카마도노미야 노리코 공주(1988), 다카마도노미야 아야코 공주(1990), 아키시노노미야 마코 공주(1991), 아키시노노미야 카코 공주(1994),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2001).
- ↑ 1993년 결혼 당시 나루히토 황태자는 33세, 마사코는 30세였다. 요즘으로 치면 그닥 늦은 결혼도 아니지만 19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꽤 늦은 결혼이었고, 당시 일본인들의 평균 결혼연령보다 높은 편이었다. 더군다나 시동생 부부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 비는 이미 1990년에 결혼하여 이듬해에 딸까지 하나 낳은 상태였기 때문에 더욱 늦은 편이었다.
- ↑ 일본 황실의 비(妃)가 되는 여성들은 결혼 전에 일정한 교육을 받는데, 마사코 황태자비는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 때보다 교육 기간도 짧았고 배운 과목도 적었다. 이는 하루빨리 결혼시켜 후사를 보기 위함이었다. 또한 "옛날에 비해 오늘날 사람들의 건강과 영양 상태가 훨씬 좋으니, 임신에 큰 문제가 없다"고 말한 의사들의 전문적인 견해에도 불구하고, 황실과 궁내청 측에서는 수천년 된 관습에 따라 30세의 오와다 마사코가 임신하기에는 너무 나이들었다고 간주하였다고 한다.
- ↑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와의 고부갈등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 ↑ 궁내청과 덴노 내외에 의한 '감금' 이라는 설도 있다.
- ↑ 황실이 덴노를 위해 존재하는데, 훗날 나루히토 황태자가 덴노가 된다는 것을 고려했을 땐 누워서 침뱉기였다고 볼 수 있다.
- ↑ 실제 황태자 부부의 유일한 낙이 아이코 공주의 성장이었다고까지 나올 정도.
- ↑ 아이코 공주는 궁내청 병원, 히사히토 친왕은 아이쿠(愛育) 병원에서 태어났다.
- ↑ 일각에서는 아이코 공주의 왕따 사건 뒤에, 숙모인 키코 비가 연루되어 있다고도 한다. 아이코 공주를 괴롭힌 남자아이들의 부모들과 키코 비가 친한 사이라는 소문.
- ↑ 아이가 없다고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문제가 없는 적장자를 왕위계승에서 배재한다는 것은 고대에도 없었던 일이다. 이런 경우에는 보통 동생에게 계승하거나 조카나 적당한 친척을 양자로 맞아들여 해결한다.
- ↑ 만일 가만히 당할 사람이었으면 1993년에 기어이 마사코와 결혼했을 리가 없다. 황태자임에도 불구하고 7년 동안 계속해서 청혼했다는 점을 본다면 그 역시 여간내기는 전혀 아니다.
- ↑ 그러나 아이코 공주의 수업 참관에 왕세자 부부가 참가했을때, 일부 언론은 마사코 황태자비와 아이코 공주에 대한 비난도 있었다. 그것도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처럼 열심히 공무를 하는 부모를 보고 자라지 못했다는 식의 꼬투리를 잡는 내용이었다.
그럼 그 집 딸들은 뭘 보고 자랐길래 성적이 그 모양일까 - ↑ 다만 일본 여론은 이 모녀의 성장을 여전히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최근 들어 아이코 공주의 카게무샤 설까지 돌고 있으니.
- ↑ 대표적으로 스페인, 영국,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네덜란드 등등. 이 나라들은 왕족이 자국 평민이나, 문제 많은 인간이라든지, 하다 못해 외국인과 결혼해도 뭐하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외국인의 경우 황실예절과 자국의 언어는 기본으로 익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압박감도 은근히 심한지, 유럽 왕족들에게 시집 온 외국 출신 여자들은 남편 나라의 언어를 마스터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고 한다. 물론 이는 공주에게 장가 온 외국 출신 남자도 마찬가지이다.
- ↑ 임진왜란 때와 상황이 뒤바뀐 셈.
- ↑ 물론 몆번씩 야당으로 정권 교체가 이뤄진 적도 있었다.
- ↑ 유엔여성차별위원회가 일본 여성차별 보고서에 여성도 왕위를 잇게 하라는 내용을 포함하려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 외교관이었던 친정아버지 히사시가 외무성의 힘을 이용해 뒷공작을 벌였다고 할 정도다.
- ↑ 일본의 모든 덴노가 부계로 피가 계속 이어져 왔다는 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