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알트만

(로버트 올트먼에서 넘어옴)

altman1.jpg.jpg

Robert Altman(1925-2006)

1 개요

미국 국적의 영화감독이자 극작가. 마틴 스코세이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우디 앨런, 시드니 루멧, 스탠리 큐브릭, 스티븐 스필버그 등 유수의 감독들과 더불어 6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까지를 풍미한 이른바 뉴 할리우드 시대의 대표적인 감독으로 꼽힌다. 극도로 사실주의적이면서, 할리우드 특유의 가치관을 거부하는 그의 스타일 때문에 할리우드는 그를 '이단아'(Maverick)라 불렀다. 동시대의 감독인 시드니 루멧과 더불어 풍자와 유머가 바탕이 된 스타일이 특징이었고, 존 카사베츠와 함께 미국 인디영화의 기수로 할리우드에 반해 끊임없이 조롱하고 타협을 거부하는 꼬장꼬장한 모습을 보여줬다.

2 경력

2.1 전성기였던 70년대

53년 이래 TV 드라마를 주로 연출했다. 이때부터 완고하기로는 유명해서, 작품의 시간 단축이나 편집을 요구하던 윗분들에게 미움을 많이 샀다고 한다. 자신의 작품을 침해당하느니 아예 때려치우겠다는 태도였다나. 그러다 TV연출의 한계를 느끼고, 영화계로 진출하여 <The Delinquents>(1950)을 시작으로 소소하게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69년, 당시 많은 감독들이 거절한 것으로 알려진 <M.A.S.H>로 일약 대박을 치게 된다. 당시 주연인 도널드 서덜랜드나 앨리엇 굴드는 당시 비주류스러운 그의 특이한 연출방식에 질린 나머지, 뒤에서 알트만을 다른 감독으로 대체하고자 여러번 시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후에 앨리엇 굴드같은 경우는 몇년 후에 직접 사과해서 알트만과 두 차례 더 작업하지만, 도널드 서덜랜드와는 다시는 같이 작업하지 않는다. 어쨌든 영화는 70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 아카데미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는 등 비평도 성공했고, 흥행도 그의 최대 흥행작으로 남았을 만큼 성공했다.

<M.A.S.H>의 성공 이후 자신감을 얻은 알트만은 직접 Lion's Gate[2]라는 제작사를 설립해서 첫 제작영화로 자신이 감독한 <브루스터 매클라우드>(Brewster McCloud, 1970)를 만든다.

그리고 다음 작품인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McCabe & Mrs. Miller, 1971)으로 비평적으로 대성공을 거둔다. 로저 이버트, 조너선 로젠봄을 비롯한 다수의 평론가들에게서 알트만의 최고 작품으로 평가받는 이 영화는 자신도 '반(反)서부극'이라 칭했을만큼 기존의 서부극의 형식을 무시하거나 파괴한다. 촬영감독인 빌모스 지그문트가 담당한 카메라워크도 굉장히 유려한 편.[3] 주연인 워렌 비티[4]와 재밌는 일화가 하나 있는데, 씬을 7번 촬영 끝에 마친 알트만에게 한 씬을 여러번 찍는 것으로 유명한 비티가 또 찍자고 요구한 것이다. 둘은 옥신각신 말다툼을 했고, 결국 알트만은 비티에게 조감독 한명을 맡겨둔 채, 맘대로 하라 두고 자신은 그냥 자러갔다고 한다. 비티는 이후 약 30번 정도를 더 찍었다고 전해진다. 이에 대한 앙갚음으로 비티가 눈 속에 박혀 죽어가는 마지막 엔딩 장면을 20번이나 넘게 찍었다고 한다. 후일담에 따르면, 비티와의 관계는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후 레이먼드 챈들러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긴 이별>(The Long Goodbye, 1973)는 당시에는 혹평을 받았으나, 시간이 지난 이후 네오 누아르 장르를 개척했다는 재평가를 받았다. <보위와 키치>(Thieves Like Us, 1974), <캘리포니아 스플릿>(California Split, 1974),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과 함께 알트만의 70년 대를 대표하는 <내쉬빌>(Nashville, 1975),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을 받은 폴 뉴먼 주연의 <버팔로 빌과 인디언들>(Buffalo Bill and the Indians, or Sitting Bull's History Lesson, 1976)[5], 셜리 듀발에게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긴 <세 여인>(3 Women, 1977) 등 70년대는 바야흐로 알트만의 황금기였다. 비록 <MASH>를 빼면 크게 흥행한 영화는 없지만, 그렇다고 아예 망한 영화도 없었고, 비평가들에게는 열렬한 지지를 받으면서 안정적인 감독 생황을 이어간다. 여담으로 로저 이버트의 'Great Movie' 리스트에는 이 시기의 영화인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 <긴 이별>, <내쉬빌>, <세 여인>, 4편이나 들어가 있다.

2.2 침체기인 80년대, 다시 재기한 90년대

79년, 알트만의 이름값으로 미국의 폴 뉴먼, 스페인의 페르난도 레이,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가스먼, 프랑스의 브리짓 포시, 스웨덴의 비비 앤더슨 등의 배우들이 각본도 읽지 않은 채 함께 한, 그리고 상당한 예산을 들인 <퀸테트>(Quintet, 1979)가 흥행-비평 양쪽에서 대차게 말아먹는다.[6]1980년, 알트만은 뽀빠이의 판권을 산 파라마운트디즈니의 영화를 맡게 된다. 이때 촬영지에서 제작진과 배우들이 술이나 약을 한다는 등의 구설수에 시달렸다. 설상가상으로 알트만은 제작자, 주연인 로빈 윌리암스, 음악 감독과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켰으며, 심지어 로빈 윌리엄스는 영화 촬영 도중에도 감독과의 불화때문에 떠나겠다는 말을 공공연히 했을 정도였다. 비록 영화는 그럭저럭 흥행을 거두었지만 제작사 측에서 기대했던 수치에 한참 못미치는 실망스러운 수치였고, 비평 면도 시원찮은 수준이었다.

자신이 제작한 영화들, 특히 <퀸테트>가 시원하게 망하면서 어려움을 겪은 알트만은 자신의 제작사를 매각한다. 결정적으로 <뽀빠이>를 찍은 과정에서의 흘러나온 구설수는 더 이상 헐리우드가 알트만을 찾지 않게 만드는 구실이 되었다. 일례로 밀로스 포먼의 영화 <래그타임>(Ragtime, 1981)은 원래 알트만이 연출하기로 되어있었으나, 시작하기 전에 짤리고 밀로스 포먼이 맡게 되기도 했다. 자신도 '전화를 해도 받질 않고, 여기저기에서 오던 연락들도 끊겨있었다'고 회상했을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그 후에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소규모 영화나 다큐멘터리, TV 드라마, 연극 연출 등에 열중하게 된다. 이 시기 영화들 중엔 연극을 영화화한 작품이 많은데 <Come Back to the Five and Dime, Jimmy Dean, Jimmy Dean>(1982), <Secret Honor>(1984) 등이 그렇다. 이 영화들은 호평을 받긴 했지만, 80년대 알트만의 영화들은 비평적으로는 대체로 평작 수준이거나 망작도 많다. 8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1988년에 '자신이 했던 일 중 가장 창의적이고 독특했던 작품'라 평했던 모큐멘터리 드라마 <Tanner 88>[7]를 통해 에미상 감독상을 받으며 서서히 회복세를 탔다.

유럽에서 <빈센트 & 테오>(Vincent & Theo, 1990)를 만들고, 다시 헐리우드로 돌아온 알트만은 92년 <플레이어>(The Player, 1992)를 통해 다시 한번 화려하게 재기하는데 성공한다. 비록 아카데미 시상식과 골든 글로브에서는 <용서받지 못한 자>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감독상을 내주기는 했으나, 칸 영화제,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수상했고, 골든 글로브에서는 코미디 부문 작품상을 수상하는 등 비평적으로 성공을 거두며 재차 전성기의 서막을 열게 된다.

그 다음 작품인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집을 각색한 <숏컷>(Short Cuts, 1993)은 <플레이어>와 함께 후반기 알트만 영화의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한다. LA 지역에 사는 22명의 캐릭터를 약 3시간에 걸쳐 펼쳐낸, 알트만의 연출방식이 총집약된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영화의 구조와 상당부분 비견되는 영화가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매그놀리아>다. <숏컷>은 아카데미와 골든 글로브 감독상에 노미네이트 되었으며,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세가지 색 : 블루> (Three Colors: Blue, 1993)와 함께 공동으로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이후 마르첼로 마스트로야니, 소피아 로렌 등 유럽의 어마무시한 배우들을 끌어모아 만든 프랑스 파리 배경의 <패션쇼>(Pret-a-Porter, 1994)가 망하긴 했지만, 그래도 <캔자스 시티>(Kansas City, 1996), <진저브레드 맨>(The Gingerbread Man, 1998), <쿠키의 행운>(Cookie's Fortune. 1999), <닥터 T와 여인들>(Dr. T & the Women, 2000) 등 평작들을 계속 만들었다.

하지만 앞서의 평범했던 행보를 만회라도 하듯 <고스포드 파크>(Gosford Park, 2001)를 통해 알트만은 다시 한번 찬사를 받았다. 앞서 개최된 골든 글로브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며 아카데미 무관을 깰 절호의 기회로 평가받았지만, 아카데미 감독상, 작품상은 둘 다 뷰티풀 마인드의 론 하워드에게 내주면서 결국 실패.[8] 여러 평론가들에게도 '걸작'이라는 극찬을 받았고, <MASH> 다음으로 가장 큰 흥행 성적을 기록했다.

이후 영화 <스크림> 시리즈의 히로인인 니브 캠벨이 제작, 주연을 맡은 발레 영화인 <더 컴퍼니>(The Company, 2003)를 연출했다. 캠벨은 어릴때 발레리나로 활동했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를 각본가인 바바라 터너와 같이 각본으로 쓰면서 터너에게 알트만 감독 스타일에 맞는 각본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은 발레를 잘 모른다'며 영화의 연출을 한사코 거부하던 알트만을 직접 찾아가 수십 번을 조른 끝에 겨우 허락을 받아내서 찍었다고 한다. 조연인 제임스 프랭코말콤 맥도웰도 알트만과 작업해보고 싶다는 이유로 출연한 케이스.

그리고 마지막 유작이 되어 버린 <프레리 홈 컴패니언>(A Prairie Home Companion, 2006)을 연출한다. 당시 제작사에서는 80살의 나이였던 알트만이 잘못될 경우를 대비해 예비 감독을 세울 것을 요청[9]했고, 알트만은 자신이 아끼던 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10]을 대리로 세웠다. 물론 직접 촬영을 끝까지 마쳐서 대리 할 일은 없었고, 대신 앤더슨은 촬영장에서 같이 참관을 하면서 거동이 불편한 알트만의 지시를 대신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프레리 홈 컴패니언>이 완성되고, 2006년 개봉을 앞둘 즈음에 알트만은 아카데미로부터 평생공로상을 받게 된다. 이 자리에서 90년대 중반에 30대 여성의 심장을 이식받은 사실을 처음으로 밝히면서, 아직 40년은 거뜬하기에 이 공로상이 너무 이른것 아니냐는 농담까지 했다. 실제로 사망 전까지 여러 작품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 소망은 실현되지 못했고, 결국 그해 11월 백혈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인해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3 특이한 연출방식

500px
- 론 만(Ron Mann)의 다큐멘터리 <Altman>(2014) 중에 나오는 한 장면.

알트만의 조연출 출신이기도 한 감독 알란 루돌프는 알트만의 독특한 연출방식을 'Altmanesque'이라 칭했다. 첫째로 중심 되는 주인공을 가리기가 모호할 정도로 대단히 많은 배우들이 출연한다. 일례로 《내쉬빌》 같은 경우는 약 20명의 배우들이 주조연으로 극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인 바 있다. 둘째로 다중 플롯. 몇개의 이야기 덩어리 속에 수많은 인물들과 대사들을 녹여넣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야기 덩어리들이 촘촘하게 짜여지고, 하나의 방향으로 큰 틀을 구성해 나가게 된다. 셋째로 카메라의 줌과 트랙을 역동적이며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넷째로는 음악과 음향의 구성을 대단히 중요시한다.

각본대로 찍지 않는 경우가 많아 극작가들과의 관계는 좋지 않기로 유명했다. 다만 배우들과의 관계는 아주 좋아서, 소위 'actor's director'로 유명했으며, 촬영과정에서도 배우의 연기를 지적하며 지도하기보다 배우들의 연기에 전적으로 신뢰하는 타입이었다. 그래서 배우들이 각본을 청사진쯤으로만 여기길 원했으며, 때때로는 배우 자신이 캐릭터 연구를 통해 대사를 수정하거나, 즉흥적인 애드립을 치는 것도 적극 권장하는 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배우들이 즉석에서 하는 건의나 제안들에 상당히 관대한 입장을 취했고,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촬영과정에서 배우들에게 화풀이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그래서 그와 함께했던 배우들은 후일담을 통해 처음에는 이상했지만,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촬영장의 분위기를 밝게함과 동시에 창의적인 연기의 발상에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스타일은 멀게는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는 등 흥행, 비평 양쪽에서 성공을 안겨준 《M.A.S.H》(1970)에서 시작되어, 가까이는 '노장은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며 흥행과 비평면에서 대성공을 거둔 2002년의 《고스포드 파크》와 유작인 2006년작 《프레리 홈 컴패니언》까지 계속되며 하나의 확고한 트렌드를 만들었다. 이는 후대 감독들에도 영향을 줘서 알트만의 영화인 《숏컷》과 상당부분 비견되는 폴 토머스 앤더슨의 《매그놀리아》와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폴 해기스의 《크래시》 등에 영감을 줬다.

4 기타

위의 수상경력을 보면 알겠지만 로버트 알트만은 이탈리아의 거장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와 함께 세계 3대 영화제로 불리는 칸 영화제, 베니스 영화제, 베를린 영화제에서 모두 작품상을 거머쥔 감독이다. 물론 로저 이버트나 폴린 카엘[11]같은 지지자가 있긴 했으나 유럽 영화 따라한다는 비판을 많이 받곤 했던 미국과는 다르게, 유럽에서는 상당한 지지를 받으며 유럽 3대 영화제에 자신의 작품을 다수 올렸다. 칸 영화제가 알트만의 영화를 특히 좋아했다.

그의 영화에 자주 출연하는 배우들은 엘리엇 굴드, 샐리 켈러먼, 릴리 톰린, 키스 캐러딘, 셜리 듀발 등이 있다. 특히 셜리 듀발은 자신의 고향인 텍사스의 화장품 가게에서 일하다가 알트만에게 픽업되어 배우로 데뷔했고, 곧 1970년대 알트만 영화에 출연하는 단골이 되었다. 《브루스터 매클라우드》(Brewster McCloud, 1970)부터 시작하여 《매케이브와 밀러 부인》(1971), 《보위와 키치》(Thieves Like Us, 1974), 《내쉬빌》(1975), 듀발에게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긴 《3 Women》(1977), 그리고 《뽀빠이》(1980)의 '올리브' 역까지 알트만의 70년대 전성기를 함께 했다.

조지 부시를 엄청나게 싫어했다. 인터뷰에서도 부시를 싫어한다고 공공연히 말했으며, 2000년 쯤에는 '부시가 재선하면, 파리로 이민을 가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막상 재선되자 '그 파리 말고, 텍사스 주 파리 였다.'라고 농담이라며 개드립을 치기도 했지만. 그 후에 노엄 촘스키나 사회적 활동가이기도 한 배우 수잔 서랜든 등과 함께 이라크 전쟁 반대운동인 이른바 'Not in My name'를 지지 하기도 했다.

제임스 카메론의 <타이타닉>과 샘 멘데스의 <아메리칸 뷰티>를 두고 자신이 본 영화중에 최악이라며 대놓고 디스한 적이 있다.

유럽의 영화제에서 사랑받은 것과 달리 아카데미 시상식과는 인연이 없어서, 《야전병원 매쉬》(1970)[12], 《내슈빌》(1975)[13], 《플레이어》(1992), 《숏컷》(1993)[14], 《고스포드 파크》(2001)등으로 5번이나 감독상에 노미네이트되었음에도 한 번도 상을 받지 못했다.

5 대표작들

  • <야전병원 매쉬> (M.A.S.H, 1970),
  •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 (McCabe and Mrs. Miller, 1971)
  • <긴 이별> (The Long Goodbye, 1973)
  • <보위와 키치> (Thieves Like Us, 1974)
  • <캘리포니아 불화> (California Split, 1974)
  • <내쉬빌> (Nashville, 1975)
  • <버팔로 빌과 인디언> (Buffalo Bill and the Indians, or Sitting Bull's History Lesson, 1976)
  • <세 여인> (3 Women, 1977)
  • <플레이어> (The Player, 1992)
  • <숏컷> (Short Cuts, 1993)
  • <쿠키의 행운>(Cookie's Fortune, 1999)
  • <고스포드 파크> (Gorsford Park, 2002)
  • <프레리 홈 컴패니언 (A Prairie Home Companion, 2006)
  1. 촬영 당시에는 알트만은 몰랐고, 나중에 알게 되었다고 한다. 알트만은 만약 그때 알았으면 영화의 감독직을 때려쳤을 거라 말했다.
  2. 현재 존재하는 Lionsgate와는 분명히 다른 별개의 제작사다.
  3. 스탠리 큐브릭이 영화를 보고, "the camerawork was wonderful, How did you do it?" 라 칭찬했다고 한다.
  4. 비티는 이후 감독으로도 활동했고, 81년에 자신이 주연과 감독을 맡은 영화 <Reds>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다.
  5. 정작 알트만은 영화제에 출품된 이 영화에 대해 제작자가 영화에 너무 과도하게 개입했다는 이유로 상을 거부했다. 참고로 이 제작자는 1940년대부터 펠리니, 데 시카, 로셀리니 등 이탈리아 영화부터 시작해서 2000년대까지 왕성하게 영화를 제작했던 디노 디 로렌티스다. 후술할 <래그타임>을 이 사람이 제작한다.
  6. 박찬욱의 책인 '박찬욱의 오마주'에서 참고.
  7. <Secret Honor>와 함께 크라이테리온 콜렉션를 통해 DVD로 나와있다.
  8. 감독상 수상자가 발표된 이후에 《멀홀랜드 드라이브》로 감독상에 노미네이트됐던 데이비드 린치와 알트만이 서로 위로해주는 모습을 보여 소소한 웃음을 주기도 했다. 워낙 당시 후보들이 쟁쟁해서 론 하워드와 <뷰티풀 마인드>의 감독상과 작품상 수상은 다소 까인다. 이를 두고 <고스포드 파크>로 각본상을 받았던 각본가 줄리안 펠로우즈는 당시 알트만이 전쟁에 반대하고, 부시 정부와 각을 세웠기 때문에 주지않았던 것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9. 이게 처음은 아니어서 <고스포드 파크>를 촬영할 때도 제작사에서는 예비 감독으로 영화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더 퀸>을 연출한 영국 출신의 감독 스티븐 프리어스를 대기시켰다.
  10. 앤더슨은 후에 자신이 데어 윌 비 블러드를 편집하던 중 사망한 알트만에게 영화를 헌정했다.
  11. 특히 카엘은 최종 완성 전의 편집본을 보고 프리뷰를 써서, 당시 영화사에 의해 대량으로 잘려나갈 위기에 처한 <내쉬빌> (Nashville, 1975)을 구해냈다. 70년대에는 그래도 영화 평론가의 힘이 강했던 시대였기 때문에, 이렇게 형성된 여론을 통해 편집없는 완전판이 개봉할 수 있게 되었던 것. 물론 이러한 카엘의 행동은 다른 평론가들에게 '완전한 영화가 아닌 가편집본을 보고 쓴 비평이 과연 합당한가'라는 점을 들어 비판의 대상이 되긴 했다.
  12. 수상은 《패튼 대전차군단》의 프랭클린 J. 셰프너
  13. 수상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밀로시 포르만
  14. 수상은 《쉰들러 리스트》의 스티븐 스필버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