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나라 이웃나라/문제점/4권(영국편)

먼나라 이웃나라 문제점
네덜란드프랑스독일영국
스위스이탈리아일본한국
미국중국에스파냐
공정성 / 구성

1 역사

영국 사람에게 잉글랜드라고 하면 안 된다고 해 놓고선 책 표지 등에는 잉글랜드라고 적혀 있다.

1.1 고대

  • 옛날 유럽 사람들이 영국 너머 서쪽 바다로 진출할 생각을 못했던 것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해서였다.
배움의 기회가 적었던 평민들이야 그랬을지 몰라도 높으신 분들은 이미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국 역사편에서는 유럽 사람들이 함부로 서쪽 바다로 가지 못한 이유에 대하여 좀더 자세하게 설명이 되어있는 편이다. 플랫 에러 참조.

1.2 중세

- 그렇게 쉽게 이기지는 않았다. 당시 잉글랜드 왕 해롤드의 주력 군대는 예전 알프레드 대왕이 육성한, 당대 유럽 최강의 중장보병이라 불렸던 허스칼이었다. 또 이들은 언덕과 같은 유리한 위치에서 상당수의 노르만 기사들을 쓰러뜨렸다. 그들이 패배한 진짜 이유는 노르만 군대의 상륙지점을 예상했는데도 상륙을 못 막고 정부(情婦)에게 깃발 바치느라 시간 낭비한 해롤드의 온갖 삽질 때문이다.[1] 그나마도 거의 이길 수 있었는데 사실상 노르만의 마지막 공세에서 눈먼 화살에 대장이 맞으면서 전세가 급반전되었다. 그 외의 패배 원인으로는 노르망디 공 월리엄이 공격하기 전에 노르웨이쪽에서 자기네가 잉글랜드 왕하겠다고 먼저 쳐들어왔던 탓도 있다. 문제는 이를 격퇴하는데 성공했지만, 곧바로 노르망디 공 월리엄이 쳐들어 왔다. (버나드 로 몽고메리 著, 《전쟁의 역사》 등 출처)
  • 존이 자신의 조카 아서를 죽인 것에 대해 필리프에게 고발당하고 영토를 빼앗겼다?
- 존이 실제로 아서를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최소한 그 사건으로 고발당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존이 필리프 2세에게 법정출두를 거부한 사건은 위그 드 뤼지냥의 약혼녀인 이사벨라 드 앙굴렘의 신부 가로채기와 과도한 로리콘질로 고발된 것이다. 당시 이사벨라 드 앙굴렘은 12살이였으며, 존은 이 왕비에게 하루 종일 매달려 살았다한다. 그리고 주변 인물들은 존을 "이 로리콘 자식!"(...) 이라는 눈빛으로 보았다고 한다.
- 에드워드 1세는 분명하게 헨리 3세의 아들이며 절대로 조카가 아니다. 아들이 없을 경우가 아닌 이상 잉글랜드는 조카가 왕위를 물려받는 경우가 드문 데다가, 애초에 헨리 3세는 에드워드 1세 말고도 랭카스터 가의 에드먼드 크라우치백(새우등, 즉 꼽추)같은 유명한 아들도 있었다. 명백한 오류이다.
- 프랑스 편의 기요틴 관련 오류와 함께 먼나라 이웃나라의 대표적인 오류 중 하나. 영국군장궁을 썼다. 오히려 프랑스군이 제노바 석궁수를 고용했으나, 크레시 전투아쟁쿠르 전투에서 대패했다. 그 원인도 영국군이 장궁을 사용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쟁쿠르 전투의 경우, 갑옷을 거의 뚫지 못하는 장궁에 안심한 프랑스의 기사들이 수적 우세를 믿고 공명심에 빠졌다. 이들은 태생적으로 서로 라이벌인 귀족이었기 때문에 팀웍을 갖추기 힘들었다. 때문에 전공을 위해 돌격하다 진창으로인해 발이 묶여 기동력을 상실하고 살아있는 과녁이 되어버렸고, 영국군은 아주 쉽게 그들을 화살꽂이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이 오류는 최근 나온 수정판까지 석궁으로 표시되고 있다(...)
전쟁은, 특히 화약 무기 이전의 전쟁은 무조건 무기 성능에 좌우될만큼 단순하지 않다. 그리고 해당 페이지의 다음 페이지에는 크레시 전투를 그린 그림이 실려 있는데, 설명과 달리 그림에서는 프랑스군(제노바인 용병이 석궁을 썼는데 그 뒤로 프랑스 기사들이 돌격해 개발살)이 석궁을 쓰고 있고, 영국군은 장궁을 쓰고 있다. 그림과 설명이 앞뒤가 안 맞는다(...).

1.3 근세

- 정확히는 해적이 아니라 사략선이다.해적과는 다르다 해적과는!!! 굳이 적당한 표현을 찾자면 국가 공인 해적.칠무해 이들은 해적질이 국가에게 들통나도 처벌받지 않고 국가는 전함을 공짜로 얻는 윈윈관계인 게 사략선의 개념.[2] 즉 해군의 역할을 어느 정도 감당해주고 국가에 보물을 공짜로(국가와 사략함대가 1:1로 분배)내는 대신 체포당하지 않는게 사략선과 국가 간의 관계이다. 민간군사기업 해적과 달리 사략꾼은 적국 선박 나포 허가장을 갖고 활동한다.[3] 그러므로 엄밀하게 말해서 사략선은 일반적인 해적선과는 다르다. 물론 해적이든 사략꾼이든 스페인 보물선을 털고 다니면 국가 입장에서야 스페인이 보물을 잃는게 고소하기는 하겠지만, 직접적으로 국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 해적질을 장려할 리는 없다. 일반적인 도둑들이 장물을 처리할 때 세금을 내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참고로, 스페인-포르투갈의 보물선 약탈을 영국인들보다 먼저한 사람들은 의외로 프랑스인들이다.
하지만 당하는 입장에선 해적이나 사략꾼들이나 강도(...)라는 점에선 다를 게 없다. 영국의 대표적인 사략꾼은 토머스 캐번디시, 프랜시스 드레이크, 존 호킨스가 있지만 오직 캐번디시만 전시에 약탈을 했기 때문에, 그를 제외한 나머지 사략꾼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그냥 해적으로 취급되었다. 적국 선박 나포 허가장은 외국해적에 약탈당한 상선의 주인이 신청하는, 그 외국해적이 소속된 국가의 상선을 약탈하는 허가장인 평화시의 특별 허가장과복수허가권 전시에 적 선박을 나포하는 일반 허가장이 있었는데 상선이 아닌 대부분의 사략꾼들은 당연히 일반 허가장을 소유하였다. 간단히 말해서 프랜시스 드레이크와 존 호킨스는 전시가 아니어도 아무 선박이나 약탈해대서 영국 외 사람들에게 해적취급 받았다는 소리다.
- 당시 영국 연합해군의 지휘자는 찰스 하워드였고, 드레이크는 부사령관이었을 뿐이다. 더욱이 드레이크는 약탈에 눈이 먼 나머지 영국 함대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거나 명령에 불복종하는 등의 이유로 전투 중에 해임당한다. 또한 당시 양측이 사용한 화약무기의 질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당시 대포는 독일이나 이탈리아 지방 외에는 신뢰할 만한 수준의 무기를 만들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부존 자원의 문제도 있다. 당시 가장 신뢰성이 높은 포는 청동제 였는데, 독일이나 이탈리아는 구리 자원이 풍부하거나 수입처가 많고 종(교회종도 청동으로 만듬)만드는 장인이 많아서, 이들 국가는 종 만드는 장인들을 금방 대포 장인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외의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질이 떨어지는 연철제 포를 주로 운용했다.'
그런데 영국, 스웨덴, 네덜란드 등이 주조제 대포를 양산하면서 선박의 대포 보유수가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문제는 스페인은 자체적으로 청동 대포를 만드는 기술도 부족하고, 구리나 철강 자원도 많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원래 스페인의 주철 대포 수입처는 당면한 적국인 영국과 한참 독립 전쟁으로 싸우고 있던 네덜란드였다! 이러니 스페인이 영국에 비해 화력이 열세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절대적인 열세는 아니었기 때문에 위와 같은 서술은 문제가 있다. 실제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대포의 운용방식이었다. 스페인은 화력 중시, 영국은 사거리 중시 경향을 보였다. 게다가 스페인은 여전히 지중해식 근접전을 선호해서 병사수는 상대적으로 더 많고 대포수는 더 적었다.
결정적으로 당시 기록을 검토하면 양측에서 포격전으로 완파되거나 반파된 함정은 6척을 넘지 못한다. 그것도 모두 낡은 선박들이었다. 왜냐하면, 파열탄이 개발되기 전까지 상태 양호한 목선을 단순히 돌 or 쇳덩이를 발사하는 대포로 격침시키는건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스페인은 영국 함대와의 결전을 최대한 회피하면서 네덜란드로 가서 거기 육군을 실어 오는게 목적이었고, 영국측도 스페인 아르마다와 제대로 붙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또 아르마다가 괴멸적 타격을 입은 직접적인 이유는 영국군의 화공이 아니다. 칼레 전투에서 화공으로 스페인군의 공격이 실패하자, 해류와 바람의 방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스코틀랜드를 돌아(...) 귀환하다가 함대의 대부분이 폭풍우로 박살났다. 이 점이 신판에서 언급되어 있기는 하다.
  • 신대륙에서 온 세 가지(담배, 감자, 매독)를 설명하는 도중에 감자에 대해서 평민이 감자를 들면서 "이것도 먹는 건가"라고 하는 장면이 있는다.
- 진실은 당시 감자가 수입되고 난 직후에는 일반 채소처럼 잎파리만 먹는 줄 알아서 저렇게 감자 들고 의문을 품는 평민도 없었다(...).
게다가 귀족이 감자 파티(...)를 열며 극찬했다고 써있는데, 애초 감자는 널리 퍼지지도 않았다가 롤리라는 귀족이 처음 먹기 시작하며 귀족들 사이에서 퍼진 것이며, 그마저도 먹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리고 도중에 감자 파티에서 "달달한 게 입에 착착 들러붙네" 면발이 윽수로 부드럽네 라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당시 감자는 그냥 직수입한 쌩감자라서 당분은 없고 크기도 작아서 저런 말이 나올래야 나올 수가 없다(...). 명백한 고증 오류.
다만, 감자 도입 당시 평민들이 감자에 대해 큰 거부감을 가진 것은 사실이고, 감자의 식용이 지식인이나 귀족의 주도로 보급된 것은 사실이니 이 부분은 그냥 농담이나 드립 정도로 해석해도 상관없는 부분이지, 딱 잘라 틀렸다고 말하기는 좀 모자라다.
- 올리버 크롬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많이 죽였다. 단 크롬웰의 핵심 추종세력이 아닌 의회파 인사들은 대부분 살아남았다.
- 말도 안 되는 소리. 어림 없는 소리! 당치도 않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웨일스는 이때부터 모두 영국 단일 정부와 의회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스코틀랜드와 웨일스, 북아일랜드에 독자적인 자치정부와 의회의 설립이 허용된 시기는 영국이 만들어진 후 292년 뒤인 1999년이다. 이마저도 영국 중앙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취소할 수 있다. 정치 자체가 이미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간섭을 안 한다는 말은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는 미국의 연방제와 확연하게 다른 점이다.
  • 헨리 8세가 성공회를 창설할 때 가톨릭루터교양념을 치는 걸로 묘사했으나, 실제 역사에서 성공회칼뱅주의의 영향을 훨씬 많이 받았다. 뿐만 아니라 실제 역사에서 헨리 8세마르틴 루터는 상당히 험악한 관계였을 뿐만 아니라, 헨리 8세성공회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헨리 8세는 로마 교황이 수위권만 부정한 가톨릭 교도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신학적으로는 개신교와는 거리가 멀었고, 로마 교회로부터 영국의 교회를 '분리'시키는 역할 정도를 했다고 보는게 적절할 것이다. 즉, 후에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아 성공회가 개신교적인 성격을 띄게 되는 것도 엄밀히 말하면 헨리8세의 의도라고 보기는 힘들다.

1.4 현대

  • 자유당(영국)은 1차 대전 이후 국민들의 인기를 잃어 자취를 감췄다.
- 자유당이 1차대전 이후 노동당에 인기를 많이 빼앗긴 것은 사실이지만, 자취를 감췄다는 말은 절대로 사실이 아니다. 그 이후에도 자유당은 꾸준히 원내 제3정당이었으며 1988년부터는 사회민주당과 합당, 자유민주당으로 재편되어 지금도 원내 제3정당 자리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물론 2015년 총선에서는 스코틀랜드 국민당에게 밀려 4당으로 추락하긴 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국민당은 스코틀랜드에만 후보를 내므로 실질적으로는 3당으로 봐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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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나마도 삽질을 한건 오히려 약탈에 눈이 멀어있던 노르만 군이고 잉글랜드군은 노르만군의 예상보다 일찍 도착 했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잉글랜드군은 북쪽에서 바이킹을 격퇴하고 남부 잉글랜드까지 내려온 거다.
  2. 서양사에서 넬슨 시기까지 일반 상선과 군함은 분명히 구분되지 않았다. 당장 동인도 회사만 해도 상선이지만 중무장시켰다.
  3. 이 적국 선박 나포 허가장은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 각국이 대부분 발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