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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성 / 구성 |
1 7권
- 일본의 예절상 남에게 자기 상사를 말할때 "님(존칭)"자를 안 붙인다.
- - '듣는 사람을 높이기 위해 대화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낮추는 어법'인 압존법을 설명하기 위한 예시라는데, 애초에 자신의 직속 상사에게도 붙이지 않는 '님'을 남에게 소개할 때에도 붙이지 않는 것인지라 이걸 압존법의 예로 드는 것은 부적절하다. 즉 일본인들은 자기 상사에게도 그냥 부장, 사장이라고 부르지, 한국에서 부장님, 사장님 하는 것처럼 部長様나 社長様 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물론 만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사장님께서는 지금 자리에 계시지 않습니다'하는 식으로 높임법을 쓰면 실례가 되는 것은 맞지만 '님'을 불였다고 해서 화를 내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고, 일본어 문법에 대해 완전히 잘못된 지식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직책명에는 어지간하면 様를 붙이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
- 한 사람 앞에 음식상을 하나씩 따로 차리는 것은 일본 특유의 이치닌마에[一人前], 한 사람 몫을 다 하는 것을 중시하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 - 한국 전통 반상 또한 한 사람 앞에 하나씩 차리는 개인상이었다. 김치 등 밑반찬이나 찌개 같은 것까지 전부 개인별로 따로 상을 차렸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 일제강점기, 6.25전쟁 등으로 인해 개인별로 상을 챙길 여력이 없어져 어쩔 수 없이 과거에는 마이너했던 겸상이나 두레상으로 밥을 먹게 된 것이 지금까지 굳어진 것이다. 그럼 우리나라도 과거에는 이치닌마에 정신이 발달했다가 쇠퇴한 것인가? 서로 아무 연관 없는 두 현상을 억지로 끼워맞추다 생긴 촌극이다. 역으로 일본이라도 겸상과 두레상 차림이 없는건 아니다. 다만 그래도 밥과 국, 그리고 기본 3찬은 개인상으로 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 - 한국에서 한 찌개 냄비에 여러 사람이 숟가락을 담그고 떠먹는것을 비위생적이라 까내림과 동시에[1] 일본은 한 음식을 여럿이 함께 먹는것은 상상도 하지 못하며 반드시 개인 접시를 놓고 따로 덜어먹는 위생적인 것으로 묘사한다. 상술했듯 우리나라는 원래 독상문화으나 여러가지 시대적 경제적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변한 것인데 그에 대한 사전조사 없이 무작정 비판하는것은 좋은 모습이 아니다. 또한 1986년 방영된 한지붕 세가족 드라마에서도 개인식기를 사용하는 장면이 나왔듯이 꽤 예전부터 한 냄비에 숟가락질 하는 것에 대한 반감이 있어 왔다.
- - 일부 맞긴 하다 특히 에도 시대나 메이지 시대 들어서 한번 일본 정부 차원에서 욕설을 대대적으로 없애는 운동도 했다. 일본어 항목이나 히라가나 항목을 들어가서 보면 알겠지만 당시 욕설을 쓰던 사람들을 다 잡아 죽였다고... 흠좀무.
정부 비판을 막으려는 속셈이었나?그 이후로 욕설이 많이 줄어 현대 일본어에선 확실히 한국어 보다는 욕설이 적긴 하다.
한국어의 경우는 사실 세계적으로도 비속어나 혹은 축약어(줄여 쓰는 말-가령 듣보잡 같은) 특정 집단에서만 쓰는 은어 변형어 등이 많다 아니 그 전에 한국어 특성상 어휘 구사 범위가 다양하여(가령 파랗다라는 색깔 형용사를 들면 파랗다 외에도 푸르딩딩, 퍼렇다, 새파랗다 파아랗다 처럼) 이의 영향으로 최근 신세대들이 만들어내는 말들도 꽤 있다. 영어의 경우 한국어 일부 단어와는 달리 오히려 한 단어가 뜻을 여러개 담고 있는 케이스... 뭐 외국어의 경우도 얼마든지 그들 사회에서 만들어 쓴다면 많은 비속어나 은어 축약어 만들수 있기는 하나 한국어보단 언어 표현 범위가 넓지는 않다.
허나 대한민국 사람이라서 잘 모를 뿐이지, 일본에서도 매우 심한 말이 꽤 있다. 당장 욕설/일본어 항목만 가 봐도 그 종류가 넘쳐난다. 바카(馬鹿)는 한국에서처럼 귀여운 욕설이고[2], 칙쇼(畜生)는 사람을 지칭하면 심한 욕이 될 수도 있지만, 쓰레기를 의미하는 '고미(ごみ;塵)','쿠즈(屑)'나 '카스(滓;カス)'를 내뱉으면, 몇 곱절로 모욕을 느낀다. 장애인을 뜻하는 카타와(片輪)나 정신병자를 뜻하는 키치가이(気違い), '새끼'를 뜻하는 '야로오(やろう, 野郎)'라는 욕도 있다.[3] 같은 말들은 한국에서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 어그로까지 팍팍 끌고 싶다면 부라쿠민(部落民)이나 백정을 뜻하는 에다(穢多)나 히닌(非人)이라는 말도 있고, 자이니치(在日) 까지 가면 핵폭탄급 위력을 낼 수 있다. 여기에 당사자에게 쓰기라도 하면 그자리에서 싸움나는것도 가능. 다만 일본어와 영어를 모두 구사하는 사람의 의견으로는 일본어에는 fuck에 대응하는, 범용성 높고 입에 착착 붙는 욕이 없다고(...). 거기에 더해 성적인 속어도 많은 편이다. 일단 성진국이니까... 가령 아나쿄다이(あなきょうだい;穴兄弟), 야리망(やりまん), 아게칭(あげちん) 등등...
- 한국인은 친구끼리 장난삼아 툭툭 치거나 머리를 쥐어 박지만 일본인은 아무리 친한 친구일지라도 철저하게 신체적 접촉을 피한다.
- - 극히 일부는 맞다고 볼 수 있는 부분도 있으나 지나치게 과장된 부분이다. 가키노츠카이 같은 일본 쇼 오락프로그램을 보면 손으로 남의 뒤통수 후려치기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방영된다. 네이버웹툰 세개의 시간으로 유명한 정구미 작가가 그린 '내가 결혼할때까지'라는 웹툰을 보면 오사카 출신인 작가가 고향에서 하던 대로 남자친구를 툭툭 치다가 싸움이 난 에피소드가 나온다.[1] 더군다나 한국인들은 존두사상이 강하기 때문에 친구끼리 장난삼아 친다고 해도 어깨나 등 정도지 머리 잘못 쳤다가는 싸움나기 딱 좋다.
- - 이 오류는 일본인과 한국인이 생각하는 개인 영역의 거리감을 설명하는데 오해가 빚은 오류이다. 한국인이고 일본인이고 모두 장난삼아 툭툭 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다만 타인이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면 인지하게 되는 거리에 대해 조사하면 확실히 일본인이 한국인보다 더 넓은 편이고, 거래나 악수와 같은 접촉마저 한국인보다 더 특별하게 여기는 편이다.
- 족보 관련해서 한국인과 일본인의 차이로 일본인은 족보라든가 출신 관계 같은거에 별 관심 없다는 식으로 표현한 부분이 있는데 이는 실제와 다르다. 사무라이 계층 출신이었는지 아니었는지라든가 부락민이었는지 아니었는지 등, 출신차별은 훨씬 더 심하다. 개정판에서는 귀족이나 무사들은 중요시한다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 자민당은 전체의석의 개헌선(2/3)를 넘어서는 거대여당이었다.
- - 자민당이 거대여당인건 맞지만 자민당의 의석수가 중, 참의원 개헌선을 넘은적은 일본 정치사를 통틀어서 단 한번도 없다.
그랬다면 진작에 개헌해서 군대 만들고 그네들이 주장하는 보통국가 됐겠지역사상 가장 많은 의석을 확보했던 1986년 중, 참의원 선거에서도 중의원 300석(정수 512석, 개헌선은 341석) 참의원에서 143석(정수 252석, 개헌선은 169석)을 얻어 개헌선에 못미친다. 다만 연립정당과 합쳐서 개헌선을 넘은적은 두 번 있었다.(2005년 중의원 총선거, 2012년 중의원 총선거
- 일본 재벌과 대기업은 자식에게 회장직 세습을 하지 않는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세습하는 경우도 있는데 우리나라 재벌처럼 자식에게 경영실적을 보고 물려주는 경우도 있다.
2 8권
- 후지와라 가와 결혼한 덴노 목록에 고산조 덴노가 들어가 있다고 묘사하였다가 뒤에 고산조 덴노가 출현할 때는 후지와라 어머니도 후지와라 부인도 없었다고 나온다. 동궁비는 후지와라노 요시노부의 양녀였지만 중궁은 황족이었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 자체는 특별히 틀렸다고 볼 수는 없지만, 아무 설명도 없이 앞서 묘사한 내용을 뒤집는 것은 독자에게 혼란을 유발하기 쉽다.
-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의 4남으로 나온다.
- - 실제로는 9남이다. 그래서 풀네임은 미나모토노 쿠(九)로 요시츠네.
- 스이코 덴노가 소가노 우마코의 딸로 나온다.
- - 실제로는 소가노 우마코의 여동생이 천황에게 시집가서 낳은 딸, 즉 조카다. 개정판에서는 수정되었다.
- 진신의 난이 덴지 덴노의 아들들간의 후계자 싸움으로 묘사되어 있다.
- - 실제로는 덴지 덴노의 동생인 오야마 황자와 덴지 덴노의 아들인 오토모 황자간의 싸움이였다. 뒷날 명나라의 정난의 변처럼 숙질 간의 왕위 계승 전쟁이었던 것이다. 이 싸움은 숙부 오야마 황자가 이겨서 덴무 덴노로 즉위했다. 오토모 황자는 자결했고 사후에 고분 덴노로 추존되었다.
- 고산조 덴노가 고레이제이 덴노의 손자로 나온다.
- - 실제로는 이복동생.
- 타이라노 시게모리가 타이라노 타다마사의 조카로 나온다.
- - 실제로는 종손(조카의 아들).
- 시라카와 상황(조코)이 곧장 인세이를 행했다고 나와 있다.
- - 그러나 시라카와 상황이 양위 후 곧 실권을 장악한 것은 아니고, 섭관가 인물들이 요절하면서 권력의 공백이 생긴 것을 이용해 실권을 장악한 것이다. 분량문제상 생략한 듯하나 인세이는 덴노의 아버지의 자격으로 상황이 행하기는 했으나 당시는 관례화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시라카와가 선례를 만든 것이었다.
- 스토쿠 덴노가 시라카와 상황의 사생아라는 부분이 정설로 묘사되어 있다. 또한 고시라카와 덴노와 스토쿠 상황의 갈등이 스토쿠 상황의 일방적 전횡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스토쿠 상황의 출생 비화가 전해지기는 하지만 정설로 확인할 증거까지는 없어, 공식적으로 스토쿠는 도바 덴노와 중궁 후지와라노 쇼시의 장자이자 고사라카와 덴노의 형이다. 그리고 스토쿠 상황은 오히려 도바 법황에 의해 정치참여가 봉쇄되어 있었고, 양자의 동생이던 고노에 덴노 사후 도바 법황이 미워하던 스토쿠 상황의 아들 시게히토의 계승을 막고자 하여 황태자도 아니었던 4남 마사히토를 즉위시킨 것이었다. 이는 마사히토의 아들인 후의 니조 덴노가 총명하다는 평을 받았던데다 호우고의 총비 나리코의 양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도바 법황은 죽기 직전에도 스토쿠 상황의 문안을 거부했으며, 고시라카와 덴노는 즉위 후 스토쿠를 계속 압박했다. 그리고 호겐의 난과 헤이지의 난 이후 니조 덴노의 즉위는 고시라카와 덴노가 인세이를 하고자 하여 양위했다기보다는, 니조 덴노와 그 양모이자 도바 상황 소유의 막대한 장원 상속자였던 비후쿠몬인 나리코의 압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니조 덴노 치세에 고시라카와는 실권을 잡지 못했으며, 니조 덴노 사후 후일 동서가 되는 타이라노 키요모리와 협조하여(고시라카와는 키요모리의 아내의 여동생이던 켄슌몬인 시게코를 측실로 들였다.) 권력을 장악해 인세이를 행하게 된다. 그리고 고시라카와의 비호 아래 키요모리는 강력한 권력 누리게 된다.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헤이지에 의해 이즈 반도로 유배된 나이가 8세라고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13세 때 일이다.
- 가마쿠라 막부 초대 쇼군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자손은 요리이에, 사네토모, 구교 뿐이며 2대 쇼군인 요리이에는 요리토모의 장남이다.
- - 요리토모에겐 일찍 죽은 치즈루마루라는 장남이 있었으며 요리이에는 차남. 게다가 형제 조카들보다 오래 살았던 3남 죠교가 있으며 요리이에에게도 구교 외에 세 아들과 딸 하나가 더 있었다. 3대로 대가 끊긴 것은 사실이지만 가계도를 엉망진창으로 망가뜨린 부분이다.
- 일본은 백제가 멸망할때 구원병을 파견했다?
- -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오류.사실 일본은 백제가 멸망하고 옛 백제 영토에서 백제부흥운동이 벌어질 무렵에 백제 부흥군을 돕기 위해 원병을 파견했다. 그러나 결과는.... 다만 대사를 볼 때 반드시 백제가 멸망할 때라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 660년 백제멸망 서술 이후 백제가 SOS를 칠 때 일본이 파병하는 모습이 그려지지만 SOS의 주체가 의자왕인지 복신인지는 그림만 가지고는 파악할 수 없다.
- 여몽 연합군의 2차 침입 연도가 1275년이다.
- - 완전히 오류. 실제로는 1281년. 1차와는 7년이라는 틈이 있다. 이후 개정판에서는 1281년으로 수정되어졌다.
- 쿠빌라이 칸은 중국을 정복한 뒤 일본을 침입했다.
- - 여몽 연합군의 1차 일본 침입은 남송이 건재하던 1274년. 그 목적도 일본의 남송 지원 예방이었다. 다만 2차때는 남송은 이미 망한 뒤였다.
- 여몽 연합군을 막아낸 호조 가문은 권위가 더욱 세지고 막부의 권위도 든든해졌다.
- - 덴노 가문이라든가 일본인 차원에서의 긍지가 올라갔고, '카미카제'(神風)로 잘 알려진 일본의 신국(神國) 의식은 강화되었고, 전쟁을 수행하면서 단일체로서의 일본의 정체성은 강화되었다. 하지만, '호조 가문'과 '가마쿠라 막부' 쪽의 권위에 있어서는 급격히 실추되는 계기가 되었다. 승전(?)을 거두고 돌아온 병사들에 대한 논공행상 과정에서 보상해야 할 토지를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적국공격이 아닌 국토방어라는 전쟁의 성격상 전리품이라 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실추된 막부의 권위는 가뜩이나 귀족들의 토지겸병과 경제난을 겪던 무사들의 불만을 급격히 증폭시켜 결국 막부 몰락에 직접적인 단초를 가져왔다. 다만 2차 침공 직후로 한정짓는다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호조가의 멸망은 고케닌 체제를 미우치비토 체제로 원활하게 바꾸지 못함과 고다이고 천황이 직접 반기를 들면서 정통성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가마쿠라의 호죠 잔당들을 토벌하고 바로 교토로 회군하여 덴노군을 공격, 손쉽게 이를 격파하여 교토에 입성했다.
- - 사실은 가마쿠라의 호죠 잔당을 격파한후 가마쿠라에 눌러 앉아서 권력을 행사하다가 덴노군이 다카우지를 공격하자 군사를 일으켰다. 교토에 입성하긴 했지만 덴노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고 다카우지는 교토를 일시 점령했지만 곧 덴노군의 반격을 받아 교토를 포기하고 큐슈까지 도망치기도 했다.
- - 실제로 건문제는 1377년에 태어났고, 아시카가 요시미츠에게 일본국왕을 책봉한 시기는 1401년으로, 아직 서른이 되기 전 이었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느긋하고 성질 급하지 않은 사람으로 묘사하였다.
- - 사실 의외로 성급한 면도 있었다. 젊은 시절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도 불리한 상황에서 신겐에게 정면승부를 걸었던 적도 있고 세키가하라 전투 초반에 동군이 불리했을 때 시동이 등에 달고 있던 깃발의 깃대를 베어버린 적도 있었으며, 불안하거나 기분이 나쁘면 왼손 엄지손가락의 손톱을 이빨로 물어뜯는 특이한 버릇이 있었는데 이게 너무 심해서 피가 날 정도로 물어뜯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또 말을 타고 지휘할 때에도 처음에는 지휘채로 지휘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맨손으로 말안장을 두드리며 고래고래 고함쳐가며 지휘했을 정도(...). 이런 모습을 보면 꽤 다혈질적인 면모도 가지고 있었다.
- 오다 노부나가는 조총(철포)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먼저 꿰뚫어봤다.
- - 오다 노부나가가 조총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는 건 사실이지만, 실제로 철포를 처음 도입한 건 타네가시마[4]이며. 최초로 사용한 것은 키모츠키 가문이고, 1549년 시마즈 가문에서 키모츠키 가문과의 전투 이후 시마즈 가문에서도 대대적으로 도입한 것이 그 중요성을 처음 꿰뚫은 것이며. 오히려 당시 조총을 중요시 하지 않았던 다이묘들을 찾기 힘들 정도다. 다만 대대적인 생산공방을 구축할 정도로 돈이 있던 다이묘들은 오다 노부나가와 사카이이의 미요시 나가요시, 시마즈 타카히사, 오토모 소린, 모가미 요시아키 등등 정도. 다케다 신겐과 다케다 가츠요리도 철포의 중요성은 알았으며 어떻게든 철포의 숫자를 늘려야만 한다. 라는 기록도 남아있으나 마련할 돈이 없었기에 가신들에게 알아서 조달할 것을 맡겼고 그 결과 나가시노 전투에서는 철포를 200정 정도 밖에는 준비하지 못하였다.
- 오다 노부나가는 3단 철포 전략으로 전투를 대승을 이끌었다.
- - 후대의 창작. 오다 노부나가 항목 참조.
- - 정확히는 히데요시가 즉시 출동한 건 사실이지만 아케치 미츠히데는 패전 후 도주 중 농민에게 살해당했다. 전국 시대의 농민들은 땅만 파먹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농사도 지으면서 다이묘가 소집령을 내리면 즉시 응하여 전투에 참여했고, 전쟁이 끝나면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예비병 비슷한 사람들이었다. 또 농민들은 이 점을 이용해 패잔병들을 습격하여 죽이고 물건을 약탈하기도 했는데, 이것을 '낙오무사사냥(落武者狩り)' 이라고 했다. 그리고 다이묘들도 적의 수급을 가져오면 상을 주는 방식 등으로 이것을 장려하기도 했다. 거기다가 주군을 배신한 배신자였던 아케치 미츠히데가 농민에게 살해당한 건 별로 이상한 건 아니다.(이전 버전에 개정판에서 수정되었다고 되어 있었으나 확인결과 안 되어 있었다.)
- 도요토미 히데츠구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동생으로 나온다.
- - (임진왜란의 연달은 승전보로 히데요시의 야망이 점점 부풀어오르는 부분에서 나오는 내용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동생은 도요토미 히데나가이다. 히데츠구는 조카 겸 양자. 거기다가 해당 페이지에서 히데츠구를 히데나가로 바꿔도 오류다. 히데나가는 임진왜란 발발 1년전에 이미 병으로 숨진 상태였다. 개정판에선 수정되었다. 참고로 히데요시는 자기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주겠다며 히데츠구를 죽였는데, 오히려 그 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포함한 휘하 가신들까지 히데요시 사후 다 배신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 가토 기요마사를 대표로 하는 무신파는 반 도요토미 파벌이었다.
- - 가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 출신이었으며, 그를 포함한 많은 무신파 일원들은 문신파와의 대립과는 별개로 여전히 도요토미 가에 우호적이었다.
- - 실제로는 가토 기요마사 등이 자신을 암살하려 하자 위기를 느껴 도쿠가와에게 도망친 거고 도쿠가와는 그를 보호해주고 무신파와 화해시켰고 그의 거성인 사와야마 성까지 배웅해 줬다.(배웅해준 사람은 아들 유키 히데야스) 물론 이것은 자신의 인망 쌓기와 도요토미파의 분열을 위해 그렇게 한 것. 그리고 이시다 미츠나리는 화해하는 대신 오봉행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파인 자들을 모조리 죽이거나 다이묘 자리를 박탈했다.
- -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처형된 인물은 안코쿠지 에케이, 고니시 유키나가, 이시다 미츠나리, 이 3명 뿐이었고, 그 외에 자결한 인물로 구키 요시타카, 나츠카 마사이에, 오노기 시게츠구 등이 있다. 이전 문서에서는 대부분이 영지 삭감 및 전봉처분을 받았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 영지삭감으로 끝난 것은 우에스기 카게카츠, 사타케 요시노부, 모리 테루모토 3명에 불과하고 영지보존을 받은 것은 가독승계를 조건으로 한 시마즈 요시히로, 조선과의 화해를 조건으로 한 소 요시토시, 마사무네의 중개로 개역을 면한 소마 요시타네 정도에 불과하다. 우키다 히데이에, 오노데라 요시미치, 조소카베 모리치카, 사나다 마사유키, 타치바나 무네시게 등은 아예 영지가 날아갔다. (더불어 이부분은 초판에도 언급이 되어 있다.
그러니까 앞뒤가 안맞다는 말이다.) 후일 메이지 이신을 주도한 이들이 바로 이 도자마 다이묘 및 그 가신들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다수의 가신 및 무사들이 일자리를 잃고 거리로 내몰린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이후 이들 낭인과 그 자손들이 시마바라의 난에 가담하게 된다. 개정판에서는 수정되었다.
1614년, 오사카성 공격이 시작되었어. 그러나 예상 밖으로 단단한 수비력은 한 해 가까이 이듬해 4월이 지나도록 무너질 줄 몰랐지.
라는 대목이 있다. 한 해 가까이란 말이 나왔으니 적어도 봄이나 초여름 쯤 전투가 시작되었다는 말. 그리고 이듬해까지 4월까지 공선전을 하다 바깥 해자만 메우는 조건으로 물러나겠다고 하면서,
그러나 약속과는 달리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밤 사이에 재빨리 안팎의 호수를 모두 메워버렸어 이제 오사카성 공격을 가로막는 호수가 사라져 버리고 오사카성은 간단히 함락되었지
- 실제론 1614년 음력 11월(즉 가을~겨울 사이)에 전투가 시작되어 음력 12월에 화의를 맺었고, 이듬해인 1615년 음력 5월에 전투가 재개해 결국 도쿠가와 측이 승리했다.
- - 오사카 전투에 대해 일본 고등학생이 배우는 상식 이하고, 성의 해자라고 그려놓은 그림은 일본의 성에 대한 기본 지식도 1%도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 에도시대가 열리며 조선과 일본은 화해하고 조선통신사를 보내어 친선 교류가 조성되었다.
- - 그 말 자체는 틀릴 것도 없고 묘사도 적절했지만 문제는 이걸 띄운답시고 400여 년 뒤 있을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까지 끌어대며 미화를 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조일 관계가 훈훈했던 것도 사실이고 월드컵을 상호 협력 하에 성공적으로 개최한 것도 사실이지만 비약이 너무 크다. 그리고 지금의 한일 관계도 매우 나빠지고 있다. 다만, 중간부분에는 "메이지 정권이 수립될 때까지"라는 언급과 함께 일본이 한국을 잡아먹으려는 표현이 그려져있다. 다만 에도시대 이후로 메이지 정권 이전까지는 조일관계는 괜찮은 편이었다.
적어도 조청관계처럼 트러블은 없었다.조선과 에도가 다시 왕래를 시작한 해는 1607년이 맞지만, 그 당시에 체결된 조약보다는 2년 후의 기유약조가 교과서에 더욱 부각되기 때문에 교과서만 보는 사람들이 간혹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수정 전 상황에서 1607년의 국교 재개를 잘못된 것이라 쓴 문구가 있었다). 해당 조약의 정식 명칭에 대해서는 추가바람.
- 사카모토 료마의 소개에서 출신지인 도사 번(지금의 고치 현)이 큐슈 섬에 위치한 것으로 나온다.
- - 실제로는 시코쿠 섬에 소재. 다른 페이지의 지도와 전면 개정판에서는 제대로 묘사되었다.
- 보신 전쟁에서 정부군은 에도까지 진격하여 막부와 협상, 정권 투쟁을 종결지었다.
- - 보신 전쟁은 협상이 아니라 전쟁으로 종결됐다. 정부군과 막부군의 협상 이후로도 막부측 강경파는 최후까지 항전을 계속하였고, 결국 홋카이도의 하코다테까지 올라가서 반정부군인 에조 공화국과 끝까지 치열하게 싸워 이듬해인 1869년 가까스로 평정했다. ("대통령"이란 표현도 에조 공화국에서 유래되었다)
-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 합병에 소극적이었다?
- - 항목에 들어가도 알 수 있듯이 이토 히로부미 역시 최종 목적은 조선을 일본에 합병하는 것이었다. 물론 초판에도 '언젠가는 합방해야겠지만'이라는 표현은 나와있다. 개정판에서는 이 내용이 추가되었다.
- 1932년 일어난 5 15. 사건(이누카이 츠요시 당시 총리가 강경파 장교에게 암살당한 사건)이후 후임 총리대신이 된 사이토 마코토를 군부 출신이란 이유로 강경파인 양 묘사했지만 사실은 사이토도 해군출신이란 점에서 짐작되듯이 온건파에 현상유지파였다. 한편 이누카이 츠요시 역시 재임중에 만주사변으로 중일 전쟁을 시작한 인물이었다. 여하간 사이토 역시도 황군파 장교들에게는 적대시되었으며, 결국 총리 퇴임 이후 1936년 2.26 사건(쿠데타)에서 다른 대신들과 함께 암살되었다. 쿠데타는 진압되었지만 이후 정권은 육군에게 넘어가게 된다.
- 가미카제가 1944년 6월에 처음 나타났다고 서술되어 있다.
- - 실제로는 1944년 10월의 레이테 만 해전에서 처음 나타났다.
- 일본 민족은 2천여 년 동안 타민족과 섞이지 않았으며 일본인으로써의 동질성이 어느 나라보다 강하다.
- - 단일민족국가항목을 보아도 알겠지만, 전세계를 통틀어서도 혈통적인 단일민족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혈통적인 단일민족국가라는게 존재할수가 없는 것이 진짜 작정하고 근처에 아무것도 없는 태평양 한가운데있는 섬에 정착해서 극폐쇄주의적으로 살지않는 이상 피는 섞이기 마련이다. 일본의 경우에도 예로부터 가까이있던 조선과 중국을 중심으로 교류는 물론 민족의 이동이 있었던데다 전국시대에는 일본인들이 동남아시아로 이민을 갈 정도로 개방적이었다. 일본은 선주민족인 류큐인과 아이누 외에는 한반도와 중국으로 부터 온 야요이족과 아이누민족과 유사한 파생족인 조몬족과 혼혈인 야마토 민족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하나의 언어라는 일본이라는 류의 우익성향의 몰지각한 발언은 정계나 언론계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는 견해이다.앞서 기술한대로 민족국가와 관련한 민족주의에 대한 혐오감도 있으며, 소수 민족을 경시하는 태도 및 일본을 단일민족국가라 부르는 것 자체를 비판하는 견해도 매우 강하게 존재하는 편이며 실제로 단일 민족 발언에 비판을 받은 유명인사가 한 두명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한국보다 동질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는 소수 민족의 존재를 지적하여 '순수'한 의미에서 일본은 단일민족이 아니라는 주장을 전개한다(한편 인구의 대다수가 야마토 민족인 일본은 '실질적인' 의미에서의 단일민족국가로서 '순수'라는 개념을 적용하여 일본이라는 국가의 단일민족성을 부정하려는 것은 옳지 않다는 반론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제도나 국가에 대한 언급이라는 면도 있으며, 그 정당성은 논쟁의 여지가있다. 1권에서 이미 신화가 복잡한 나라는 복잡한 피로 섞였다고 했는데 이 말은 일본을 두고 한 말이다.
- 일본과 영국의 경우를 예로 들며, 섬나라의 주요 특징 중 하나로 아직도 왕이 있다는 점을 꼽았지만, 섬나라가 아닌 군주국이나 섬나라인 공화국도 많다. 저자는 비교 대상을 G7 국가로 한정지어서 그 중에는 일본과 영국만 군주국이라고 했는데, 섬나라의 특징을 설명하면서 비교대상을 국력의 크기로 필터링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G7 중 하나인 캐나다는 섬나라가 아니지만 엄연한 입헌군주제 국가라는 점에서도 오류이다.[5]
- 섬나라에서는 대의명분 하의 역성혁명이 불가능하다고 서술했지만 섬나라인 잉글랜드의 청교도 혁명과 명예혁명이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대의명분 하의 왕을 사형시키고 나라 자체를 공화국으로 바꿔버린 사례이며, 후자의 경우 정치제도 자체를 바꾸지는 않았으나 왕을 몰아내고 그 두 딸인 메리와 앤을 연달아 왕으로 모셨으며, 두 딸이 죽은 이후에는 몰아낸 왕의 사촌인 팔츠의 소피를 다음 후계자로 정했고 소피가 앤보다 2달 먼저 사망하자 소피의 아들이 즉위한다.
신하가 왕을 사형시키는 케이스는 전세계적으로도 특수한 케이스이기에 영국만 그런걸지도 모르겠다.
- 스슌천황이 소가노 우마코의 외손자였다.
- 스슌천황은 요메이 천황의 이복동생으로 쇼토쿠 태자의 숙부이다 그리고 스이코 천황의 이복오빠 이기도하다
- 미나모토 요시토모가 차남으로 표기되는데 다메모토가 차남이고 요시토모는 겐지가의 장남이다
- 미국은 전후 일본을 탈공업화해 농업국가로 만들려 했다.
탈공업화를 통한 전쟁불가국가로 만들려는 계획은 독일을 대상으로 한 모겐소 플랜(Morgenthau Plan)이라는 실행되지 않은 계획만 존재했었고 일본을 대상으로 한 계획은 미국의 대일본 전후계획에도 없었다.1
이 착각된 내용을 근거로 한국전쟁탓에 일본이 공업화됐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저 먼나라 이웃나라로 퍼져진 헛소리들중 하나일뿐이다.
- 일본, 조선, 중국을 비교하면서 이중권력이 일본의 특수성이라고 서술했는데 사실 이중권력은 어느 나라 역사에서나 존재했다. 중국의 경우 망탁조의 중 왕망을 제외한 3명은 군주를 능가하는 권력을 휘둘렀음에도 새 나라를 세우지 않았다. 조선의 경우 알려진 것과 달리 이전의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보다 왕권이 강력했다는 반론이 있지만 조선에도 정종, 단종, 명종, 순조, 헌종, 철종 등 허수아비 군주들이 있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다만 이러한 구도가 제도로 정착되었다는 점은 일본이 좀 특수하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이나 한반도의 경우, 실권자가 군주를 건드리지 않고 허수아비로 남겨두었다쳐도 대부분 당대 한정이며 막부처럼 대대로 실권만을 장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 ↑ 한국 특유의 정 문화라는 말을 끼워넣었으나 전체적인 묘사로 봤을 때 비위생적이라고 까는 내용이다.
- ↑ 비슷한 욕설로 '아호(あほ, 阿保, 바보)'와 '마느케(まぬけ, 間ぬけ, 얼빠진 놈)'라는 욕설도 있다. 도쿄 쪽 사람들은 '아호(あほ)'를, 오사카쪽 사람들은 '바카(ばか)'를 더 심한 욕으로 친다.
- ↑ 바카나, 쿠즈를 야로에 붙이면 바보새끼, 쓰레기새끼라는 큰 욕이 될수있다.
- ↑ 그래서 일본식 화승총을 타네가시마라고 말하기도 한다.
- ↑ 캐나다에서는 영국 여왕을 국가원수로 모신다고 설명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건 다소 부정확한 표현이고, 정확히 말하면 엘리자베스 2세는 캐나다의 여왕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