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나라 이웃나라/문제점/6권(이탈리아편)

먼나라 이웃나라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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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성 / 구성

1 역사

1.1 로마 왕정 및 그 이전 시대

  • 로마 이전 이탈리아에는 에트루리아와 라틴 족, 그리스인들 살고있었다.
- 당장 삼니움 전쟁 자체가 이탈리아 반도 남쪽에 있는 '삼니움'지역에 거주하던 삼니움 족과의 전투였다. 당시 이탈리아에는 앞서 말한 세 민족 외에도 수 많은 민족이 살고있었다. 심지어 북부 이탈리아 지역에는 갈리아와 같은 켈트족들이 살고 있었고, 이들 중 일부는 포에니 전쟁 이후까지도 로마에게 복속되지 않았다.
  • 건국신화에서 로물루스 레무스 형제의 아버지인 전쟁의 신 마르스는 아이들을 기를 자신이 없어 배에 강에 버렸다.
- 신화에서 로물루스 형제의 어머니 레아 실비아는 알비롱가 왕의 딸이였으나 삼촌이 아버지를 쫓아내고 왕이 된 후 실비아가 자식을 낳지 못하게 무녀로 만들었고 실비아의 출산사실을 알자 아이들을 강가에 버렸다. 물론 나중에 진실을 알게 된 형제가 쳐들어와 삼촌은 끔살 당했다.
  • 로마에게 경제 봉쇄를 가한 에트루리아의 왕은 타르퀴니우스다.
- 타르퀴니우스는 에트루리아인이긴 했지만 로마의 왕이였다(...). 로마 7왕 항목 참조. 또한 로마가 에트루리아에게 경제 봉쇄를 당하자 수입이 급감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로마는 농경국가였다. 애당초 왕정시대의 로마는 역사라기보다는 사실상 전설에 가깝지만.

1.2 로마 공화정 시대

  • 알렉산더 대왕 사후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아시리아, 이집트, 페르시아로 갈라졌다.
- 아시리아는 마케도니아는 물론이고 페르시아 이전에 멸망했던 나라이다. 또한 '페르시아' 라는 이름은 아케메네스 왕조 이후 셀레우코스 왕조아르사케스 왕조 둘 다에서 사용되지 않다가 로마 말기에 사산 왕조 들어서야 사용되었다.
그 외에 그리스=마케도니아라고 하는 부분이 계속 나오는데,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는 엄연히 다른 나라다. 당시 그리스라고 하면 마케도니아의 반기를 든 여러 폴리스들의 연합인 헬레논 연합을 의미했다.
따라서 정확하게 표현하면 마케도니아, 프톨레마이오스 소테르의 이집트, 소아시아, 이란의 셀레우코스로 분리되었다. 디아도코이 항목 참고.
  • 메시나의 지배자는 히에론이란 젊고 씩씩한 왕이었는데, 히에론 왕은 이웃나라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 이웃의 용감하고 싸움 잘하는 마메르니티 족의 청년들을 데려다 많은 봉급을 주고 메시나 시를 지키도록 고용하고 있었다.
- 히에론 2세는 메시나가 아닌 시라쿠사의 왕이었고, 마메르티니 역시 부족이 아닌 용병대장이었다. 메시나에서 그들을 고용한 적은 없으며, 그들은 시칠리아를 떠돌다가 지쳐 메시나에 머무를 것을 시민들에게 수락받은 뒤 그 기후에 반해 메시나를 점령한 것이다. 그리고 히에론 2세는 이들의 만행에 분노해 그들을 공격한 것이지 자기 나라에서 쫓겨나 그렇게 한 게 아니다. 마메르티니와 그 용병들은 메시나의 모든 성인 남자를 죽였기에 히에론이 만일 메시나에 있었다 해도 죽음은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 1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군은 카르타고군보다 해군이 약해 해전의 패배로 전쟁이 길어졌고 전쟁 말에야 카르타고 해군을 무찌르고 이길 수 있었다.
- 의외로 로마군은 해전 경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 해군과의 싸움에서 크게 밀리지 않았다. 물론 첫 전투에서는 패배했지만 까마귀의 도입으로 첫 승리를 거둔 이후 해전에서 로마군은 카르타고 해군과의 싸움에서 오히려 우위를 보이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로마는 카르타고에게 해전에서 완전히 발리지 않았다. 중간에 폭풍우를 만나 함대를 대거 손실하는 피해를 입기도 하지만, 결국 최후의 해전에서 근성으로 복구된 로마 해군이 아이가테스 해전[1] 승리하여 1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개정판에서는 이 내용이 추가되었다.[2]
  • 카르타고가 사군툼을 공격하면 로마와의 평화 협정을 깨는 것이었다.
- 카르타고가 에브로 강을 경계로 로마와 평화 조약을 맺어 조약상으로는 에브로 강 이남의 지역을 모두 정복할 수 있었고, 로마와 사군툼 간 동맹 체결을 과거 하스드루발이 인정한 게 카르타고 본국의 의견을 거치지 않은 것이라 논리적으로는 깨는 게 아니었으나 반박하기에 논리적 근거가 부족했던 로마 사절단은 평화와 전쟁 사이 양자택일만을 강요했다. 그러니 엄밀히 말해 깨지는 않았다.
  •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지구전법은 패퇴했던 로마군을 한데 모아 한니발과 결전을 벌이기 위한 시간벌기용 전술이었다.
- 2차 포에니 전쟁 당시 독재관이었던 파비우스의 지연전술이 한니발에게 연전연패해 흩어졌던 로마군을 다시 모으기 전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전투를 회피한 것이었다고 서술되어 있으며, 병력이 다시 모이자 로마군이 벌인 결전을 칸나이 전투라고 묘사했다. 실제로는 파비우스의 지연전술은 칸나이 전투와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결전을 벌일 의도도 없었다. 파비우스의 전략은 전투로는 이길 수 없는 한니발을 보급의 차단과 지속적인 소모를 통해 말려죽이기 위한 것이었으며, 칸나이 전투는 이를 이해하지 못한 로마인들이 파비우스를 해임한 후 취임한 강경파들에 의해 벌어진 전투였다.
- 이 내용을 보면 마치 한니발이 칸나이 전투에서 승리한 직후 로마를 공격하기 직전 스키피오가 카르타고 본토에 상륙해서 어쩔 수 없이 돌아간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그냥 엘리전하면 안되나? 실제로는 한니발이 카르타고로 돌아가 스키피오와 결전을 치른 자마 전투와 칸나이 전투 간에는 무려 14년의 차이가 있음에도.칸나이와 로마가 너무 멀어 도착하는데 무려 14년이 걸렸다(...)고 하면 말이 될려나? 무슨 오디세우스 실제로는 한니발이 로마 시가지 근처에 온 것은 단 한 번뿐이었으며, 이후에는 로마군의 지연 전술에 밀려 스키피오가 카르타고 본토를 공격하기 전까지 무려 10여 년 가량을 이탈리아 남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므로 로마를 '바라보며' 분통해하는 모습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그런 '이미지'를 나타낸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 3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군은 패한 카르타고인들의 용맹을 기려 생존자들을 살려주고 이주를 허락했다.
- 실제로는 분노에 가득찬 로마군이 카르타고 시내를 초토화시키고 농지에는 소금까지 뿌리며(그나마 파괴된 카르타고에 소금 뿌리라는 대사는 작중에 나온다) 생존자도 전원 노예로 팔아 버렸다. 물론 카르타고라고 해서 특별히 잔혹했던 건 아니고 항복을 거부한 도시는 근대 이전까지는 어디나 비슷한 운명을 겪긴 했다는 점에서 로마를 깔 문제는 아니다.
- 여기서 설명되는 '까마귀'는 실제로 병사들이 다른 배로 건너가기 위한 작은 교각 모양 구조물(조교(弔橋)라고 함)의 별명이다. 그림에서 묘사된 까마귀는 로마 상선에 있던 새 모양 장식물이다.
  • 카르타고 군대가 출동하여 누미디아군을 단숨에 깨뜨렸다.
- 카르타고군은 누미디아군의 횡포에 누미디아를 공격했으나 깨뜨리기는커녕 패배했다. 사실 누미디아는 이전부터 군사적으로 강국이었으며 3차 포에니 전쟁 시점에는 카르타고를 압도하는 강국이었음에도 만화에서는 갑툭튀해 로마의 약조만 믿고 카르타고를 공격한 것처럼 되어 있어 독자들 입장에서는 누미디아를 믿고 설치는 약소국으로 착각할 수 있다.
- 이 두사람은 로마 공화정이 제정으로 넘어가는 단초를 마련했을 만큼 역사적인 비중이 매우 높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은 사병화[3]의 근거를 마련해서 이후 로마의 대권을 쥐고자 하는 장수들이 정권 장악의 수단으로 훌륭하게 활용했으며, 술라의 개혁은 원로원으로 대표되는 공화정을 강화하였으나, 정작 공화정을 크게 위협할 요소인 사병화는 전혀 손대지 못했고[4] 그의 사후 부하였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책동[5]을 시작으로 오히려 공화정 자체가 정당성을 상실하는 역효과만 불러왔다.
-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나오는 내용이다. 역사적으로는 완전히 오류다.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안토니우스는 벌벌 떨면서 도망쳐 버렸을 뿐이다. 더구나 이 희곡은 시대에 맞지 않게 대포자명종(...)이 등장하는, 대표적인 시대 무시 연극으로 악명이 자자한 작품이다. 단, 카이사르 장례식 때 유언장 발표를 한 사람은 안토니우스가 유력하기는 하다.
그밖에도 실제로 카이사르는 "브루투스 너마저!" 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것도 역시 셰익스피어가 지어낸 말이다. 실제로는 그런 거 없이 찔려 죽었다. 그래서 그런지 희대의 카이사르 빠순이라 불리는 시오노 나나미도 셰익스피어의 '줄리우스 시저'를 혹평했다.
  • 안토니우스의 아내 풀비아는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 연분이 났다는 사실을 듣고 노발대발한 후 얼마 안 가 죽었다.
- 풀비아는 안토니우스 세력을 이끌고 옥타비아누스와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의 안일한 대처와 옥타비아누스의 기민한 대응으로 패배했고 풀비아는 자결했다.
- 해당 서적을 읽은 사람들로 하여금 폼페이우스를 함량미달의 젊은 장수라는 선입견을 갖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 폼페이우스는 놀라운 군사적 업적을 성취한 장수였다.[6] 그는 카이사르를 상대로도 파르살루스 회전을 치른 병크를 빼놓곤 나름 합리적으로 맞섰으며, 디라키움 공방전에서는 카이사르를 완패시키기도 하였다. 파르살루스 회전도 폼페이우스 본인의 의사로 했다기보다는 동행한 원로원의 압박으로 인해 장기전을 포기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당시 카이사르가 희대의 전술가인데다 쓸만한 카드를 워낙 많이 갖고 있어서 이겼지, 만약 그런 조건이 하나라도 안 맞았다면 승자는 폼페이우스였을 것이다.
그리고 먼나라 이웃나라의 오류 중에 가장 결정적인 것으로, 폼페이우스의 실제 나이는 카이사르보다 6살이나 많았다. 이제 이걸 보고 이탈리아 편에 나오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얼굴 작화를 다시 보라. 카이사르는 얼굴에 주름이 잡혀져 있는 반면, 폼페이우스는 옥타비아누스만큼이나 젊게 묘사되어 있다(...).

1.3 로마 제정 시대

  • 네로에 대한 악평. 그가 로마 대화재와 기독교 탄압을 주도했다.
- 공화정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 남아있던 제정 초기에 14년이나 되는 긴 재위기간을 지냈을 만큼, 실제 네로는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악정만을 일삼는 폭군은 아니였다. 물론 상당한 사치를 했고 어머니를 죽였으며 충신을 쫓아내는 등 성군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최소한 답이 없는 폭군은 절대 아니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당장 파르티아와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황제가 바로 네로였다.
그 외 로마 대화재 당시 네로는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로마가 아닌 멀리 떨어진 도시인 안티움에 있었으며, 화재 소식을 듣고 로마로 귀환해 소화작업을 직접 지도하였다. 따라서 최소한 불타는 로마를 보며 노래를 불렀다는(...) 이야기는 거짓이다. 다만 로마 대화재가 끝난 직후 민심이 흉흉해지자 기독교도들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운 것은 사실이다.
- 틀린 말이라기보다는 로마사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논조로 서술된 부분. 물론 지도자가 여럿 존재하면 서로 분열될 가능성도 높고 실제로도 그랬지만 그 이전에 이미 로마 제국은 단일 황제로는 도저히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이 기정사실화된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 부분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는데 그걸 소홀히 하고 이후의 혼란상을 부각시켜 서술하다보니 독자 입장에선 마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뻘짓을 저지른 것처럼 오해할 소지가 있다. 실제로 다중 황제 체제를 끝장낸 것으로 서술된 콘스탄티누스 1세도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실제로 로마 제국을 분할해서 통치할 계획을 세운다.
- 이건 한 마디로 동서 로마가 공식적으로 서로를 별개의 국가로 선언했다는 얘기나 마찬가진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한참 전부터 로마 제국은 단일 황제로는 도저히 다스릴 수 없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높으신 분들이 인지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따라서 디오클레티아누스 이래 다중 황제는 여러 번 존재하는 상황이었으며 따라서 동서 로마 제국의 존재도 이와 별개의 상황으로 볼 수 없다. 즉, 여러 황제가 다스렸든 아니든 동서 로마 제국은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하나의 국가였다. 정작 책에는 분명 디오클레티아누스의 4두 정치를 언급해 놨으면서 이에 대한 설명이 다른 것은 무슨 일인지... 게다가 동서 분리 이후에도 두 로마 간의 공조는 계속되었는데 책에서 말한대로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포했다면 일반적으로 두 나라는 절대 사이가 좋을 수 없다.
  • 오도아케르가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를 죽임으로서 로마 제국이 멸망했다.
- 오도아케르가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퇴위시켜서 로마 제국이 끝난 건 사실이나 황제를 죽이지는 않았다. 오도아케르가 죽인 건 로물루스의 아버지인 오레스테스다. 로물루스 본인은 자택에서 그냥 조용히 살다가 자연사했다.
  • 로마 제국은 포용력이 강한 다신교를 버리고 제국 통치를 위해 기독교를 국교로 하는 독선적인 정책을 펼치면서 반발한 타 민족들의 반발로 멸망했다.
- 먼저, 다신교라고 해서 다른 종교에 포용적이고 관대한 건 아니다. 게다가 기독교의 확산과 국교화 과정을 보면 기독교 때문에 로마가 망했다기보다는 로마가 망해 가면서 기독교가 퍼졌다는 느낌이 더 든다. 로마 제국이 망할 때쯤에는 제국 영토 대부분에 기독교가 퍼졌을 뿐만 아니라 침공해 온 게르만족조차도 종파는 다르지만 기독교를 믿고 있었다. 기독교 때문에 멸망했으면 동로마는 어떻게 1000년을 버텼지?한편 가로세로 세계사에서는 다신교 때문에 타 민족의 반발을 샀고, 기독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포용력을 강화하였다고 묘사하였다.
로마 제국의 멸망은 대개 군인 황제 시대와 같은 끝없는 내분과 게르만족의 침공, 정복전쟁의 중단으로 인한 외부수입 감소, 사회 구조 변화로 인해 국가 수입이 줄어들면서 커진 재정 적자 등의 복합적인 원인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기독교 이전의 로마 제국이 열려 있는 제국이였다고 이야기하나 로마 민족이 아니면 야만족이라 무시하는 건 공화정 때나 오현제 때나 바뀐 게 없었다. 이 내용은 구판본에서는 찾을 수 없고 에스파냐 편 이후 개정된 판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 로마가 멸망한 이유는 사치(...)와 항락(...)에 찌들어서 남하한 게르만족에게 멸망했다.
- 전반적으로 로마인 이야기스러운 이탈리아편의 절정 부분이다. 로마가 멸망한 이유는 물론 내적인 요인도 있지만, 외적인 요인이 더 크다. 게르만족은 로마의 군대 양식을 비롯한 많은 부분을 모방하여 부족 단계에서 왕국 단계로 성장하고 있었다. 느슨한 봉건제를 유지하던 동방의 파르티아도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갖춘 사산 왕조로 교체되었고, 사산왕조는 축척된 국력을 구 아케메네스 왕조의 재건을 외치며 로마로 방출하였다. 또한 로마도 디오클레티아누스나 콘스탄티누스같은 걸출한 인물들이 나와 군제를 개혁하는 등 쇄신의 노력을 하였다. 결국 상대적으로 자원이 부족했던 서로마는 멸망했지만 동로마는 개혁된 군제를 가지고 이민족의 침입을 잘 방어했으며 이는 유스티니아누스 때의 팽창으로 나타난다.

1.4 중세 시대

  •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수많은 도시국가로 갈려진 이탈리아의 역사는 이민족 침략등의 이유로 인해 기구하였다.
- 이들이 이민족의 침략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나라들이 항상 기구한 역사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에 들어섰던 국가들 중에서는 강하고 부유했던 국가들이 많았다. 예를 들자면 베네치아 공화국의 해군은 근세 까지는 최강 중 하나였고 에게 해와 아드리아 해, 이탈리아 본토에서도 수많은 속령을 만들며 '서유럽 최고의 경제대국'이라고 자평할 정도였다. 특히 캉브레 동맹과의의 전쟁 때는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 교황령을 베네치아 공화국 혼자서 상대했을 정도다. 베네치아 공화국과 경쟁했었던 제노바 공화국과 금융의 중심지였던 피렌체 공국이나 밀라노 공국 역시 만만찮은 부국이였다. 르네상스 시기 이후 급격히 발달한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이 스페인이나 프랑스같은 강대국가에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기는 시기는 중앙집권이 확립되는 16세기 이후에나 해당된다. 로마 멸망이후의 파트에도 이러한 점을 언급하였으며, 세상만사 유럽만사에서도 마찬가지로 언급된다.

1.5 근대 시대

  • 통일 당시 베네치아는 공화제식 정치체제를 시행하는 곳이였다.
- 중간에 베네토 공화국이라 하는 공화제 국가가 잠시 부활하기는 했지만, 당시 베네치아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토였기에 공화제를 실시한 역사가 있는 지방이라는 표현이면 몰라도 공화제로 통치되고 있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물론 나폴레옹에게 멸망하기 전에는 공화국이긴 했으나, 권력이 시민들에게는 제한되어 있는 편이었다. 이는 KBS <부국의 조건>에도 등장한다.

1.6 현대 시대

  • 무솔리니 축출과 2차대전 종결 이후 이탈리아 왕가가 국민들의 지탄을 받고 쫓겨났다는 서술까지는 맞게 했으나, 이로 인해 이미 죽은 움베르토 1세가 퇴위했다는 해괴한 서술을 해놨다(...).
- 1946년 투표로 퇴위한 국왕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고, 더 정확히 서술한다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어떻게든 왕정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인 움베르토 2세를 내세운 걸 적어야 한다.' 그나마 무솔리니 기용으로 욕 처먹은 왕이 누군지를 생각하면 참 답이 안 나오는 부분. 좋게 보자면, 그저 2세를 1세로 적은 오타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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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부분에서는 또 최후의 해전이 드레파나에서 벌어졌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실제 드레파나 해전은 오히려 까마귀에 골탕먹던 카르타고 해군이 이를 피하는 전술을 개발해 로마 해군을 격파한 카르타고의 승전이었다.
  2. 다만 까마귀가 없거나 까마귀가 무력화 된 상태라면 패배했다. 실제로 카르타고 해군이 까마귀를 무력화 시킨 후 로마 해군을 공격하자 승리한 적도 있다.
  3. 로마 공화정은 농민과 빈민층이 다수였던 병사들에 대해 지원을 안해준 대신, 장군이 이 병사들을 대하는 것에 대해서 법적으로 규정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병사들이 장군 개인과 독단적으로 친분을 쌓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4. 술라는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을 그대로 따라했기 때문에 사병을 해체한다는 건 술라라 해도 불가능했다.
  5. 평민회에서 만든 법이 원로원의 동의 없이도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내용으로 하는 호르텐시우스 법을 부활시키고 호민관과 연합해서 원로원을 공격하는 등 술라의 개혁을 전부 무효화해버렸다.
  6. 애초에 본작에서는 폼페이의 인기를 "꺄아! 싸인해줘요!"라는 연예인식 인기(...)로 묘사하는데, 장군의 명성은 군사적 업적에서 나오는 것이다. 걍 대중들의 인기만 많았던게 아니라 명장으로서 명망이 높았다는 소리. 게다가 "나는 용맹만 있고 멍청한 놈 취급한다"라고 카이사르에 열폭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무리 고대라고 해도 돌격대장도 아니고 사령관이 멍청하면서 힘만 세고서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