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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50 Greatest Players in National Basketball Association History NBA 역사상 위대한 선수 50인 in 1996. ESPN / 영상 | ||||||
네이트 서몬드 | 네이트 아치볼트 | 데이브 빙 | 데이비드 로빈슨 | 데이브 코웬스 | 돌프 세이즈 | 레니 윌킨스 |
래리 버드 | 로버트 패리시 | 릭 베리 | 마이클 조던 | 매직 존슨 | 모제스 말론 | 밥 페팃 |
빌 러셀 | 빌 셔먼 | 빌 커닝햄 | 빌 월튼 | 샤킬 오닐 | 샘 존스 | 스카티 피펜 |
아이재아 토마스 | 얼 먼로 | 엘빈 헤이즈 | 엘진 베일러 | 오스카 로버트슨 | 웨스 언셀드 | 윌리스 리드 |
윌트 체임벌린 | 월트 프레이저 | 제리 루카스 | 제리 웨스트 | 제임스 워디 | 조지 거빈 | 조지 마이칸 |
존 스탁턴 | 존 하블리첵 | 줄리어스 어빙 | 카림 압둘 자바 | 칼 말론 | 케빈 맥헤일 | 클라이드 드렉슬러 |
폴 아리진 | 패트릭 유잉 | 피트 마라비치 | 하킴 올라주원 | 할 그리어 | 찰스 바클리 | 밥 쿠지 |
이름 | 스코티 모리스 피펜(Scottie Maurice Pippen) |
생년월일 | 1965년 9월 25일 |
신장 | 203cm(6' 8")[1] |
체중 | 103kg |
출신학교 | 센트럴 아칸사스 대학교 |
포지션 | 스몰포워드 |
드래프트 | 1987년 1라운드 5순위 시애틀 슈퍼소닉스에 지명 |
역대 소속팀 | 시카고 불스(1987~1998 / 2003~2004) 휴스턴 로켓츠(1998~1999)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1999~2003) |
등번호 | 33번 |
수상내역 | NBA champion 6회 (1991-1993, 1996-1998) NBA All-Star 7회 (1990, 1992-1997) NBA All-Star Game MVP (1994) All-NBA First Team 3회 (1994-1996) All-NBA Second Team 2회 (1992, 1997) All-NBA Third Team 2회 (1993, 1998) NBA All-Defensive First Team 8회 (1992-1999) NBA All-Defensive Second Team 2회 (1991, 2000) NBA steals leader (1995) |
시카고 불스 영구결번 |
No. 33 |
1995년 NBA 올해의 스틸왕 | |||||
네이트 맥밀런 | → | 스카티 피펜 | → | 게리 페이튼 |
1994년 NBA 올스타 MVP | |||||
칼 말론 & 존 스탁턴 | → | 스카티 피펜 | → | 미치 리치먼드 |
목차
1 개요
스카티 피펜은 전 NBA 농구 선수이다. 현대 스몰포워드의 표본과도 같은 선수로 역대 최고의 스몰포워드 수비수이자. 포지션을 통틀어서 올타임 3손가락안에들만한 역대급수비수이며, 90년대 최고의 스몰포워드. 시카고 불스에서 조던과 함께 6번의 우승을 이뤘고 올림픽에서 드림팀의 멤버로 2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 유년기에서 고교 졸업 전까지
스카티 피펜은 아칸소 햄버그 출생으로 12형제중에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집은 말 그대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그의 아버지는 가족을 먹여살릴려고 불철주야 쉼없이 일했다. 피펜은 농구선수로써의 성공을 꿈꿨지만...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그의 키는 겨우 5피트 9인치(약 175cm). 그러다보니 운동부에서는 퇴짜맞기 일쑤. 간신히 들어간 농구부에서도 별반 두각을 나타내지도 못했다. 지금으로써는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당시에는 키도 작은데 몸무게 또한 아주 적게 나가서 거의 연필같았다고 하며 뚜렷하게 재능도 보이지를 못했다고 한다. 졸업이 다가오고 대학에서 스카웃 제의가 와야했지만 디비전1 대학은 고사하고 디비전2, 디비전3 대학도 이런 피펜을 눈여겨 보는곳이 없었다. 아오안 지못미
고등학교 코치는 급기야 자신의 대학 은사에게 피펜을 받아달라고 하소연 하기에 이르렀다. 그 대학은 바로 센트럴 아칸소 대학. NCAA가 아닌 NAIA라는, 당시에도 지금도 존재감은 엄청나게 안습인 대학리그 팀이었다.[2]
3 반전의 대학시절. 그리고 NBA입단
하지만 1학년때도 별 두각을 나타낸 것도 아니었다. 1학년때 성적이 4.3점 3.0 리바운드가 고작이었으니 말이다. 키도 6피트 1인치까지 밖에 자라지 않았다. 이대로 피펜은 대학시절도 그저 그렇고 그런 선수가 될 뻔 했으나...기가막힌 반전이 찾아왔다.
2학년때 몸무게가 8파운드나 늘어나고, 키는 6인치(약 15cm)나 자란 것이다. 이때부터 피펜은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2학년때 18.5점 9.2 리바운드. 3학년때 19.2점 9.2 리바운드. 졸업반인 4학년 시즌에는 23.6점 10.0 리바운드 4.3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하지만 자신이 속한 대학농구팀이 안습의 대학리그 소속이었기 때문에 큰 관심을 받지는 못했다. 그의 대학 감독인 돈 다이어는 NBA 단장들에게 피펜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조금씩 조금씩 입에 입소문을 타고 결국 당시 시카고 불스의 단장인 제리 크라우스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 크라우스는 피펜을 확인하고서는 피펜을 꼭 뽑아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다. 오죽그랬으면 피펜이름만 나오면 잠을 설쳤다는 카더라통신도 있었을까...[3] 근데 크라우스는 다른팀이 피펜을 가로챌까봐 두려워했고, 피펜은 워크아웃을 통해 자신이 NBA레벨의 선수임을 확인시켰다. 크라우스는 불안감이 증폭되었고, 결국 시애틀 슈퍼소닉스와 협상을 하게 되고, 피펜은 전체 5순위로 시애틀에 지명되고 바로 그날 전체 8순위로 지명된 올덴 폴리니스[4]와 트레이드 되어 불스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올덴 폴리니스와 스카티 피펜의 모자 교환. 당시에는 별것 아닌 광경이지만 이것이 불스왕조의 초석임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5]
4 시카고 불스 시절
4.1 초반 3연패의 주역 그리고 올림픽 금메달
시카고에 입단한 후 그는 조던과의 조교연습을 통해 성장해 갔다. NBA를 소개하는 루키잡지에 피펜관련 칼럼을 보면, 둘의 초창기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 조던은 당시 피펜을 그 특유의 제왕적 기질로 갈궜다고 한다. 하지만 피펜은 불만을 터트렸다거나 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오히려 필사적으로 덤볐다고. 이유는 바로 자신이 농구선수로서 성공해서 집안을 일으켜야 했기 때문. 하지만 루키시즌과 1990년 플레이오프때는 나약한 모습을 많이 보여서 비판받기도 했다. 1990년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 7차전때 알수없는 두통에 의해 10개의 슛중 9개를 놓치게 된다. 그리고 피펜 본인도 이때부터 디트로이트 배드 보이스라면 이를 갈았을듯. 당시 디트로이트의 육탄전에 가까운 수비를 가장한 가격에 시달렸고 데니스 로드먼에 의해 턱에 흉터가 생기기도 했다.
사실 1990년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배드 보이스는 지독하도록 피펜을 괴롭혔는데 사실상 조던 룰을 피펜에게도 어느 정도[6] 적용했다고 보면 된다. 그 전까지는 조던 한 명만 잡으면 되기 때문에 조던룰 [7]을 조던만 막는데 주력했다. 그러나 피펜이 점점 성장하면서 위협으로 작용하자 무지막지한 구타를 피펜에게도 적용한 것이다. 기존 버젼에는 조던은 내버려두고 피펜만 괴롭혀서 조던이 날고 기었다고 되어있었는데, 이때 피스톤즈는 조던에게도 기존에 하던 것처럼 집중마크를 했다. 다만 막을 대상이 한 명에서 두 명으로 늘어났으니 약간 헐거워진 것 뿐이다. 또한 89년 패배 이후 조던은 트레이너 팀 그로버를 고용해 벌크업을 했는데 [8] 이 점 덕분에 89시즌 보다는 피스톤즈를 상대로 약간 더(전 시즌 대비 평균 2.4점 정도 오름) 뛰어난 활약을 펼친 것이다. [9]
1991년 플레이오프에서는 그 원한이라도 되돌려주려는듯 시카고는 디트로이트를 4전전승으로 처바르고 파이널에 오르게 된다. 상대는 매직 존슨이 이끄는 로스엔젤레스 레이커스. 1차전을 패한 후 내리 4연승을 하며 우승을 하게 된다. 피펜은 1차전 패배 후 매직 존슨의 전담 수비를 맡으면서 매직을 끈질기게 괴롭히면서, 공수양면에서 대활약하게 된다. 1993년까지 3개의 우승반지를 끼우게 된다. 그리고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드림팀1)에 선발되어 금메달도 목에 걸게 된다.
4.2 구단과의 불화, 그리고 돌아온 그분, 또 한번의 3연패
그런데 피펜에게는 한가지 걸림돌이 있었다. 바로 슈퍼스타인 그에게 걸맞지 않은 형편없이 낮은 연봉 때문이었다. 그가 신인시절 맺은 계약은 7년간 2천 2백만 달러. 언뜻보면 당시에 연간 약 300만달러를 받는것 같아 보였지만, 첫해 그의 연봉은 약 72만달러 정도였다. 그의 연봉지급은 인상과 삭감폭이 너무 심했다. 그리고 1994년에 입단한 토니 쿠코치가 자신보다 더 높은 연봉을 받는다는 사실에 그는 팀에 섭섭함과 실망감을 드러냈다. [10] 실제로 피펜은 시카고를 떠날때까지 쿠코치보다 적은 연봉을 받았다. 심지어는 2차 3핏때 영입했던 론 하퍼[11]는 영입 당시 31세로 클리퍼스에서 평균 20득점대를 올리던 선수긴 했지만 무릎 부상 후유증으로 기량은 계속 쇠퇴중이었고 불스에선 토니 쿠코치에도 밀리는 3~4옵션에 불과한 수준이었음에도 피펜보다 연봉을 많이 받았다. 불만이 안쌓일래야 안쌓일수 없다. 1994년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는 박빙의 경기에서 종료시간이 0.4초가 남은 상황에서 필 잭슨 감독이 마지막 슛을 피펜이 아닌 쿠코치에게 맡기자, 그는 코트에 나가기를 거부하고 그대로 벤치의자에 앉기도 했다.[12] 당시 유튜브 동영상 결국 시카고는 컨퍼런스 세미 파이널에서 뉴욕 닉스에게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펼쳤으나 결국 탈락하고 말았다.
이때를 기점으로 94-95시즌이 시작되면서 불스도 흔들리고 피펜도 흔들렸다. 시즌 시작전 절친이자 팀 동료들이었던 호레이스 그렌트와 빌 카트라이트, 스캇 윌리엄스는 다른팀으로 이적, 존 팩슨은 은퇴하여 전력이 약화되었다. 또한 피펜은 구단이 연장계약이라든지 계약갱신을 해주길 원했지만, 구단은 "당신이 그런 낮은 연봉을 받을선수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돈이 없다."이라고 무시했고, 오히려 그를 트레이드 하려고 했었다.[13][14] 결국 피펜과 시카고 불스 구단은 돌이킬 수 없는 관계까지 가벼렀다. 그와 동시에 시카고 불스의 성적도 5할성적에서 왔다갔다 하는 등 기복이 심했다. 결국 "날 보내달라. 시카고 불스만큼 형편없는 구단이 또 있는가? 시카고 구단에게 말한다. 날 보내달라"라며 트레이드 요청을 하기에 이른다. 필 잭슨이 자서전에 언급한 내용에 따르면, 자신에게 합당한 대우를 해주는 곳이라면 아무데나 갈 모양이었던 것 같다. 로스엔젤레스 클리퍼스도 마다하지 않겠다고(...)하니...그리고 시즌기간인 1995년 1월에 샌안토니오와의 경기도중 심판판정에 항의하면서 의자를 코트에 집어던지는 등 그야말로 막 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찰나에 마이클 조던이 "I'm Back"을 외치며 돌아왔다. 조던이 돌아오면서 피펜도 잠시 구단에 대한 불만을 참았다. 조던이 피펜을 적극적으로 보호해주면서 불스도 함부로 피펜을 어쩌지 못하게 되었다. 94-95시즌은 조던과 다른 불스 팀원간의 호흡이 완성되지 못하면서 컨퍼런스 세미파이널에 올랜도 매직에 패해 탈락했지만, 95년 오프시즌동안 데니스 로드먼을 받아오면서, 전력을 강화했다. 최강의 트리오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당시 NBA최다승인 72승 기록과 두번째 3연패를 달성했다. 이 72승 기록은 쉽게 깨지지 않을 것이라 여겨졌으나 20년만인 2015-16 시즌에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 의해 73승으로 경신되게 된다.[15]
피펜도 조던이 돌아오면서 좀 더 편한 마음으로 경기에 임했고,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에 다시 국가대표로 출전하여 금메달을 목에 건다. 하지만 여전히 구단과의 갈등은 임시봉합에 불과했다. 그렇게 시카고 불스 구단과의 관계도 1998년. 시카고가 여섯번째 우승을 차지하면서, 끝나가고 있었다.
5 불스를 떠난후
1997-98시즌 이후 피펜은 사인 앤 트레이드 방식을 통해서 휴스턴 로케츠로 이적하게 된다. 계약조건은 5년간 6천7백만 달러. 드디어 원하던 천만달러의 사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팀도 나쁘지 않았다. 비록 클라이드 드렉슬러가 은퇴했지만, 하킴 올라주원이나 찰스 바클리가 건재했고, 여기에 피펜이 왔으니 이 멤버면 우승못하는게 이상한 정도의 사기 라인업이었다. 하지만 그해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로스엔젤레스 레이커스에게 1승3패로 탈락(...). 피펜은 비난의 화살을 찰스 바클리에게 돌렸다. "그는 열심히 뛰지 않는다. 그는 정말로 우승할 마음이 있었는가? 조던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휴스턴으로 가는게 아닌데...바클리 때문에 졌다."라고.[16] 실제로 바클리와 피펜은 사이가 매우 안 좋기로 유명했다.[17] 결국 이게 시발점이 되어 둘의 관계는 험악해졌고, 결국 휴스턴은 그를 다시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로 트레이드 시켰다. 당시 피펜의 네임드가 워낙 높았기 때문에 그의 샐러리를 맞추기 위해 포틀랜드는 무려 여섯명의 선수를 휴스턴에 퍼줬다.
당시 포틀랜드는 명문팀으로 가기 위해 아낌없이 현질중이었다. 포틀랜드의 구단주가 바로 빌 게이츠의 동업자이자 친구인 폴 앨런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멤버가 라쉬드 월라스, 스티브 스미스, 브라리언 그랜트, 데이먼 스타더마이어, 아르비다스 사보니스, 데틀레프 슈램프, 본지 웰스, 저메인 오닐 등등의 후덜덜한 라인업이었다. 여기에 피펜까지 가세했으니 포틀랜드는 단숨에 우승을 노릴 수 있는 팀으로 거듭났다. 비록 피펜은 나이와 부상 덕택에 기량은 다소 저하되었으나 그 특유의 센스와 강력한 수비력은 변함없었다. 정규시즌에서 무려 59승을 거두며 2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컨퍼런스 파이널에서는 레이커스와 7차전까지 가는 대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최종 7차전에서 믿기지 않는 역전패를 당하며 아쉽게 탈락하고 말았다. 재미있었던 것은 바로 이 당시 상대팀 감독이 그와 고락을 함께 했던 필 잭슨이었다는 점이다. 피펜은 후에 이때가 자신의 농구경력에서 제일 아쉬운 한해였다고.[18] 적이 별로 없다는 생각 탓인지 시카고 불스를 떠난 이후로 그후 그는 수 년간 포틀랜드의 정신적 지주로써 활약했지만, 시카고 불스만한 포스가 없었다. 더군다나 포틀랜드가 Jail Blazers[19]라는 조롱과 비판을 받았을때, 팀을 바로 잡아주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포틀랜드에서 다사다난한 4년의 시간을 보낸후 피펜은 자신의 커리어를 시작한 시카고 불스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6 친정팀으로의 복귀. 은퇴 그리고 그 후
전과 달리 구단은 그를 환영했고, 팬들도 다시 돌아온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시카고는 당시 리빌딩 중이었는데, 피펜은 젊은 선수들을 이끌어 줄 베테랑이자 선생님으로써 필요한 존재였다. 피펜도 경력을 시카고에서 마무리짓는것 외에도 불스의 구단임원으로의 진출도 꿈꾸고 있었다. 하지만 부상으로 인해 많은 경기를 결장하면서 실질적으로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결국 피펜은 03-04시즌이 끝난 후 은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은퇴 후 피펜의 행보는 거의 안습할 정도이다. 뒤늦게 번 큰 돈을 바탕으로 자가용 비행기 임대업를 시작한 것. 비행기 구입비용도 그렇지만, 인건비와 보험료, 여기에 비행기 유지비용까지 돈이 엄청나게 깨질수밖에 없었다. 결국 사업은 한큐에 말아먹고 오히려 수백만달러의 빚만 지게 되었다. 얼마나 빚독촉에 시달렸는지 43세의 나이에 코트 복귀를 선언했을때만해도, '빚 갚으려고 복귀하는거 아니냐'라는 말이 나왔고, 팬들사이에는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본인은 부정했지만. 하지만 NBA 구단은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결국 스웨덴 리그에서 한게임 뛰다 오는 알바를 하는걸로 그쳤다.
스웨덴 리그에서 알바뛰는 피펜. (2008년)
그래도 2010년 1992년 미국 올림픽 국가대표농구팀 자격과 개인자격으로 미국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감격을 누리기도 했다. 이때 한해 먼저 헌액된 조던의 축하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2010년 현재 시카고 불스에서 팀의 홍보대사로 재직중이다. 웨이드에게 팀 레전드에 대한 예우가 없다며 디스를 당한 것이 이런 결과를 이끌어냈다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현역 시절 구단과 그렇게 치고박고 싸웠으면서도 팀의 한 자리를 내어준 것에 대해 팬들은 긍정적인 반응이다.그리고 피펜의 재정은 좀 나아지겠지
그리고 2010년에 시카고 불스측에서 드디어 피펜의 동상까지 만들어주었다.# 비록 반신상이고, 유나이티드 센터 정면에 있는 마이클 조던의 동상에는 못 미치지만 그래도 피펜에 대한 예우로서는 충분한 보답이 된 듯. 그리고 지금은 홍보대사라는 이름에 걸 맞게 팀의 행사나 경기에 얼굴을 비추며 홍보트윗질에 열을 올리고 있다. 시카고 불스 홈경기에서 자주 얼굴을 비춰주니 올드팬들은 찾아 보시길.
7 플레이 스타일
현대농구에 포인트 포워드라는 개념을 창립한 선수로 평가되기도 한다. 사실 반 세대 위에 래리 버드라는 20-10-5를 밥먹듯이 찍은 대괴수가 존재했지만 버드는 어시스트보다는 득점과 리바운드에 강점을 보이는 선수였고 스타일상 전형적인 코너맨에 스트레치 포워드로 활동했기 때문. 실제로 피펜은 트라이앵글에서는 꼭지점을 맡아 주로 하이포스트(자유투 라인 주변)에 자리잡고 공을 돌리는 역할을 주로 했다. 이때문에 불스에서 1차, 2차 쓰리핏 당시 볼 소유시간이 가장 길고 어시스트가 가장 많은 선수는 피펜이었다. 피펜과 함께했던 존 팩슨, BJ 암스트롱, 론 하퍼 등의 포인트 가드들은 모두 탑에서 공격을 주도할 능력이 되는 전형적인 포인트 가드라고 보기 힘든 선수이다. 팩슨과 암스트롱은 3점슛 스페셜리스트이고 하퍼는 스윙맨이 원래 포지션이었다. 트라이앵글 시스템 특성상 1번이 탑에서 경기를 주도하지 않는 것도 있지만 그만큼 피펜의 시야와 패스웍이 출중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경기 조율을 전담했다고 할 수 있다. 특이한 점은 볼핸들링이 포인트가드 역할을 볼 정도로 매우 뛰어나지만 드리블이 매우 높다. 장신 PG들이 공통적으로 그렇긴 하지만 피펜은 그 정도가 더 심해서 속공할때는 종종 머리까지 공이 올라온다. 그럼에도 실책은 많지 않으니 신기한 노릇...
수많은 후배들이 존경하는 농구선수중 하나로 그를 꼽을 정도. 피펜은 공격뿐만 아니라 수비, 게임리딩과 볼배급 등 스몰포워드가 갖춰야 할 대부분의 스킬을 다 보유했다. 평균 이상의 리바운드 능력은 보너스. 다만 3점슛과 자유투가 약한 건 약점이었다. 이것까지 좋았으면 그야말로 우주굇수였을지도... 다만, 이런 특징때문에 그는 명백히 2인자여야만 빛나는 선수중 하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약점도 있었는데, 중장거리 슛과 자유투였다. 피펜은 커리어동안 32.6%의 3점 슛 성공률과 70.4%의 자유투 성공률로 스윙맨 기준으로는 2016년 현재는 물론이고, 당시 기준으로도 중장거리 슛이 나쁜 선수이다.[20] 정확히 말하자면 들어갈 때는 괜찮게 들어가는데 안 풀리는 날은 슛이 림을 빗나가기 일수였다. 스티브 커에 의하면 필 잭슨 감독이 피펜의 이런 모습을 두고 "sometimes a shooter"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바로 이런 점 떼문에 그가 1옵션이 되어서 공격을 주도하는데 한계가 있던 것이다(슛 시도가 많으면 많을수록 상대팀 입장에선 땡큐이니까).[21] 실제로 2차 쓰리핏 당시에 피펜이 컨디션이 좋지 않을때는 안정적인 공격력을 가진 토니 쿠코치가 때때로 (사실은 꽤 자주) 제 2옵션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조던이 있던 시기 피펜은 확실한 찬스가 아니면 슛을 던지는걸 자제했고 패스를 돌리고 팀플레이에 주력했다. 그덕에 낮은 슈팅능력에도 효율을 극대화하고 다재다능함을 갖출 수 있었다.
다재다능함, 2인자 마인드등 여러가지가 뛰어났지만 가장 뛰어났던 것은 역시 수비다. 90~91시즌 세컨드팀에 오른후, 91~92시즌부터는 8년 연속 마이클 조던과 함께 올 디펜시브 퍼스트팀에 같이 올랐다. 리그 최고의 수비수들 2명을 한꺼번에 가진 불스의 위엄(...)[22] 개인 수비만이 아니라 팀 수비를 업그레이드 시키는 선수였는데 포틀랜드와 LA 레이커스와의 플레이오프 때 적으로 마주하게 된 피펜이 교묘하게 일리걸 디펜스를 하고 있다고 필 잭슨이 주장했던 것이 대표적. 실상 2001년까지 지역방어를 금지하던 시기의 NBA에서 상대팀 에이스에 대한 방어는 공 잡기 전까지 더블팀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 득점원이 패스를 아예 받지 못하도록 하는 디나이가 매우 중요했는데 피펜은 자신의 1:1 상대를 락다운시키는 재능은 물론이거니와 디나이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복잡한 설명을 제끼고 간단히 말하면 맨투맨 외엔 할 수 없던 이 당시 자신의 수비담당을 막지 않고 공을 갖지 않은 에이스에게 달라 붙거나 일정 영역을 지속적으로 지키고서 수비를 수행하면 일리걸 디펜스가 불렸다. 다만 심판이 눈치 못챌만큼 어느 정도 선을 지키면 효과적으로 상대 에이스를 압박하면서도 일리걸 디펜스를 피해갈 수 있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닌데... 피펜은 이걸 매우 교묘하게 수행하여 팀 수비를 견고히하는 점에 있어서 그야말로 리그 최강이었다.[23][24] 때문에 상대팀의 입장에서는 피펜의 디나이가 거진 더블팀처럼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노릇인지라 천하의 개쌍놈 소리가 입에서 나올 수 밖에. 당연히 잭슨은 이걸 미치도록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걸로 십년 가까이 재미보더니만 이 사람이 이제와서
또한 피펜은 정말 적극적으로 수비를 했는데 틈만 보이면 항상 스틸을 시도했다. 때론 의도적으로 포인트 가드를 막을 때도 있었는데[25] 상대를 압박해서 하프코트조차 넘기 힘들게 만들었고, 넘어와서도 손을 쉴새없이 움직여 제대로 된 패스를 하기 힘들게 할 때도 많았다. 포스트 업 수비시에도 안쪽으로 못 들어오게 막으면서 스틸을 시도하거나 턴오버를 유발했었다. 역대 플옵 통산 스틸 1위가 그러한 것을 반증하는 수치. 사실, 스틸을 노리는 수비는 실패시 대응이 어렵다는 점에서 도박수비로 불린다. 그런데 압박+스틸을 시전하면서도 수비를 철옹성같이 유지했다는 점이야 말로 피펜의 능력.
8 역대 최고의 스몰포워드 수비수
당연하지만, 수비력으로는 스몰포워드 포지션에서 압도적인 1위이며 모든 포지션을 포함해도 빌 러셀에 버금갈만큼 역대 최고의 수비수 중 하나이다. 교묘한 일리걸 디펜스의 일화에서보듯 당연히 역대 최고의 팀 디펜스능력을 갖고있으며, 맨투맨 디펜스능력또한 스몰포워드 포지션에서 최고인 동시에 역대최고수준이라고 할 수있다. 91년 파이널에서의 매직 존슨을 락다운 수비한것이 대표적인 예. 당시 매직존슨은 31살의 최전성기였으며 서부 플옵을 승승장구하며 파이널에 올랐는데, 피펜의 맨투맨수비에 잦은 턴오버를 범했고, 경기조율에 큰 어려움을 겪으며 결국 우승을 시카고 불스에 내주었다. 그외에도 파이널및 플레이오프에서 코비 브라이언트, 레지 밀러, 클라이드 드렉슬러, 찰스 바클리, 칼 말론등 기라성같은 레전드 에이스 플레이어들을 전담 마크했을뿐만 아니라 팀 디펜스로도 만능 살림꾼 역할을 했는데 화룡점정으로 선수생활 말년에 포틀랜드시절 플레이오프에서 당시 우승팀 레이커스의 코비 브라이언트를 수비한것으로 명성을 크게 드높였는데, 이당시 코비를 상대로 락다운디펜스를 시전하는동시에 팀 수비의 앵커로서 전방위적인 수비사령관의 역할을 동시에 이루었고, 당시 천하무적 LA 레이커스에게 큰 위기를 선사했는데 이로인해 전적으로 피펜을 중심으로한 포틀랜드의 팀 디펜스의 위력을 볼 수있었다. 맨투맨및 팀디펜스의 핵으로서 최강팀을 상대로 업셋의 순간까지 간것은 비록 연이은 부상으로 운동능력을 상실한 피펜이지만 피지컬에 의존하지않는 노련한 수비만으로도 천하무적의 레이커스를 몰아부친것 자체가 그의 역대최고를 논할만한 수비력을 단적으로 증거했다고 할 수있다.
한동안 그의 수비력은 동포지션에서 비교할만한 선수조차 없으며, 굳이 스몰포워드 포지션에서 찾자면 바비 존스[26]정도인데.. 모든 포지션을 통털어서 최고의 수비수 중 한 명으로 거론되는 피펜이기에 다른 선수들과 이렇다 저렇다 비교함이 어렵다. 피펜은 팀 디펜스로는 현존하는 모든 수비기술에 능했고 맨투맨 수비역시 완벽했으며 빠른 손속으로 스틸역시 플레이오프 통산 1위에 올라와있을만큼 가로수비 세로수비 모두 통달했다. 무엇보다 그의 진가는 큰 경기에서의 클러치 디펜스가 완벽했는데..앞서 언급한 커리어 말기 포틀랜드 시절 레이커스를 상대로 한 디펜스뿐만 아니라, 전성기 시절의 클러치 디펜스는 상대적으로 스몰마켓이자 짠돌이 구단주를 보유했던 시카고불스를 조던과 함께 6번 우승시킨 원동력이었다. 그나마 2014년 이후 스몰 포워드 포지션에서 2연속 DPOY를 받은 카와이 레너드가 등장해서 피펜과 비교할만한 만능 수비수로 평가받고 있다.[27]
9 말말말
나는 득점만 하면 된다. 나머지 모든 것은 피펜이 다 알아서 하기 때문이다.
10 기타
- TNT 해설가이자 전 NBA 감독이었던 제프 반 건디가 2010-2011년도에 마이애미가 72승을 깰것이라고 한것에 대해, "제프 밴 건디는 얼간이다. 마이애미는 불스의 기록을 절대 깰 수 없다"라고 하기도 했다. #
- 2011년 동부 결승에서 마이애미 히트의 르브론 제임스가 맹활약하면서 시카고 불스를 격파하자 이에 감명(?)을 받았는지 중계 도중 자신의 옛 동료 마이클 조던을 "역대 최고의 스코어러"라고 한 반면에 제임스를 "아마도 역대 최고의 선수"(!)라고 크게 치켜세우면서 파문(?)이 일기도 했다. 이 발언으로 인해 피펜은 전방위로 까이게 되었고, 급기야 본인은 르브론의 실력을 존중해주려다 일으킨 실수였다고 해명했다. 그 후 르브론 제임스가 결승전에서 졸전을 펼쳐 흑역사가 되는 분위기다(…)
- 은퇴후에서는 슬쩍 독설가의 이미지도 있기도 한듯 보인다. 은퇴후 근황을 묻는 중 골프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아직은 서툴지만 찰스 바클리보단 잘 친다."고 해서 대놓고 찰스경을 씹기도 했다.(...) 또한 한 언론 인터뷰에서 케빈 가넷은 과대평가되었다고 평가절하했다. 팬들의 반응은 대다수가 피펜에 대해 이해할수 없다와 소수의 피펜이 옮은 말 했다로 나뉘기도 했다. 아무래도 조던이 시카고의 레전드를 넘어서 농구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지라 언사에 신중해야 하기에 자신과 시카고 불스가 보여줬던 실력이나 업적에 대한 후배들의 도전을 직접적으로 평가하기보다는 상투적인 답변으로 칭찬
디스하는 반면, 피펜은 뭐 딱히 그럴 게 없다보니 대놓고 평가해서 이래저래 어그로끄는 일도 종종 있는 편.막상 팀에 있을 때는 그렇게 나가고 싶어하더니만함께 했던 동료와 팀의 업적에 대해선 자부심과 애착을 보여주고 있다. -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때 조던과 함께 드림팀 의 일원으로 올림픽에 참가하였는데 크로아티아 전에서 훗날 자신의 동료가 되는 토니 쿠코치를 만나게 된다. 이 당시에 제리 크라우스 단장은 쿠코치 영입을 위해 그에게 피펜보다 더 많은 연봉을 제시했는데(전술했듯 피펜은 연 200만불 수준, 그시절 실력대비로 노예계약 수준의 적은 연봉을 받고 있었다.) 그것에 잔뜩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피펜은 조던과 합작해 쿠코치를 묵사발 만들기로 계획한다. 매직 존슨 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 당시 조던과 피펜은 서로 쿠코치를 맡겠다고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그래서 전반은 피펜이 후반은 조던이 쿠코치를 전담 마크했는데 당연히 결과는 쿠코치 안습(...). 쿠코치의 회상으로는 그 당시 크로아티아 동료들이 쿠코치에게 "쟤네 너 한테 왜 저럼?" 하고 물어볼 정도로 철저하게 박살냈다고 한다. 그리고 이는 시카고 불스로 이적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 딸인 타일러 피펜은 배구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키가 183cm 밖에 되지 않아 크게 대성할지는 미지수.
- 2016 NLCS 6차전에서 시카고 컵스가 월드 시리즈 진출을 확정짓는 자리에 참석했다. 7회 공수교대 때 Take Me Out to the Ballgame을 가사도 박자도 음정도 다 틀렸지만(...) 리글리 필드의 컶빠들이 일제히 피펜을 연호하는 장관을 연출했다.
- ↑ 1987년 드래프트 측정 결과 맨발 신장 6' 7.5" = 202cm
- ↑ 재밌는 것은 수년이 지나 함께 트리오를 결성했던 데니스 로드먼 또한 NAIA 출신이라는 점. 더불어 피펜은 드래프트 시절에 Comparison이 로드먼이었다.
- ↑ 실제로 그는 드래프트를 앞두고 피펜에게 "팀이 비용을 전액부담할 테니 드래프트 사전 캠프에 참석하지 말고 하와이로 2주간 휴가를 가라"고 제안했다. http://www.nba.com/bulls/history/pippenhof_smith_100812.html 참고로 크라우스는 좀 특이하게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 이런 씨알도 안 먹히는 제안을 다른 선수에게 한 적도 있는데, 피펜을 뽑은 다음 해인 88년 드래프트를 앞두고 1라운드 지명이 확실시 되는 댄 말리(썬더 댄이란 별명을 가진 백인 선수로 외곽슛과 운동능력이 뛰어났으며, 올스타에도 세번 뽑혔다)에게 "우리가 2라운드에서 지명해줄테니 다른 팀과 워크아웃을 거부하게"란 택도 없는 제안을 했다. 말리는 너무 당연하게도 "거부하겠습니다. 1라운드에 뽑혀야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는데요"라고 답했다.
- ↑ 피펜과 드래프트 동기로 지명되었지만, 공격력에 문제를 드러내며 93~98년 새크라멘토 킹스 주전 센터시절을 제외하면 저니맨으로 이팀저팀 다니다가 2004년 은퇴했다.
- ↑ 정말 아무도 몰랐다. 당시 드래프트 데이 광경을 보면 피펜의 이름이 불리는 순간 관중석에서 터져나오던 야유들은...당시 팬들 대부분의 반응을 딱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저 듣보잡은 뭐임???. 드래프트 데이 광경 #
- ↑ 피펜도 견제했지만 주된 수비 대상은 조던이었다. 당시 영상을 보면 조던이 받는 압박과 피펜이 받는 압박은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사실 피펜은 캐치 앤 슛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돌파만 견제하면 된다. 그러나 조던은 공을 잡기 전부터 찰거머리같이 따라붙는 수비로 괴롭히고 (조던은 캐치앤슛도 특급이기 때문), 잡으면 슛하지 못하도록 또 집중견제, 마지막으로 골밑으로 돌파하면 둘러싸서 두들겨 패는 것이다. 영상을 한번 보자. "두들겨 팬다"가 전혀 과장이 아니다.
- ↑ 맨투맨을 가장한 사실상의 지역방어로, 역사상 가장 더티하고 악명이 높은 수비전술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전술은 조던을 맨투맨으로 막는 선수가 조던이 공을 잡고 중앙으로 돌파해오도록 유도하면, 주변의 수비수들이 조던을 둘러싸면서 거칠게 막는 것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비슷한 전술로는 슬램덩크에서 북산이 이정환을 상대로 한 4대1 전술, 그리고 2000년대에 보스턴 셀틱스가 르브론 제임스를 상대로 한 걸 들 수 있는데, 이 전술들보다 조던룰이 더 극악했던 것은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NBA는 신체접촉에 관대했기 때문이다. 당시 영상을 보면 수비수가 핸드체크 (손으로 밀고 당기면서 공격수를 견제하는 것)을 자유롭게 하는 것과, 2000년대 농구 같으면 플래그런트 파울(상대에게 부상을 입힐 수도 있는 도를 지나친 신체접촉에 주는 파울로 플래그런트 1을 두번 받으면 퇴장, 2를 받으면 즉시 퇴장이다. 90년대에 도입)을 받을 만한 것도 그냥 파울로 넘어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즉, 한 팀이 작정하고 한 명을 거의 두들겨 패다시피 막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하면 다른 선수들은 프리가 된다. 그렇지만 1989년까지의 불스의 안습한 선수진으론 어차피 도움이 안됐기 때문에 조던만 막은 것.
- ↑ 그 전까지 조던은 근육을 늘리면 스피드가 떨어질까봐 근육트레이닝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피스톤즈의 거친 플레이에 맞서 파워를 키울 필요성이 워낙 컸고, 이에 그로버는 파워를 늘리면서도 운동능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조던을 설득했고, 실제로 90시즌 이후에도 조던의 운동능력은 리그 최정상급을 유지했다.
- ↑ 오히려 조던은 이때 피스톤즈전에서 스탯이 확 떨어졌다. 그는 플옵 1,2라운드를 통틀어 40.2점 7.2어시스트 7.2리바운드 필드골 성공률 54.4%를 기록하고 있었는데, 피스톤즈를 상대로는 32.1점 6.3어시스트 7.1리바운드로 당시 조던치고는 별로 높지 않은 스탯을 기록했다. 특히 득점은 8점이나 떨어지고 슛 성공률도 8% 가까이 떨어졌다. 조던룰의 효과...
- ↑ 그 전부터 제리 크라우즈 단장은 계속해서 쿠코치를 찬양하고 영입의 의지를 보이는 등 많은 관심을 보내왔다. 그것을 빌미로 쿠코치는 올림픽에서 성질이 있는데로 난 피펜과 조던 에게 정말 안습하게 쳐발리게 된다.
- ↑ 94시즌을 피트 마이어스란 평범한 SG로 떼워야했던 불스가 94-95시즌을 앞두고 야심차게 단행한 영입이었다. 실제로 하퍼는 당시 클리퍼스에서 에이스 대니 매닝에 이은 2옵션이었음에도 평균 20점을 올릴 정도였고, 비록 올스타에는 선정된 적이 없지만 올스타급 실력을 가진 선수로 널리 인정받고 있었다. 94시즌에는 4백만 달러를 받으며 “리그에서 가장 돈을 많이 받는 슈팅가드”였던 적도 있다. 그러나 부상 후유증과 트라이앵글 오펜스 적응 실패로 인해 주득점원으로 활약하진 못했고, 불스 이적 직후부터 득점이 거의 반토막난 9점 수준이 된다. 또한 마이클 조던이 복귀하면서 조던과 공격범위가 겹치면서 외곽슛도 없는 하퍼는 더욱 설 자리를 일게 된다. 이후 하퍼는 득점력을 거의 포기하고 수비 스페셜리스트로 변신하게 된다. 하퍼는 원래부터 긴 팔과 탁월한 운동능력으로 맨투맨 매치업에서 제법 실력을 발휘하긴 했지만 (클리블랜드 시절에는 크렉 일로와 번갈아가며 조던을 막았는데 전체적인 수비력은 일로가 위였지만, 조던과 거의 대등한 운동능력을 가졌던 하퍼의 수비를 조던이 더 힘들어했다. 물론 둘 다 털렸지만…) 본격적으로 수비가 부각된 건 불스 시절부터였다.
- ↑ 결국 쿠코치가 이 슛을 성공시키면서 피펜은 전국구적인 비난을 받게된다. 93-94시즌동안 조던없이 안된다며, 피펜과 불스에 대한 비관적인 시선을 그때 피펜은 올스타전 MVP와 시카고 불스 55승이라는 성적표로 조던 없이도 잘할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의 이런 행동은 더 비난받았다. 게다가 냉정하게 판단하면 잭슨의 결정이 백번 옳았다. 피펜은 좋은 득점력의 소유자고 슛거리도 길었지만 안정적으로 슛을 넣는 선수는 아니었다. 파이널 한 경기에 삼점슛 7개를 넣는 등 터질때는 터지지만 슛 한방이 필요할때 맡길만한 선수는 아니란 말. 99년에 시카고를 떠난 이후에 포틀랜드에서 리더 역할을 맡을 때도 마지막 슛을 전담하는 선수는 아니었다. 반대로 쿠코치는 피펜보다 훨씬 뛰어난 슈터였으며 NBA 기준으로는 루키였지만 이미 유럽에서 8년이나 (17세에 데뷔) 뛴 베테랑이었다. 게다가 오랫동안 에이스로 뛰어왔기 때문에 스스로 득점기회를 만들거나, 승부가 걸린 상황에서 해결하는 것에도 익숙했다. 오히려 피펜의 자존심을 세워주려고 그에게 마지막 슛을 맡기는게 적절치 못한 처사였을 것이다.
- ↑ 한국에 발간된 NBA 신화라는 책에 필 잭슨 관련 이야기를 따르면, 당시 시애틀 슈퍼소닉스가 숀 캠프와 리키 피어스를 매물로 트레이드를 요청해왔었다고 한다.
- ↑ 사실 팬들 사이에서 이 부분은 "짠돌이 크라우스가 돈 몇푼 아끼려고 피펜을 헌신짝 버리듯 했다"라는 평이 지배적이지만, 따지고 보면 다른 이유도 있다. 바로 피펜은 1인자로서 어느 정도 한계가 있는 선수라는 점이다. 피펜은 전성기 당시 평균 22점을 득점하던 수준급 득점원이었지만 소위 말하는 go-to move(에이스로서 안정적으로 득점해줄 수 있는 확실한 공격옵션)이 없었다. 체격과 힘이 괜찮아 작은 상대를 포스트업해서 밀어낼 수도 있었지만 조던이나 매직존슨같은 마무리 능력은 없었으며, 슛거리는 길었지만 기복이 심하고 자유투성공률이 말년 전까지는 6할대에 그칠 정도로 슈팅력도 별로였다. 이로 인해 닉스와의 플레이오프에서는 피펜을 제치고 루키 토니 쿠코치에게 결승슛을 맡겨야 했던 것이다. 공격에서 피펜의 가장 큰 강점은 속공에서 마무리하는 능력이었는데, 하프코트 오펜스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반면 숀 켐프는 96파이널에서 로드맨이 그에게 달라붙었음에도 오히려 시즌/플옵보다 높은 평균득점을 기록할 정도로 좋은 득점력을 갖고 있었다. 또한 켐프가 피펜보다 네살이나 어린 점도 컸다. 물론 전체적인 기량에서는 피펜이 켐프보다 나으면 나았지 결코 못하지 않다. 커리어 자체를 보면 당연히 피펜이 월등하다. 그러나 당시 시카고 불스는 속공도 가능했지만 기본적으로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주축으로 한 하프코트 오펜스 팀이었는데, 이런 팀에서는 켐프처럼 확실한 공격옵션이 있는 편이 유리했다. 반면 시애틀은 리그 최고의 속공 팀이자 최고의 PG수비수인 게리 페이튼이 버티고 있는 강력한 수비팀이었기 때문에 피펜이 2옵션으로 페이튼을 받쳐준다면 활개를 칠 수 있었다. 결국 두 팀다 윈윈 트래이드가 될 수 있었다는 말. 물론 조던이 복귀하면서 피펜은 "리그 최고의 2인자" 자리로 복귀하고 불스는 다시 역사를 만든다.
- ↑ 그러나 워리어스는 우승을 하지못하여 여러모로 불스와 비교되고 있다.
- ↑ ESPN Sports Century에서 바클리가 한 말에 따르면 인터뷰 직후 조던이 전화해 "그런말 한적 없어. 스카티가 한 말은 bs(bullshit:x소리)야"라고 했다고 한다. 진실이야 당사자들만 알겠지만 조던이 사적으로는 그리 친하지도 않은 피펜에게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는 바클리를 욕했을까? 조던과 바클리는 지금도 친하게 지내지만 피펜과는 둘다 사적인 교류가 없다.
- ↑ 정작 바클리는 휴스턴을 떠나서 은퇴를 하려다 피펜과 계약한다는 소식을 듣고, "피펜이 온다면야"하면서 연봉 150만 달러의 헐값에 휴스턴과의 계약을 갱신했다. 바클리가 우승에 얼마나 목이 말라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 ↑ 아무래도 시카고 시절에는 조던의 사이드킥이었기 때문에 자신만의 가치를 인정받기가 힘들었고, 때문에 피펜은 신진강호의 기둥으로 활약해서 팀을 정상으로 이끌어 자신만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시기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 당시 레이커스를 상대로 1승 3패로 뒤진 상황에서 5, 6차전을 잇달아 잡아내 동률을 만들었고, 최종 7차전 또한 4쿼터 한때 15점차의 리드로 파이널 진출을 목전에 두고 있었으나 정말 귀신에 홀린듯한 역전패를 당하고 말았으니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을 듯.
- ↑ 당시 포틀랜드는 워낙 주축선수들이 막장짓을 해대는 바람에 홈관중들마저도 팀을 외면하는 상태였다. 보이콧 움직임까지 보였으니...
- ↑ 해당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3점 슛은 40%, 자유투는 75%가 효율성의 마지노선이다. 오죽하면 자유투로 이런 굴욕 영상도...
- ↑ 앙숙인 아이재아 토마스도 드림팀 다큐에서 본인이 합류하는 거를 거부한 걸 보고 조던이나 버드가 그러면 납득을 할텐데 너 따위가? 라는 반응을 보면...
- ↑ 거기다 2차 쓰리핏 땐 로드먼까지 세명이었다. 이건 뭐 벽이 따로 없을 정도.
- ↑ 불스는 여기에 수비왕까지 먹었던 마이클 조던이 미친듯이 1대 1 수비로 상대 에이스를 압살했고, 피펜의 지능적인 디나이로 상대의 패스흐름을 턱턱 막아제끼고, 호레이스 그랜트, 데니스 로드맨의 강력한 대인마크로 상대 빅맨을 지치게 만들며 빌 카트라이트, 룩 롱리, 윌 퍼듀 같은 별거 아니어보이는 센터들도 인간 방패 역할 정도는 무난하게 해냈다. 그 막강한 디펜스 때문에 상대팀이 압살을 당할 수 밖에 없었을 정도.
- ↑ 다만, 2차 스리핏 시절부터는 조던의 나이와 체력을 고려해 최대한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서 상대방 스윙맨 에이스에 대한 마크는 주로 피펜이 담당하게 되었다.
- ↑ 6피트 8인치의 신장으로 스몰포워드로서는 평균 이상의 신장인데도 자기보다 훨씬 작고 빠른 포인트가드들을 수비할 때 별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는 것도 피펜의 위엄을 보여주는 한 단면. 사진과 같이 비슷한 시기 활동했던 NBA 최단신 타이론 보그스도 마크한 적이 있었는데 해설자가 2미터가 넘는 피펜이 170도 안되는 보그스보다도 자세가 낮다며 감탄했던 적도 있다.
- ↑ 바비 존스는 스몰포워드 역대 수비수에서 피펜에 이어 2위로 많이 거론되는 선수이다. 6-9의 3번으로는 큰 키를바탕으로한 스몰포워드겸 파워포워드였는데 워낙 트랜지션 디펜스에 탁월해서 별명이 '국방장관'이었다
- ↑ 이는 2014년부터 바뀐 디펜시브팀 및 수비왕 선정방식의 변경에 따른것이 크다. 이전에는 수비왕을 기자단및 언론에서, 디펜시브팀을 감독들이 선정했지만 위에언급된 2014시즌부터는 기존의 수비왕및 디펜시브팀도 전부 기자및 언론에서 투표하는방식으로 바뀌었다. 어떤방식이 더 객관적이고 검증되었다는것은 논란이 될 수 있지만 한가지 확실한것은 수비왕을 3번연속으로 받은 드와이트 하워드가 수비왕을 각각 1번, 2번씩 수상했던 데이비드 로빈슨, 하킴 올라주원보다 더 수비력이 뛰어나다고 말하는 전문가는 단 1명도 없다. 수비왕이 전부라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 물론 수비왕이 단 한 번도 없는 것과 수비왕이 존재하는 선수들의 차이는 엄연히 있는것이 사실이다.
- ↑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지 조던은 피펜에 이은 제2볼핸들러이다. 보조리딩을 했으며 팀내, 그리고 리그 최고의 맨투맨 수비수이자 가드로선 최상급의 리바운더였다. 89시즌에눈 시즌 중반부터 포인트가드를 맡으면서 2010년 전후의 르브론이 보여준 것 이상의 1차스탯인 32점 8리바운드 8어시스트를 기록하고 피펜도 못 탄 올해의 수비수를 타는 등 피펜만큼 다재다능한 선수. 2차 3연패 당시에 불스엔 리딩이 좋은 포인트가드가 없었기 때문에 필 잭슨은 사실상 승부가 갈린 경기가 아니면 거의 항상 조던이나 피펜 중 한 명을 뛰게 했다. 그래야 경기조립이 되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