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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가요대상 대상 | ||||||
임창정 그때 또다시 (1997) | → | H.O.T. 빛 (1998) | → | 조성모 For Your Soul (1999) | ||
MBC 가요대상 대상 | ||||||
김건모 스피드 (1996) | → | H.O.T. 행복 (1997) | → | H.O.T., 김종환 빛 사랑을 위하여 (1998) | ||
H.O.T. 행복 (1997) | → | H.O.T., 김종환 빛 사랑을 위하여 (1998) | → | 조성모, 송대관 For Your Soul 네 박자 (1999) | ||
SBS 가요대상 대상 | ||||||
클론 꿍따리 샤바라 (1996) | → | H.O.T. 행복 (1997) | → | H.O.T. 빛 (1998) | ||
H.O.T. 행복 (1997) | H.O.T. 빛 (1998) | → | 핑클 영원한 사랑 (1999) |
서울가요대상 대상 | |||||
클론 꿍따리 샤바라 (1996) | → | H.O.T. We are the future (1997) | → | 젝스키스, H.O.T. 커플 빛 (1998) | |
H.O.T. We are the future (1997) | → | 젝스키스, H.O.T. 커플 빛 (1998) | → | 조성모, 핑클 For your soul 영원한 사랑 (1999) |
50 음반 대상 | ||||
김건모 <스피드> (1996) | → | H.O.T. <행복> (1997) | → | 김종환 <사랑을 위하여> (1998) |
목차
1 개요
이젠 전설이 된 1990년대 후반,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1세대 아이돌 그룹의 대표주자.
현재 대한민국의 모든 아이돌 그룹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최초의 완성형 아이돌 그룹.
아이돌 왕국이라 불리는 SM엔터테인먼트 전설의 시작
그리고 아이돌 평균 학력이 가장 높은 그룹[1]
SM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되었던 5인조 남성 아이돌 보이밴드다. 1996년 9월 7일에 데뷔, 2001년 2월에 해체했다. 1990년대 후반을 호령한 전설의 아이돌 그룹이고 1세대 한류 스타이다. 2010년대에는 사람들의 다양한 취향에 맞춰 다양한 컨셉의 아이돌 그룹들이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1990년대에는 그런게 없었고 거의 H.O.T.로 단결할 수 있을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그나마 유일한 라이벌로 젝스키스가 활동했지만 실질적인 인기는 1990년대 후반을 호령한 H.O.T.의 적이 될 수 없을 정도로 독보적이었다. H.O.T.의 대성공으로 가요계에는 아이돌 그룹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현재는 대중음악을 다루는 프로그램에 아이돌 그룹들이 거의 점령하게 되었다. 2010년대는 아이돌 전성시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가요계는 크게 변화했다. 1990년대 후반 대중가요계의 판도를 바꾸는 변화의 시초격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이돌 그룹이다. [2]
서태지와 아이들이 아이돌 그룹의 태동으로 본다면 H.O.T는 아이돌 그룹의 정의를 완성한 그룹이다. 현재 거의 모든 아이돌 그룹들이 담당하고 있는 구성들 메인보컬(강타), 서브보컬(문희준, 토니안), 래퍼(장우혁) 등의 구성이나 성격적/음악적 설정들인 카리스마리더(문희준), 대표비쥬얼(강타), 귀여운훈남(토니안), 남성다움(장우혁), 막내(이재원) 등 현재 아이돌 그룹의 멤버들에게 등장하는 기믹과 컨셉적 역할들을 최초로 완벽히 구현한 선배 아이돌 그룹이다. 실제로 2집 수록곡 Go!H.O.T.! 의 가사에서 멤버들의 이미지를 위트 가이 희준, 섹시 가이 강타, 무드 가이 토니, 와일드 가이 우혁, 샤이 가이 재원이라고 칭했으며 1집 캔디 때부터 멤버 각자에게 고유 번호 [3] 와 고유 컬러 [4] 를 부여했다. H.O.T.의 아이돌 그룹의 구성은 나중에 거의 모든 아이돌 그룹에 영향을 주었고 H.O.T.가 데뷔하고 바로 데뷔한 젝스키스, NRG, 신화, god 등 다른 1세대 남성 아이돌 그룹들도 H.O.T.의 영향을 받았다. 대표적인 예로 당시 아이돌 업계에서 나름 선구자였던 DSP 이호연 사장은 H.O.T.의 성공을 보고 급하게 듀엣에서 6인조 그룹으로 노선을 수정해 젝스키스를 데뷔시켰다. [5]
2 그룹명
이 그룹의 정확한 이름은 'H.O.T.'로 표현해야 좋은말로 할때 반드시 쩜을 세개 다 찍어야 한다. High-five Of Teenagers의 약자며 '10대들의 승리'를 의미한다. 앨범 자켓에 확인해보면 Teenagers 하고 확연히 표시되어 있음에도 복수가 아닌 Teenager 단수로 사용하는 이들이 간혹 있다.
god와 H.O.T.가 함께 출연한 방송에서 김태우의 말로는 원어민인 박준형이 H.O.T의 뜻을 듣고 웃었다는 후문이 있다.
초창기에는 너도나도 '핫'으로 읽는 통에 난감했던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첫 데뷔 무대에서 소개 멘트 혜수언니이이이이ㅠㅠ도 H.O.T.가 아닌 '핫'. 당시 아이돌 문화를 제대로 아느냐 모르느냐는 H.O.T.를 어떻게 읽느냐로 판단되기도 했다. 약칭도 있는데 에쵸티 혹은 쵸티.
3 멤버
H.O.T. | |||||
문희준 | 장우혁 | 토니 안 | 강타 | 이재원 |
- 문희준(1978년 3월 14일생) : 리더 및 서브 보컬, 서브 래퍼, 안무 담당, 리드 댄서
예능 담당 - 장우혁(1978년 5월 8일생) [6] : 메인 래퍼, 안무 담당, 메인 댄서
짐승랩, 샤우팅 랩 담당 - 토니 안(1978년 6월 7일생) : 서브 보컬, 서브 래퍼
영어랩 담당 - 강타(1979년 10월 10일생) : 메인 보컬
당시 비주얼 담당 - 이재원(1980년 4월 5일생) : 리드 래퍼, 서브 댄서
막내 담당
1세대 아이돌 치고는 특이하게도, 2016년 기준으로도 기혼자가 전무한 그룹이다. 같은 1세대인 젝스키스나 god, NRG, SES, 핑클, 베이비복스 멤버들 중 각각 최소 한명 이상은 결혼식을 올렸던 걸 생각해보면 특이한 케이스. 신화도 있잖아. SM의 저주?
처음 결성 당시에는 졸업 시스템을 적용해서, 20세가 되면 탈퇴하고 새 멤버를 받는 식으로 운영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생각 외로 큰 인기를 끌면서 그냥 그대로 가기로 했다고. SM은 이후 슈퍼주니어에서 졸업 시스템을 계획했지만 역시나 팬들의 큰 반발로 무산되었다.
참고로 원빈이 데뷔전에 SM에 오디션을 본 적이 있었는데, 당시 이수만이 원하던 컨셉과는 이미지가 안맞아서 탈락했다고 한다. 만약 붙었다면 십중팔구 에쵸티 멤버가 되었을 거라고. 김종민 역시 이 당시에 오디션을 봤었는데 백댄서부터 시작하라는 말을듣고 탈락인 줄 알고 스스로 그만뒀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문희준이 밝히기로 그게 합격통보였다고(...). 만약 김종민이 그대로 남았다면 김종민 역시 에쵸티 멤버가 되었을 확률이 높다. 이외에 개리, 앤디, 황대균, 장용진[7] 등등 여러 후보가 있었다. [8]
4 이력
H.O.T.는 신화를 데뷔시키기 전에 SM에서 실험 격으로 데뷔시킨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허나 H.O.T.가 대박이 터지면서 반대로 신화는 H.O.T.의 후발주자가 된다. 1996년 9월 7일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에서 첫 데뷔하여 1집 타이틀곡인 학교폭력을 주제로 한 갱스터 랩 '전사의 후예'는 잠깐 주목을 받았으나 [9] 그 뒤 이 곡이 사이프레스 힐의 표절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일찍 활동을 접었지만 후속곡인 '캔디'가 대박이 나면서 90년대 후반을 대표하는 아이돌 그룹으로 자리잡았다.
4.1 해체
2001년 2월 27일, 마지막 해체 당시 라이브 공연 및 KBS 뉴스 방영장면이다.
해체 원인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발표도 없고 관련인물들의 말도 다 다른지라 정확한 정보는 없다. 알려진것은 문희준과 강타를 제외한 멤버, 장우혁, 토니 안, 이재원이 일방적인 방출통보를 받고 해체되었다는 것 정도. 멤버간 각각 상이한 계약 문제로 인해 일부 멤버가 반발하기 시작하고 멤버들간 불화가 생긴것이 원인이라는 소리도 있다.
4.2 개인 활동 및 이슈
문희준은 그룹 해체 이후 SM 엔터테인먼트에 남아 파란과 논란의(…) 록커 생활을 하였다. 전국민이 안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10] 이후 SM을 떠나 PS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하여 활동하다 2005년 현역으로 군에 입대. 제대 후에는 싸이더스 HQ로 소속사를 옮겨 연예생활을 하고 있었다가 2012년에 라인엔터테인먼트로 옮겼었다. 그 뒤 2015년 1월, 코엔스타즈와 계약했다.
강타는 H.O.T. 5집 후속곡 활동 중 음주운전 뺑소니로 걸려 면허가 취소되었다. 이로인해 H.O.T. 는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H.O.T.의 마지막 활동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게 한 강타를 원망하는 팬들이 아직도 있다. H.O.T. 해체 이후에는 문희준과 함께 SM 엔터테인먼트에 잔류하여 솔로 앨범을 발매하였으며, <북극성> 등의 히트곡을 발표하며 아시아 활동에 매진하던 중 SM의 이사가 되었다. 역시 현역으로 군복무를 마쳤고 현재는 SM에서 고위 임원직을 겸임하고 있다. 중국 위주로 활동하는데, 중국에서는 본명인 안칠현으로 활동 중이다.
장우혁과 토니안, 이재원은 해체 이후 SM에서 나와 2001년에 프로젝트 그룹인 jtL을 결성하여 2003년까지 활동하다 이후로는 솔로의 길을 걷는다.
장우혁은 솔로로 전향하여 활동하다 턱관절 문제로 인해 멤버들 중 유일하게 공익근무 후 제대했다. 원래도 평발 때문에 공익판정이었으나, 신체검사를 받기 조금 전에 모 높으신 분 아들의 병역문제가 터져 신검기준이 대폭 강화된 탓에 현역판정을 받았다는 안습한 스토리가 있지만 결국 공익판정. 공익활동 때문에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제대후에는 2011년 6월 솔로앨범을 내고 활동을 재개했으나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한국보단 중국에서 더 많은 활동을 하고있는 것으로 보인다.
토니안 역시 솔로로 전향하여 음반을 내고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활동하다가 TN 엔터테인먼트, 스쿨룩스 등의 사업이 성공하여 많은돈을 벌었다. 미국 영주권을 포기하고 군대에 현역으로 입대하여 복무를 마쳤다. 제대 이후 무릎팍도사에서 말하길 당시에 심각한 우울증으로 인해 약을 처방받아 먹었는데 군생활로 우울증을 극복했다고 한다. 2008년에는 스매시라는 보이그룹을 제작, 같이 활동하기도 했다. 2013년 초 걸스데이의 혜리랑 공개연애를 하며 화제가 됐으나 몇개월만에 결별했다. 2013년 가을 불법도박으로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이재원도 솔로 활동을 하며 음반을 냈다. 지망생에 대한 성폭행 의혹 사건으로 준비중이던 정규 2집마저 급버로우, 사건은 성폭행 재판 중 합의로 마무리. 다른 성폭행범이 일행에 있었는데 여자쪽에서 일방적인 오해를 하였다고 한다. 참조 이후 바로 군대에 현역으로 입대하게 된다. 이후 2011년 3월 제대하여 중국과 아시아권을 위주로 활동하고 있다. 이재원이 제대할 당시 H.O.T. 멤버들이 막내의 제대를 축하해주기 위해 한자리에 모여 화제가 됐었다.
멤버들이 죄다 중국에서 활동하는것 같은건 착각이다
4.3 재결합 가능성
2010년 7월 7일 무릎팍도사에 출연한 강타의 말에 따르면, 그룹이 해체된 것은 멤버 간에 계약과 관련하여 서로 오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오해는 1년 정도 후에 각자 다 풀었다고 한다. 문희준도 라스에 출연했을때, 그때 당시 3대 2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인정.
SM에서 나간 세 멤버들은 'jtL'이라는 프로젝트 그룹을 결성하고 활동을 시작. 1집 53만장을 기록하여 2001년 음반 판매량 10위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SM측의 보이콧 등 으로 인해 제대로 된 방송은커녕 시상식조차 참가하지 못했다. 자세한 것은 연제협 MBC 출연 거부 사태 참고.
이외에도 1.5집과 2집은 10만장 이상을 기록하였다.
2010년 6월 24일 현 SM 엔터테인먼트 이사인 강타가 재결합을 천명하겠다는 보도가 있었으나 오보임이 밝혀졌다. 그날 기자의 이메일, 전화, 팩스는 모두 불통이 되었다고. 다만 멤버들과 이야기중에 있다고는 한다.
핫젝갓알지 은희상담소에서 재결합과 관련된 이야기에서 문희준이 직접 밝힌 바로는 해체 이후 재결합 이야기가 몇번 나왔었지만 전설은 전설로 남기자는 데에 멤버들이 모두 동의를 했고 각자의 길을 가기로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후 10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면 과연 전설로 남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한다고...어쨌든 만약 재결합을 한다고 하면 꼭 예전처럼 아이돌 활동을 다시 한다는 의미가 아닌 콘서트나 미니 앨범 발매 식으로 활동하는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실제로 핑클도 각자 다른 기획사임에도 디지털 싱글을 발매한 적이 있다. 토니 안도 엄연히 중견급 기획사 사장이고, 문희준은 이휘재, 이경규, 이경실 등이 소속돼 있는 코엔스타즈 소속이다. [11] 이재원 역시 라디오 스타에서 재결합에 대해 밝힌적이 있는데 이재원이 제대하던 날 멤버들 전원이 모였을 때 재결합을 밝힐 계획이었지만 여러가지 사정으로 결국 불발되었다고 한다.
2014년 11월 무한도전 토토가에서 H.O.T. 섭외를 위해 강타가 출연했는데, [12] 강타는 H.O.T. 재결합을 조심스럽게 보고 있는 시각이 비춰졌다. 결국 토토가 출연은 불발되었다. [13] 하지만 토토가 본편에서 무한도전 멤버들이 H.O.T. 코스프레를 하였고 이후 토토가에 출연했으면 싶은 가수 설문조사에서 H.O.T.가 1위로 뽑히기도 하였다.
꾸준히 제기되던 재결합설이 2016년 데뷔 20주년을 맞아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특히 2016년 4월에 H.O.T 활동 당시 라이벌이었던 젝스키스가 무한도전 토토가2 - 젝스키스에서 재결합한 것을 기점으로, H.O.T 재결합에 대한 관심과 기대도 증가하게 된다. 게다가 토토가2 - 젝스키스 말미에서 유재석과 하하가 토토가3를 암시하는 장면이 나오면서 최유력 후보로 뽑힌 상황이고, 멤버들과 이수만 프로듀서가 비밀리에 만남을 가졌다는 기사가 돌기도 했다.
이에 대해 멤버들은 노력중이나 구체적으로 정해진 것은 없다는 답변을 공통적으로 하고 있다.
5 스타일
간단하게 보는 주요 활동곡들
활동 당시 모습은
- 타이틀곡은 사회비판 가사와 강렬한 SMP가 인상적인
반항적인곡으로 활동
- 2. 후속곡은 밝고 귀여운 곡 or 얌전한
가창력발라드곡
이런 설정이 반복된다. 후배 가수들도 접하게되는 SM의 전형적인 설정 이지만 에쵸티 4집은 그런거 없다. 이다.
4집의 타이틀곡인 아이야는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사건의 추모곡으로 인기를 얻었다. [14] [15] 아이야 뿐만 아니라 투지, 환희 등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H.O.T.의 역사 중에서 사실상 대중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져 있고 제일 인기가 많았던 시기 [16]
6 평가
6.1 실력
1집과 2집에서 강타에게 비중이 치중되어 사실상 1보컬 4래퍼 체제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2집부터 서브 보컬인 문희준과 토니 안의 보컬비중이 꽤 상승하여 3집 때부턴 두사람이 강타보다 더 많은 파트를 맡기도 했다. 토니 안은 캔디에서 많은 클럽 H.O.T. 회원들이 그렇게도 단지라는 사람을 극혐했다는 킬링파트인 후렴구를 불렀고, 문희준 역시 캔디에서는 랩 없이 보컬만 했으며 사실 이 노래는 장우혁만 랩한다. 이재원도 짧게나마 노래만 한다 행복, 빛 등의 노래에서도 그의 보컬을 들을 수 있다. 사실상 이 두 사람이 다른 멤버에 비해 압도적인 파트를 가졌던 노래는 4집 후속곡 투지인데 이 노래는 문희준으로 시작해서 토니 안으로 끝이 난다. 투지에서는 그 강타가 파트가 줄어 상당히 오랜만에 랩을 할 정도였다.
H.O.T.의 곡들이 강렬한 SMP 곡들이 많다보니 활동 중엔 대부분 립싱크로 대체해버렸다.(...) [17] 그렇지만 의외로 콘서트 영상이나 라이브 영상들을 찾아보면 나름 안정적인 라이브를 하는 영상을 찾을 수가 있다. 물론 초창기엔 프로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라이브 영상들이 있는데 지금과 같은 트레이닝 시스템이 자리잡고 있지 않았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멤버들은 훗날 데뷔 전 제대로 된 트레이닝을 받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이들은 안무도 본인들이 직접 짰다고 한다. 1집에 비해 2집과 3집의 라이브 영상을 비교해 보면 급성장한 실력들을 볼 수 있고 SMP가 아닌 댄스, 발라드의 후속곡들은 라이브로 활동했다. 해체할 때쯤인 1999년 2000년경 4, 5집에서는 멤버들 개개인의 실력이 어느정도 올라왔다. 안 그랬으면 네번이나 단독 콘서트를 열지도 않았을거고, 콘서트들에선 대부분 립싱크 없이 라이브로 소화했다. 단 이 부분은 멤버들에게 알맞은 부분을 배분해주는 프로듀싱 능력도 절묘했다는 점.
6.2 작사/작곡
3집 때부터 멤버 전원이 작곡/작사과 프로듀싱에 직접 참여했고 뮤지션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스스로 노력했다. 3집의 후속곡인 빛은 강타가 작사/작곡한 노래고 5집 타이틀곡인 아웃사이드 캐슬은 문희준이 작사/작곡한 곡이다. [18] 참고로 1집과 2집 때 몇몇 곡들이 표절 논란에 휩싸여서 다음 곡들은 표절 시비를 줄이기 위해서 멤버들이 작사/작곡을 하게 되었다. 특히 5집은 멤버들만 작사/작곡/프로듀싱을 해서 화제가 되었다. 90년대에 아이돌이 곡을 직접 만드는 것은 흔하지 않았다. 물론 선배 아이돌인 서태지와 아이들의 서태지나 듀스의 이현도가 자작곡을 만들어 활동하는 그룹이었긴 하지만, 두 그룹의 프로듀싱 담당이 따로 있었던 것에 비해 H.O.T.는 멤버 전원이 프로듀싱 능력이 있었다는 점이 차별점이라면 차별점.
6.3 영향과 파급 효과
당시 영세 기획사였던 SM 엔터테인먼트를 한국 최고의 기획사로 키워낸 그룹으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혜성같은 등장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10대 팬덤을 타켓으로한 기획형 아이돌의 시작이다. 이때부터 대형기획사가 철저하게 사전분석하고 조립한 아이돌의 댄스뮤직이 대중문화를 석권하고 한류의 시작이 된다. [19] 이때 외국에서의 인기도 엄청나서, 따로 활동하지 않던 일본이나 아시아권 뿐만 아니라 유럽권에서도 매니아층이 생겼을 정도였다.
종종 서태지와 아이들과 비교되고는 하는데, 단순 파급력은 서태지와 아이들보다 더 강했던 모습을 보여줬다. 서태지가 아이돌의 시초이나 영향력과 해외인기를 비교해서 서태지와 아이들은 가요계에 쿠데타를 일으켰다면, H.O.T는 아이돌 왕조를 세웠다.
서태지 문화를 향유하기에는 조금 어렸던 사람들 대부분(통상적으로 1996년~1999년경 초등학교 고학년 학생~중고등학교 학생이었던 사람들이다.) [20] 은 H.O.T.에 관한 추억들이 남아있을 것이다. 실제로 서태지 세대보다 어린 사람, 1996년~1999년경에 초등학교 고학년~중고등학생이었던 사람들이 자기자신을 "에쵸티 세대"라고 칭하는 것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태지처럼 앨범 판매량에 대한 얘기는 많이 오가지는 않는데, 그렇다고 판매실적이 저조했던 것도 아니다. 1집이 80만장으로 시작해서 2집이 150만장, 3집이 110만장에 4집 138만장, 마지막 5집도 88만장을 파는 기록을 세웠다. [21]
그 외에도 콘서트를 이유로 지하철 막차 시간을 바꿀 수 있는 몇 안되는 가수다.
6.4 관련 산업
인기에 힘입어 H.O.T.의 데포르메 그림을 그려넣은 틱톡이라는 음료수가 발매된 적이 있다. 팬사이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으며, 종류는 핑크, 블루, 그린 세종류. 디자인은 3종 모두 밝은 형광색으로 한것이 특징. '이 음료수는 신기하게도 전부 모아 섞으면 투명한 색으로 변한다'라는 루머가 있었지만 그럴리가...
3집 무렵엔 한불 화장품과 손을 잡고 H.O.T. 향수도 발매했으며, 4집 때는 DNA 목걸이를 팔기도 했다. 이 무렵엔 '평화의 시대'라는 한일합작 3D입체 영화에도 출연했는데 흑역사 흥행 실적 1만이라는 성과로 묻혔다. 보다보면 정말 열심히 연기하는 멤버들이 불쌍할 지경. 아이러니하게도 멤버들이 참여한 평화의 시대의 OST 음반은 몇십만장이 팔렸다고 한다.
6.5 노예계약
당시 멤버 개개인이 받았던 인세가 20원 밖에 안 되었다는 사실이 해체 후에야 뒤늦게 드러나면서 이수만은 당시 H.O.T.의 열렬한 팬이었던 많은 사람들에게 욕을 먹게 된다. 심지어 현진영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20원이 어디냐'고 한 적이 있다. 거기다 동방신기마저 H.O.T.의 전례를 따라간다는 소릴 들으며 확인사살 [22] [23]
장우혁은 해피투게더에서 H.O.T.로 활동하며 번 돈은 거의 없었고 JTL로 활동하며 번 돈이 대부분이라고 밝혔고 토니안, 문희준 역시 H.O.T.로 활동할 때보다 이후 활동으로 번 돈이 훨씬 많았다고 밝혔다.
7 팬덤
H.O.T.가 인기가 많아지면서 흔히 말하는 팬클럽, 빠순이라는 말이 퍼지게 됐는데, 공식 팬클럽을 비롯해 팬덤 문화라는 것은 H.O.T. 팬들이 거의 만들다시피한 것들이 많다. 응원 도구로 흰색 풍선만 사용한다거나, 현수막, 플랜카드, 응원봉 등을 조직적으로 사용한 것도 Club H.O.T.가 최초다. 심지어 응원봉을 만들기 위해 팬들이 직접 일본에서 흰색 LED를 직수입해와 만들 정도로 열성과 충성도도 높다. 그럴려고 준 용돈이 아닐텐데 가사가 없는 전주 부분에 멤버들의 이름을 외치거나 구호를 외치는 것도 Club H.O.T.가 처음이며, 심지어 가사 검열로 묵음처리 된 원가사를 팬들이 대신 불러주기도 했다.
공식 팬클럽은 Club H.O.T. 활동 당시에 공식 팬클럽 최다회원수 15만명, 비공식 팬클럽 25만명이라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세움과 동시에 최초로 안티사이트가 생긴 가수로도 기록에 남았다. 당시에 존재하던 팬클럽 중 가장 무서운 팬클럽이었다고. 문희준이 과거 해피투게더에 출연했을 때 전성기 시절땐 공식으론 78만, 비공식적으론 158만 정도였다고 직접 인증했다.
매년 잠실주경기장에서 열리는 드림콘서트의 경우 H.O.T.가 활동할 당시 H.O.T. 팬덤을 수용하기 위해 세로가 아닌 가로로 무대를 설치하여 좌석수를 두배로 늘려야 했다.
현재도 선후배 간의 기강이 빡센 팬덤계에서 가장 무서운 팬덤으로 통한다. [24] 얼마나 무섭냐하면 신화창조가 초창기에 Club H.O.T.의 말을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하다가 몇개월동안 무시당했고(말그대로 공기인간 취급당했다.) 나중에 울며불며 허리숙여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다녔다는 소리도 있고, 심지어 당시 같은 H.O.T.를 좋아하던 남자 팬들은 여자 팬들이 무서워서 콘서트를 관람하기보다는 음반을 구매했고 그 당시 어린시절을 보낸 남자애들의 이야기거리 중에서는 항상 "H.O.T.의 여자 팬들이랑 결혼하는 남자들이 있을까? 만약 그들과 결혼하는 남자들이 만약 아내의 과거를 알게되면 십중팔구 이혼할걸" 같은 말이 포함될 정도였다. 최근에도 일부 엘프들에게 사과문을 받을 정도로 아직도 건재하다. [25]
팬들의 열기만큼 막장도도 심해서 팬덤 문화에서 나오는 각종 사건사고를 담당하기도 했다.(…) 그 당시 H.O.T. 팬들이 얼마나 막장스러웠느냐면 문희준이 모 아이돌 여가수와 스캔들이 생기자마자 혈서를 보내고 죽여버리겠다는 협박편지가 전국에서 다반사로 퍼졌다. 그 여가수를 화장실에 가둬놓고 당장 우리 오빠와 헤어지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때 시사 프로그램에서 이 사건을 크게 보도하면서 팬들의 사랑이라는 걸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가를 토론했다.
또한 멤버들의 생일파티에 참가한다거나 콘서트가 열리는 날이면 전국의 여학생들이 대부분 조퇴를 해서 교육부에서 조퇴금지령을 직접 공문까지 내렸으며 9시 뉴스에 멤버토니안과 문희준의 생일파티가 이뤄졌다/강타가 수능을 보았다는 식의 보도도 나오기도 했다.
게다가 H.O.T 9.18 콘서트에서는 문희준이 무대에서 미끄러져서 떨어질때 200여명의 팬들이 실신하는 사건이 벌어졌으며, 콘서트를 보고 온 한 팬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관련 영상
동시대에 활동했던 젝스키스가 라이벌로 여겨지고 있지만 실제로 사회적 파장과 인기규모는 상당한 차이가 있어, 확실하게 H.O.T.가 당시 아이돌 계의 1인자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실제로 문희준이 콘서트에서 사고를 당해 실려 나갔다가 다시 등장했을 때 기절하는 팬들도 있었다. 은지원이 2011년 해피투게더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해당영상, "사람들이 젝스키스가 H.O.T.의 라이벌이라고 하는데, 우리 입장에서는 따라가기도 벅찼다.", "공연을 하면 팬석이 계란후라이였다."[26] 라고 말을 하기도 했다. 이어서 은지원은, H.O.T.가 활동 후 휴식기를 가지고 있을때 젝스키스는 전혀 쉬지 않고 1년에 2~3장 씩 앨범을 내며 활동해서 팬을 늘려가 따라잡아갔다고 밝혔다. 실제로 젝스키스는 97년 4월15일 데뷔 후 99년 1월 3.5집 활동마감까지 휴식기가 거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스케쥴을 소화했다. 그렇게 일한 보람이 있었는지, 강타가 무릎팍도사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당시 젝키의 3.5집 커플에 처음으로 지면서 위기감을 느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휴식기를 가지고 99년 9월 4집으로 같은 시기 컴백하며 맞붙었는데, 젝키와 H.O.T.의 격차가 다시 벌어지게 된다. 2016년 4월 16일 무한도전에 젝스키스가 출연했을 때 해체이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은지원은 당시 소속사가 4집 앨범이 망했다는 반응을 보이자 너무 화가 나서 홧김에 해체했다고 밝혔다.
한편 팬들이 바라본 시선과 달리 젝스키스와 사이는 괜찮았으며 실제 문희준과 은지원은 서로의 집을 자주 방문할 정도로 친분이 있었다. 싸움도 자기네들이 보기에도 서로 민망할 정도라, 우리도 친하다는 걸 보여주길 위해 젝스키스가 캔디를 불러서 했는데 만일 이게 또 말이 나올까봐 H.O.T도 같이 합세해서 춤을 췄다. 하지만 역효과 나버려 더 싸움만 났다고 한다.
풍선색은 흰색. 해체되고 멤버들이 솔로로 활동하고 있는 지금도 흰색을 사용하고 있다. 팬들에게는 신성시해서 H.O.T. 외에는 신승훈 [27] 만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비, 투애니원, 비스트등 후대 가수들과 응원색을 가지고 엄청나게 대립했고 2013년 봉색이 정해진 마이네임과 첨예하게 대립한다. 2016년 현재 야광봉 건으로 인해 가장 크게 대립하고 있는 팬덤은 엑소 팬덤이다. 장우혁이 트위터에 쓴 [28] 문희준도 강심장에서 흰색은 우리거라는 간판을 썼을 만큼 멤버들도 소중히 여긴다.
7.1 팬픽 문화의 시초
나우누리와 천리안 시대. H.O.T.의 팬들은 아이돌 그룹의 멤버들이 등장하는 팬픽을 처음으로 썼다. 다비도프 쿨워터 쓰는 남자 주인공의 원조가 되었다.
2012년 11월 17일 SNL 코리아에 장우혁과 토니 안이 출연했다. 망가지거나 짤방이 될 만한 H.O.T의 팬들에게 동심파괴를 동반한 호응을 얻었다. H.O.T.를 재현하기 위해 SNL의 크루인 권혁수, 김민교, 박상우가 나머지 멤버 대역을 맡았다. 이를 역이용해 이미테이션 상황극에서 가짜 멤버들이 진짜 멤버들을 구박했다. [29] 선배 왈 어디서 말대꾸야! 결정타는 팬픽의 BL을 소재로 그대로 재현한 드라마. 팬픽의 오글거리는 대사 [30] 와 사랑의 방해꾼 난입, 키스까지 우혁 왈 감히 날 거부해? 그대로 재현했다.
지금도 H.O.T.를 파는 코어 팬들이 있다. 2013년은 H.O.T.의 데뷔 17주년이었고 홍대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팬들의 충성심이 정말 크다. [31]
2012년. H.O.T.의 팬이 주인공인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이 방영되었다.
8 표절 논란
- 전사의 후예 : 로코테스의 스타일, 싸이프레스 힐의 'I Ain't Goin' Out Like That' 표절의혹을 받았으며, 이 곡이 실린 앨범은 자켓사진도 표절 의혹을 받았다. 그로 인해 후속곡을 바꾸기도 했다.
- We are the future : 크라프트베르크의 'Tour De France' 부분, 슬레이어즈 넥스트 오프닝 Give a Reason 부분 등의 짜깁기 표절의혹을 받았다. 사실 직접 들어보면 의혹이 아니라 완전히 표절이다. [32]
- 열맞춰 :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의 'Killing In The Name' 표절의혹을 받았다. 당시 유명 실용음악과 학생들을 상대로 표절 여부를 의뢰했을 때 표절이라 판정한 사람이 과반수가 넘을 정도였다. H.O.T.의 표절의혹을 받은 모든 곡들의 작곡가는 유영진이며 행복의 작곡가는 장용진이다.
- 나의 너 : '나의 너'의 후렴부는 재닛 잭슨의 'Together Again' 후렴부와 비교하여 빼도박도 못하고 똑같다.
9 음반
발매연월 | 제목 | 싱글(활동곡) | 판매량 |
1996.09 | We Hate All Kinds of Violence | 전사의 후예/캔디 | 900,000장 |
1997.07 | Wolf and Sheep | 늑대와 양/행복/We Are The Future | 1,520,000장 |
1998.09 | Resurrection | 열맞춰/빛 | 1,103,255장 |
1999.09 | I Yah! | 아이야!/투지/환희 | 1,383.985장 |
2000.10 | Outside Castle | Outside Castle/그래! 그렇게 | 875,386장 |
10 콘서트
- 1998년 1월 23일~25일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
- 1999년 1월 22일~27일 (세종문화회관)
- 1999년 9월 18일 (잠실올림픽주경기장)
- 2001년 2월 27일 (잠실올림픽주경기장)
- 원래 2월 23일~27일 5일간 체조에서 열 예정이었으나 폭설로 체조경기장 지붕이 무너지면서 주경기장 1일로 대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