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 나오토

일본 내각총리대신
93대94대95대
하토야마 유키오간 나오토노다 요시히코
간 나오토
菅 直人(かん なおと)
생년월일1946년 10월 10일
출생지일본야마구치우베
출생학도쿄 공업대학교 이학부 응용물리학 졸업
전직다카하시 특허 법률 사무소 소장
현직중의원 환경위원회 위원
중위원 원자력 문제 조사 특별 위원회 위원
정당사회 시민 연합 - 사회 민주 연합 - 신당 사키가케 - 구 민주당 - 민주당 - 민진당
종교신토
칭호중의원 영년 재직 의원학사(도쿄 공업대학)
배우자간 노부코
가족간 미노루(할아버지)
히메이 치에코(이모)
간 켄타로
일본의 제94대 내각총리대신
임기2010년 6월 8일 ~ 2011년 9월 2일
일본의 부총리
내각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총리대신
임기2009년 9월 16일 ~ 2010년 6월 8일
일본의 제13대 재무대신
내각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총리대신
임기2010년 1월 7일 ~ 2010년 6월 7일
일본의 내각부 특명 담당 대신(과학 기술 정책 담당)
내각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총리대신
임기2009년 9월 16일 ~ 2010년 1월 7일
일본의 제 85대 후생성 대신
내각제 1차 하시모토 류타로 내각총리대신
임기1996년 1월 11일 ~1996년 11월 7일
기타경력
중의원 의원1980년 6월 23일 ~ 현직

1 개요

일본의 94대 총리대신.

제84대 후생대신, 13대 재무대신, 내각부특명담당대신(경제재정정책, 과학기술정책) 등을 역임했으며 10선의 민주당 중의원이다. 제2대 민주당 간사장이기도 했으며 초대, 제3, 8대 민주당 대표이다. 현재는 민진당(일본)소속이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학창 시절

  • 1946년 10월 10일 일본 야마구치우베시의 샐러리맨 집안에서 출생.
  • 1965년 도쿄공업대학의 응용물리학과(현 물리학과)에 입학. 당시 대학의 자치회[1]에 들어가 있던 중핵파와 대립하고 나서 "이데올로기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현실적인 대응을 해야 한다."라며 15명 정도의 학생들을 모아 "전학개혁 추진회의"를 세워 극좌 계열과는 다른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이 조직은 첨예화되고 있던 전공투일본 공산당의 지배 하에 있던 민청과도 달랐고, 학교에 친화적인 '체제 찬성파' 그룹도 아니었던 제4의 그룹이었다고 한다.[2] 당시 경시청 경비과장을 지낸 삿사 아츠유키[3]가 회고한 바에 따르면, 당시 간 나오토는 논 섹트 래디컬 그룹에 속해 있었고, 학원분쟁 당시 자신이 기동대와 함께 도쿄공업대학에 출동했을 때 본 적이 있다고 한다. 간 나오토는 당시 "4번째 열의 사람"이었고, 아지[4]를 포함한 연설로 청중을 모으는 데에는 뛰어났지만, 각목을 들고 검거를 각오하고 데모대를 돌진시키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삿사는 그를 "성공적인 리더였다"고 평가했다.
  • 학원분쟁으로 인해 졸업논문 작성이 어렵게 되자, 제대로 연구해서 논문을 내고 싶다고 자진해서 1년 유급했다고 한다.
  • 1970년 도쿄공업대학 졸업 이후 변리사로 일하면서 지역 사회를 중심으로 한 시민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2.2 가정사

  • 그의 아내 노부코(伸子) 여사는 1살 연상의 외사촌 누나다. 사실 일본에선 사촌 간의 결혼이 법적으로 가능은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다지 인정되지 않는 편이다. 그렇지 않아도 정치가 집안이라 둘이 결혼한다고 할 때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 하지만 둘의 결혼을 둘러싼 가족회의가 어느새 일본의 보유를 둘러싼 정치토론회로 번지고(…?), 정작 결혼은 두 사람 뜻대로 진행되었다... 계획대로
  • 더군다나 민주당 대표 시절에도 총리 당선될 뻔한 적이 있었지만, 불륜 스캔들로 하차한 이력이 있다.[5] 참고로 부인은 그가 막 총리에 되었을 무렵, 자신의 남편이자 총리를 까는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이럴 거면 왜 했냐

2.3 정계입문 이후

1976년부터 정치에 입문했으나 2차례의 낙선 끝에 1980년 미니정당인 사회민주연합 당적으로 도쿄에서 첫 당선. 이후 사회민주주의와 야권통합을 주장하는 사회민주연합(사민련)의 얼굴로 활약했으며 1993년 호소카와 모리히로와 오자와 이치로가 주도한 비자민 연립정권에 참여하면서 행정 경험을 쌓았다.

1994년 자민당-사회당-신당 사키가케의 연정 수립 이후에는 신당 사키가케 소속으로 후생성[6] 장관을 맡았다. 이 시절 일명 O-157 사건이 터졌는데, 무순식중독 대장균인 O-157 확산의 주범으로 지목받고 판매량이 폭락하자 기자회견장에서 무순 1사발을 통째로 먹어치우는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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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위엄. 먹어서 응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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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구나.
먹방해도 되겠네

이 외에도 제약회사들이 에이즈에 감염된 혈액제재를 혈우병 환자들에게 공급했다는 사실을 은폐하려는 시도에 일본 정부가 관련되었다는 것을 폭로하고 직접 피해자들을 만나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주목을 받았다.

이후 자민당과의 연정에서 탈퇴하고 1996년 신당 사키가케의 동료 의원들과 사회당 내 우파세력을 결집하여 민주당을 창당. 하토야마 유키오와 함께 당의 얼굴로 활약했다. 2003년에는 자유당 당수 오자와 이치로를 끌어들여 당세를 대폭 확장했으며 이 때부터 사실상 일본 정치에선 자민당vs민주당의 양당 체제가 성립했다.

이후 오랫동안 하토야마, 오자와와 함께 트로이카 체제신나는 삼국지를 형성하며 민주당을 이끌었으며 2010년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가 지지율 하락과 후텐마 미군기지 이전 문제로 인한 정치적 난국을 이기지 못하고 사퇴하자, 2010년 6월 4일 국회(중의원) 본회의에서 유효투표 477표 가운데 313표를 얻어 총리로 취임했다.

2.4 일본의 제 94대 총리로서 천재(天災)인재(人災),그리고 막장을 겪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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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일본 정치사에서 보기 드문 좌파 시민운동가 출신의 총리. 도쿄공업대학을 나왔으며[7], 세습 정치인 집안도 아닌 평범한 중산층 가정 출신이다. 사회당적이었던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 이후 15년만의 비(非)자민당 출신 총리이기도 하다.

2010년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소비세 인상 발언으로 팀킬을 저지르면서 정치적 능력에는 의문부호가 붙고 있지만, 일단 역대 총리 사상 최소 재산세 신고에서 알수 있듯 청렴성이나 도덕성 면에서는 일본 내에서도 평가받고 있....었는데 토호쿠 대지진 하루 전에 재일교포에게 정치헌금을 받았던 사실이 나타났고 본인 역시 인정했다. 액수 자체도 크지 않고 헌금 자체는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이루어졌지만 문제는 재일교포가 외국인으로 명시된 일본에선 재일교포의 정치헌금은 불법이라는 것.[8] 간 총리의 도덕성에 흠집이 났다.

2010년 9월 이후 엔고 현상으로 인해 일본 경제가 위기국면으로 치달은 데다 참의원 선거 참패라는 이중고로 총리직 유지가 위태로웠다. 재정문제 해결을 위해 증세가 필요하다는 발언을 '선거 전에' 하는 병크를 저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9월 14일 민주당 대표선거 결과에서는 오자와 전 간사장을 여유 있는 표차(721 대 491)로 제치고 재선되었다. 이는 오자와 전 간사장의 이미지가 (정치적 수완과는 별개로) 워낙 좋지 못하기 때문에 덕을 본 면도 있다. 간 나오토의 지지도가 떨어지는 와중에 상대편에 오자와가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지지율이 상승(…)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 사실 당심에선 패배했지만 민심에선 크게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총리 임기를 연장하자마자 중국센카쿠 열도 문제로 충돌하다가 꼬리를 내리게 되었다. [9] 게다가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가입을 하려 하다 일본 농민들의 강력한 반발로 입장을 철회했으며 조선학교 무상화 검토로 극우파 의원들에게 까였다. 그리고 2011년 러시아 드미트리 메드메데프 대통령의 러시아(및 소련) 정상으로는 사상 첫 북방 4도 방문으로 인한 일본 외교의 무사안일함, 북한 연평도 포격 사건에 대한 늦장대응, 한반도 유사시 자위대의 파병이 가능한 듯한 뉘앙스의 발언 문제 등 여러 모로 비판을 받았다.

더욱이 관료제를 폐지하자고 공언했을 정도로 반 관료주의자였던 사람이 돌변해서 관료들이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것을 사실상 다시 부활시키고 아시아 중시 외교 정책도 친미정책으로 돌아가는등 여러모로 정권교체 때 민주당이 내세웠던 공약들이 상당 부분 후퇴해버렸다. 근데 사실 도호쿠 대지진 등의 사태와 현실적인 국정 운영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는 불가피했던 측면도 있다.

2.4.1 도호쿠 대지진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대한 대처

간 총리는 많은 실수를 저질렀지만 도쿄전력으로 쳐들어가 포기하지 말라고 요구한 것이 일본을 살렸다"

2012년 2월 27일의 후쿠시마 원전사고 독립검증위원회의 조사 결과.[10]

이런 상황에서 3월 11일, 일본 지진 관측 사상 최악의 상황까지 일어나버렸다. 사건 극초반에는 비교적 빨리 대책본부를 마련하고 5만명의 자위대 병력을 사건 현장에 급파하는 등 괜찮은 대처를 했으나 이후 점점 매뉴얼을 한참 넘어서는 규모[11]의 재난 앞에서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특히 관료들과 공기업 조직에 대한 통제에 실패하면서 매뉴얼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일본의 무기력한 관료 현실을 드러내고 말았다.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에는 도쿄전력 측이 총리에게 사고 경위에 대해 보고도 제대로 하지 않고 사건 상황을 은폐하려 들자 보여준 그 개인의 리더십만큼은 의미가 있었다. 간 나오토 자신이 도쿄공대 응용물리학과 출신인지라, 스스로도 "원자력은 내가 잘 안다"라고 말해왔던 그였던 것이다.

결국 도쿄전력이 사태를 수습 못하고 심지어 1호기가 폭발했는데도 보고조차 안 들어오자, 대폭발한 나머지 2011년 3월 15일 새벽, 직접 도쿄전력으로 쳐들어가서 아예 거기에 지휘본부를 차리고 도쿄전력 직원들에게 사자후를 내뱉어 공포에 떨게했다고 한다. 또 문제가 생겼다는 보고를 듣자마자 해수 투입을 지시했었다고 한다. 오오오. 당시는 도쿄전력이 원전 철수를 운운하던 시점이었는데, 불 같이 화가 난 총리의 말을 듣고 찌그러진 것이다. "철수는 있을 수 없다. 철수하면 도쿄전력은 반드시 무너진다"는 위의 다그치는 발언도 이때 나왔다.

다만 국민 여론은 간 총리도 잘한 것 하나 없다는 반응(...) 준비된 총리였지만 자기 임기에 대재앙이 일어났고, 또 도쿄전력이라는 기업 또한 대재앙급 기업이었다...

해수 투입을 몇시간 지연시켰다는 떡밥도 있었으나, 알고 보니 도쿄전력이 총리의 명령을 멋대로 왜곡했던 것으로 밝혀졌다.[12] 원자로 하나당 약 3,400억엔(약 5조원)이 드므로 그 가격을 담당하기 힘들었던 도쿄전력은 아직 수습이 가능하다며 둘러댔고, 간 총리도 처음엔 그 말을 믿어 해수투입을 미뤘던 거다. 그랬는데 일은 이렇게 커지고 도쿄전력은 보고조차 안 하는데 직원들은 철수시키겠다고 나오고 있으니 화가 난 것이다. 하지만 초기에 도쿄전력의 말만 믿고 초기대응 시기를 놓친 간 나오토 내각의 책임도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이 와중에 에다노 유키오 관방장관이 109시간 동안 철야를 해가면서 잊을만 하면 TV에 튀어나와 상황보고를 하는 바람에[13] 일본 국민들에게는 '저 아저씨 쉬지도 못하고 고생하네' 하는 식으로 인지도가 대폭 상승했다. 에다노는 간 총리 이후의 차기 총리감으로 지목되기도 했었다. 40대 후반의 젊은 나이도 있고..

총리가 되면서 관료체제와 타협을 시도하기도 했고 지진 이후로 더욱 더 관료들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으나, 자신들을 적대시 했던 탈관료 정책을 진행한 민주당 정권과 관료체제 사이의 보이지 않는 알력은 여전해서 재난 수습이 지지부진한 원인이 되고 있다. 게다가 지진을 이용해서 간 총리의 측근인 센코쿠 요시토 등을 다시 내각에 복귀시키기도 해서 비판받고 있다. 여기저기서 이번 재난에 대한 정부의 대처가 문제가 많다는 비판이 들려오는 가운데 원전 사태가 수습 못되면 간 총리도 연말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현지 분석이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4월 10일에는 제11회 통일 지방선거에서 가히 역사적인 참패를 기록했다. 광역의원이 자민 1,119: 민주 346. 물론 늘 1당은 자민당이었지만 지난 선거의 415석보다 69석 감소한 것이었고, 무소속(442)보다도 못했다.이시하라 신타로는 가뿐히 4선 연임에 성공했고, 민주당은 사실상 전패했다. [14] 간 때문이야 이게 끝이 아니었으니, 동일본 대지진으로 선거 기일이 연기된 지역들이 나오면서 오사카시의 하시모토 토오루 같은 극우들도 정계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5월 6일, 골든 위크가 지나가자 도쿄 지역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하마오카 원전을 중지시키는 방안을 내놓고, 기어코 중지시켰는데, 일본전력과 보수주의자 측에서는 "시민사회단체의 핵공포에 넘어가 전력난을 일으키려고 한다"라는 식의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원전반대단체나 환경단체, 국민 여론 전반에선 환영을 받으면서 간 총리의 임기 중 몇 안되는 치적으로 평가받는 분위기. 자기 전공(응용물리학)에 가까웠음에도 일본에서 최초로 탈 원전을 주장한 총리인 셈이다.

무순에 이어서 이번엔 오이로 방사능 공포를 몰아내려고 했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한중일 3개국 정상이 같이 먹었다.(...)도원결의# 근데 외교적 결례라는 말이 있다. 참고로, 원자바오 중국 총리는 한입만 딱 베어 물었는데, 모 국의 그 분은 아삭아삭 맛있게(;;) 드시면서 한반도의 기상을 드러내셨다는 말이 있다.그리고... 여하간, 이시하라 신타로보다는 모양새가 나았다.
파일:Attachment/간 나오토/Kannaoto.jpg

2.5 지지율 하락과 퇴진

지진 이후 내각 지지율은 20%대 이하로 바닥을 기고 있게 되었으며 자민당, 공명당은 중의원을 해산하자는 주장을 내놓았다. 즉 빨리 그 자리에서 꺼지고 중의원 해산 안하면 니가 실행하는 정책 다 반대할 꺼임!으름장을 놓았다.[15]

이렇게 되자 간 나오토 총리는 화살을 오자와 이치로에게 돌리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정치자금 문제로 강제 기소된 오자와 이치로 전 대표의 당원권을 정지시키고 탈당을 압박했던 것. 간 총리는 심지어 의회해산 카드도 슬쩍 내보이는 상황인데 한마디로 "나 건들면 의회해산 해버리겠어. 니들이 자리 지킬수 있을것 같아?!"라는 협박인 셈. 잠시 상황이 반대로 됐다. 그러나 오자와 계파가 따로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면서 간 총리의 퇴진을 압박하는 상황으로 변했다. 망했어요.

... 그리고 이렇게 동력이 빠진 상태에서 센가쿠에서의 중국과의 갈등(10년 9월), 후텐마 기지에서의 미국 요구 수용(11년 5월), 그외 러시아 북방 4도 굴욕 등 매번 상대국의 말을 들어줌으로서 "약한 일본"으로 낙인이 찍혔다. 이로서 친미 기조에서 탈피해 한중일 경제 공동체를 하자던 하토야마의 꿈은 좌절되었다. 또, 2010년 제2사분기에 중국의 경제규모가 일본을 추월하면서 1968년 서독을 제친 이후 42년만에 3위가 되어, 추락하는 일본의 한가운데에 있게 되었다. 경제 망했어요 지진 망했어요 방사능 망했어요 국격 망했어요

하지만 그래도 간 나오토 담화# 위백항목에서 자국 내 극우들의 까임을 무릅쓰고 우회적으로 국권침탈의 강제성을 인정했으며 의궤 반환을 추진하였다. 이런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도 사회당의 무라야마 이래 처음이다. 안습하지만 그래도 개념있는 인물. 물론 자위대 파병드립을 쳤다가 긁어 부스럼으로 땄던 점수 다 깎아먹었지만.. 최근 10여년간의 한일관계에서 간 총리 재임기간동안의 한일관계가 가장 원만했던 것도 사실이다.[16]

결국 2011년 6월 2일에 재해 복구가 대략 마무리되면 퇴진하기로 발표하였다.## 자민당, 공명당의 내각 불신임안 제출에 대한 일종의 고육지책으로 평가받는데, 이 고육지책이 통했는지 당일 오후 2시관련 기사에 열린 일본 중의원의 내각 불신임안 표결 결과 찬성 152 대 반대 293표로 부결되었다. 불신임안이 부결된것은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가 간 나오토 총리의 편을 들면서[17] 오자와 이치로 전 간사장쪽도 대놓고 반대를 할 수 없었고, 자진 퇴임 정도면 모양새도 좋다고 생각해서 나온 결과로 보인다. (그러니까, 민주당 의원 대략 전체가 반대를 했다.) 또한 일본 국민들이 "지진과 원전으로 난리난 판국에 권력다툼 하고 싶냐"라고 부정적 여론을 비친 것도 영향이 있는듯.

그러나 간 총리가 사임 의사를 표명한 만큼 6월 국회를 마무리하고 사임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올 연말까지는 총리 일을 해야 하지 않겠나" 라고 발언해 사실상 조기 퇴진 의사를 철회하였다.[18] 거기에 9월에 있는 유엔 총회에서 "탈 원전 기조"에 대한 연설까지 한다고 연설문 준비중이라고 밝혔다;; 거기다가 재해 복구를 지원하기 위해 정기국회의 회기를 올해 말까지 연장하겠다고 밝혔다. 내각 불신임 안을 한 국회회기에 두 번 이상 할 수 없는 법을 노린 것이다. ㅎㄷㄷ 이에 하토야마 전 총리가 사기꾼새퀴!라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 때문에 하토야마 전 총리와 오자와 전 간사장은 간 총리의 조기퇴진을 위해 연대하기로 합의했다(...)

상황이 이리 흘러간 탓인지 간 총리는 다시 여름이 끝나기 전, 즉 8월 말의 정기국회 회기까지 2차 추경예산과 재해복구기본법, 전력회사가 자연에너지 발전을 사들이는 재생에너지특별조치법안, 올해 예산에 편성된 국채발행을 가능하게 하는 특별공채법안을 처리하고 퇴진하겠다고 말을 바꿨다. 여하간 일본 내에서도 '경이적인 끈기'라고 표현할만큼 끈질긴 버팅기기 덕분에 고이즈미 준이치로 이래 가장 오래 총리를 한(.../1년 3개월) 인물이 되었다. 그래봐야 세 달 더 한거지만.

8월 초에 접어들자 지지율이 15%로 민주당 집권 이후 최저가 되어버렸고,(그나마 다행(?)인건 아무리 지지율이 폭락해도 모리 요시로5.7% 기록에는 한참 못미친다는 점이다.) 노다 요시히코 재무상, 마에하라 세이지 전 외상 등이 총리 레이스에 뛰어들기로 공식 발표하면서 결국 2011년 8월 29일에 민주당 대표경선이 열리기로 확정되었다. 당초 유력한 주자로 거론되던 노다 요시히코가 증세론때문에 지지율이 오르지 않으면서 결국 오자와계를 이길 후보로 마에하라 세이지 전 외무장관이 거론된 끝에 대표경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현재의 분위기로는 마에하라 전 장관이 사실상 차기 총리로 유력하다는게 대체적인 견해였으나 에다노 총리의 꿈은 저멀리 여론의 지지와는 달리 당내에서의 부정적 분위기로 마에하라 전 장관은 낙마했고 보수적인 노다 요시히코가 당선되었다.

2011년 8월 26일, 자신이 공약한 퇴진 3조건인 2차 보정 예산안, 특례공채법안, 재생에너지 특별법안이 중참 양원에서 통과되면서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의를 표명했다. 8월 30일 대표선거에서 당선된 노다 요시히코 신임 대표가 중참 양원에서 신임 총리로 당선되면서 파란만장했던 간 총리 내각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총 재임기간은 452일.

2.6 퇴진 이후

본인의 도쿄도 18번 선거구에서도 리벤지 매치에서 2위, 석패율제에 따라 비례대표 순번 3위로 복귀하였다[19]. 떨어졌어도 아직 가장 상태가 나은 편이라는 이야기가 되겠으나 일단 거물이 떨어졌다는 자체가(...) 그래도 민주당을 이끈 다른 주역들에 비교하면 나은편이다. 오자와 전 대표는 아예 민주당을 뛰쳐나가 신당을 차렸으나 자신의 지역구를 수성한것을 빼면 완벽하게 몰락했고 노다 전 총리도 선거패배로 몰락했으며 하토야마 전 총리는 노다의 공천 방침에 반대하며 출마를 포기했기 때문. 민주당을 이끌던 트로이카 중 2명이나 퇴장한 상황이라 향후에 민주당 내에서 입지를 펼칠 여지도 없진 않아보이지만...

3 평가

세습 정치인이 아닌데다 일관되게 반(反) 자민당의 길을 걸어온 군소야당 출신으로 맨땅에 헤딩하듯 성장해온 입지전적 인물이라 자민당의 보수 세습 정치에 질린 시민들의 기대가 컸으나, 야당 정치인 시절의 기대치에 한참 못 미치는 정치력으로 실망을 주었고 불운하게도 천재(天災)인재(人災),그리고 막장을 모두 겪은 인물.

복지 확대 이전에 소비세 인상을 통한 재정 건전화가 우선이라는 간 내각의 정책방향 자체는 오자와 이치로의 '일단 닥치고 복지 확대'보다 현실적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세금 인상이라면 본능적으로 회피할수 밖에 없는 유권자들의 심리를 무시하고 참의원 선거 직전에 이를 주장함으로서 참패의 원인을 제공한 것은 프로 정치인으로서의 자질을 의심케 하는 부분. 이 때 참의원 선거에서 참패만 하지 않았어도 나름대로 안정적인 국정 운영이 가능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간 총리 개인으로서도 뼈아픈 부분일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어난 뒤

"국민 절반이 살 수 없게 되는 사고라면 100년에 한번뿐일지라도 그런 위험부담은 져서는 안된다"

라는 간지폭풍 발언까지 날리기도 했다.

총리는 적어도 4년 정도는 해야 안정적이다라는 말을 총리가 되기 전인 의원 시절에 한바 있다고. 하지만 본인의 생각대로 4년을 하기는 커녕 1년 3개월에 그치면서 또 하나의 단명 내각으로 남고 말았다. 그래도 역대 전후 내각 총리대신 32명 가운데 19위의 재임기간으로 일본 정치의 현실에서는 아주 짧은 편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고이즈미 준이치로 이래에는 비교적 긴 임기에 리더십 있고 색깔있는 총리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그도 일본 인터넷 문화가 우익 성향으로 돌진하는 상황은 제어하지 못했고 하토야마 유키오와 함께 가장 많이 까이게 되었다. 당장 니코니코 대백과에서 간 나오토 항목과 아베 신조 항목을 비교해봐도 우익들이 얼마나 간 총리를 혐오하는지 알수 있다. 퇴임 이후에는 원전 재가동을 밀어부치고 있는 일본 내의 보수세력들에게도 주된 공격대상. 퇴임 후에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간 나오토의 안습한 처지는 2010년대의 일본 정치와 여론 전반의 극우화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 화도 이에 못지 않다

사실 동일본 대지진 같은 걸 생각하면 운이 지지리도 없는 인물이다. 의외로 사태에 잘 대처했음에도# 휩쓸린 비운의 총리라는 이야기. 시간이 어느 정도 충분히 흐르고 나면 재평가될 소지도 있다는 평가.

그리고 이 부분에 대해서 전문가 집단에서는 간 총리 같은 전공자가 해서 그나마 저정도지, 안그랬으면 일본 도호쿠 지방 전체가(도쿄를 포함해) 헬게이트가 될 수 있었다라는 평 역시 존재한다. 어찌 보면 포기하고 무책임하게 떠넘겼다면 재평가라는 항목도 없었을 것이다. 괜히 복구해서 더 욕 먹는 사례라 할수 있을 정도. 근데 일본을 살려놔서 FAIL 살아남았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우리나라를 봐라

단지 이 양반의 경우는 특유의 언행불일치 때문에 극우가 아니더라도 까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 "아베 총리는 인터넷으로 유권자와 소통하기 때문에 자격미달"이라는 발언을 본인 블로그에 써놓는 걸로 시작해서, "정치판이 개판이라 은퇴하고 싶다"고 인터뷰까지 해놓고 선거 전에는 제일 먼저 뛰어든다던지(...) 자기는 블로그에서 타 정당 낙선운동[20]을 벌였으면서 아베가 블로그에 본인의 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올리자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걸로 정점을 찍은 여러가지 기행 덕분에 신나게 까이고있다. 그러나 간 나오토가 아베를 고소한 이유는 이런 이유 때문이니 간 나오토만 잘못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21]

4 이야깃거리

  • 별명은 핏대. 후생성 장관 시절 관료들에게 뻑하면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질러대던 탓에[22] 붙은 별명. 이름부터 예견된 꼿꼿
  • 독일 국영방송에서 <후쿠시마의 거짓말> 이라는 이름의 방송으로 지진, 원전 사고 2년 후의 일본을 촬영하고 방송했다. 전 일본 총리가 일본 내의 도쿄원전과 일본 정치세력의 커넥트를 폭로하는 외국인이 보기에는 참으로 보기 드문 모습을 볼 수 있다. 링크
  • 대학시절 마작점수계산기를 발명, 특허도 갖고 있다고 한다.
  • 일본 전 총리로서는 이래적으로 한국의 뉴스인 JTBC 뉴스에 게스트로 나왔다. 주제는 역시 일본 내 원전 문제 및 원자력 발전 반대.
  • 한 코미디언에 의하면 가면부부라고 한다.[23]
  • 띄어쓰기를 잘못하면 간나 오토 간나라는 말이 AUTO로 나올...지도 모르겠다.

5 관련 사이트

공식 홈페이지(일본어)
페이스북(일본어)
트위터(일본어)

  1. 한국으로 치면 학생회.
  2. 참고로 이 조직은 200명 정도의 규모로 성장했다고 한다. 역시 떡잎부터 달랐다
  3. 훗날 내각 안보실장을 지낸다.
  4. Agitation의 줄임말. 말 자체는 선동을 의미하지만 선동을 위한 구호나 문장을 뜻하기도 한다. 한국의 운동권들도 아지라는 단어를 쓴다. 나무위키에서 아지를 찾아 볼 수 있는 항목은 인터내셔널가를 참조할 것.
  5. 뉴스 캐스터와 심야 데이트를 하다가 걸렸다. 디스패치
  6. 지금의 후생노동성.
  7. 동경일공(東京一工) 중 하나로 도쿄대, 교토대, 히토츠바시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일본의 최상위 대학이긴 한데 이공계에 특화된 교육기관으로 정치계와는 좀 거리가 있는 편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포항공대 또는 카이스트 출신의 정치가인 셈.
  8. 마에하라 세이지 전 외상의 경우에도 같은 이유로 외상직에서 자진사퇴했다.
  9. 물론 대신 센카쿠에 함대를 대폭 보낸다. 항목 참조.
  10. 이 조사를 통해 그동안 도쿄전력이 사고 당시 전면 철수를 시도했다는 주장을 놓고 도쿄전력과 일본 정부 쌍방의 주장이 엇갈렸으나 이번 조사결과로 사실이었음이 확인되었다.
  11. 총리 본인이 "사실상 일본 국토 20%를 잃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할 정도다.
  12. 자세한 것은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경과 항목 참조.
  13. 원래 비상사태가 되면 관방장관이 할 일이 많아지는데,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워낙 급박하게 돌아가는 지라...이 탓에 나름 인심 좋아보이던 아저씨가 반폐인이 되었다.
  14. 자민련과 연합공천한 6명만 당선
  15. 2011년 예산안은 일단 동일본 대지진의 여파로 정치권의 극한대립을 피하자는 여론에 야당이 응하면서 가까스로 통과되었다.
  16. 간 총리의 총리 재임기간동안 마지막 업무지시가 야당의 반대로 표류중이던 조선학교 무상화에 대한 심의를 재개하라는 것이었다.
  17. 하토야마 전 총리와 민주당을 깨지 않는다, 자민당에 정권을 내주지 않는다, 대지진 부흥 기본법과 2차 추경예산 조기 편성을 추진한다는 합의가 있었다고 한다.
  18. 정확히는 후쿠시마 원전의 냉온정지가 완료되는 시점이라고 했는데, 저게 2011년 12월 말이나 다음해 1월 초로 예정된 것이다.
  19. 도쿄 민주당 정당 득표율이 1%만 더 낮았어도 간 나오토는 낙선이었다.
  20. 일본은 원칙적으로 인터넷에서의 선거운동이 금지돼 있었다, 단지 2013년 5월부터 한정적으로 제한이 풀리긴했지만, 2013년 7월 현재도 정치인과 찍은 사진을 트위터에 올렸다는 이유만으로 연예인이 방송에서 퇴출당한 사례가 있을정도로 엄격하다.
  21.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경과 2013년 7월 17일자에 자세한 내용이 실려있다.
  22. 간 나오토는 일본 의회 내에서도 이름 높은 반관료주의자였다
  23. 매스컴 등에선 금슬 좋은 척하지만 카메라 밖에선 남남인 부부라는뜻. 가키노츠카이라는 유명 예능프로의 1년마다 하는 <절대로 웃으면 안 되는 특집>에서 지미 오오니시가 한 말... 이에 대해 당시 전 방위대신이었던 사람은 "이 이상 무서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꽁트를 급 마무리지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철저히 각본으로 짜여진 코미디기에 픽션으로 봐야 한다. 애초에 설정부터가 바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