潛在的 加害者, (영어) potential offender
목차
1 개요
어떤 특정한 인물이나 단체를 불특정 사건의 가해자가 될 것이라 의심하고 모함하는 태도를 말한다. 개념 자체는 예전부터 있어왔으며, 이런 개념을 비판하는 상황을 본 사람도 많을 것이다. 예를 들어서 왕따 방관자도 예비 가해자이거나 우회적인 가해자라는 접근론 같은 것이 있다.
엄밀히 말해, 미래를 들여다보고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지 않는 한, 그 어느 사람도 가해자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굳이 예외를 만든다면, 전신마비+정신장애로 인해 자기 의지대로 외부에 영향을 주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 정도다. 다만 이 경우도 기적적으로 치료법이 개발되서 치료받은 후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
또한, 경찰들이 순찰하는 이유 중 하나가 잠재적 가해자들의 범죄를 막는 것이다. 사람이 범죄를 저지를지 아닐지 완벽히 판단할 수 있다면, 굳이 돈 들여서 경찰들에게 순찰을 시킬 이유가 없다. 하지만 특정 계층만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하여 부당한 이득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예를 들어 범죄 발생율이 높은 지역에 경찰 인력을 투입하는 것은 정상적인 행동이지만, 범죄 발생율이 높은 지역에 사는 사람을 전원 범죄자로 취급하여 불이익을 주는 것은 부당하다. 적어도 무죄추정의 원칙과 증거재판주의를 채택하는 법치주의 국가에서는 그러하다.
2 '잠재적 가해자'를 지목하는 원인
어떤 사람이나 집단을 잠재적 가해자로 보는 인식이 생기는 원인은 두 종류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인간의 생리적 혐오감이나 편견, 다른 하나는 자신만의 이득을 위해 작정하고 특정 대상을 없애려고 중상모략을 짜는 경우이다. 전자 중의 일부는 후자를 겸하기도 한다.
집단괴롭힘, 강간 등으로 PTSD 등을 앓는 피해자들이, 자신에게 상처를 준 존재가 한 것과 비슷한 행동을 보고 이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있으나, 그 사람들이 보이는 태도는 다음에 이런 일을 겪기 싫기 때문, 혹은 이런 일을 두려워해서 사전에 보이는 방어기제일 뿐이다. 즉 여기에서 말하는 원인과는 다르다.
2.1 생리적 혐오감 및 편견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싫어하는 것에 대해 불신과 혐오, 그리고 편견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리고 생리적으로 인간은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웬만하면 빨리 치워버리고 싶어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서 무의식적으로 '이런 사람은 이러이러한 못된 짓을 저지른다'고 생각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는 경우이다.
2.2 중상모략
대상에게 갖는 혐오감에 상관없이, 자신의 이득을 위하여 거짓을 날조하고 이를 증거로 삼아서 모함을 하는 경우이다. 혐오감에서 비롯된 잠재적 가해자를 만드는 태도에 비해 훨씬 치밀하고 교활하며, 고의이므로 훨씬 악질적이다. 이런 부류의 행위는 정당하고 아니고를 떠나서 이미 진짜 범죄다.
3 어떻게 가해자가 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생리적 혐오감과 편견에서 비롯된 '잠재적 가해자'를 만드는 시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해 볼 수 있다. 자기 자신이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혐오감을 느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범죄자로 몰 수 있는 정당한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전과자가 재범의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여긴다면 전과자를 보고 그런 의식을 가질 수도 있지만, 이 세상에는 전과자보다 비전과자가 훨씬 많이 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그들이 꼭 범죄를 저지르리라는 보장도 없다.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자기 기분을 나쁘게 했다고 그 사람을 때린 것이 과연 정당한가에 대해 생각해보면 된다. 만일 정당하다면 맞은 상대편도 똑같이 자기를 때려도 할 말이 없어야 되는데, 누가 그런 식으로 주고받고 싶어 하겠는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을 두고 자신에게 위협이 될 것 같다는 성급한 판단을 내려서도 안 된다. 심지어 자신에게 올 위협을 미리 막으려면 선수방어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데, 이런 주장의 경우, "저 사람ㆍ집단은 나에게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으니까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미리 규제, 제재를 가하면서 짓밟아놔도 상관없다."라는 '논리'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할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성별을 막론하고 자신이 억울한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4 포스트 모더니즘 적 관점-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이론 및 오독 논란
4.1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페미니즘 이론
현대 페미니즘에 크리스테바가 결정적으로 기여한 바라고 한다면, 근대 언어학 및 정신분석학에서 기표-기의 개념을 차용하여 오늘날 사회의 근저에 자리잡은 여러 개념들과 그것의 상징성 및 기호화 양상이 전적으로 남성중심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것은 특정 성별에 기대되는 표면적 행동양식을 기호화 및 이식화 함으로서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성역할의 전형화, 표본화 및 양식화를 굳히는데 기여하고 있다는 분석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애초에 크리스테바의 이론은 정치학이나 대중운동의 측면에서 보다는 철학적인 개념으로서 언어학과 정신분석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소위 여성성으로 회자되는 가치나, 상징성, 기호는 사회 저변에 이미 자리 잡고 있는 남성성으로부터 소외된 것들의 집합체이며 주변적 의미만을 가지기에 그 여성성에 집착하는 것 부터가 잘못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즉, 페미니즘적인 측면에서 볼 때 '여성'이라는 통상적 정의는 정작 '여성'이 무엇인가와 관련되어 있기 보다는 '남성이 아닌 것'으로 정의되며, 결국 이에 의거한 여성성의 논의는 본질적으로 남성중심의 젠더권력에 여전히 예속되어 있다는 뜻이라고 크리스테바는 본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여성성'이라는 것은 하나의 이방인, 영속적인 주변성으로 개념화 되는 것이며, 그 현실이 결국에는 변화의 동력이라고 주장한다. 즉, "상징적 질서 속에서 여성이 갖는 이중적 측면, 한편으로는 사회적 질서의 침묵하는 보증인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질서를 위협하고 전복할 수 있는 잠재적 동력"이며, 이러한 맥락에서 "크리스테바의 작업은 상징적 질서를 전복하기 위해 주변성과 관련된 부정성과 거부의 속성을 여성에게 부여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므로 크리스테바의 언어이론을 지배하고 있는 전복의 윤리학은 그의 페미니즘에도 적용된다." [1]
즉, 이 계통의 철학적 페미니즘에서는 여성이 상징적 질서 속에서 폐쇄되고 고정된 심급으로 머물거나, 순응하지 않고, 집단과 체계가 동질적이고 억압적인 페쇄성으로 고착되지 않도록, 언제나 항거하면서 일종의 경계인, 이방인의 역할을 하는 것이 곧 여성해방이라는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성평등을 위한 투쟁은 여성에 대해서만 요구되는 실천이 아니며, 여성들의 투쟁만으로 사회적 질서가 변화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회는 스스로를 구성하기 위해 사회적 강제와 억압을 행사하므로, 문제는 이 강제를 부수고 재구성하는 것인데, 이 재구성의 동력은 부정성과 거부를 원리로 하는 기호론적 실천이다. 따라서 여성들의 투쟁은 혁명적 투쟁, 계급투쟁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며, 기호론적 실천은 여성 및 모든 억압된 사회층들, 담론, 생산과 재상산관계에서 억압되는 모든 사회층들간의 횡단적 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원래 현대철학과 포스트모더니즘이 인문계의 양자물리학 같은거라서
4.2 오독의 발생
위와 같은 이론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결코 쉽지 않지만 현대철학 및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중요한 문제제기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철학과 결합 된 분석적 이론들이 늘 그렇듯 심각한 문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실제 정치운동에 어떻게 적용시켜야 하나"에 대해서는 답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론을 제시하고 고찰하는 사람들의 문제라기 보다, 애초에 기호학적, 언어학적, 철학적 견지에서 차별과 젠더라는 현상을 바라보는 담론을 제시한 것이며, 모든 철학 이론이 그러하듯 그 핵심적 논지를 설명하기 위해 수 많은 은유와 비유를 사용하고 있는데다가 대단히 복잡한 양상을 띄고 있기 때문에 정확히 이해하기가 매우 힘들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와 가장 비슷한 사례라면 역시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 및 그 후계운동의 관계인데,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을 철학적인 관점과 정치적인 관점 양자 모두에서 제시한 바 있다. 이러한 일련의 이론들은 마르크스주의로 알려져 있으며, 그에 영향을 받은 수 많은 이론적 분파들이 나오는데, 이러한 분파 중에서 실제로 정치투쟁과 정치혁명의 이론적 원동력이 된 한 갈래가 마르크스-레닌주의이고, 소련 및 공산권과는 달리 서유럽 역사학계와 철학계를 중심으로 연구되고 논의 된 것들은 마르크스의 소외이론; 통칭 '초기 마르크스 이론'들이다.
마르크스의 소외이론은 하나의 정체로서 노동자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역학관계에 종속되어 있는 한 실제 돈을 어떻게 받고 어떻게 생활하느냐와는 별개의 차원에서 존재론적 소외에 대한 고뇌를 거듭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즉, 철학적 견지에서 존재론의 일종이기에, 예컨대 단순히 노동자 복지를 늘린다든지, 노동자들의 발언권을 확충한다든지 등 기존 체제 질서 내에 종속된 상태를 간과하는 노동자운동 등은 궁극적으로 존재로서 노동자의 해방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착한 자본가도 있다"든지, "자본가들도 노동자 권익에 관심을 갖고 공존할 수 있다"든지 하는 차원의 개인적 도덕론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구조로서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이 존재하는 이상 그에 예속되어야만 하는 존재론적 문제이기 때문에, 결국 자본가도, 노동가도 극복할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결국 혁명이라는 과정은 자본주의 단순히 자본주의를 부수는 것이기 보다는 그것의 극복,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것으로부터의 해방에 중점을 두는 개념정의이다.
이와 유사하게(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 범주에 있다면...), 크리스테바의 페미니즘 이론 역시 현상론이나 정치운동으로서 성차별 및 불평등을 접근한다기 보다는 관념철학의 존재론적 측면에서 접근한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그 자체로 객관적 사실이나 특징을 지칭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흡사 언어학에서의 기표-기의의 관계와 같이, 이미 무의식적으로, 정신적으로 중심적 역할을 하는 '남성성'에서 '여성성'이 파생되는 관계이기에 이러한 관계의 핵심을 부수지 못하고 사회 내에서 피상적으로 여성복지, 여성권익을 부르짖거나, "남자지만 나는 여성의 권익에도 관심 있다. 나는 '착한 남자'다(바로 위에 서술한 '착한 자본가'와 비교해보자)" 라는 식의 운동이나 인식은 결국 그 구조를 타파하지 못한다.
따라서, 여성해방이라는 것은 '남성성'이나 '여성성'같은 구차한 개념들에 종속되기 보다 그 질서로부터 벗어나는 행위 그 자체, 위에 인용 된 토릴 모이의 평처럼, "상징적 질서를 전복하기 위해 주변성과 관련된 부정성과 거부의 속성을 여성에게 부여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존재론적 측면에서 젠더권력에 대한 구조적 항거 및 파괴 행위, 그 현존 질서에 대한 아웃사이더가 되어 탈피하는 그 행위ㆍ인식 자체가 하나의 투쟁이자 여성해방운동이라는 뜻이다.
여기까지 읽었으면 눈치 빠른 사람은 대체 어디서 메갈리아의 투쟁론 같은 오독이 발생했는지 대충 눈치를 깠을 것이다.
4.3 사회정의론과 '잠재적 가해자'의 발생
1980년대에서 2000년까지 근 20년을 풍미한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의 중요한 한 축 답게, 난해하다. 기본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 중시하는 담론과 유희와도 같은 철학적 사변의 개념을 인지하지 못한 사람은 즉, 철학 파고 드는 사람들이 아닌 일반 대중은 솔직히 이해하기 매우 어렵고 복잡한 이론인다보니, 보통 사람들이 이러한 계통에 있는 여성학을 읽고 공부하는 경우에는 죽~ 나열된 사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그러다보니 결국 머릿 속에 남는 것은 마지막 구절들 뿐이다. 즉, 바로 위에 서술된 내용;
"따라서, 여성해방이라는 것은 '남성성'이나 '여성성'같은 구차한 개념들에 종속되기 보다 그 질서로부터 벗어나는 행위 그 자체""상징적 질서를 전복하기 위해 주변성과 관련된 부정성과 거부의 속성을 여성에게 부여하려는 시도"
"존재론적 측면에서 젠더권력에 대한 구조적 항거 및 파괴 행위"
"현존 질서에 대한 아웃사이더가 되어 탈피하는 그 행위-인식 자체가 하나의 투쟁이자 여성해방운동"
철학적 개념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이론의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오독하는 순간, 이것은 (쉽게 말해서), "현존 질서는 죄다 남성들이 만들어놓은 것이니까, 그걸 까고 부수고 거기에 반항하는 그 모든 행동은 다 여성운동이다"라는 식으로 읽히게 된다.아니 오독이 아니라 그냥 자기 생각이 철학과 순간 짬뽕된거잖아. 마르크스 잘못 읽은 사람들이 막무가내 강성투쟁이 진정한 노동운동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즉, 이 맥락에서 젠더권력이라는 것은 실제로 관료적, 체계적으로 움직이며 여성억압이라는 목적아래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권력구조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에 무의식적으로 자리잡은 일족의 철학적 관념이며, 사회 저변에 깔려있는 정신적 억압 및 개념적 종속성의 폭력이다. 그것은 사회정의 개념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원래 잠재적 가해자로서의 남성이라는 개념은 사회정의론적 측면에서 접근해야 할 개념이다.
예를 들어, 식민지 현실 아래 조선에서 생활하는 착한 일본인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고등학교 윤리 수업 정도에도 나오는 내용이므로 쉽게 이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식민지적 현실 아래 조선인의 입장에서는 '나쁜 일본인'과 '착한 일본인'의 차이는 없다. 한 나라를 식민지로 전락시키고 착취를 하는 구조 아래에서, 보편적 정의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그 구조 속에 있는 모든 일본인은 결국 그러한 수취, 착취행위의 잠재적 동조자이자 공범자다. 개인의, 개인도덕의 측면에서 조선인을 멸시하지 않고 동등하게 취급해주며 착하게 사는 일본인이라고 해도, 결국에는 '대일본제국'이라는 압제적, 제국주의적 권력이 만들어낸 그 구조 속에서는 아무리 개인적 처신이 훌륭한 인격자라고 해도 전체 사회정의의 측면에서 까방권을 획득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독립을 주장하는 조선인의 입장에서는 착한 일본인과 나쁜 일본인을 구별해서 독립투쟁을 해야 할 이유도, 여유도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 도식에서 '일본제국'을 '젠더권력', '제국주의'를 '성차별', '일본인'을 '남성'으로, '조선인'을 '여성'으로 치환하면 원래 "잠재적 가해자로서 남성"이라는 개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사용한 단어 자체가 어폐가 있으나 원래 '잠재적 가해자'라는 개념은 이러한 관념적, 철학적 이해의 차원에서 등장한 개념이다.
물론, 이는 원론적이고 철학적인 개념이며, 실제 독립투쟁에서도 일본인이라고 해서 다 때려죽여야 한다는 식의 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드물었고[2], 오늘날에 있어서도 '적국' 사람은 다 죽여도 죄가 아니다라는 주장은 제네바 협약 위반이며 그 이전에 인도적인 관점에서 국제적 비난을 면치 못 할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복잡한 관념철학으로서 크리스테바 계통 페미니즘 이론과 사회정의론에 입각한 '보편적 가해자'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오독하고, 깊은 고민 없이 바로 투쟁운동에 접목을 시도한 결과가 바로 '남성 잠재적 가해자론'과 같은 사회적 분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곧 "구조로부터의 탈피, 파괴가 곧 해방"이라는 구절에 대한 철저한 몰이해로 나온 것이라, "그러니까 모든 남성은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는 가해자로서(사회정의론 오독), 그 구조를 파괴하고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적극적으로 까고 해체하는 나의 활동은 곧 여성해방의 일환이다(페미니즘 오독)"라는 그릇된 결론에 도달한 것이 바로 오늘날 메갈리아 및 워마드 같은 부류의 (자칭) 여성운동의 가장 큰 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이론의 오독 및 오용의 사례는 사실 한국만의 특이한 케이스는 아니다. 크리스테바 계통의 정신분석학적, 언어학적, 기호학적 '투쟁의 페미니즘'이 등장한 이해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까지 미국에서도 매우 비슷하게 "남성구조로부터의 탈피와 해방 = 남성 조져버려"라는 식으로 운동을 했던 페미니즘 계통이 존재했었다. 즉, 현대철학 어려워서 잘못 이해해먹는건 서양이든 동양이든 마찬가지라는거. 다만 그 쪽이 우리 보다 30년쯤 앞섰던 것 뿐...
4.4 그것은 전체주의일 뿐이지
크리스테바는 미국의 페미니스트 학자들이 자신의 저작을 오독했다고 여기고 있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숨은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 언어구조를 해체하는 것만이 자기 이론의 골자는 아니다. 언어는 또한 역사적 스펙트럼 및 개인의 심리적, 성적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측면도 존재한다. 이러한 포스트-구조주의적 접근을 접한 특정 사회적 집단은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 그 자체에 압제적 의도가 숨어있다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집단주의적 논리를 개인정체성 위에 두는 행위는 해로운 것이며, 이러한 식으로 성별적, 민족적, 종교적 정체성 그 자체에 정치적함의를 덧씌우는 것은 결국 전체주의일 뿐이라고 크리스테바는 얘기하고 있다.- 정체성의 정치학에 대한 거부, (위키피디아, Julia Kristeva 문서 중 발췌[3]) -
앞서 언급한 것처럼 1980년대를 거치면서 서구권에도 소위 '메갈리아와 같은 전투적 페미니즘'에 대한 논란이 이미 한 차례 진행된 바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크리스테바 본인의 언급한 내용이 바로 위에 인용한 대목이다.
즉, 크리스테바 본래의 관심사는 구조적 언어학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무의식의 구조'딱 그 시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무지하게 관심 많이 갖고 있던 에 대한 연구이며, 그러한 '무의식의 구조'가 개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 중 하나로 '성차별'의 문제를 바라보았기에 그 특유의 유의미한 페미니즘 이론들이 나왔던 것이다. 따라서 (앞서 설명한 것처럼)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모호한 개념 아래 서로간의 '힘싸움'이라는 형태로 대립을 거듭하는 식의 여성운동은 궁극적으로 무의미한 것이며, 일단 근저에 깔려있는 그 무의식적 구조의 파괴, 타파, 그러한 차원에서 개인의 고찰 등을 얘기하는 측면이 훨씬 크다.
그러나 이는 쉽사리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이론이 아니며, 그 자체를 하나의 정치운동, 투쟁운동의 이론으로 삼는 것은 더더욱 무리다. 결국, 일부 여성운동 집단에서 자기들이 현재 사용하고 있는 영어 마저도 사실은 남성들이 정교하게 만들어낸 언어이기 때문에 타파해야 한다라는 무리한 주장들이 나오는 둥 여성운동의 내부에서도 여러가지로 골치아픈 일들이 많이 발생하였으며, 그에 대해 크리스테바는 위에 인용한 것과 같은 평을 내린 것이다. 즉, 오독이라고.
여기서 특히 주의해야 하는 대목은 집단주의적 논리를 개인정체성 위에 두는 행위는 해로운 것이며, 이러한 식으로 성별적, 민족적, 종교적 정체성 그 자체에 정치적함의를 덧씌우는 것은 결국 전체주의일 뿐이라는 부분이다. 즉, 철학적 측면에서 제시 된 담론을 조심스레 다루지 않고, "집단주의의 논리" - 즉, 집단간 대립의 논리에 그대로 대입하는 태도는 자신의 이론을 오독하고 전체주의를 밀어붙이기 위해 오용되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쉽게 말해서, 위에서 설명 된 각종 페미니즘적 개념을 공부하고 습득하며 조심스레 다루지 않고, 그야말로 남자 vs 여자로 진영을 나누어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공격하고 모욕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은 제대로 된 여성해방운동이 아니라 그저 전체주의의 일종이라는 말이다.
애초에 현대 사회의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용어들 그 자체가 무의식적으로 각인 된 억압의 구조에 의해 만들어진 무의미하고 기만적인 허상같은 것이라, 그에 집착하는 여성운동이나 해방운동 또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 이쪽 계통 페미니즘의 중요한 이론적 틀임을 생각해보면, 그냥 전형적인 패거리싸움에 고급 이론의 개념 몇개 도용해서 가져다 붙인 채로 한 집단 전체를 매도하는 행위가 "여성운동"이라고 하는 것을 보게 되면 크리스테바가 뭐라고 할런지... 공부 열심히하고 연구 열심히하면 뭐해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왜곡하는데...
5 여성우월주의, 남성혐오와 엮여 생기는 논란
이 단어는 그렇게까지 많이 언급되는 단어는 아니었는데 2016년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이 일어나자 특히 여혐과 관련해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워마드나 메갈리아, 여성시대 등의 여초 커뮤니티 및 해당 살인 사건의 추모 행사에 참여했던 인원 중 일부 측에서 남성들은 언젠가 범죄를 일으킬 것이며 이에 대해 자기비판, 자기반성을 해야한다며 내세우면서 갑자기 시끌해졌다. 이들의 논리를 풀어보자면,
"여성보다 월등한 근력을 가지고 있고 성욕이 왕성한 남성들은 언제든지 주변 여성을 강간하거나 살해할 수 있는 짐승으로 돌변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또한 그 근력을 바탕으로 강간이나 살해에 성공할 확률이 높은 위험분자들이다. 따라서 남성들 스스로가 이를 미리 인지하고 참회하며 여성들 앞에서 고해성사함으로써 자신들이 여성들에게 위협적이지 않음을 온 천하에 인증해보라"는 것인데……
사실 위와 같은 논쟁이 발생한 이유는 자신의 행동원리를 전투적 페미니즘로 설정한 일부 과격 페미니즘 진영의 "젠더 권력" 개념 및 "사회정의" 개념의 오독 및 오남용에서 출발한다. 실제로 "남성 타도"나 "남성 배격"등의 과격한 목표로 유명한 페미니즘의 사례는 사상적으로는 20세기 페미니즘의 거두 중 한 명인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영향을 짙게 받은 운동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운동 양상은 현재의 메갈리아와 같은 집단과 유사했다.
비단 인터넷의 극단적인 페미나치 커뮤니티뿐 아니라, 한국 사회의 주류 여성단체들도 이 잠재적 가해자 논리에 상당히 경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사의 마지막 부분도 참고하자. (기사)
5.1 남성이 잠재적 가해자라면, 여성은 결백한가?
여성은 출산만 하면 자신의 아이지만, 남성의 경우, 별도의 검사 없이는, 자신의 자식인지 판별할 수 없다.[4]여성들만 간통으로 얻은 아이를 배우자의 아이로 속일 수 있다.[5]
그러므로 여성들은 이를 인지하고 참회하며 모든 자식을 대상으로 친자 확인을 실시하면서, 자신이 배우자에게만 충실했음을 증명해야 한다.
여성이 간통으로 자식을 낳은 것인지 판별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절대로 불가능하다,[6] 그나마 현대에 와서야 DNA 검사라는 수단이 생겼지만, 의무가 아니며, 뉴질랜드처럼, 모친이 친자 확인을 막을 수도 있다. 남성이 친자확인에 있어, 압도적으로 열세에 있는 것은 여전하다.
덤으로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모는 주장보다, 여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보는 주장이 (예외가 적다는 점에서) 더 우수한 주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7][8]
여담으로 '여성 가해자론'을 페미니스트들이 본다면 '여성 해방'을 표어로 들면서 반박할 것이며, 현대 사회에서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이 합당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보다 열등한 주장인 '남성 가해자론'이 어떤 대접을 받아야 할지는 쉽게 알 수 있다.
5.2 신 잠재적 가해자론 - 여성혐오와 연계한 '남성 잠재적 가해자론'
그러나 현재는 잠재적 가해자론이 위처럼 단순한 이론에서 벗어나 여성혐오 기반의 잠재적 가해자론으로 교묘해졌다. 주로 메갈리아와 워마드같은 비교적 최근에 나온 사이트들이 주로 주장하는 내용이다.
*원시시대는 힘이 곧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고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여성은 젠더권력에서 하위로 밀려났어요. 순종적인 역할을 맡아야했죠. 남자는 성적 우월 의식을 갖고요. 이는 단순한 역할 분담이 아닙니다. 그리고 여성혐오는 흔히 떠올리는 바퀴벌레를 대하는 것과 같은 혐오가 아니라, 대상화/신격화 등 동등한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 모든 행위를 통틀어 말해요. 남녀 붙어다닌다고 뭐라 할 사람은 없지만 남자와 많이 자는 여성/여성과 많이 자는 남성에 대해 사회가 각각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죠. 여성혐오는 일상에서 알게 모르게 일어나요. 옛날 남부의 흑인혐오나 20세기 중후반의 아시안혐오처럼 알기 쉽고 극단적인 이슈가 아니에요.
- 하지만 대한민국 사회에서 남성으로 태어난 이상 여혐에 노출될 수 밖에 없고, 물론 이는 남성 자체의 문제는 아니에요. 남성의 뇌에 여성혐오 뉴런이 따로 있는건 아니니까요. 누누히 말하지만 저는 원시시대의 힘만능주의가 현대사회까지 내려온 것을 여혐이라고 봅니다. 사람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상 그 사회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있어요. 여성은 여혐에 순종하거나, 맞서죠. 하지만 남성은 가만히 있어도 여혐으로 손해볼 게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남성은 더욱 여혐에 무뎌질 수밖에 없고, 저는 이것을 여혐의 방관 즉 간접적 가해로 해석한 겁니다. 또 일부는 이번 강남역 살인마처럼 극단적인 경우로 치닫죠. 이를 포괄해 잠재적 가해자로 명명한 거에요.
- 여혐이 사회에 존나게 퍼져있으니까 남자들이 잠재적 범죄자라고 하는 거잖아요... 니네는 여혐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여혐일 수 있다고. 그럼 니가 여혐인지 모르고 한 행동=가해가 되기 때문에 남자를 잠재적 가해자라고 하는 거임. 언제 여혐발언/행동을 할지 모르니까. 제일 심각한 건 그래 놓고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른다는 거지. 페북에서 여자 머리채 잡고 모텔 가는 만화에 좋아요 누르는 것들이 지들이 여혐하고 있다고 생각하겠나.
- 아무리 자신을 정상적이고 깨끗한 남자라 생각한들 여혐이 남은 사회에서 살고 있는 이상 여성혐오적 생각을 하거나 혹은 보고도 문제점을 못 느끼는 등 간접적인 가해에 동참할 수 있어요. 남자 자체에 뭔가 문제가 있다기 보단 원시시대 사냥을 해오는 남성 쪽이 젠더권력을 쥔 것을 시초로 하여 성별이 별로 문제될 것 없는 현대 사회까지 여성차별 혹은 여혐 관련 범죄가 끊이지 않는 거죠. 이 때 해야 할 행동은 자신이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사회 인식을 고쳐나가는 것입니다.[9]
- 남자로 태어난 게 잘못은 아닙니다. 사회가 알게 모르게 여혐을 띠고 있는 게 문제죠. 남성이나 여성이나 그것에 익숙해져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것도 문제고. 지금이야 많이 나아졌지만요. 하지만 아직 기득권을 쥐고 있는 쪽은 남성이고, 강력범죄 피해자 90%는 여성입니다.[10] 단순히 여성이 신체적 약자이기 때문만은 아니에요. 뭘 시사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세요. 극단적인 말로 어그로 끌지 말고.[11]
- 음...그건(남자가 가해자가 되는 사건들도, 여자가 가해자인 사건들도 있으므로 남자와 여자 모두 잠재적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 모든 인류에게 해당한다 생각해요. 하지만 남자는 잠재적 가해자이다 에서 가해는 여혐에 기반을 둔 가해를 말합니다. 여자가 여자에게 하는것/남자가 남자에게 하는 것은 관계 없어요.[12]
- 남혐에 상대적으로 관대할 수 밖에 없는건, 그 전까지 여혐이 너무 컸다는 사실의 반증이죠. 심지어 혐오 피라미드[13] 로 봤을 때 여혐은 6단계인 제노사이드에 이른 반면[14][15] 남혐은 교묘한 차별적 행위에 해당하는 1단계 밖에 안되요.[16] 왕따 피해자가 가해자 팔을 물어 뜯었을 때 `그래도 폭력은 나쁜 짓이야` 라고 말하는 것과 `그럴수도 있지. 당연한 반응이야` 라고 말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전자는 상당히 비겁한 반응이죠.
- 미국사회에선 흑인혐오, 아시안혐오가 엄청난 범죄이기 때문에 흑인, 아시안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적고 흑인혐오, 아시안 혐오를 하는 사람조차 그 인식을 대놓고 드러내진 못해요. 말 한마디 잘못해서 인종차별주의자로 낙인찍히고 직장에서 쫓겨나거든요.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여혐은 너무 일상적이기 때문에 남자도 여자도 노출되기 쉽죠.
위 글은 경향신문에 문화평론가 김작가가 잠재적 가해자가 되어도 실질적 피해자가 없으니 억울하지 않다는 기사-이 기사의 헤드라인 제목은 '잠재적 범죄자 됐다는 남성들, 억울하지 않은 이유였다.'-에 100개가 훌쩍 넘는 댓글을 쓴 꾸까의 것 중 대표적인 것 몇 개를 작성 순서와 상관 없이 모아 맞춤법을 교정한 것이다. 2016년 5월 26일 경향신문 (문화와 삶) 남자들, 억울해하지 말라
위는 그간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과 실제 행한 가해자의 주된 성별(남성)에 입각해 주장하던 잠재적 가해자론이 비판받은 것을 의식해 남성 기득권과 여성혐오를 엮어 새롭게 나온 것이다.
먼저 이 '여성혐오 기반 잠재적 가해자론'에서 말하는 여성혐오란 단순히 여성을 혐오하는 것이 아닌 여성을 남성의 밑에 두는 의식과 행위, 남성과 여성에 대한 다른 반응 등을 포괄하는 것이므로 단순히 '나는 여자를 좋아하니 여성혐오자가 아니야'로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여성을 어떻게 생각하건 모든 남성은 여성혐오의 직간접 동참자가 된다는 것이다.
꾸까는 먼저 남자가 다른 남자나 여자에게, 여자가 남자나 다른 여자에게 가해할 수 있는 가능성 만으로는 잠재적 가해자라 할 수 없다고 해서 기존의 잠재적 가해자론을 부정하고 있으며, 오직 기득권이고 강자인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로 만든 여성혐오를 기반으로 한 것에만 잠재적 가해자라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에 의거해 오직 남성만이 잠재적 가해자라 한다.
즉 원시시대부터 남성 기득권인 힘만능주의로 여성을 억압하고 차별한 이데올로기가 현대까지 내려온 것이 여성혐오이며, 이 여성혐오는 남성의 기득권을 바탕으로 하기에 남성들로서는 손해볼 것이 없어서 여성혐오에 무뎌지면서 방관자가 된다. 남성들의 그 방관이 여성에 대한 간접적 가해이며, 일부 남성은 이번 강남역 살인사건처럼 직접적 가해를 한다. 이 다수의 간접적 가해와 소수의 직접적 가해를 할 예정인 것을 포괄해서 남성이 여성에 대한 잠재적 가해자가 된다. 이상이 꾸까의 의견이다.
그리고 꾸까는 여성에 대한 범죄의 근본인 여성혐오를 없애기 위해서는 무조건 남성들만이 자신이 잠재적 가해자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남성이 잠재적 가해자라는 것이 그간 써오던 잠재적 범죄자라는 의미가 아니므로 워딩에 집착하지 말고, 기분 나빠할 것 없이 남성들이 받아들이라 하고 있다.
위 '여성혐오 기반 잠재적 가해자론'에서는 이 세상에는 남성혐오가 없거나 있어도 미약하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여성은 (남성혐오 기반의)잠재적 가해자가 될 수 없으며, 이 세상은 여성혐오로 이루어졌고 그것이 넘치므로 남성은 모두 직간접의 차이만 있을 뿐 잠재적 가해자에서 피할 수 없게 된다. 이 논리에 의하면 그간 '남성이 잠재적 성범죄자다'라고 할 때, 그러면 '여성은 잠재적 꽃뱀이다'하는 공방을 일방적으로 막아 오로지 남성만 잠재적 가해자로 만드는 것이다. 또 '그럼 미국의 백인들이 흑인에 대한 잠재적 가해자냐?'는 질문에 꾸까는 '미국에는 흑인혐오를 한국의 남성혐오처럼 드러낼 수 없기에, 가시적으로 형성된 흑인혐오 기반은 없으므로 잠재적 가해자는 없다'는 근거가 불분명한 자의적 의견을 바탕으로 부정하고 있다. 꾸까는 이렇게 남성 잠재적 가해자론 외의 다른 대상의 잠재적 가해자론은 여성혐오같은 명백한 혐오 의식에 기반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부정한다.
위 이론은 한국이 '여성혐오가 심각하다 - 6단계 제노사이드 단계다'라는 이론을 절대시하고, '남성혐오는 심각하지 않다 - 1단계 교묘한 차별 단계에 불과하다'는 이론을 도출 후 둘을 동일 선상에 놓을 수 없으니 비교를 하지 말라고 한다. 꾸까의 말에 의하면 여성혐오 피해는 너무 커서 말도 못하고, 남성혐오 피해는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발언은 당연히 헛소리다. 여혐이 극에 달한 ISIL조차도 여성들을 제노사이드의 대상으로 보지않는데. 애초에 제노사이드 단계에 있었다면, 여성들이 살아남느라 바빠니까 이런 헛소리들을 지어내고 공론화시킬 여력조차 갖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여성혐오에 기반한 잠재적 가해자론'은 한국의 급진적 페미니즘계와 여성시대, 메갈리아, 워마드 등의 남성혐오주의자들과 일부 여성들이 앞으로 계속 밀어붙일 것이고, 기존처럼 '범죄의 발생 가능성만으로 설정한 잠재적 가해자론' 반박으로는 이에 대한 효과적 대응이 되지 못한다.
5.3 여성혐오 기반 '남성 잠재적 가해자론' 비판
위의 글은 스누라이프에서 올라온 글이다. 잠재적 가해자론의 허상이 무엇인지 아주 잘 보여주는 논조다.
이렇게 겉만 번지르르하기 짝이 없는 5.2 항목에 나오는 꾸까의 글이나 김작가의 주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류가 적지 않다. '잠재적 가해자'란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 기득권 사회구조인 여성혐오에 대해 방관 및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다수의 사람과 강남역 살인자처럼 직접적 가해까지 나갈 소수의 사람을 포괄한다.
그러나 이것을 바탕으로 모든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이며 모든 여성은 '잠재적 가해자'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는 없다. 이 결론을 내기 위해서는 모든 남성이 자신이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구조에 동조하며, 모든 여성이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구조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장 꾸까의 글에서도 여성 역시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구조에 방관 및 동조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으며, 이는 여성 역시 여성혐오에 기반한 '잠재적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또한 모든 남성이 자신(남성)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구조에 동조하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 근거 역시 없다. 즉 남녀평등에 의해 소실된다고 주장되는 사회적 지위를 남성 모두가 남녀 평등의 가치보다 앞세울 것이라는, 지나치게 일반화된 명제를 전제로 하기 때문인데, 남성 중에서도 인간평등적 가치나 자유주의적 가치를 더 중시한다면 충분히 여성혐오적인 흐름에 대해 '반발'할 수 있음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이것과 별개로, 성차별적인 사회구조의 영향 아래 주입 혹은 강요된 고정관념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사회구조에 동조하게 된 자들 모두를 '잠재적 가해자'라는 부정적인 단어로 지칭하는 것은 인식의 전환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꾸까 역시 여성혐오는 남성들의 잘못이 아닌 사회구조 전반의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되었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해답으로 모든 남성에게 '잠재적 가해자'라는 딱지를 붙이고 반성을 요구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반증하고 있다. 진짜 가해자는 성차별적인 인식과 고정관념을 강요하는 사회구조 그 자체이며, 이것을 타파하기 위한 사회 구성원의 노력을 촉구하는 것이 보다 근본적인 해결방안이 될 것이다. 또한 여기에는 남성, 여성 할 것 없이 모든 사회 구성원이 해당되는 내용이다.
실질적인 해결책의 부재 또한 위 여성 혐오로 인한 잠재적 가해자론의 문제점 중 하나다. 위 글에서도 나타나지만 결론적으로 이 논리가 내놓는 해결방안은 '모든 남성이 반성할 것'이다. 문제는 이 해결책을 통해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율이 줄어들거나 사회전반에 암암리하게 존재하는, 혹은 인간 무의식 속에 잔류하는 여성 혐오를 없앨 수 있다는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해당 해결책이 제대로 이행되었는지의 여부를 따질 근거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류의 주장에서 간혹 "혐오의 5단계 이론"이니 뭐니 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미국 심리학자 고든 올포트(Gordon Allport; 1897년 ~ 1967년)가 1954년에 제시한 올포트 척도(Allport's Scale)를 언급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척도는 어째서 나치 독일이 유대인을 그렇게 차별하고 학살했는가를 설명하려다가 나온 것이며, 여기서 언급하는 제5단계의 "대학살" 상황은 국내의 여성혐오 현황에 댈 만한 것이 못 된다. 한국인과 관련하여 그 정도의 사회적 차별이 존재했던 극명한 사례가 하나 있으니, 관동 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대학살이 바로 그것이다. 이 정도는 돼야 올포트 척도의 제5단계 등급을 매길 수 있다.
또한, 아래에 이어질 추가적인 근거와는 관계 없는 여담이지만, 원시시대는 결코 남성우월주의 사회도 아니었으며 힘만능주의 사회도 아니었다. 남성이 여성보다 우위인 이데올로기가 탄생한 것은 초기 문명사회 이후의 이야기로, 원시 사회에서는 비교적 성 역할이 공평하였거나 심지어는 여성우위적인 성향이 드러난다. 물론, 위의 주장에서 원시사회라는 부분을 초기 문명사회라고 바꾸기만 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6 피해 사례
잠재적 가해자'를 만드는 시선 때문에 억울한 사람이 피해를 보는 경우가 적지 않다.
- 동성애자와 같은 성 소수자나, 장애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 이 '잠재적 가해자'로 찍히는 경우가 많다(편견 및 고정관념/성 관련 항목 참조). 특히 성 소수자들은 특정 종교에 속하는 단체의 사람들에게 물리적 테러를 당하는 경우도 있다. 모 교계 종교 단체 일원들이 김조광수 결혼식장에서 김조광수 부부에게 사회의 윤리를 파괴한다며 오물을 던진 테러 행위를 예로 들 수 있다.
- 춘추전국시대에도 방연이나 이사가 자신보다 우월한 손빈이나 한비자를 시기하여 혜왕이나 진시황에게, 앞의 둘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고 모함을 해 죽이거나 죽이려 하였다. 돌고 또한 봉상왕의 '잠재적 반란 분자'로 보는 의심 때문에 반역 의혹을 받아 죽었다.
- 9.11 테러 이후, 무고한 이슬람 출신 이민자들이 '잠재적 가해자' 취급을 받고 억울하게 증오범죄를 당하는 사례가 많았다.
- 1980년대 일본에서 발생한 미야자키 츠토무 사건 이후, 오타쿠들이 억울하게 '잠재적 범죄자'로 몰렸다.
- 아시카가 사건 당시, 일본 경찰이 주먹구구식 프로파일링 기법을 동원해서 "독신남성은 소아성애자일 가능성이 높다."라는 이유로 무고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웠다. 독신남성들을 모두 잠재적 소아성애자로 취급한 사건이다.
7 관련 문서
- ↑ 토릴 모이, "성과 텍스트의 정치학"
- ↑ 독립운동가 신채호의 경우, 한 사람의 일본인이라도 더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민족주의에서 아나키즘으로 돌아선 후에는, 억압받는 일본인들과 연대해서 일본 제국주의를 향해 투쟁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 ↑ 출처
- ↑ 현대에 와서야 DNA 검사라는 수단이 생겼지만, 아래에 나오는 뉴질랜드의 사례처럼, 근본적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 ↑ 검사결과 모친이 간통을 저질러서 낳은 아이로 밝혀진 경우가 제법 있었다는 검사 기관의 언급이 있다.
- ↑ 정조대 등은 뚫릴 위험이 있고, 수영하다 딸이 임신했다 식의 경우도 불가능하지 않다. 남성이 없는 곳에 감금시키는 것만이, 간통으로 자식을 낳는 것을 막는 그나마 효과적인 방법이다. 이것도 감시자를 매수해서 간통을 저지를 여지가 있으니,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다.
- ↑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모는 근거인 근력과 성욕은 개인차가 심한데다가, 무기 등으로 극복이 가능하다. 그러나 여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보는 근거인 '남성은 친자 판별이 불가능하다'라는 점은 과학적으로 예외가 없다.
- ↑ 아래에_나오는_'신 잠재적 가해자론'조차 (그 자체만으로 잘못된 근거와 잘못된 논리적 전개, 잘못된 결론을 내포하고 있지만), 남성우월사회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 근거가 사라진다는 것에 주목하자. '여성 잠재적 가해자론'은 인간이 새로운 번식 방법을 지닌 종으로 진화하지 않는 한, 반박 불가능하다.
- ↑ 당연히 이들은 여성도 잠재적 가해자임을 고려하지 않는다.
- ↑ 강력범죄(흉악) 한정으로는 맞는 말이다.
- ↑ 여성이 사회적 약자인 것은 맞지만, 여성 혐오와 연결짓기에는 근거가 약하다. 여성이 범죄 피해자가 되는 것도 여성이 신체적/사회적으로 약자이기 때문에, 범죄를 성공시키기 쉽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사건이 일어날 때 대부분 부하 직원이 피해를 입는다. 그것을 혐오와 연결지을 수 있을까?
- ↑ 여자가 남자에게 해를 가하는 경우를 무시하는 점을 주목하자.
- ↑ 1단계(교묘한 차별적 행위), 2단계(차별과 편견적 행위), 3단계(구조적 차별), 4단계(폭력적 행위), 5단계(개인에 대한 극단적 행위),6단계(제노사이드)를 말한다.
- ↑ 당연히 헛소리이다. 여성 전체를 대상으로 한 제노사이드가 보고된 적 있었는가? 심지어 ISIL조차도 여성을 비정상적으로 탄압하고 억압할지언정, 제노사이드의 대상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ISIL의 선언문을 봐도 최소한 자신들의 규칙을 따르는 여성은 탄압 대상으로 표시하지 않는다. 물론, 이 규칙이라는 것이 비합리적이고 비정상적이라서 정상적으로 규칙을 지키기 힘들겠지만 적어도 죽인다는 목적을 갖고 있지는 않다.
- ↑ 이들은 80-90년대의 조직적인 여아낙태를 제노사이드(또는 젠더사이드)로 규정하는데, 낙태를 전면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낙태에 대한 권리는 오롯이 여성에게만 발언권이 있다는 본인들의 주장에 정면으로 모순된다.
- ↑ 그런데 이 피라미드 주장은 자칫하면 다음 아고라의 영남 공격을 정당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호남혐오는 1단계(빨갱이,전라디언등의 멸칭), 2단계(호남사람은 배신자다.), 3단계(정재계에서의 호남 사람 배제), 4,5단계(김대중 납치 사건 등) 6단계(5.18)가 다 있는 데 비해, 영남혐오는 1단계(개쌍디언,흉노족등의 멸칭)밖에 없기 때문이다.
- ↑ 여성은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라고 보는 것에 주의하자.
- ↑ 당연히 헛소리다. 남성만 잠재적 가해자로 보는 시선이 강해지면서, 공적 자금으로 여성 전용 도서관을 설립하는 등의 추태가 벌어지고 있다. 기분 문제가 아니다.
- ↑ 물론, 여자도 '여자라서' 죽는 것은 아니다. 여자가 약자니까 범행 성공이 쉬워서 여성을 노리는 것과 여성을 혐오하는 것은 다르다. 부하 직원에게 불합리한 폭력을 가하는 상사가 부하 직원들을 혐오해서 폭력을 가하던가? 학교에서 집단 따돌림을 가하는 이유가 혐오 때문인가? 그리고 범죄를 저지를 때 약자인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성공 확률이 높은 것은 여성이 범죄를 저지를 때도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물론 남성이 여성을 보고 방심하는 등의 요소가 끼어들어서 예외적으로 복잡해지기는 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