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식(조선)

(조식(유학자)에서 넘어옴)

nmjohsik_abcsohn.jpg

曺植[1]
1501년 7월 10일 ~ 1572년 2월 21일

1 개요

조선 중기 북인의 남명학파를 창시한 유학자, 남명(南冥). 경상도 삼가현(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출신.

2 본문

당시 점잔을 떨던 조선 사정에 비추면 의아하리만치 적극적인 비판과 철저한 절제를 강조해 의(義)를 중시하여 파장을 일으킨 인물로, 퇴계 이황, 율곡 이이과도 비견되는 조선 성리학의 거두다. 권력자 배출로 학파를 후대까지 보존한 이황이나 이이에 비하면 인지도는 낮지만, 사림의 계보라든가 붕당을 설명할때는 북인의 시조로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네임드급 인물이기도 하다. 진주를 중심으로한 서부 경남 권역(경상좌도)에선 이황에 밀리지 않는 위상을 가지고 있다.[2]

별명은 항상 을 지니고 다녀 선비. 이미지에 걸맞게 말보다 행동을 우선했다.

본디 학문 닦기를 즐기던 성품으로, 25세에 성리대전을 읽고 뜻한바 있어 성리학에 심취하게 된다. 30세부터는 아예 산해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는데, 높은 학문으로 여러번 벼슬길에 오를것을 권유받았으나 벼슬을 꺼리는 성품탓에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나마 맡던 관직들도 대부분 도중에 그만뒀는데 당시 조선은 사화가 겹치던 시기였던걸 생각하면 벼슬에 나아가길 꺼린게 이해가 갈만 하다.[3] 그래도 사후에는 제자인 정인홍 등의 노력에 힘입어 영의정이 제수되었고, 덕천 서원을 지어 모셨다.

성품은 과단성있는 행동가, 달리 말하면 거침없는 과격파라 할수 있다. 말했듯이 평생 벼슬을 멀리하고 처사생활을 했으나 시사에는 큰 관심을 두어 명종시절에는 거침없는 상소를 많이 썼다. 왕실조차도 그의 독설에는 예외가 아니어서 특히 명종을 "선왕의 어린 후사"[4], 문정왕후를 "깊숙한 궁궐의 한 과부"라고 공개 비판한 상소[5]는 벗이었던 성수침이 아직 학문이 원숙하지 못해 이런 과격한 상소를 내밀었다고 평을 할 정도.[6] 당시 문정왕후의 권세와 전횡을 보면 이러한 일침은 용감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여인천하? X까! 나 조식이야! 명종이 하도 기가차서 아무리 임금이 어질지 못하기로서니 욕을 퍼부어서야 되냐라고 분개하여 조식을 죽이려 들었지만 세간의 반발때문에 결국 죽이지 못했다.

이런 과격한 발언은 임진왜란을 예견하는 듯한 발언에서도 드러나는데 평소에 제자들과 대화하다가 왜적이 쳐들어 올 것을 예상했던지 왜적이 설치면 목을 확 뽑아버려야 한다.고 했다고 한다...

위와 같은 대범한 행동은 오히려 할말 못하고 숨죽이던 선비들에게 큰 반향을 얻어, 벼슬을 사퇴하여 처사 생활로 접어들자 더 많은 인재들이 찾아와 배움을 청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그의 명성은 갈수록 높아지고 마침내는 그의 호를 딴 남명학파가 형성되기에 이른다.

게다가 명종이 조식에게 그렇게 까였음에도, 명종실록에 기록된 조식은 오히려 찬양 일색이다. 당시 관직도 마다했던 그의 평판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엿볼 수 있는 부분. 발췌하자면 아래와 같다.

당시 유일(遺逸)에 가탁(假托)하여 실제 학덕을 갖추지 않고 한갖 허명(虛名)으로 도명기세(盜名欺世)하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식(植=조식)은 지신수결(持身守潔)하여 초야(草野)에 묻혀 세상에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으나 그 명망이 조정에 전달되어 관직이 누차 제수되었으나 안빈자락(安貧自樂)하여 끝내 출사(出仕)하지 않으니 그 뜻이 가상하다. 그러나 식은 결코 세상을 잊지는 않았다. 진소항의(陳疏抗義)하여 시폐(時弊)를 극론함에 있어 그 말이 간절하고 의(義)가 올바르게 하였고 시대를 상심하고 난(亂)을 우려하여 임금을 명신(明新)의 경지에 이르게 하고 풍화(風化)를 왕도의 극치에 두려 하였으니 우국지성(憂國之誠)이 지극하다. 오호라! 평소의 가진 뜻을 임금 앞에 다 개진(開陳)하고 끝내 처사(處士)로서 일생을 마치니 그 마음이 충성(忠誠)하고 그 절의(節義)는 높다 하겠다.

다음은 그의 시 한 수. 내용 자체가 화끈하다.

온몸에 쌓인 사십년 찌꺼기를

천 섬의 맑은 물로 다 씻어 없애리라.
그래도 티끌이 오장에 생긴다면
곧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보내리라.

환갑이 넘자 그는 지리산[7] 기슭 덕천동으로 이주해 산천재를 지어 10년의 여생동안 강학에 힘썼다. 이 기간의 그는 말년의 명종에게 학문과 정치의 도를 논하기도 했으며(명종은 조식에게 한세대나 어린 뻘이었지만 3년 먼저 죽었다.) 이후 즉위한 선조가 그의 고명함을 듣고 초빙했지만 거절했으며 대신 '무진봉사'라는 상소문을 통해 서리들의 폐해를 논한 '서리망국론'으로 화답했다. 그의 사후 후학들은 덕천서원, 회현서원, 신산서원을 건립해 스승의 업적을 기렸다.

그는 항상 경의검(敬義劍)이라는 검 한 자루와 성성자(性性子)라는 방울 한 쌍을 차고 다녔다. 이는 자신의 수양도구로 삼아 안으로는 거울과 같은 마음을 유지하고 밖으로는 과단성 있는 실천을 이룩하고자 했던 그 다짐을 한시도 잊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경의검에는 "안으로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결단케 하는 것은 의다."라고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조식은 죽기 전 경의검은 강직하고 불같은 정인홍에게, 성성자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외손녀 사위인 김우옹에게 각각 물려져 학통을 이어받는 상징이 되었다. 조식의 가장 직계에 가까운 정인홍의 경우 경의검을 평생 지니고 다닐 정도였다.[8]

한죽당 섭필에 따르면 본래 조식은 처음에는 매우 검소하여 거친 베옷과 꾸미지 않은 말을 타고 들에 나갔었다. 그런데 장사꾼과 서로 길을 비키라고 다투다가 장사꾼이 남명을 밀어 말 아래로 떨어뜨리고 욕지거리를 하면서 갔다. 그러자 남명이 탄식하기를,"사군자가 옷차림이 허술하니 장사하는 놈에게도 업신여김을 당하는구나."하였다.
그 뒤부터는 마침내 화려한 옷과 좋은 말에 수행하는 종이 다 호걸스럽고 건장하니 사람들이 모두 길을 양보하고 감히 거스르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탄식하기를, "사군자는 외모 꾸미기를 응당 이와 같이 해야 한다."하였다. 그 뒤로는 너무 사치한 것으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에도 진주(晉州)ㆍ단성(丹城) 사람들이 성대하게 의복과 말을 단장하는 것은 대개 그의 유풍(遺風)이라고 전하고 있다.[9]

3 제자

그의 남명학파를 계승했다고 공인되는 인물로는 위의 정인홍과 곽재우가 있다. 이들과 달리 남명과 퇴계 이황을 공동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한[10] 제자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김면이다.[11] 그의 실천적인 태도에 영향을 받았는지 이 셋 모두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켜[12] 명성을 떨치게[13][14]된다.[15] 그러나 전쟁중 병사한 김면과 일찌감치 재야로 내려온 곽재우와 달리, 끝까지 조정에 남아있던 정인홍은 스승의 불같은 기풍을 고집하고 제 목소리를 내다 선조시절에 영변에 유배되는 수난을 겪기도 하고, 광해군때 다시 정계에 복귀하여 스승 조식의 명예를 높이려고 애를 쓰다 청금록 사건 등을 야기해 정적들을 늘렸다. 결국 인조반정으로 정인홍이이첨은 참수되고 그가 이끌던 조식의 남명학파마저 계보가 단절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3.1 퇴계 이황와 남명 조식

그는 생전 이황과 일종의 라이벌 플래그를 형성했는데, 내면에 치우친 이황의 학문을 비판하고 하학이상달론을 주장했다. 실천적인 그의 사상은 경의협지(敬義夾持), 즉 경전만 읊을것이 아니라 의(義)를 겸비해야 한다는 표현에서 잘 드러난다.

이황이 벼슬을 여럿 지냈음에도 학문 이론을 중시하고 현실 참여에는 가급적 거리를 뒀다면, 조식은 벼슬은 멀리 해도 현실참여에는 앞장서는 태도를 보였다. 이 두학자때문에 영남의 학풍은 둘로 나뉘어 조식의 후학들은 지리산이 있는 낙동강 서쪽의 경상우도에, 이황의 후학들은 안동이 있는 낙동강 동쪽의 경상좌도에 많았다.

생몰연도에 나와있는 것처럼 퇴계와 동갑내기다. 서로 북극성 같은 존재니 어쩌느니하며 칭찬도 하긴 했지만 실제로는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둘이 한번도 만난적도 없고 서신으로 키보드 배틀논쟁을 자주 했다고. 퇴계와 고봉 기대승의 사단칠정 논쟁을 고까워해서 퇴계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뿌리고 비질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를 담론하여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도리어 남에게서 사기나 당하고 그 피해가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치니 아마 선생같은 어른이 꾸짖어 그만두게 하시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같은 사람은 마음을 보존한 것이 황폐하여 배우러 찾아오는 사람이 드물지만, 선생같은 분은 몸소 상등의 경지에 도달하여 우러르는 사람이 참으로 많으니 십분 억제하고 타이르심이 어떻겠습니까? 삼가 헤아려 주십시오. -퇴계에게 드립니다(與答退溪書)-

즉 사단칠정 논쟁으로 이와 기의 기본도 서있지 않은 당시 유생들이 아는척만 하며 헛바람이 들자 이를 비판하며 퇴계에게 보낸 편지. 왠지 요즘의 현실과도 비슷해 보이는 건 기분 탓? 퇴계 또한 남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잘난 척은 심하고 하는 말은 과격하고 노장(老莊=도가)에 물들어 있다.[16] 어떻게 그사람을 도를 아는 사람이라 하겠는가?"고 제자들에게 뒷담화하기도 했다. 대학자들의 인간적(?)인 면모랄까.

어우야담에서는 이황과 조식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황은 "술은 그래도 소홀히 하기 쉽지만 색(色)은 가장 참기 어렵소."라고 운을 떼자 조식은 "나는 색에 관해서는 패전한 장수와 같소. 이에 대해 묻지 않는 것이 좋겠소"라고 받아쳤다고 한다. 다만 상술되었듯 이황과 조식은 실제로는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고, 어우야담은 어디까지나 야사이니 그냥 이런 이야기도 있다는 정도로 알아두자. 만일 이게 실제 있었던 대화라면 아마 서로 교환한 서신에 있었던 내용일 수는 있을 것이다.

팬텀 하록웹툰 포천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간단명료하게 묘사해 놓았다.#

3.2 분파와 분열 그리고 쇠퇴

초기에 이황과 조식의 후학이 함께 동인으로 모여 서인과 대립했으나, 정철이 지휘한 정여립의 모반사건 이후 붕당정치에서 강경파인 조식 계열(& 서경덕의 후학 약간)은 북인, 온건파인 이황의 후학은 남인에 다수 참여한다. 북인은 의병 등으로 조선왕조를 위기에서 구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특히 류성룡의 실각 이후 조정에서도 세를 확대해 집권당으로 성장하지만, 영창대군의 계승 문제를 놓고 다시 대북, 중북, 소북으로 분열된다.

선조 사후 광해군의 지지파가 대부분 북인이였기에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을 지지하던 집권파 대북이 쇠락하고 말았으며, 여기다 대북의 사상적 기반이라는 이유로 남명학파에도 철퇴가 가해져 왕성하던 맥은 사실상 끊기고 말았다. 여기다 본인 스스로가 학문이란 옛 성현의 말씀을 갈고 닦는데 있는 것이라 생각하여 이렇다 할 저서를 남기지 않았고 제자들 또한 스승의 학문을 정리한다거나 하는 일이 없었기에 이황이나 이이의 제자들 처럼 학술적인 구심점도 미약했다. 애초에 스승 조식이 그러했듯이 남명학파 태반은 관직에도 거리를 두려했기 때문에 결국 그의 학풍은 끊어진다.

4 교과서

7차 교육개정 이후 초등학교 5학년 국어교과서에는 그의 일대기가 소개되기도 했다. 첫 머리부터 그의 상소(바로 그 단성소)가 수록된다. 물론 조선내내 세를 떨친 후학들의 버프로 지금까지도 조선 성리학 하면 튀어나오는 이황이나 이이만큼 유명하진 못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에 대한 조명이 계속 이뤄지는 추세라 인지도는 점점 상승하고 있다. 게다가 그의 날선 비판은 요즘 정치판에 대입해도 훨씬 싱크로가 잘 맞아서….

5 야사

이렇게 근엄한 선비였음에도 불구 그에게도 일종의 벽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화려하게 수놓은 솜이불을 수집하는 것이었다. 조식은 이불들을 전부 깔아놓고 관상하길 즐겼는데 어느 날은 친구 서경덕의 제자로 알고 지내던 토정 이지함이 찾아와 일부러 그런 이불 위에서 냅다 뒹굴고 하는 기행을 벌였다고 한다.

6 관련 동영상

업로드 날자순

  • 남명 조식의 신명사도 강의, 홍익학당 # 2012. 11. 17.
  • 선비의 발자취 '남명 조식', 천지매거진 # 2013. 2. 7.
  • 국회 인문학 아카데미 5회 남명 조식, 대한민국국회 # 2014. 12. 1.

7 관련 항목

  1. 현재는 중국 삼국시대의 조식(曹植)과 성씨의 획 수를 구분해서(曹와 曺 - 세로획 개수가 다름) 표기되고 있으나 사실 曹와 曺는 같은 글자의 이체자라 통용됐었다. 사실 과거 문헌에도 두 글자는 통용되는 걸 볼 수 있다. 오늘날 曺씨로 알려진 수많은 인물들이 조선시대 문헌에 曹로 적혀 있거나 반대로 중국의 曹씨들이 중국 옛 문헌에 曺로 돼 있는 일이 허다했다. 과거에는 같은 한자에 모양이 다른 여러 이체자가 통용이 됐고 지금보다 그런 글자들의 사용이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실상 중국 삼국시대의 조식과 조선시대의 조식은 한자까지 같은 동명이인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오늘날 한국에서는 曺-한국의 성씨에 사용, 曹-중국의 성씨 또는 기타 어휘에 사용한다는 표기 원칙이 세워졌으니 적어도 한국어에서 한자를 표기할 때는 여기에 따라 구분을 지어주는 게 좋긴 하다. 참고로 현재의 중국어일본어에서는 曺 자가 사용 가능한 한자로 채택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의 조씨들도 전부 曹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2. 그래서 진주에 자리잡은 경상대학교는 주기적으로 학회도 열고 남명학관이란 건물도 지어놓는 등 남명사상 연구에 꽤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3. 사실 38세에 벼슬이 내린다고 하자 싫은 내색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퇴계나 율곡에 비해 제자들의 세력이 약해서 막상 온건 종 9품 능참봉. 이후 전생서 주부, 단성현감, 조지서 사지 등에 제수되지만 당시 조정의 문제점을 비판하며 모두 사퇴한다.
  4. 말이 이렇지 사실상의 의미는 고아란 소리다.
  5. 흔히 이 상소를 '단성소(丹城疏: 단성현감을 사직하면서 올린 글이라 이렇게 부른다.)' 혹은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라고 부르는데, 이 상소 자체는 대단한 명문이다. 요즘의 정치판에도 참 시사하는 면이 많은 글.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고.
  6. 명종한테 너 도대체 뭘 아냐? 라고 묻기까지 했다(!)
  7. 일생 12번을 등정했는데 유토피아 청학동을 찾기 위해서라고 한다.
  8. 아쉽게도 지금은 둘 다 행방을 알 수가 없다. 성성자는 김우옹 이 후 행방이 묘연하고 경의검은 정인홍 이 후 조식의 종손이 대대로 가지고 있다가 한국전쟁 때 분실하고 만다. 다만 분실 전 흑백사진을 남겨두어 찾아 볼 수 있다.
  9. 야사에는 토정 이지함이 친구 조식을 만나기위해 그의 집을 방문했으나 마침 조식이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런데 조식의 방이 지나치게 화려했고 특히 비단 방석이 눈에 거슬렸다. 이에 토정은 제자 고청 서기와 함께 흙이 잔뜩 묻은 신발로 방석을 짓밟고 돌아갔다. 집에 돌아온 조식은 지저분해진 방을 보고 화내긴커녕 역시 토정이 한 짓이 분명하다며 호탕하게 웃었다고 한다.
  10. 19세(1559년)에 지리산 아래 덕산으로 남명선생을 찾아가 제자
  11. 김면 장군 유적
  12. 동아일보 1986년 5월 17일
  13. 임진왜란 시기 고령 지역의 의병운동과 의미
  14. 임진왜란 (고령 사건사고와 사회운동)
  15. 당시 정인홍의 나이는 60이 넘은 상태였다. 환갑이면 묫자리 알아보러 다니던 그시대에, 그것도 왜군의 초입 루트였던 영남에서 의병을 지휘했으니 그 불같은 성품을 짐작할수 있다.
  16. 이것은 조식의 호가 남명(南冥)이었다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바로 <장자>의 첫 대목인 붕새의 이야기에서 붕이 날아가는 곳이 남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