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문화축제/노출 부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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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경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 등지에서 퀴어퍼레이드의 일부 참가자의 노출 정도가 일반인이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과도하다는 비판이 있었다. 행사 반대세력 외에 성소수자 단체 내에서도 "굳이 그런 옷을 입었어야 했느냐"며 일반인의 부정적 시각을 우려하는 반응이 있었음이 퀴어축제 준비위원 인터뷰를 통해 확인되었다.


퀴어문화축제의 노출 부정론은 크게 다음과 같다.

1 통념과 불쾌감 문제

1.1 불쾌감도 교묘하게 포장된 혐오다?

노출에 대해 불쾌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그것도 교묘하게 포장된 호모포비아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꼭 호모포비아적인 동기에서 노출을 불쾌하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다. 카우치 성기 노출 사건은 그들이 동성애자였기 때문에 그렇게 비난받았을까? 물론 어떤 사람들은 호모포비아적인 동기 때문에 노출을 불쾌해할 수도 있겠지만, 모든 불쾌해하는 사람들이 호모포비아라는 것은 아니다.

짧게 말하자면, 그들이 "게이라서" 노출이 눈살 찌푸려진다는 게 아니고, 그들이 "노출했기 때문에" 눈살이 찌푸려진다는 것이다. 남녀를 막론하고, 이성애/동성애를 막론하고, 다수/소수를 막론하고 노출은 대중의 지탄거리가 된다. 설령 배타적 이성애자 남성들끼리 모여서 동성애에 대한 혐오발언을 하는 시위를 하는데 그들이 퀴어문화축제처럼 옷을 벗고 다녔다면, 그들 역시 메시지와는 무관하게 욕을 먹었을 것이다. 어쩌면 "나도 똥꼬충 싫어하는데 옷 벗는 건 문제 있어 보임" 이런 반응일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퀴어문화축제의 경우는 "나도 성 소수자 존중하는데 옷 벗는 건 문제 있어 보임" 정도의 반응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스탠스가 '반드시 불가능하다고 지레짐작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1.2 성 상품화 이중잣대 논란

간혹 "길거리에 널린 19금 광고들과 대중가요 걸그룹들의 온갖 적나라한 퍼포먼스에는 불쾌해하지 않으면서, 왜 우리 노출에만 유독 이렇게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는가? 우리가 성 소수자라서 그런 것이 아닌가?" 와 같은 반론이 나오기도 하는데, 공연히 성 상품화 이슈를 끌어들여서 어떻게든 호모포비아 프레임을 씌우려는 시도다. 퀴어퍼레이드 관련 논란에는 이러한 "호모포비아 독 풀기" 문제가 놀랍도록 만연해 있다. 물론 소돔고모라를 방불케 하는 지나친 성 상품화의 물결은 분명히 올바르지 못하고, 이에 대해서는 이미 (고쳐지지는 않을지언정) 사회적으로 자성도 많이 이루어져 있는 상태이다.

흔히 "비판하지 않는다" 고 말하는데, 자기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셈이다. 웹 페이지나 학술자료를 가지고 검색을 잠깐만 해 봐도 아이돌들의 성적인 무대, 노출이 심한 광고에 대해 우려하거나 분석하는 수많은 자료들을 확보할 수 있다. 심지어 성 상품화를 비판하는 자료들 중 상당수는 그들이 그렇게나 혐오하는 특정 종교 신자들이 생산한 자료다.

1.3 호모포비아들 날뛰니까 얘기하지 말자?

또한 이와 관련하여 "개인이 불쾌해할 수 있음은 인정하나, 호모포비아들이 이를 자기네 혐오의 근거로 쓸 수 있으니 불쾌감의 표현은 자제해 달라" 고 요청하는 경우도 있다. 정말로 축제측이 이를 인지하고 있었다면, 이 축제는 쉽게 말해서 자폭이다. 호모포비아들은 동성애가 선천적이라면 종자를 말리려 들고, 동성애가 후천적이라면 치료시키려고 드는 양반들이다. 일반 대중이 불쾌감을 표출하지 않아도, 노출했다는 사실만으로 축제는 그들의 매의 눈에 걸려들어서 좋은 먹잇감이 되는 거다. 그렇게 자기들이 사회적으로 불리하다면, 그렇게 호모포비아들을 조심해야 한다면, 그냥 애초에 노출을 하지 않았으면 되는 일이 아닐까?[1]

또한 이는 넓게 보면 일종의 진영논리다. "우리의 적들이 악용할 수 있으니 이런 얘기는 다시는 꺼내지도 말라" 는 것은, 심지어는 정당 지도부 회의에서도 국회의원들 사이에서 심심찮게 오가는 흔한 마법의 말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그 정당을, 그 집단을, 그 정체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아끼는 사람은, 설령 적들에게 비웃음을 당하고 욕을 먹더라도 용기를 내어 비판할 수 있다. 다수의 횡포가 아무리 심하다지만, 그걸 빌미로 소수의 비판점이 면책될 수도 없는 일이다.

1.4 처음부터 사회의 인정을 바라고 하는 축제가 아니다?

퀴어문화축제가 사회적 논란이 되자 찬성론자들은 "퀴어(queer)란 본디 사회의 일상규범과 일반적 관점에 비추어 이상하고 기묘해 보이는 것을 의미하며, 우리의 문화축제는 그러한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일 뿐" 이라고 해명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다양성을 참아 넘길 수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교묘하게 가식적으로 포장한 또 다른 포비아일 뿐이며, 대놓고 싫다고 말하는 것보다도 더욱 역겨운 반응이다" 고 분개하고, 누가 당신들에게 반듯함과 문란함을 구분할 권리를 주었느냐고도 되묻곤 한다.

이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너희들 그렇게 해서 어디 사회적으로 공감이나 받겠니?" 라고 물었을 때 "됐거든, 우린 너희 같잖은 인정이나 받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너희들 기분 나쁘라고 축제하는 거야. 내년에는 더 기분 나빴으면 좋겠다!" 라고 대답하게 되면 건설적인 대화는 거기서 끝이다. 이를 통해 무엇이 변화될 수 있는가? 탈동성애 운동가들이 자기네들 운동의 문제점을 깨닫고 화합의 자리로 나올 수 있는가? 동성애에 대해 별 생각이 없던 사람들이 그들의 진정한 모습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로 수용할 준비를 할 수 있는가? 호모포비아들이 그들이 괜한 세기말적 두려움(…)에 빠져 있었음을 뒤늦게나마 인정할 수 있겠는가? 기대되는 효과는 단 하나다. 성 소수자 운동가들로 구성된 소수집단이 극화(polarized)된 사회배척에 빠져서 소위 "주류" 사회계층과의 교류를 더욱 축소하는 것뿐이다. "다름" 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회를 바로잡기는커녕, 그 사회와 소수집단 간의 상호 반감을 극대화하는 데 그치는 것이다.

둘째, 소수자운동에 있어서 일반 대중(mass)의 역할을 지나치게 무시한 일부 선각자들의 도덕적 우월주의로 빠질 위험이 있다.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다름이 생소하게 느껴지는 다수 대중들은 배척시키고, 다름을 이해하는 소수의 사람들끼리만 모여서 그들만의 축제를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꼴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회운동이나 사회적 제도의 변화를 이끄는 데 있어서, 가장 쉬운 것은 이해관계자 및 정체성이 동일시된 집단[2]의 참여를 독려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쉬운 것이 그 주제에 평소 많은 관심이 있던 사람들[3]의 참여를 독려하는 것이다.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그 주제에 관련하여 개별적으로 움직이는 전문가 집단[4]을 참여시키는 것이다. 가장 어려운 것은 그 주제에 관심도 없고 열의도 없는 다수의 대중[5]의 지지를 (어떤 식으로든) 확보하는 것인데, 이들의 도움이 있어야만 그 운동의 목표가 달성될 가능성이 비약적으로 상승한다.[6] 실제로 역사상의 많은 혁명이나 진보들을 보면 일반 대중들에게 먹힐 만한 호소를 함으로써 크게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게 하거나 작게는 그들의 암묵적 승인을 구해내는 데 성공했다. 역사 속에는 이들의 협조와 승인을 구하지 못해 "우매한 군중, 저열한 대중" 을 원망하며 스러져 간 선각자들이 부지기수로 많다. 물론 퀴어문화축제가 그렇게까지 거창한 것이라고 말하기는 살짝 어렵지만, 아무튼 요지는 모두에게 먹힐 수 있는 이야기를 하든지 아니면 상징(symbol) 싸움에서 승리하든지 해야 하는데, 이런 대중적 여론을 도외시하면[7] 안 된다는 것이다. 사회의 인정을 얻어내는 것이 최종목적은 아닐지라도,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중간단계 정도는 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동성애자 인권 운동의 많은 부분이 "알고보면 동성애자도 성적 지향만 다를 뿐, 모든 것이 이성애자와 같습니다" 와 같은 홍보를 통해 이루어져 왔는데 이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는 본질적으로 성적 지향에 대한 담론과 퀴어학에 대한 담론이 서로 약간 맥이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무엇이 방정한 몸가짐이고 무엇이 퇴폐적이고 음란한 것인가에 대한 합의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물론 "동성애자들은 음란하다" 는 호모포비아들의 편견에 대처하기에는 좋지만, 성적 지향만 다를 뿐이지 역시나 평범한 사회인으로서 살고 싶어하는 성 소수자들에 대해 적절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분명히, 퀴어학은 기존에 사회적으로 통용되던 "평범함" 의 의미와 도덕적 정당성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했다는 데에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성 소수자 운동과 엄밀하게 구분되면서도 발맞추어 가며 진행해야 할 논점이다. 퀴어문화축제에 적잖은 성 소수자들이 불쾌해했던 이유는, (국내에 퀴어 개념이 제대로 홍보되지도 못한 시점에서) 평범하게 사회규범을 지키며 살고자 했던 성 소수자들이 축제의 "퀴어" 로서의 의의를 납득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넷째, 이들은 퇴폐와 음란에 대한 기준을 개인이 정하고 요구하는 건 오만한 처사이며[8] 자신들은 얼마든지 그 "자의적인" 기준을 넘나들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조금 이상한 반론이다. 물론, 개인이 함부로 퇴폐와 음란에 대한 기준을 정할 수는 없으며, 그것이 특정 종교적 교리에 의해 뒷받침된다 해도 역시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은 신정국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실 이 기준은 개인이 마음대로 정한 게 아니라 그 개인이 있기 이전의 사회가 정한 것이었다. 개인이 가진 퇴폐와 음란의 기준은 사회화를 통해 학교에서 학습된 것이다. 다시 말해, 개인이 오만한 게 아니라, 부모님유치원 선생님과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그들도 그러한 사회적 합의를 지킬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행여 바지를 벗어내리기라도 하면 "아이구 챙피해! 아이구 부끄러워!" 하고 부모가 호들갑을 떨면서 혼내는 것은 개인의 평생에 있어 생각보다 강력하다. 물론 그 부모 역시 그들의 부모로부터 그렇게 배워 온 것이다. 따라서 특정 개인에게 그러한 도덕적 판단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은 부당한 것이다. 더 나은 방법은 사회 구성원 모두가 적절한 절차를 통해 참여할 수 있는, 사회규범을 개선하기 위한 국민적 숙고와 고민을 제안하는 것이다.

1.5 소수자에게만 세련된 전략을 요구한다?

이렇게 얘기하면 이번에는 "우리에게 그렇게나 세련되고 우아한 소통전략을 요구하는 것만큼, 당신들도 세련되고 우아하게 불쾌감을 '표시' 해 보시지?" 같은 퉁명스러운 반응이 나오기도 한다. 물론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어느 쪽이든 간에 성숙한 태도는 필요하다. 그러나 발가벗은 몸을 보고 비명을 지르는 행인들[9]에게 함부로 가운데손가락을 치켜드는 축제 측에서 먼저 꺼낼 말은 아니다. "우리는 억압받아 왔어, 고통받아 왔어, 배척당해 왔어, 그러니까 이렇게 해도 돼" 라는 마인드셋을 놓지 않기 때문에 대중의 놀라는 반응에 도리어 적개심을 드러내는 것이고, 신중한 우려의 목소리까지도 듣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2 노출의 효과성

2.1 뜬금없는 노출, 전후맥락의 부재

퀴어문화축제는 축제로서 즐기는 것 외에도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신장하고 성적 자기결정권을 표현하는 것 역시 중요한 활동목표로 보고 있다. 그러나 슬럿워크처럼 여성의 노출에 관한 비하발언에 대한 반발로 촉발되었기 때문에 노출의 의미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케이스와 달리, 퀴어퍼레이드는 노출과 직간접적 연관이 거의 없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노출을 하는 이유를 이해하기 힘들다. 이럴 경우 노출도 본래의 의도가 아닌 자극적인 이미지와 불쾌감만이 전달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일부 참가자들의 복장과 행위는 대개 비하적으로 묘사되는 인터넷 만화에서의 성소수자 모습과 흡사하며 이는 성소수자들의 바람과 달리 일반인에게 그릇된 인식과 불필요한 거부감을 유발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즉 목적이 있는 노출이라고 하더라도 적합한 수단인지, "표현의 수단으로서 부작용이 큰 신체 노출의 효용성" 에 의문이 제기된다.

노출의 주된 의의 중 하나로 "'존재'에 대한 표현, 억압에 대한 저항, 자기긍정의 의미로 노출은 필요하고 퀴어퍼레이드에서의 노출을 경범죄에 해당되는 무의미하거나 상업적인, 아니면 단순히 '음란성'을 띄는 노출과 동일시하기는 어렵다." 라는 논지가 있으나 그 범위가 애매하다는 것도 논란의 요인이다. 예를 들어 겨우 성기 부위만을 가리는 옷을 입은 사람이 거리에 활보하면, 퀴어퍼레이드 참여자들은 저 사람은 저항의식이 강한 사람이구나 생각할 지도 모르지만, 퀴어퍼레이드가 있는지도 모르고 근처를 지나던 사람, 혹은 아이와 동반한 부모들도 그렇게 생각할리 만무하다. 이런 일반 대중들이 과연 그들의 노출을 보고 억압에 대한 저항이니, 자기긍정이니, 존재감의 어필이니 하는 이상을 떠올릴 수 있을까? 굳이 노출을 하지 않아도 무지개색이나 핑크색 정장을 입거나 남녀가 반대 성별의 정장을 입는 것으로 대체가 가능하다. 이렇게 되면 훨씬 더 축제를 보는 시선이 나아질 것이다.

요약하자면, 노출이라는 리스크 큰 방법을 선택하면서, 그 축제의 지향점에 대해 굳이 구구절절 설명해야만 한다면, 이 축제는 지향점에 도달하기는커녕 노출로 인한 역효과만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의도가 좋다고 한들 사회의 인식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노출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존재한다면 성소수자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나 그들에게 갈 수 있는 피해를 막기 위해 사회적 인식에 대한 부분을 감안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2.2 선의의 피해자들

성소수자들 또한 원래 의도와 달리 다양한 성소수자의 이미지가 곡해되거나 불필요한 오해가 생길 것을 우려한다.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거나 자신의 성적인 정체성 때문에 주위에 알리지 못하고 고통받는 성소수자들은 주변인들이 이런 부분에 기반한 편견을 가졌을 경우, 더더욱 커밍아웃을 하는 게 힘들 수밖에 없다. 가장 피곤해지는 사람들 중 하나가 바로 용기를 내어 겨우 주위 사람들에게 커밍아웃을 한 사람들로, 이들은 축제로 인해 유발된 주변인들이나 다른 사람들의 편견을 바로잡으려는 소모적인 노력에 지치곤 한다. 게다가, 사람들은 자신과 관계없는 다른 집단의 구성원들에 대해서는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10] 이들은 "설마 너도 그런 식으로 노냐?" 와 같은 질문 세례에 직면하게 된다. 사람들의 인식은 강한 임팩트에서 그 집단의 스테레오 타입을 정하게 된다. 부정적일 수록 더더욱...

이렇게 한쪽에서는 일군의 소수자들이 축제랍시고 움츠린 어깨를 펴고 (자신들만의) 터질 듯한 자유와 해방감을 만끽하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는 또 다른 소수자들이 그 모습을 보고는 커밍아웃을 반쯤 포기하거나 당분간 유예하기로 마음먹게 되고 다시 골방 속으로 들어가고 만다. 이미 커밍아웃을 한 소수자들은 축제에서 벌어진 그 모든 일들에 대해서 "일반 대중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으로" 구구절절 해명해야 할 처지에 놓인다. 축제의 의도를 굳이 대신 해명해 주어야 할 하등의 의무가 그들에게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2.3 잠재적 지원군을 걷어차다

이미 누차 언급했지만, 일반 대중들은 성 소수자에 대해 나쁜 인식이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회정책 입안의 측면에서 본다면 그 주제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또는 사회에 의해 암묵적으로 소수집단에 대한 고정관념은 갖고 있을지언정,[11] 개인 수준에서 면대면으로 소통할 경우 의외로 개방적이고 존중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올바른 홍보와 적절한 교육을 펼쳐서, 탈동성애 운동가들의 개소리를 사전에 차단하면서도 집단적 고정관념을 변화시켜 지지자를 최대한 많이 확보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퀴어문화축제는 그런 잠재적 아군 집단에 대해서 고려할 생각이 없거나, 내지는 적극적으로 적으로 돌리고 있다. 사회에 의해 주입된 암묵적인 성 소수자의 이미지가 깨지기는커녕, 자신의 퀴어퍼레이드 목격 경험을 통해 더욱 지지되고 고착되게 만드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이는 탈동성애 운동가들에 대한 전략적 이점을 제 손으로 내어주는 오판이다. 비록 축제가 대외적으로는 "많은 시민들의 자연스러운 참여" 를 표방할지는 모르지만, 과연 얼마나 많은 일반 대중들이 그 축제에 참여하여 발칙한(?) 스트리퍼들의 사이에 끼게 될지는 미지수다.

2.4 외국에선 효과가 있는 방법?

설령 다른 나라에서 "효과가 있었다" 고 인정받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꼭 우리나라에서도 통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우리나라는 우리나라만의 의식세계가 있고, 우리나라의 현실에 맞는 고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중시하고 개인의 스캔들을 집단에 잘 투사하지 않는[12] 서구 개인주의 사회에 비해, 집단의 조화와 사회의 연결성을 중시하는 동아시아의 집단주의 사회에서는 노출이 가져올 사회적 후폭풍과 성 소수자 커뮤니티에 가해질 불이익이 더 클 수밖에 없다.

혐오받는 소수자들이 관심없던 일반인을 설득하기 위해선 충격요법이 아니라 정중함이 제일 중요하다. 관심 없던 일반 대중들에게 무례함이 입력되는 순간, 어쩌라는 거냐는 반응과 함께 일반적인 편견이 고정된다.

그리고 "국내의 노출 부정론자들이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들은 외국에서는 전부 30~40년 전에 이미 나왔던 버려진 대안들이다!" 와 같은 발언들도 마찬가지다. 물론 그들의 시행착오를 타산지석으로 삼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노출 긍정론자들은 그 행사의 외적인 현상만을 보는 데 그칠 뿐, 실제로 그곳에서 어째서 그 방법이 "효과가 있었으며" 온건한 노출 부정적 대안들이 "실패한" 것인지 그 시대적, 사회적 맥락을 찾으려는 시도는 거의 드물다. 그들은 그저 "아하, 일반 대중들은 우리가 좋게 말하면 안 듣고, 난리법석을 쳐 줘야 듣나 보구나! 우리도 마찬가지일 거야!" 라는 결론으로 넘어갈 뿐이다

2.5 반복하면 마침내 수용될 것이다?

이런 의견은 종종 강성 사회운동가들이나 과격한 페미니스트들이 제기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즉, 처음에는 낯설게 여겨지고 일견 폭력적으로 보이는 방법이지만, 반복하다 보면 점차 유화적인 방향으로 인식이 개선될 것이라는 얘기다. 이들은 이에 덧붙여서 서구 사회에서 수십 년 동안 그 효과(?)가 증명되었다고도 강조한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풍토와 문화, 사회적 맥락에서도 효과를 나타낼 것이 분명하다는 얘기다.

바로 위의 주장과 이 주장은 전체적으로 프라이드 퍼레이드의 모태가 된 스톤월 항쟁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13] 문제는, 1969년이라는 이 당시의 시대정신의 흐름이 무엇이었는지를 간과했다는 것이다. 이 시기 미국은 각종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사회적으로 편견과 차별 어린 인식들이 확 깨어지는 것이 반복되던 시절이었다. 그야말로 터질 듯한 자유와 인권의 개화기였던 것이다. 게다가 성 소수자 운동이 비단 그 항쟁 하나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동일한 규모의 강성 항쟁들이 숱하게 반복되어 여기까지 온 것도 아니다. 한때 슬로건으로 쓰였던 "It's getting better!" 는 (때로 스톤월 항쟁 같은 큼직한 전환점도 있었지만) 알게 모르게 조금씩 많은 노력과 기여가 있어 왔음을 암시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과격한 사회운동을 강행하는 것이 정말로 효과가 있는지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온건한 방법이 이루어낸 것이 도대체 뭐가 있느냐고도 묻지만, 과격한 방법에는 그만큼 강한 되튕김이 돌아온다는 것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생각이 옳다면 대규모의 혁명과 파격이 반복되는 사회일수록 더욱 인류의 이상에 가까워져 있을 것이다.

3 기타 논점들

3.1 표현의 자유 논란

퀴어 페스티벌의 참가자들의 과도한 노출이 불법인가에 대해서도 이론의 여지가 있다. 스스로 표현의 자유와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상황하에서 노출은 편협한 이기주의에 불과하다. TV에서 여성의 유방이 서슴없이 보여주는 네덜란드나 타인의 자유보다는 한 사람의 표현의 자유를 더 존중하는 프랑스의 경우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이지 대한민국은 엄연히 이들 국가와 다른 노출/폭력의 표현수위를 규정하고 있음을 보자.

다만, 당해 사안을 규정한 경범죄처벌법 조항의 경우, 모호성의 측면 때문에 법학자들이 위헌성 논란을 제기하고 있다. 그 점 때문에 실제로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으로 한 것이 관련 조항의 처벌을 완화한 것이다.

3.2 사회규범과 윤리는 가해자들의 억압일 뿐이다?

일부 과격한 소수자들은 실제로 "그간 참고 참아 왔던 것들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우리의 분노에 대해서 규범과 도덕을 들어 재단하려고 하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폭력적이고, 강자의 치졸한 자기방어에 불과하다" 면서 그들의 분노를 숨김 없이 드러낸다. 즉 규범과 윤리의 "프레임" 에 가능한 한 엮이지 않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이거, 가만 생각하면 앞뒤가 안 맞는다. 규범과 도덕, 윤리는 도리어 약자가 강자를 공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규범과 도덕, 윤리로 뒷받침되는 사회운동은 어마어마한 정당성이 부여되기에 강력한 파괴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건 가해자의 논리일 뿐이라고? 단순히 선점효과일 뿐이다. 사실 사회 주류가 동원하는 가장 대표적인 무기는 도덕 같은 게 아니라 다름아닌 다수결의 논리였다. 괜히 19세기 중엽의 미국 사회운동가들 사이에서 이에 대항하기 위한 한 사람으로서의 다수(majority of one)라는 슬로건이 인기를 끌었겠는가?[14] 다수의 횡포에 도덕이 꺾여서는 안 되고, 도덕적 정당성만 있다면 소수의 대의는 다수결조차도 압도할 수 있다는 얘기다.

위 주장의 모순은 도덕은 (당연히 다수에 의해)보편적으로 옳다고 믿어지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다수의 입장과는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닌다. 위주장은 추상적이고 모순적인 문장들로 인해 해석에 어려움이 있지만 도덕적 정당성이 강력한 무기이고 강자를 압도 할 수 있다는 내용이 약자의 원하는 바를 관철함을 뜻하는 것이라면, (법은 소수의견을 더 지지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ex 차별금지법. 법의 힘을 빌리는 경우는 제외한다.) 결국은 내용상의 약자가 약자가 아니라 다수인 경우( 도덕은 다수의 것이다.)나 소수가 다수를 회유해/입장이 반전되어 다수결로 누른다는 소리다. 하지만 다수를 (다수가 가진)도덕적인 정당성으로 회유하는 것은 그 도덕이라는것에 심각한 모순성이 있지 안은한 힘들다.
차별금지법은 천부인권의 가치라는 일종의 규범을 내세운 소수자들 보다 "보편적인 가족관 이라는 도덕을 신봉하는" 사람이 다수 이기 때문에 통과 되지 못했다. 동성결혼 논란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인의 도덕관은 성소수자들을 지지하지 않고 한국은 규범보다 도덕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경향이 강한 사회이다.(그 규범또한 소수자들에게 모두 유리하지는 않다ex남녀 이외에는 부부에 준하는 대우를 받을 수 없는점) 그러므로 규범과 도덕이 뒷받침되는 성소수자 운동은 실현되기 어렵다. 물론 그것이 소수자들에게 모든 범법행위에 대한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해석에 있어 사회에 대한 피해망상에 의한 반사회적인 행동보다 경범죄 처벌법, 풍기문란, 동성결혼 불인정같은 헌법적 가치, 자유를 억압는 부당한 법규에 벜규를 날리는 편으로 보는것이 합리적이다.

사실 이 주장은 호모포비아들이 도덕이라는 사회적 가치를 재빨리 선점했기에 나온 것이다. 분명 좋지 않은 상황이지만, 그래도 소수자들은 도덕의 기치를 그들에게서 빼앗아서 사회의 정의의 이름으로, 인간애의 이름으로, 인간으로서 누려야 마땅한 당연한 권리라는 이름으로 소수자 문제를 재점화시켜야 했었다. 그러나 호모포비아들이 도덕의 깃발을 흔들고 있는 걸 목격한 후, 축제 측은 도덕 체계 자체를 아예 외면하고 거부하기로 선택한 듯 보인다.

분명, 소수자들이 그토록 두들겨맞다가 이제 한 번 발악한 걸 가지고 바로 도덕의 프레임으로 얽어매는 비열한 짓을 벌이는 호모포비아들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들의 비열함과 위선에 대해 도덕을 활용해서 제대로 폭로하는 것이 우선이지, 도덕 따위는 들이밀지 말라고 싸늘하게 받아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무턱대고 "도덕으로 치장된 가해자들의 뻔뻔함" 을 외칠 게 아니라, 보편적 가치에 입각함으로써 정의로운 소수가 불의한 다수를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어야 한다.

4 법률적 해석

[1]
검찰이 기소유예 처분을 내린 이상, 경범죄처벌법이 차후에도 적용될 수 있고, 이는 노출한 사람들은 물론 노출하지 않은 참가자까지도 범법자로 인식되게 하여 전반적인 행사를 위축시킬 수 있다. 이미 사회적 시선이 그리 우호적이지 않은데 법적으로도 위법이라는 해석이 나왔으니 노출을 강행하여 반감을 키우는 것이 옳은가, 적절한 전략인가는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5 부스, 피켓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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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축제의 각종 부스들이 큰 논란이 되었으며, 대표적으로 남성의 알몸과 항문성교를 노골적으로 표현한 부채와 여성기를 묘사한 풀빵 등의 선정적인 부스들이 존재했다. [2] 참고

동성애에 대해 관대한 성향을 보이는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도 '퀴어축제나 동성애를 반대하진 않지만 저런 부스는 없어야 한다'라는 반응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심지어는 동성애자를 가장한 지능적 호모포비아가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올정도.[15]

해당 부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정작 동성애와 큰 관련이 없는 것 들이라는 점이다. 가령 항문 성교나 생식기 그 자체는 동성애 이성애 따질 것 없이 일반적인 성교를 상징하는 요소들이고, 노출 역시 동성애와는 큰 관련이 없다. 동성애 축제에서 저런 성적 어필을 하는 부스나 노출등을 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 '동성애 = 성교와 노출이 필수인 변태적 행위'라고 홍보하는 꼴에 가깝다. 이 때문에 오히려 동성애 옹호측에서도 "동성애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풀려고 노력해야 할 퀴어 축제에서 오히려 동성애자들을 성행위에 집착하는 변태로 일반화하는 호모포비아 짓거리나 하고 있다"라는 비판의견도 많다.

검찰은 “누구든지 여러 사람의 눈에 뜨이는 곳에서 공공연하게 알몸을 지나치게 내놓거나 가려야 할 곳을 내놓아 다른 사람에 부끄러운 느낌이나 불쾌감을 주어서는 아니된다”라는 이유로 경범죄처벌법을 적용하여 기소유예 처분을 내리고 검거하는 대로 기소하기로 하였다. 이 문제는 비단 노출 문제만이 아닌, 행사의 존속까지 연관될 수 있으므로 노출 긍정 측이든 부정 측이든 간에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다. #

5.1 동성애 내에서의 반대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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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동성애자들 중에서도 선정적인 부스나 노출을 자제하라는 목소리도 많다.

또한 상술했다싶이 퀴어 축제에서 항문성교를 묘사하는 부스나 팻말등을 들고다니는 사람이 있는데 항문성교 항목이나 동성애/논쟁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여러 연구결과 모든 동성애자들이 항문성교를 하는 것은 아니고 이성애관계에서도 충분히 항문성교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즉 '모든 동성애자 = 모든 항문 성교자'가 아니다. 항문성교를 안하는 동성애자도 있고 반대로 항문성교를 하는 이성애자도 있으니 당연하다.

그런데 퀴어축제에 저런 부스나 팻말, 피켓은 '동성애자 = 항문성교자, 노출과 성교의 아이콘' 이라고 일반화 하는 행위다. 아이러니하게도 동성애자가 다른 모든 동성애자들을 일반화하고 있다. 지능형 호모포비아

저런 물건을 들고다니는 사람은 '우리들은 항문성교를 하는 것을 숨기기 싫고 자랑스럽다'고 주장하지만 반대로 생각해서 항문성교를 하는 이성애자들도 저런 피켓이나 부스를 만들고 다니진 않는다. 애시당초 저 행위자체가 법적으로는 풍기문란이고 이건 꼭 퀴어 퍼레이드가 아닌 다른 어디서든 이성애자든 누가했어도 똑같이 욕먹을 일이다.
  1. 심지어 이렇게까지 하더라도 그들의 반발이 아예 없을 거라고 장담을 못 할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다.
  2. 동일시 집단(identification group)이라고 한다. 실제 성 소수자들이나 소수자 운동가들이 대표적 사례.
  3. 주의 집단(attention group)이라고 한다. 오피니언 리더, 인본주의자, 무신론자, 유사 사회운동 참여자들이 대표적 사례.
  4. 주의 공중(attentive public)이라고 한다. 대학교수, 연구원 등을 비롯한 고학력자 집단이 대표적 사례.
  5. 일반 대중(general public)이라고 한다. 위에 해당하는 소수를 제외한 수많은 사람들로, 그 구성 특징이 다양하지만 그들 전부 다 이 주제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6. 류지성, p.195; Cobb & Elder, 1972.
  7. 소위 말하는 "이성애자들이/사회가 '허용' 한 동성애 문화는 거부하겠다!" 처럼 막나가겠다고 선언하는 것들. 비슷한 맥락에서 "피억압자들에게 억압에 어떻게 대처할지 알려주려 하지 말라"(Do not tell the oppressed how to react to their oppression) 같은 슬로건도 있는데 이것도 유사하다. 이런 류의 운동은 종종 아나키즘 쪽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8. 이런 류의 글들을 자주 보다보면 "역겹다, 토 나온다" 같은 표현들이 굉장히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무척 흥미롭게도, 2010년 이후의 수많은 정치심리학적 연구결과들에 따르면, 이와 같은 표현들은 정치극단주의의 연장선으로서 상대방에 대한 극심한 도덕적 혐오의 표출이며, 기존에는 권위주의 우파의 특징으로 분류되던 것들이었다. 짧게 말해서, 정치적 과격파들이 상대방에 대한 도덕적 폄하와 자신에 대한 도덕적 고양을 과시하고 싶을 때마다 역겹다느니 토 나온다느니 하는 표현을 즐겨 구사한다는 것.
  9. 심지어 이런 행인들 중에는 동성애에 크게 관심은 없었지만, 적절한 안내와 설명만 제공된다면 호응해 주었을 잠재적인 성 소수자 지지층도 포함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이 노출을 목격하고 동성애 등에 편견이나 거부감을 갖게 될 가능성은 축제측의 실책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10. 이는 "외집단 동질성 편향"(outgroup homogeneity bias)이라고 불리는 현상이다.
  11. 이런 건 실제 소수자들 몇 명만 만나게 해도 금세 깨진다. 아직까지는 막연한 이미지 수준에서 머물러 있기 때문에, 상이한 이미지를 만나면 쉽게 교정된다.
  12. 실제로 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 사건을 예로 들면, 한인 교포들이 사과할 때마다 미국인들은 "네가 저지른 일도 아닌데 왜 네가 사과함?" 등의 뜬금없다는 반응을 보였다는 이야기가 많다. 또한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오토바이 타고 외간 여자 만나고 다녔다는 특종기사에 동양에서는 불륜설에 놀랐는데 프랑스에서는 일국의 대통령이 국산 말고 외제를 탄다고 욕하더라(...) 같은, 동서양의 이런 차이에서 기인한 컬쳐쇼크(?)가 예로부터 적지 않다.
  13. 또는, 한때 유명했던 여성 참정권 운동인 서프러제트(Suffragette)와도 관계가 있을 수도 있다.
  14. 미국의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H.D.Thoreau)가 시민의 불복종을 외쳤을 때, 그는 "다수 대중의 도덕 같은 건 족구하라 그래!" 의 메시지를 설파한 것이 아니었다. 단순히 찬반투표를 해서 어느 쪽 머릿수가 더 많은가를 비교하지 말고,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메시지였다. 도덕의 힘을 빌려서 정의로운 소수가 불의한 다수를 이겨야 한다고 본 것이다.
  15. 단순히 농담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한 번쯤 진지하게 지능적 호모포비아가 아닐지 생각해 볼 문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