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갑옷

1 개요

한국에서 사용된 갑옷을 총칭한다. 한국에서 출토된 갑옷은 대부분 찰갑이나 판금갑같은 금속제 갑옷이다. 목갑(나무)과 골갑(뼈) 그리고 피갑(가죽)등의 경우 사막과 같이 건조한 환경에 노출되지 않는이상 썩기 쉽기 때문에, 거기다 한국의 산성토양 문제로 인해 출토된 예가 상대적으로 적으나, 대체로 중국 또는 일본과 비슷한 양상을 띠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삼국시대의 갑옷이 처음 알려진 것은 고구려 벽화를 통해서였으며, 고분 발굴로 한국 갑옷 연구가 본격화되었다. 연구 초창기에는 한반도에서 출토된 예가 적었고, 한반도의 갑옷 양식이 일본에서 만든 갑옷과 유사하다는 점을 들어 일본 갑옷이 한반도로 수입되었다는 견해가 일본 학자들에 의해 제시되었다.

그러나 점차 국내에서 발굴되는 갑옷의 양이 많아지면서, 그런 견해에 대해 거꾸로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갑옷 제작 기술이 전래되었다는 견해가 제시되었고, 그것은 2010년대에 들어서 일반적으로 고고학계의 통설로 받아들여졌다. 판갑(단갑)의 경우 시대별 발전 양상을 보여주는 유물이 일본에서 더 많이 발굴되는 관계로 일본 학계에서는 일본에서 독자적으로 발현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한국 학계에서는 제철기술의 전파 경로를 들어 이에 대해 반박하고 있다. 실제로 고대 일본에서는 철의 수입을 전적으로 백제와 가야에 의존하고 있었다. 고구려(북방)계 찰갑(괘갑)의 경우 모든 학계에서 확실하게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전파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한반도 남부에서는 종장판이나 횡장판갑 등의 판갑(단갑)이, 고구려등 북방 지역에서는 찰갑(괘갑)이 주류를 이루었고, 고구려의 남하 이후 판갑이 찰갑으로 완전히 대체되는 양상을 띄게 된다. 찰갑 형식의 갑옷은 몽고의 영향을 받게 되는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변함없이 차용된다.

고려시대 이후로는 주로 포형(袍形) 갑옷을 입게 되었으며, 이는 한국 갑옷의 특징으로 자리잡게 된다.[1]

한국 사극에서 등장하는 대다수의 갑옷은 고증 수준이 굉장히 심각하다. 특히 고려 이전 시기를 다루는 사극에서 고증 문제로 가장 많이 까이는 요소 중 하나이다. 그렇다고 조선 갑옷이 제대로 고증되냐 하면 그건 또 아니라 닥치고 포졸복이 튀어나오는 경우가 많다. 대체로 사극의 의상 고증은 복식학자들이 하는데, 일반적으로 한복 고증에 주로 힘을 쏟기 때문에 갑옷은 소품 제작자에게 만들어달라고 대충 의뢰하거나 다른 작품에서 사용한 것을 돌려쓰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 기본적으로 주연급 인물들에게 투구를 안씌우는 것은 애교수준이고, 주인공과 주연급 인물은 고증과는 전혀 무관한, 마치 판타지 게임에서나 등장할 법한 화려한 비닐 소재 갑옷을 입는 경우가 태반이다. 음 미개한 오랑캐놈들! 하하하 하하하![2]

한류에 힘입어 주몽이나 태왕사신기 등의 많은 국내 사극이 해외로 수출되고 있는데, 보다시피 예로 든 해당 두 작품은 발고증 판타지 갑옷의 끝판왕, 종결자라고 불리는 물건이다(…) 물론, 둘 다 애당초 제작진이 '퓨전'을 지향한다며 고증이란걸 염두해두지 않은 작품이긴 하지만 퓨전사극임에도 오히려 재미와 고증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전부 잡은 추노의 예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아무리 퓨전사극이라고 고증을 대놓고 무시해도 되느냐"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고대사를 아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한국 사극을 보는 외국의 시청자들[3][4]에게 고대 한반도의 갑옷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불러일으키기 딱 좋은 상황.

일례로 일본의 자위대 부사관 출신인 밀덕이 운영하는 사이트에서는 일본 갑옷과 함께 직접 한국 고대 갑옷 자료를 조사하여 3D 모델로 고증하고 있는데, 고구려 갑옷 자료 페이지에서 "한류 영화 등에서 나오는 호화로운 갑옷은 확인하지 못했다"(3번 문단 마지막 줄)고 밝히기도 했다. 거기다 해당 사이트에서는 한국 갑옷을 참고할 수 있는 드라마로 그나마 대조영, 연개소문(...), 근초고왕을 추천하고 있는데, 주몽 등에 비하면 그나마 양호하지만 이들도 근초고왕을 제외하면 갑옷이 별로 좋은 고증이 아니라는 점에서 갑옷이 제대로 고증된 사극이 적다는 사실만을 반증하는 꼴이 됐다. 부끄럽다 (참조 포스팅)

드라마 한편 나올때마다 갑옷고증으로 신나게 욕먹는 게 일상다반사가 되다보니 다들 포기하면 편해 그러려니 했지만 결국 방송사 측에서도 이 문제를 느꼈는지 2010년대 들어서 제작되는 사극은 그나마 고증 자료를 슬쩍 엿보기라도 한 듯한 갑옷을 만들기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욕먹는 것은 게속 욕먹지만 특히 근초고왕(드라마)대왕의 꿈은 드라마 본편의 평가와는 별개로 갑옷만은 상당한 수준으로 재현해서 호평을 받기도 했다.

2 청동기시대

가장 오래된 만주-한반도 지역 갑옷은 청동기 시대인 청동기시대 문화층이며, 이층의 연대는 B.C. 2000년기 후반에서 1000년기 전반(약 B.C10세기 전후)에 드는 것으로 보인다. 함경북도 무산 호곡유적에서 출토된 뼈찰갑편이 이 시대의 유물에 속한다. 청동기 시대인 2기층 40호 집자리에서 발견되었는데, 부서진 흔적이 있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더불어 2003년 길림성 쌍요(솽랴오)시의 후태평 유적에서도 뼈찰갑편이 발굴되기도 한다.#

이 갑옷편들은 시베리아 청동기시대 문화인 세이마-뚜르비노(seyma-turbine)문화의 찰갑편들과 유사하며#, 또한 오늘날에도 제작법이 전해지는 시베리아와 알래스카 원주민들(추크치족, 틀링깃족 등)의 갑옷과도 매우 유사하여 복원이 가능할 것으로 여겨진다.#

투구로는 기원전 8~7세기로 추정되는 만주 오금당 돌곽무덤에서 출토된 투구편 일부가 있는데, 비록 1/4 정도 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남은 조각의 모습이 몽골과 연나라 지역에서 발견된 투구와 유사한점을 감안하였을때 북방지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기타 부속갑으로는 BC 1000년 전반기에 해당하는 함경남도 북청군 토성리 유적에서 출토된 청통토시가 있다(비갑으로 추정됨).#

3 고조선 멸망무렵~ 원삼국시대

한나라와 고조선 간의 교역, 혹은 한사군 설치이후 유입된 한나라계통의 갑옷이 발굴되기도 했다. BC2~B.C1세기경 낙랑무덤인 평양 정백동 219호에서는 가죽찰갑편이, 평양 정백동 1호 무덤에서는 현존 국내유물 중 최고로 오래된 철제 찰갑편이 발굴되었다.(출처: 북한문화재 자료관)

기원전후의 갑주 유물로는, 부여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길림성 유수노하심 유적의 M56, M67, M97 무덤에서 출토된 종장판주 3점과 한나라 어린갑으로 추정되는 찰갑이있고, 한성백제로 추정되는 인천공항 옆 운북동 레져단지 건설도중에 발굴된 운북동 유적에서 출토된 찰갑편이 있다.# 한편 한성백제 유적인 경기도 가평 대성리 유적인 40호 집자리, 44호,46호,49호 수혈주거지에서는 한나라때의 어린갑으로 추정되는 찰갑편이 출토되었다.(출처: 군사연구 131권 수록 논문 "百濟甲胄의 形成과 그 背景(백제갑주의 형성과 그 배경)/이현주/ 부산임시수도박물관장)

그리고 4세기 이후 폭발적으로 많은 수량의 철제 갑주유물이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고분 부장품과 함께 부장되기 시작했다.

또 부여의 갑옷 엮는 양식이 발굴되기도 했다.#

4 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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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도(?). 왼쪽부터 백제의 황칠갑, 신라의 갑옷, 가야의 판갑, 고구려의 찰갑이다. 국내의 막장고증 드라마들에 비하면 월등히 우수한 고증이지만 일부 오류나 상상이 존재한다. 황칠갑의 경우 투구가 미비부주일 가능성은 적고, 가야, 신라 갑옷의 경우 흉갑이 종장판갑인데 가슴 부분에 붙어있는 두개의 뿔 모양 철판은 어깨 위에 세우는 것이며 종장판갑의 상박갑이 발견된 예는 없고 다만 상체의 방어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고증에 추가하는 것이다. 일단은 어느 정도 상상이 가미된 디자인으로 보는 것이 옳다.

4.1 갑옷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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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 판갑

찰갑이 퍼지기 전까지 삼국시대 초기에 사용된 양식. 판갑은 결합 방식에 따라 혁철판갑(가죽끈으로 결합)과 정결판갑(리벳못으로 결합)으로 나뉜다. 발굴 빈도로 볼 때 정결판갑이 좀 더 높은 빈도로 나오고 있는 편.

한반도 남부에서 자체적으로 개발된 것이 종장판갑이며, 이에서 더 발전한 횡장판갑 계열 갑옷.. 이른바 대금계 갑주에 대해서는 한일 양측 학계에서 공통적으로 한반도에서 건너가거나 한반도의 제철 기술을 습득한 현지 기술자들이 개발한 일본계 갑옷으로 분류하고 있다.

파일:Attachment/한국 갑옷/고대 동아시아 갑주계보.jpg

이 대금계 갑주의 경우 종장판갑의 완전한 직계 후손은 아니고, 고대 중국계 갑옷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백제의 방형판갑이 종장판갑과 함께 그 형태, 제작기법의 혼재가 이루어져서 탄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쉽게말해 짬뽕. 아니, 사생아.. (참조)][5] 일각에서는 이 갑옷이야말로 고대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군사적 진출을 의미한다는 식의 주장을 하기도 했으나 당연히 헛소리고, 고대의 백제, 가야, 왜 사이의 긴밀한 동맹관계에 의한 결과물로 보는 것(##)이 역사학계의 결론으로서, 한국 학계에서는 백제, 가야 지방 고위 계층의 무덤에서 대금계 판갑이 발굴되는 이유에 대해 일본과의 교류와 군사적인 동맹관계를 상징하는 위세품(군사적인 과시에 의한)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들었다. (출처 : PDF논문 - <한반도 출토 왜계 갑주(倭係 甲冑)의 분포와 의미/김혁중>)

일본과 한국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다른 갑주들을 그래픽으로 복원해 다루는 사이트(참조) 에서는 전문가의 대금계 판갑의 기원에 대한 발언을 인용하고 있다. 前期中葉以降(4世紀後半)に現れる竪矧板革綴短甲と方形板革綴短甲は韓半島南部の縦長板釘結板甲の影響 を受けて、日本内で作られたものと考え、古墳時代の中期中葉(5世紀後半)に現れる鋲留技法の板甲、札甲(掛甲)、眉庇付冑などは韓半島の工人が日本列島に渡り、新しい体制によって生産し始めたものだ と説いた ("전기 중엽 이후(4세기 후반)에 나타난 방형판갑과 장방판갑옷은 한반도 남부의 종장판갑의 영향을 받고 일본 내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고분 시대 중기 중엽(5세기 후반)에 나타난 리벳기법의 판갑과 찰갑(괘갑), 미비부주 등은 한반도의 공인이 일본 열도에 걸친 새로운 체제로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라고 말했다.)

고대 한국에서는 일본보다 앞서 더 방어력이나 활동성에서 유리한 찰갑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사용했던 후기형 판갑에 해당하는 갑옷들은 일본에서 제작한 것을 수입해 사용했거나, 한반도 내에서 해당 디자인으로 제작하여 사용했다는 것이 한/일 학계의 통설. 찰갑의 경우 제작, 보수가 어려운 점을 볼 때 찰갑이 보급된 이후에도 일반 보병용 방어구는 필요할 경우 판갑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한국, 일본의 판갑의 경우 모두 입고 벗기 편하도록 문짝처럼 열리는 형식으로 만들어 오른쪽 옆구리 부분에 가죽띠나 경첩(돌쩌귀) 형태의 개폐보조장치가 달려있다. 전자는 종장판갑에서, 후자는 삼각·횡장판갑에서 사용된다. 참고로 찰갑은 자체적으로 유연성이 있기 때문에 따로 개폐보조장치를 달지는 않았다.

4.1.1.1 종장판갑(수신판단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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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퇴래리 종장판갑종장판갑 복원품

왠지 갑빠에서 초고열선을 발사할 것 같은 색 배열이다.
9개~15개의 세로로 긴 철판을 연결해서 제작된 것으로, 한반도 남부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목갑/피갑 바로 다음 단계에 해당하는, 판갑 중에서는 가장 원시적인 형태이며, 국내 출토 빈도도 가장 높게 나온다. 제작에 사용된 철판이 갑옷마다 다소 들쭉날쭉한 편인데, 당시의 제작 환경이나 제조기술 문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6] 종장판갑은 한반도를 대표하는 양식으로써, 3세기부터 5세기까지 한반도 남부에 고르게 분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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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나 고구려 지역, 일본과 중국 등지에서는 사실상 거의 출토되지 않고 낙동강 하류 지역인 김해와 부산, 그리고 경주와 울산 등지에서만 출토되고 있어, 가야와 신라만의 독자적인 갑옷으로 분류된다. 개폐보조장치가 달려있으며, 고사리 모양 철판을 덧대거나 갑옷 테두리에 깃털로 장식하는 등 장식성이 많이 가미된 갑옷이다. 또한 세부적인 용어를 한복에서 차용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과거 가슴 부분에 반달 모양 장식을 붙이기도 했는데, 사실 그것은 어깨에 세우는 측경판이다.

4.1.1.2 방형판갑

파일:Attachment/한국 갑옷/방형판갑.jpg

사각형의 지판을 가죽끈으로 엮어서 만든 판갑으로, 역시 종장판갑처럼 목갑, 피갑 바로 다음 단계에 있는 원시적인 형태의 갑옷이다. 종장판갑과는 달리 후술할 소찰주(비늘투구)와 함께 중국에서 그 형태와 양식을 들여와 4세기 백제에서 만든 갑옷이다.

송파구청에 재현된 갑옷 소품(일러스트)이 있는데, 방형판갑을 모티브로 만든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실제 고증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으니 주의하는 것이 좋다.

4.1.1.3 장방판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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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 7단으로 구성되고 직사각형의 지판 여러장을 가로로 긴 테두리에 고정시킨 형태이다. 각 지판은 가죽끈으로 결합했으며, 방형판갑과 종장판갑의 제작기법이 혼재되어 생겨난 판갑으로서, 한반도 남부와 일본에서 사용된 왜계 판갑인 이른바 대금계 판갑의 가장 초창기 형태에 해당한다.

4.1.1.4 삼각판갑(삼각판단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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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 복원품/右 유물

삼각형의 지판을 이어붙여 만들었다. 부산·김해지역과 고령·합천 지역에서 출토되었으며, 일본에서도 상당수 출토되고 있어서 고대에 이루어졌던 한일간의 교류를 반증하는 귀한 자료이다. 국내에서 출토되는 대금계 판갑 중에서는 가장 출토빈도가 높다.

4.1.1.5 횡장판갑(횡신판단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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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판갑과 동일한 형태로, 이 역시 가로로 긴 철판을 이어붙여 만들어졌다. 고령과 합천 그리고 망이산성 등에서 출토된 예가 있다. 더하여 일본에서도 다수 출토되고 있으며, 드라마 근초고왕에서 백제의 갑옷으로 재현되었다.

4.1.2 찰갑(괘갑)

복원된 신라의 찰갑[7]복원된 가야의 찰갑

미늘갑옷이라고도 한다. 말 그대로 여러개의 철판들을 연결한 전 세계적으로 통용된 갑옷 형태로써, 고구려에서 한반도 남부와 나아가 일본으로 전래되었고, 신라, 가야는 고구려의 것을 쫒아 찰갑으로 완전히 개량하였다. 이를 일본에서는 괘갑(挂甲)이라고 한다.


갑찰이 앞으로 나오는 방향이 위쪽이냐 아래쪽이냐에 따라 외중식과 내중식으로 나뉘는데, 외중식은 위쪽 갑찰이 앞으로 나오고, 내중식은 아래쪽 갑찰이 앞으로 나온다.(참조) 기마병이 찰갑을 사용할 때에는 외중식 찰갑을 입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아래쪽에서 창칼 등이 찔러들어올 경우 내중식은 날이 그대로 파고들어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고대 한국에서 사용된 찰갑은 모두 외중식이다.

고구려(북방)계 찰갑은 부품수가 많고 관리가 힘들었지만, 다층구조에 의한 충격완화효과로 화살에 대한 방어력이 남부식 판갑에 비해 높았다. 판갑의 경우 금속판 하나로 화살을 방어해내야 했지만 찰갑의 경우 몇겹으로 겹쳐진 철편, 그리고 가죽으로 충격을 분산흡수한다. (참조 영상) 영상을 보면 판갑은 뚫렸지만, 찰갑은 화살을 일정 수준 방어하는 모습을 보인다. 두정갑도 유사한 이유로 단갑보다 방어력이 높은데, 영상에서 화살이 철판 한장은 뚫었지만 같은 철판으로 만든 두정갑은 뚫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8]
제철 규모가 현대에 비해 극히 작고 기술력이 떨어져 그 품질 균일성을 확보하지 못했을 4~5세기 경의 철판과 철편으로 만든 판갑과 찰갑이라면 더욱 심한 차이가 나왔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찰갑의 방호력에 대한 실험이 아래 글이 지적하듯 실제 전투 상황의 장거리 사격에서도 동일한 결과가 나오는지의 여부를 반영하지 못한 것은 옥에 티. 화살의 운동에너지는 강궁이라도 약 180J 정도이며[9] 거리가 늘어나거나 곡사할 경우 더 떨어지게 되는데, 이 상황에서 판갑으로 화살을 막았을 때와 찰갑으로 화살을 막았을 때 어느 수준의 방호가 가능한가의 여부는 불명확한 만큼 찰갑이 모든 상황에서 우월하다거나 판갑이 아예 못쓸 물건이라고 보는 것은 자제할 필요가 있다.

디펜스 코리아[10] 신재호의 기고문에서는 해당 실험이 지닌 한계에 대해 지적했다. 아래는 그 일부.

아래 사진은 KBS 역사 스페셜에서 2000년 1월22일 방송한 실험 장면으로 복원한 고구려 화살촉이 가야 판갑(板甲, 일명 단갑)을 관통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용한 화살촉은 뾰족한 화살촉이다. 서울 구의동에서 출토된 고구려 화살촉의 강도(탄소량 평균 0.51%)를 참조하여, 이에 준하는 초강을 사용하여 화살촉을 제조했다. 판갑은 가야 갑옷으로 알려져 있지만 가야에서만 사용한 갑옷은 아니며 이른 시기의 신라나 백제에서도 사용한 갑옷이다. 또한, 백제나 가야의 원군, 용병, 혹은 동맹군 자격으로 한반도상에 출전했을지도 모르는 왜군들도 이러한 판갑을 주된 갑옷으로 사용했다. 따라서, 아래 사진에 보이는 실험 결과는 삼국시대의 전투에서 고구려군을 상대했을 이름모를 판갑 전사(板甲 戰士)의 죽음을 재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실험은 개인은 추진하기가 어렵고, 언론사나 공영 연구기관 정도는 되어야 실험이 가능한데, 공영방송인 KBS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칭찬할 만하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기병사격을 재연하기 위해 먼거리에서 사격하지 못하고, 가까운 거리 (5m 이내)에서 사격했다는 사실이다. (현재 원거리에서 국궁 기병사격을 잘하는 인물이 없다) 실전적인 의미가 있는 거리 (50~70m 이상)에서도 관통할 수 있는지, 근거리라면 넓적한 화살촉도 판갑을 관통할 수 있는지 실험해 보았으면하는 아쉬움이 있다.

드라마 근초고왕, 대왕의 꿈, 칼과 꽃에서 고구려의 갑옷으로 사용했다. MBC 사극 계백제왕의 딸 수백향에서 찰갑을 모티브로 한 갑옷이 등장하는데, 의외로 조각들을 엇갈리게 엮는 수결법에 있어 단순히 갑찰을 나란히 붙여놓은 KBS 사극에 등장한 찰갑옷보다 더 실제 찰갑에 근접한 형태를 하고 있다. 물론, 기본적인 색감이나 실루엣 자체가 판타지라 의미는 없다.

삼국시대의 갑옷. 그림은 삼국시대 만화 프로젝트 천손의 시대.(만화체 작화지만 갑옷 고증은 상당히 잘된 편으로 왼쪽부터 백제, 고구려, 신라의 갑옷이다. 결정적으로 모에하다. 핰

4.2 투구(주)

4.2.1 종장판투구(몽고발형주)

세로로 긴 철판을 이어붙인 형태의 투구. 마치 고대 로마의 투구를 보는 듯한 형태가 특징으로, 원형의 복발(투구의 꼭대기부분에 있는 일종의 뚜껑)의 형태가 지닌 북방계 투구와의 유사성으로 몽고발형주라고도 불린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것도 있다.

독일에서 발굴된 아바르 족의 투구가 종장판주와 거의 동일한 형태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유목민족들을 중심으로 유라시아 전역에 걸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국내에서 가장 높은 발굴 빈도를 보이고 있으며, 한반도를 대표하는 투구 형식이다. 삼국시대 모든 국가가 종장판주를 주력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국내보다 적지만 일본에서도 출토된 예가 있다. 크게 철판이 일반적인 돔을 형성하는 종장판주와 철판이 S자로 휘어있는 만곡종장판주로 나뉜다. 그리고 볼가리개와 수미가리개(뒤통수 가리개)가 달려있으며, 이들 가리개는 초창기에는 2~3매의 철판을 연결하거나 투구와 같은 종장판으로 만들다가 기술의 발전과 함께 찰갑과 같은 소찰 형식으로 자리잡게 된다. 소찰 형식은 철판과는 달리 유동성이 있어 활동하기에 훨씬 유리했다.

드라마 근초고왕에서 고구려군의 투구로 사용했다.

본래 종장지판을 가죽끈으로 엮어 만들지만 합천 옥전 고분군 28호 출토품은 유일하게 원두정으로 고정된 형태이다(리벳팅).

4.2.2 비늘투구(소찰주)

철판을 이어붙여 만든 투구. 종장판투구에 비하면 출토 예가 드문 편이며, 중국에서도 소찰주가 출토된 예가 있으므로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가 제시되어 왔다. 관모 형태의 복발이 존재한다는 특징이 있는데, 출토된 유물 자체가 적으므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드라마 근초고왕에서 백제 투구로 사용했다. 드라마 계백 에서도 이것과 비슷한 관모가 달린 투구를 사용하는데, 잘 쓰지도 않을뿐더러 일단 참고는 한 것 같지만 비늘투구라고 보긴 좀 이상하다.

4.2.3 차양투구(미비부주)

파일:Attachment/한국 갑옷/image6.jpg

종장판주처럼 세로로 철판을 이어붙인 뒤, 이에 차양을 단 형태이다. 고대의 투구 중 가장 화려한 편에 속한다. 이 투구는 고대 일본의 대표적인 양식으로써, 한반도 남부에서도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국내에는 백제와 가야지역에서 출토되나, 그 예가 적어서 일본 학계에서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장인이 일본에서 만든 것을 국내로 역수입했다는 학설을 제시한다
[1]
하지만보통 일본에서 4세기 중반에출토된거에비해 한국에서 4세기 초반에출토되나 출토양은 매우적다

드라마 근초고왕과 계백, 광개토대왕에서 백제 병사 및 장군의 투구로 사용했다.

4.2.4 충각부주

특징적인 부품인 이마에서 정수리에 이르는 세로로 긴 철판을 중심으로 횡장판 또는 삼각판을 이어붙여 만든 투구이다. 역시 고대 일본을 대표하는 투구 형식이며, 한반도 남부에서 사용하였지만, 차양투구처럼 출토 예가 적다. 가야 무사를 재현한 자료에서 종종 보인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신라 병사의 투구로, 광개토태왕에서 백제 병사의 투구로 사용.

4.2.5 이형주


4세기 신라의 무덤인 경주 사라리 5호에서 출토된 신라투구이다. 장방형 철판을 가로로 휘어 배치한 뒤, 원두정 으로 고정한 투구인데, 비슷한 투구를 찾을 수 없어 이형주라고 한다. 코가리개나 볼가리개 부분등이 유사하여, 종장판주와 크게 다른 형태는 아니다.

4.2.6 원주투구


4세기 말 5세기 초로 추정되는 고구려 사찰 정릉사지의 우물퇴적층에서 발견된 투구이다. 부식이 심하지만 투구 정개부에 리벳팅한 흔적과 고리를 철사로 고정한 장식부분은 구분이 될 정도이다.

4.2.7 농오리산성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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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중반으로 추정되는 평안북도 태천군 농오리산성 출토품이다. 철판의 형태(화염문철판)와 리벳팅 기법 등이 후대 투구(발해-조선중기)까지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4.2.8 금동장투구


6세기 후기로 추정되는 경상남도 합천군 옥전고분군 M3호 고분에서 출토된 투구이다. 부식전에는 금동으로 장식되어 화려했을 것이다.

화염문철판 여럿을 원두정으로 이어붙이고, 유사한 미간부를 근거로, 농오리산성 출토품같은 고구려 투구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한다.

4.3 부속갑옷

4.3.1 어깨가리개(상박갑)

파일:Attachment/한국 갑옷/상박갑.jpg

어깨에서 팔꿈치까지(상완부) 보호하는 부속이다. 판갑, 찰갑과 세트로 사용되며, 판갑에는 긴 철판을 휘어 겹쳐서. 찰갑에는 쇠비늘들을 일렬로 늘어놓아 만들었다.

단, 국내에서 판갑용 상박갑이 발굴된 예는 극히 드물다. 종장판갑과 세트로 이루어진 상박갑은 현재까지 출토된 예가 없으며, 횡장판갑용 상박갑만이 일부 발굴되었을 뿐이다.[11] 일부 복원 자료에서는 공격에 노출되기 쉬운 상완부분 방어력이 전무하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서인지 종장판갑에도 상박갑을 적용시킨 경우도 있지만, 엄밀히 말해 검증된 고증은 아니고, 추측의 영역에 가깝다. 제작이나 착용의 편의성을 위해 일부 부품을 가죽으로 만드는 경우는 흔한 만큼 종장판갑에는 가죽으로 만든 상박갑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내기도 했다. 가죽재질이라 부장자의 의복처럼 오랜 세월이 흘러 삭아 없어졌을 것이라는 이야기. 아니면 아예 상박갑을 부장품에 넣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고 상박갑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러한 추측들 중 어느쪽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기에 정확한 사실은 아직 불명이다.

4.3.2 치마갑옷(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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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치마
그림에서 판갑 아래에 보이는 치마 형태의 갑옷. 허리 아랫부분을 보호하는 부속이다. 실제로 상갑이 짧거나 없는 경우도 있다.

고분 벽화를 참조하여 만드는 찰갑 고증 중 비교적 예전 고증에서 흔히 보이는 바지 형태의 다리를 전부 감싸는 갑옷 부속의 경우 실제로 제작하여 입게 될 경우 상식적으로 말에 올라타는 것은 고사하고 걸어다닐 때에도 활동성이 매우 떨어질 것이 뻔하고, 허벅지 안쪽까지 전부 감쌀 경우 말에 앉을 수 없을테니 한국 찰갑과 유사한 포형 갑옷인 티벳 찰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 옆으로 트임이 있는 갑상이거나 실제 유물로도 여러 차례 발굴됐으며 중국(영상 7분 10~20초의 대퇴갑 착장법 참조. 해당 일러스트를 그린 작가는 해당 부품을 퇴군(腿裙)이라고 부른다.), 일본 갑옷에서도 사용하는 ㅠ자 모양 대퇴갑일 가능성이 높다.

4.3.3 목가리개(경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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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목을 보호하는 데에 쓰이는 부분. 목가리개는 삼국시대 갑옷의 특징적인 부품으로,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종장판갑에 사용된 목가리래는 못을 사용해 완전히 갑옷에 붙어있지만, 찰갑에 사용된 목가리개는 가죽끈을 사용해 갑옷과 엮어서 연결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물론, 찰갑용 목가리개 연결에 못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각 지판을 연결할때는 가죽끈을 엮어서 사용하거나 원두정(리벳)을 사용하였는데, 초창기에는 가죽끈을 사용하가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원두정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원두정을 사용한 목가리개는 판갑처럼 개폐보조장치가 달려있는데, 철제 고리경첩 혹은 가죽끈 경첩이 사용되었다. 가죽끈으로 만든 경첩이 제작의 편의성이 있어서 더 많이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드라마 연개소문과 근초고왕, 계백(드라마), 대왕의 꿈에서 재현됐다.

목가리개는 조선 중기까지 찰갑경번갑 등에 쓰였고, 조선시대에는 이를 가리켜 호항(護項)이라고 불렀다.

4.3.4 팔보호대(비갑)


토시 형태로 팔목을 감싸서 보호하는 갑옷. 발굴 당시에는 다리에 착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었으나, 일반적으로 팔에 착용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후기에 들어서 찰갑 형식의 비갑도 나온다.

4.3.5 허벅지보호대(대퇴갑)

허벅지 부분을 따로 보호할 수 있도록 착용하는 부품.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북방계 찰갑의 영향을 받은 중국 갑옷의 대퇴갑(상술), 일본갑옷의 대퇴갑인 하이다테(佩楯)처럼 입는다는 학설이 우세하다. 상단의 마네킹이 입은 가야 찰갑 복원품의 허벅지에 있는 것이 대퇴갑.

4.3.6 정강이보호대(경갑.脛甲)

정강이에 둘러 정강이, 종아리를 보호하는 부품. 비갑 형태의 유물 중 경갑으로 추정되는 물건이 있는데, 판갑처럼 경첩으로 여닫을 수 있다. 신라, 가야 지역에서 발굴되는 찰갑에는 찰갑 형식의 경갑이 있다. 상단 가야 찰갑 복원품의 정강이에 있는 것이 경갑.

5 고려시대

5.1 몽골 침략 전

고려시대에는 비교적 독자적인 형식의 갑주를 고수했었다. 다만 유물로 남겨진 것이 없어 여러 나라에서의 묘사를 바탕으로 그 생김새를 추측할 수밖에 없다.

5.1.1 일본 측의 묘사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때의 모습을 일본 측에서 기록한 삽화인 몽고습래회사를 보면 당시 몽골군과 고려군의 복식을 볼 수 있는데 고려군의 투구는 전형적인 송나라의 양식에서 영향을 받은 것에 따른 모습을 하고 있으며 [12] 목화를 신었으며 갑옷은 조선 전기의 전형적인 두정갑과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다.[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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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스페셜에 의하면 이 사진에서 투구에 깃털이 북슬북슬하게 난 날개(?)같은 게 달려 있는 게 고려군이라고 한다.

5.1.2 고려시대 예술 속의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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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불경대방광불화엄경에는 당시 시대의 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오는데, 고려 갑옷보다는 오히려 송나라 갑옷에 가깝다.

예천 개심사지 5층석탑에 남아있는 암각화에는 그나마 고려시대의 갑옷과 비슷한 갑옷이 묘사되어 있다. 이건 조선시대의 것처럼 중앙에서 여미는 포형 갑옷이다.
참고1
참고2

5.1.3 고려도경에서의 묘사

투구와 갑옷[鎧甲]은 아래위가 붙어 있는데 그 제도는 봉액(逢掖)과 같아서 형상이 궤이(詭異)하다. 금화고모(金花高帽 모자 위에 금화로 꾸민 전모(戰帽))는 거의 2자[尺]나 되고, 비단옷과 푸른 도포[錦衣靑袍]에 헐렁하게 맨 띠[帶]는 고(袴 저고리와 함께 입는 하의)에까지 드리우니, 대개 그 나라 사람은 키가 작아서 특별히 높은 모자와 비단옷[錦衣]을 입어 그 모양을 장하게 한 것이다. 이제 그림을 그려서 각각 그 명색(名色)을 뒤에 나열한다.

서긍고려도경에 의하면 3만명에 달하는 고려의 용호중맹군(龍虎中猛軍)이 모두 갑옷을 착용했다고 하며, 이 갑옷은 위 아래가 붙어 있는 두루마기 형태이고, 어깨를 가려주는 부박(覆膊)이 없다고 했고, 또 다른 장군의 갑옷은 철찰(鐵札)을 검은 가죽으로 덮고 각각의 철찰을 비단으로 꿰매어 서로 붙어 있게 하고 허리에는 오색 꽃무늬 띠를 드리웠다고 한다.[15]투구엔 꽃이 달려 있는데[16] 착장시엔 그냥 등에 걸치고(...)[17] 머리에 을 쓴 차림이었다고 한다.안 쓸거면 왜 이렇게 화려하게 만든거야? 쓸데없이 고퀄리티

사실 미쳤다고 쓰지도 않는 투구를 지급했을리도 없고, 지급한 투구를 실전에서 쓰지 않았을리도 없다. 투구를 쓰고 있으면 시야도 제한되고 불편하기 때문에, 실제로 백병전에 돌입하기 전까지는 머리 뒤로 걸고 있었다는 뜻일 가능성이 높다. 고대 그리스 호플리타이를 묘사한 조각에도, 투구를 완전히 쓰지 않고 들어올린 형태의 묘사가 있는것을 생각해보자. 요즘 군대도 방탄헬멧을 평시에 계속 쓰고 있지는 않는 것도.
고려도경 원문

5.2 몽골 침략 후

원나라의 침략 이후로 사회가 원나라의 문화를 급속하게 받아 들이면서 이를 따라 갑주도 비슷하게 변한다. 사실상 고려 후기의 갑주와 조선시대의 두정갑과 그 투구는 원나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원나라

5.2.1 갑옷 양식

고려 시대의 주된 갑주 양식은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찰갑경번갑그리고 쇄자갑이다. 경번갑은 쇠사슬과 철판을 이어 만든 갑옷이며, 쇄자갑은 서양의 체인메일처럼 쇠사슬을 이어 만든 갑옷이다.


고려시대 정지 장군의 경번갑 유물.


복원된 정지 장군의 경번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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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말선초의 쇄자갑 무장[18]

5.2.2 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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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투구는 고려 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상당히 흔했던 첨주형 투구라고 한다. 드라마 용의 눈물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영남과 기타 제장들이 쓰고 나온 투구가 바로 이 투구라고 할 수 있다. 첨주형 투구의 제작 방법은 긴 철판 4개가 세로 방향으로 둥글게 배열되고 철띠와 쇠못으로 이를 고정한다고 한다.

6 조선 시대

6.1 초중기


책 '조선전쟁 생중계'의 일러스트 중 하나.


부산 동래부성 해자에서 발굴된 찰갑의 복원품

초기에는 찰갑(철제,피제,지제)이 가장 많이 쓰인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 실록에서 다른 갑옷은 고유의 이름을 가졌지만, 찰갑만은 그냥 갑이나 피갑 또는 지갑 그리고 철갑등 재료만 구분해서 불렸다. 조선시대의 찰갑은 고구려 때 쓰이던 찰갑의 양식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그 외에도 쇄자갑, 경번갑, 두두미갑, 그리고 엄심갑 등이 있다.

위는 국조오례의에 그려진 두두미갑, 아래는 리조복식도감에 그려진 황동두정갑. 비단으로 걷감을 만들고 사슴가죽 편찰을 사용한 갑옷이다.#

세종실록 오례의 병기조 부분에 묘사된 그림을 통해 당시에 성행했던 갑옷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기존에 두두미갑만 존재하던 의-두정형 갑주(직물에 갑찰을 두정으로 고정한 형태의 갑옷 종류를 통틀어 일컫는 용어)는 이때부터 두정갑과 두두미갑 그리고 황동두정갑으로 세분화 된다.

유물로는 유성룡의 가죽 찰갑 갑옷이 대표적으로써, 이는 조선시대의 가장 오래된 찰갑 유물로써 현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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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기 유물로는 부산 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공사중에 발견된 수안동 찰갑이 있다.

6.2 후기


무예도보통지에서 묘사된 두정갑. 투구와 기본 갑옷 이외에도 엄심(사타구니 보호대), 호액(옆구리보호대), 갑상(허벅지보호대)으로 이루어진 부속갑을 볼 수 있다.

임진왜란 종전 후 전쟁에서 겪은 갑옷과 무기의 장단점을 따져, 기존의 찰갑에 비해 유지와 보수가 수월하고, 오히려 뛰어난 방어력을 보여준 두정갑이 점차 최신 방호구로써 자리잡는다. 원나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투구의 형태와 장식까지 상당히 유사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같은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청나라의 갑옷과도 유사해진다. 그러나 호항(목가리개)이 몸에 고정되는 형태 등을 한 원나라 및 청나라 갑옷과는 달리, 한국의 갑옷은 분리되어 있어 유연성을 강조하며, 장식에 있어서도 청나라와는 재료나 문양의 배치 등이 다르다.

또한, 오늘날 조선 시대를 다룬 사극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두석린갑도 이때 등장하였는데, 이는 두석으로 된 비늘 갑옷을 의미한다. 어린갑 또는 용린갑으로 불리는 갑옷들도 두석린갑과 같은 갑옷이거나, 거의 유사한 갑옷들이다. 조선시대를 다룬 사극에서는 고위급 장수는 두석린갑을, 중간~하위 계급 장수들은 두정피갑을 입고 있는 것으로 흔히 묘사된다. 물론, 두석린갑은 실제 전투용 이라기보단 의장용의 성격이 강했으며 방어력이나 내구성 자체도 두정갑에 비해 상당히 떨어지는 편이다.

두정갑 외에 지갑(=엄심갑, 조선 중기부터는 지제찰갑이 쓰이지 않아 지갑으로 부름)과 면갑 그리고 삼승갑 등이 군사들의 갑옷으로 널리 쓰였다.


면제배갑 유물


흉갑 유물

조선 말기에는 면제배갑, 삼승갑주, 흉갑(철엄심갑으로 추정), 면주 그리고 등투구가 만들어졌다.
  1. 중국에는 포형갑옷은 없고 비슷한 포갑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2. 근데 해당 짤방에 나오는 태조 왕건은 지금 사극과 비교해보면 비교가 안될 정도로 복장 고증이 뛰어난 편이다. 비록 후대에 들어 만들어진 근초고왕이나 정도전 등에 비하면 갑옷의 세세한 디테일 오류나 재질 같은 부분에서 많이 부족하지만 당시 예산이나 기술력 문제도 감안할 필요가 있고, 최소한 후술할 주몽이나 태왕사신기처럼 대놓고 고증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3. 태왕사신기는 주 수출 타겟이었던 일본 반응이 미적지근했기에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했으나, 주몽은 이란 시청률 85%, 카자흐스탄 시청률 80%에 육박했는데, 이란과 카자흐스탄 시청자들이 고구려 갑옷을 찰갑이 아닌 드라마에 나온 근본없는 판타지 갑옷으로 착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4. 그리고 한국의 시청자들도 포함. 일부러 논문이나 자료사진 등을 찾아보는 사람이 아닌 한 드라마에 나오는 모습을 그대로 고증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하다.
  5. 국립중앙박물관의 한 연구사는 "당시 제철/갑주 제작기술은 가야에 있었지만 실제 제작은 일본에서 이루어졌을 수 있다." 고 이야기했다.
  6. 이를 들어 몇몇 일본 학자들은 고대 한국의 제철기술 수준이 조악하다는 주장으로 연결하기도 하는데, 까놓고 제철기술의 전파 경로를 따져보면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헛소리. 실제로 종장판갑이 생산될 당시 일본은 쇠를 거의 다루지 못했다.
  7. 쪽샘지구 고분에서 발굴된 신라 판갑의 복원품인데, 상박갑과 대퇴갑, 경갑까지 모두 갖춘 완전체 상태로 발굴됐지만, 기사가 나온 2013년 기준으로는 사진처럼 흉갑과 목가리개, 갑상만 복원된 상황이다.
  8. 물론, 찰갑이 화살을 막아냈을 때 착용자에게 가해지는 충격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타박상이나 골절 문제도 어느 정도 감안하고 판단하는 것이 좋다.
  9. 현대 무기와 비교하자면 보통 권총에 쓰이는 파라벨럼 탄이 약 500J 정도이고 소총탄은 4자릿수로 그보다 훨씬 높다.
  10. 디펜스 코리아가 망해버렸기 때문에 원문 출처 링크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11. 구정동 고분 출토 종장판갑에서 어깨끈 형태의 철제 부품이 나오기는 했지만 어깨와 쇄골, 상박을 전체적으로 가리는 모양은 아니다.
  12. 이 때문에 사실은 고려군이 아니라 사실은 남송의 원병일 수도 있다는 주장이 있는데, 갑옷의 형식을 보면 고려군이라 보는 게 맞다. 상하의가 이어진 형 갑옷은 중국에는 없는 우리나라 고유의 양식이다. 또한 애당초 이 그림은 남송 출신 군사(강남군)가 출정하지 않은 1274년의 1차 일본 원정(이때 남송은 여전히 원과 전쟁중이었다)을 묘사한 것이라 남송군을 묘사한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13. 그런데 자세히 보면 조선시대 두정갑처럼 중앙에서 여미는 게 아니라 그냥 두루마기처럼 양 섶을 교차해서 입었다(...) 게다가 옆트임과 뒷트임도 없고 소매도 팔뚝까지 내려오는 게 아니라 손목까지 내려온다. 흠좀무. 안 덥나? 아니, 그 전에 갑옷이 그렇게 유연하나? 진짜로 그 시대에 그렇게 입었거나(...)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관점에서 잘못 본 것일 가능성이 높다.적어도 검열삭제는 방어가 완벽하겠군
  14. 두정갑이 원나라를 통해 들어왔다는 주장이 있는데, 사실 몽골 침략 이전부터 우리나라에서 두정갑은 존재했다.
  15. 계급이 높아질수록 띠가 많아졌으며 가장 높은 계급은 띠가 10개가 넘었다고(...)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갑옷일까
  16. 위의 개심사지 석탑 암각화에 나오는 무사들의 투구에 꽃같이 생긴 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17. 투구끈을 목에 걸친 상태로
  18. 출처는 책 '조선전쟁 생중계' 의 일러스트 중 하나. 일러스트 작가의 블로그를 참조해보는 것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