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오 함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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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의 프로 통산성적, 저 나이는 도미니카 출신 선수인데다가 출전가능 나이를 맞추다 보니 누락된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나이제한 때문에 1961년생으로 등록되었다.

그리고 1984~1985, 1998~2005시즌 성적은 이미지 크기 문제 때문에 잘려나갔다고 한다.

1 프로필

이름헨리 오 함마(Henry O'Hammer)
생몰년도1967년 3월 9일 ~ 2007년 12월 25일
출신지도미니카 공화국
투타우투우타
포지션투수,외야수,지명타자
입단1984년 외국인 아마추어 특별 드래프트
소속팀롯데 자이언츠 (1984~2005)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34번 (1984~1991)
프로야구 출범헨리 오 함마 (1984~1991)김상현 (1992~1997)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1번 (1991~2005)
정학수(1986~1989)헨리 오 함마 (1991~2005)이우민 (2006~2012)


롯데 자이언츠의 잊혀진 레전드
현역 시절 롯데의 살아있는 레전드 [1]

2 개요

롯데 자이언츠 전설적인 프랜차이즈급 외국인 선수.
그러나 프론트의 압박과 KBO의 농간에 휩쓸려 결국 그 존재마저 부정당한 비운의 남자.

한국에서 엄청난 성적을 기록하고 있었지만 혈중 담석증이라는 희귀 불치병에 걸려 투병 끝에 2007년에 운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도 원년 팬들은 헨리 오 함마의 이름을 언급하면 눈시울부터 적신다고.

2.1 플레이 스타일

커리어 대부분을 투타겸업을 하면서 양쪽 모두에서 엄청난 금자탑을 쌓아올린 대선수.

2.1.1 투수 부문

일단 투수로서 플레이 스타일은 압도적인 구위, 정교한 컨트롤과 여러 생소한 변화구를 앞세운 사상 최강의 이닝이터. 선수생활 후기로 갈수록 구위는 떨어져갔지만 정교한 컨트롤, 변화구 등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면 1996년, 97년 부상으로 완급조절 능력을 상실해 버린 것. 이 때문에 선수생활 후반기에는 마무리로만 등판했다.

그의 구위는 실로 엄청났는데 1984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 등판해서 시속 157km의 공을 던졌고[2], 1991년 준플레이오프에서는 KBO 최초로 시속 160km의 공을 던지기도 했다.

그는 이닝을 많이 먹으면서도 삼자범퇴와 삼구 삼진, 땅볼 유도 등을 손쉽게 해내는 플레이를 선보이곤 했다. WHIP, 삼진과 이닝 등 통산기록이 이것을 증명한다.

직구 외의 변화구로는 주로 투심, 체인지업, 고속 슬라이더, 너클커브, 포크를 구사했다. 슬라이더를 주 결정구로 썼는데 80년대 당대에는 최고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커터, 싱커, 스플리터를 구사하기도. 이 때문에 팔색조라는 별명도 있다.

하지만 선발 외에 중무리로도 많이 뛰었고, 1994년 이후로는 출장도 줄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손해본 커리어 또한 상당하다.

2.1.2 타자 부문

타자로서 플레이 스타일은 무지막지한 힘을 바탕으로 홈런을 양산하는 전형적인 홈런타자. 심정수의 스타일과 비슷하다. 통산 장타율이 6할이 넘어간다는 것을 보면 정말 대단한 타자이다. 보통 장타율 5할이 넘어가도 준수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 보면... 출루율도 3할 아래로 내려가본 시즌이 한 번도 없다. 이 기록은 OPS로도 증명되는데 통산 OPS가 10할이 넘어간다. 얼마나 대단한 타자인가... 선구안 역시 좋았지만 당시 심판의 차별에 의해 시즌 60~70삼진을 꾸준히 기록하였다.

그의 기록을 보자면 규정타석을 채운 모든 시즌이 20홈런, 70안타와 10도루 이상은 충분히 먹고 들어갔을 정도로 대단하다. 장타율 1위도 심심찮게 찍었던 그런 선수.

또한 그의 홈런타자로서의 위력을 증명하는 사실로는 KBO 최초로 400홈런을 달성해내었다는 것에 있다. 이후 10년도 더 넘어서 이승엽이 그를 뛰어넘기 전까지 아무도 400홈런 근처에 가지 못했다.

사사구는 많았던 편으로, 이중 몸에 맞는 사구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 때문에 출장경기 대비 타석수도 그리 많지는 않고, 사구를 맞고 부상당한 적도 꽤 있어 커리어 손해도 꽤 봤다. 대표적으로 1988년 시즌이 그러한데, 시즌 초 1번 타자로 출장해 첫 타석에서 초구 헤드샷(...)을 맞고 몇 주 간 병원 신세를 졌었다. 무엇보다 그 해에는 20-20을 기록할 뻔 했었기에 더욱 아쉬움에 남는 시즌.

도루능력은 뭐 아주 뛰어나다 할 수준은 안 되지만 센스가 좋아 20-20 클럽 근처에 가 본 경험도 몇 번 있는데 1987~1989년, 1993년, 2000년 총 6시즌으로, 이 당시 20-20을 기록할 뻔했으나 전부 운이 지독히도 안 따라주어서 실패하고 말았다.[3] 그래도 시즌 15도루 가까이 할 만한 능력이 있었고, 꾸준히 10도루 이상을 기록했기에 주루도 기대할 만한 타자였다.

수비는 뭐 평균 수준이었는데, 타석이랑 마운드에서 기록한 성적이 아주 좋다 보니 사람들 눈에는 타격이랑 투구는 역대급인데 수비는 시망인 선수로 찍힌 듯. 외야수계의 이만수라 볼 수 있겠다.[4] 임팩트 있는 호수비도 없었고... 이 때문인지 상복은 더럽게도 없었다.[5]

3 생애

3.1 생애 초기 ~ 롯데 자이언츠 입단

1967년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태어났다.

한국프로야구 1983 시즌 이후, KBO에서는 외국인 용병의 성공적 도입을 위해 외국인 아마추어 특별 드래프트를 미국도미니카 공화국 등의 야구 강국에서 아마추어 야구선수들을 상대로 실시하였다.[6]

하지만 당시 듣보잡이던 한국프로야구에 가려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7], 헨리는 비슷한 시기 우연히도 CNN을 통해 한국프로야구를 접하게 되고, 한국에 가기로 마음먹고 신분위조까지 해 가면서 KBO 아마추어 드래프트에 지원한다.
하지만 지원자가 헨리 하나밖에 없었고, 이 한 명을 둘러싼 주사위 대결에서 롯데 자이언츠가 승리하면서 계약금 700만원에 롯데로 입단하게 된다.

3.2 선수시절

사실 롯데는 그렇게 까지 큰 기대는 걸지 않았다. 이미 최동원이라는 초대형 투수를 가지고 있었고 헨리는 그렇게 유명한 선수도 아니었으며 가장 최근 경기기록이 리틀리그에서 투수로는 2.1 이닝 4실점, 타자로써는 3타수 1안타 1홈런 [8] 의 그다지 별 기록이 없었다.

그리고 헨리는 상상 그 이상의 활약을 하기 시작한다.
1984년 롯데에 입단하여, 처음에는 중계-마무리 투수로 뛰었다. 그리고 그 해 한국시리즈 7차전 마지막에서 지친 최동원을 대신하여 등판해 롯데의 승리를 확정짓는다. 이후 1985년 시즌부터 출장이 뜸해지기 시작한 1994년까지 크보를 씹어먹는 원조 생태 파괴범으로 군림했다.

이 선수가 투수로서의 플레이 스타일을 제대로 보여준 시즌은 1986년~1992년 정도로 볼 수 있다. 이 당시에는 강력한 구위와 정교한 컨트롤을 앞세워 활동한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시기.[9] 이닝도 많이 먹었지만 피안타율 또한 높지는 않았다. 중무리도 뛰었는데 구위가 전혀 안 떨어져서 괴물이라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1992년 이후로는 영원할 것만 같던 구위가 떨어지기 시작하고, 이후에는 어찌어찌 컨트롤로 버텨 나갔지만 1996년 6월 초순경 쌍방울전에서 선발로 올랐다가 부상을 당하고 만다. 그리고 재활에 절치부심해 1997년 개막전에 등판하며 재기를 알렸지만 5월 말 다시 부상을 당하고 만다. 이후 1998년에는 재활로 인해 투수 보직을 제대로 소화할 수 없게 되어 주로 타자로 뛰었으며 후반기 선발로 복귀하였다. 하지만 완급조절 능력이 너무 나빠져버려 선발 투수로 뛰기에는 부적합해진 상태.

결국 1999년 계투로 꽤 나오는가 싶더니 2000년 완전히 마무리 투수로 정착했다. 하지만 이때를 기점으로 프런트의 핍박이 더욱 가시화되었고, 2002년 스프링캠프에서는 주전 마무리로 낙찰받았음에도 19경기밖에 나오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고야 말았다. 2003년에는 더욱 심해져 5경기밖에 나오지 못했고, 그 와중 헨리는 다시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10] 결국 2005년을 끝으로 은퇴하고 말았다.

타자로서의 플레이 스타일은 커리어 내내 유지하였다. 하지만 사구도 많이 맞았으며 이로 인해 부상도 상당히 당하곤 했다. 그래서인지 통산 타격기록도 손해가 좀 있는 편. 특히 이것은 1990년대 중반에 자주 있었다. 사구 갯수는 277개이다. 최정은 한참 멀었나

1985년 시즌 이후 전지훈련 중 강병철이 그의 타격력을 알아보면서 타자로도 많이 서게 되었다. 1986년 시즌 첫 출장은 외야수 출장이었는데, 그는 여기서 첫 타석을 홈런으로 신고하기도 했다. [11]

1987년~1989년 시즌 20-20을 기록할 뻔했으나 1987년은 주루 중 부상으로, 1988년1989년은 심판의 석연찮은 판정으로 두 번씩이나 홈런이 2루타로 둔갑해 버리면서 아쉽게 놓치고 만다. 1993년, 2000년에도 기록할 뻔했지만도루가 안 나와서 실패하고 말았다.

특히 타격부문에서 괴물같은 활약을 한 시즌은 1998년~2002년 시즌으로 이 시기 헨리는 투수로 재활을 해도 타자로는 꼬박꼬박 나왔다. 그 결과 1998년 37홈런, 1999년 40홈런, 2000년 34홈런을 터뜨렸다. 시기상으로는 이 때가 타격 절정기인데, 1997년 시즌 헨리가 안타를 치는 족족 대주자로 교체되어서[12] 빡친 나머지 웨이트 트레이닝을 강하게 해 거포로 거듭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런 호성적은 원래 20홈런은 치는 헨리의 장타력 + 웨이트 트레이닝 + 때마침 찾아온 타고투저로 인해 기록된 것이었다. 또한 이 때 웨이트 트레이닝은 2000년~2001년 마무리 투수로 부활하는 데도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2003년 프런트의 농간과 큰 부상이 겹쳐 타자로든 투수로든 경기를 나가지 못하고, 결국 타자 출장은 2003년이 마지막이 되어버렸다.

여튼 이렇게 뛰어난 활약을 한 선수였지만, 1989년 즈음부터 프런트와의 갈등이 가시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당시 프런트가 헨리를 대하는 태도는 썩 달갑지는 않았고, 당시 관계자는 헨리를 두고 "양놈 새끼가"라는 말을 했던 게 드러나 물의를 빚은 적도 있다.[13]

1991년 헨리는 프런트와의 기나긴 갈등으로 인해 연봉이 대폭 삭감된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대신 헨리는 등번호 1번을 달라고 요구하여 결국 받아낸다.
그리고 1994년부터 롯데 구단측은 노쇠화를 이유로 들며 헨리의 출장빈도를 줄여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프런트가 헨리를 고깝게 생각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이 때문에 프런트 퇴진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많이 퍼져나가진 못하고 묻혔다.

1996년 6월 피칭 중 부상당해 시즌 아웃된 헨리는 절치부심하여 1997년을 준비했지만 다시 시즌아웃을 당하고 말았다. 결국 헨리는 선발로 더 이상 뛸 수 없게 되었고, 이후 마무리로 전향에 성공한다.

1997년 시즌 이후, 당시 외환위기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면서 연봉을 전액 기부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1998년, 헨리는 타격 부문에서 부활한다. 4월은 2군에 있었지만 하도 무력시위를 해대서[14] 경기수를 줄여나가던 롯데는 그를 1군 레귤러로 고정시킬 수밖에 없었고, 그는 31홈런을 쳐내며 파워가 아직 살았음을 인증하였다. 그리고 1999년 40홈런을 때려냈고, 2000년 37홈런을 터뜨리며 타자로서 최전성기를 보냈다. 후술할 8점 홈런이나 잠실구장 장외홈런이 이 때 나온 이야기.

1998년 5월, 당시 현대와의 경기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던 정민태에게서 8점 홈런을 때려냈다. 이것은 전 세계에서 유일한 4점보다 많은 타점의 홈런으로 기록되었으며, 지금까지 이 기록이 깨지지 않고 있다.

그 해 7월에는 대 두산전에서 헨리가 출장했는데, 이 때 헨리를 대적했던 유일한 상대가 강병규. 강병규를 본 헨리는 페트병을 들고 나오더니 그것으로 잠실구장 장외홈런을 때려냈다. 기존에 알려졌던 첫 잠실구장 장외홈런이 김동주가 아닌 헨리가 처음 달성한 기록이지만, 그 날 두산 베어스 측에서 배트를 쓰지 않고 타격했다고 KBO에 이의를 제기, 결국 이 기록은 무효화되고 말았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첫 잠실구장 장외홈런은 2000년 김동주가 내게 된다.

1999년 플레이오프 며칠 전, 당시 주장이었던 박정태와 술자리를 하면서 플레이오프를 예언하기도 했다. 정작 헨리는 7차전 당일 불펜 피칭 중 부상당해 나오지 못했고 한국시리즈에도 나가지 못하면서 결국 한화 이글스가 최초 그리고 최후의 우승을 차지한다.

2002년에는 처음 출장했던 삼성 라이온즈전에서 6타수 2홈런 4안타 1볼넷 7타점의 맹타를 휘두르고 당해 김응룡 감독이 약물의혹을 제기하며 난리를 피웠지만, 도핑 테스트에서 헨리는 깨끗한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의혹은 끊이지 않았으며, 헨리의 커리어 내내 따라붙는 의혹이었다.[15]

2003년에는 부상으로 5경기밖에 나오지 못하고 시즌 아웃. 롯데 팬들은 헨리가 부상을 떨치고 씩씩하게 다시 일어설 줄 알았지만 생각보다 부상이 컸던데다 나이도 있어서 그랬는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팬들은 타자로라도 출장시켜 달라고 청원을 넣었지만 그의 배트스피드는 훈련 부족으로 상당히 저하되어 타자로 출장하긴 힘든 수준이 되어버리고 말았다.[16]

2005년, 현대와의 경기에서 손민한이 9회말 만루 위기상황을 만들어내자 헨리가 등판해 모든 주자들을 견제구로 잡아 투구 없이 세이브를 만들어냈다. 이때 1루에서 아웃되고 완전 어이없어하는 이택근의 표정이 압권.
하지만 이것이 마지막 경기가 되어버리고 말았으니, 2005년 시즌 도중 롯데 구단측에서는 "헨리는 이미 노쇠화되었고 약물복용 의혹도 있으니 이미지 쇄신을 위해서라도 퇴출시키자"는 명분에 의해 은퇴식 없이 퇴출시켜 버리고 만다. 덧붙여 헨리가 달던 1번도 영구결번 없이 다른 선수에게 주는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3.3 은퇴 이후

은퇴 이후 KBO 측은 2002년 김응용 감독이 제기했던 약물의혹을 문제삼아 그의 모든 기록은 약물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모든 공식기록을 삭제해 버렸다.

2006년, 일반인 신분으로 사직구장에 경기를 보러 가던 중, 이대호가 커리어 첫 장외홈런을 때렸다. 날아오는 타구를 본 헨리는 옆에 있던 빗자루로 이를 받아쳤고, 공은 다시 넘어가 관중석 쪽으로 떨어져서, 장외홈런이 순식간에 장내홈런으로 둔갑해 버리고 말았다. 이대호 안습

하지만 2007년 불치병 진단을 받고 크리스마스 당일 사망하고 말았다.

2009년-2010년 즈음부터,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혀졌던 그가 꼴갤러들로부터 재조명을 받으면서 서서히 발굴되고 있다. 이와 함께 롯데 프런트의 만행들도 속속이 발굴되어 한층 더 까이는 중.

4 왜 그의 이름을 찾을 수 없는가?

배번은 입단 당시에는 34번을 받았지만, 재계약하면서 1번으로 바뀌었으며 퇴출될 때까지 줄곧 1번을 달았다.

한국인이 아닌 용병이 리그의 전설이 될 정도의 맹활약하는 걸 고깝게 생각하던 KBO가 헨리가 롯데 자이언츠에서 퇴출된 이후 약물의혹을 빌미삼아 모든 공식 기록을 삭제, 더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17]

롯데 자이언츠 프런트와도 갈등이 있어 팀 자체의 공식 보도자료에도 전혀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당시 MBC에서 헨리오함마 특집? 이라고 하기엔 짧은 5분짜리 영상을 보낸적이있는데 그 영상파일조차 KBO에서 들어온 압박으로 인해 삭제되었다 카더라.

5 일화

  • 선수시절 등록된 이름은 오함마. 이 때문에 타 팀 팬들은 헨리만 나오면 키득거렸고, 사직아재들은 키득거리는 타 팀 팬들을 척결하고 다니면서 특유의 엄청난 전투력을 길렀다고 한다.
  • 1이라는 등번호에 대한 애착이 강해 유니폼을 도난당했을 때도 다른 선수의 유니폼을 빌리되 빌린 유니폼에 청테이프로(...) 1을 만들어 붙이고 나간 전력이 있다.
  • 부산갈매기를 롯데의 응원가로 사용하게 된 것도 헨리 때문이다. 유부남이던 헨리를 사랑한 한국인 여성 순이에 대한 추억을 담아 부산갈매기를 듣던 헨리는 롯데 응원에서 부산갈매기를 제일 좋아했다고 한다. 퇴출을 예감한 것인지, 마지막 시즌의 최종 경기에서 부산갈매기를 틀어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 헨리 오 함마가 떠난 이후 롯데에는 1번 저주설이 생겼다. 팬들은 헨리의 1번을 영구결번시킬 것을 요청했지만 구단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후 1번을 다는 선수들의 성적은 다 시원찮았다는 전설.과연 손승락도 여기에 추가 될 수 있을지? 영구결번을 원하는 팬들이 단체로 헨리의 1유니폼을 불사르는 퍼포먼스를 펼쳤다는 전설도 있다.
  • 뉴욕 양키스에서 KBO를 초토화시키던 헨리에 대해 오퍼를 한 바 있으나 거절. 이 때 헨리의 답이 걸작.
"물론 메이저리그는 최고의 리그다. 하지만 사직의 롯데 자이언츠 관중은 최고의 팬이다. 그래서 난 이 곳에 남아있다."
  • 현대가 사기 유닛으로 군림하던 시절 에이스 정민태와의 승부에 나선 헨리. 상황은 9회 무사에 주자 1/3루, 11:4로 현대가 리드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민태가 견제구로 주자 2명을 잡고 단번에 상황은 9회 2사 주자 없음.
분노한 헨리의 머릿속에 불꽃이 타올랐고, 헨리는 정민태가 꽂은 회심의 몸쪽 직구를 제대로 후려쳐 8점 홈런을 쏘아 올려 11:4에서 11:12로 극적인 역전승을 일궈냈다.
  • 이대호사직 장외홈런 기록이 늦춰진 것은 헨리 때문이다. 퇴출 이후 사직구장을 찾은 헨리가 사직구장 밖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이대호의 장외홈런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만 것이다. 헨리는 빗자루를 들고 타구를 받아쳤고, 타구는 방향을 바꾸어 그라운드로 돌아갔다고 한다.
  • 헨리의 무시무시한 활약 앞에 투수들은 모두 데꿀멍 상태로 헨리를 피했다. 결국 1.5리터 페트병을 들고 타석에 들어선 헨리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수들은 모두 그를 피했다. 유일하게 헨리를 상대한 용자는 강병규.
몸쪽으로 날카롭게 떨어지는 커브를 보고 코웃음을 친 헨리는 페트병으로 잠실 장외홈런을 만들어 냈다(...)
  • 손민한이 마무리 알바를 뛰던 2005년, 손민한은 그만 9회 초 무사 만루를 만들고 만다. 스코어는 5:4. 누구나가 다 동점을 예상한 순간 양상문 감독은 승부수를 띄운다. 헨리의 마무리 등판. 연호하는 오함마 소리와 함께 마운드에 올라선 헨리.
헨리는 견제구로 주자 3명을 모두 잡아 투구수 0개짜리 세이브를 따내고 내려갔다.
  • 박정태가 주장이던 1999년 헨리가 박정태를 찾았다. 박정태와 함께 술을 마시며 많은 것을 이야기했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 중 성지가 나왔다. 눈을 부릅뜨고 헨리가 했다는 말.
"경기는 삼성 쪽으로 기울고 롯데는 할 수 있는 모든걸 쏟아붓는 심정으로 기론을 투입한다."
  • 1984년 후기리그 막판, 헨리는 투수 알바를 뛰던 중 삼성 장태수의 강습타구에 정강이를 가격당해 시즌아웃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강병철 감독은 한국시리즈 엔트리 제출 전날, 전격 헨리의 한국시리즈 엔트리 등록을 선언해 버린다.
헨리는 "감독님요, 너무한거 아입니꺼. 아직 뼈도 다 안 붙었심더." 하지만 강병철 감독은 역사에 남을 말을 남기게 된다. "헨리야 우야노, 여기까지 왔는데..." 헨리는 "네, 알겠심더!"라고 씩씩하게 외치고 재활훈련에 박차를 가한다.
  • 한국시리즈 7차전, 최동원이 연투에 지쳐 9회말 주자 3루의 위기에 처하자 강 감독은 전격적으로 헨리를 등판시켰고, 헨리는 그를 부상의 구렁텅이로 내몰았던 장태수를 하프스윙 삼진으로 처리하고 롯데의 우승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비록 정규방송 관계로 최동원의 강판 장면까지만 남아있지만, 1985년 한국프로야구연감의 표지에는 포수 한문연과 진한 포옹을 하는 헨리의 모습이 자랑스럽게 남아있다. [18]

6 화려한 통산성적

6.1 투수

역대기록
년도소속팀경기수이닝ERA피안타사사구탈삼진
1984[19]롯데 자이언츠214402303.27733028
198524116⅔11202.19
(4위)
862831
1986[20]258812202.76912240
198731200
(5위)
1310102.57
(7위)
1916584
(7위)
198835
(7위)
234
(1위)
18
(1위)
103
(10위)
03.15
(7위)
24156123
(2위)
198938
(5위)
250
(1위)
16
(3위)
11202.7022173141
(3위)
199026143⅔312004.071574464
199134205
(3위)
17
(2위)
12003.251826299
199230212
(3위)
17
(3위)
5203.6120461131
(3위)
199328203
(1위)
12
(8위)
12003.012124792
199418112⅔47005.351412849
199524159⅓12
(10위)
8003.281484071
1996155335004.42552519
1997112710013.67371119
1998952⅔10022.76263215
1999204411805.6829915
20004587⅓3523
(4위)
52.064961106
20013652⅔261136.49572543
20021937⅔421023.58381013
20035700303.86986
200423⅔00014.91352
2005100100.00000
KBO 통산
(22시즌)
4972333⅔
(3위)
129
(6위)
111
(9위)
73113.302250
(2위)
7421191


1996년 이후로는 규정이닝 미달이다.

2000년 이전에는 홀드가 기록되지 않았다.

완투, 완봉기록
년도완투완봉
1985년5완투
(5위)
2완봉
(4위)
1986년4완투0완봉
1987년7완투0완봉
1988년12완투
(2위)
5완봉
(1위)
1989년4완투1완봉
1990년5완투3완봉
(3위)
1991년10완투
(5위)
2완봉
(4위)
1992년6완투1완봉
(10위)
1993년4완투0완봉
1995년3완투1완봉
1997년1완투1완봉
(4위)
통산60완투15완봉
(10위)

6.2 타자

역대기록
연도소속팀경기수타수타율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득점도루사사구삼진출루율장타율OPS
1986[21]롯데 자이언츠77219.2976511210
(8위)
282753564
(1위)
.364.502.865
198784292.2918525
(2위)
321
(2위)
4435184775
(1위)
.382
(9위)
.572
(2위)
.954
1988103335.319
(8위)
10730
(1위)
5
(1위)
19
(3위)
57
(6위)
66
(4위)
25
(3위)
6866
(2위)
.394
(8위)
.609
(1위)
1.003
1989100337.291
(9위)
9820
(8위)
318
(4위)
5377
(2위)
216763
(6위)
.378
(9위)
.484
(3위)
.862
199097356.312
(5위)
118
(7위)
23
(3위)
122
(3위)
68
(5위)
60147360
(6위)
.409
(2위)
.596
(1위)
1.005
1991116427.347
(2위)
148
(2위)
36
(1위)
326
(3위)
6066168762.421
(2위)
.628
(1위)
1.049
1992119433
(8위)
.321
(5위)
139
(5위)
39
(2위)
227
(3위)
79
(5위)
73158673
(8위)
.404
(8위)
.607
(4위)
1.011
1993126452
(4위)
.345
(1위)
156
(1위)
33
(1위)
325
(2위)
86
(3위)
79
(3위)
19
(10위)
9578
(3위)
.427
(2위)
.624
(1위)
1.051
1994109373.308
(5위)
11535
(1위)
4
(9위)
26
(1위)
65
(10위)
59168362.410
(3위)
.660
(1위)
1.070
1995[22]84297.337100282206977178970.461.6461.107
1996[23]79259.32083173134852157772.440.6461.086
1997[24]77261.31883152125553136275.423.571.994
1998103354.29710520131
(3위)
79
(10위)
73167770.424
(3위)
.621
(1위)
1.008
1999119401.369
(2위)
14820340
(3위)
112
(3위)
106
(5위)
178377.457
(2위)
.733
(1위)
1.190
2000125467.332
(6위)
155
(6위)
285
(1위)
37
(3위)
109
(4위)
105
(2위)
19
(9위)
9289.424
(3위)
.651
(1위)
1.075
2001117405.328
(6위)
133223
(9위)
30
(4위)
100
(5위)
98
(4위)
179577.440
(5위)
.620
(2위)
1.060
2002[25]76289.33998172247770176677.441.6751.116
2003[26]37116.45753915202672820.525.6811.206
KBO 통산
(18시즌)
17486073.328
(2위)
1989
(10위)
428
(3위)
48
(8위)
406
(2위)
1199
(4위)
1202
(3위)
2871240[27]1230
(6위)
.435
(1위)
.614
(1위)
1.049
{1위)

1시즌간 60삼진은 넘게 기록했는데, 이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이긴 하지만 당시 심판들의 노골적 외인차별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1998년 이후로는 외인들의 본격적 등장으로 인해 삼진도 많이 줄은 편. 사실 삼진 갯수는 변함이 없지만 경기가 늘어나면서 잘 안 당하게 된 것에 가깝다.

18시즌을 타자로 활동하며 1989안타, 통산타율 3할, 406홈런을 기록했다. 어찌 보면 소리없는 강자들 중 최강자로 보아도 될 듯. 406홈런은 2015년 이승엽이 넘기기 전까지 KBO 통산 홈런 최고기록이었다.

OPS의 경우 현재까지 KBO 리그 최고기록이며, 유일한 통산 OPS 10할 타자이다.

  1. 틀린 말은 아니다. 1984,1992년 우승과 1995년 준우승과 588, 그리고 1999년 준우승과 88885를 찍고 퇴출됐기 때문. 하지만 롯데가 8년 만에 4강 가는 것은 못 보고 세상을 떠났다.
  2. 당시 KBO 최고기록
  3. 이중 1988년, 1989년은 심판의 석연찮은 판정으로 홈런이 날아가버린 적이 있다.
  4. 근데 이만수는 당대 최강의 포수라 불릴 만큼 수비력도 절륜했기에, 지금처럼 평가되는 건 SK 팬덤을 위시한 이만수 깎아내리기 때문일 것이다. 갓동니뮤ㅠㅠㅠ
  5. 국수주의도 팽배하던 시절이라, 헨리는 인터뷰에서 "골든글러브 같은 희망은 애초에 접었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6. 일반적으로 용병은 1998년 외국인 선수 트라이아웃으로 인해 처음 도입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이지만, 안 알려지고 묻혀서 그렇지 이 드래프트가 최초의 용병 도입 드래프트다.
  7. 사실 그당시 인지도가 해외에서 거의 없었던 것도 있다. 모르니까 가려고 해도 갈 수가...
  8. 그런데 144m 나 되는 초대형 홈런이다 ! 지금은 구하려면 조금 시간이 걸리지만 당시영상으론 대타로 나와 홈런을 쳤는데 그냥 오른쪽 멀리 사라져버렸다 ! 어렸을 적부터 파워가 ㅎㄷㄷ했다. (외야는 관중석이 그냥 벤치 3개가 줄서있는 형태라서 경기장 밖으로 멀리 날아갔다.) 전해져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그공은 경기장 뒤쪽 테니스장 철망에 꽂혀 있었다고 한다.
  9. 하지만 공격적인 피칭으로 인해 생각보다 실점이 많다.
  10. 혹자는 이 당시 부상으로 재활치료를 받던 헨리가 약을 투여받으면서 부작용으로 그 죽을 병(혈중 담석증)에 걸렸다고 주장한다.
  11. 위에 각주에서도 설명되었지만 헨리는 리틀리그 때부터 144m 짜리 홈런을 날린 적이 있을정도로 타격에서도 소질이 있었다. 이홈런도 대형홈런 이었다고 한다.
  12. 1997년에는 누상으로 나갔을 때 80%는 대타로 교체되었다고 한다.
  13. 아무래도 용병이 국내 타자들을 순식간에 압도해버린다는 게 달갑지만은 않았을 것을 넘어 고까웠을 것이라는 게 중론. 실제 1991년 재계약 당시 프런트의 행동들을 보면 헨리를 얼마나 고깝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드러난다. 이건 KBO도 마찬가지여서 나중에 헨리가 방출당하자 약물의혹을 빌미삼아 모든 공식 기록을 삭제해 버렸다.
  14. 2군에서 타자로 15경기 뛰면서 8홈런을 쳐냈다고 한다.
  15. 하지만 송승준이 자신의 자서전 '나의 꼴레발'에서 헨리는 약을 한 적이 전혀 없었으며 선수들이 마시는 영양 드링크조차 마시지 않았다고 못을 박아 기나긴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16. 공식적으로 롯데 구단측에서 밝힌 내용이긴 한데 구라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
  17. 현재 모든 인터넷 유저가 항목을 작성, 수정할 수 있는 나무위키에서 야구 관련 인물, 롯데 자이언츠/선수목록 항목이나 그를 언급하는 문장에 삭제선을 긋는 이유는 들처럼 그를 미워해서 삭제선을 긋는 것이 아닌, 오히려 그를 존경하고 기리는 의미에서 그리고 위대한 선수를 홀대한 KBO의 병신짓을 까기 위해서 근데 더 병신인건 롯데 자이언츠의 프런트다. 긋는다는 것을 이 항목을 방문하는 모든 위키러에게 공지하는 바이다.
  18. 참고로 헨리는 큰 경기에 아주 강한 면모를 보였다. 1984년 한국시리즈 1세이브, 1992년 한국시리즈 .568 3홈런 9타점, 1995년 플레이오프 .438 8타점, 1999년 플레이오프 2승 1세이브 0.88, (그의 롯데에서의 마지막 포스트시즌이 된) 2000년 준플레이오프에서 단 한 타석 출장했지만 그것이 임창용에게 때려낸 결승 2루타였고, 이것은 2009년 준플레이오프 1차전 이전까지 롯데의 마지막 포스트시즌 승리기록이었다.
  19. 규정이닝 미달
  20. 규정이닝 미달
  21. 규정타석 미달
  22. 규정타석 미만
  23. 규정타석 미만
  24. 규정타석 미만
  25. 규정타석 미달
  26. 규정타석 미달
  27. 277사구(死球) 포함. 사구 역대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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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진실

사실 이는 롯데 자이언츠 갤러리에서 시작된 낚시극. 한 뉴비가 올린 질문에 헨리 오 함마라는 농담 섞인 리플을 달기 시작하더니 롯갤 전체에서 헨리 오 함마 드립을 치기 시작했다. 심지어 방송에 나온 유명 블로거 모 씨가 방송에서 헨리 드립을 치면서 분위기는 안드로메다로(..) 일단 외국인 용병제도가 1998년에 도입되었기 때문에 조금만 한국프로야구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낚일 리가 없다. 결론적으로 낚시.

애초에 마지막에 설명된 한국시리즈도 롯데 팬이라면 당연히 9회에 최동원의 공에 헛스윙으로 삼진 당하는 장태수가 나오는 장면을 알 것이니...더 이상 설명이 필요한지?

사실 헨리 오 함마는 들이 '내가 좋아하는 선수가 이래 주었으면...'하는 소망이 담긴 일종의 팬에 의해서 만들어진 아이돌이다. KBO가 본격적인 스포엔터테이먼트의 길로 가는 시점에서 이런 선수(?)가 팬들 사이에서 만들어 진 이유는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여담으로 위의 투수 스탯은 윤학길의 성적이다.(...) 타자 스탯은 주작이라는 건 함정 또한 등번호 34번도 도위창코치의 등번호이고 등번호 1번 또한 한 때 대도라 불렀던 전준호의 등번호이기도 하다.

파일:QWf4qHa.jpg
그리고 8점 홈런이란 얘기는 이 사진에서 나온 드립이다. 그런데 정말로 8점 홈런나와버렸다(...).

참고로 샤다라빠의 롯데 유니폼 마킹이 헨리 오 함마다.(...) 샤빠의 저주가 예전보단 약해졌다고 하지만, 위키러가 13, 14년 목격한 날에 어김없이 다 졌다. 개자식아

오 헨리와는 전혀 관련 없다. 오함마와도 전혀 관련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