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한국사의 500년을 거슬러 온 조선의 역사가 시작된 해인 동시에, 태조 왕건 이래로 가장 위태로웠던 고려가 멸망한 해이기도 하여, 한민족에겐 아주 중요한 해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2016년 3월 3일까지 그렇게 대단한 설명이나 문서 내용의 보충은 없었다
2 사건
2.1 실제
- 4월 26일 :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살해당함.
시인 정몽주의 굳건한 정신을 담은 시 '단심가'가 발표되었다[1] - 음력 8월 8일 : 태조가 정안군을 자신의 고조부인 목조가 묻힌 동북면 지역에 파견해 태조의 4대조에게 제사를 올리게 하고, 각 무덤마다 능호를 붙였다.[2]
- 8월 5일 : 태조가 송경 수창궁에서 공양왕으로부터 선위의 형식으로 임금 자리를 물려받고, 조선이 개국함.
- 음력 10월 19일 : 일본 축주 태수 장충가가 승려 장주·종순 등을 파견해, 사로잡혀 있던 조선인들을 돌려보내고 친선 도모를 청함.
- 음력 10월 28일 : 덕릉 주위의 민가 몇 호와 권무 2명을 수릉호(守陵戶)로 두어 능지기 역할을 맡게끔 함과 동시에, 그 옆에 재궁(齋宮, = 재실)을 함께 마련했다.
- 10월 15일 : 일본 남조의 마지막 천황 고카메야마 덴노가 화친파의 주장에 따라 아시카가 요시미츠에게 평화를 요청한다. 이후 교토로 돌아와 당시 북조의 천황이었던 고코마츠 덴노에게 3종신기를 건네며 양위하였다. 이로써 56년에 걸친 남북조시대가 막을 내린다.[3]
- 12월 1일 : 조선에서 인재의 천거 등과 같은 시무책을 정한다.
- 음력 11월 29일 : 예문관 학사 한상질을 명나라 금릉에 보내, 조선과 화령 중 어느 것을 국호로 고칠 지 결정을 청하였다.[4]
- 일자불명
- 음력 11월 : 조선이 승려 각추를 무로마치 막부에 파견해, 왜구 소탕, 포로 귀환, 친선 도모를 요청했다. 당시 쇼군이였던 아시카가 요시미츠는 사신과 함께 포로 100명을 송환하여 조선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에 있는 능주향교가 지어졌다.[5] 또한 면천향교[6], 김산향교, 문경향교, 함안향교, 광주향교, 동래향교, 구호서원 등의 교육 기관이 전국적으로 지어지게 된다.[7]
- 고려 성리학의 대가 이색의 아들 이종학이 정도전의 사주를 받은 손흥종과 김여지에 의해 암살당함.
- 호조 소속[8]의 관서 내부시[9]가 설립된다.[10]
- 정도전이 요동 정벌을 계획하기 시작함.[11]
- 베네치아 공화국이 알바니아 왕국의 항구 도시 두러스를 지배함.
- 도교 관련 관청이었던 복원궁, 신격전, 정사색, 소전색, 태청관, 태일전, 구요당, 청계배성소 등을 소격전에 통합한다.[12][13]
2.2 가상
3 탄생
3.1 실제
3.2 가상
4 사망
4.1 실제
4.2 가상
5 기타
무한도전 TV특강 특집에서 멤버들이 직접 역사 강의를 했을 때,
노홍철이 조선이 건국된 1392년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도착년도인
1492년, 그리고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을 묶어 1492±100년으로 조선의 굵직한 일을 설명했었다.
생선구이는 100도에 구워야 맛있다는 꿀팁도 설명했다
- ↑ 헌데, 일각에서는 이 시가 정몽주의 창작물이 아니고, 전해져 내려오는 시구를 적절히 인용한 것이라고도 본다. 단심가 문서 참조.
- ↑ 목조의 능에 '덕릉', 그 부인인 효공왕후의 능에 '안릉'이란 이름을 붙인다.
- ↑ 당시 평화 조약의 조건으로 남북조 덴노들이 각각 왕좌를 교대로 계승하는 것이 있었는데, 이는 1412년 파기된다.
안습
- ↑ 근데 명나라 황제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했던 감이 없잖아 있다. 일부 학자들은 명나라 황제가 '기자조선설(상나라 귀족인 기자가 고조선 지역을 책봉 받아 국가를 세웠다는 설)'에 의거해 조선이라는 국호를 고른 것이라 하기도 한다.
- ↑ 원래는 능주 서쪽에 있었으나, 선조 33년(1600년)에 하응도가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 ↑ 정확한 건설년도는 불명확하나, 태조 원년에 지었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 ↑ 대부분의 향교가 태조 대에 지어졌는데, 이는 1392년 태조가 각도의 안찰사들에게 교육의 개혁을 명령하면서 비롯되었다.
- ↑ 정확히는 1405년 육조 직무를 나눌 때 호조에 소속된다.
- ↑ 태종 1년(1401년)에 내자시로 고쳐진다.
- ↑ 왕실의 재물을 넣어두던 부고(府庫)의 출납, 궁궐 내 등불의 점멸(點滅)을 담당하였다. 훗날 태종 대에 들어서면서 의성고와 병합되어, 왕실에서 사용되는 쌀, 국수, 술, 간장, 기름, 꿀, 채소, 과일, 꽃 및 내연직조(內宴織造) 등도 관장하는 한편, 왕자를 낳은 왕비의 권초례(捲草禮)를 봉안하는 일도 도맡았다.
- ↑ 명에게 보내는 경고였을 뿐이라는 해석이 강하다. 실제로 이루어지진 못했다.
- ↑ 세조 12년(1467년)에 소격서로 이름을 고친다. 도교의 영향을 받아 하늘과 별에 제사를 지내던 관청이었다.
- ↑ 녹화사업 및 국군기무사령부
and 서태지 로 대표되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소격동의 이름을 여기서 따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