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반적 의미
민둥산 등에 나무를 심어 푸른 산을 만드는 사업. 녹화(錄畵)사업[1]이 아니라 녹화(綠化)사업이다.
숲을 만드는 사업인 조림사업과 의미상 유사하며 혼용되기도 하나, 녹화사업은 필요한 경우 사방공사를 시행하여 조림사업에 적합한 환경을 인위적으로 구성하는 것을 포함한다는 것에서 구분된다.
1.1 식민지 이전
16세기~ 17세기를 거치면서 인구 증가와 목재 수요 증가로 유럽과 동아시아의 각국의 산림은 고갈되고 있었다. 조선의 경우 인구 증가 뿐 아니라 '온돌'이 대중화되면서 나무의 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면서 산림고갈에 시달렸다. 또한 18세기 조선에는 산림의 소유권을 둘러싼 송사인 산송(山訟)이 증가한다. 때문에 조선 정부도 산림 보호를 위한 금산(禁山) 규제와 정부 주도로 비변사와 각 지방 군관을 동원한 대규모 나무 심기를 시행하였다. 1788년에는 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산림법인 송금사목을 제정한다. 문제는 이러한 규제와 나무 심기에도 불구하고 급증한 수요를 공급이 따라가지 못했고 조선 후기 상당한 삼림의 고갈을 겪는다. 일본과 유럽도 비슷한 과정을 겪었으나 일본은 홋카이도 침략 개척을 통한 외부 지역의 목재 공급, 유럽은 아메리카 대륙과 기타 해외 식민지에서 목재 공급을 통한 수용 충족과 석탄 사용을 통한 목재연료 사용 감소를 통해 산림 고갈을 해결하게 된다. 더군다나 유럽과 일본은 해양성 기후로 강수량이 고른 편이었기 때문에 굳이 힘을 들이지 않아도 천이현상을 통한 자연적인 산림회복이 수월한 편이었지만 한반도는 가을과 봄에 걸쳐서 사실상 비도 눈도 거의 오지 않는 건조기후에 가까웠으므로 대충 나무만 심어놓으면 그냥 말라죽거나 산불에 홀라당 타버리기 일쑤였다.[2]
1.2 대한민국의 산림녹화사업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은 국유림, 민유림을 불문하고 벌채하여 수탈해감은 물론 공출제를 통해 수피, 수엽, 수지, 소나무 뿌리 등을 가져가 한국의 임야의 비옥도는 상당히 감소해 있었다. 이에 1공화국은 식목일을 지정, 산림보호임시조치법(1951)을 공포하고, 석탄 산림녹화사업을 개시하였다.# 1950년대까지도 가정용 연료에서 신탄(나무)의 비율이 80%에 달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제1공화국 정권은 당시 연료를 연탄으로 대체하는 사업을 벌이고 석탄개발공사를 세웠으며, 유연탄 도입 5개년계획(상공부, 1955년 07월03일 성안) 등을 실시했다. 또 국군이 미군의 기술적 지원을 받아 석탄 수송로 철로를 깔게 하는 등 한국 산림녹화의 기반을 다졌다. 그래도 가난한 지역에서는 산에서 나무껍질을 벗겨 삶아먹느라 산의 나무가 다 말라 죽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보다는 공출제의 폐해. 60년대는 50년대와 크게 다르지 않게 해오던 것들이 계속되었으나, 사방사업법 개정(1962), 화전정리 법률 제정(1966) 등 몇가지 행정 및 법제적 변화가 있었다. . 67년 농림부 산림국이 산림청으로 발족되었고 73년엔 산림청을 내무부로 이관, 새마을운동과 연계되었다. 이때 시도별 산림과나 녹지과가 국으로 승격되었고 영림과와 식수과가 신설되기도 했다. 70년대에는 1982년 전국토 녹화를 목표로 제1차 치산녹화 10개년계획이 세워졌는데 이때 식목일 행사를 식수기간으로 확대해 기후별로 선택할 수 있게 하였고 과학 연구에 힘입어에 4년 단축된 1978년 종결되고 차 기간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1970년대 말에는 해풍(海風)+돌산으로 나무가 자랄 수 없을 것으로 여겨지던 포항시까지 녹화사업이 완료될 정도였다. 당시 포항 영일지구는 토양이 모두 침식된 채 암반층만 남아 노출된 상태로 나무는커녕 풀 한 포기 없었던 지역. 이 암반층에 도랑을 파고 물을 부어 퇴적암반이 풍화되게 한뒤 풀을 베어 만든 퇴비를 날라다가 나무를 심고 가물면 물을 길어다 주고 매년 비료를 주는 노력 끝에 산림이 복원되었다. 관련기록은 국가기록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여기에 정부에서는 그린벨트 제도를 도입해 과도한 도시화에 의한 산림파괴를 방지하였다.[3] 이 사업을 지시한 박정희는 국립수목원의 '숲의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어 있다.[4]
여담으로 이 명예전당에는 총 5인이 수록되어 있다. 나머지 4명을 소개한다면 (출처 : 국립수목원 홈페이지)
- 현신규 : 은수원 사시나무 개발자. 척박한 땅에서도 빨리 잘 자랄 수 있는 조림수종 개발에 평생을 바친 세계적인 육종학자. 1953년부터 40여년 동안 임학교육과 함께 소나무와 포플러 육종에 쏟은 그의 순수한 열정은 임업과학기술 발달의 견인차였으며 그가 개량한 조림수종은 국토녹화 사업에 큰 기여를 하였다. 과학동아에도 실렸다.
- 김이만 : 이 땅에 자라는 나무 종자를 수집하고자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국토의 구석구석을 누빈 '나무 할아버지'. 1922년부터 64년 동안 수목표본 수집과 종자 시험에 바친 그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주요 조림수종의 종자품질기준이 정해졌고 각 지역에 알맞은 나무를 골라 심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 민병갈(Carl Ferris Miller) : 1979년 한국인으로 귀화하기 전 1962년부터 40년 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충남 태안의 산림을 10,300여종의 식물종이 살고 있는 세계적인 수목원으로 바꾸어 놓았다. 아시아 처음이자 세계 12번째로 국제수목학회로부터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인증받은 천리포수목원을 조성하였다.
- 임종국 :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전남 장성의 543ha에 이르는 임야를 제일가는 조림성공지로 만들었다. 이 공로로 66년 식산포장(殖産褒章), 70년 철탑산업훈장, 72년 5·16 민족상을 수상했다.
2010년 최종현 sk그룹 회장이 활엽수 단지 조성과 조림지를 교육기관에 기증하고 임업 교육에 힘쓴 공, 그리고 사후 화장을 하고 화장시설을 만들어 장례로 인한 산림훼손을 줄인 공으로 새롭게 헌정되었다. 이로서 명예전당에 헌정된 인원이 5인에서 6인으로 바뀌었다.
이후 80년대에는 유한킴벌리의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 캠페인(1984)의 주도로 민간단체의 녹화사업이 활발해졌으며, 1998년 생명의숲 국민운동, 1999년 평화의숲, 동북아산림포럼, 2000년 한국내셔널트러스트, 2003년 서울그린트러스트 등 다양한 운동이 전개되어 오늘에 이른다.
1.3 비판과 옹호
대한민국 성장 과정 특유의 압축적 전개 탓에 이 녹화사업(+그린벨트)에도 몇 가지 부작용이 생겼고, 2000년대 들어 그에 따른 비판이 일고 있다.
- 그린벨트의 부작용으로 대두되는 사유재산권 행사 권리의 방해.
- 소나무 중심의 사업으로 인한 생태계 문란.
- 한반도는 분명히 온대지방[6]인데 눈에 보이는 건 타이가인 셈. 그런데 사실 중부지방부터는 타이가라고까지 할 수준은 아니지만 냉대기후[7]로 경기도와 강원도, 충청북도쪽에 리기다소나무, 물오리나무, 은사시나무(혹은 은백양)를 많이 심었다. 때문에 2007년부터 외래종을 대신해 국내종으로 바꾸는 사업을 추진중이다.# 하지만 (외래)소나무->(자생)소나무로 바뀌는거라 일반인은 쉽게 느끼지 못한다.
- 아까시나무, 리기다소나무, 리기테다소나무 등으로 대표되는 외래 속성종의 도입.
- 다만 여기서 아까시나무 같은 수종은 근본적으로 수명이 짧은 나무이기 때문에, 단시간 내에 산림 환경이 조성된 이후 자연적으로 말라죽으면서 다른 나무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고, 소나무류 역시 남부지방에서는 떡갈나무류 등 활엽수와의 경쟁에 밀려나서 천천히 활엽수로 대체되고 있는 중이다.
다만 그린벨트를 제외하고 밑의 두가지 비판은 전후상황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당시의 녹화사업은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이 아닌 산림이 자연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는 위한 과정의 성격 역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데 아까시나무의 경우 당시 척박한 토질 환경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의견이 다수로, 60년대 당시의 메마른 토양에서 잘 자라는 큰키나무는 리기다소나무, 사방오리, 아까시나무 정도밖에 없었고, 리기다소나무를 제외하면 모두 뿌리혹박테리아의 질소고정으로 척박한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진 나무들이다.[8] 리기다소나무 또한 당시에는 솔잎혹파리가 기승을 부린 탓에 어쩔 수 없었다는 쪽이고, 리기테다소나무는 현신규 박사가 새로이 개량해 낸 수종이기도 하고
정리하자면 외래종, 생태계 문란이라는 비판은 일단 흙부터 양분을 가질 수 있게 만들기 위한 방편으로써 시행된 사항에 대한 것으로, 결과적으로는 외래종들이나 침염수림이 나이를 먹어 가며 말라죽고 결국은 활엽수림에 제 자리를 내주면서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이러한 비판이 나오는 이유는 조림사업 자체가 흐지부지된 것도 영향이 있다. 애초에 치산녹화계획은 1차는 아까시나무 등 생명력이 강한 품종, 2차는 소나무 등 중형목, 최종적으로 3차는 경제성이 좋은 대형목으로 10년씩 3차로 예정된 30년짜리 초장기프로젝트였다. 그런데 1967년 산림청이 설치되고 시작된 1차 사업은 제대로 마무리 되었지만, 5공 때인 2차에서 주춤했다가 6공 이후에는 흐지부지 중단돼 버린 것이다. 그래서 산지의 대부분이 중형목인 소나무 잣나무 등인 것. 여기에는 연탄,석유 연료의 보급과 함께 1차 사업이 마무리되고 2차 사업에 돌입하는 1980년대 초반 시점에서 이미 대한민국의 산림이 민둥산에서 대부분 벗어났기 때문이다. 산림의 경제성이나 활용방안 등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던 높으신 분들 보기에 '이제 민둥산도 아닌데 뭐하러 나무 심는데 돈쓰나' 식으로 정리된 것이다.
물론 반드시 어떤 의미로든 손을 보아야 할 제도이며 명과 암이 공존하는 그린벨트 문제에 대한 논의는 분명 타당하므로, 이에 대해서는 해당 문서에서 다룬다.
1.4 기타
외국 환경운동가들 중에는 한국의 사례를 들면서 "전 세계의 산림도 이렇게 구원될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정작 그 나라 국민들 의견은 "그럼 밥지을 나무 어디서 구하는데?" 정도. 한국에서 산림녹화가 성공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민수용 석탄을 비롯한 연료 공급 사업을 병행한 결과 석탄과 석유가 장작(땔감)을 대체했다는 점이다. 이게 해결이 안 되면 나무를 아무리 심어봤자 소용이 없다. 사람들은 계속 나무를 베고, 공기가 더러워지며, 홍수와 산사태가 빈발하고, 흙이 쓸려가고, 강바닥이 불어나 수력발전소까지 잡아먹는 악순환이 벌어진다.[9]
바로 이런 문제로 태양열 조리기를 보급하는 운동도 있다. 인도 등 저위도 지방에서는 태양열 조리기 효율이 장난이 아니다. 낮의 대부분을 땔감 줍느라 시간을 보내던 여자들이 이런 조리기 덕분에 허리 펴고 살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인도의 어느 힌두교 사원에서는 하루에 만 명분 음식을 태양열 조리기로 만들 정도.
대륙의 기상. 돌산에 녹색칠을 하는 다른 의미로 녹화(綠化)사업이다(…).
이후 한국에서도 F1이 벌어지는 영암 서킷 공사에서 잔디밭에 녹색 페인트칠을 하는 사진이 돌아다녔으나 사실 그건 복합비료, 잔디 씨앗, 피복 양생제, 침식 방지 안정제, 착색제 등을 섞어 만든 시드 스프레이다. 즉, 앞의 '대륙의 돌산'은 그냥 녹색으로만 보이게 하는 거고 이쪽은 녹색으로 보이게 함과 동시에 진짜로 잔디를 심는 거다. 다만 잔디 혹사 논란이 있을 수도... 있다?
북한에서도 녹화 사업이 시행되고 있으나 경제난과 겨울철 연료 부족으로 효과가 별로 없다고 한다.[10] 북한은 공업화 과정에서 자국 내에 풍부한 석탄을 일반 가정과 공장에서 연료로 활용하였으나 1990년대 이후 경제가 붕괴하면서 석탄의 채굴과 수송 체계가 상당 부분 마비되었다. 평양과 대규모 기업소를 제외하면 석탄 공급이 모두 끊겼고, 이러나 일반 가정들은 난방이나 취사를 위해서는 당연히 산에서 나무를 베어오는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부족한 식량 증산을 위해서 산을 무리하게 개간하다가 1994~95년 대홍수로 상당 부분 삼림이 유실되었고, 그 결과 평양만 조금 벗어나면 죄다 민둥산이 되어버렸다. 북한에서 민둥산 신세를 면하는 곳은 오지 중의 오지인 개마고원 지역과 관광지인 금강산, 묘향산 정도.
실제로 탈북자들이 대한민국에 망명할때에 가장 놀라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어딜가나 산림이 우거져 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온갖 나무가 빽빽히 들어선 산과 언덕들이 여기저기 있으니... 모 탈북자의 증언에 따르면, 이런 모습을 보고 '남조선이 잘 살긴 잘 사는가 보다' 라면서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고 한다.[11]
이렇다 보니 통일되면 70년대에 난리쳤던 녹화 사업을 북쪽에서 다시 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이미 한 번 했던 것이 있긴 하지만, 이제 엄연히 민주화된 세상이니 막대한 인력과 자금이 들겠지만, 민둥산 때문에 발생하는 피해를 생각해보면 필수적이고 우선적으로 해야 할 사업 중 하나다. 한국은 현재 삼림이 울창하게 형성되고 도시 시설들이 탄탄히 갖춰지면서 한국에서 물난리와 홍수는 거의 전무해졌지만, 북한에서는 태풍이나 홍수 때마다 어마어마한 인명피해를 낳아 한국으로 북한인 시체들이 떠내려 올 정도이다.
2 전두환 정권의 흑역사
82-83년 '녹화사업' 기간 중 군대에서 의문사한 6명의 대학생들
제5공화국 정권에서 대학생들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뿌리뽑기 위해, 국군보안사령부에서 실행했던 비밀 공작이다. 대학생들 머리의 붉은 물[12]을 푸르게 만든다는 의미로 '녹화사업'이라 명명하였다. 한자는 1과 같지만, 실제 의미와 내용은 전혀 다른 것. 이 시기 남자 대학생이었다면 누구나 이 사업의 대상자가 될 수 있었고 여대생들은 군복무만 안 하지 산간오지의 청송교도소 같은 곳에에 수감되어 성고문을 포함한 잔인한 학대를 받았다.[13]
녹화사업 대상자로 지정되면 일단 강제휴학 & 입대처분이 내려졌다. 참고로 당시엔 학생운동을 통제하기 위해 대학 학칙에 '지도교수가 학생을 휴학시킬 수 있다'는 항목이 있었다.(...) 이를 빌미로 수사관들이 지도교수들을 찾아와서 반강제로 대상 학생을 휴학시킨 뒤, 제멋대로 입대영장을 뽑아와서 바로 입대시켜버리는 것. 바로 잡아가서 입대영장 뽑아서 훈련소에 집어넣으므로 가족이나 친구들 입장에선 어리둥절하게된다. 심지어 신검도 안하고 무조건 현역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반대로 대학생 출신 입대자를 찾아서 녹화사업 대상자로 지정하기도 했다. 대학생 출신 중에서 보충역으로 나와 방위병으로 복무하고 있는 경우에는 상관 없던 걸로 알려져 있고 예비역의 경우도 이미 군복무를 마쳐서 상관이 없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운 좋게 화를 피한 케이스. 대신 몇몇은 사실 상의 해외 망명인 유학길에 오르기도 했다.
거주지에 따라 내륙지역 거주자는 육군, 부산 같은 해안지역 거주자[14]들은 전원 해군으로 갔다. 해안지역엔 해병대로 배치되는 제주도민들이 포함된다.
녹화사업으로 강제입대할 경우, 육군은 최전방의 휴전선 경계부대로, 해군은 역시 전방 고속정 등에 배치[15]토록 했고, 해병대도 제주도 거주자를 대상으로 받아서 제2해병사단 및 제6해병여단 등 해안경계부대에 배치했다. 공군은 군 특성 상 없었다.
그러나 전방 철책에 배치된 몇몇 강제입대자들은 군사정권의 탄압에 염증을 느끼고 월북을 해버렸다. 심지어 녹화사업으로 강제입영된 육군 병사가 아군을 여럿 죽이고 월북한 사건도 있었다. 강제입영으로 내부의 적이 될 가능성이 있는 인원을 최전방에 보낸것은 보안사령관에 중앙정보부장 서리까지 했던 전두환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을 만큼 한심한 조치이며, 대놓고 이적 행위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전 박정희 정권도 눈엣가시인 운동권 대학생들을 강제로 군대로 끌고 갔지만, 무조건 전방철책으로 보내지는 않았다. 일단 입대가 결정되면 다른 신병들과 똑같이 뻉뻉이 돌려서 전국에 분산배치했다.[16][17]
걸기적 거리는 운동권 대학생들을 가혹한 환경의 전방 전투부대(혹은 해군 함정)에 배치해서 좆뺑이 치게 하는게 당시 신군부의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후방이라고 모두 편한 꿀보직도 아니고 오히려 전방철책보다 힘든 곳도 수두룩한데, 정권과 체제에 극도의 반감을 가진 인물들을 무조건 전방에 보냈다는거 자체가 당시 신군부의 인물들이 얼마나 군의 현실을 모르는 똥별들인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냥 전방은 힘들고, 후방은 편하다는 단순한 사고방식에 월북이나 총기사고 등의 위험성 등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위에도 언급했지만, 이런 강제입대자들은 월북 등의 초대형 사고를 수차례 저지른다. 상관 살해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저런 사람들을 전선에 내보내는 자체가 자살행위다!
일각에서는 녹화사업 대상자들을 무조건 전방으로 배치한것은 단순히 고생뿐만 아니라 몸이 망가져와서 민주화 운동 & 학생 운동을 하지 못하게끔 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랬다는 이야기가 있다. 즉 전방의 강원도나 철원 같이 극한의 추위나 열악한 환경으로 고생하는 곳으로 가서 동상이나 병들어 제대해도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거나 아니면 가서 확 죽으라고 그랬다는 것이다. 참고로 당시 강제입대자들이 배치됐던 곳들은 지금도 겨울에는 날씨가 워낙에 추워서 동상환자가 속출하는 등 생활환경이 열악하다. 군장병 복지, 인권을 부르짖는 지금도 이런데 병사 목슴은 파리 목슴처럼 생각하던 군사정권 시절 1980년대 초중반에는 훨씬 더 가혹했을 것이다. 특히 녹화사업 대상자에게는 근무생활을 더욱 가혹하게 하는 경우가 많아서 몸이 병드는 경우가 많았으며 심하면 죽음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보상? 당연히 그딴건 없었다 이를 통해본다면 5공 정권은 단순히 이들을 고생시키는게 아니라 인위적으로 병들게 하거나 죽게하려는 의도 역시 충분히 있었다고 봐야하며 당시 녹화사업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꽤 신빙성있는 증언도 많다.
당시 정권은 이렇게 녹화사업 대상자로 지정된 병사/수병들에게 대학내 학생운동을 감시하고 방해하는 프락치가 될 것을 강요하였고, 이 과정에서 당연히 온갖 종류의 폭력이 동반되었다. 이런 고문을 견디다 못한 학생들이 자살하는 사건도 있었다. 이 시기에 발생한 수많은 군의문사 사건 중에는 녹화사업 대상자들도 상당수 포함돼있다.
현재 유명인사가 된 486세대 정치인들 중에도 이 사업에 의해 피해를 입은 이들이 제법 있다. 대표적으로 전직 보건복지부장관이면서 현직 작가인 유시민 또한 녹화산업 해당자였는데 당시 보고서에는 녹화완료로 처리되어 있었다고 한다.(...)본격 무쓸모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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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민주광장에 있는 녹화사업 희생자 추모비
이렇게 입대한 이들은 제대한 이후 학교에 의해 보호받아야 할 학생들을 강제적으로 휴학시킨 것에 대한 보상 차원으로 이후 남은 학기를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 응? 그리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군 입대 중 의문사한 6명의 학생들(이윤성, 김두황, 정성희, 최온순, 한영현, 한희철)을 위로하는 위령비를 고려대학교 민주광장[18]에 건립하였으며, 이 비석은 아직도 남아 있다.
당연히 6명의 학생만이 녹화사업의 희생자였던 것이 아니고, 당시 군 내부, 특히 정보기관인 보안사에서 추진한 일이었기 때문에 피해자가 얼마나되는지 정확히 알 도리가 없다. 애초에 강제입대 자체가 워낙 학부모들과 사회의 반발이 심했으므로 1984년 9월에 폐지되었다. 그리고 이때 녹화사업도 공식 중단되었다고 발표했지만, 2005년에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확인해낸 것처럼 이러한 발표는 사실이 아님이 입증되었다.
2005년 12월 19일에 국방부 과거사위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실제로는 '특별 정훈 교육'이라는 이름 하에 강제입대를 안시켜서 그렇지 대학생 입대자에게 프락치가 될 것을 강요하는 행위는 그 뒤로도 꽤 오랫동안 군 내부에서 공공연히 행해졌다. 심지어 다음정권인 노태우 정권까지도 계속되었다고 한다.
노골적이지 않아서 이슈가 안 되었을 뿐이지 2010년대 중반의 군대에서도 각 군 훈련소에서 신병들을 모아놓고 데모에 참여해보거나 참여한 적이 있는, 혹은 그런 사람을 아는 이는 잠깐 면담할테니 나와라 하는 식의 사상검증 행위는 여전히 기무사에서 파견 나온 인원들에 의해서 이뤄지고 있다. 혹은 신병 총원을 불러모은 뒤 설문조사를 실시해 일부를 추려내 면담하기도 한다. 이는 겸사겸사 기무사령부나 기타 정보관련 특기 등에서 근무할 이들을 선발하기 위한 조사 과정이기도 하여, 여기서 대답 잘 하거나 좋은 정보 등을 알려주거나 한 인원들은 기무부대 등에 가게 될 확률이 높아진다. 아울러 최근까지 알게 모르게 행해지고 있던 운동권 출신 또는 데모에 참여한 적이 있는 육군훈련소 입대자의 전투경찰 전환복무도 어찌보면 녹화사업의 연장선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현재는 지원제인 의무경찰만 남고 강제 차출하는 전투경찰은 폐지되었으므로 해당없다.
드라마 제5공화국의 한 에피소드가 이 녹화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잘 묘사하고 있다. 드라마에 나오는 가상의 녹화사업 희생자와 같은 부대원들인 육군 병사들이 달고 있는 부대 마크는 실존하지 않는 것으로, 녹화 사업 대상자가 배치되지 않은 부대를 모르고 쓸 경우 혹은 실제로 썼다 해도 증거를 대지 못할 경우 그 부대에서 소송 등 명예 훼손에 대한 이의 제기를 해올 것을 우려해 가상의 부대 마크를 달았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석사장교라는 제도도 있었는데 당시 권력층의 자제들은 이를 이용하여 군생활을 6개월만 하도록 법을 고쳐서 활용하였는데, 당시 군부권력자들의 아들 또는 사위들은 이를 이용하여 입대와 전역을 하루만에 해치우기도 하여 큰 대비를 이루고 있다.
서태지와 아이유의 콜라보레이션으로 화제가 된 노래 소격동은 녹화사업으로 인해 벌어진 소격동 사건을 베이스로 깔고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소격동에 녹화사업을 주도한 기무사령부가 있었다는 점, 뮤직비디오에 나온 상황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 실제로 TV 프로그램을 녹화해서 가입자들에게 판매한 업체가 있었으나, 저작권법의 철퇴를 맞고 2009년에 폐업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엔탈 문서를 참조.
- ↑ 후술하듯 그냥 나무만 심은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물을 주고 여러 노력을 해가며 관리한 결과로 오늘날의 대한민국 산림이 회복된 것이다.
- ↑ 그린벨트의 애초 도입목적이 군사작전지역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였다는 주장도 있으나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헛소리다. 현대 군사작전의 기본이라도 숙지하고 있다면, 오히려 산악지대의 대규모 숲은 공방 모두의 방해물일 뿐이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 ↑ 박정희 정권에 비판적인 이들조차 인정하는 치적이 바로 이 그린벨트 지정과 산림녹화 산업, 그리고 고교평준화 조치이다. 특히나 앞의 두개는 기본권침해 행위에 해당되기 때문에(사유재산권, 무임금 강제노동) 군사철권통치가 아니라면 시행되지 못했을 거라는 의견이 중론이다.
- ↑ 누구나 일부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는데 그 누구 하나 나서서 고칠려고 하지 않고 그냥 쉬쉬 하면서 넘어간다. 사실 그린벨트를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시도 자체가 정치적 사망선고니 그럴만도 하다.
- ↑ 충청북도를 제외한 남부지방만 이렇다.
- ↑ 남부에서는 충청북도가 냉대기후이다.
- ↑ 참고로 오리나무는 자작나무과에 속한 나무들 중 유일하게 질소고정을 하는 나무이며 나머지 질소고정 효과가 있는 나무들은 모두 콩과에 속한다. 예컨대 아까시나무 등.
- ↑ 윌리엄 캄쾀바의 이야기를 다룬 책 <바람을 길들인 풍차 소년>에 나오는 말라위 이야기다. 수력발전소가 말라위에 필요한 전력 절반을 간신히 생산하는데, 불어난 흙 때문에 강바닥 준설작업을 해야 해서 안 그래도 비싼 전기가 더 비싸진다고.
- ↑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마을 인근의 산은 이미 주민들이 전부 벌목해서 나무가 없기 때문에 그런 산 몇 개를 넘어서 땔감을 조달했다고 한다. 물론 그 중에서도 돈 좀 있는 집들은 땔감을 사서 쓰긴 한다는데 어쨌든 이쪽도 나무를 연료로 쓴다는 점은 마찬가지다. 나무가 연료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북한의 녹지사업은 효과가 없을 것이다.
- ↑ 수목이 우거진 산림의 모습은 민둥산보다 훨씬 심리적 안정효과를 준다.
- ↑ 단순히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뜻하는 것 이상으로, 당시에는 군사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모든 이들을 친북·좌경·용공으로 몰던 시대이다. 여기서 붉은 물은 그런 의미에서 쓰인 것이다.
- ↑ 교도소는 아니지만 1986년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을 생각해보면 된다.
- ↑ 수도권에선 김포시나 인천광역시, 부천시, 당시 시흥군 등 서해안 내진 한강 하구쪽 거주자들이 해당된다.
- ↑ 일단 해군은 근무지에 따라 강제배치되는 방위병(현 상근예비역)을 제외하면 전부 지원자였으므로, 강제 입대가 아닌 자원입대한 수병들 중 녹화사업 대상자로 지정된 이들을 전역을 연기시키거나, 훈련병 신분일 경우 무조건 고속정에 배치시키거나, 고속정 등에 승조한 상태면 수병들 중 6개월 이상 함상근무시 육상 등 후방부대로 전출갈 수 있는 특혜 대상에서 빼버리거나, 후방 함정이나 부대 근무자는 고속정으로 전출시키거나 하는 식으로 이뤄졌다.
- ↑ 예를 들어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서 강제징집된 정동영은 후방 향토사단이었던 제33보병사단(현 제17보병사단) 본부대 행정병 보직을 받았다.
- ↑ 다만 각 부대 보안대가 이들을 집중관리했다고는 한다.
- ↑ 학생회관 맞은편, 홍보관 앞 편의점 계단 아래에 위치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