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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중에 아일랜드 상징이던 패트릭의 십자가가 잘렸다
영국과 아일랜드 공화국의 외교관계를 다루는 항목. 클로버와 장미
영국과 아일랜드 공화국은 한때까지만 했어도 영국과 영연방 멤버 국가라는 관계에 있었던 사이이자 애증적인 사이가 있는 편이기도 하다. 1973년에는 영국과 공동으로 EU에 가입하기도 하였던 적도 있었지만 이후로 북아일랜드 분쟁 등으로 감정의 골이 깊은 그런 사이이기도 하다.
1 아일랜드인의 반영감정
아일랜드인들이 영국에 대한 감정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한국이 일본에 대하여 가지는 감정보다 더 심하다. 21세기에 들어서는 반영감정이 상당히 희석되었지만 영국에 대한 감정은 한일관계랑 비교할 수 없이 영 좋지 않다.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영국의 최초 침략부터 계산하면 무려 800년 동안 영국에 지배받은 나라이다보니 영국에 대한 감정이 좋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아일랜드는 잉글랜드로부터 지속적인 침략과 수탈, 식민지배를 당했다. 특히 영국은 아일랜드인을 아프리카 흑인과 동급의 야만족인 하얀 흑인으로 멸시했다. 그러면서도 끈질기게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가며 식민지배에 맞서 싸웠다. 우여곡절 끝에 국제정세에 따라 독립을 얻긴 했지만, 나라가 남북으로 쪼개졌다. 바로 북아일랜드. 아일랜드인의 반영감정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다면 아일랜드 대기근을 알아보는 걸 추천한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을 들이대기에도 아일랜드의 경우는 적절하지 못한데, 1920년대 무렵까지도 아일랜드 산업은 거의 근대화되어 있지 않았다. 산업혁명 과정에서 아일랜드는 빈곤한 농업 지역으로 남았는데, 인구부족과 노동력 부족, 지리적 고립성으로 공업화가 추진되지 않았던 것. 또한 올리버 크롬웰의 아일랜드 정벌 이후 농지는 거의 다 영국계 신교도 지주, 영국인 부재 지주들의 소유였고 대다수 아일랜드인은 빈곤한 소작농 신분으로 남아 있었다. 어떤 면에 있어서는 독립 이전 아일랜드는 식민지시대 조선보다도 상대적으로 무척 열악한 처지였던 것.
조선은 20세기 초엽까지는 명목상 독립국이었고 조선 말기의 빈곤과 근대화 미숙에 대해서까지 일본을 탓할 수는 없겠지만, 아일랜드는 중세시대부터 수백년간 계속 영국의 지배를 받고 영국의 한 지방으로 취급 받았는데도, 영국이 선도한 산업혁명과 근대화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공업화가 조금 진척되었던 벨파스트와 북아일랜드 지역은 계속 영국령으로 남았고 독립 직후 아일랜드는 경제적으로 매우 후진적인 농업 국가였다.
장기간에 걸친 영국의 통치정책은 아일랜드의 빈곤과 빈부차, 사회갈등을 전혀 해결하지 못하고, 수백년 세월동안에도 아일랜드를 영국의 일부로 동화시키지 못하여 결국은 격렬한 무장독립운동을 자극했다는 점에서 크게 실패했다고 할수 있다.
아일랜드 역시 우리나라와 일본이 겪는 독도 분쟁과 유사한 분쟁을 겪고 있는데, 아일랜드어로 로칼(Rocal) 혹은 로카바리(Rocabarraigh), 영어로는 로콜(Rockall)이라 불리는 대서양의 작은 바위섬을 영국이 자기네 EEZ로 집어넣으려 하여 갈등을 겪고 있기도 하다. 국제법을 기준으로 단순히 자로 잰 수치만 따지면 분쟁의 소지가 있다고는 하지만 문화적, 역사적으로는 명백한 아일랜드의 영토이기 때문에, 반영감정을 키우는 한 요인이 되고 있다. 이쯤 되면 비슷하다 못해 섬뜩하다 유라시아 패러랠 월드?심지어 1970년대에는 울프 톤스(The Wolfe Tones)라는 정치색 강한 아이리시 포크 그룹이 'Rock on Rockall'<독도는 우리 땅> 아일랜드 버전이라는 노래를 내놓기도 했다.
제국주의 시대가 피식민지에게 여러 후유증을 남겼듯이 아일랜드 역시 영국의 식민지배가 남긴 후유증이 크다. 그런 일을 겪고도 피식민국과 아일랜드가 경제적으로 탄탄하게 성장했다는 걸 가해자였던 제국주의 열강들과 영국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지만, 아직도 영국은 아일랜드에 사과하는 일에 대해선 다소 미적지근하고, 이는 아일랜드인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영국은특히, 잉글랜드는 아일랜드의 독립운동가들을 테러리스트나 살인마로 취급하고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등의 입장을 보인다. 제국주의자 강대국들은 하는 짓들이 참 잘 통하는 것 같다.
2 제2차 세계대전 아일랜드의 중립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일랜드는 중립국이었는데, 이것은 물론 당시 약소국인 아일랜드의 사정상 전쟁에 참여할 이유도 없었고 그럴 여력도 되지 못했다는 점이 매우 컸지만, 반영감정이라는 이유도 꽤 컸다. 북유럽의 어떤 나라는 반러시아 감정 때문에 나치 독일과 협력하기도 했는데[1] 당시 영연방 소속 국가 중 영국에 협력하지 않고 중립을 선언한 것은 아일랜드가 유일했다. 아일랜드가 영연방 탈퇴를 선언한 것은 1937년이고, 영국이 이를 정식으로 승인한 것은 1949년이다. 즉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은 아일랜드를 영 연방 소속 국가로 간주했으나, 아일랜드는 이를 부정했다.
예를 들면 아일랜드의 베레하벤, 코브, 락 스월리 항구를 영국 해군이 사용할수 있게 해 달라는 윈스턴 처칠의 요청을 당시 아일랜드 대통령이었던 이몬 데 발레라는 철저히 무시했다.(…) 이 항구들에 영국 군함들이 기항했다면 대서양으로의 항속거리를 늘릴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독일의 U보트에 시달리던 영국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화딱지가 날 일이었지만, 아일랜드인들의 국민 감정상으로는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일이었던 것.
사실 괜히 어설프게 영국 편을 들었다가 괜히 영국 본토 항공전과 같은 일이 아일랜드에서도 일어났다면 그야말로 답이 없었을 것이다. 당시 아일랜드에는 공군 전력이라고 할 만한게 거의 전무했으니까. 당시 아일랜드 공군은 전투기의 종류 자체는 꽤 다양하게 보유하고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그 절대수가 다른 강대국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아일랜드를 점령하면 영국의 목에 칼을 겨눈 형국이 된다는 점에서 한때 아돌프 히틀러가 아일랜드 침공을 계획한 일이 있었지만, 해군의 반대로 계획을 철회한 일이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그야말로 코앞인 도버 해협도 건너지 못하는데, 훨씬 멀리 떨어진 아일랜드에 상륙이 가능하다면 그냥 영국 본토에 상륙하면 될 일이지 않은가.(…)
하지만 당시 영국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아일랜드인들도 상당수 있었으며, 영국군에 자원하여 참전한 아일랜드인들도 약 4만 5천여명에 달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일랜드 주민들의 반감이 매우 컸기 때문에 이 아일랜드인들은 휴가를 나올 때 군인인 걸 철저히 숨겼다고 한다. 아일랜드 정부는 이런 사실을 결코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언론의 검열에 의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였다가 탑승 함선이 격침되었다가 살아남은 한 해군 병사에 관한 기사는 '태평양의 선박 사고에서 생존' 이라는 식으로 보도되었고, 아프리카 전선에 참전했던 병사에 관한 기사는 '리비아 사막에서 납 중독으로 고생한 후 입원 중(한마디로 총탄을 맞고 입원했다는 얘기)' 이라는 식으로 보도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1945년 5월 히틀러 자살 직후에는 더블린에 주재한 독일 대사관에 대통령 이몬 데 발레라가 조의를 표명할 정도였으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렇다고 아일랜드인들이 나치를 좋아한 건 아니었다. 이몬 데 발레라는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영웅 중 하나로 나치빠는 물론 아니었다. 마이클 콜린스를 위시한 IRA의 무장투쟁과 이몬 데 발레라의 미국 내 정치 여론 활동이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가장 큰 두 축이었다. 그러니 영국에 대한 감정이 좋았을 리가 없었던 것. 또한 독일에서는 아일랜드 독립운동가들에게 은근슬쩍 무기를 지원해주기까지 하여 무장 투쟁에 기여하기도 했으니, 미워할 수만은 없는 입장이기도 했다. 운동에 큰 1941년 4월 독일군이 영국령인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를 폭격했을 때 아일랜드에서는 소방차를 보내 구호를 지원해준 일이 있다. 이건 중립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인도주의적, 민족주의적(북아일랜드도 한 민족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입장에서 행해진 일이었고, 독일은 이에 대한 보복 폭격을 몇차례 하였다.
아일랜드가 UN에 가입하는 것은 1955년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소련이 2차대전 당시 중립국이었던 아일랜드의 UN 가입을 불쾌하게 생각했기 때문.
3 애증의 이웃 : 현대 아일랜드와 영국 관계
아일랜드의 영국에 대한 감정은 한국의 일본에 대한 감정과 비슷한 면이 많지만, 단순히 1:1로 대응시키기는 어렵다. 너무나 길었던(최초 지배부터 계산시 약 800년) 지배기간 탓에 문화적으로 상당히 동화된 면도 적지않게 있었기 때문이다. [2] [3] 아일랜드와 영국의 오랜 갈등원인 중 하나였던 가톨릭과 성공회 간의 관계는 점차 개선되어갔으며, 80년대 이후 종교의 영향력은 서유럽에서 전반적으로 퇴조했고 아일랜드에서 가톨릭의 영향력도 조금씩 감소중이다. 민족 고유언어인 게일어 또한 거의 잊어버리고 영국의 언어인 영어가 사실상 모국어의 역할을 하고 있다. 만약 한국인 대부분이 해방 이후에도 계속 일본어를 일상적으로 유창하게 구사하며, 친인척끼리도 일본어로 주로 대화하는 수준이었다면, 해방 후 한일 관계가 어떠했을지[4](...)
이렇게 영국과 아일랜드간의 상호 공유하는 역사가 한일보다 훨씬 더 깊다는 건 비단 강대국과 약소국의 권력 관계적 의미에서 뿐만이 아니다. 분명히 영국의 일부이긴 하지만 그만큼 아일랜드와 켈트계 혈통, 문화를 공유하며 잉글랜드와 비교적 동등한 위치에서 영국이란 나라를 같이 만들고 참여한 스코틀랜드는 분명히 존재하는 실체이다! 그리고 스코틀랜드는 특히 현대 글래스고 지방과 서부 해안, 하이랜드를 필두로 항상 아일랜드와 밀접한 문화적, 경제적, 사회적 지리를 공유해 왔다. 켐벨, 카메론, 맥도널드, 고든, 맥도넬, 등 수많은 하이랜드의 거대 클랜들은 아일랜드에도 그 분파가 존재해 왔고, 반대로 아일랜드 기원의 오닐, 오도넬 같은 클랜들도 많은 수가 스코틀랜드로 건너가서 분파를 형성했다. 이들이 왕실에게 협조하기만 한다면 런던과 에딘버러의 중앙 권력자들은 오래부터 비교적 현대 까지 그 문화적, 사회적 자치성을 인정하거나, 중앙에 통합 하여도 주요 클랜 당주들에게 귀족 작위를 내려주는 형식으로 상당히 융통성있게 대하여 유기적으로 영국이란 국가적 정체성을 형성해 왔다.
현대까지도 스코틀랜드에서 그 인구의 20% 가까이 되는 가톨릭 교도들은 대부분 부모 중 1명 이상이 아일랜드계인 압도적인 '소수민족'은 아이리시이고, 북아일랜드 장로교의 위세를 보면 아일랜드 또한 스코틀랜드 혈통의 인구가 굉장히 많다. 여기서 아일랜드가 스코틀랜드, 웨일스와 다르게 영국이란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다양성을 포용 한 국가 공동체에서 배제 된 건 일단 종교적, 그 이후 경제, 사회적 요인이 가장 크다.
이렇기 때문에 영국과 아일랜드의 갈등은 종교, 문화, 민족,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이 결합된 복합적이고, 시대적 여건에 따라 변화해 온 다이너믹한 관계로 봐야지, 일차원적인 민족적 '타자'의 억압과 핍박의 관계로만 봐서는 그 한계가 뚜렷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피비린내 퍼지게 사람들 핍박하고 수탈하며, 그 가깝고 그만큼 공유하는 것도 많은 이웃이 끝까지 원한에 사무쳐 독자적인 민족 정체성을 강제로 가지게 만든 영국 제국주의의 악랄함에 면죄부가 떨어지는 건 아니다.
또 일본에 대해서 자립적일 수 있는 한국의 인구와 경제규모에 비해, 6천만에 달하는 영국 인구에 비해 450만에 불과한 아일랜드의 인구로는 영국에 대해 완전히 대등한 위치에 선다는 것은 사실상 힘든 일이다.[5] 헌법상 그들의 영토이자 국민인 북아일랜드는 아직 영국령으로 남아있는 것도 크다. 경제규모(GDP)를 비교해보면 한국과 일본은 3배 차이 정도이지만[6] 영국과 아일랜드는 10배도 넘는다. 군사력에 있어서도 나토 2위의 군사대국인 영국에 비해 병력과 무기 등 여러면에서 독립이후 지금까지 항상 비교할수도 없을 정도로 약소한 수준[7]이라 영국과의 군사적인 분쟁은 극도로 자제해왔다.
이러한 이유로, 특히, 북아일랜드 IRA의 무장 투쟁에 대해, 자치권을 획득한 20년대 중반부터 줄곧 비협조적이었으며, 아일랜드 내에서 IRA의 활동과 지원을 아일랜드 정부가 전면 금지하자, 이에 실망한 일부 IRA 과격파들이 아일랜드에서 군자금 탈취를 위한 은행강도 등의 범죄를 저질러 아일랜드 경찰이 IRA 단원들을 체포하여 수감한 일도 있을 정도(...) 이런 흑역사 과거사로 인해 현재도 북아일랜드 신페인당과 아일랜드정부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못하며, 아일랜드 통일에 양측이 소극적 입장으로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실상 80년대 중반까지도 서유럽에서 경제규모, 경제력 수준이 포르투갈과 경쟁하며 바닥을 다투던 나라(...)[8]였기 때문에, 이웃국가 영국과의 교역과 경제적 관계는 국가 유지에 필수적이었다. 또한 현재 영국에 거주하고 있는 아일랜드계 이민 1세대, 2세대와 유학생, 노동자 등 영국체류 아일랜드 국적자, 영국-아일랜드 이중국적 보유자 등등을 모두 합치면 수백만 명이 넘어 아일랜드 공화국 전체인구와 맞먹는 숫자(...)로, 인적 교류도 아주 많다.[9][10]
EU 출범 이후로는 같은 유럽연합 회원국으로써 물적 인적 교류가 점차 더 확대되었다. 아일랜드는 1990년대 호황기엔 "켈틱타이거"라 불리며 유럽의 신흥 경제강소국으로 급성장하고 선진국 도약이 이루어졌지만, 이후 2008년 세계금융위기로 큰 타격을 입으면서, 영국의 투자를 유치하고 경제교류를 더욱 더 확대하기 위해 영국과 전반적인 관계 개선에 나서게 되었다. 2011년 영국 여왕의 아일랜드 최초 방문도 그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2011년과 2012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잇다른 방문에 아일랜드의 여론이 크게 갈리고, '폐하(Your Majesty)'와 같은 존칭까지 사용해주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다만 여왕이 방문했을 당시 아일랜드에선 반영시위 또한 일어났다.[11] 영국 여왕은 아일랜드에게 사과의 입장을 보였지만 여왕이 영국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진 못하므로...히로히토나 아키히토 등의 덴노들 역시 한국에게 식민지배 등에 대해 사과했으나 그들이 일본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지 못하는 것처럼(...)
다만 그렇다 해도 꾸준히 신세대들에게 게일어 교육을 시키는 등으로 민족성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해외로 이주했던 아일랜드인들 자체도 타 이민족들에 비해서 자신의 민족성을 강하게 느끼고 살아간다. 북아일랜드 분쟁도 끝나고 현대로 들어갈수록 어두운 과거사의 무게를 떨치고 하나의 이웃으로 서로를 대하려고 하는 양국이지만, 지금도 아일랜드인들 앞에서 영국 따라지 취급하거나, 500년째 잘만 써먹고 있는 "'미개한 아일랜드를 문명화 시켜준 영국' 따위 소리를 꺼내면 다음날 해를 보기가 참 힘들 것이다".(...)
정리하자면 영국-아일랜드 관계를 한일관계에 투영하여 이해하려는 것은 소위 문화적, 정서적 차원에서 어느 정도 도움은 되어도 근본적으로 성립하기 힘든 비교 대상이다. 비단 국력의 우열 차원 뿐만 아니라 영국 내의 다른 켈트계 주요 세력이었던 스코틀랜드의 비중 까지 고려하자면 수 많은 스코틀랜드 고지대와 서부 해안의 게일어권 클랜들은 아일랜드 쪽에도 가족과 세력이 있었고, 이런 지정학적 현실에 따라 아일랜드-영국간 관계는 정치적인 적대적 종주 관계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할 만큼 문화적, 인구적 교류의 역사가 깊다. 이것도 한일관계에 대입해서 보자면 일본 관서 지방에 옛 고구려어 비슷한 중세 한국어의 변형을 아직도 사용하며, 백제에서 도래한 독자적인 정체성을 지닌 민족, 문화 집단이 한국과 나머지 일본 양쪽 모두와 꾸준히 교류하며 지금까지도 존재한다고 생각해 보라(...).[12]
반면 한일관계에서 한쪽이 압도적인 지배 민족으로 다른 민족을 일방적으로 수탈했던 시기는 그렇다고 원한의 깊이가 얕다는 건 결코 아니지만 20세기 초중반의 길어야 반백년의 세월이며, 이 이전과 이 후에는 저만큼의 일방적인 탄압이 가능할 만큼의 국력 격차는 벌어 진 적 없다. 어디까지나 다른 나라의 역사를 이해할 만한 비유로서 봐야지, 학술적으로 가치가 있는 진지한 소리로 받아 들이면 안된다.
4 북아일랜드 문제
1937년부터 1999년까지 아일랜드 공화국의 헌법에는 '아일랜드 공화국의 국토는 아일랜드 섬 전체와 그 부속도서 및 해역으로 한다'(제2조) 는 규정이 있었다. 단 '민족의 영토가 재통합될 때까지는 아일랜드 헌법은 남부 26개 주에만 적용된다'(제3조) 라는 구절도 있었다. 대한민국 헌법에서 대한민국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하고, 따라서 북한은 대한민국 영토 북부를 무단으로 불법 점거 중인 반국가 단체로 간주하는 것과 같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아일랜드는 '영국(자신들이 국가로 인정하는)이 자국의 일부를 무단 점거 중'이라 한다는 차이인 것.
그러나 1998년 4월 북아일랜드 문제와 관련해 영국-아일랜드 간에 "성 금요일 협정"(Good Friday Agreement)이 맺어지자, 같은 해 6월 19차 헌법개정으로 영토 관련 부분이 삭제되었다. 대신 해당 조항은 "아일랜드의 통일이 민족의 굳은 의지임을 선언하되, 그것은 북아일랜드 주민의 동의를 통한 평화적 방법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수정되었다.
그래서 명목상으론 북아일랜드를 영국의 일부로 인정하지 않고 자국 영토로 간주한다. 즉 아일랜드 공화국 헌법상 북아일랜드는 대한민국 헌법상 북한과 같은 지위를 갖는다. 다만 현실적으로는 남한-북한, 중국 대륙-대만의 관계처럼 북아일랜드의 주권이 영국에 있다는 사실도 묵인한다. 물론 북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이 더블린에 와서 경기를 치를 때는 영국 국가를 연주해 준다.
독립을 이루지 못한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를 위시한 얼스터 지방 내에도 가톨릭교도가 1/3이 있었기 때문에 북아일랜드내에서 또 신/구교도끼리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이들 지역에서는 피의 일요일 등의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현재는 조금씩 평화 분위기가 불고 있다. IRA는 2005년 소수의 원칙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무장해제하였고 대부분의 남&북아일랜드인의 지지를 얻어 북아일랜드는 영국령으로 재확인되었다.
5 기타
- 영국과 아일랜드는 이미 1923년부터 공동여행구역(Common Travel Area)을 결성, 입국심사 없이 국경을 넘나들 수 있게 했다. 영국과 아일랜드는 EU 가입국이지만 솅겐조약에는 서명하지 않았으며, 만약 영국이 솅겐조약에 서명한다면 아일랜드도 동조한다고 표명하였다.
- ↑ 하지만 이건 제2차 세계대전 말기를 제외한 전기~중후기 한정. 말기에 제2차 대전의 전세가 연합국으로 기울자 핀란드는 히틀러와 관계를 끊고 나치군을 공격하였다.
- ↑ 이 점 때문에 한국을 "동양의 아일랜드"라고 부르는것에 의문감을 느끼는 사람도 많다. 한국이 800년이나 일본의 손아귀에 있었단 말인가? 아일랜드 역사에서 영국의 영향력은 한국사에서 일본의 영향력은 보다 훨씬 크다. 오히려 일본과 등지고 일본의 잠재력을 너무 무시해서, 19세기 말에 와서야 일본의 앞선 근대화를 뒤늦게 인식하고 이후 식민화되는 굴욕을 겪었는데 비해, 아일랜드는 12세기 노르만족의 정복 이후부터 잉글랜드 국왕의 속령이었고, 1800년대 들어서는 저런 형식적인 동군연합급의 자치도 완전히 폐지되었다. 한국이 "동양의 아일랜드"라는 말은 <슬픈 아일랜드>에 소개된 일설에 의하면 영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일본 정치인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 역사보다 은근히 과거 한국의 역사를 좀더 아일랜드에 동치시키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그럼 아일랜드는 동양의 조선왕국급이라는건가??? - ↑ 아일랜드에서의 영국을 굳이 일본이 아닌 주변 외세라고 두루뭉실하게 비유를 한다고 쳐도 중국이 조선과사대 한다고 해서 인구를 대거 추방하고, 군대를 정기적으로 보내고, 내정에 마구 간섭한 것은 아니다. 원나라 간섭기를 식민 지배 기간으로 포함시킨다고 해도 오히려 당시 지배국의 피지배국에 대한 영향력은 지배 기간을 감안해 봤을 때 일제강점기의 그것보다 많다고 하기 힘들다.
- ↑ 일본이 일제강점기 말기 일본어 교육을 크게 강화했지만, 45년 무렵에도 식민지조선 전체 인구에서 일본어가 유창한 사람은 10%도 채 되지 않았다. 소학교 진학률도 그리 높지 못했고, 적어도 30년대까지는 농촌계몽운동가들이 문맹퇴치 사업으로 시행하던 한글 교육도 금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일본은 일본어 교육을 강화만 했지, 조선인들을 피지배인으로 보며 조선인들에게 일본어 교육을 무작정 밀어부치기만 하였다. 위에서 언급했듯 소학교 진학률 자체가 높지않은데 일본어를 알고 있으면 그게 이상한거다. 소학교 진학률 자체가 위낙에 낮았고 문맹퇴치작업도 순조롭게 진행되기도 어려웠던 판이라 1945년의 문맹률은 70%를 훌쩍 넘는 수준이었다(...)
- ↑ 그런데 대기근 당시 미국등지로 이주한 아일랜드계의 주민수를 생각해보면 예전 아일랜드의 인구는 현재의 인구수보다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 ↑ 대충 전라도와 경상도의 차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여기서 말하는 전라도와 경상도는 호남, 영남지방을 포괄하는 의미이다.
- ↑ 아일랜드군 항목 참조, 병력 1만명으로 인구에 비해서도 군 규모가 매우 작으며, 다른 서유럽 나라에 비해 해공군 장비의 수준도 크게 떨어진다. 섬나라면서도 해군 전투함이 8척(...)에 불과하며, 공군은 경공격 프롭기를 10여대 보유하고 있을 뿐이다(...)
영국이랑 싸우면 그냥 순삭(...).냉전시대에는 친서방 자본주의 반공 노선을 견지했지만 나토에는 가입하지 않았다. 명칭부터 Óglaigh na hÉireann : Defence Forces:방위군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방어적 개념의 군대라는 점을 표명하고 있다.이정도 전력이면 아일랜드군이 영국군을 무찌르고 북아일랜드를 탈환하는 공상소설을 쓸려고 해도 쓸 껀덕지가 없다.(...) 불쏘시개급 밀리터리 공상소설을 쓸려고 해도 왠만큼은 군대가 있어야 쓰지(...)프롭기가 해리어를 잡고, 고속정이 데어링급 구축함을 잡아야 하나. 잠수함이라도 한대 있으면, 어뢰 공격으로 무쌍 찍는 망상이라도 할텐데, 한대도 없네(...) - ↑ 그나마 포르투갈은 식민지라도 많았지, 아일랜드는 본인들이 서유럽에서 유일한 피식민지 신생 독립국(...).
- ↑ 글로벌화 지구촌 시대에 영국으로 구식민지 출신 아프리카인과 아랍인 동양인까지 몰려오는 실정에서, 아일랜드인 정도는 그나마 같은 유럽계 백인으로서 영국인들이 그리 거부감 가지거나 차별할만한 이유가 없어진 것이 현실이다. 아일랜드계 영국인으로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도 많으며, 배우 연예인 가수 등의 유명인들(예를 들면 제 5대 제임스 본드 피어스 브로스넌이라든지)도 많다. 아마도 외국 출신으로 영국사회에 가장 많이 동화되고 성공한 사람들이 아일랜드인들 일것이다.
스코틀랜드인과 웨일즈인은 영국인이라고 쳐야 겠지?(..) 여튼 공식적으로 독립은 안했으니까 - ↑ 이 점은 아이러니하게도 한국과 일본과 비슷하다. 같은 동아시아계 황인이다 보니 딱히 서로 간의 거부감이 없는데다 일본에서 스포츠나 연애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유명하고 높은 지위에 오른 재일 한국인, 한국계 일본인도 많고 일본의 외국인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데다가 2000년대에 들어서 양국 사이에서 관광과 유학, 사업, 이주등의 이유로 영국과 아일랜드 못지 않게 인적 교류가 활발한 편이다. 물론, 과거에는 차별이 상당했지만.
- ↑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70~80년대 북아일랜드 독립을 단호하게 반대하며 IRA를 테러집단을 규정하고 무력진압을 지지하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북아일랜드 IRA와 영국왕실은 79년 왕실 인척인 마운트배튼 백작의 암살 사건으로 개인적인 원한도 깊다. 그러나 그 전에 피의 일요일 학살 사건을 담당한 군인에게 훈장을 직접 줬기 때문에 아일랜드인들의 상처에 소금을 뿌렸고, 그 때문에 아일랜드에서 팔자 좋게 휴가를 보내던 마운트배튼 백작을 IRA가 암살한 일은 같은 피지배 민족의 설움을 겪은 한국인 입장에서 여왕에게 인간적인 동정은 갈 수 있어도, 정치적 사건으로서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에게 또한 공감이 갈 수 밖에 없다.
- ↑ 게르만계 잉글랜드의 인구, 경제적 비중이 워낙 넘사적으로 높을 뿐이지만 영국이란 나라 전체는 게르만 잉글랜드인들 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 웨일즈, 그리고 분리독립 이전 아일랜드의 켈트인들 또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형성한 국가 공동체이다. 영국으로서 전체의 역사를 두고 봐도 잉글랜드계가 민족적, 인종주의적 관점에서 켈트계 전반을 일방적으로 배제하고 탄압했다고 규정하기에는 중세 말 상당히 일찍부터 꾸준히 웨일스, 그리고 스코틀랜드인들은 지방 자치를 존중 받으면서 중앙으로의 진출도 적극적이었고, 대영제국에 소속 됨으로서 들어온 이익과 번영도 많이 누렸다. 치명적인 종교적인 문제로 아일랜드가 스코틀랜드, 웨일즈와 달리 끝까지 이런 영국이란 전체에 동화되지 못하고 독자적인 정체성을 유지할 수 밖에 없을 만큼 비지배민족으로서 수탈, 억압 당한 것이야 말로 양국간 역사의 비극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